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훔(Nhum)의 외침

G. Campbell Morgan 저 / 김현진역

- 하나님의 보복 -

"여호와는 투기하시며 보복하시는 하나님이시니라 여호와는 보복하시며 진노하시되 자기를 거스리는 자에게 보복하시며 자기를 대적하는 자에게 진노를 품으시며" (나1:2,참조,나1:1-15)

한 세대 전의 위대한 설교가이며 신학자였던 로버트 윌리엄 데일(Robert Willian Dale) 은 어느날 필자에게 말했다. "나는 지옥에 관해 말할 자격이 있는 사람을 알고 있다. 그 사람은 무디(D.L.Moody)이다." 데일은 그 이유를 이렇게 말하였다. "내가 그렇게 느끼는 이유는 무디가 지옥에 대해 두려워하지 않고 말하는 것을 결코 들어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거의 공포에 가까운 두려움없이 이 나훔의 선지서를 읽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나의 문장이라기보다는 오히려 하나의 서술 句에 불과한 첫 문장에서 우리는 본서의 주제를 읽을 수 있다. "니느웨에 대한 중한 경고." 이를 보다 정확히 이야기하면 '니느웨에 대한 신탁'이다.

나훔서는 요나서의 후편이라 할 수 있다. 이 책은 요나서와 한 백년 정도 차이가 난다. 나훔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니느웨에 대한 신탁에 대해 말하려고 온 선지자였다. 나훔이 이 책을 기록하였을 때, 이는 하나의 예언이었다.하나님의 뜻과 행동에 의해 거대한 성읍과 위대한 사람들이 완전히 소멸되리라는 예언이었다. 그런데 이 책을 읽는 우리는 역사가 된 사건에 대해 읽고 있는 것이다. 그가 예언으로 말하였던 모든 것이 그대로 되어졌다. 위로를 의미하는 선지자의 이름 나훔은 상당히 암시적이다. 분명히 그의 말씀의 목적은 이스라엘에게 위로를 베풀기 위함이었다.그 당시 이스라엘 민족은 앗수르 즉 니느웨의 위협을 받고 있었다. 나훔은 니느웨를 향한 하나님의 태도가 무엇인지를 밝혔다. 또 그 성읍과 백성을 말살시킬 하나님의 행위를 예언하였다.

이 예언은 완전하게 성취되었다. 실제 군사들이 니느웨 도성으로 쳐들어와 성읍 전체를 황폐케 하였다. 나훔이 선포한 말씀은 매우 자세하고 명쾌하였다. 또 그 주장은 논리적이었으며 뚜렷하였다.

서두에 그는 이것을 묵시라고 기록하고 있다. "엘고스사람 나훔의 묵시 글이라." 이는 처음부터 끝까지 여호와의 묵시이다. 처음에는 진노하신 하나님의 묵시이고, 다음은 보복하시는 하나님의 묵시이다. 따라서 우리는 말씀의 순서에 따라 장을 나눌 수 있다. 1장은 보복의 결정이고,2장은 보복의 내용이다. 그리고 3장은 보복의 이유이다.

본서의 최고 가치는 바로 여기에 있다. 본문에는 하나님의 진노에 대한 자세한 설명이 나타나 있다. 이는 진조하심이 있다는 것과 그 진노의 이유를 밝히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 형태까지도 기록하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이를 읽음으로 하나님의 자비와 애정을 대하게 되었다고 고백하여야 한다. 하나님의 진노와 징벌에 있어서도, 하나님의 성품에 관한 심오한 진리는 결코 가리워지지 않는다.

본서는 성경전체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계시와 일치이며 본서 자체만으로도 그 계시를 완전히 드러내고 있다. 모든 선지자들은 어떤 형태로든 하나님의 진노를 목격하였다. 하지만 그들은 또 그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도 목격하였다. 우리가 이 모든 말씀을 주의깊게 읽으면, 특히 본 나훔서를 주의깊게 읽으면,하나님이 진노하시는 이유가 결국 그의 사랑에 있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다른 모든 것을 제쳐 놓고,오직 주님에 대해서만 생각해 보자. 많은 사람들이 아이들의 찬송가 가사 식으로만 주님을 생각한다.

온순하고 온화하며 유순하신 에수.

