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혜림(MIR 9기)
1세기 갈릴리의 유대의 시골 사람들 속에서 시작된 난폭한 종파는 세상을 변화 시키기로 운명 지어졌었다. 하나님은 유대의 시골 사람들에게 아브라함의 아들과 딸들을 통해 땅의 모든 사람들을 축복한다는 약속을 선포했었다. "나는 너를 축복할 것이며, 땅 위의 모든 사람들이 너로 인하여 축복을 받으리라." 유대의 메시야는 태어났었고, 죽었고, 다시 살아나 그의 약속을 성취했다. 그 후 기독교의 믿음은 모든 인종, 종교, 언어 그리고 문화 속의 개인과 공동체에 스며들며, 변화 시키는 놀랄만한 힘을 나타내고 있다. 21세기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은 각 대륙과 모든 나라로부터 나타나고 있으며 약 20억의 인구, 세계인구의 1/3이 예수 그리스도께 충성을 고백했다.
1.로마 제국의 기독교(A. D. 30 - 500,선교의 첫 5세기)
1) 유대인 시대(B.C.150-A.D.30)
유대주의는 지중해를 연안을 넘는 첫번째 위대한 선교운동이었다.예수님 시대, 4천만 이상의 유대인이 로마제국의 모든 지역에 흩어져 살고 있었으며, 전체인구의 7%를 차지했었다. 그들은 150여 곳에 시나고그(유대의 회당)를 건립했었고, 이방인에게 다가가 그들을 개종 시키는 일에 매우 열정적이었고, 적극적이었었다. 역사상의 그 어떤 요소보다 유대인의 선교는 바울과 그리고 다른 제자들이 당시의 주요 지방과 도시에 걸쳐 하나님을 두려워 하는 이방인을 훈련 시키는 일을 예비했다.
2) 사도시대 (A.D.30-70)
예루살렘 교회 유대인전도자 베드로와 사도들은 예루살렘과 사마리아로 사도행전 1:8의 말씀대로 복음은 계속 퍼져 나갔다. 또한 A.D.70 때는 안디옥교회 헬라인도 갈라디아,소아시아로 전도를 하였다. 기독교는 로마제국의 대로와 강을 따라 계속해서 확장되었는데, 동향으로는 다메섹과 에뎃사를 거쳐서 마케도냐로 갔고, 남향으로는 보스트라와 페트라를 통해 아라비아로, 서향으로는 알렉산드리아와 칼타고를 거쳐 북 아프리카로 향하고, 북향으로는 안디옥을 통해 알미니아, 본도 비두니아로 퍼져 갔다. 콘스탄틴이 기독교로 개종하게 되면서부터 기독교는 급속한 확장을 보게 되었다. 왕실의 보호와 국가적인 재정 지원까지 받으면서 4세기의 기독교는 급속하게 성장하였다. 복음은 평신도들이 전파하였다.
초기 교회의 가장 두드러진 두 가지의 미덕은 사랑과 순결이었다.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아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이것이니라"(약 1:27).그리고 풍성한 구호, 교사와 지도자에 대한 지원, 과부와 고아 지원, 병자와 불구자 지원, 광산에 있는 죄수와 전과자 위문, 가난한 사람의 장사 협력, 노예보호 및 재난 구조, 고용 알선 및 모든 자선 사업등이 있다.
3) 로마시대
네로,도미시안,디오클레시안으로 기독교의 박해는 시작되었다. 그러나,1세기 동안의 박해는 의회에서가 아니라 공회에서 기원되었다. 기독교가 하나의 유대 종파로 인정되는 한 유대교에게 베풀어졌던 종교 허용의 특혜를 누렸다. 64년 네로 황제가 로마를 불태운 후에 그리스도인들을 공격 대상으로 삼았다.
제2차 박해는 도미시안 통치 시기이다. 첫 두 세기 동안의 박해는 지역적이며 간헐적이었다. 3세기 중엽에는 세베루스, 막시미니우스 및 데시우스 하에서 산발적인 박해가 있었다. 박해는 기독교를 멸절시키기 보다는 오히려 더 강력하게 만들어 주었다. 순교자의 피가 교회의 씨가 된 것이다.
