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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슬프도록 아름다운 자취를 따라서...
서대문 형무소
글,구성:이정민(MIR) / 사진:이은경(MIR)

시간은 봄을 말하는데 느낌은 여전히 겨울을 붙잡고 있다. 어제 내린 비 때문일까..
촉촉한 단비로 한결 싱그러워진 땅이 따스한 봄볕을 기다리고 있다.
문득 지나가는 차가운 바람은 이곳 서대문형무소의 계절이 아직은 봄을 노래할 때가 아니라는 듯 속삭이며 스쳐간다. 아직 갈 길이 남아있음인가...

민족이니 나라니 하는 것에 무감한 사람도 한번쯤은 제 나라 제 민족에 대해 생각해 볼만한 3월의 문턱, 우리는 서대문구 현저동 독립공원 내에 자리하고 있는 서대문형무소를 찾았다.
조국 광복을 맞기까지 수많은 애국지사들을 투옥하고 감금하여 고문과 처형을 자행한 일제의 대표적 탄압기관이었던 이곳은 종래의 전옥서를 개편한 가장 오랜 역사를 가진 행형기관으로 행형의 근대적 개혁이 시작된 이후 최초로 설치된 감옥시설이다.
1908년 10월 21일 경성감옥으로 문을 연 뒤 1912년 9월 3일 서대문감옥으로, 1923년 5월 5일에 서대문형무소로 이름을 바꾸고, 다시 1945년 11월 21일에 서울형무소로, 1961년 12월 23일에 서울교도소로, 1967년 7월 7일에 서울구치소로 명칭이 변경된 후 1987년 11월 15일에 경기도 의왕시로 서울구치소가 옮겨가기까지 민족 수난의 역사를 간직해 왔다.
이후 1992년 8월 15일에 독립공원이 개원되었고 1995년부터 서대문형무소에 대한 성역화 사업이 시작되어 조국독립을 위해 투옥되어 모진 고문과 탄압을 받고 순국하신 애국선열들을 기리고 역사의 산 교육장으로 삼기 위해 1998년 11월 5일 서대문형무소역사관이 개관되기에 이른다. 그렇다면 이 붉은 담장 안에 어떤 세상이 있었을까.. 함께 들여다보자.

당시에 고문으로 악명 높았던 보안과 청사가 현재는 전시관으로 쓰이고 있는데 입구에 들어서면 제일 먼저 좌측으로 영상실, 우측으로 안내실이 보인다. 영상실에서는 서대문형무소의 설립배경과 역사적 변천과정을 담은 7분짜리 입체 영상을 볼 수 있고 안내실에서는 '터치스크린'을 통해 관람객들이 서대문형무소에 대한 정보를 직접 찾아 볼 수 있다. 단, 영상실은 단체 관람객에게만 제공되기 때문에 개인은 전시장 곳곳에서 상영되고 있는 다른 영상물을 활용해야 한다.
통로를 따라 우측으로 좀 더 들어가면 기획전시실을 볼 수 있다. 이곳은 순국선열들을 추모하기 위한 다양한 기획전이 열리는 곳인데 현재는 "일제 강점기 항일학생운동"을 다룬 기획전이 열리고 있다. 중앙에는 독립운동가의 유품과 함께 용수, 수갑, 족쇄 등과 같은 도구들도 전시되어 있다.
하나하나 자료를 읽어가다 보니 모진 고문 끝에 출옥했지만 후유증으로 출옥 하루만에 유명을 달리한 어떤 독립운동가의 사진에 시선이 멈춘다. 모 종교의 대표자였다는 그분의 이력을 대하고 보니 마음속의 애석함이 배가 되는 것 같다. 생명을 버려 나라를 되찾았으나 진정으로 찾아야 했을 더 큰 본향은 영원히 잃어버린 안타까움... 마음이 무겁다.
미처 마음을 수습하지도 못한 채 무작정 계단을 따라 올라간다. 계단 전면으로 독립운동과 체포당시의 모습을 태극문양으로 연출한 인상 깊은 작품이 눈에 띤다. 이후 도착한 곳은 민족저항실. 형무소 설립에 따른 역사적 배경과 우리민족의 항일저항사를 시대적 사건별로 전시해 놓은 곳이다. 특히 이곳에서는 강우규 의사가 1919년 9월 2일 남대문역(현 서울역)에서 조선총독 사이토에게 폭탄을 투척하는 의거 장면을 첨단영상기법인 매직비젼으로 생생하게 재현해 놓고 있어 눈길을 끈다. 강의사는 일제 침략 이후 북만주와 시베리아 등지에서 민족교육과 국권회복운동을 벌인 분으로 장로교 전도사까지 지낸 독실한 기독인이었다. 3·1운동 후에는 '대한노인동맹단'에 가입, 조직적으로 독립운동을 벌이기도 했는데 의사가 거사를 행한 당시의 나이는 66세였다. 민족의 저항이 연령이나 계층, 성별을 불문하고 유관순과 같은 소녀에서부터 의사와 같은 노인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람이 동참했던 것임을 알게 해준다. 거사 후 동료들과 함께 피신해 있던 의사는 결국 같은 동족인 조선인순사의 밀고에 의해 발각되어 순국하게 된다.

