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가랴(Zechariah)의 외침

G. Campbell Morgan 저 / 김현진역

- 다가올 시대 -

"그 성읍 거리에 동남과 동녀가 가득하여 거기서 장난하리라 "(슥8:5,참조 슥 8:1-17)

스가랴는 학개와 동시대인이었다. 두 선지서를 자세히 읽으면 스가랴의 초기 말씀이 학개의 말씀과 같은 시대에 선포되었음을 알게 될 것이다. 그들은 초기 활동에 있어서 메시지를 번갈아 가며 선포하였다. 또 그 모든 메시지는 이스라엘 백성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전을 건축하도록 하는 데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다.

하지만,스가랴는 학개를 능가하였으며,흔히 구약의 계시록 저자라고 일컬어져 왔다. 일련의 상징적 환상을 통해 그는 그 당시 사건의 전개 과정을 보았다. 우리가 본문으로 택한 장에서 우리는, 그가 모든 황폐함 뒤에 있는 회복을, 하나님의 징벌적인 심판 뒤에 있을 회개한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돌이키심을,그리고 새로운 하나님의 질서가 세워지는 것을 보았음을 알게 된다.

때때로 옛날 히브리 선지자들은 환상을 통해, 다가올 영광 즉 아직은 임하지 않았지만 반드시 임할 영광을 언뜻 보았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마지막에 있을 조화에 대해서도 들었다. 이들은 하나님의 성읍을 아득하게나마 보았다. 그들은 그 성벽을 보았다.그들은 성읍이 건설되고 하나님의 나라가 세워질 때 이루어질 상황들을 보았다.

내 판단에 의하면 그러한 환상들 중에서 우리가 택한 본문만큼 생생하고 완전하게 그 상황들을 묘사하고 있는 것은 없다. 스가랴는 성읍을 보았다. 그런데 이 성읍은 세상적인 질서하에 있는 성읍이었다. 왜냐하면 그는 나이 탓으로 지팡이에 의지하고 있는 남녀 노인을 거기에서 보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는 다음의 것도 보았다.

그 성읍 거리에 동남과 돈녀가 가득하여 거기서 장난하리라.

나는 이와같은 말이 대단히 의문시되던 시기에 태어나 자라났다. 나는 같은 또래의 나의 친구가 그리스도를 발견했을 때 교회가 마친 후 기쁨에 넘쳐 식탁 위에 손을 놓고 즐거워한 것을 기억한다. 그때 그의 어머니가 날카로운 음성으로 쏘아 붙였다. "죠오지,너 교회에 갔었지." 이는 단순하지만 상당히 시사적인 말이었다. 어머니는 교회에 갔던 소년이 영적 기쁨에 넘쳐 그러한 행동을 했었다는 것을 생각지 못했다. 지금은 분명 내가 말한 그러한 시대와는 다르다. 하지만 그러한 태도는 여전히 사람들의 마음 속에 남아 있다. 매우 훌륭한 사람들이 다음과 같이 말하기도 한다."그것은 노는 것이 아니라 기도하는 것이지 않은가?" 아니다. 선지자는 기도하고 있다고 말하지 않았다. 그는 논다고 말했을 뿐이다. 더군다나 그는 그들이 거리에서 노는 것을 보았다. 그러므로 이는 더욱더 놀랍게 보이낟. 그러나 분명한 것은 동남과 동녀가 함께 장난하고 있다는 점이다. 현재 그 말씀이 기이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는 것을 볼 때, 선지자 자신도 그 말씀에 놀라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알았던 것이 분명하다. 왜냐하면 그는 바로 다음 문장에서 이렇게 말하였기 때문이다.

이 일이 그날에 남은 백성의 눈에는 기이하려니와 내 눈에 어찌 기이하겠느냐.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즉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에게 기이한 것이 그에게는 기이하지 않다고 말씀하셨다. 동남과 동녀가 거리에서 같이 장난하리라는 것은 하나님의 섭리의 목표를 밝히고 있다. 오늘날, 내가 앞으로 있게 될 하나님의 성읍을 실제로 보기 원한다면, 나는 그것을 보기 위해 주일 예배에 참석하기 보다는 오히려 토요일 오후에 공원으로 가거나 아이들이 놀고 있는 장소로 갈 것이다. 나는 기도회에 참석하기보다는 운동장으로 갈 것이다.

