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살로니가후서(2thessalon)


I. 저자

본서의 저자가 자신을 가리켜, '바울과 실루아노와 디모데'(1:1)라고 밝혀 주고 있다. 본서도 전서와 마찬가지로 실루아노와 디모데 모두, 또는 그들 중 어느 한 사람이 본서를 쓰는데 어떤 역할을 했다거나 불러준 것을 받아썼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첫절 이후에, 바울은 끊임없이 자신의 인격으로 말하고 있으며, 또한 자신을 지시하는 일인칭 단수를 사용하기도 하였다(3:17). 본서가 바울의 저작이라는 점에 대해서는 한동안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1) 그런데 19세기초 슈미트(Schmidt,1801)가 최초로 바울 저작설에 이의를 제기하였고, 주로 독일 계통의 근대 학자들3)에 의해 바울 저작설에 대한 반대 의견이 주장되었다. 그들의 논지는 다음과 같다.

(1) 본서 2:1-12과 전서 4:13-5:11을 비교해 볼 때, 전서에서는 그리스도의 재림을 임박하고도 갑작스런 것으로 묘사하는 반면에, 본서는 재림 전에 있을 여러 징조들을 기술하고 있다(슈미트).3) 본서에 나오는 종말론은 전서와 달리 주후 70년의 예루살렘 함락 이후에 생겨난 기독교적인 전망을 대표하는 이론이다.따라서 본서는 바울 시대 이후에 기록된 것이다 ("Kern",4) "Marxen,Reginald H.Fuller,Norman Perrin ")5) 또한 본서에 나오는 "불법의 사람"은 완전히 유대적 사상으로서 전서와의 사상적 근거에도 차이가 있다. 그러므로 본서는 전서와 계시록을 조화시킨 후대인의 가작이다(in 흑기, p.226).

(2) 본서 2:11,12,13,의 엄격한 예정설은 바울의 것이 아니다(Perrin).6)

(3) 본서의 매우 많은 부분이 전서의 반복이라는 점은, 본서가 다른 사람에 의해 모방된 것이라는 증거이다(Wernle, Holtzmann).7) 그러한 이유로 [스피타(Spitta)는 본서를 디모데의 저작으로 보고, 버키트(Burkitt:전서 2:18과 후서 3:17은 후에 바울이 추가한 것이라 함)는 두 서신을 실라의 저작으로 보았다](Bailey).8)

(4) 매우 많은 점들에 있어서 본서는 순수한 바울의 서신들과 다르다. 즉 매우 냉혹하고(덜 우호적이며, 더욱 공적이다), 또한 전서보다 훨씬 더 유대적 색깔이 짙다(Werde).9)

(5) 인사 (살후 3:17)가 의심스러워 보인다. 그것은 확실히 위조자가 본서를 바울의 저작처럼 보이려고 한 기묘한 시도이다.10)

(6) 바울 이후에야 비로소 예수 그리스도께 신적인 속성과 기능을 부여하기 시작하였다(살후 2:163:5,살전3:11-13,Fuller).11) 두 서신의 기도문에 나타난 이러한 차이는 본서가 바울의 생존시에는 쓰여질 수 없었음을 보여 준다(Perrin).12) 우리는 이상과 같은 반대설을 하나하나 검토해 보아야 할 것이다.

첫째 설에 대해 토마스는 [두 서신간의 상황이 다르다는 것은 종말의 사건에 대한 두 서신에서의 다른 측면들을 강조할 것을 요구한다]13) 라고 답변하고 있다. 전서에서는 데살로니가 교인 중에 죽은 자 때문에 슬퍼하는 자가 있어서 그를 위로할겸(4:13-18)재림의 임박성을 지적하였다. 그러나 이 가르침을 받은 일부 몰지각한 신자들이 재림이 임박했다 하여 무위도식하고 남에게 폐를 끼쳐 교회를 어지럽히게 되었다(살후 3:10-12). 그러므로 바울은 좀더 조직적으로 재림 문제를 다루어, 그들로 하여금 착실하게 재림을 위해 준비하도록 재림 전의 징조들에 관해 교훈한 것이다. 이 점은 전서 5:6에도 시작되었다.[더우기 재림에 관한 두 가지 관념은 상호 배타적인 것이 아니다. 어떤 징조들이 그리스도의 재림에 앞설 것이다.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 모든 사람은 놀라와 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참조 단11;1-12:13,마24:1-44,눅17:20-37)](헨드릭슨).14) 본서의 종말론이 유대적이라는 것은 본래 바리새인이었던 바울에게는 너무나 자연스런 것이다.

