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기스(Lachish)


마레사 서남쪽 6Km 지점에 있는 고대 유다 지방의 중요 도시로, 유다 왕국의 역사와 관련이 깊은데, 이중 성벽과 삼중문으로 구축된 요새이며 남방 방어선의 요충지였다. 그러나, BC 701년 히스기야왕 때 앗수르의 왕 산헤립에 의해 멸망되었으며, 1932년 이래 발굴이 계속되어 이때 전사한 것으로 보이는 사람의 뼈가 커다란 동굴에서 1,500,구 이상 발견되었고, 히브리어가 새겨진 예레미야 시대의 토기도 출토되었다.

성은 남서쪽 비탈이 가장 낮은 지역이었는데 이는 남서쪽 모서리에만 지형학적인 안부가 있었기 때문이다. 남서쪽에 있는 언덕과 함께 그 성은 지어진 것이다. 남서쪽 모서리에 있는 성벽 맞은편의 언덕은 해발 260-265m 였다. 이러한 지형학적 조건은 외부인이 공격해 올때 공격의 지점을 어디서부터 해야 할 것인가를 쉽게 결정하도록 만들어준다.
이처럼 라기스는 전략적으로 중요한 위치에 있었으므로 주전 701년 앗수르산헤립에 의해 멸망되기 전까지 라기스는 남부 유다에서 예루살렘 다음으로 중요한 도시였다.

(1) 가나안의 한 성읍으로 여호수아가 점령하여 유다지파에게 주었다(수10:3, 15:39).

(2) 르호보암은 이 곳을 견고한 요새로 지켰다(대하14:9).

(3) 아마샤가 피살된 곳(왕하11:19).

(4) 앗수르산헤립이 포위하여 히스기야에게 조공 받을 것을 조약하고 (왕하18:13, 14)

(5) 느부갓네살이 점령하여 불 살랐다(렘34:7).

(6) 바벨론에서 귀환후 다시 입주한듯하나 자세하지 않다(느11:3).

이 텔 에드 두웨이르(Tell ed Duweir)는 1932-1938년에 웰컴 마스턴 고고학 탐사대에 의해 발굴되었다. 이곳에는 물이 흔하기 때문에 
고대로부터 각 시대에 걸쳐 사람들이 거주했던 곳이다. <A href=라기스에서 발굴된 것들 중에는 [라기스 서한]이 특히 유명하다."> 텔 라기스
라기스에 관한 고고학적 연구는 1932년에 시작이 되어 오늘날까지 계속되어왔다. 라기스에 관한 수많은 고고학적 자료들, 유적, 유물들은 성경의 기록과 어느정도 부합되고 있는가? 성경에는 라기스에 관하여 10차례 이상 언급을 해주고 있다. 이러한 성경의 라기스에 관한 기록은 역사적 사실에 근거한 것인가 아니면 단순한 이야기, 혹은 문학작품에 해당되는 것인가?

텔 라기스의 정확한 위치는 어디인가? 이것에 대한 학자들의 견해는 2 가지로 분류된다. 먼저 1878년 Conder 라는 학자는 고대의 라기스가 텔 el-Hesi 라고 주장했다. 이러한 그의 주장은 라기스에서 보내진 텔 아마르나 시대의 쐐기 문자를 발굴함으로 지지되었다. 텔 라기스의 위치에 대한 두번째 견해는 1929년 Albright 에 의해서 제안되었는데 그는 고대의 라기스가 텔 el-Deweir 라고 주장했다. 그의 이러한 주장은 유세비우스의 언급에 근거한 것이다. 유세비우스는 라기스가 Eleutheropolis(벧 구브린)에서 가사를 향하는 도로 7마일 지점에 있었다고 언급하였다. 텔 라기스를 발굴한 모든 고고학 자료는 Albright의 제안을 지지하며 오늘날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라기스는 성경에 언급된 쉐펠라의 중심도시이다. 쉐펠라에는 중요한 골짜기가 다섯개 존해하고 있다. 북쪽에서부터 아얄론 골짜기, 소렉 골짜기, 엘라 골짜기, 구브린 골짜기, 라기스 골짜기의 순서로 구성되어 있다. 그러므로 라기스는 쉐펠라 중에서도 하부 쉐펠라에 해당이 된다. 서쪽으로는 해안평야 - 특히 블레셋 평야 - 가 있으며, 동쪽에는 중앙 산악 지역 중에서 유다 산지, 특히 그중에서도 헤브론 산지가 있다. 북쪽에는 앞에 언급한 쉐펠라의 중요한 골짜기들이 있으며 남쪽에는 네게브 산지가 존재하고 있다. 그러므로 라기스는 해안평야 지역에서 헤브론 산지로 향하는 중요한 길목에 위치해 있다.