`동포여 나의 용모를 기약하지 마오/하늘이 주신 충렬 몸과 뼈에 새기오/삶과 죽음의 종적은 바야흐로 다시 이어지나니/천국은 이미 의사(義士)들에게 열려 있소'
(1920년 12월 기독신보,강우규 의사의 유시, 국민일보사에서 재인용)

다음에 이른 곳은 형무소역사실. 이곳에서는 서대문형무소의 변천 과정과 전국 형무소의 현황, 1934년 당시의 서대문형무소의 배치 모형을 한 눈에 볼 수 있다. 3.1 운동 이후 감옥 수용인원이 날로 증가하자 계속 감옥시설을 확장해 나간 일제는 일제 말기에 모두 17개 형무소와 11개 지소를 운영하기에 이른다.
이어지는 전시관은 옥중생활실. 일제의 고문과 탄압에 관한 옥중생활의 실상을 전시하고 있는 곳인데 이곳에 가면 입체적으로 구성된 사형장의 절개 모양도 볼 수 있다. 벽관, 독방 등과 같이 일부는 관람객이 직접 체험할 수 있도록 재현해 놓은 것도 있다. 벽관은 일제가 애국지사들의 고문도구로 사용했던 것으로 2-3일 갇혀 있으면 전신이 마비되는 지경에 이른다. 관을 세워 놓은 모양에 안은 사람의 신체 구조를 따라 역삼각형 구조로 되어 있는데 실제로 들어가 서 보면 사방 어디에도 미동을 허락할 조금의 여유 공간도 없음을 보게 된다.

애국지사들을 구금하고 고문했던 악명 높은 보안과 지하감방의 임시구금실과 각종 고문실은 밀랍인형을 통해 당시의 잔혹했던 상황을 그대로 연출시켜 놓았다. 어두컴컴한 통로를 따라 걷다 보면 폭력과 고문으로 인한 애국지사들의 신음이 생생하게 들려온다. 우리의 상상을 초월한 애국지사의 일그러진 고통과 분노가 그대로 느껴지는 장면들이다.

통로를 따라 나와 조금 위로 걸어가면 건물 세 동을 부챗살처럼 펼쳐 놓은 듯한 옥사를 만난다. 건물이 모이는 중앙에서 시야만 돌리면 온 감방을 모두 감시할 수 있는 그런 구조로 되어 있는데 한 동을 개방해 놓아 직접 들어가 볼 수 있다. 사람 하나 누우면 머리 끝과 다리 끝이 닿을 듯한 독방도 있다. 전시관에 재현되어 있던 독방은 어둡지만 그래도 전시관의 작은 조명 덕분에 그렇게까지 공포스럽지는 않았었다. 그런데 실제 독방이었던 곳을 들어가 보니 한낮인데 빛은 흔적도 찾을 수가 없다. 5분쯤 혼자 들어가 있으면 빛이 안드는 폐쇄공간이 인간을 얼마나 공포스럽게 하는지 느낄 수 있다.
옥사는 모두 7개동이 보존되어 있는데 이중 1915년에 지어진 제 10,11,12 옥사는 사적 324호로 지정되어 있다. 작업 공장인 제13옥사와 중앙사는 1923년에, 제9옥사는 1929년에 지었다.
옥사의 한 부분에서는 독립운동가추모전이 열리고 있는데 이달의 독립운동가는 이필주 선생이다. 기독교 대표로서 활발히 독립운동을 주도했던 어른이시다.

