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굽

키췬(K.A. KITCHEN)

애굽:지명사전
  1. 역사와 문화

    애굽과 성경

  2. 아브라함에서 요셉까지
  3. 모세와 출애굽

그 땅

실제의 애굽은 현대의 정치지도에 나오는 텅빈 공간이 아니라 아스완에서부터 시작하여 나일강이 지중해로 흘러들어가는 삼각주에서 끝이 나는 600마일의 길고도 좁은 골짜기이다. 지도상에서 삼각주와 나 일강은 "봉우리"는 파윰(Fayum) 호수지역이다.
유일한 생명의 원전은 매년 있는 나일강의 범람이었다. 현대의 높은 댐들이 건설되기 전에는 나일강의 한 물을 공급해주는 번영을 뜻하였다. 그러나 부족한 물은 굶주림으로 인한 파멸을 뜻하였고 과도한 물은 광범위한 유역에 파괴를 가져다 주었다. 나일강의 물길이 닿는 곳에는 푸른 식물이 무성하였고 그렇지 못한 곳은 건조하고 생명이 없는 황갈색의 사막이 되었다. 양편에 사막을 끼고 나일강 유역을 따라 띠 모양으로 전개된 골짜기의 경작지와 하구의 넓은 삼각주 평야지대에 거주한 애굽인들은 외따로 떨어져 있었으나 그 이웃들과 고립되어 있지는 않았다. 내국에서는 나일강이 주된 교통오로 이용되었다. 그 밖에 시내 반도 북부를 가로지르는 대로들은 팔레스타인으로 통하였고 동편 사막을 가로지르는 골짜기들은 홍해로 통하였다. 나일강은 농업경제의 원천이 되었고 사막들은 돌과 금속을 제공해 주었다.

역사와 문화

애굽의 역사도 수메르와 바벨론의 역사처럼 30세기에 걸친 장구하고 웅장한 면모를 지니고 있다. 그 역사는 골짜기와 삼각주가 상형문자(일부는 그림으로 된 문자체계)의 발명 직후에 단일 왕에 의해서 통일된 때인 B.C.3000년경에 시작되었다. 애굽 왕들 혹은 "바로들"의 긴 계보는 30왕통 혹은 "왕조들"을 형성하고 있다. 그러나 B.C. 3000년에서 B.C.300년에 이르는 전기간은 7시대로 구분하는 것이 더 쉽다. 곧, 초기("고대"),제1,제2중간기에 의해서 구분되는 세 전성기(옛 왕조,중간 왕조,새 왕조).그리고 마지막으로 쇠퇴하는 후기가 그것이다. 애굽 역사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시대에 실제적인 수도는 골짜기와 삼각주의 합리지점에 위치해 있었는데 대개는 멤피스였다. 새 왕조에서는 그보다 남쪽으로 300마일 지점에 있는 테베가 남부의 수도가 되었다. 그 도시는 아문(Amun)신의 성도로서 오래도록 종교의 중심지로 남아 있었다. 후기에는 멤피스가 삼아메스 네페르타리(Ahmes Nefertari B.C.1550) 여왕의 벽화에 나타난 정장한 여왕의 모습:이것은 B.C 1150년경의 것으로 추정된다.

그림 : 아메스 네페르타리(Ahmes Nefertari B.C. 1550)여왕의 벽화에 나타난 정장한 여왕의 모습 : 이것은 B.C. 1150년경의 것으로 추정된다.

