열왕기 연대의 해결

아더 쿤덜(ARTHUR CUNDALL)


얼핏보면 이스라엘과 유다 왕들에 관한 관한 자료만 가지고도 정확한 연대표를 충분히 작성할 것 같은 생각이 들 것이다.
각 왕의 통치기간이 분명히 제시되어 있다(사울왕의 경우는 제외된다.삼상 13:1은 불확실하다).또 이스라엘과 유다의 분열이후의 기간 동안에는 각 왕의 등극이 상대 왕국 왕의 통치와 관련되어 있다.

또한 예후가 한날에 이스라엘 왕 요람과 유다 왕 아하시야를 죽인 경우(왕하 9:21-28)와 같이 한 사거건이 두 왕국 모두에게 영향을 미친 곳에는 "확실한 표시들"을 해두고 있다. 열왕기 저작자는 두왕국의 연대기를 조심스럽게 통합시킨다. 그는 한 왕의 통치기간을 그의 등극에서부터 죽음에 이르기까지 전체적으로 다루고 난 다음 이 기간 중에 통치를 시작한 상대 왕국 왕들을 다룸으로써 두 왕국의 역사들을 서로 병행시키고 있다. 다만 유일하게 예외가 열왕기하 8-9장에 나오는데 그곳에 보면 예후가 요람과 아히시야를 죽인 사건이 열왕기 저작자로 하여금 유다 왕 여호람과 아하시야를 언급할 필요를 느끼게 만들어 주고 있다(왕하 8:16-29). 정상적으로 다루어졌다면 그 왕들은 이스라엘 왕 요람이 죽고 난 뒤에 가서 언급되었을 것이다.

문제들

하지만 자세히 검토하게 되면 심각한 문제들이 일어난다. 예를 들면, 유다 왕국에 있어서 르호보암에서 아하시야의 죽음에 이르는 전기간이 95년인데 반하여 이스라엘 왕국에 있어서는 그와 동일한 기간인 여로보암에서 요람의 죽음까지 98년이나 된다.

그보다 더 큰 모순점이 예후의 거사에서 사마리아의 함락에 이르는 기간에서 나타난다. 이 기간 중 유다 왕들의 통치기간을 모두 합하면 165년인데 반하여 이스라엘 왕들의 통치기간을 모두 합하면 144년밖에 안된다. 그 이상의 사소한 문제 하나는 곧 섭정을 한 여왕 아달랴가 6년간을 통치하였다는 언급(왕하 11:3)을 우리가 대하고 있음에도 일반연대의 게산에는 이 여왕의 통치기간이 포함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외견상 이스라엘 왕 여호람의 등극 연대에 대한 기록들 (왕하 1:17과 3:1)이 서로 다르다는 사실에서 또 하나의 두통거리를 안고 있다. 솔로몬의 죽음이 B.C. 930년 이전이었을리는 없다는 것이 사리에 맞는 결론일 것이다. 이것은 솔로몬의 죽음과 B.C. 587년의 예루살렘 함락 사이의 기간을 대략 343년으로 추정하게 만들어 준다. 그러나 우리가 성경의 연대적인 숫자들을 가장 낮게 계산하더라도 이 기간은 대략 372년에 달하게 된다.

해결의 실마리

그러나 세가지 요인들이 그 기간의 연대에서 발생하는 외견상의 문제들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크게 증진시켜 주는 동시에 그 문제들을 완전히 해결하는 일을 상당히 진척시켜 주고 있다.

고대 근동에서는 왕들의 통치기간을 계산함에 있어서 두가지 서로 다른 방법을 사용하였다.

그 하나는 "양입계산법"이고 다른 하나는 '단입계산법'이었다. 양입계산법에 있어서는 한 왕이 죽고 다른 왕이 그 위를 계승하면 그 해는 이중으로 계산이 되었다. 이는 죽은 왕이 그해를 다 채우지 못하였어도 완전한 1년으로 계산하였고 또 그의 뒤를 이은 왕이 그 해의 나머지 기간 곧 1년의 일부를 통치하였어도 그것을 완전한 1년으로 계산하였기 때문이다. 이 계산을 정확한 연대계산으로 환원하기 위해서는 각 왕의 통치기간에서 1년씩 삭감해야 한다.

단입계산법에서는 한 왕의 전통치기간에 등극한 해를 포함시키지 않았다. 완전한 한 해가 못 되는 그의 첫 해는 그의 등극의 해로 간주되었다. 이 계산법에 따르면 정확한 연대계산이 나왔다.