라기스 성의 크기는 약 72 두남이었으며 그 성의 북동쪽에는 우물이 있어서 사람들에게 물을 제공할 수 있었다.

라기스 성을 중심으로 한 지형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그 성 자체는 깊은 골짜기들로 둘러쌓여 있었다. 남서쪽의 성벽은 높이가 23m 였으며 북동쪽은 비탈에서 36m, 남동쪽은 40m, 북서쪽은 약 42m 였다. 즉, 그 성은 남서쪽 비탈이 가장 낮은 지역이었는데 이는 남서쪽 모서리에만 지형학적인 안부가 있었기 때문이다. 남서쪽에 있는 언덕과 함께 그 성은 지어진 것이다. 남서쪽 모서리에 있는 성벽 맞은편의 언덕은 해발 260-265m 였다. 이러한 지형학적 조건은 외부인이 공격해 올때 공격의 지점을 어디서부터 해야 할 것인가를 쉽게 결정하도록 만들어준다.

이처럼 라기스는 전략적으로 중요한 위치에 있었으므로 주전 701년 앗수르산헤립에 의해 멸망되기 전까지 라기스는 남부 유다에서 예루살렘 다음으로 중요한 도시였다고 한다.

(1) 유다 지파의 성읍 (수 15:1-62)

여호수아 15장에는 유다 지파에게 분배된 땅에 대해 기록하고 있다. 유다 지파는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남쪽에 분배가 되었는데 쉐펠라 지역과 유다 산지 그리고 사해에 이르기까지 넓은 지역을 분배받았다. 라기스는 쉐펠라에 분배된 14 성읍 중 하나였다(수 15:39). 그러나 예루살렘은 유다 자손이 쫓아내지 못하였으므로 여부스 사람이 유다 자손과 함께 예루살렘에 거하였다. 여부스 족속이 거하던 예루살렘은 후에 다윗 시대에 이르러 다윗에 의해 점령되어 다윗성이라 명명하였다(삼하 5:7).

(2) 기브온을 치기 위한 동맹에 가담함 (수 10:3-5)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백성들과 요단강을 건넌 후, 여리고아이를 점령하였으며 기브온 백성과 화친을 하였는데 이 때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 및 기브온을 치기 위한 5 동맹국이 형성되는데 라기스는 그 중 하나였다. 이 다섯 동맹국을 형성한 사람은 예루살렘 왕 아도니 세덱이었는데 이로 보건대 당시 예루살렘은 세력이 강했으며 라기스도 예루살렘에 못지 않는 강한 성읍이었음을 보여준다.

(3) 여호수아가 진멸함 (수 10:6-33, 12:11)

예루살렘 왕 아도니 세덱과 연합하여 이스라엘 백성을 치려했던 라기스 왕은 후에 막게다 굴에 숨었다가 여호수아에 의해서 죽임을 당하고 나무에 달렸다. 그 후 여호수아의 군대는 라기스 성읍을 취하고 칼날로 그것과 그 중의 모든 사람을 쳐서 멸하였다. 때에 게셀호람이 라기스를 도우려고 올라왔으나 그는 라기스 백성과 함께 그곳에서 죽임을 당하였다.

(4) 르호보암에 의해 견고한 성읍으로 건축됨 (대하 11:5,9)

여호수아에 의해 멸망한 라기스 성은 르호보암(주전 928-911)이 그곳을 요새로 만들기까지 폐허로 남아있었다. 르호보암은 유다 왕국의 서쪽 지역을 방어하기 위하여 이곳에 튼튼한 요새를 구축하였다.

