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복한 성읍들

알란 밀라드(ALAN MILLARD)


가나안의 성소 : 므겟도에서 고고학자들에 의하여 발견된 가나안 사람들의 종교 제단으로 현재의 지층보다 훨씬 아래에 있다.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들어간 사건에 관한 성경의 기사들을 불과 몇몇 성읍들만 실제로 무너졌다고 기록하고 있다. 도처에 이스라엘이 이전 주민들을 몰아내고 그들의 재산을 탈취하였다는 사실이 강조되어 있다. 폐허가 된 성읍들이 널려 있는 황량한 땅은 40년간의 반유목민 생활에서 이제 막 벗어난 이스라엘에게 별로 유익이 못되었을 것이다. 그들이 파괴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은 가나안 족속들의 이교사당과 그들의 제사도구들이었다.

여리고는 특별한 경우였다. 그 성읍은 정복의 한 "첫 열매"로서 하나님께 바쳐진 제물이었다. 아이와 하솔도 역시 정복되었다. 그러나 이 성읍들 또한, 아마도 정반대의 관점에서 예외적인 경우들이었을 것이다. 성경의 기록이 믿을 만한 것이라면, 우리는 이스라엘 정복의 물리적인 증거를 많이 구하려들지 않을 것이다. 소유권의 이전은 필시 종교적인 영역을 제외하고는 알아볼 만한 표적들을 거의 남기지 않았을 것이다. 대부분의 성읍들은 여호수아서와 사사기가 지적하는 것보다 더 많은 성읍들이 당시에 함락되었을 것이나 히브리어 성경의 기사들은 그 세세한 목록을 필요로 하고 있지 않다.

그러므로 청동기 말엽의 가나안 성읍들에서 나타나는 모든 파괴의 흔적들을 이스라엘의 정복에 연결시키려는 시도는 그르칠 우려가 있다. 벧엘과 벧세메스와 드빌의 유적지 발굴결과들은 어떠한가?(텔 베이트 미르심).하솔, 그리고 라기스는 B.C. 13세기 어간에 폭력에 의해서 파괴된 흔적들을 보여주고 있으나 그 연대들은 어림으로 잡은 것들이고 또 그 성읍들이 동시에 파괴된 것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파괴된 후에 그 성읍들은 초토화되었거나 아니면 보다 적은 규모로 다시 사람이 거주하였다.

이스라엘이 비록 궁극적으로는 가나안 족속들의 최대 적수였으나 그 밖에도 적수들이 더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B.C 13세기의 역사에 있어서의 일반적인 쇠망의 경향을 포함하고 있다. 애굽의 바로는 가나안과 레바논과 다메섹의 통치권을 쥐고 있었다. 애굽의 총독과 관료들이 주요 성읍들에 상주하였고(예로,가사와 므깃도 등) 그 밖의 성읍들은 주둔군을 위한 성읍들로 이용되었다. 이 시대에는 간헐적인 반역사건들이 일어났는데 왕실의 동맹군이나 애굽의 군사력에 의해서 진압되었다. 애굽의 쇠퇴기 다음에 쎄티I세(Seti I)는 B.C 1300년경에 가나안과 요단 동편에 원정하였다. 고고학자들은 자주 그의 원정을 하솔에서와 같이 폐허가 된 성읍들의 파괴시기와 일치시킨다. 그 직후에 그의 아들 라암셋 결과로 일어난 반역을 진압시켜야만 했다. 그는 이 때(B.C. 1285년경)에 모압까지 뚫고 들어갔다.

아마도 이 강경조처의 결과로서, 라암셋이 헷왕과 평화조약을 맺은 다음에는 (B.C. 1270년경에) 50년이 넘도록 애굽에서는 침공해 온 일이 없었다. 라암섹의 아들 메르ㄴ타(Merneptah)의 통치시대에는 또 다시 문제가 발생했다. 애굽이 가나안에 개입했다는 사실과 그 곳에 애굽의 통치권이 존속되었다는 간접적인 증거 외에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 한 기록은 이스라엘을 여러 패배한 적들의 하나로 언급하고 있는데 이것이 이스라엘에 대한 성경 이외의 언급자료로서는 가장 오래된 것이다. 메르ㄴ타는 북서편의 "해양민족들"에게서 내려오는 침략자들의 물결을 저지시켰다. 애굽은 수리아와 가나안을 통해서, 그리고 바다를 통해서 밀려오는 또 다른 침략의 물결이 밀려올 때까지는 안전하였다.

