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바냐(Zephaniah)의 외침

G. Campbell Morgan 저 / 김현진역

- 하나님의 엄하심과 선하심 -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지면에서 모든 것을 진멸하리라.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시라. 그가 너로 인하여 기쁨을 이기지 못하여 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인하여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습1:2,3:17,참조,습1:1-6,3:14-20,벧후3:10-18).

이 두 말씀을 택한 이유는 이것들이 스바냐서의 특징을 이루고 있는 대조적인 면을 잘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그 대조는 하나님의 엄하심과 선하심에 대한 계시로 묘사하될 수 있다. 스바냐는 우리에게 공포와 부드러운 사랑을 제시하고 있다. 그 대조는 대단히 뚜렷하다. 그래서 어떤 주석가들은 이 하나님의 두 가지표현이 한 사람에 의한 것일 수 없다고 주장하여 왔다. 따라서 이들은 하나님에 대한 이들 자신의 이해에 입각하여 스바냐서를 분할해 왔다.

사실상 이 특성들의 결합은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바이다. 오늘날의 그리스도 교회는 언제나 요한을 사랑의 사도로 언급한다. 이는 분명히 그러하다. 여기에 덧붙여 예수께서 요한과 그의 형제를 보아너게 즉 우뢰의 아들이라고 부르셨다는 사실도 상기해 보자. 요한의 글을 잘 읽어 보면, 상당히 자주 반복되어 거의 핵심어라고 불리울 수 있는 두가지 단어를 그가 사용하였음을 발견할 수 있다. 그해 그 하나는 "사랑"이고, 또 하나는 "계명"이다. 그의 저작을 통해 그는 사랑의 가치와 우월성을 주장하고 있다.또한 율법 혹은 계명의 중요성에 대해 요한보다 더 조리있게 나타낸 이가 없음도 사실이다. 본문에서 우리는 그와 똑같은 것 즉 선하심과 엄하심 다시 말해서 공포와 자비를 볼 수 있다.

우리는 이 두 가지가 우리 주님의 가르침 속에서도 궁극적으로 완벽하게 발견된다는 사실을 경외심을 품고 상기할 수 있다. 우리는 예수님이 다음의 두가지 말씀을 하셨음을 결코 잊어서는 안된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화 있을진저, 독사의 자식들아."여게어서 우리는 또다시 엄하심과 선하심 곧 공포와 부드러운 사랑을 접할 수 있다.

우리는 모든 예언적인 말씀이 주로 민족적인 차원으로 적용되었음을 알고 있다. 그러나 선지자들이, 민족이 그 구성원인 개인들의 집합체임을 알았던 것도 사실이다. 여하튼 그들의 예언 대상이 민족이었다는 사실에서 보면 거기에는 개별적인 성격이 들어 있으므로 이제 우리는 그러한 방법으로 그것을 고찰해 보아야 할 것이다.

스바냐서의 핵심은 분명히 "여호와의 날"이라는 말씀에 있다.또한 그는 자신의 주장을 펴 나가면서 그 의미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우리는 신약에서나 구약에서 그 말씀을 발견할 때 언제나 선지자 혹은 사도가 하나의 대조를 암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 대조는 언제나 인간의 날과 하나님의 날 간의 차이점에 관한 것이다. 인간의 날은 언제나 실패와 파멸의 날이다. 그래서 이들 예언적이고 사도적인 전달자들은 인간의 날과 여호와의 날 간의 차이를 뚜렷하게 보인다.

인간의 날은 여호와께서 인내하시는 날이다. 그 동안 하나님은 인간이 자신의 삶의 철학을 다 이룰 때까지 내버려 두신다. 여호와의 날은 하나님께서, 그에게와 그의 거룩한 뜻에 그리고 그의 영원한 사랑의 타오르는 정열에 대항해 온 모든 것에 대해 심판을 행하시는 날이다.

