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라기(Malachi)의 외침

G. Campbell Morgan 저 / 김현진역

- 마지막 메시지 -

그림설명 : 가시들 틈에서 피어난 꽃처럼 영광스러운 미래에 대한 선지자들의 예언은 심판과 재난의 경고들 틈에서 피어났다.

"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너희를 사랑하여노라 하나 너희는 이르기를 주께서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셨나이까 하는도다 "(말1:1,참조.말3:13-4:6)

여러가지 의미로, 성경 전체에서 이 구절만큼 사람을 깜짝 놀라게 만드는 구절은 달리 찾아 볼 수 없다고 나는 장담한다. 이 구절은 하나님과 사람이 서로 주고 받은 말을 기록한 내용이다. 하나님께서 "내가 너희를 사랑하였노라"고 선언하시자 사람이 "주께서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셨나이까"라고 대답하였는데,사실 이것은,'나는 그것을 모르겠습니다"라고 말한 셈이다.

이러한 구절은 주의깊게 살펴보아야 한다. 그리고 어떤 상황 아래서 이 대화가 발생하였는지를 조사해 보아야 한다.말라기가 역사상의 순서로 볼 때 구약 선지자들 중 마지막 사람이었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다. 따라서 그의 메시지가 느헤미야의 활동과 아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었음은 조금도 의심의 여지가 없다. 실제로 말라기서를 공부하기 전에 느헤미야서를 먼저 보는 것이 좋다. 느헤미야서에서 그 역사적 배경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말라기가 에스라서나 느헤미야서에 이름이 한번도 오르지 않은 것이 사실인 까닭에,만일 말라기가 그들과 동시대 사람이 아니라면 틀림없이 그가 그들의 활동을 그대로 뒤따른 것이 분명하다. 느헤미야서의 마지막 부분을 말라기서와 비교해 보면, 느헤미야를 화나게 만들고 말라기로 하여금 메시지를 전하도록 만든 백성들의 여러가지 잘못을 볼 수 있을것이다. 느헤미야서는 우리에게 아주 특출한 한인물을 소개하고 있듯이 책 자체가 아주 독특한 매력을 지니고 있다. 느헤미야가 활동하던 당시의 상황을 살펴보면, 그때에 제상직은 더럽혀졌고 이방인과의 결혼 풍습이 성행하였으며 백성들이 십일조를 잘 내지 않았던 것을 알게 된다. 이 점들이 바로 말라기 다룬 문제들이다.

백성들의 정신 상태가 말라기서에서 아주 분명하게 드러나는데 다소 기묘한 방법으로 나타난다. 말라기서 여기 저기에 흩어져 있는 일곱 문장을 하나씩 읽어보면 내가 말하는 뜻을 알게 될 것이다.

첫째 문장은 본문으로 정한 구절에 들어 있다. '주께서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셨나이까?" 두번째 문장은 1:6에 있다. "우리가 어떻게 주의 이름을 멸시하였나이가?" 세번째 문장은 바로 그 다음 구절에 있다. "우리가 어떻게 주를 더럽게 하였나이까?" 2:17에는 "우리가 어떻게 여호와를 괴로우시게 하였나이까?" 하는 말이 있고, 3:7에는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돌아가리이까?" 하는 말이 있다. 또한 같은 장 8절에는 "우리가 어떻게 주의 것을 도적질하였나이까"하는 말이 있고, 이어서 13절에는 "우리가 무슨 말로 주를 대적하였나이까?" 하는 말이 있다. 이 "어떻게"라는 말이 사실상 이 책을 여는 열쇠이며 백성들의 태도를 보여주는 놀라운 계시이다. 백성들은 자기들에게 비난이 퍼부어질 때마다 그와 같은 말로 대꾸하였다. 바꾸어 말하면, 말라기는 자기가 퍼붓고 있는 비난에 대해 항의를 하는 백성들을 상대로 말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책 전체는 무감각한 백성과 예민한 하나님을 동시에 보여 준다. 말라기는 바로 이스라엘을 향해 외쳤는데, 그가 이스라엘이란 말을 쓸 때는 단지 북왕국만을 가리키거나 남왕국 유다만을 가리키지 않고 이스라엘 전체를 두고 말했다는 사실을 기억해 두는 것이 좋다. 이 사실과 관련해서 다음의 사실도 기억해 두는 것이 좋다. 바벨론 포로사건 이후에 이 백성들이 돌아왔는데 이스라엘 백성 중 오직 남은 자만이 처음에는 에스라의 인솔 하에 돌아왔고 다음에는 또 다른 대표단의 인솔을 받아 돌아왔다. 그러나 돌아온 사람들 가운데는 유다 지파 뿐만 아니라 모드 지파 사람들도 다 있어서 말라기의 메시지는 자연히 이스라엘 전체에 전달되었다. 확실히, 돌아온 백성들 중 많은 수가 유다 지파에 속했으나 다른 지파 사람들도 들어 있었다.