그렇다고 내가 주일 예배나 기도회를 경시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러한 데에서는 아이들이 모여 노는 것을 바라볼 때만큼, 앞으로 있게 될 하나님의 나라를 분명하게 볼 수 없다. 이 두 가지에는 분명히 모순되는 점들이 있지만, 정치학이나 경제학 또는 법학을 공부하는 것보다는 뛰어 노는 아이들로 가득한 운동장에서 하나님의 이상에 대해 훨씬 더 깊이 깨달을 수 있다.

옛 주석가들이 어떻게 성인들의 안전에 대한 계시를 본문에서 찾아냈는지를 살피는 것은 흥미롭다. 본문이 유아 인구의 증가를 보여주고 있으며 그럼으로써 이때가 평화로운 시대임을 보여 준다고 하는 사람이 있다. 이는 옳은 이야기일 수도 있으나 아이들 자치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을 갖지 않는 것이다. 그러한 관점에서 이 문제에 관해 생각해 보자.

우리가 찾아볼 수 있는 첫번째 것은 본문이 아이들을 위한 하나님의 목적을 계시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나서 본문은 아이들의 태도와 상황이 성읍과 국가의 상황과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음을 명백히 보여준다.

아이들은 놀아야 한다는 하나님의 생각은 매우 명확한 것이다. 옛 선지서들에서 나라의 궁극적인 승리에 관한 말씀에도 아이들이 노는 것이 기록되어있다.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거하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찐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 아이에게 끌리며... 젖 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며 젖 뗀 어린 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으리라.(사11:6-8)

이처럼 어린 아이가 천진 난만하게 놀고 있는 것으로 나타나 있다. 어린 아이를 동물원에 데리고 가면, 난간을 넘어 동물에게 접근하는 것이 위험함을 아이에게 설명하는 데에 어느 정도 어려움을 느낀다. 왜냐하면 그러한 행동은 바로 아이가 원하는 바이며 아이들에게 있어 매우 자연스러운 고유의 본능이기 때문이다.
"논다"라는 말에 대해 잠시 생각해 보자. 러스킨은 이렇게 말하였다.

놀이는 자기 임의대로 몸과 마음을 움직이는 것이다.

이는 어떤 면에서 옳은 말이다. 직업상 자동차를 모는 많은 젊은이들은 그것을 고된 일로 여긴다. 하지만 자기 소유의 차를 모르는 젊은이들은 이를 즐거움으로 여긴다. 놀이는 언제나 일을 의미한다는 것을 기억하는 것이 중요하다.의심이 나면, 하루만 일을 쉬고 4살짜리 사내에든 계집애든 그들이 하는 대로 아침부터 밤까지 해보라. 그러면 놀이가 일을 포함하고 있다는 것을 확신하게 될 것이다. 또 놀이는 일을 위한 준비를 의미한다. 아이들의 생활이 바로 이해되면, 아이들의 기본적인 능력 또한 이해될 것이다. 아이들은 일을 방편으로 노는 것이다.

죄송하지만 나 자신의 이야기를 예로 들어 보겠다. 나의 놀이는 설교하는 것이었다. 나는 예닐곱 살 때 누이의 인형을 놓고 설교를 하였었다. 그것은 멋진 놀이였다. 나는 그 이후로 죽 설교를 해왔다. 이는 설교가 하찮은 일이라는 것을 의미하는 말이 아니다.그것은 지금가지 대단히 노력을 요하는 일이었으며, 때때로 번민과 영적 고통으로 표현될 수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언제나 노는 시간 같았다.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또 한 가지 것은 소년, 소녀들이 함께 장난하는 것으로 선지자에게 보였다는 것이다. 우리는 오랫동안,교육 체제와 청소년 단체를 통해 남녀를 구분하려고 노력해 왔다. 그런데 또 가족간의 연대를 보면 소년들의 힘이 소녀들을 돕고, 소녀의 세련됨이 소년의 거친 품성을 순화시킨다는 것이다. 이는 자세히 다룰 문제는 아니지만,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임에는 틀림없다.