그러나,313년에 콘스탄틴은 그의 유명한 밀란 칙령을 선포하므로 평화가 깃들기 시작했다. 거기서 그는 제국 내에 있는 모든 종교에 완전한 자유를 허락하고 디오클레시안 시대에 몰수당했던 교회 재산을 다시 환수하도록 했다. 콘스탄틴 통치 시대의 중요한 두 사건은 325년에 황제가 주재한 니케아 회의이며, 다른 하나는 같은 해에 유세비우스가 '교회사'를 완성한 것이다. 476년,드디어 로마는 멸망을 하게되었다. 교황은 봉건영주로 전락을 하게된것이었다.
2.불확실의 천년 시대(500-1500년)
1) 유럽에 대한 선교(A. D. 500 - 1200)
A.D. 500년 이후의 유럽을 일반적으로 암흑시대라고 하는데, 훈족으로 부터 시작된 민족대이동으로 유럽의 문명이 붕괴되었기 때문이다. 당시 야만족의 개종이 유럽 기독교의 과제가 되었는데, 약 500년에 걸친 야만족 선교는 표면적으로나마 A.D. 1000년경 이루어졌다. 그러나 기독교는 이슬람교라는 큰 적을 만나게 되었다. 638년 예루살렘이 함락된 이후 북아프리카와 스페인을 정복한 이슬람 세력은 비록 패하기는 했지만 732년에는 프랑스의 심장부인 투르까지 진출하였다. 북아프리카 교회의 몰락은 기독교 선교의 문제점을 노출하기도 한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이후 서유럽의 교회는 동로마를 도와 화해를 꾀하고 성지를 탈환한다는 명목으로 십자군 운동을 펼치기도 했으나 십자군의 잔악한 행위로 이슬람의 문제는 야만족들과 달리 지금까지도 해결되지 않은 채 기독교 선교의 큰 멍에가 되고 있다.
* 유럽의 기독교화 : 6-8세기간 아일랜드는 서구 유럽에서 가장 발전한 나라였다. 이때 어두운 중세의 유럽을 밝혀주었던 등대는 바로 아일랜드였다. 유럽의 학자들은 야만족들의 침략을 받지 않았던 아일랜드의 수도원 학교로 모여들어 수준 높은 교육과 학문을 이루게 되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아일랜드 교회를 빛나게 했던 것은 선교에 대한 열정이었다. 해박한 성경 지식과 성령으로 무장한 아일랜들의 선교사들은 순교를 무릅쓰고 스코틀랜드, 영국, 고올 지방, 네델란드, 독일, 북부 이탈리아 등으로 나아가 위대한 선교적 업적을 쌓았다.
영국 기독교의 기원은 분명치 않지만 3세기 전에 교회는 존재했으며 6세기에 영구적인 뿌리를 내렸다고 한다. 영국의 교회에는 한동안 켈틱 기독교와 로마 기독교 사이에 갈등이 있었는데, 켈틱 교회는 아일랜드의 콜럼바(Columba)에 의해 그리고 로마 기독교는 그레고리 1세가 파송한 어거스틴에 의해 세워졌다. 콜럼바는 아일랜드의 귀족 태생으로 학문과 재능에 뛰어났는데, 563년 42세의 나이로 12명의 동료들과 함께 아일랜드 해협을 건너가 스코틀랜드의 섬인 아이오나에 수도원을 세웠다.이 수도원은 콜럼바 사후 200년 동안 영국과 유럽 선교의 기지가 되었다. 선교사 어거스틴은 596년 베네딕트 수도승 40명과 함께 영국의 켄트에 상륙하였다. 그는 기독교인이었던 프랑크 족 출신 왕비의 도움으로 에텔버트왕을 전도하였다. 왕의 신임에 힘입어 어거스틴은 캔터베리 성당을 세웠고 최초의 캔터베리 대주교가 되었다. 어거스틴 이후 요크의 주교였던 윌프리드의 지도하에 로마 기독교가 우세하게 되었으며, 영국 교회는 아일랜드 교회로부터 선교의 바톤을 이어받게 되었다.
