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바댜(Obadiah)의 외침

G. Campbell Morgan 저 / 김현진역

- 나라가 여호와께 속하리라 -

"구원자들이 시온산에 올라와서 에서의 산을 심판하리니 나라가 여호와께 속하리라"(옵1:21)

오바댜의 예언은 분명히 구약 성경에 있어 특이한 것이다. 그 예언 속에는 우리를 위한, 또 우리 시대를 위한 메시지가 전혀 없다고 생각되기 쉬우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사도르(Isadore)는 성경의 비유에 관한 그의 저서에서 다음과 같이 이 선지서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모든 선지자들 중에서 그는 가장 짧은 말씀을 전한 사람이다. 그러나 그의 신비에 관한 은총은 다른 선지자들과 다름이 없다.

본서는 하나의 메시지로 엮어져 있다. 선지자가 누구인가와 그 시대적 환경은 별로 중요한 것이 아니다. 오바댜가 누구인가에 대해 명확히 말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우리는 성령의 다른 곳에서도 오바댜란 이름을 볼 수 있다. 그러나 그가 어떤 인물인지는 확인할 수 없으며 또한 그의 예언의 시기도 정확히 알 수 없다.그러므로 우리는 별로 중요치 않은 이 일에 집착할 것이 아니라, 그 말씀 자체에 주의를 기울여야 할 것이다.

본 선지서의 특성은 이곳에 야곱과 에서의 반목이 다른 어떤 선지서에서보다도 명확하게 드러나 있다는 것이다. 처음 8절까지를 보면, 오바댜가 말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 것의 많은 부분이 예레미야서에도 나타남을 알 수 있다. 이는 오바댜가 예레미야의 예언에 정통하였거나, 예레미야가 오바댜의 예언에 정통하였거나 둘 중의 하나를 의미하는 것이다.

이 야곱과 에서의 반목은 성경을 통해 명확히 역사적 사건으로 기록되어 있고, 지속적으로 암시되고 있는 명백한 것이다. 우리는 창세기에서 "아이들이 그 태 속에서 서로 싸우는지라"는 말씀을 읽을 수 있다. 그러므로 이는 리브가에게 있어 하나의 사전 경고였다. 이는 대단히 중요한 것이었고, 그녀를 두려움에 떨게 만든 것이었다. 우리 모두에게 익숙한 "나는 야곱을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한다"는 말씀은 많은 사려깊은 사람들을 어리둥절케 해왔다. 그러나 하나님은 야곱을 자신이 사랑하시게끔 만든 것도 아니고, 예서 자신이 미워하시게끔 만드시지도 않았다는 것이 정당한 말이다. 그들은 하나님이 그들 각각을 사랑하시거나 미워하였기에 그와 같은 사람들이 된 것은 아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미움을 초래한 것은 오히려 그들 자신의 행동과 성품이었다. 지속적으로 구약에 나타났던 이 반목은 신약에 다시 나타난다. 이는 결국 예수와 헤롯이라는 두 뛰어난 인물을 통해 매우 놀라운 방법으로 드러난다. 우리는 헤롯이 에돔인이었다는 것과 예수께서는 혈통에 따라 야곱의 후손이었다는 것을 기억하여야 한다. 예수께서 결단코 헤롯에게 말씀하신 적이 없다는 점은 매우 시선을 끄는 섬뜩한 사실이다. 예수께서 자신의 권위를 드러내시기 위해 그에게 신랄한 메시지를 보내신 적은 있다. 또한 그를 심하게 경멸함으로 자신의 반감을 드러내신 적도 있다.

이 오바댜서의 배경에는 야곱이 있다. 그는 고통당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즉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의해 고통을 당하는 것으로 나타나는 반면, 이 오바댜서의 前景에서는 에서가 야곱의 고통을 조롱하고, 그의 환난을 더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또 하나님은 야곱과 에서 둘 다에 관여하시는 것으로 나타난다.

