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가(Micah)의 외침

G. Campbell Morgan 저 / 김현진역

- 하나님의 요구 -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는 것이 오직 공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미6:8,참조.미6:1-7)

선지자 미가는 이사야와 동시대 사람이다.그가 전한 세가지 말씀은 권위에 관한 것이었다. 주로 그는 민족적 삶의 중심지로서, 권위를 가진 자들이 거주하던 성읍들을 대상으로 말씀을 선포하였다. 그는 백성을 잘못 이끄는 불의한 통치자들을 수없이 비판하였다. 또 그는 구약에 있어 가장 훌륭한 필치로써 단 한사람의 참된 통치자가 오실 것을 예언하였다. 물론 그의 말씀은 민족에 관한 것이 우선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 말씀 속에서 개인에 관한 것도 찾아낼 수 있다. 6:8의 말씀은 앞 두 절의 물음에 대한 답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는 영적, 도덕적 고통 속에 처해 있는 사람,즉 예언의 교훈을 들음으로써 죄를 깨닫고 개인적 책무를 깨우친 사람의 질문이었다.

내가 무엇을 가지고 여호와 앞에 나아가며 높으신 하나님께 경배할까(6:6).

그림설명 : 메마른 산들과 무성한 초목은 선지자들에게 영적인 황폐와 회복의 비유적인 표현들을 제공하여 주었다.

질문자는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길을 제시하고 있다.

내가 번제물 일 년 된 송아지를 가지고 그 앞에 나아갈까 여호와께서 천천의 수양이나 만만의 강수 같은 기름을 기뻐하실까(6:7)

그때 그는 인간의 이교적인 우매함으로 자행되어 왔던 가장 끔찍한 행위를 마음 속에 떠올리며 절규하였다.

내 허물을 위하여 내 맏아들을, 내 영혼의 죄를 인하여 내 몸의 열매를 드릴까.

선지자 미가는 바로 이 외침에 답하고 있다. 우리가 이 대화를 조금만 더 거슬러 올라가 살피면, 우리는 이 질문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과 하신 쟁변에서 비롯하는 것임을 깨닫게 된다.

내 백성아 내가 무엇을 네게 행하였으며 무엇에 너를 괴롭게 하였느냐.너는 내게 증거하라. 내가 너를 애굽땅에서 인도하여 내어 종노릇하는 집에서 속량하였고 모세와 아론과 미리암을 보내어 네 앞에 행하게 하였느니라(6:3,4).

하나님은 그의 백성들에게 "네가 나를 괴롭게 한 것에 대해 내가 너에게 무엇을 행하였느냐?"고 말씀하셨다. 이는 아버지의 마음과 같은 애처로운 외침이다. 고통받는 영혼이 부르짖었던 호소에 대한 답변인 것이다. 또 이 영혼의 부르짖음에 대해 선지자는 바로 8절의 말씀으로 답하였다.

전 민족적인 사건들은 궁극적으로 개개인에게 영향을 미친다. 따라서 선지자는, 권위를 오용한 민족에게 그의 메시지를 선포하며, 진정한 권위자의 도래를 예언하고 있다. 또 그는 한편으로 이를 개인에 대한 말씀으로 외치고 있다. 우리는 이런 식으로 미가서를 이해하여야 한다.

이때 우리는 세 가지 사실에 주의하여야 한다. 첫째는 "여호와께서 네게 무엇을 구하시는가"라는 말씀 속에 있는 가정이다. 이는 분명히 하나님이 요구하고 계심을 가정하는 것이다. 둘째는 본문(6:8)을 시작하는 말씀, 즉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라는 말씀이다. 이는 하나님이 사람에게 자신의 요구를 분명히 알리셨음을 선포하는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인가를 밝히고 있는 본문 내용이다. 즉 선이 무어인가에 대한 해설이다. '공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따라서 예언의 말씀은 스스로 자연스럽게 간명하게 답을 구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을 순서대로 살펴보자.