각주의 여러 도시들과 함께 그 몫을 담당하였다. 전역사를 통해서 바로는 신들과 인간 사이의 중재자로서 사회의 중추적 존재였다. 신들은 대개 자연의 세력들이나 그 현상들(해,달),혹은 개념들(정의,질서)을 형상화시킨 것들이었다. 대신전들이 공식적인 제사(매일 제물로 드리는 의식)를 주도하고 있었고 이 제사에는 바로와 제사장들과 중신들만 참예할 수가 있었다. 오직 장관을 이루는 행렬의 축제들이 열릴 때에만 신전의 의식들을 통해서 애굽에 복 내리기를 구했던 위대한 신들의 영광에 거리의 사람들도 참예할 수가 있었다. 일반 사람들은 위대한 신들의 모양을 보다 작게 본떠서 만든 가족신들의 모양을 보다 작게 본떠서 만든 가족신들을 섬겼고 또 큰 신전들의 통로 주변에 세워진 "작은 예배처소들"에서 예배하였다. 종교의 한 국면으로서 마술도 성행하였다. 긍정적인 면에서 메리카레(Merikare)왕의 스승 말을 빌리자면 그것은 삶의 재난을 막는 일들의 무기였다. 그러나 "혹"마술(목적이 악한)은 벌을 받아 마땅한 죄악이었다.

바로 통치의 일반적인 측면은 실제로 국가의 대신들과 함께 나누어졌다. 그의 대신 중에는 남부와 북부의 총리대신들 국고를 맡은 대신들,곡물창고 관리들 그리고 심지어는 징세를 관장하는 세리장들까지 있었다. 이 정부의 각 부서들은 수도에 있는 중앙 관서의 서기관들과 지방에 있는 지방 서기관들의 뒷받침을 받았다. 대제사장들은 그들의 토지와 관리부를 두고 있었다. 새 왕조 이후로는 바로가 또한 전차대와 보병으로 이루어진 상비군을 유지하였다. 교육은 행정기관이나 신전에 부속된 학교들에서 실시하는 필기훈련에 기초를 두고 있었다. 애굽은 많은 이야기 책들과 지혜서들(잠언과 유사한), 그리고 종교시와 서정시들을 발전시켰는데 그 중에 몇몇은 고전이 되었고 또 어떤 것들은 학생들을 위한 "고정된 교과서"가 되었다. 사회계층의 근본과 기초는 농부들의 수고였다. 애굽의 웅장한 유적들-거대한 피라밋 무덤들과 신전들로부터 정교한 벽화와 작은 인장반지에 이르기까지-은 각 시대의 바로와 신전고 지도자들을 섬기던 거대한 집단의 예술인과 기능인의 전문적인 솜씨에서 나온 것들이다.

건조한 주변 사막의 보존력에 자극을 받은 애굽인들은 사후 세계에 관한 풍부한 이론을 발전시켰다. 이 모든 이론에 따라 사람이 죽으면 그 시신을 미이라로 만들어서 보존하였는데, 이는 무덤이 시신을 가리워주듯이 밤에 영혼의 거처가 되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대게 내세는 죽은 사람의 신인 오시리스(Osiris)에서 세상에서 누리게 될 현재 생활의 짝일 것으로 생각하였다. 마술의 방편들을 통해서 무덤 안의 시 설들과 그림들은 그 상태에서 무덤 주인들을 받들도록 되어 있었다.


애굽과 성경

아브라함에서 요셉까지

성경에서 애굽의 첫 주역은 기근을 만난 족장들의 피난처로서의 역할이었다(창12:10이하,42-47장). 애굽은 나일강을 끼고 있어서 수리아.팔레스타인에는 극히 중요했던 지중해성 기후의 강우량과는 상관없이 번영할 수가 있었다. 히브리 민족의 선조를 이외에도 여러 사람들이 애굽에서 기근을 피하였다. 옛 왕조로 거슬러 올라가면 굶주린 외국인들이 조각된 그림의 장면들에 나타나는데 그로부터 천년 뒤에는 (B.C. 1230년경)에돔 부족의 일부가 "바로의 큰 배려로 그들 자신과 그들의 가축들을 살리기 위해서"비돔의 연못에 들어가도록 허락을 받았다. 애굽은 그 동편 경계에 국경수비대와 관료들을 두었고 방문자들은 가끔 애굽 땅에 들어가고 나올 때 호위를 받았다.(창 12:20에서의 아브라함처럼).