고올 지방의 복음화를 위해 앞장섰던 사람은 아일랜드인 콜롬반(Columban)이었다. 그는 40세에 사역을 시작했는데, 다혈질적인 사람으로 상류층의 부도덕을 거침없이 비난하고 우상을 때려부수며 사원 등을 불태워 독일과 스위스에서 두 차례나 추방당했다. 그는 마지막으로 북부 이탈리아로 가서 보비오에 수도원을 세웠다. 그는 "항상 배우며, 항상 가르치며, 항상 방랑하며, 항상 설교했다."라고 전해진다.
네델란드를 비롯한 베네룩스 3국 사람들은 프리지안(Frisians)라고 알려졌는데, 이 지역 최초의 선교사는 윌리브로드(Willibrord)였다. 그는 영국 사람으로 궁정대신이였던 피핀의 후원으로 사역했기 때문에, 계속해서 정치적인 의심을 받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40년 동안의 사역을 통해 네델란드 교회는 강력한 교회로 성장하였다.
독일 선교의 주역은 중세기의 가장 위대한 선교사로 추앙되고 있는 보니페이스(Boniface: 680-754)이다. 그는 영국의 귀족 출신이며 베네딕트 수도승이었다. 그는 탁월한 학자요, 뛰어난 조직가이며 열렬한 전도자였는데, 가이스마(Geismar) 지역에서 우상으로 섬겨지던 상수리나무를 찍어버린 것으로 유명하다.
스칸디나비아의 바이킹족은 9세기 당시 영국 교회의 선교 사업을 말살시키는 위협적인 존재였다. 영국의 알프레드 대제가 878년에 대승을 거두어 30명의 바이킹 지도자들이 기독교를 받아들이기로 했지만 큰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독실한 황제 루이는 열정을 갖고 북부지방에 기독교를 보급시켰다. 1차로 덴마크에 에보 대주교를 파송했으나 좋은 결과를 얻지 못했지만 실망하지 않고 프랑스 수도사였던 앙스카(Anskar)를 지도자로 해서 선교사들을 파송했다. 앙스카는 많은 어려움 가운데서도 스웨덴에 교회를 설립했고 덴마크에서는 기독교에 적대적이었던 왕 호릭의 신임을 끝내 얻어내었다. 그는 보니페이스와 같은 큰 성공을 얻지는 못했지만 인내와 집념으로 스칸디나비아 반도의 전도의 길을 닦아 놓았다. 그는 오늘날까지 북부의 사도로 추앙받고 있다.
9세기 들어서 슬라브 민족들에 대한 관심이 커졌으나 동, 서간의 갈등은 슬라브 선교에 있어서 어려운 점으로 작용했다. 슬라브족 최초의 선교사는 콘스탄틴(Constantine)과 메소디우스(Methodius) 형제로 모라비아 군주가 요청하여 콘스탄티노플 감독에 의해 파송되었다. 이들은 성경과 기도문을 슬라브어로 번역하고 예배시 모국어를 사용하도록 하였는데, 당시 로마 카톨릭 쪽에서는 이것을 반대하였다. 이들의 사후(死後) 모라비아 공동체는 서로마의 영향을 받게 되자, 이들의 제자들은 불가리아로 복음을 들고 갔다. 이들의 수고는 불가리아의 왕 보리스의 적극적인 주도로 꽃을 피게 되었다. 이들은 슬라브 기독교 문명의 최초의 공헌자들이었으며 가장 위대한 선교사들 중에 속한다.
10-11세기에 이르러 러시아와 폴란드 등에도 기독교가 뿌리를 내리게 되었는데 깊이 회심한 왕과 여왕들의 후원으로 큰 힘을 얻었다. 이 지역에 기독교가 전파되는데는 결혼도 큰 역할을 했다. 러시아에 기독교가 영구적으로 뿌리내리게 한 왕이었던 블라디미르는 그리스 황제의 여동생과 결혼한 후 기독교 신앙을 갖게 되었고, 동시에 그는 러시아가 비잔틴 제국의 후계자로 자처하게 되는 법적인 근거를 얻었다.