놀이는 일을 위한 준비라는 말에 대해 잠시 생각해 보자,우리는 어른들을 심각하게 하는 일을 아이들이 놀이로 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좀 슬픈 예지만, 장난감 상점에는 장남감 병정, 장난감 대포, 장난감 비행기 등이 진열되어 있다. 하지만 하나님의 성읍에 있어서 아이들은 전쟁놀이를 하지 않는다. 그들은 왕이 되고 종이 되는 놀이를 하지 않는다. 나는 하나님의 나라가 서고 난 초기에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대장간에서 놀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칼을 쳐서 쟁기를 만들 것이고 창을 잘라 옷걸이를 만들것이다. 또 하나 확실한 것은 아이들은 어른들이 하는 대로 논다는 것이다.

이제 이것이 도래할 왕국의 공공의 생활에 관해 갖는 의미가 무엇인지 살펴보자. 선지자는 왕국이 성읍 곧 큰 성읍으로 임할 것임을 보았다. 또 아이들이 성읍의 거리에서 장난하고 있다는 사실은 아이들이 어떻게 공공 생활의 시금석이 될 것인가를 보여주고 있다.

이는 두가지 말로 쉽고 간단하게 설명될 수 있다. 첫째, 하나님의 성읍에서 그 거리가 장난하는 소년, 소녀들로 가득차 있다면, 그곳이 소년, 소녀들이 놀기에 좋을 것임에 분명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둘째는 소년,소녀들이 거리에서 노는 것이 어울린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암시된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성읍에서의 권위와 생활에 관한 삶의 질서를 알 수 있다.
첫째, 거리는 아이들이 놀 수 있는 장소이다. 이 말의 의미를 다른 선지자의 말씀을 인용해서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나의 성산에는 해함도 없겠고 상함도 없으리라(사65:25).

그 거리는 육체적, 정신적, 영적으로 아이들에게 적당할 것이다. 하나님의 성읍에는 소홀한 부분이 있을 수 없다. 소홀함으로 아이들이 신체적인 위험을 당할만한 것은 전혀 없다. 노출된 하수구도 없을 것이고, 교통 사고도 없을 것이다. 하나님의 성읍에서는 아이들의 안전이 가장 우선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아이들의 안전을 보장한다면 모든 시민의 안전을 보장하는 것이리라.

또 정신적으로도 아이들에게 해를 끼칠 것은 전혀 없을 것이다. 불건전한 책은 판매되지 않을 것이다. 좋지 않은 포스터도 없을 것이고, 비속한 그림도 아이들 눈에 띄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의 성읍에서도 아이에 대한 사랑이 소유욕보다 더 클 것이다.

마지막으로, 아이들에 대한 영적인 관심 또한 최고일 것이다. 소자를 실족케 하기보다는 연자 맷돌을 목에 매는 것이 더 나으며, 소자를 해치는 자는 깊은 바다에 빠지우리라는 그리스도의 말씀이 완전히 이루어질 것이다. 더욱이 분명한 것은 가정 생활이 제대로 되어야 거리로 나온 아이들이 거리에 악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제 이러한 일들이 어떻게 있을 수 있겠는가라는 의문이 자연스럽게 떠오른다. 답은 오직 한 가지이다. 이는 바로 하나님의 왕국이다. 하나님의 권위 곧 그리스도의 권위로 옷입은 하나님의 왕국이다. 그리스도가 왕이 될 때, 성읍의 모든 권위가 그의 지도와 통치하에 있게 될 때,그 왕국은 깊은 밤의 어둠이 걷히고 새벽 동이 트듯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질 것이다. 우리의 모든 거리가 아이들의 놀이터일 수 있을 때 하나님의 성읍은 임할 것이다.

오늘날 아이들의 안전은 우리 시대에 그리스도의 영이 얼마나 활동하시는가에 달려 있다. 하나님의 은혜로 지난 반세기 동안 아이들의 안전도는 크게 향상하였다. 나는 런던을 거닐며, 수업이 파한 후의 거리 모습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학교 근무 근처에 경찰관이 서 있었다. 경찰관이 그에게 매달리는 두 세명의 아이들 손을 잡고 웃으며 길을 건네주고 있던 모습은 내가 기억하는 가장 아름다운 모습 중 하나였다.