느헤미야서에서 영감받은 히브리 역사의 마지막 단편을 보듯이, 말라기서에서는 영감받은 히브리 예언의 마지막 단편을 본다. 세례 요한이 올 때까지는 진정한 선지자가 달리 없었다. 마카비 시대에 특출한 인물이 여러 명 일어났었지만 그 시대에 관해서 영감을 받아 쓰여진 역사 기록은 성경에서 전혀 찾아 볼 수 없고 진정한 선지자도 전혀 일어나지 않았다.

이스라엘 백성의 역사에서 이때로부터 백년을 거슬러 올라가 보면, 학개와 스가랴가 백성들로 하여금 다시 성전 재건의 책임을 지도록 만든 것을 알게 된다. 백성들이 수고한 결과로 모든 것이 회복되었다. 성읍을 세우고 성벽을 둘렀다. 성전이 세워졌고 제사장들은 직무를 맡았으며 제물들을 바쳤다. 이때 말라기가 와서 이스라엘에게 경고 혹은 여호와의 말씀이라는 신탁을 알렸다. 그 경고의 첫 문장은 "내가 너희를 사랑하였노라"는 것이고, 그 답변은 "주께서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셨나이까"이다.

그 다음에 이 책 전체를 살펴보면, 오늘날 우리 시대까지 그 메시지를 생생하게 전달하고 있는 세가지 문제를 발견하게 된다. 첫번째는 여호와의 끊임없는 사랑이 계시되었다는 점이다. 두번째는 이같은 사랑 앞에서 드러난 인간 생활의 끔찍한 실패에 대해 보게 되나는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백성들의 그런 실패 가운데서도 실제로 하나님을 아는 자들의 힘의 비결이 발ㄱ지는 것을 보게 된다는 것이다.

하나님 끊임없는 사랑이 다음과 같은 서언으로 선포되었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낵 너희를 사랑하였노라." 이 번역문이 아름답기는 하지만 히브리말의 근본적인 사상과 의미가 어느 정도 빠져 있다고 나는 본다. 나는 지금 이 문장이 부정확하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불충분하다고 말하고 있는것이다. 히브리어는 시제가 영어보다 훨씬 더 다양하다. 여기서 사용된 시제는 과거 시제로 쓰인 "내가 너희를 사랑하였노라"는 말보다 훨씬 그 이상의 어떤 내용을 암시한다. 그 시제는 연속성을 표시하고 있다. 그 시제는 뒤를 돌아 볼 뿐만 아니라 또한 주변과 앞을 내다 본다. 따라서 우리가 그 말의 의미를 좀더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해서 그 문장을 이렇게 번역할 수도 있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나는 너희를 사랑해 왔고 지금도 사랑하며 앞으로도 사랑할 것이다."

하나님의 영감이 부여된 4백년 역사의 마지막 페이지와 그 기간 동안의 영감어린 예언의 마지막 페이지에 나오는 이러한 배경과 함께, 하나님의 끊임없는 사랑에 대한 이러한 위대한 선언을 접하게 된다. 세익스피어는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변할 만한 이유가 생겼다고 해서 변하는 사랑은 사랑이 아니다.