이 에돔에 대한 게시가 갖고 있는 가장 큰 가치는 실질적인 불경건에 대해 계시했다는 점이다. 우리는 야곱과 에서의 시대와는 멀리 떨어져 있다. 하지만 야곱과 에서에게 나타났던 원리는 지금도 여전하며, 그것이 인류 역사 속에 분명히 드러났듯이 오늘날에도 분명히 드러난다. 삶의 두가지 유형과 개념, 그리고 방법은 여전히 이 세상에 존재한다.

이 선지서에서 우리는 무엇보다도 에서라는 인물의 적나라한 모습과 에돔의 의미에 대해 깨닫게 된다. 선지자는 그것을 그들 개인들에게서가 아닌 그들의 후손들로 이루어진 족속들에게서 그 당시 입증되었던 것으로 다루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가 여기 에서와 에돔에 대한 계시에서 깨달은 것은 무엇인가?그것은 바로 잔인과 폭력의 가공할 모습이다. 여기에서 에돔은 자만의 높은 곳으로부터, 하나님의 진노하심을 겪고 있는 이스라엘 민족의 고통을 내려다 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에돔은 구경만 하다가 급기야는 국경을 넘어 야곱의 고통을 더한다고 폭로되고 있다.

하지만, 이것이 에돔의 죄악의 전부는 아니다. 드러나야 할 뿌리깊은 악은 무엇인가? 우리가 이를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것이라고 말하려면, 우리는 이 불신앙에 앞선 것, 이 불신앙을 유발시킨 것이 있음을 기억하여야 한다. 이는 '너의 중심의 교만이 너를 속였도다"란 말씀에서 드러난다. 마음의(중심의)교만은 하나님에 대한 무관심으로 나타났다. 에돔인은 하나님을 몰랐을 뿐만 아니라 어떠한 신도 몰랐다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다. 다른 족속들은자기들의 신을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그들은 우상 숭배자들이었다.그런데 에돔 족속은 전혀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어떤 형태로도 신을 섬기지 않았던 것 같다. '너의 중심의 교만이 너를 속였도다.' 즉 그들은 하나님이 필요함을 전혀 느끼지 못했다.

우리는 신약에서 에서와 그의 모든 후손, 그리고 그들이 행했던 것과 같은 생활 태도에 관한 무서운 말씀을 대하게 된다. '불경한 사람 에서'여기서 불경하다는 것은 부주의하고 경망스런 정도의 언동을 말하는 것이 아ㄴ. 이는 완전히 자의적으로 하나님을 거역하는것이다.불경스런 사람은 전혀 영에 대한 생각이 없는 사람이며, 그의 삶이 완전히 유물론적인 사람이다. "나에게는 하나님이 필요없다.""나는 하나님과 무관하다"라고 주장하는 사람은 중심이(마음이)교만한 자이다.

이런 생각이 우리에게 놀라운 것이 아니라면, 이는 우리 생각 속에 그러한 죄악이 있기 때문이며, 이러한 말을 들어도 무관히 여김은 모든 죄악이 이 근원적인 죄에서 비롯한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다. 마음이 교만한 자는 삶이 그 자체로 충분하며, 하나님과의 어떠한 관계도 필요없다고 말한다.

에돔의 이 교만은 에돔이 바위 성 높이 올라 "누가 능히 나를 땅에 끌어내리겠느냐"라고 말함에서 드러난다. 독수리 처럼 높이 올라 별 사이에 깃들임으로, 에돔은 자신을 신격화하려는 죄를 범하였다. 이 모든 것은 본 예언이 행해지던 당시의 상황이다. 에돔 족속은 우리가 지금 페트라(petra)라고 부르는 암벽 지대에 살고 있었다. 그들은 그들이 살고 있는 지역이 절대적으로 안전한 곳이라고 생각하였다.또한 실제로 그들은 오랜 기간을 그 요새에서 안전하게 지냈다. 그 결과 그들은 가장 도전적인 불신앙의 화신이 되었던 것이다. 그들은 자신을 신격화시켰으며, 자기 스스로 완전하다고 믿었다. 또 자기 방어를 위해 만든 요새가 모든 적들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에 충분하다고 믿었다.

사진설명 : 이전에는 에돔이었던 나바태의 도성 페트라의 바위 요새로 들어가는 좁은 통로.