한센병과 장애인 수감자들을 수용했다는 한센병사, 수감자들의 탈옥을 막고 동태를 감시하기 위해 설치한 붉은 벽돌담과 망루, 서대문 형무소에서 순국한 선열들이 기록된 작은 추모비를 지나면 마침내 사형장에 이르게 된다. 조국의 독립을 미처 보지 못하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져간 순국선열들의 통곡과 아픔이 배여 있는 곳이다. 1923년 일제가 지은 목조건물로 입구엔 통곡의 미루나무라고 불리는 큰 미루나루 한 그루가 서 있다. 사형장 옆엔 사형 집행된 시신을 비밀리에 옮겼던 비밀통로가 있는데 그 입구를 시구문이라 부른다. 일제가 철수하면서 폐쇄해 놓은 것을 독립공원을 조성하다 찾아낸 것인데 인근 건물의 안전 때문에 일부만 복원시켜 놓았다.

애국지사들의 손때가 담긴 붉은 벽돌로 만들어진 작은 길을 지나 마지막으로 찾은 곳은 지하감옥. 여성만을 투옥시키기 위해 1916년에 신축한 여성옥사를 복원해 놓았는데 높이 148cm의 작은 지하 독방은 애국지사들을 투옥시켜 가혹한 신문과 고문을 하는 장소로 사용되었다. 특히 이곳은 유관순 열사가 일제의 모진 고문 끝에 순국하신 곳으로 일명 '유관순굴'이라고도 불린다. 유관순의 시체는 고문 흔적 등 그 파장을 우려해 시체를 넘겨주지 않으려던 일제가 세계언론에 알리겠다는 외압에 못 이겨 넘긴 뒤 이태원 공동묘지에 묻혔는데 신작로가 나면서 묘소가 훼파되고 인근으로 옮겨졌다가 곧 유실되고 말았다. 신앙의 선배가 남긴 소중한 피흘림을 가볍게 대하는 부끄러운 후손들의 모습이다.

여성옥사를 끝으로 몸을 돌이켜 걸어온 길을 쳐다보니 거쳐 왔던 서대문형무소 곳곳의 모습이 한눈에 들어온다. 민족의 치욕과 아픔을 간직한 곳으로 보기엔 너무나 아름답고 평온한 모습.

길을 돌아 서대문으로 향하는데 차창 너머로 미처 둘러보지 못한 독립공원의 모습이 보인다. 서대문형무소와 독립공원이라... 걸어가면 5분도 채 안될 그 곳에 이르는데 실은 수십년이 걸렸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니 사이좋게 나란히 자리한 그 모습이 도리어 서럽고 야속한 마음까지 든다. 그러나 달리 생각하면 서대문형무소와 독립공원은 동전의 양면 같다. 고난과 희생의 다른 얼굴은 소망과 회복이기 때문에 그렇다. 결국 이 둘은 둘로서 동일한 하나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믿음장이라고 일컬어지는 히브리서 11장에는 이런 사람들이 언급되고 있다.

희롱과 채찍질,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험,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에 죽는 것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던.. 그러나 오직 믿음으로 나아가므로 세상이 감당하기 어려웠던 하나님의 사람들..

서대문 형무소에서 만난 믿음의 선배들은 바로 성경이 말하는 이런 사람들이었다. 민족 앞에 놓여진 홍해같이 절망스런 바다를 육지같이 건넌 하나님의 사람들 말이다.

한국교회는 한국 근대사와 맞물려 모진 고난을 견디어 냈고 많은 순교자들의 피를 토양삼아 오늘의 놀라운 성장을 이뤘다. 한국교회사에서 순교자로 기록된 많은 이들은 더불어 민족사에서는 애국자로 기록되는 분들이기도 했다.
그렇다면 오늘을 사는 믿는 우리는 어떤 길을 가야 할까. 또한 이 땅에 심겨진 우리의 부르심은 무엇인가.. 에스더처럼 바울처럼 동족을 위한 애통으로 가슴을 찢고 마음을 찢어 하나님께 나아가며 각자를 제물로 드려야 할 때는 아닌지..

서대문 형무소를 뒤로 하면서 내가 그리고 우리가 가야 할 길이 무엇인지 깊은 묵상에 잠기게 된다.

(서대문형무소역사관 T.363-9750-1)


[ Webzine MIR 2002년 3월호 Index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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