먼저, 가정을 보자. 개개인에 대해 말씀하신다는 느낌이 매우 강하게 떠오른다. '사람아, "오직 너 사람아."이는 다른 모든 이들과 절단된 "너" 혼자만을 지칭하는 말이다. 이 질문은 하나님이 무엇을 구하시는가이다. 이를 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너의 하나님이 네게 무엇을 구하시는가"이다. 사실, 이와 같이 하나님이 개인 개인에게 물으신다는 것은 우리에게 무한한 힘과 위안이 된다. 하나님이 어느 한 사람에게 요구하신다면, 이 하나님은 바로 그 사람의 하나님이신 것이다.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정의에 대해 생각해 보자. 사람은 그가 살고 있는 도덕적 세게에 방치되어 있지는 않다. 우리는 반드시 하나님의 성경 말씀의 권위와 그 세계를 가정하여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을 단순히 추상적인 것으로나, 가능성으로만 생각한다면, 이 본문에서 우리는 아무런 의미도 찾을 수 없다. 이는 성경 전체에 해당되는 진리이다. 우리는 어린 시절부터 다음의 것들에 익숙해 왔다."하나님은 창조주이시다. 하나님은 왕이시다. 하나님은 아버지시다. 하나님은 구세주이시다."

하나님은 창조주이시다. 바로 여기에서 우리는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근본적인 정의를 발견할 수 있다. 만약에 우리가 무엇인가 창조하는 것이 가능하다면, 우리는 본능적으로 우리가 강조한 피조물에게 그 창조된 목적을 기대할 권리가 있다고 느낄 것이다. 물론 우리가 무엇을 창조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우리는 만들 수는 있다. 하지만 창조할 수는 없다.바울은 이를 구약에서 인용하여 분명한 어조로 표현하고 있다.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뇨(롬9:20).

하나님은 창조주 이상의 분이시다. 그는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그것을 방임하지 않으셨다. 또한 자신이 만드신 인간을 제멋대로 행동하도록 내버려 두지도 않으셨다. 하나님은 왕이시다. 따라서 그는 입법자이기도 하다. 그의 법은 그가 창조하신 피조물의 존재와 권위를 규정하는 것이다. 그가 요구하시는 것이 바로 그 법이다.

또 하나님은 창조주와 입법자 이상의 존재로 나타나신다. 그는 아버지이시다. 이는 하나님이 스스로 지으신 피조물을 돌보시고 주의깊게 살피시며 섭리하신다는 뜻을 함축하고 있다. 그의 법은 언제나 사랑의 표현이며, 그의 부성애는 그의 지속적인 보살핌 속에 나타난다.

이상의 것들이 하나님을 완전히 표현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는 조물주 이상이시고 왕 이상이시며 또 아버지 이상이신 분이다. 그는 구세주이시다. 모든 것이 변하여도 변치 않는 것이 그의 사랑이며, 결코 실패하지 않는 사랑이 그의 사랑이다. 그는 긍휼히 없는 곳에 긍휼을 베푸시고 구원의 손길이 없는 곳에 구원을 베푸신다.

이 모두는 하나님이 요구할 권리가 있는 분이심을 입증하는 것들이다. 하나님의 창조는 의도적이며, 신중한 것이다. 결국 하나님의 피조물이 아닌 인생은 하나도 없다. 우리는 출산의 놀라움에 대해 안다. 그러나 이는 오직 인생의 육신적인 면에 불과하다. 이것 역시 놀랍고 경외로운 능력인 것은 틀림없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이 생명의 탄생속에 하나님의 행동이 개입하고 있음을 깨닫는 것이다. 인간적인 조건에 비추어 아이가 잘 태어났는지 아닌지를 깨닫는 것이 중요한 것은 아니다. 우리에게는 육신의 아버지가 있으며 또 그에게도 자신의 아버지가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영의 아버지이시다. 모든 인간에게는 선조로부터 물려 받은 것 이상의 잠재력과 가능성이 있다. 오늘날의 인간에게 있어 놀라운 사실은 그 분별력이 계속 퇴화되어 왔다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자기 부인의 필요성에 관해 말씀하신 것은 자아가 부정되어야만 비로소 자아가 건전해짐을 선포하신 것이다. 부인되어야 할 것은 거짓 자아이다. 거듭난다는 것은 하나님의 원래 의도를 실현할 수 있도록 개성이 되게 다시 태어난다는 것이다.