지금은 인간의 날이다. 우리는 인간의 날에 살고 있다. 그러나 그 말의 궁극적인 의미에서 볼 때 여호와의 날은 올 것이다.

스바냐의 방법대로,뿐만 아니라 모든 선지자들의 방법대로 해석해 볼 때, 이 구절의 영구적인 가치는 다음과 같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의 날에는 결국 하나님 자신에 관한 것들이 심판 과정을 통해 드러날 것이다. 그의 날에 스스로를 민족들에게 알리사 그들의 삶을 정화시키며, 그들에게 보다 깨끗한 언어를 주실 것이다. 그럼으로써 그들은 그의 이름을 부를 수 있을 것이고, 그때가 되면 모든 사람들 심지어 가장 멀리 떨어진 곳에 있는 사람들도 그에게 제사를 드리러 오게 될 것이다. 여호와의 궁극의 날이 임하는 것은 그의 참을성 있는 기다림이 끝나는 데에 있는 것으로, 인류의 궁극적인 복지와, 사랑이라는 그의 거룩한 목적을 실현하기 위함이다. 우선 하나님의 엄하심은 다음의 말씀에서 분명히 선포되고 있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지면에서 모든 것을 진멸하리라(1:2)
하나님은 인간의 생활과 활동을 관찰하시는 분으로 묘사되어 있다. 그는 인간의 활동에 한계가 있음을 선포하시며, 또 그가 모든 것을 완전히 진멸하실 때 그 날과 그 시가 오리라는 것을 선포하신다.
조금 뒤에서 선지자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그때에 내가 등불로 예루살렘에 두루 찾아 무릇 찌끼같이 가라앉아서 심중에 스스로 이르기를 여호와께서는 복도 내리지 아니하시며 화도 내리지 아니하시리라 하는 자를 벌하리니(1:12).

이 말씀 속에는 모든 악하고 죄된 일들의 근본 원인이 드러나 있다. 인간은 인간사에 개입하시는 하나님의 활동을 믿지 않는다. 따라서 그들은 선지자들이 말한 것이 그대로 이루어지지 않으리라고 선언한다. 그들은 여호와께서 이러한 것들과 아무 관련도 없다고 말한다. 여호와께서 이러한 것들과 아무 관련도 없다고 말한다. 여호와께서는 복을 내리시지 않는다. 그는 복도 내리지 아니하시며, 화도 내리려 하지 않는다.그는 인간을 찾아 죄를 벌하려 하지 않으신다. 이와 같이 하나님은 외면당하신다. 하나님의 존재는 인정될 때조차도 그의 활동은 부정된다. 사람들은 그의 활동을 무시하고 살아나간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스바냐가 요시아 시대 그의 사역을 하였다는 것은 시선을 끈다. 요시아 시대는 분명히 개혁의 시대였다. 그는 매우 사랑받는 인물이었다. 더우기 그의 의도는 여호와를 섬기려는 것이었다. 그는 온 정성을 다해 이를 행하였다. 그런데 스바냐가 이 개혁에 대해 언급치 않았다는 것은 매우 의미심장하다. 그것에 대한 이유를 찾아 보면, 요시아가 마음 속으로는 개혁을 계획하면서 훌다라는 여선지자에게 물으러 갔음을 알게 된다. 요컨대 그녀는 그에게 이렇게 말했다. "네 마음에 있는 모든 것을 하라. 네 의도는 거룩한 것이다. 네 손을 거두지 말라. 그러나 이것이 영구적인 가치가 있는 일은 아닐 것이다. 부분적인 개혁은 가능할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을 향한 심령은 없으리라." 분명히 요시아의 지휘아래 개혁은 수행되었다.그러나 그 모든 것은 표면적인 것에 불과하였다. 진심으로 회개하는 심령은 없었다. 사람들은 "여호와께서는 복도 내리지 아니하시며 화도 내리지 아니하시리라. 하나님은 수동적이실 뿐이다"라고 말하기까지 하였다.

