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도의 시작

본 문 : 마태복음 3:1-12
성경에는 많은 예언자들이 있습니다. 우리나라 성경 번역에서는 [예언자]라는 말대신 [선지자]라는 말을 써 왔습니다. 일반적으로 예언자나 선지자라는 말에 대한 첫 느낌은 장차 일어날 일을 점장이처럼 미리 안다는 뜻으로 간주하게 됩니다. 미리 말한다는 [예언자]나 [먼저 있다]는 선지자의 뜻이 성경의 예언자의 본질을 설명하는 것 같이 이해되고 있습니다. 성경 자체가 우리에게 알리려는 예언자에 대한 본래의 뜻은 간단치 않습니다. 구약성경에는 [선지자] 또는 [선견자]란 말로 번역되는 두개의 낱말이 있습니다. [호제]와 [로에]가 그것이고 예언자로 번역되는 [나비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예언자의 성격과 본질적인 사명을 이해하려면 이런 낱말의 뜻과 역사적으로 또는 언어학적으로 많은 설명이 필요하게 됩니다. 핵심만을 말씀 드린다면, 예언자라는 말의 뜻이 미래에 일어날 사건을 미리 알고 말한다는 점성술이나 복술의 의미가 아닌 하나님이 말씀을 어느 사람에게 부탁하여 전하는 사람이라고 아시면 됩니다. 즉 미리 예(豫)자 예언이 아닌 맡길 예(預)자 예언으로 생각하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을 시간관념과 관계없이 그 말씀의 내용에 중점을 둔다면 예언자의 사명에 이해가 가실 것입니다. 현재나 미래에 일어날 일에 상관없이 하나님이 말하라고 명하고 위탁하여 맡긴 말씀을 전한다면 그것이 곧 예언자의 사명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대신하여 말하는 사람을 예언자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항상 선지자를 통하여 이스라엘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은 선지자의 활동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배우고 깨달았습니다. 때로는 책망을 받고 회개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좇아 살아갈 수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에게는 말라기 이후로 4백년동안 선지자가 없었습니다. 선지자가 없는 이스라엘을 생각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도 선지자가 없는 시대가 있었습니다. 그 적막을 깨뜨리고 하늘의 소식을 전하며 "천국이 가까왔으니 회개하라"고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분명히 선지자의 소리였습니다. 그가 곧 세례요한입니다. 세례요한은 아비야 반열의 제사장 사가랴와 아론 자손인 엘리사벳을 부모로하여 태어났습니다. 주 앞에서 큰 자가 되며 포도주나 독주를 마시지 아니했습니다. 모태로부터 성령의 충만함을 입었고 이스라엘 자손을 주, 곧 저희 하나님께로 많이 돌아오게 한 자입니다. 실로 그는 주님의 사자였으며 빛에 대하여 증거했고 오리라고 성경이 예언한 엘리야였습니다. 주님이 친히 말씀하시기를 여인이 낳은 사람중에는 세례요한보다 더 큰 이가 없다고 하시었으니 지상 최대 인격의 인물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은 이 요한 선지자의 출현으로부터 전파되기 시작합니다. 그는 전도하면서 회개를 외쳤고 죄사함을 주는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그래서 그의 닉네임이 세례요한인 것입니다. 우리는 이제부터 세례요한의 인물됨과 선지자로서의 그의 사명을 생각하면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게될 것입니다.