그림 : 애굽의 한 무덤 벽화에 나타난 사냥 장면.

아브라함과 요셉 시대의 바로들은 필시 제12왕조와 제 13/15왕조에 각각 속하였을 것이다(중간 왕조와 그후시대).그때에는 많은 외국인들이 애굽에서 종으로부터 대신에 이르기까지 (보디발 수하에 있던 요셉처럼.창39:1-4) 각계 각층에 침투해 있었다. 그리고 요셉과 같이(창 41:45)당시의 많은 외국인들이 애굽식 이름을 받았다. 귀족이나 천민 할것 없이 각계 각층의 사람들은 꿈이 의미를 가진 것으로 생각하였다. 학식있는 서기관들이 갖가지 꿈을 해석하는 데에 도움이 될 교과서를 쓸 정도였다.일곱 암소의 주제는 바로의 꿈(창41:18이하)에만 나오는 것이 아니라 죽은 자의 책(The Book of the Dead) 주문 148번에도 역시 나오는데 후자는 내세의 음식과 관련되어 있다.

경제적인 수준에 있어서는 애굽의 행정당국이 토지 소유주들의 상세한 기록대장을 비치하고 있다가 추수 전날에 조세를 위해서 정해진 곡물의 예상 수확량을 결정했다. 그러한 제도를 통해서라면 요셉이 제안한 기근대책은 쉽사리 실행될 수가 있었을 것이다(창41:34-3548-49,47:23이하) 또 삼각주 지역은 목축에 알맞는 땅이었다(창 46:34).이것은 B.C. 1600년경의 한 비문에서도 분명히 밝혀진 사실이다.

요셉이 대신으로서 입은 세마포 관복(창 41:42)은 수많은 애굽의 그림들에서 익히 알려져 있다. 한편 애굽의 미이라와 관들(창 50:2-326). 그리고 무덤들(출14:11)은 그 당시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유명한 것들이었다.

모세와 출애굽

4대후에 무수한 히브리인들은 그 시대의 대규모 건축계획에 따라 애굽 새 왕조의 벽돌공장에서 일하는 종이 되었다. 그들의 중노동은 국고성 비돔과 라암셋(출1:11)의 건설에서 절정에 달하였다. 라암셋은 라 메셋 II세가 건설한 동부 삼각주의 그 유명한 비라메세의 자리에 위치하고 있었다. 그 당시의 파피루스들에서 우리는 "라메셋 II세의 (한 신전)의 거대한 탐문을 위한 돌을 끌었던"아피루(Apiru:히브리인들을 포함한 백성들)와 "매일 일정한 양의 벽돌을 만드는"사람들과 벽도을 만들 사람도 짚도 주지 아니한 간역자들(출5:7을 보라)에 관한 내용을 대한다. 출애굽기 5장의 상황은 그 당시 애굽 문서들에 반영되어 있다. 서부 테베에 있는 왕실의 무덤을 판 노동자들의 마을에서는 토기 파편에 기록된(당시는 토기 파편이 메모지의 대용이었다)"작업 일정표들"이 나왔다. 이것들에는 일한 날과 "논"날들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는데 때로는 "그의 아내가 병들다" 혹은 "감독과 함께 맥주를 만들다",혹은 (슬프게도!)전갈에 쏘이다."등등 노동자 개개인의 결근사유가 구체적으로 덧붙여져 있다. 가장 흥미를 끄는 것은 "자기 신에게 제사하는"사람의 명부 혹은 어떤 지방의 종교축제에 며칠씩 단체로 참가한 자들의 명부이다(출 5:1-5과 비교하여 보라.그곳에 보면 모세가 히브리인들을 보낼것을 요구하나 바로는 그 이상의 휴가를 허락하거나 모세의 하나님을 인정하려 들지 않고 있다).

