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교회의 설교


마이클 그린 (MICHAEL GREEN)

초대교회의 설교에 있어서 참으로 놀라운 일은 그것이 종교적인 의무들이나 도덕적인 표준들 혹은 어떤 개혁 방안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한 인물, 곧 십자가에 죽으셨다가 다시 사신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좀더 잘(구약성경의 연구를 통해서)알고자 하였고 더 나아가서 만나본 적이 없는 사람들에게 그 예수님을 확실히 전하고자 하였다. 공통적인 신앙과 다양한 제시는 그들이 이룩한 성공의 바탕을 이루고 있다. 무엇보다도 그들의 설교내용과 능력은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잘 알고 있었고 또 수년간 그를 좇은 경험이 있었다. 그가 목수로 성장하신 후 위대한 선생이 되셨고 친히 그들의 구주가 되신 일을 낱낱이 알고 있었다.

초대교회가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함에 있어서 광범하게 통일된 양식을 갖고 있었던 점이 지적되어 왔다. 그 양식은 대개 다음과 같다. "옛적의 예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말미암아 성취되었고 새 시대가 시작되었다. 그는 다윗 집에서 나셨고 우리를 이 세상의 죄악에서 구하시기 위하여 성경대로 죽으셨다. 그는 장사지낸바 되셨다가 성경이 예언한 대로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셨으며 지금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산자와 죽은자의 주로서 하늘에 오르사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신다. 그는 그를 좇는 자들에게 그의 주권에 보증으로서 그리고 그가 마지막 날에 사람들의 심판주와 구주로 재림하실 것에 대한 예비조처로서 그의 성령을 보내셨다."

설교를 하는 마가 : 틴토레토 작품인 <마가의 기적>과 함께 베네치아의 스콜라 그란데의 산 마르코의 방을 장식하고 있었던 이 거대한 그림은 벨리니 형제의 공동작품이다. 이 그림은 알렉산드리아 유페이아 성당 앞의 광장에서 마가가 설교를 하고 있는 장면으로 석탑.회교사원의 첨탑,아라비아 고유의 복장. 기린.낙타 등 여러가지 동방적인 요소들이 광장의 분위기를 드높이고 있다.캔버스 유화 347*770cm.

이같은 설교양식은 이미 초기부터 발전되어 온 것이었다. 이것은 초대교회의 설교나 찬송가, 혹은 서신서들에 구체화되어 있는 신조들의 단편들에서 찾아 볼 수가 있다. 예를 들면, 빌립보서 2:4-11은 매우 이른 시기의 것이다. 어쩌면 아람어를 말하던 교회에서 유래된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신약성경의 다른 것처럼 그것도 교리적으로 앞선 것이다. 최초기의 신앙에 관한 그 밖의 단편적인 진술들은 고린도전서 15:3-4,로마서 1:3-4,디모데전서 3:16과 같은 구절들에 보존되어 있다.

강조점이 약간씩 다른 사실도 역시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주로 유대인들에게 말할 때에는 그리스도께서 제공하신 하나님의 율법으로부터의 구원이 강조되고 있다.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을 받는 것과 성결한 삶도 역시 중요한 요소이다. 독자나 청중이 아주 이교적인 배경을 갖고 있을 때에는 옛적 사람들이 아주 두려워했던 귀신들의 세력으로부터 구원에 강조점이 놓여 있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에게는 예수께서 구약 계시의 절정인 그리스도 곧 구원자 메시야로 제시된다. 비유대인들에게는 그가 모든 악의 세력을 지배하는 주와 정복자로 제시된다.