첫째, 세례요한은 어떤 사람이었을까요
로마의 황제 "디베료 가이사가 위에 있은지 열 다섯해 곧 본디오 빌라도가 유대의 총독으로, 헤롯이 갈릴리의 분봉왕으로, 그 동생 빌립이 이두래와 드라고닛 지방의 분봉왕으로, 루사니아가 아빌레네의 분봉왕으로, 안나스와 가야바가 대제사장으로 있을 때에 하나님의 말씀이 빈 들에서 사가랴의 아들 요한에게 임한지라(눅 1:1-3)"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세례요한은 분명한 역사적 인물이라는 뜻입니다. 그는 광야의 사람이었습니다. 본문은 "그 때에 세례요한이 이르러 유대 광야에서 전파하여 가로되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3:1-2)" 고 합니다. 세례요한은 광야에서 살았고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였습니다. 광야는 외로운 곳입니다. 쓸쓸한 장소입니다. 그러할지라도 광야는 하나님과 면회하는 곳입니다. 세례요한은 광야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습니다. 선지자로서의 사명을 깨달았고 광야에서 그의 사명을 다했습니다. 하나님은 광야에서 역사하시는 신이십니다. 광야에서 그의 백성을 양육하셨으며 오늘날의 위대한 성도들도 광야에서 만드십니다. 그래서 어떤 학자는 말하기를 그리스도교는 광야의 종교라고합니다. 시중은 온갖 잡것으로 인하여 복잡하고 더럽고 추합니다. 유혹이 있고 탐욕이 번뜩입니다. 시기와 질투가 난무하고 음난과 사행심이 가득합니다. 살아가기 위한 지혜로 스스로의 능력을 키우고 한마디로 제 잘난 맛에 살아갑니다. 광야에는 생사 여탈이 하나님께만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만 바라보게 됩니다. 하나님을 통하여 세계를 보고 자기 자신을 살피게 됩니다. 자연히 하나님 상대의 거룩한 생활을 하게 됩니다. 세례요한이 그러했습니다. 벌거숭이 맨 땅에서의 생활이 물질에 구속을 받지 않았습니다. 인간생활을 영위하는데 삼대요소라고 하는 의복과 음식과 거처에 구애되지 않았습니다. 세례요한은 아름다운 옷을 입을 수 있고 맛있는 음식을 먹을 수 있으며 큰 집에서 으리으리하게 살 수 있는 상류사회 제사장 가문의 독자였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빈민이 두르는 약대 털옷을 입었고 가난한 백성들의 음식인 메뚜기와 석청을 먹었습니다. 어디든지 자리를 펴면 누을 수 있고 햇볕과 바람을 막으면 그의 거처였습니다. 옛말에 의식이 족하여야 예절을 알고 창름이 실하여야 영욕을 안다하여 사람 사는 조건을 경제 바탕에 두었습니다. 이런 까닭에 현대인은 의식주에 얽매여 자기의 인격 전체를 파멸시키고 있는 일들을 종종보게 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렇지 않는가요 물질적 조건 때문에 신앙의 정조를 팔고 물질축복이라는 유혹 때문에 이단사설에 빠지는 일들은 없는가요 그리스도인들은 세례요한을 통하여 배워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의 가슴 속에는 의식주에 매이지 않는 광야가 있어야 합니다.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고 하나님과 대화하고 자신의 진지한 사명을 깨달아 주님께 충성을 다하는 세례요한의 생활이 이루어져야 할 것입니다. 세례요한은 위대한 전도자였습니다. 전도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위탁받을 뿐만 아니라 그 말씀을 담대하게 전파해야 합니다. 그것이 예언자의 속성입니다. 전도의 사명은 목회하는 전도자에게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모든 그리스도인은 전도자의 사명이 있습니다. 세례요한은 회개를 요하는 인생들에게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다"고 외쳤습니다. 그의 눈에는 오직 죄의 짐을 진 사람들만이 보였습니다. 권세, 부귀, 영화가 아무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담대하게 회개를 외칠 수 있었습니다. 부귀를 바라보면 부귀에 아첨하게 되고 권세를 생각하면 권세에 매달리게 됩니다. 영화를 마음에 두면 담대할 수 없게 됩니다. 이것 저것 재어보는 계산적인 사람이 되어 버립니다. 이런 사람이 어찌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겠습니까. 복음이 기쁜 소리 복된 소리임에 틀림없지만 먼저 회개하고 그리스도의 뜻대로 순종하는 사람에게 복음이 임하게 됩니다. 세상을 바라보면 담대한 전도자가 될 수 없습니다. 광야의 사람 세례요한만이 회개를 명하고 감히 저 헤롯에게도 당당하게 그의 잘못을 탄핵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모두 세례요한 같이 될 수는 없지만 세례요한을 본받아 광야 생활을 한다면 우리들은 세례요한보다 더 위대한 일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둘째, 세례요한은 무슨 일을 했을까요