둘째 설에 대해 헨드릭슨은 로마서 8:28399:10-24,그리고 에베소서 1:4,11, 2:10등을 쓴 바울이, 왜 본서 2:11,12,13을 쓸 수 없었겠는가고 반문하고 있다. 15).

세째 설에 대해 모페트(Moffatt)는 [전 후서의 집필 시기가 그다지 멀리 떨어져 있지 않았다면 동일한 저자가 같은 내용의 말을 반복한다는 것은 잇을 수 있는 일이고, 더우기 전서로 말미암아 독자들에게 어떤 오해가 생긴 처지가 되었다면 반복의 방법을 통해서 재강조할 수도 있는 것이다]라고 하였다.16)

네째 설에 대해서는, 수신자의 상황의 변화로 보아 양서간의 분위기의 차이란 오히려 자연스러운 것이다. 그트리(Guthrie)는 [두 서신 사이에 유사점과 차이점이 섞여 있다는 사실은 오히려 바울이 저자라고 하는 사실을 매우 합리적으로 만들어줄 만한 것이다]라고 설명하고 있다.17)

다섯째 설은 논의의 가치가 없으며, 바울이 그리스도의 신성을 믿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여섯째 설은 근거 없는 주장이다. 데살로니가전서에서도 바울은 그리스도를 신적인 은혜의 근원으로 보았으며(1:1,5:28),마땅히 기도를 드려야 할 대상으로 (3:11,12),더우기 인간과 우주의 미래 운명을 결정지으실 이로(5:1-11)보고 있다. 토마스(p.293)는 [내적인 문제로 근거를 삼는 어떠한 논증들도, 바울이 저자라고 하는 서신 그 자체의 주장이나 강하게 입증된 전통적인 견해를 무너뜨릴 만한 증거를 충분히 가지고 있지 않다]라고 결론지었다. 방금 눈의에 언급된 이들 외에도 [본서가 바울의 저작임을 지지하는 이들은 웨른레(Wernle),핀들레이(Findlay,),클레멘(Clemen),휘셔(Vischer), 하이린히(Heinrici), 밀리간(Milligan), 부세트(Bousset),멕킨토쉬(Mackinto -sh) 돕슈츠(Von Dobschutz),모페트(Moffatt), 놀링(Knowling),하르낙 (Narnack) 디벨리우스(Dibelius),레이크(Lake),다이스만(Deissmann)등이다](프레임).18) 본서가 바울의 저작임을 지시해 주는 외적 증거는 다음과 같다. (1) 이레니우스의 글에 본서가 인용되었다(2:8-9 in Irenaeus,'Adv.Haeres' iii,7.2,2:3,4 in 'Adv.Haeres'v.25.1). (2)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도 본서를 인용하였다(3:1,2 in Clement of Alex.Stromata v.3) (3) 터툴리안 역시 본서를 인용하였다(2:1-3 in Tertullian, Resurrection 24). (4) 출처가 본서라고 거의 확실시 되는 두 귀절이 폴리캅(Polycarp)의 저서에서도 나타난다. (5) 12사도의 교훈집에도 본서가 인용되었다(3:8,10 in Didache 12). (6) 저스틴 역시 본서가 바울의 저작임을 명확히 보여 주며, 또한 본서를 인용하였다((2:3,4 in Justin Martyr,'Dial.cum Tryph.c.110). (7) 이그나티우스도 본서를 인용하였다(3:5 in Ignatius,Rom.10). (8) 무라토리 정경(Muratorian Cannon)과 말시온 정경 (Marcion Cannon)에 본서가 수록되어 있다. (9) 고대 수리아역이나 라틴 역에도 본서가 포함되어 있다.19)( 본서가 바울의 저작임을 뒷받침해 주는 내적 증거는 무수하다. 이 점에 대해서는 반대설을 논의할 때에 이미 언급되었으므로 재론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또한 [더우기 전서의 저자가 바울이라는 것을 증명할 때 사용했던 증거들은 후서의 저자가 바울이라는 것과 후서가 일찍부터 정경으로 인정되었음을 증거하는 보충 자료가 된다]라고 한 밀리간(Milligan)의 주장은 아주 타당한 것이다.20) 지금까지의 논의를 미루어 보아, 본서 역시 바울의 저작이라는 사실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II. 대상

본서의 대상에 관한 논의는 전서와 같다.