하나님의 구약 계시에 대한 배경이 없는 이방 세계에 복음을 전할 때에는 초대교회 선교사들을 훨씬 더 뒤로 거슬러 올라가서 시작해야 했다. 사도행전은 우리에게 두 가지 예를 보여주는데 그 하나는 미개한 백성에 대한 설교(14:15-17)요, 다른 하나는 미개한 백성에 대한 설교(14;15-17)요, 다른 하나는 개화된 백성에 대한 설교(17:22-31)이다. 두 경우 다 그리스도인들은 한 분 하나님이 계시다는 사실을 확증하고 우상숭배의 맹점을 지적하였으며 자연계시(창조주시요 보존자이신 하나님)의 빛을 통하여 그리스도안에 있는 특별계시를 받아들일 준비를 갖추도록 하기 위해서 힘썼다. 이같은 방법은 그보다 앞선 시대에 유대인들이 부도덕하고 우상숭배에 젖어 있으나 사모하는 마음을 가진 이방세계에 이스라엘의 윤리적인 유일신교를 전할 때 사용한 것이었다. 그것은 특별한 기독교의 선언에 하나의 유용한 서론을 이루고 있었고 또 수 세기 동안 주요 접근방법으로 이용되었다.

유대인에게 설교하든 이방인에게 설교하든간에 초대교회는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신 일만 아니라 그가 제공하신 것(성령으로 말미암은 새 삶과 죄사함)과 그가 요구하시는 것(회개와 믿음과 실천)까지도 강조하였다. 이것은 세례와 믿음과 성령을 받는 것을 전제로 하였다. 이 세가지 요소가 사람을 그리스도인으로 만들었다.

사도행전은 이 초대교회 설교의 깊이를 강조하고 있다. 그리스도인들이 사신들과 같이 선생들과 같이, 토론하는 자와 같이 행동하였음을 암시하는 낱말들이 사용되고 있다. 그들은 이 기쁜 소식(복음)을 논의하고 주장하였으며 그것에 대하여 증거하고 또 그것이 구약성경과 얼마나 정확히 일치되는지를 보여주었다. 그것은 일정한 범주에 들어가는 그리스도인만의 일이아니었다. 여자들은 빨래터에서 복음을 전하였고, 철학자들은 길 모퉁이에서 그것을 논의하였으며, 죄수들은 옥중의 동료들에게 그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온갖 문화와 계층의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자신들의 변화된 삶을 통해서 복음의 능력을 보여주었다(고전 6:9-11을 보라).또 고난과 죽음까지도 그리스도를 위하여 기쁘게 당하는 자세를 통해서 그것을 확증하였다(예:행 20:22-24).

그 새로운 메시지가 힘있게 증거된 이유는 바로 이러한 특질들에 있었다. 그들의 사회적, 개인적 삶에 나타난 성령의 권능은 그들의 메시지를 뒷받침해 주었다. 그들이 큰 성공을 거두게 된 이유 중에는 또한 지적인 요인도 있었다. 그들은 여러 다양한 필요들을 만족시키기 위해서 갖가지 방법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제시하는 법을 찾아내었다. 그들은 지나치게 편협한 사람들이 다른 종교의 통찰력도 마찬가지로 참된 것으로서 새 믿음과 융합될 수 있다는 말을 하지 아니하였다. 기독교는 유대교처럼 이교 세계의 혼합주의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기독교는 유대교와 달리 우리가 앞서 살펴본 바 공통된 주요 양식과 내용만큼은 그대로 유지하되 믿음을 표현하고 제시하는 데에 있어서는 크게 융통성을 보일 것이었다.

예를들면, "하나님 나라"에 관한 예수 그리스도의 설교는 유대사회에서는 의미가 깊은 것일 수 있으나 다른 곳에서는 정치적으로 불이 붙게 될 가능성이 있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초대교회 설교자들은 예수님의 다른 표현들 곧 "영생"이나 "구원"이라는 낱말을 택해서 사용하였다.

또 "인자"는 유대교의 어떤 집단들에 있어서는 아주 묵시적인 의미들을 가지는 하나의 특수한 명칭이었으나 다른 곳에서는 무의미하였다. 융통성이 있는 이 초대교회 설교자들은 그러한 명칭 대신에 이방인들의 공감을 불러 일으킬 수 있는 명칭들-"하나님의 아들"혹은 "주"-을 사용하였다.

주 예수그리스도의 인물을 소개할 때에는 그들이 얻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친숙한 말들과 개념들을 사용하였다. 그들의 목적은 그들이 섬기는 주님이신 동시에 그들이 전파하는 메시지 자체인, 하나님의 아들로서 십자가에 죽으셨다가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유일무이한 구원사역을 명백히 전하는 데에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