광야의 사람 세례요한은 예수님을 올바르게 증거하고 예수님의 길을 예비하여 무섭게 외쳤습니다.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냐? 아니다. 독사의 자식들이다. 너희는 좋은 열매를 맺는 나무냐? 아니다. 악한 열매로 불탈 자들이다. 너희는 곡간에 들어갈 알곡이냐? 아니다. 지옥 불에 타질 쭉정이다. 세례요한이 외친 말들입니다. 누가 감히 이런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이것이 선지자의 권위, 전도자의 권위, 그리스도인의 권위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면 우리는 이런 말을 서슴없이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은 빈 강단을 울리는 설교자만의 전유물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복음을 증거하는 그리스도인은 누구라도 세례요한과 같은 담대한 증거를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기에 아무나 할 수 있는 말은 아니지요. 우리는 구약성경에서 세례요한과 같이 서릿발이 선 예언자들을 보게 됩니다. 그 중에서 엘리야를 들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세례요한은 엘리야의 사명을 가지고 왔다고 복음서는 말합니다. 북왕국 이스라엘 제 7대 아합왕 시대는 남왕국 유다의 여호사밧 왕과 함께 부강하던 때입니다.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물질적 풍요는 정신적 부패를 가져옵니다. 아합이 두로왕의 딸 이세벨을 아내로 취하니 당대의 여걸이요 열렬한 우상숭배자였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종교적으로 타락하여 하나님과 바알의 분별이 없어졌고 도덕적으로 부패해지고 정치적으로는 권력 계급의 횡포가 심해지기 시작하던 때입니다. 하나님의 사람 엘리야는 백성을 견책하고 특히 왕가를 향하여 사정없이 공격하였습니다. 그래도 회개의 기미가 없는 그들을 향하여 3년 6개월의 대한(大旱)을 선포했습니다. 그 유명한 가멸산의 대결에서 불이 내리도록 기도했습니다. 그 결과 비가 쏟아지기도 했습니다. 아합왕이 나봇의 포도원을 빼앗을 때에 엘리야는 왕을 향하여 "네가 남의 생명을 빼앗고 남의 산업을 빼앗았으니 너의 피도 나봇의 피와 같이 될 것이요 네 집에 남자는 다 이 나봇의 피가 떨어진 자리에서 죽어 멸족 되리라"고 했습니다. 이 얼마나 무서운 예언입니까. 이 얼마나 엄청난 저주입니까. 그리고 사실은 그대로 된것입니다. 3년만에 아합왕이 전사했습니다. 13년 후에 예후의 혁명군이 일어나서 나봇의 피가 떨어진 곳에 왕후 이세벨의 피도 떨어졌습니다. 아합의 왕자 70인이 그 자리에서 몰살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이것이 선지자의 권위입니다. 엘리야의 눈에는 바알도 없고 왕도 없고 오직 하나님만이 계실 뿐입니다. 이것은 옛 이야기가 아닙니다. 오늘의 그리스도인들에게도 가능한 이야기입니다. 오직 하나님만을 중심하여 사는 그리스도인에게는 이런 전도인의 권위가 주어질 것입니다. 엘리야 못지않는 선지자로 예레미야가 있습니다. 유다의 말년에 태어나서 약관의 때에 선지자의 입술을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기 시작했습니다. 40년간을 [유다는 망한다]고 경고하다가 맞아 죽은 선지자입니다. 그는 아나돗이라는 제사장 촌에서 태어났습니다. 제사장의 아들로 당당히 제사장의 예복을 입고 교권자가 될 수도 있었지만 예복 대신에 베옷을 입고 망해가는 조국을 위하여 일생을 울다가 순교하였습니다. 때는 신앙의 명군 요시야왕이 므깃도에서 전사하니 온 나라는 눈물 골짜기기 되고 말았습니다. 그후 불행하게도 왕의 세 아들들 여호아하스와 여호야김과 시드기야가 한결 같이 다 망국의 어두운 임금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예레미야는 40여년간 [나라가 망한다]고 외쳤습니다. 그 다음에는 [바벨론에 항복하라]고 외쳐야만 했으니 동족으로서는 차마 못할 말이었습니다. 매국노요 바벨론의 앞잡이라는 매도를 피할 수 없었습니다. 욕먹고 매맞고 갇힐 뿐만 아니라 매일 죽음의 협박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그래도 선지자는 굽히지 않고 순교하기까지 외쳤습니다. [평안하다] [나라가 잘 되어간다]고 집권 당국과 시대에 아부하는 사람은 많지만 바른 말하는 사람은 예나 지금이나 흔치 않습니다. 오직 예레미야 홀로 하나님의 말씀을 외쳤습니다. 누가 듣던지 아니 듣던지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면 외치는 것이 선지자의 권위입니다. 우리 시대에도 전도자의 외침이 있어야합니다. 진리라면, 하나님의 올바른 말씀이라면 듣던지 아니 듣던지, 믿던지 아니 믿던지 전해야 합니다. 증거해야 합니다. 이것이 이 시대 예언자의 사명입니다. 선지자는 망할 것을 내어다 보고 외칠 뿐만 아니라 그 뒤의 소망에 대하여서도 말해야 합니다. 예레미야는 [70년 후에는 회복이 된다]고 망한 뒤의 소망을 분명히 말했습니다. [시대의 죄악을 직시]하고 [멸망의 경고] [장래의 소망]을 가르치는게 선지자의 사명이라면 오늘의 그리스도인들도 죽어가는 영혼들을 향하여 천국의 소망을 외쳐야만 할 것입니다. 