아주 멋진 말이다. 이 말이 맞다면 우리는 사람의 차원에서 사랑에 관해 잘 알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변할 만한 이유가 생길지라도 변하지 않는 사랑은 하나님의 사랑이다.
"어떻게" 라는 질문이 발생하는 경우들을 주목하면서 다시 한번 이 책을 잠깐 훑어 보면, 매 경우마다 어떤 비난에 대해 답변하느라고 질문을 꺼낸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여기에 나오는 비난은 신성한 것을 더럽힘과 탐욕, 예배를 권태롭게 여기는 무관심, 도덕적 가치 기준을 왜곡함,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을 더럽히는 것을 고발하는 것들이다. 두려운 죄목들이 아닐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사자 말라기는 비난할 때마다 매번 하나님의 사랑을 이유로 들어 이런 문제들에 대해 호소한다. 게다가 그는 자기 메시지를 통해서 백성들에게, 그들의 일곱 가지 잘못의 기저에 있는 가장 심각한 죄는 그들이 하나님의 감정을 상하게 하고 하나님을 모욕한 것이라는 사실을 가리쳐 주려고 애쓰고 있었다. 신성을 모독하는 언행과 신성한 것을 더럽히는 행위, 탐욕, 무관심, 도덕적 가치 기준을 왜곡함, 도둑질, 불경스러움 등 이러한 너의 행위에도 불구하고 "내가 너희를 사랑해 왔다."이것은 잘못을 범하고 있는 이 백성들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이었다. 이렇게 처음부터 끝까지 우리는 강렬한 사랑 때문에 생긴 하나님의 상한 심정에서 나오는 슬픈 목소리를 듣는다.

그 다음에 백성들의 실패의 배경을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밖으로 드러난 실패의 근본에는 항시, 백성들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데 소홀하였다는 사실이 있다. 그 실패는 결과가 아니라 오히려 원인이었다. 하나님께대한 사랑이 있는 곳에서는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는 일이나 신성을 모독하는 일,탐욕, 예배를 드리지 않거나 예배를 지겨워 하는 일, 도덕적 가치 기준을 왜곡하는 일이 전혀 없을 것이다. 하나님에 대한 사랑도 잃어버리고 마음마저 무감각해져서 그들은 "주께서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셨나이까"하고 지껄였다. 이 백성들이 그동안 호된 경험들을 겪어온 것은 사실이다. 그들은 포로로 끌려가기도 했었고 끔찍한 노예생활도 겪어 보았다. 그들이 다시 돌아오기는 했으나 새 성읍은 이전의 여광을 갖추지 못했고 성전은 그 장엄함이 솔로몬 때의 성전만 못하였다. 그래서 노인들은 그 성전을 보고 울었다. 이러한 경험들 때문에 그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들의 마음 자세가 어떠했는지는 알 수 없다.때때로 우리는 이렇게 묻고 싶은 생각이 든다. 왜 하나님은 우리가 지금 이런 고통을 당하도록 내버려 두시는가? 왜 하나님은 그처럼 견디기 어려운 상황을 통과하도록 우리를 이끄시는가? 이런 질문을 할 때마다 우리는 자칫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려는 생각이 든다. 이와 같은 생각이 들 때는 항시, 그 이면에는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사랑이 어떤 이유 때문에 약해졌다는 사실이 있다. 우리가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무엇인가 끼이도록 내버려 둔 것이다. 종교의 형태와 의시ㅐ은 계속해서 유지해 올 수 있다. 성전에 계속해서 참석하고 교회에 제물을 가져왔을지는 모르지만 우리에게는 사랑이 부족하다. 그동안 사랑이 우리 속에서 잘 발휘되지 못하였으며, 따라서 우리는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게 된 것이다.

우리는 이렇게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지 않도록 마치 수비대처럼 우리의 마음을 지켜야 한다. 우리 자신의 사랑이 어디선가 이지러지고 냉담해지지 않는 한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는 일은 결코 발생하지 않는다. 우리 속에서 사랑이 식으면 마음이 무감각해지고 그 다음에는 양심이 무디어지고 마비된다. 그런데 속 상태는 이러면서도 종교의 외형적인 형식들을 계속해서 유지할 수가 있는 것이다. 이것은 곧 말라기 시대의 이야기이다. 즉 능력이 없는 형식의 이야기요 겉은 정확하면서도 속은 이단인 시대의 이야기이다.