2) 이슬람의 발흥(A. D. 600 - 1200)
이슬람의 발흥 빌 두란트라는 학자는 7세기의 이슬람 세력의 돌발적 출현을 두고 "지중해 세계를 정복하여 절반이나 개종시킨 아라비아 반도의 폭발적 활동은 중세 역사상 가장 특이한 현상이다."라고 말했다.
570년 마호메트 출생. 이슬람교의 창시자인 모하메드는 문맹자였는데, 40세에 자신이 알라신의 사자라고 하는 환상을 본 후 메카에 사는 사람들과 그곳에 모여드는 순례자들을 대상으로 설교하면서 그들에게 새로운 도덕성과 유일사상을 불어넣었다.
632년 이슬람 정복전쟁은 시작되었다. 마호메트의 사후 그의 추종자들은 아랍을 통일하고 질풍노도와 같이 중동과 북아프리카를 거쳐 715년에는 스페인의 대부분 지역을 정복하였다.물론 다메섹,안디옥,예루살렘,가이사랴,알렉산드리아,페르시아도 정복하게됐다. 그 후 13세기와 14세기에 걸쳐 두 번째 정복활동을 펴 1453년 동로마 제국을 멸망시켰다.
이슬람과 기독교 일반적으로 이슬람교도들은 그들의 피정복민에게 코란과 칼 중 하나를 선택하도록 했다고 믿어진다. 그러나 유대인과 기독교인들은 이류시민으로 차별을 겪어야 했고 교회를 세우거나 전도를 하지 못했지만 신앙을 유지할 수 있었고 '책의 사람들'로 간주되어 행정과 교육 분야에서 일할 수 있었으며 꽤 높은 신분에 오를 수도 있었다. 이슬람의 정복에 있어서 기독교가 꽃 피웠던 북아프리카가 너무나도 쉽게 무너져 버린 것은 의아해할 만하다. 북아프리카 교회는 터툴리안과 시프리안 그리고 어거스틴 등 기독교의 위대한 신학자들을 배출했고 당시 기독교 인구의 1/4을 관할하고 있었다.
이런 교회의 급속한 몰락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많은 이유들이 있지만 진정한 이유는 먼저 북아프리카 교회는 진정으로 토착화되지 못했다. 두 번째로는 그들의 모국어로 성경을 보급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더구나 신학 논쟁들은 교회의 세력을 약화시켜 버렸다.
3) 유럽의 안정과 선교의 정체
십자군 운동(12-13세기)교회사 가운데 어두운 두 면이 있는데 하나는 유대인 박해 사건이고 다른 하나는 십자군 원정이었다. 1095년과 1272년에 걸쳐 7차의 원정이 있었다.
십자군 전쟁을 일으킨 이유는 첫째 예루살렘을 회복하고자 하는 것이고 둘째 비잔틴 제국을 지지함으로 터키 침공을 막고자 함이었고 셋째 동 서방 교회의 통합이었다. 십자군의 가장 나쁜 결과는 모든 이슬람 세계의 격리였다. 침략 행위는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배격하는 것이며 초기 교회의 실천 사항과는 어긋나는 것이었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이름을 빙자하여 잔악한 일을 저질렀다.
십자군 운동은 교회사의 어두운 페이지이다. 십자가 운동은 시작부터 참여자들의 경제적, 정치적, 심지어 개인적인 요소들이 혼합되어 실패가 예견되었지만 무엇보다도 종교적인 동기가 컸다. 로마 교황청은 예루살렘을 탈환하고 비잔틴 제국을 도와 투르크족의 침입을 막으며 동, 서방 교회의 융합을 꾀했다. 그러나 탈환한 예루살렘은 150년 동안만 명맥을 유지했고, 십자군들은 콘스탄티노플에 이슬람교도들보다 더 큰 피해를 입혀 결국 동방 교회와의 골은 더 깊어졌다.