세례요한이 그런 사람입니다. [멸망의 경고]를 서슴없이 외쳤습니다. 그의 경고는 오실 메시야에 대한 소망을 가지게 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요단강에 나와서 세례를 받고 구세주를 기다리게 되었습니다. 오늘의 그리스도인들은 세례요한을 본받아야 합니다. 오히려 그 이상의 일을 해야 합니다. 주님은 세례요한을 가리켜 여자가 낳은 자 중에서 가장 크다고 하셨지만 천국에서는 그리스도인들이 저보다 더 크다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셋째, 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야 하겠습니다
세례요한 이후로 인류는 항상 역사의 종말을 살아 왔습니다. 우리는 지금도 죄악의 가장자리에 서있습니다. 언제 도끼를 들어 나무를 내리칠지 모릅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엄존하고 시시각각 경고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우리 세계에 달라진게 무엇이 있습니까. 오늘 하루에도 서울 특별시에서만 태어나는 인구가 4백 64명입니다. 1백 4명이 죽고, 2백 20쌍이 결혼하고, 27쌍이 이혼을 합니다. 9천 7백 85명이 이사를 하고 8백 47건의 각종 범죄로 시달리고 있습니다. 해는 여전히 동쪽에서 뜨고 겨울가면 봄이 옵니다. 자연질서에 조금도 변화가 없습니다. 30년 전만해도 겨울이면 이와 벼룩에게 시달리고 여름이면 빈데와 모기에 시달렸습니다. 저희 옆집에 괴상한 청년이 살았는데 그는 샘표 간장이 아니면 밥을 먹지 않았습니다. 간장을 먹는 피 덕분인지 그가 하룻밤 자고 일어서면 그 밑에 빈데가 수두룩하게 죽어 있곤 합니다. 그래서 집집마다 그 청년에게 간장을 먹이고 자기 집에서 하룻밤 자게하는 것이 큰 소원이었습니다. 지금도 샘표간장은 여전히 잘 팔리고 있는데 이와 빈데는 찾아볼 수 없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문명의 이기는 나날이 발전하여 더욱 살기좋은 세상을 만들어 줍니다. 인간이 만든 문명이 어쩌면 이것이 낙원이 아닌가 싶도록 우리 눈을 휘둥그러지게 합니다. 물질문명은 눈부시게 발전하지만 우리 영적인 정황은 어떠합니까. 정신세계는 더욱 황폐해 지고 하나님이 만드신 아름다운 세계가 오염물질로 가득차 가고 있습니다. 내 뼈가 자라고 내 뼈를 자랑스럽게 묻어야 할 이 땅은 점점 쓰레기장이 되고 사람들은 알 수 없는 각종 질병으로 더욱 시달리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잘 먹고 잘 살고 더욱 오래 살기를 소원합니다. 그 방법들이 기발해져서 외제 고급 침대를 들여놓고 고급 싸우나탕에서 놀아납니다. 밤이면 으리번쩍한 불빛 아래에서 살덩이를 맞대고 한가했던 전원에는 고급 호텔과 고급 음식점이 줄비해져 갑니다. 곰의 옆구리를 트고 쓸개즙을 빨아먹는 것도 부족해서 돈보따리 싸들고 해외로 나가 기생관광을 즐기고 곰발바닥 뱀대가리 원숭이 두개골을 파먹는 짐승들이 되어갑니다. 그 이면에는 늙은이와 어린애를 생매장하는 비정이 판치고 일제의 정신대를 방불케 하는 인신매매가 젊은 여인들 사이에서 독버섯처럼 자라고 있습니다. 마음 놓고 나들이를 할 수 없는 불안이 엄습합니다. 한마디로 잘 포장된 문명생활 속에서 썩은내 나는 영혼을 들여다 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화려하게 무덤을 회칠하려는 것은 그 속에 썩는 냄새가 진동하기 때문입니다. 속이 썩은 것일수록 더욱 포장을 곱게하려는 것은 인지상정입니다. 어차피 우리 육신이 썩어져야 하는 무덤이라면 자꾸만 회칠할 것이 아니라 그 내용을 바꾸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회개입니다. 고쳐도 고쳐도 더 이상 고칠 수 없는 것은 결국 폐기처분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바라보시는 인생도 이와 같습니다. 하나님은 그 아들을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순종하는 아들을 통하여 인류의 모든 죄짐을 그 몸에 지우셨습니다. 예수님은 그 몸을 산 제물로 드려서 인류의 모든 죄의 문제를 해결해 주셨습니다. 누구든지 주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면 하나님은 구원의 복과 영생의 복을 주십니다. 세례요한은 이것을 미리 보고 회개를 선포했지만 우리는 그 주님의 십자가 아래에서 회개할 은총을 입은 것입니다. 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여 있습니다. 지금 회개 하십시다. 나는 이미 구원 얻은 사람이다 하는 자만에 빠지지 말고 구원 받은 자신이 그 말씀대로 순종하고 있는지 돌아보아 회개하고 아직도 우리 주위에 구원 받지 못한 뭇 영혼들을 향하여 회개를 선포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1992. 1. 26. - 설 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