이것은 주님에 대한 옳은 표현이긴 하지만 진리의 전부는 아니다. 구약의 어떤 선지자도 예수께서 하신 것 만큼 깜짝 놀랄 만한 말을 하지는 못했다. 예를들면, 예수께서는 우리가 위의 찬송가를 가르쳐 주는 아이들에 관해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소자 중 하나를 실족케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을 그 목에 달리우고 깊은 바다에 빠뜨리우는 것이 나으니라."그는 분명히 "온순하고 온화하며 유순하신 예수"였다. 그는 아이들을 사랑하셨다. 그는 이처럼 아이들을 사랑하셨기 때문에 어린 아이를 실족케 하는 것보다는 연자 맷돌을 메고 깊은 바다에 빠지는 편이 낫다고 선포하셨다. 또한 그는 한 성읍을 바라보며 눈물을 흘리시기도 하신 분이셨다. 그러나 그 눈물이 채 마르기도 전에,그는 그 성읍의 운명을 천명하셨다.

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린 바 되리라(마23:38)

우리가 본문의 8절까지를 읽으면,나훔이 본 하나님에 대한 진리를 밝히고 있는 뛰어난 말씀의 조합을 대하게 된다. 각 선지자들은 하나님에 대해 약간씩 다른 모습을 제시하고 있다. 따라서 우리가 이를 잘 조합한다면, 어느 정도 하나님에 대한 완전한 진리에 접근할 수 있다. 이사야는 보좌에 오르신 하나님을 보았다. 하늘이 그의 보좌이며, 땅이 그의 발등상인 하나님을 보았다. 에스겔은 구르는 바퀴와 살아 있는 생물들 속에서 하나님을 보았다. 예레미야는 진노의 하나님을 보았다. 그러나, 그는 다음과 같은 말로 하나님의 마음을 밝히고 있다. "어찌하면 내 머리는 물이 되고 내 눈은 눈물 근원이 될꼬 그렇게 되면 살륙당한 딸 내 백성을 위하여 주야로 곡읍하리로다"(렘 9:1). 나훔이 본 하나님의 모습은 본서 서두에 나타나 있다. 이것들을 모아 보자."투기"(jealous),"보복"(avengeth),"진노"(wrath),"노"(anger),"분노"(indignation),"진노"(fierceness),"진노"(fury).

"노함"(anger)에 대하여 히브리어 성경에서 발견할 수 있는 모든 용오가 본서의 서언에 나타난다는 것은 우리의 시선을 끌게 한다. 이 용어들을 잠시 살펴보자. "투기"(jralousy)의 원뜻은 격렬한 감정적 혼돈이다. 이는 전적으로 주관적인 것이다. 질투는 언제나 진노의 결과이다. 이 진노는 사랑이 잘못됨에서 오는 것이다. 배신에 대한 감정적인 반감이 바로 이 투기이다.

이 용어에 바로 이어 나오는 것이 "보복"(avengeth)이다. 이것은 단순히 감정적인 것이 아니다. 이는 의지적인 것이며, 활동적인 것이다. 히자만 이 보복은 천벌이지,앙갚음이 아니다. 천벌과 앙갚음은 같은 것이 아니다. 인간의 노함은 거의 언제나 앙갚음으로 표현된다. 하지만 하나님은 결코 그렇지 않으시다. 하나님의 노함은 천벌이다.

"진노"(wrath)는 히브리어로 단순히 한쪽 편으로부터 다른 편으로 건너감을 의미하는 용어를 번역한 것이다. 하나님의 진노는 그의 태도와 활동의 변화를 말하는 것이다. 우리는 심판이 하나님에게 있어서는 "기이하신 행동"임을 기억하여야 한다. 즉, 이는 하나님의 마음, 그의 소망, 그의 목적, 그리고 그의 의도와는 동떨어진 것이다. 따라서 이 진노에서는 불가피한 원인이 있다. 다음에 우리는 거의 같은 의미의 "노"(anger)와 "분노"(indignation)을 대하게 된다. 이 둘은 각각 활동을 나타내는 것으로 진노의 표현을 가리킨다.

그 뒤에 나오는 "진노"(fierceness)는 타오르는 것을 의미하며 또 다른 "진노"(fury)는 뜨거움을 의미한다.