이 침략의 물결은 그들이 변경에 도착하기 전에 그 함대를 쳐부수고 전위부대에 제동을 가하여 얼마 동안 가나안 땅의 통치권을 확고히 했던 라메셋 III세에 의해서 저지되었다. 그러나 침략자의 무리는 아직 남아 있어서 어떤 무리들은 몇몇 성읍들을 정복하였다. 예를 들어 블레셋 족속은 아스돗과 아스글론,에그론, 가드,그리고 가사를 수중에 넣었다. 또 다른 무리는 돌의 통치권을 장악하였다. 이 모든 사건들과 우리에게 알려지지 아니한 그 밖의 사건들은 정복시대를 전후하여 가나안 땅의 성읍들에 약탈과 파괴를 가져다주었다. 주변의 왕들도 침입세력으로서 황폐를 초래할 수가 있었을 것이다.

사진설명 : 하솔의 광대한 발굴 현장들 가운데에는 이 가나안 사람의 단 혹은 "산당"이 들어 있다. 여호수아 시대 그 전지역의 주요 도성이었던 하솔은 완전히 진멸된 몇몇 성읍들 가운데 하나였다.

그런데 우리는 세 성읍들-여리고,아이,하솔-이스라엘에 의해서 파괴되었다는 말씀을 대한다. 하솔에서는 청동기 말엽의 마지막 성읍이 B.C.13세기의어느 때에 폭력에 의해서 파괴되었다는 증거가 나왔다. 가나안의 마지막 성읍들의 폐허는 잘 보존되어 있지 않다. 이는 일부가 비바람과 경작으로 손상되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비록 그 전성기는 지나갔다 해도 그것이 중요한 성읍이었음을 보여줄 잔재들은 충분하다. 동일 언대의 다른 성읍들은 아주 비슷하다. 비록 성벽들이 자주 이전의 성벽과 연합(혹은 개수)되어 있었을지라도 모두가 다 철저히 요새화되어 있었다. 간선도로상의 성읍들(예:므깃도)은 훨씬 더 부요했던 경향을 보이고 있다. 한편 텔 베이트 미르심(드빌?) 같은 비교적 가난한 성읍들의 유적지들은 발굴자들의 관심을 도자기 모양들이 세목에 집중시켰는데 팔레스타인 고고학은 이 도자들의 여러 가지 형태에 그 비교연대를 의존하고 있다.

이스라엘 공격의 가장 분명한 증거가 나올 것으로 기대될 수가 있는 여리고의 유적지에서는 B.C. 13세기 중엽에 도시가 있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증거가 발견되지 않았다. 심히 부식된 흙벽들의 폐허는 그 성읍이 존재하던 이전 시기들의 흔적을 거의 남겨두고 있지 않다. 이러한 이유로 그 세기의 후반에 그곳에 요새화된 성읍이 서 있었을 가능성이 무시될 수는 없다. 그 폐허는 여호수아 때부터 아합의 때까지(약 400년,왕상 16:34을 보라) 오랫동안 버려진 상태에서 사라졌을 것이다. 한 때는 여호수아의 공격의 증거로 생각되었던 그 성벽들은 사실상 그보다 훨씬 더 이전 시기의 것으로 추정된다. 그 유적지의 발굴결과는 여호수아 시대 이전에 이미 여러 차례나 파괴되었다가 재건된 적이 있는 한 성읍의 모습을 보여준다.