" 르호보암이 이 모든 성읍을 더욱 견고케 하고 장관을 그 가운데 두고 양식과 기름과 포도주를 저축하고 각 성읍에 방패와 창을 두어 심히 강하게 하니라(수 11: 11-12)"

(5) 죄의 도성 (미 1:13)

선지자 미가는 라기스 거민의 죄를 꾸짖는데 라기스는 딸 시온의 죄의 근본이며 이스라엘의 허물이 보였다고 언급하고 있다. 특히 '준마에 병거를 메울지어다'라는 표현은 이미 라기스 성에 병거가 있었음을 시사해 주며 이는 고고학적 으로도 관심의 대상이 되고 있는 것이다.

(6) 아마샤가 살해당한 곳 (왕하 14:19, 대하 25:27)

유다 왕 아마샤(주전 798-769)가 반역자들에게 피하여 예루살렘에서 라기스로 도망갔을때 그곳에서 반역자들에 의해 살해되었다. 이것은 당시 라기스가 예루살렘 다음으로 중요한 도시였음을 시사해주는 기록이라고 할 수 있다.

(7) 히스기야 왕때 산헤립이 취한 곳 (왕하 18:13-17, 대하 32:9, 사 36:1-3, 사 37:8)

히스기야 왕 십 사년에 앗수르산헤립이 유다의 모든 견고한 성읍들을 쳐서 취하였는데 라기스도 그 중 하나이다. 산헤립이 유다를 공격하였을때 라기스를 포위하여 히스기야에게 랍사게를 보내어 항복하도록 위협을 했다. 산헤립은 후에 니느웨에 있는그의 궁전에 있는 한 왕실에 공격장면을 포함하는 벽화를 그림으로 그의 라기스 정복을 기념하였다.

(8) 느부갓네살의 공격을 받음 (렘 34:1,7)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예루살렘을 점령하기 전 유다의 모든 성읍을 쳤는데 유다의 견고한 성읍 중에 마지막 까지 남아 있었던 성읍은 라기스와 아세가였다.

(9) 바벨론 유수 후의 유다 사람의 거주지 (느 11:30)

느헤미야의 기록에 의하면 바벨론에서 유다인들이 돌아온 후 여러 지역에 정착하였는데 라기스는 특히 멸망 전과 마찬가지로 유다인의 거주지였다.

고고학적 접근
Starkey 의 발굴은 Starkey 감독, L. Harding 과 O. Tufnell 의 협조로영국 원정단에 의해 1932년 시작되어 Starkey 가 산적에게 살해됨으로 1938년에 끝이 났다. 이 발굴은 주로 북서쪽 모서리에서 실행되었으며 그곳에서 성문들과 외부 지탱벽, 주거지 및 태양 신전, 거대한 수갱, 유다 궁전 요새, 그리고 북서쪽 바닥에서 발견된 해자 신전 등은 중요한 유적들이다.

특히 1935년 성문에서 발견된 '라기스 편지'는 그의 발견물 증 가장 중요한 것이었다. 외부에서는 청동기 시대의 것을 포함한 여러 시대의 수많은 무덤들이 발견되었다. 그의 발굴은 고고학자들의 인정을 받을만큼 뛰어난 것이었다고 평가가 된다.

1966-1968년에 태양 신전에서 아하로니에 의해서 발굴이 되었다. 그 당시 아하로니는 아라드를 발굴하고 있었는데 아라드에서 발견된 유다 신전의 기본 구조가 라기스의 태양 신전과 흡사한 것으로 믿고 이러한 목적으로 라기스를 발굴한 것이다.

1973년 우시쉬킨 감독으로 조직적이고도 장기적인 연구를 위한 발굴이 Starkey의 발굴지 부근에서 시도 되었다. 이 발굴은 이갈 야딘과 함께 진행되었는데 그는 발굴 처음부터 앗수르에 의한 공격의 가능성을 생각했다.

이 발굴에서 발견된 것은 유다 궁전 요새 및 청동기 시대의 기념 건물, 유다 성문, 앗수르 군대가 주전 701년 그 성으로 접근하려고 만들었던 참호 등이다. 1983 -1985년에 계속된 발굴(남서쪽)은 R 지역에서 이루어졌다.

('나눔' 98. 8월호 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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