왕국 분열의 초기에 이스라엘은 양입계산법을 사용하고 유다는 단입계산법을 사용한 것이 분명하다. 두왕국 사이의 전통치기간에서 발견되는 모순은 이 기간에 있어서 이스라엘 왕들의 숫자가 더 많은 데서 비롯된 것이다. 가능성이 있는 그 이상의 복잡한 문제는 유다 왕국의 한해 (하여튼 그 기간의 초반에 있어서는) 가 다스리월(9월/10월)에 시작된 반면에 이스라엘 왕국에서는 한 해가 니산월(3월/4월)에 시작되었음을 시사하는 증거에서 연유된 것이다.

아합의 행정 지구는 므깃도에 있는 군비 저장소 건축물들의 규모에 의해서 예증되고 있다. 그는 반앗수르 동맹에 병거 2000승과, 군사 10,000명을 제공하였다.

어떤 통치기간들은 섭정으로 인하여 서로 중복되어 있다.

이에 대한 선례는 다윗과 솔로몬은 경우에서 발견되는데 그 섭정은 아도니야가 실권을 장악하지 못하도록 효과적으로 막을 수가 있었다(왕상 1장). 또 하나의 분명한 예는 요담의 경우로서 그는 그의 부친 웃시야가 문둥병에 걸렸을 때 섭정자로서 행동하였다(대하 26:21).유다 왕국에만 국한되었던 것으로 보이는 이 관습은 분명히 다윗 왕조를 견고하게 해주었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아사와 여호사밧,여호사밧과 여호람,아마샤와 웃시야 요담과 아하스, 아하스와 히스기야,그리고 히스기야와 므낫헤 사이의 섭정기간을 인정하고 있다. 어떤 경우들에 있어서는 나아가 더 적은 자(예를 들면,히스기야)가 그의 부친(아하스) 보다 뛰어났는데 이것이 실제의 왕이라기 보다는 섭정자를 가리키는 언급을 통해서 사건의 연대를 추정하게 만들었다(예를들면 왕하 18:9-10). 이 관습을 안다는 것은 곧 유다 왕들의 전통치기간을 감축시킨다는 것을 의미하며 이 사실은 또한 우리가 성경의 숫자들이 지닌 의미를 이해하는데에 도움이 된다. 예를 들면 유다 왕 므낫세는 B.C. 687년에서 642년까지 통치하였다. 열왕기하 21:1은 그가 55년간을 통치하였다고 말씀하고 있는데 그것은 우리로 697년부터 687년까지의 섭정기간을 추정하게 해준다. 이 섭정의 가능성은 히스기야의 심각한 병으로 인하여 더욱 짙어지고 있다(왕하 20:1)

어떤 통치기간들은 서로 동시에 진행된 것일 수도 있다

이것은 필시 북방 이스라엘 왕국에서 여로보암 II세가 죽고난 후 마지막 몇 십년의 요란한 기간 중에 있었던 일일 것이다. 이 시대의 여섯 왕들의 혼합된 통치기간은 41년 7개월이었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그 기간은 31년을 채 넘지 못하였을 것이다. 사실 대부분의 학자들은 그 기간이 실제로는 24년 정도밖에 안 되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무정부상태에 가까운 기간 중에는 경쟁적인 왕들이 그 왕국의 서로 다른 지역들을 동시에 "지배하고"있었을 가능성이 있다.

므깃도에 있는 창고들에 짐을 나르는 나귀들의 고삐를 매는 돌기둥과 물을 마시게 하는 돌확.

외적인 자료들과의 대조

이러한 요인들을 신중히 적용시킨다면 유다와 이스라엘의 연대기는 조정될 수가 있다. 그러나 그 결과로서 얻은 연대기를 주변 세계의 사건들에 연결시키는 작업이 주로 고고학적인 발견을 통해서 가능하게 되었는데 이는 상대적인 연대기보다는 절대적인 연대기를 얻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었다. 그 중 가장 중요한 고고학적 발견들은 다음과 같다.

앗수르의 림무(Limmu) 혹은 신임관리 명부

앗수르에서는 매년 공직을 맡게 되는 신임관리의 이름을 그 특정한 해의 명부에 올리는 관습이 있었다. B.C. 그 특정한 해의 명부에 올리는 관습이 있었다. B.C. 892-648년 어간을 포괄하는 이 신임관리들의 명부가 아주 완전한 상태로 보존되었는데 그 명부에는 그들이 공직에 있는 기간중에 일어났던 중요한 사건들이 기록되어 있다. 부르. 사갈데가 림무였던 해의 심마누 달에 일식현상이 있었던 것으로 언급되고 있는데 천문학자들은 그 연대를 B.C. 763년 6월 15일로 계산한다. 이것은 림무 명부에 나오는 그 밖의 모든 연대를 해준다. 성경의 역사와 앗수르의 역사가 여러가지 면에서 한 점에 집중되고 있으므로 성경의 사건들도 역시 그 연대가 정확히 추정될 수 있다.