자, 이 마음의 교만이 어떻게 나타나는지 보자. 이 교만에서 비롯한 죄는 폭력, 잔인 그리고 완악함의 죄였다. 이는 야곱의 성품으로 표현되는 것과는 완전히 반대되는 것이다. 처음에 이는 소극적인 잔인함으로 나타난다. 재앙의 날에 에돔 족속은 이를 방관만 하였고 패망의 날에는 이를 즐겼다. 고난의 날에 그들은 스스로 교만해져서, 입을 크게 벌려 떠들어대었다. 이제까지는 소극적이던 것이 저극적이 되기 시작한다. 야곱 족속이 환난을 당하는 날에 그들은 그 성문에 들어가 그 고통을 방관하였고 재물을 강탈하였다. 또 야곱 족속이 도망치려 할 때 그들의 퇴로를 차단하였다. 이 모든 것은 인간에 대한 태도를 표현한 것이다. 그러나 이는 하나님에 대한 태도에서 비롯한 결과이다. 하나님을 무시하는 자는 그들의 이웃을 무자비한 폭력으로 짓밟는다.

그렇다면 이것의 결말은 어떻게 될 것인가? 아마 오바댜의 말씀은 바로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오바댜가 예언하던 바로 그때는 야곱이 매우 고난을 당하던 때였다. 야곱은 하나님의 진노로부터 뿐 아니라 잔인하고 잔혹한 에돔이란 적으로부터도 고통을 당하고 있었다. 야곱은 에돔의 거만한 외침을 들었다. "누가 능히 나를 땅에 끌어 내리겠느냐." 이는 대응할 길 없는 도전 같았다. 에돔은 언제나 번성할 듯했으며, 또 형통한 가운데 영원히 불경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이에 대한 응답의 여호와의 말씀 속에 있다. "내가 거기서 너를 끌어내리리라. 나 여호와가 지혜있는 자를 멸하고 용사를 놀라게 하리라."

오바댜는 그러한 일이 복합적으로 일어나리라고 보았다. 에돔에 대한 말씀은 "너와 조약한 자들이 너를 대적할 것이라"는 것이었다. "너와 화목하던 자들이 즉, 너와 협약을 맺었던 자들이 그 협약을 깨리라, 네 식물을 먹는 자들이 너의 적이 되리라." 따라서 하나님의 통치하에 있는 모든 것들이 연합하여 에돔에 대적하므로, 에돔은 바위 성으로 부터, 또 별 사이에 깃든 곳으로부터 땅에 끌어내려진다. 이는 우리가 종종 시적으로 표현하곤 하는 하나님의 정의이다.

네가 행한 대로 받으리라.

이제 우리는 확실히 시사적인 마지막 말씀에 주목하여야 한다.

구원자들이 시온산에 올라와서 에서의 산을 심판하리니 나라가 여호와께 속하리라.

이 마지막 문장은 마치 심령 깊은 곳으로부터 터져 나오는 것 같다. 즉 "나라가 여호와께 속하리라."는 깊은 확신으로부터 솟구쳐 나오는 것 같다. "구원자들이 시온산에 오른다"는 말씀는 두 가지로의 해석이 가능하다. 많은 이들이 "심판"이라는 단어의 의미에 집착한다. "구원자들이 시온산에 올라와서 에서의 산을 심판하리니." 이 심판이라는 단어의 최우선적인 의미는 의로운 통치이다. 물론 이는 종종 징벌로서의 통치 행위를 가리키기도 한다. 그러나 적어도 필자에게 있어서 이 오바댜의 말씀에는 에서에 대한 소망, 심지어는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들에 대한 소망이 빛나고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하나님의 산인 시온산 위의 "구원자들"이 모든 사악한 것들을 심판하여, 이를 의롭게 세우기를 바라는 소망이 빛나고 있다. 결국 "나라가 여호와께 속하기"까지 모든 사악한 것들을 심판하여, 이를 의롭게 세우기를 바라고 있는 것이다.