III. 통일성

본서가 두 개의 편지로 되어 있다는 의견(1:1-12+3:6-16 그리고 2:13,14+ 2:1-12 + 2:15-3:5+3:17,18)이 제시되어 왔으나, 실질적인 지지는 받지 못하고 있다. 전서에서와 마찬가지로, 이 이론은 주로 감사를 표시하는 두개의 귀절(1:3 이하,2:13 이하)과 두개의 기도문이 있다는데 기초하고 있다. 본서를 이렇게 두 부분으로 나누는 이론은 바울이 결코 상투적인 문장 형태를 벗어나서 글을 쓰지 않는 다는 가정에 근거하고 있다. 그러나 이 가정은 증명된 일이 없다. 비록 그 가정이 사실이라 할지라도, 문제될 것이 없음은 그 이론들에 불리하게 사용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Best). 21) 또한 본서의 통일성에 의문을 제기하는 어떤 사본상의 권위 있는 증거물도 발견되지 않았다. 그러므로 우리는 본서가 원래의 형태를 잘 보존해 왔다고 결론지어도 무방할 것이다(토마스).22)

IV . 내용

본서의 내용 및 특징을 올바로 이해하려면, 본서를 쓴 바울이 곧 이어 후서를 쓰게 된 동기와 목적을 알아야만 한다.
[우리는 이 두 통의 편지 어간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자세히 모르고 있다. 우리가 말할 수 있는 모든 것은 고린도에서 함께 일하고 있는 바울과 실라와 디모데에게 또 그 이상의 어떤 정보가 당도했으리라는 점이다](렌스키).23)
이 정보가 어떻게 전해졌는가는 알 수 없지만, 아뭏든 바울이 서둘러 재차 편지해야 할 만큼 중요한 내용이었다.
그 내용은 재림에 관한 것이었다. 바울은 전서에서 재림 문제에 관하여 비교적 자세하게 설명한 바 있었다. 특히 재림의 임박성을 강조하였다(3:13,4:13-5:11,23). 그런데 異設이 일어나 주의 날이 이미 왔다고 하며 인심을 동요시키는 자가 있었다. 더구나 그것을 성령의 역사로 잘못 믿거나 또는 말로 또는 바울의 편지를 조작하기까지 하면서 주장하는 이들이 생겨났다(2:2,3:17). 아마 전서 5:1-3의 영향 때문에 너무 긴장한 나머지, 그러한 건전치 못한 주장이 발생한 것 같다(2:1-12). 그 결과 세상의 의무를 팽개치고 매일매일을 흥분 상태로 무위도식하는 자들이 생기게 되었다(3:11).
게다가 어린 데살로니가 교회는 여전히 핍박과 환난으리 받고 있었다(1:4).

그러므로 바울은 그들을 위로 및 격려해 주고 또한 재림전에 있을 징조들을 가르쳐 주어, 현실 생활에 더욱 충실한 믿음을 갖도록 하기 위해 본서를 쓰게 된 것이다.
본서의 내용은 첫째, 데살로니가 교인들에 대한 소개와 인사(1:1-2), 그들의 믿음의 성장과 형제간의 사랑의 풍성함 그리고 인내에 대한 감사(1:3-10) 및 기도(1:11-12)이다.

둘째, 교리적 교훈으로 재림에 대한 자세(2:1-2), 재림의 징조인 배도하는 일과 불법의 사람 곧 멸망의 아들의 출현(2:3-4), 불법의 비밀의 활동을 막는 자의 역사(2:5-8), 멸망하는 자들에게 임하는 악한 자의 역사(2:9-12), 구원받을 자에 대한 당부(2;13-15), 그리고 성도를 위한 중보기도(2:16-17)이다.

세째,실천적 교훈으로 기도의 요청 및 성도에 대한 염원(3:1-5)과 규모 잇게 행하라(3:6-15)는 권면이다.

끝으로 바울은 평강을 기원하고(3:16),문안하며 축도해 준다(3:17-18). 본서의 내용을 소개하는 가운데 대체로 드러나고 있는 것처럼, 본서의 특징 역시 전서와 같다.

V, 기록 연대와 장소

일반적으로 본서는 전서를 쓴 후 얼마 지나서 않아서 쓴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 이유는 후서의 상황은 전서의 그것과 거의 같았고 또 바울이 교회에서 주는 충고나 교훈도 전서와 거의 다를 바가 없기 때문이다. 물론 장소는 같은 고린도이다(전서의 기록 연대와 장소를 보라).

