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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 놀라운 것들을 기대하라. 하나님을 위해 위대한 일들을 시도하라.
- William Carey -


윌리암 캐리
(1761-1834, William Carey)


1761년 영국 노스턴햄프턴셔에서 윌리암 캐리는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교회와 집에서 매일 성경말씀을 듣고 자란 그는 1779년 비국교도들의 기도모임에 참석했을 때에 히브리서 13장 13절 "그런즉 우리는 그 능욕을 지고 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자"는 말씀에서 그는 깊은 감명을 받았고 전 생애를 주님께 헌신하여 복음을 전하고 사람들을 그리스도께 인도하는 거룩한 사역을 통해 섬기기로 결심했다. 그는 새로운 관점으로 성경을 읽어나갔다. 캐리는 설교를 위해 많은 공부와 히브리어, 이태리어, 화란어, 불어 공부도 하여 복음전도자로서 복음을 효과적으로 전하기 위한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가르치고 배우는 것에 대한 욕구가 남달랐던 그는 몰튼에서 교사생활과 구두가게를 같이 하였다. 그리고 그는 침례교회에서 목회자로서의 능력을 인정받았고 교회와 가정, 학교 모두 안팎으로 충실했다.

캐리는 「쿡 선장의 마지막 항해」라는 책을 읽으면서 "와서 우리를 도우라"는 마게도냐인의 외침을 들었다. 그는 교회 역사에 관한 책을 탐독하고 매일 세계선교정보들을 모아 선교지도를 만들어 나갔다. 그는 비전을 함께 나누기 위해 모은 자료들을 「이교도의 개종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의무에 관한 연구」라는 책으로 출간하였다.
그는 후원회만 있다면 타이티를 시작으로 태평양에 있는 섬들로 가기를 원했으나 인도의 의료선교사로 활동했던 토마스와의 연결로 인해 인도로 수정하였다.

「이교도의 개종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의무에 관한 연구」발간 이후 침례교회 목회자 모임의 설교에서 그는 세계선교에 대한 확신을 심어주고자 했으며 마침내 선교회를 설립하게 되었다. 인도에서 처음 얼마간 필요한 돈과 영국에 남아있는 가족생활비를 위해 영국도처를 순회하며 성공적인 선교사역을 위해 기도로 후원해 줄 것을 호소했다. 인도로 떠나는 길에 그는 성경을 번역과 학교설립 계획을 세우고 벵갈어를 배우는데 힘썼다.
1794년 캐리는 무드나배티 지방의 인디고 공장에서 일함으로 이전까지의 연봉의 5배를 받게 되어 자비량 선교를 하고 번역을 위해 돈을 저축할 수 있었다. 그는 동료들과의 대화의 시간을 통해 인도언어를 더 잘 구사하고 지식을 넓혔고 힌두와 이슬람의 세계관에 대해 더 명확히 알고 그들의 관점을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일요일이면 캐리의 동료, 회교도, 힌두교도들이 캐리의 설교를 들으러 왔고, 오후에는 인근 마을에서 노방전도를 했다. 그는 산스크리트어, 힌두어도 열심히 공부하고, 성경을 벵갈어로 번역하는 작업도 계속했다.

1800년 공장을 정리하고 덴마크의 영지인 세람포르로 옮긴 캐리는 선교사들의 공동생활이 선교 초기단계에 비용, 효율성, 교제면에서 효과적이라고 확신하고 여섯 가족을 한 공동체로 묶어 공동사역을 시작하였다. 그들은 공동체 생활에 있어 오해를 막기 위해 토요일 저녁마다 모여 허심탄회하게 이야기를 나누고 교제를 하였다. 후에 7명의 선교사 중 3명만 남게 되어 캐리의 공동사역이 현명했다는 것이 증명됐다. 그들은 조직화된 교회생활의 필요를 느끼고 캐리를 목사로 침례교회를 세웠다. 또한 성경번역에 많은 힘을 쏟았고 부유한 사람을 위한 기숙학교를 열어 수입을 늘리고, 어려운 아이들을 위한 무료 기숙학교도 열었다. 1800년 첫 개종자 크리슈나 팔에게 벵갈어로 세례를 주고 첫 벵갈어 예배를 드렸다. 세람포르 선교기지는 복음증거를 위해 선교여행을 다니며 1803년에는 캐리의 두 아들 펠릭스와 윌리암이 최초의 주일학교를 열었다.

1801년 캐리는 캘커타에서 영국 공무원들을 교육시키는 포트윌리암 대학에 벵갈어 교수로 부임했다. 그 결과 선교사들이 사적으로 번 돈도 선교회에 헌금해야 된다는 원칙 하에 선교회의 재정이 늘어나고, 동인도 회사의 보호도 받게 되고, 인도의 저명한 석학들과 긴밀한 관계로 벵갈어 성경 번역본을 훌륭히 다듬을 수 있었다. 캐리는 산스크리트어로 된 인도 종교경전들을 조사하여 어린아이를 희생제물로 바치는 것과 과부들을 부당하게 죽이는 사티제도를 폐지시켰다. 당시 선교회 재정은 탄탄했지만 그들은 가능한 절약했다.
1802년에서 1809년 사이에 벵갈어로 된 구약성경이 장별로 인쇄되어 나왔다. 1813년에는 안팎의 노력으로 인도에서 공식적으로 선교의 자유가 허락되었다. 캐리는 각각 독특한 특성을 가지고 있는 언어들의 문법을 체계화시켜 정리하여 편찬하였다. 브라만 계층을 위해 인도의 고전어이자 종교어, 문학언어이며 거의 모든 인도 방언의 뿌리인 산스크리트어로 성경을 번역하였고 그것은 성공했다. 성경과 인도의 많은 경전들을 번역, 출판하기 위해 활자주물공장을 세웠고, 1832년까지 신구약 성경, 신약성경, 권별 성경이 44개 언어와 방언으로 출판되어 나왔다.

1813년 52세의 캐리는 대학교수이자 능력있는 사업가요 번역가, 인쇄업자이자 발행인이 되어 있었다. 해가 갈수록 선교사업이 확장되어 선교회 지부가 12개나 세워졌다. 그들은 교회의 성도들을 교육시키고 효과적 복음 전파를 위한 인도교회를 자립시키기 위해 아시아 최초 학위수여대학인 세람포르 기독교 대학을 세웠다.

선교의 개척자 캐리는 인도와 인도인들에 대한 사랑으로 무척 바빴지만 가족들을 소홀히 하지 않은 안팎으로 헌신적인 사람이었다. 그는 일과가 끝난 후 편지를 통하여 바쁜 생활 중에 사랑과 관심을 확인시켜주었다. 말년에도 그는 인도인들의 복지에 관심을 두어 인도농업협회를 발족시키게 하였다.
처음 침례교 선교협회가 세워진 이후 여러 선교협회들이 세워졌다. 1834년 그는 떠났지만 캐리가 시작한 사역은 오늘날에도 계속되고 있다.


[ Webzine MIR 2002년 1월호 Index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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