이 모든 것을 분명히 기계적이며 인위적인 구분이기도 하다. 그러나 우리는 이를 통해 하나님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즉 선지자가 시종 사용한 용어인 여호와의 모습을 볼 수 있다. 하나님은 이 이름을 통해 인간에게 나타나신다. 진노를 발하고 노하시는 이는 바로 이 하나님이시다. 이를 좀 더 자세히 살펴보자. 우리는 2절에서 세 가지 모습을 본다. 이는 또 6절에서 8절까지 세 가지로 설명되어지고 있다.

여호와는 투기하시며 보복하시는 하나님이시니라(1:2).

이는 활동적인 격정을 표현하고 있다.

여호와는 보복하시며 진노하시되.

이는 같은 것의 다른 면이다. 즉, 이것은 격정에서 나오는 행동을 언급하는 것이다. 그러면 마지막 말씀은 무엇인가.

자기를 거스리는 자에게 보복하시며 자기를 다스리는 자에게 진노를 품으며,

이 세가지 언명으로부터 우리는 하나님의 진노가 격정의 결과라는 사실, 그리고 이것은 언제나 특이하게 나타난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 수 있다.

선지자는 우리에게 설명하고 있다. 그는 선포로써 그 설명을 시작한다.

여호와는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권능이 크시며 죄인을 결코 멸하지 아니하시느니라(1:3)

그는 가장 강력한 성격의 상징적인 언어를 사용하고 있다. "여호와의 길은 회리바람과 광품에 있고." 하나님의 응답은 저항할 수 없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다음의 말씀을 주의깊게 살펴보자.

여호와는 선하시며 환난 날에 산성이시라 그는 자기에게 의존하는 자들을 아시느니라 그가 범람한 물로 그곳을 진멸하시고(1:7)

이는 니느웨에 관한 말씀이다.
그러면 우리는 여기에서 무엇을 볼 수 있는가? 첫째, 하나님의 진노는 행동으로 진전하는 사랑에서 나온 격정이다. 우리가 본 선지서를 계속해서 읽으면, 니느웨가 어떤 도성이며, 니느웨가 무엇을 하였는가를 알 수 있다. 니느웨는 주변의 모든 백성들로부터 원성을 듣고 있었다. 이는 니느웨가 전제적 압정을 행하였기 때문이다.니느웨는 건방진 오만함으로 모든 종류의 잔혹한 행위를 하였다. 여호와는 갇힌 자의 외침을 들으셨다. 니느웨에게 억눌린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이 니느웨를 향한 노를 발하게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호와는 노하기를 더디하시는데, 니느웨가 바로 그 증거였다. 백년 전에 선지자 요나는 마지 못해 하면서 니느웨에 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였었다. 그때 니느웨는 회개하였었고, 하나님은 기다리셨다. 그 사이에 니느웨는 다시 자신의 회개를 돌이키는 가증스런 죄악을 범하였으며 잔악한 행위를 계속하였다. 이 때문에 하나님의 진노가 니느웨에 임하게 되었다. 선지자는 이어 하나님의 진노에 관한 환상을 보여 준다. 여호와께서 노하신 이유는 다음과 같다.

여호와께 악을 꾀하는 한 사람이 너희 중에서 나와서 사특한 것을 권하는도다(1:11).

이는 역사적 언명이다. 그가 행한 행위는 이사야서에 나타나 있다. 이것은 산헤립을 중심으로 한 니느웨의 죄, 즉 하나님을 향한 니느웨의 죄였다.
그 결과는 그 성읍에 명백히 임하였다. 3장을 읽어보자.

화 있을진저 피 성이여 그 속에서는 궤휼과 강포가 가득하며 늑탈이 떠나지 아니하는도다. 휙휙하는 채찍소리. 굉굉하는 병거 바퀴 소리, 뛰는 말, 달리는 병거, 충돌하는 기병, 번쩍이는 칼, 번개같은 창, 살륙당한 떼, 큰 무더기 주검, 무수한 시체여, 사람이 그 시체에 걸려 넘어지니, 이는 마술의 주인된 아리따운 기생이 음행을 많이 함을 인함이라. 그가 그 음행으로 열국을 미혹하고 그 마술로 여러 족속을 미혹하느니라(3:1-4).
바로 이것 때문에 여호와는 "내가 네 대적이 되어서"라고 말씀하셨다. 여호와는 노하셨다. 이는 통치자가 하나님의 뜻에 거스려 자고하였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거역하면 그 결과로 백성들을 가혹히 다루게 된다. 따라서 하나님을 거역하는 통치자는 압제자가 되며 잔혹해지는 것이다. 그들이 있는 곳에는 어디나 비참함과 황폐함이 따른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진노를 통해 어떤 이들은 은혜를 입기도 한다. 바로 억압당하던 자들, 짓밟히던 이들,억울함을 당하던 이들이다. 하나님의 진노가 오래 참음 후에 이 성읍을 향해 발하여졌음을 다시 한 번 기억하자. 이때는 이미 희망이 사라져 버린 때이다.