도덕적 세계에 관해 생각해 보자. 부도덕의 거대한 물결이 인류를 집어 삼킬듯 휘몰아친다. 그러나 종국에 가서는 하나님의 창조 의도와 왕적 권위하에 도덕은 여전히 남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이다. 우리는 지금 어떤 의미에서 본문의 놀라운 선포를 접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도래를 바라는 영혼의 애절한 부르짖음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답변이 주어졌다.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6:8).

우리는 이 말씀의 첫째 대상이 히브리인이라는 것, 그리고 선지자는 이를 그들의 율법으로부터 인용하였다는 것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신명기에서 다음의 말씀을 읽을 수있다.

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이냐 곧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 모든 도를 행하고 그를 사랑하며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고(10:12).

이는 백성들을 위한 율법에 쓰여져 있는 것이었다. 따라서 선지자는 질문자 개개인에게 "주께서 네게 보이셨느니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우리는 말씀이 보다 강력한 의미를 갖는 시대에 살고 있다. 선한 것은 단순히 기록된 법에 의해서만 드러나는 것이 아니다. 이는 성육신을 통해서도 드러난다. 예수는 나타나셨고, 선포되셨으며 알려지셨다. 그를 통해 하나님은 우리에게 선한 것을 보이신다. 심지어는 예수의 인성에 관해서도 다양한 의견들이 있을 수 있지만, 그의 선하심은 보편적으로 알려져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를 통해 선한 것을 보아 왔다.

다시 한번, 이 두가지 적용, 즉 첫째, 율법을 통해서 히브리 백성에 대해 하신 말씀과 둘째, 성육신을 통해서 온 세상을 향해 하신 말씀을 돌이켜 생각해 보자. 그리하면 우리는 고대 율법을 모르는 사람들, 또 심지어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조차 들어본 적이 없는 사람이 있음을 깨닫게 된다. 본문의 말씀은 이런 이들에게도 적용될 수 있는 것인가? 우리는 요한복음 서두에 나오는 말씀을 떠올린다. 요한은 모든 사람을 비추는 빛에 대해 언급하였다. 그 빛은 역사적인 성육신을 일컫는 것이다. 빛은 율법이나 복음이 선포된 적이 없는 곳까지도 비추인다. 인간의 속성 가운데는 잠언 기자가 "사람의 영혼은 여호와의 등불"이라고 묘사한 빛이 있다. 그 말씀이 하나님의 영에 관한 것이 아니라 사람의 영에 관한 것임에 주의하자. 따라서 인간의 신비스러운 성품 가운데는 선에 대한 보편적인 의식이 들어 있는 것이다.

이제 "선하다"는 단어의 의미를 생각해 보자. 영어에 있어 이 단어는 많은 뜻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성경 원전의 히브리어 단어 역시 마찬가지이다. 이는 병듦의 반대인 건강하다는 뜻이며, 추함의 반대인 아름답다는 뜻이고, 또 그른 것의 반대인 옮음이라는 뜻이다. 이를 구별할 줄 모르는 사람은 없다. 병 들엇음을 인정하는 것은 건강이 무엇인지 아는 것이다. 추함을 아는 것은 또 아름다움도 아는 것이다. 그른 것을 안다는 것은 옳을 가능성이 있음에 동의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다소라도 그러한 빛을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은 없다. 따라서 모든 사람은 자신의 빛의 분량 만큼은,즉 그 이상은 아니더라도 그 분량 만큼은 책임을 져야 한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본문을 통해 선한 것이 무엇인지에 관해 깨닫게 된다. 여호와는 번제물을 요구하시지 않는다. 일년된 송아지, 천천의 수양, 만만의 강수같은 기름을 번제물로 요구하시지 않는다. 또 영혼의 죄를 인하여 몸의 열매를 요구하시지도 않는다. 이러한 것들 중 어떠한 것도 우리가 하나님께 접근하는 수단인 희생으로써의 가치를 갖지 못한다. 선은 "오직 공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시는 것"이라는 말씀 속에 드러난다. 이는 선한 사람의 삶에 대한 놀라운 분석이다. 이것은 세 가지로 구분된다. 공의를 행하는 것,인자를 사랑하는 것, 겸손히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먼저 인간과의 관계, 즉 공의를 행하는 것과 인자를 사랑하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그 다음은 인생에 있어 하나님과의 관계이다. 즉 겸손히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다.