출애굽기 2장에서와 같이 동부 삼각주 후궁의 공주가 이국인의 아기에게 관심을 가지는 것이 애굽 새왕조의 세계 동포주의적 사회에서는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우리는 가나안에서 데려온 아이들이 도처의 후궁들에서 자라난 사실을 알고 있다. 타국인들은 가장 멸시받는 종에서부터 바로의 오른편에서 술을 따르는 관원장에 이르기까지 사회의 각계 각층에 섞여 있었다. 모세 같은 사람도 여기서 특례는 아니었다. 출애굽기의 술객과 박사들(7:11,8:7,18,9:11)은 대제사장들과 학식있는 서기관들이었다. 애굽인들 자신은 그러한 사람들의 유명한 공적에 관한 유쾌한 이야기들을 했다.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올 때 바로-필시 라암셋 II세-는 그의 병거들을 보내서 추격케 하였다. 600승의 병거(출14:7)는 상당히 큰 세력이었으나 그 정도는 충분히 동원할 수 있었다. 이는 그 당시의 군사적 규모가 그보다 더 컸던 사실이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광야시대에는 회막-본질상 하나의 조립식 성전-은 애굽에서 오랫동안 연마한 기술들을 이용해서 일반 목적과 종교적인 목적에 따라 세우고 걷기에 편리 하도록 만들어졌다.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와 B.C. 13세기말경에 서부 팔레스타인으로 들어간 것은, 라암셋 II세의 후계자인 메르ㄴ타(Merneptah.B.C.1230/1220년경)의 리비아 승전시(victory-poem)에서 유일하게 알려진 애굽인의 이스라엘에 대한 언급(게셀과 아스킬론에 관련된 문맥중)에 의하여 확증되고 있다.

후기

성경 역사상 애굽은 다윗과 솔로몬의 시대에 다시 나타난다. 솔로몬은 바로의 딸과 결혼하였는데 그 바로는 게셀을 탈취한 후 그 성읍을 자기 딸 솔로몬의 아내에게 예물로 준 인물이었다(왕상 9:16).그는 시아문(Siamun,B.C.970년경)이었을 가능성이 가장 짙다. 시아문은 그의 왕조 수도였던 타니스(Tanis.성경의 소안)에서 발견된 바 깨어진 한 전승기념 부조의 내용으로 미루어 볼때 필시 블레셋과 팔레스타인 남서부를 침략한 애굽왕이었을 것이다.

잠언-대부분이 "솔로몬의 지혜서"-의 문학적인 배열은 성지 근동의 문서들과 유사성을 지니고 있는데 그중에 많은 문서들이 애굽의 것들이다. 하지만 잠언이 부분적으로 애굽의 아메네모페(Amenemope)의 저작에서 직접 인용하였다는 주장이 종종 대두되는데 그것은 충분한 근거가 없다.

시아문의 왕조는 곧 무너지고 새 왕 곧 제22왕조의 창건자 세숑크 I세(Sheshonq I 왕상 11:4014:25의 "시삭")가 대신하여 일어났다. 그는 솔로몬의 이스라엘 왕국을 정치적, 경제적인 적수로 보았다. 그리하여 르호보암이 솔로몬의 왕위를 물려받았을 때 그는 여러보암을 이용해서 왕국을 둘로 나누어 서로 적대관계를 유지케 하였고 그 사이에 자기의 국익을 도모하였다. 테베에 있는 아문 신의 카르낙 신전에서 보는 한 거대한 승리의 장면은 그의 카르낙(Karnak)과 팔레스타인의 므깃도(Megiddo)에서 발견되었다.

그 이후로 애굽의 세력은 급격히 쇠퇴하였다. 히브리 선지자들은 그들의 왕이 애굽의 후원을 의존하는 일로 책망을 하였다(사30,31장,렘46장을보라) 바사제국(Persian Empire)의 발흥과 함께 실로 애굽은 "나라 중에 지극히 미약한 나라"(겔29:15)가되어 여러 세기 동안 실제적인 국가의 자주성을 상실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