십자군 운동의 이득이 있었다면 그것은 사회, 경제적인 것이었다. 예술, 과학 등의 분야에서 이슬람의 선진 문물이 유럽에 소개되었고 인쇄술, 화약, 나침반 등이 전해졌다. 또한 십자군 운동은 육상, 해상 교통을 자극해 해상무역 확장에 영향을 주었다.
기독교에 끼친 십자군 운동의 영향은 최악의 결과를 낳았다. 십자군들이 예수의 이름으로 포학한 행위들을 자행하여 이슬람교인들의 가슴에 씻지 못할 흉터를 남겨주었다. 기독교 세계에서 십자군 운동은 거의 잊혀졌지만 그들의 더러운 행실에 대한 기억은 이슬람교도들의 가슴에 오늘날까지 깊이 박혀있다. 기독교도의 잔악성과 복수행위에 대한 악명은 중동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는 기독교 선교사들에게 오늘날까지 큰 어려움이 되고 있다.
3.진출의 3세기(1500-1800)
1) 로마 카톨릭의 선교(A. D. 1300 - 1700)
종교개혁으로 인해서 많은 교회가 개신교 회로 돌아섬으로 많은 손실을 얻었으나 중국, 일본, 필리핀, 인도차이나, 인도, 신세계, 아프리카 등지에 선교사를 보냄으로 많은 결실을 얻었다. 유럽에서 개신교에 회심 자를 잃은 것보다 더 많은 이교도 회심 자를 1500년부터 1700년 사이에 얻었다.
2) 개신교 유럽 선교의 기원(A. D. 1600 - 1800)
선교는 먼저 대륙에서 시작되었는데 1555년에 칼빈이 4명의 성직자와 프랑스 위그노일단을 리오 데 자네이로만에 보내 박해받는 개신교도들을 위한 영지를 개척한 일이다.
개신 교회가 종교 개혁 후 곧장 선교에 전념하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종교 개혁자들의 신학의 문제이다. 그들은 지상 명령이 원 사도들에게만 해당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또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편협된 이해로 선교의 열심을 가지지 못하였다. 그리고 교세의 약함도 한 몫을 했다. 루터교와 개혁파 교회 사이의 논쟁도 한 원인이 된다. 해외 진출한 두 나라 즉 스페인과 포르투칼이 모두 카톨릭 국가여서 개신교는 아시아, 아프리카에서 고립되어 있었다.
1648년 이후에 독일에서 시작된 경건주의 운동의 직접적인 소산이 곧 근대적 선교 사업의 발단이다. 경건주의 시조는 필립 스페너이다. 경건주의 신학은 '전도의 열정 없는 한 설교의 비젼이 있을 수 없고, 개인적 경건 생활이 없는 한 전도의 열정이 있을 수 없으며, 진정한 회심 체험이 없는 한 개인적 경건 생활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할레 대학에서 첫 번째의 개신교 선교 기구가 형성되었으니 그것이 곧 덴마크 할레 선교회이다. 인력과 많은 지원이 할레에 의해 공급되었으며 그 초기적 발달은 덴마크에서 주어졌다.
니콜라스 진젠돌프는 스페너에 의해 복음을 듣고 회심하였고 할레에서는 프랑케의 입문 학교에서 공부한 사람인데 젊은이로서 그리스도를 위해 자신의 시간과 재물을 다 헌신하기로 작정하였다. 진젠돌프와 프랑케는 18세기에 있어 가장 훌륭한 선교 지도자로 꼽히고 있다. 그리고,경건주의 운동에 있어 주요한 인물도 역시 스페너, 프랑케, 및 진센돌프였다. 영국의 경우 복음적 각성에 있어 위대한 설교자는 웨슬레와 휘필드였고, 미국의 경우는 죠나단 에드워더였다. 초기 영국 선교회는 일반적으로 1792년에 근대 선교의 아버지라고 하는 윌리암 케리와 더불어 시작한 선교를 영국 선교의 시작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정확하지 않다. 이미 그 이전에 세 개의 선교 기관이 이미 있었다. 첫째는 1649년에 창설된 뉴잉글랜드의 '복음 선포회'이고 둘째는 '기독교 이해 증진회' 셋째는 '해외 복음 선포회'로서 SPG로 알려져 있다.