이제 우리가, 아이들에게 안전한 도시를 만들기 위해서는 어떻게 하여야 하는가 하는 문제에 이르렀다. 우리는 종종 이러한 도시 문제가 그리스도인의 생각과 활동과는 상관없는 것이라고 말하곤 한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우리가 배교자가 되지 않기 위해서는 그리스도의 구원의 복음을 아는 것 것 뿐만 아니라 그의 교훈과 이상을 따르는 것이 필요하다.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우리는 이것이 가정 생활에 대해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깨달아야 한다. 바로 아이들 자신 때문에 거리가 더럽혀지는 경우가 있다. 이는 빈민가 뿐만 아니라 교외에도 적용된다. 이때 그에 대한 비난은 아이들에게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그 아이들의 가정으로 돌아간다. 하나님의 왕국은 적지 않은 사람들이 집에 걸어 놓고 있는 말씀 속에 드러나 있다.

그리스도는 이 집의 머리이시며,
모든 식사 때에 보이지 않는 손님이시고,
모든 대화를 말없이 듣는 분이시다.

이 말씀이 지켜지는 가정의 아이들은 밖에 놀러 나가서도 친절할 것이고, 이기적이지 않을 것이며 깨끗할 것이다. 아이들이 가장 명랑하고 쾌활하게 놀 수 있는 조건은 복종이 강제적이지 않고 자발적인 가정, 신뢰와 고귀한 이상이 있는 가정,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 대한 어른들의 대화가 결코 거칠지도 않고,아이들이 듣기에 거슬리지도 않는 가정 속에 있다. 가정은 나라의 힘이다. 하나님에게 있어서 가정은 여전히 가장 중요한 사회 집단으로 사실상 다른 모든 것들이 그것을 기초로 하며 그것에 좌우된다.

우리는 이 하나님의 나라의 모습과 우리가 지금 대하는 많은 일들을 비교할 때, 먼저 하나님의 나라를 향해가고 있는 모든 것으로 인해 하나님께 감사한다. 하지만 아직 얼마나 많은 슬픈 일들이 있는가, 우리는 우리 자신의 아이들 말고 많은 아이들을 생각하여야 한다. 오염된 환경속에 사는 아이들, 부유한 아이들, 가난에 찌들린 아이들에 대해 생각하여야 한다. 아직 얼마나 많은 일들이 이루어져야 하는지를 깨달아야 한다.

우리는 언제나 하나님께 감사한다. 지금은 고인이 된, 벤쟈민 위프(Benjamin Waugh)가 아이들을 위해 한 놀라운 일로 인해 하나님께 감사한다.
바라트 브라우닝 여사(Mrs. Barratt Brownning)의 시를 생각해 보는 것이 도움이 될 것이다.

 어린 양은 초원에서 울고,
 어린 새는 둥지에서 지저귄다.
 어린 사슴은 그늘에서 놀고,
 어린 꽃은 서쪽을 향해 자라난다.
 그런데 어린 아이들, 어린아이들은, 오 나의 형제여!
 그들은 슬피 울고 있다 -

 남들은 놀고 있는데 그들은 울고 있다.
 이 자유의 나라에서,

 너는 아이들의 울음소리, 울부짖는 소리를 듣는가.
 오 나의 형제여,
 너는 무엇을 가르치는가?
 하나님이 그의 세상을 사랑하신다는 것을 가르치는
 가?
 아이들이 운다.
 아이들이 네 앞에서 울고 있다.
 그들은 점점 지쳐간다.
 하지만, 강한 사람의 분노보다도
 조용한 아이의 울부짖음은 더 깊은 저주이다.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은 무엇보다도 우리의 마음과 우리의 가정에 그리스도의 통치를 확립하는 것이다. 그 다음에 우리는 공공 업무에 주의를 돌려야 한다. 아이들을 위한 거리를 만들기 위해 영구히 노력해야 한다.
 내게 오라,아가야,
 나는 네가 노는 소리를 들었다.
 나는 혼돈시키던 문제는
 이제 완전히 사라졌다.

 해가 보이는 동창을 열어라.
 제비가 지저귀고 아침이 흐른다.

 너는 지금까지 노래한
 모든 시보다 낫다.
 너는 살아 있는 시이고,
 그 외에는 어떠한 것도 죽은 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