너의 다친 것을 고칠 수 없고 네 상처는 중하도다(3:19).

불의의 잔이 이미 넘쳐 흐르기 때문에, 니느웨가 넘어져도 이를 위로할 자는 아무도 없다. 모든 나라가 하나님의 진노하심이 정당한 것임에 동의한다.
그러므로 일단 하나님의 진노를 발하시면,이는 완벽한 파멸을 의미하는 것이다. 선지자가 기록한 니느웨에 대한 시적 기술이 실제 역사 과정을 통해 실현되었음을 다시 한번 기억하자. 우리는 이 성경적 예언 말고도 역사적 설명을 잘 알고 있다. 데오도루스 세쿨루스(Deodorous Seculus)는 강물이 대적할 때가 되어야 니느웨가 멸망하리라고 예언하였었다. 때가 되매 강이 범람하여 둑을 무너뜨리려 20스타디아(stadia)의 제방을 쓸어가 버렸다. 광포한 강물의 범람에 의해 니느웨는 멸망하였다.역사가들은 이를 단순히 불운에 의한 강의 범람 정도로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것이 하나님의 행위임을 안다. 그는 강을 사용하셨던 것이다.

그러면 이 말씀은 하나님에 관해 무엇을 우리에게 말하고 있는 것인가. 첫째는 하나님의 사랑을 믿는 것은 곧 그의 진노에 대해서도 아는 것이라는 점이다. 사랑은 어떤 상황에서는 진노일 수 있다. 사랑은 진노이다. 오늘날 비참함과 유혈, 그리고 잔인함과 잔혹, 이런 상황 속에서 우리가 침묵하며 고분 고분히 비위나 맞추고 있다는 것은 말도 되지 않는 일이다. 우리가 비위나 맞추고 있다면, 하나님이 노하시리라는 것을 빨리 깨달아야 한다. 인간성이 짓눌리고 훼손된 곳에는 언제 어디든지 하나님의 진노가 분연히 임한다. 우리는 이를 주님의 말씀과 연관시켜 생각해 볼 수 있다.

실족케 하는 일들이 있음을 인하여 세상에 화가 있도다 실족케 하는 일이 없을 수는 없으나 실족케 하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도다(마18:7).

나훔서는 놀라울 정도로 명쾌하게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는 죄악에 대해 밝히고 있다.첫째는 교만의 죄이다. 이는 자만한 마음을 갖는 것이다. 이 교만은 하나님을 무시하거나, 전혀 생각지 않는 데서 비롯한다. 하나님은 교만에 대해 언제나 노를 발하신다.이는 교만이 낳는 결과 때문이다.

또 하나님의 진노는 언제나 어떤 형태든 잔혹함이 있는 곳에 나타난다. 오래 참으심에도 불구하고,여전히 회개치 않으면,하나님의 진노는 가중된다.

자주 책망을 받으면서도 목이 곧은 사람은 갑자기 패망을 당하고 피하지못하리라(잠29:1).

이 모든 것을 염두에 두고 선지자의 분명한 선포로 돌아가 보자.

여호와는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여호와는 선하시며 환난 날에 산성이시라.그는 자기에게 의로하는 자들을 아시느니라(1:7)

하나님의 진노하심은 언제나 그에게 어울리지 않는 행위이다.그러나 이는 그의 의로움과 그의 사랑을 위해서 필요한 것이다. 이러한 사실에 비추어 우리는 다시 한번 시편 기자의 말씀을 듣는다.

그 아들에게 입맞추라. 그렇지 아니하면 진노하심으로 너희가 길에서 망하리니(시2: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