이 선지서의 마지막 말씀은 다른 모든 선지서와 조화를 이루고 있다. 비관적인 말씀으로 결론을 맺은 히브리 선지자는 아무도 없다는 것을 명백한 사실이다. 히브리 선지자들은 음울하고 어두운 것을 보았다. 또 죄악과 불신앙도 보았다. 그러나 그들은 그 이상의 것을 보았다. 그들 중 어느 누구도 모든 것이 음울함과 어두움 그리고 불신앙으로 끝나리라고 보지는 않았다. 그들은 이를 꿰뚫어 보았다. 짧은 글을 통해 불신앙과 신앙 간의 반목을 우리에게 명확하게 보여 주고 있는 오바댜도 마지막 문장을 '나라가 여호와께 속하리라"로 맺고 있다. 오바댜는 눈 앞의 갈등, 즉 야곱의 고통과 에돔의 비웃음 이상을 보고 있다. 그는 반드시 에돔에게 임할 심판 그리고 이 모든 것이 이루어질 때를 보았다. 그러므로 나라가 여호와께 속하리라는 것을 보았다.

이는 우리가 오늘날 귀기울여야 하고,주의해야 하는 선언이다. 아마도 불신앙이 오늘날처럼 심하게 번진 적도 없을 것이다. 기독교에 대한 이교도들의 공격은 거의 다 사라졌다 해도 무장하다. 그러나 오늘날처럼 실질적인 불신앙이 팽배한 시대도 없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우리는 하나님이 필요없다. 우리는 별들 사이에 깃들여 있다. 누가 능히 우리를 땅에 끌어내리겠느냐?" 사람들은 하나님과 상관없는 것처럼 행하고 있다.따라서 기도조차 하지 않고 있다. 그들은 보이지 않는 것은 보지 못한다. 그들은 영혼에 대해 아무 생각도 갖고 있지 않다.

그러나 인간이 자신을 높이는 바로 이때에,그들과 조약한 모든 이들과 그들의 자만심이 함께 작용하여 그들을 교만한 위치로부터 끌어내린다. 이로써 그들은 현실에 직면케 된다.

이 모든 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오바댜처럼, "나라가 여호와께 속하리라"는 사실을 확신한다. 우리는 우선 그점을, 오늘날 나라가 여호와의 것이라는 사실로 인해 확신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을 다스리신다. 이 세상은 하나님으로부터, 또 하나님의 통치로부터 결코 벗어날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통치하에 있다는 것만은 확실하다. 이런 의미에서 그 나라는 이미 여호와께 속한 것이기 때문에, 앞으로도 여호와께 속할 것이다.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일상의 삶 속에서도 여호와께서 선포하신 말씀과 복음을 통해 나라가 그에게 속한 것으로 되어가고 있다.

나라가 여호와께 속하리라.

그렇다면 우리는 이 말씀과의 관계에서 어디에 위치하는가? 우리는 야곱의 편인가,아니면 에서의 편인가? 야곱은 칭송받을 만한 사람은 아니었으나 바로 우리의 표본이었다. 그는 대단히 많이 실수하였고 실패하였으며 어리석었다. 그러나 그는 어리석은 일을 저질렀을 때에라도 언제나 하나님을 믿었다. 이것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야곱에게 인내하셧으며 그가 자신의 기만 행위로 말미암아 집을 떠나 방황할 때 그에게 환상을 보여 주셨다.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그가 집으로 돌아올 때 친히 그를 만나 그와 겨루시고 또한 축복하셨다.

혹시 우리가, 하나님을 거역하는 불경스런 사람이고, 보이지 않는 것은 보지 못하며, 영혼에 대해서는 도무지 알지 못하는 에서, 또 스스로 암벽으로 된 요새에 거한다고 자만하여 "누가 능히 나를 땅에 끌어 내리겠느냐"고 외치는 에서와 같은 사람은 아닌가? 만일 그렇다 하더라도, 우리는 먼저 그래도 구원의 길이 있음을 기억하여야 한다. 하나님은 기다리신다. 또 그는 구원자를 보내주신다. 불경스런 자도 하나님의 은총으로 인해 성화될 수 있다. 이 묵상을 마치면서 마지막으로 할 수 있는 말, 또 유일하게 할 수 있는 말은, 광범위하게 해석될 수도 있고 개인에 한정될 수도 있는 말씀인 "나라가 여호와께 속하리라"는 예언의 말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