이것들 중에서 최고의 것은 분명히 마지막 것인 겸손히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다. 이것이 되면 앞의 두가지, 즉 인간과의 관계인 공의를 행하는 것과 인자를 사랑하는 것은 자동적으로 된다. 다시 말해서 인간 관계는 역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이 말씀은 역으로 읽으면 이해가 쉽다. "하나님과 함께 행하라. 그리고 인자를 사랑하라. 그러면 공의를 행하게 되리라."이것은 선에 대한 완전하고 궁극적인 묘사이다.

하지만 이를 본문에 기록된 순서대로 살펴보자.선이란 먼저 공의를 행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공의를 행하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는, 그 말이 궁극적으로 정의를 의미하는 히브리어인 '미쉬파트'에서 유래된 것임을 상기해야 한다. 정의는 무엇보다도 의로운 기준을 첫째로 요구한다. 또 둘째로 참된 판단을 요구한다. 세번째로는 옳은 결정으리 요구하고,마지막으로는 이러한 것들의 조화로운 조합을 요구한다. 인간과의 관계에 있어 공의를 행하기 위해서는 참된 기준과 의로운 법이 필요하다. 우리는 이웃에 대한 판단이 참된 것이 되도록 주의하여야 한다. 우리는 각 사람에 대한 판단이 공의로운 것이 되도록 주의하여야 한다. 그리고 우리가 행위가 하나님의 성품 속에 나타나는 위대하고 영원한 원리와 조화되도록 주의하여야 한다. 이 요구는 결코 힘든 것이 아니다. 그것은 순수하고 거룩한 것이다. 그것은 윤리적 삶의 표준을 밝히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나는, 이 세상에서 무엇보다도 필요한 것은 공의로운 행위라고 말하고 싶다.

그러면 말씀의 두번째 요구, "인자를 사랑하며"에 대해 생각해 보자. 인자함이란 단어에는 "겸손히 머리숙인다." "허리를 굽힌다." "봉사한다"라는 뜻이 함축되어 있다. 이 모두는 사랑에 의해 창출되는 행동들이다.

우리는 여기에서 단순하나 중대한 문제를 주의깊게 살펴야 한다. 본문에는 우리가 공의를 사랑하고 인자를 행해야 한다고 기록되어 있지는 않다.사람은 관념적으로 정의를 사랑한다 하면서,실제로는 이웃에게 불의를 행하곤 한다. 그러므로 관념적으로 정의를 사랑하는 것은 충분치 않다. 우리는 이를 행하여야 한다. 인자를 행하는 것은 더욱더 충분치 않다. 삶의 깊은 고서으로부터 나오지 않으면서도 자선이라고 불리우는 행위는 있을 수 있다. 인자함이란 우리가 반드시 사랑하여야만 하는 것이다. 이는 영혼이 하나님의 자비와 화합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 위대한 말씀의 도전에 직면케 되면, "누가 이 모든 것에 충분할 수 있겠는가"라고 외칠 수 밖에 없다. 이러한 결핍의식, 즉 자기가 부족함을 절실히 느끼는 의식 때문에 "내가 무엇을 가지고 여호와 앞에 나아갈 것인가"하고 질문자는 외쳤다. 이에 대한 대답은 바로 마지막 세번째 것, 즉 겸손히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분이시다. 따라서 우리가 복종과 신의로 하나님과 함께 행하면, 우리 역시 인자를 사랑하고 공의를 행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 미가의 말씀이 바로 복음은 아니라는 것을 기억하자. 이는 오히려 율법에 가까운 것이다. 우리 주님께서 "나는 곧 빛이다"라고 말씀하셨을 때 이 빛은 오직 정죄할 수만 있는 것임을 깨달아야 한다.

하지만, 이 미가의 말씀에는 복음에 대한 넘치는 갈망이 드러나 있다. 복음은 예수께서 빛 훨씬 이상의 분이심을 선포하고 있다. 그는 생명이며, 생명을 주시는 자이시다. 구약의 히브리 선지자들이 우리에게 우리의 실패만 깨우쳐 주었다면, 예수의 복음은 그 회복과 자아의 완전한 실현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것이다. 예수는 우리를 받아 들이신다. 또 그는 우리를 새롭게 하신다. 따라서 그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것을 할 수 있게 하시는 분이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