코르사밧(Khorsabad)왕의 명부

이 명부와 그 사본들은 B.C. 745년에 이를 때까지의 앗수르 왕들의 명단을완전히 수록하고 있고 또 자주 그들의 통치기간을 밝힌 예들이 나오고 있다. 이 명부는 림무 명부와 일치된다.

톨레미 (Ptolemy)의 성인록

비록 이 저서의 연대가 A.D. 2세기로 추정된다고 할지라도 그 정확성 만큼은 정당한 의심의 여지가 없음이 판명되었다. 그것은 B.C. 747년 나보낫사르(Nabonassar)의 등극에서부터 시작하여 바벨론 왕들의 명단과 그 통치기간들을 담고 있다.

아합 시대의 수많은 상아 조각품들이 발견되었는데 그 가운데 사마리아의 것들도 많이 폼함되어 있다. 이것은 날개 달린 생물의 조각으로서 그 시대의 전형적인 장식이었다.

바벨론 연대기

최근에 불과 및 몇개만 번역 출판된 이 토판들은 히스기야 왕 때부터 예루살렘 함락 때까지의 바벨론 역사를 다루고 있다. 이 토판들은 유다가 바벨론에 예속된 B.C. 605년 이후의 시기에 대해서 성경학자들의 비상한 관심을 끌고 있다. 이전에는 분명치 않던 많은 사실들이 이제는 해결을 보게 되었다. 예를들면 무엇이 유다 왕 여호야김을 자극해서 B.C. 601/600년에 바벨론에 대해 번역을 일으키게 했는지 혹은 그 반역사건이 어찌하여 B.C. 598/597년에 이르도록 진압되지 못했었는지는 알려지지 않고 있었다. 그런데 바벨론 연대기는 우리에게 B.C. 601년 11월/12월에 애굽 국경지대에서 바벨론과 애굽 사이에 치열한 접전이 있었다는 말을 들려준다. 비록 그 전투가 결정적인 것은 아니었을지라도 바벨론의 손실은 막심하였고 그리하여 결국은 그 지역에서 철수하여 전열을 재정비할 수밖에 없었다. 여호야김이 반역을 일으키게 한 것은 바로 이 외견상의 약점이었다. 바벨론 연대기는 구약역사상의 한 사건인 예루살렘 함락의 정확한 연대를 B.C. 597년 3월 15-16일로 밝히고 있다.

또 하나의 작은 문제가 남는다. 히브리 역년이 획일적으로 바벨론의 형식을 따르고 있느냐 하는 점은 분명치 않다. 이것은 유다의 마지막 왕 시드기야 통치 어간의 연대에 있어서 1년의 오차를 유발할 가능성을 의미한다. 예를들면 예루살렘의 함락은 B.C. 587년이나 586년으로 그 연대가 제시된다. 두 가지 형태의 계산법이 예레미야 52:12과 29절에 나타나고 있는데 첫눈에 보기에는 예루살렘이 함락되기 한해 전에 그 곳에서 백성이 사로잡혀간 듯한 느낌이 든다!

사마리아의 요새화된 산꼭대기에 건축했던 아합 궁의 잔재들.

수많은 당대의 비문들

역시 특별한 사건들을 진술하고 있다. 예를들면,앗수르군과 아합왕 치하의 이스라엘을 포함한 군소 도시국가들의 연합군 사이에 있었던 B.C. 853년의 갈가 전투나 예후가 B.C. 841년에 앗수르 왕 살만에셀 III세에게 조공을 바친 사건, 혹은 B.C. 722/721년 앗수르인들에게 사마리아가 함락된 사건 등이 그것이다. 이 기록들은 성경의 자료를 확증할 수 있는 믿을 만한 근거들을 제공해준다.

성경의 연대기들의 기초가 되는 원리들을 신중히 적용시키고, 또 그것들을 유다와 이스라엘과 그 당시의 세계 열강들 사이의 대조를 통해서 가능케 된 고정적인 연대와 연결시킴으로써, 우리는 열왕시대의 대부분 기간에 있어서 오차 1년 미만의 정확도를 가지고 있는 성경의 모든 자료를 포함시키는 하나의 절대적인 연대기를 확정지을 수가 있다. 사울의 통치기간은 예외로 남는다.

히브리어 원문에 남아 있는 유일의 숫자는 "2"이므로 대부분의 학자들은 10단위 하나가 빠져있다고 보고 12,22 혹은 32년의 통치기간이었을 것이라고 제안하고 있다. 22년이 필시 가장 받아들일 만한 수치일 것이다. 이는 그 수치가 사사시대와 같은 그 밖의 연대기 자료에 가장 잘 들어맞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