VI,전서와 후서의 관계

이제 남은 문제는 전서와 후서의 관계에 관한 것이다.
전.후서의 관계를 취급함에 있어서 첫 번째의 문제는 데살로니가 교회의 통일성에 관한 것이다. 즉 데살로니가 교회는 하나의 교회인가, 그렇지 않으면 둘로 갈라진 교회인가 함이다.
이 점에 대해 아돌프 하르나크(Adolph Harnack),커소프 레이크(Kirsopp Lake)등의 몇몇 학자들은 데살로니가 교회가 유대인의 집단과 이방인의 집단으로 분리된 교회라고 보았다. 그리고 바울은 데살로니가전서를 이방인들에게, 후서는 유대인들에게 보낸 것이라고 주장하였다.24).
사실상 전서 1:9의 "... 너희가 어떻게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사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섬기며"라는 구절과 동 2:14의 ".... 저희가 유대인들에게 고난을 받음과 같이 너희도 너희 나라 사람들에게 동일한 것을 받았느니라"는 구절을 보면,전서의 수신자가 이방인들이라는 인상을 받게 된다.
다른 한편, 후서에는 유대적인 색채가 강하다는 것도 지적되어 있다.그러나 그것은 본서가 유대인에게 보낸 편지임을 확증할 만한 근거가 되는 것은 아니다(김용옥).25)
아뭏든 전서에는 이방적인 요소가, 후서에는 유대적인 요소가 뚜렷한 것이 사실이라 해도, 그것만으로는 데살로니가 교회가 유대인들과 이방인들로 갈라져 있었다는 충분한 증거가 될 수 없다. 더우기 바울이 갈라져 있는 교회라고 해서 두개의 편지를 따로따로 보냈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다.
바울은 여러 파가 난립해 있던 고린도 교회에도 그 파들에 대한 개별적으로 편지를 보낸 일이 없었다. 오히려 그는 교회의 단합을 위해서 전체 교회를 상대로 편지를 썼던 것이다(김용옥).26) 그는 누구보다도 교회의 일치를 강조한 사람이었다(고전 1:101213,빌2:23, 4:2,3,엡4:3-6등).
또한 본서에 나타나 있는 바울의 감사((1:3)와 칭찬(1:3,4)을 보더라도 데살로니가 교회가 분열된 교회라고 생각하기 어렵다. 사실상 본서에는, 바울이 크건 작건 분열의 문제를 안고 있는 고린도 교회나 빌립보 교회에게 한 것과 같은 일치에 대한 강력한 요구가 없다.

결국 우리는 데살로니가전.후서가 한 교회에 보낸 바울의 두 편지라는 사실을 그대로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두 번째의 문제는 전,후서의 순서에 관한 것이다. 물론 전통적인 견해는 전서가 후서보다 먼저 쓰여졌다는 것이다. 그러나 휴고 그로티우스(Hugo Grotius,),요한네스 바이스(Johannes Weiss),외스트(J.S.West)등은 집필 순서가 바뀌었다고 주장하였다. 그들의 논지는 다음과 같다.
전서가 후서보다 내용이 풍부한 것은 후서를 쓴 다음에, 부족했던 것을 보충하여 전서를 썼기 때문이라는 것이다(참조 전서5:1).27)
반면에 현재의 전서와 후서의 순서가 본래의 그것과 같다고 주장하는 대표죡인 이는 레온 모리스(Leon Morris)이다.
그는 다음과 같이 설득력 있는 견해를 제시하고 있다.

(1) 전.후서에 다같이 기독교인의 고난, 주의 재림, 태만한 자 등에 관한 것이 언급되어 있는데, 후서에서는 전서에서보다도 그러한 사항들에 관한 논의가 좀 더 심각하게 철저하게 다루어졌다.
(2) 전서의 일반적 논조는 그 편지를 집필했을 당시의 바울의 심경을 그대로 잘 반영시키고 있다. 즉 전서를 썼을 때의 바울의 심경은 데살로니가 교회에 관한 좋은 소식을 들은 뒤였기 때문에 매우 명랑할 수 있었다. 그러나 후서의 논조가 다소 냉담한 것은 그동안 시간이 경과하면서 상황이 변했다는 사실과 데살로니가 교회의 일보 교인들이 바울의 가르침을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3) 전서에서 바울이 일신상의 회상을 적은 것은 그것이 첫 편지였기 때문에 자연스런 것으로 볼 수 있다.
(4) 데살로니가 교인들의 신앙 생활에는 계속적인 발전의 흔적이 보인다. 전서 1:6에서는 그곳 개종자들이 복음을 받아들였었는데, 후서 1:3에서는 그들의 신앙이 자란 것으로 되어 있다.

또한 전서 3:12과 4:10에서는 바울이 교인들에게 넘치는 사랑을 갖도록 권유했었는데, 후서 1:3에서는 바울이 그들의 넘치는 사랑에 대하여 감사하고 있다. 이런 것들이 비록 결정적인 요인이 된다고 말하기는 어려우나 후서가 나중에 보낸 것임을 시사한다고 생각되낟. 28) [결국 우리는 이 두편지의 순서에 관한 이론이 확정적인 근거를 못 가진 것이라고 보며, 반면에 현재대로의 순서가 다 타당성을 가진다고 생각한다](김용옥).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