3) 영국과 미국 개신교 선교의 기원(A. D. 1750 - 1850)
개신교 선교는 윌리암 케리에 의해 출항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는 라틴어, 헬라어, 히브리어, 이태리어, 프랑스어, 화란어까지 독학으로 배웠다. 그가 출간한 유명한 책은 '이교도의 회신을 위해 수단을 사용하는 그리스도인의 책임에 관한 조사'이다.
미국의 선교사로는 사무엘 밀즈, 건초 그룹, 져드슨, 리챠드스, 프란시스 로빈즈, 하비 루미스, 고든 홀드이 활약을 하였다. 1973년 현재 485개의 기관이 해외 선교 업무를 맡아 파송과 지원을 하고 있다. 세계 개신교 선교사 숫자의 70%가 미국에 속한 사람들이며 또한 해외 선교 예산의 많은 비율을 담당하고 있다.
4.19세기 이후의 기독교 (1800-1914)
위대한 2세기 (1800-2000)
수많은 선교사 파송,과학적/경제적 변화,산업혁명,중국개방,기독교와 식민주의,복음주의 영적운동,초교파적 선교단체의 홍수,성경번역으로 언어장벽 극복을 하기도 하였다.
1) 19세기의 개신교 선교 현장
유럽 세력의 아시아, 아프리카 침투에 세 가지 주요 그룹이 있었다. 그것은 외교관 그룹, 상인 그룹, 선교사 그룹 등이다. 피선교지 국민들의 눈에는 이러한 세 가지가 정치, 경제, 문화적 식민주의로 보았다. 지리적 측면에서 십자가 뒤에는 국기가 따라 왔다. 근대적인 선교 사업은 다양한 선교 형태로 나타났다. 최초의 선교 형태는 초교파적이었다. 그후 교파선교회, 신앙 선교회, 특수 선교회가 생겨났다. 성서 공회는 선교에 괄목할 만한 공헌을 했다. 그중 영국 해외 성서 공회, 스코틀랜드 성서 공회, 네덜란드 성서 공회, 미국 성서 공회가 큰 공헌을 했다.
19세기 선교사들의 특징은 교육적 측면에서 보면 폭이 넓어 반 문맹의 장색에서 대학원 졸업생까지 있다. 독일과 스코틀랜드 출신의 선교사들은 상당히 많은 훈련을 받은 사람들로서 거의 대부분이 대학 출신 자들이었다. 미국의 초기 선교사들도 그리 하였다. 그들 대부분은 동부 연안의 명문 대학과 신학교를 졸업한 사람들로서, 선교지에도 대단한 명문의 교육기관을 설립하였다. 반면 영국 선교사들은 그렇지 못했다. 허드슨 테일러는 신앙 선교회를 설립 하였다.
19세기의 선교사들은 남녀가 모두 깊은 확신과 사랑이 충만한 사람들이었다.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면 영원히 멸망한다는 것을 의심 없이 믿고 있었다.
개척 선교사들은 위험과 수고와 고통을 불구하고 그 거대한 대륙의 심장부에 스며들었으며 그들이 가는 곳마다 피와 땀과 눈물로 얼룩져 있는 것이다. 서부 아프리카는 백인들의 묘지라고 불릴 정도로 많은 선교사들이 죽었다.
19세기를 위대한 세기라고 부르는 이유 가운데 하나는 그 시대에 수많은 선교사들이 나왔기 때문이다. 그리고 많은 결실을 얻었다. 순전한 마음과 대단한 용기를 가지고 이들은 당시의 수많은 사회 폐습을 공격하였다. 세계 각처에서 선교사들은 학교, 병원, 의대, 고아원, 나환자 촌을 시작하였다.
2) 20세기의 개신교 선교 발전
신앙 선교 운동은 모든 공급은 주님께만 의지함으로 해결하는 것이었다. 빚을 지지도 않지만 고정된 자금도 없이 경우에 따라 그리스도인에게 필요한 것을 알리고 하나님께서 그들의 마음을 감동시키기를 기대하는 것이다. 신앙 선교 운동의 특징은 꾸준한 질, 계속적 동적인 성장, 창조성이 뛰어났다.