아이성도 역시 문제를 제기한다. 발굴결과들은 그 성읍이 초기에는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었으나 B.C. 2500년경부터 B.C. 1200년 이후까지 버려진 상태로 있었음을 보여주었다. 아이라는 이름은 "폐허"를 뜻하는데 많은 사람들은 여호수아 이야기를 단순히 아주 인상적인 폐허를 설명하기 위한 시도로보고 있다. 고고학적인 증거를 받아들인다 해도 일단의 가나안 족속이 이 전략상 중요한 산성의 옛 요새들을 이용, 이스라엘 자손을 대항해서 싸웠을 가능성은 여전히 배제될 수 없다. 그처럼 일시적으로 점거하였던 경우라면 흔적을 별로 혹은 전혀 남기지 않았을 것이다.

간단히 말해서 우리는 특히 가나안의 폐허들에서 이스라엘이 찾아낼 것으로 기대할 필요는 없다. 여하튼 이스라엘의 사명은 전적으로 파괴하는 데에 있었던 것이 결코 아니다. 그리고 그 밖의 파괴요인들이 있었다. 성읍들은 이스라엘이 그 땅에 정착하여 그것을 개척할 수 있었거나 아니면 단지 부분적으로만 사람들이 거주하고 있었다. 이스라엘이 블레셋 족속과 요단 건녀편의 원수들이 위협을 가해오고 있는 동안에는 그땅을 완전히 정리할 수가 없었다. 가나안 후기 시대(철기 시대 초기)의 여러 유적들에서 그 잔재들을 별로 찾아볼 수 없는 사실은 이 상황을 입증해준다.

많은 학자들은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을 정복한 사건을 유목민 목자들이 점차 침투하여 결과적으로 그들의 소유로 삼았다는 식으로 설명해왔다. 어떤 이들은 이 사건을 일부는 침투해 들어왔고 또 일부는 여러 세대에 걸쳐 아마도 한 번 이상의 기회를 타서 몇몇 지파씩 애굽에서 이주했던 점진적 사건으로 간주한다. 또 어떤 이들은 그 땅 백성이 전체적으로 반역을 일으켰던 사건이었을 것으로 상상하기까지도 한다. 이처럼 다양한 견해들은 모세오경의 문서분석을 포함하는 이론들과 관련되어 있다. 이 견해들은 성경의 이야기들을 여러 다른 자표들에게 돌려서 각각의 기원을 제의하여 그것들이 서로 관계가 없는 여러 지파의 이야기들이라는 견해를 갖게 만든다. 이것과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이 바로 한 민족으로서의 이스라엘의 개념은 "정복"후 오래 뒤에 형성되었으며 후대의 이스라엘 역사가들이 초창기를 돌이켜 보며 만들어낸 것이라는 설이다.

점진적 과정의 사상은 그 밖의 침입들과 백성들의 이동에서 유추된다. 그 점유지가 제한되어 있었다는 사실이 강조된다.(예를 들면 사사기 1장은 간선도로상의 정복되지 아니한 혹은 원주민과 섞여 사는 가나안의 주요 성읍들을 열거하고 있다) 여호수아서의 이야기들은 지파 혹은 제사 자료들의 탓으로 돌려지고 있다. 그것들은 실제로는 작은 사건들, 지방의 사건들을 서술하고 있거나 혹은 폐허가 되어 실제적인 역사가 잊혀진 성읍들의 기원으로 엮어진 민간설화들을 들려주는 것으로 간주되고 있다.

유추를 통한 추장에 대해서는 항상 주의해야 한다. "정복"의 경우에 있어서는 특히 더 주의해야만 한다. 유목민 침투에 관한 유추들은 이스라엘을 이미 알려진 형태에 들어맞게 하기 위해서 사용되고 있다. 그러나 이스라엘에 관한 성경의 모든 기록들은 경우가 전혀 달랐음을 주장하고 있다. 그러한 사도들은 기껏해야 시험적인 것일뿐 실제적인 것은 못된다. 실제로 성경에 제시된 설명을 그것이 특이한 것이라는 이유로 제외시키는 것은 편견이요 비과학적인 입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