말라기는 그러한 마음 자세를 향해 하나님의 사랑의 변함없는 사실을 선언하였다. 사랑은 하나님의 통치의 동기이다. 백성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한 것은, 그들이 복종과 그 결과로 일어나는 교제에 실패하여 그들의 사랑이 더이상 하나님을 향하여 나아가지 못했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었다.

이 다음에는 충성스러운 남은 자들을 향한 하나님의 태도를 밝히 보여 주는 계시가 나온다.

앞에서 말했듯이, 백성들 가운데 오직 남은 자들만이 포로 생활에서 돌아왔다. 그러나 그 남은 자들 가운데는 또다른 남은 자들이 있었다. 이 시기는 여러가지 면에서 혼란하였다. 이때는 왕이 없었다. 왕들은 그동안 다 사라졌다. 제사장직은 완전히 부패하였다. 예언은 이미 오랫동안 그쳐 왔고 또 앞으로도 없을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끔직한 상황 가운데서도 하나님께 충성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리고 그들에 대한 묘사는 시사하는 바가 매우 많다.

"그때에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들이," 잠시 "그때에"라는 말을 살펴보자. 그때는 능력이 없는 형식이 판을 치고 사람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지 못하고 그 사랑을 의심하며 백성들이 십일조를 가져 오되 온전한 십일조를 가져 오지 않고 아주 차액이 심하게 가져오며, 하나님을 모시는 것이 지겹다고 말하던 때였다. 그때에 소수의 백성 집단이 알려지고 있다. 그들은 이런 사람들이었다.

그때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들이 피차에 말하매 여호와께서 그것을 분명히 들으시고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와 그 이름을 존중히 생각하는 자를 위하여 영호와앞에 있는 기념책에 기록하였느니라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내가 정한 날에 그들로 나의 특별한 소유로 삼을 것이요(3:16,17).

여기서 그 무리에 관한 두가지 사실이 분명하게 드러났다. 첫째는 그들이 함께 말했다는 사실이다. "그들이 피차에 말하매."타락한 시대 가운데서도 함께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내친 김에 한 가지 더 말하자면, 흠정역 성경은 그 구절을 "그들이 가끔 서로 말하였다."고 번역하고 있으나 히브리어에는 "가끔"이라는 말이 없다. 말라기의 그 진술은 가끔 발생하는 경우를 나타낸다기보다는 오히려 끊임없는 생활의 습관을 나타내고 있다.

그 다음에, 말라기가 그들이 "여호와의 이름을 존중히 생각하였다."고 말한 것에서 우리는 그들이 무엇에 관해 말하고 있었는지를 알게 된다. 여기서 잠시 무엇에 관해 말하고 있었는지를 알게 된다. 여기서 잠시 "생각하였다"는 말을 주목해 보자. 바울이 "무슨 덕이 있든지 무슨 기림이 있든지 이것들을 생각하라"고 썼을 때 그는 70인역 성경의 말라기서에 있는 단어를 사용하였다. 이 단어의 문자 그대로의 의미는 목록 중의 물품을 조사한다는 뜻이다. 이 사람들은 그 이름을 깊이 생각하였다. 그들은 그 이름 속에 들어 있는 그들의 재산 품목을 조사하고 있었다. 왕들은 죽었고 제사들은 타락하였다. 선지자들도 침묵을 지키고 있었으나 그들은 여전히 그 이름을 생가하고 있었다. 그 이름은 여호와였다. 이 이름은 여러 시대에 여호와 샴마(Jehova-Shammah),여호와 치드케누(Jehova-Tsidkenu), 여호와 닛시(Jehova -Nissi),여호와 로페카(Jehova-Ropheka)등과 같은 말들과 연결됨으로써 다양한 뜻으로 해석되었다. 위 말들 및 다른 어구들은 여호와라는 이름 속에 담긴 풍부한 의미들을 해석하는데 도움을 준다. 남들과의 교제에서 발생하는 그러한 정신적 활동 속에, 모든 이가 타락하는 가운데서도 충성을 지킬 수 있는 비결이 있다.