나는 종종 이 옛 선지자들은 진부할 뿐이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상황을 생각해 보곤 한다. 인간은 온갖 활동을 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들의 복이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인지는 깨닫지 못하고 있다. 얼마전에 어떤 사람이 나에게 매우 솔직하게 이렇게 말했었다. "나는 하나님의 덕을 입은 적이 전혀 없다. 나는 스스로 진로를 개척해야 했으며, 그래서 스스로 내 위치를 구축해 왔다." 이 말은 언어로 표현될 수 없는 대단히 많은 독특한 생각을 함축하고 있다. 그에게 한 나의 대답은 매우 간단한 것이었다. 나는 그에게 지난 30년 동안 의사에게 얼마의 돈을 지불하였는가를 물었다. 그는 미국인이었다. 그의 대답은 단 1센트도 지불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를 바라보며 말하였다. "그런데도 당신은 하나님께 감사할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말이요."

하나님의 엄하심은 그가 인간의 이러한 태도에서 비롯하는 이 모든 활동을 끝내실 때 그날이 임하리라는 사실에서 드러날 것이다. 그의 심판은 결국 하나님과 그의 통치에 무관심한 이들에게 뒤따르는 황량함 가운데 나타날 것이다.

선지자는 이 하나님에 대한 무관심이 어떻게 표출되는가를 대단히 명쾌하게 설명하고 있다. 인간은 모두 찌끼 같이 가라앉아 있다. 즉 하나님에 대한 무관심은 인간의 여러 활동 속에서의 방심으로 나타난다. 선지자는 하나 하나의 인간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 아니라 도성 - 물론 인간은 언제나 도서엥 포함되지만 - 에 대해 말하고 있다.

그가 명령을 듣지 아니하며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여호와를 의뢰하지 아니하며 자기 하나님에게 가까이 나아가지 아니하였도다(3:2).

이 모든 것의 결과가 그 다음에 명백히 드러난다.

그 가운데 방백들은 부르짖는 사자요 그 재판장들은 이튿날까지 남겨 두는 것이 없는 이리요 그 선지자들은 위인이 경솔하고 간사한 자요 그 제사장들은 성소를 더럽히고 율법을 범하였다(3:3).
하나님을 대신하여 의로운 통치를 하는 것은 맡은 바 기본적인 임무인 방백과 재판장, 선지자와 제사장들은 모두 철저하게 실패하였다. 하나님의 엄하심은 "내가 지면에서 모든 것을 진멸하리라"는 말씀을 통해 드러났다.

하나님께서 죄에 대해 진노하시는 하나님이라는 점은, 오늘날 인식되거나 언급되지도 않는다. 사람들은 하나님이 악을 행하시지도 않고 해도 끼치시지 않으리라고 말하고 있다. 이러한 이야기가 나를 설득시킬 수 있다면 나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기를 거절할 것이다. 하나님이 인간의 죄와 실패에 대해 무기력하시고 인간의 비위나 맞추는 분이시라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베드로는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에 대해 언급하였는데, 이것은 하나님의 인내에 대한 아주 뛰어난 언명이다. 하지만 이 기간에 지나면 홍수가 밀어 닥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하나님을 잊고 그의 명령에 복종하기를 거절한 이들에게 심판도 없고,징벌도 없으며, 어떠한 신속하고 무서운 보복도 없다는 이야기가 나를 설득시킬 수 있다면, 나는 엄청난 혼돈 이외에는 바로 앞에 있는 것조차 전혀 볼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에 예언의 전부는 아니다.이는 진리의 한쪽 면일 뿐이다. 이는 진리의 또 다른 쪽 면과 밀접히 연결되어 있다. 잠시 처음에 인용한 두번째 말씀으로 넘어가 보자. 이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자신의 과거를 회개하여 하나님께 돌아온 백성, 즉 불의를 행하거나 거짓을 말하기를 그만두고 속이는 혀를 더이상 놀리지 않았던 남은 자들에게 하신 말씀이다. 이들에 대한 하나님의 태도는 다음의 말씀 속에 선포되어 있다.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이시라. 그가 너로 인하여 기쁨을 이기지 못하여 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인하여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하리라(3:17).