성서 학원 운동은 1880년대에 시작하였는데 신앙 선교 운동보다도 더 활발하게 주로 북미 지역에서 나타났다. 1880년대에 일어난 운동으로서 괄목한 성과를 얻은 것은 로버트 윌더의 선교비젼, 19세기의 위대한 부흥사였던 무디의 영적 능력, 죤 모트의 천재적인 조직력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1931년 크리스마스날 에콰도르의 HCJB방송이 최초의 방송 선교를 시작하면서부터 새로운 의미를 갖게 되었다. 마닐나에 본부를 두고 있는 극동 방송국의 활동이 큰 역할을 하고 있다. 라디오 방송과 함께 성경 통신 과정이 있다. 오랜 세월 동안 수백만 명이 이 통신 과정에 등록하였다. 인도의 24개어로 성경 공부를 지도하는 생명의 빛 통신 학교에는 1940년대 이래로 100여만 명이 등록하였다.
1945년에서 시작하여 유엔의 회원국은 51개국에서 149개국으로 증가하였다. 과거 식민지들이 분리 독립하였기 때문이며 선교사들도 스스로 서야만 했다. 제 2차 대전 이후에, 모든 종교에 대한 가장 강력한 적수는 공산주의로서 이미 아시아 여러 나라에서 대단한 세력을 장악하고 있었으며 아프리카, 남미, 중공, 몽고, 북한, 베트남, 라오스, 캄보디아에서 선교사에 대한문을 닫았다.
세계 대전 이후로 미국 주요 교단의 선교에 대한 관심과 활동은 현저하게 감소되었다. 이것은 자국민 교회가 독립되고 성장했고, 민족주의의 고조로 인하여, 자유주의 신학의 영향, 교회의 재정 부족이 문제였었다.
1960년대에 두 가지의 새로운 프로그램이 개발되었다. 즉 단기 해외 선교 계획과 하절기 선교 계획이다. 연장 신학 교육(TEE), 이것은 1960년에 과테말라의 장로 교회에서 이 운동이 시작되었다. 이 운동의 주도적인 인물은 랄프 윈터였다.
IVF에 의해 개최되는 울바나 선교 대회의 영향, IVF, 네비게이토, CCC등이 대학생 사이에서 훌륭한 사역을 수행함으로 인해서 젊은이들이 선교에 많은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또한 선교사들은 인쇄물에 대하여 매우 높은 우선권을 두어 왔다.오랫동안 선교는 백인의 책임으로만 생각해 왔으나 이제 바뀌어 한국, 일본, 필리핀 등에서 많은 선교사가 배출되었다.
5.선교의 미래상
발전적 전망과는 달리 난제도 아울러 있는데 이것은 선교사 지원 비의 앙등, 민족주의의 고조와 확대, 정치적 불안정 및 민주주의의 붕괴, 사회적 불안과 변화의 요구, 비기독교 종교의 재기, 아랍 제국이 경제적 및 정치적인 충격, 공산주의의 호소력과 위협 등을 들 수 있겠다. 고무적인 현상들로서 국내 교회의 영적 부흥, 세계적인 문제에 대한 의식과 증가, 전도에 대한 관심도의 고조, 교회 성장에 대한 관심도의 고조, 선교지 현장 방문 여행의 증가, 가치 있는 학문으로서의 선교 관등을 들 수 있다. 전례 없는 기회들로는 사람들의 마음이 많이 열려 있다. 빌리그래함은 1973년 '기독교 세계의 중심 세력이 서양에서 동양으로 옮겨가고 있는 것 같다'하였다.
성경의 번역과 보급이 활발하고 수많은 언어로 성서는 번역되어 배포되고 있다. 또한 세계적인 라디오 방송망의 확대되고 있다. 선교사들이 운영하는 기독교 방송국만도 65개가 넘는다. 공립학교에서 종교 지식을 가르친다.
[참고자료]
1. www.inni-mission.pe.kr
2. 기독교 세계 선교사 / 허버트 케인 저
3. 김주헌 간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