다음에는 "여호와께서 그것을 분명히 들으시고"(the Lord hearkened and heard)라는 말이 있다. 여기서도 잠시 몇 마디 말을 생각해 보자.히브리 말은 언제나 그림으로 나타내는 것 같기 때문이다. 여기서 여호와께서 "들으셨다"(hearkened)라는 말은 동물에게 쓰이는 용어로서 귀를 세운다는 뜻이다. "heard"로 번역된 히브리 단어도 회화적(pictorial)인데, 온 신경을 쏟아 한 소리도 놓치지 않는다는 뜻을 나타낸다. 여호와께서는 귀를 세우시고 온 신경을 귀울여 들으셨다. 대담하게 말라기 선지자는 이 백성들에게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림으로써 그들의 주의를 끌려고 하고 있었다. 그 사실이란, 그들이 타고 다녔을 말이 그것을 ㅌ 자의 입에서 나오는 말을 한 마디로 놓치지 않고 다듣기 위해 귀를 세우듯이 혹은 엄마가 어린 아기의 잘 알아 듣기 힘든 옹알거리는 소리를 하나도 놓치지 않기 위해 허리를 구푸려 듣듯이, 이 백성들이 여호와의 이름을 깊이 생각한 결과로 함께 이야기하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 듣고 계셨다는 것이다.

남은 자들은, 다른 모든 사람이 죽어가고 있었을 때 민족 생활에 있어서 실제적인 능력을 갖춘 중심 인물이었다. 사백 년 동안 상태는 계속해서 악화되어 백성들의 대다수는 형식주의자들이 되었고, 그들이 자신들의 전통 때문에 질식하게 되기까지 더욱더 형식주의자들이 되어 갔다. 그러나 신약에서 우리는, 시므온과 안나, 요셉과 마리아 그리고 여호와를 경외하는 그밖의 사람들이 여호와의 이름을 숙고한 결과로써 함께 이야기하는 것을 본다. 하나님은 말라기를 통해서 "내가 나의 정한 날에 그들로 나의 특별한 소유를 삼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따라서 그들은 메시야께서 오실 때 하나님 편의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였다.

이 선지서의 마지막 장은 백성들에게 또 다른 날이 다가오는 것을 보도록 촉구하였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극렬한 풀무불 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초개같을 것이라 그 이르는 날이 그들을 사랄 그 뿌리와 가지를 남기지 아니할 것이로되 내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치료하는 광선을 발하리니(4:1,2)

그 날은 해가 떠올라 밝아오는 날과 같게 될 것이다. 생활 상태에 따라 그 날의 결과가 좌우될 것이다. 해가 뜨면 뿌리가 없거나 생명이 없는 그루터기는 타 버릴 것이다. 그러나 뿌리도 있고 생명도 있는 곳에는 해가 치료하는 광선을 발할 것이다. 말라기는 백성들에게 그 날을 바라보고 그 이상 (vision)에 맞게 행동하라고 명하였다.

오늘날의 기독교 국가의 상태가 말라기서에 생생하게 그려져 있다. 나는 교회에 대하여 말하지는 않았다. 나는 교회와 기독교 국가를 명백히 구분하고 싶다. 교회는 함께 모여 하나님에 관해 이야기하고, 언제나 하나님의 이름을 깊이 생각하는 선택된 남은 자들로만 구성되어 있다. 기독교 국가는 외형적인 형식이며 교회를 괴롭히는 거대한 형식주의이다. 그 날이 오고 있다는 사실고, 태앙이 떠오르면 전적으로, 우리의 생활과 성품의 상태에 따라 그 결과가 좌우될 것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자. 태양이 뿌리없고 생명없는 그루터기는 멸망시킬 것이나 충성스런 사람들에게 치료하는 광선을 비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