이제 하나님의 공포의 선지자, 거룩한 하나님의 엄하심에 대한 선자지인 스바냐는 하나님의 심정을 보여 주고 있다. 이것을 그는 하나님의 왕되심에 대한 주장에서부터 시작하고 있다.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시라."하나님은 전능자이시다. 이는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말이다. "그는 구원을 베푸시리리."이는 하나님의 결심에 대해 선언하는 것이다. 그는 하실 수 있고, 하실 것이다. 인간이 하나님 곧 왕되신 하나님께 돌아가는 것은 그의 능력을 의지하는 것이다. 그는 능력이 있으시고, 하실 수 있는 분이시다. "영웅과 영웅 능력이 있으시고, 하실 수 있는 분이시다."영웅과 영웅 숭배 "(Heroes and Hero Worship)라는 글에서, "궁극적으로 왕은 힘이 있는 사람"이라고 말했던 사람이 바로 카알라일(Carlyle)이 아닌가. 이 힘의 능력은 궁극적으로 오직 하나님에게서 비롯되는 것이라고 말할 수 밖에 없다. 하나님은 전능자이시고, 그의 전능하심이 흘러나가는 방향은 하나님 자신의 뜻과 의도에 따를 것이다.

하나님의 활동이 무엇인가는 "그는 구원을 베푸시리라"라는 말씀 속에 나타나 있다. 그는 불법에 따른 재난으로부터 구원을 베푸실 것이다. 즉 재난을 야기하는 불법으로부터 구원을 베푸실 것이다.

이때 이어서 매우 아름다운 장면이 나타난다. 이는 곧 모성애적인 모습이라 할 수 있다. 즉 어린 자식을 팔에 안고 있는 어머니의 모습을 암시하고 있다 나는 스바냐가 바로 이러한 모습을 목격하였다고 생각할 수 밖에 없다. 그는 어머니가 아이를 바라보며 기쁨을 이기지 못하는 모습을 보았다. 그는 그 여인이 너무 기뻐 아무 말도 못하는 모습을 보았다. 그녀는 결국 더이상 잠잠할 수 없게 되어 갑자기 즐거운 노래를 부리기 시작했다. 이것이 선지자가 본 하나님의 모습이었다.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이시다. 그러므로 그는 구원을 베푸시고 나서 마치 어머니처럼 우리를 안고 자신의 사랑을 베푸시고 나서 마치 어머니처럼 우리를 안고 자신의 사랑을 만끽하실 것이다. 그때 하나님은 노래를 부르시는 것으로 묘사되고 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선하심이며 ,부드러운 사랑이다.

이 모든 일의 결과로 하나님의 전능하신 힘을 통해 구원을 받아 하나님의 영원한 사랑을 받는 자에게 슬픔 대신에 노래가, 아집 대신에 봉사가,분산 대신에 연합이 임하게 된다. 인간과 우주의 안전은 바로 이 하나님의 성품의 양면에 달려 있다. 만일 하나님이 이 선지서에 표현된 것과 다른 분이시라면, 인간에게는 어떤 희망도 있을 수 없을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엄하심을 믿고 그의 선하심을 알기 때문에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기뻐한다."

이런 면에서 베드로의 말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우리는 열심을 다하여 거룩한 삶과 경건한 삶을 살아야 한다. 그리하면 우리 삶의 모든 행위가 그날의 도래를 촉진시키는 것이 될 것이다. 마지마긍로, 우리가 미호고디어 우리의 신앙을 잃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다음의 말씀을 따라야 할 것이다. "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저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 가라"(벧후 3: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