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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3월 13-16일 캄보디아한인선교사 초청으로 프놈펜을 방문했습니다.
이영제 목사







한국컴퓨터선교회 회장 이영제 목사


캄보디아의 방문은 오랜 바램이었다.

시아누크가 왕으로 있을 1993년 하와이 교포를 통해 당시 우리나라와는 비 수교국가인 캄보디아를 갈 생각을 하고 있었다. 당시의 프로젝트는 286급 컴퓨터(당시 최고 기종) 20대를 캄보디아에 기증하는 조건으로 컴퓨터 교육을 목적으로 방문승인을 얻었다. 당시는 기독교의 복음전파를 완강히 차단하고 있었기 때문에 노방전도나 교회건축 등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그래서 대신 컴퓨터 교육장을 통해서 사람들과의 접촉을 통해서 서서히 복음의 기반을 다져간다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비 수교국가방문 신청을 외무부에 신청했는데 국교가 이루어지지 않고 완전히 전쟁이 종료되지 않은 치안이 불안한 국가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이다. 이 문제로 한동안 기도했다. 태국까지 가서 비행기를 타고 캄보디아로 바로 들어오면 나머지 문제는 캄보디아에서 해결하기로 결정했지만 선교를 위해서 앞으로도 지속적으로 여러 나라를 방문할 계획이 있었기 때문에 외무부의 권고를 받아들여 방문하지 않기 결정했었다.(한국컴퓨터선교회 회보, "컴퓨터와 선교", 1993.6.15, p.10. 에 당시 컴퓨터를 수집하는 광고가 실려있다.)

이로부터 10여 년이 거의 다 되어서 2002년 3월 13일 캄보디아 땅을 밟게되었다. 캄보디아 한국선교사협의회의 초청으로 강의와 월례회에 참여 차 방문하게 되었다. 애꿎은 것은 태국과 베트남에는 여러 번 다녀왔지만 바로 옆 나라인 캄보디아에 이제야 오게되었다는 것이다. 남다른 감회를 느끼면서 밟은 캄보디아 땅은 이웃 베트남과 그리 다르지는 않았다. 다만 도로의 사정이 아직 포장된 도로가 시내 중심도로 하나밖에 없다는 것과 프놈펜 시내는 사방 4-6Km를 넘지 않는 작은 도시라는 것이다.

겉으로 보아서는 주위 환경이 크게 발전하지 못했다는 것 위에는 사람들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얼굴을 마주치면 빙그레 잘 웃었다. 오히려 아시아의 주변 국가들 사람들 보다 더 잘 웃고 얼굴이 밝아 보였다. 하지만 이들 중에는 가족이나 가까운 친족 중에 킬링필드의 사건에 관여되지 않은 사람이 없다는 것이다. 정확한 수도 알 수 없이 대략 250-300여 만 명이 이유 없이 죽어갔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들은 사람을 보면 일단 친근하게 보이려는 것인지 아니면 별일 없다는 것인지 멋쩍게 씩 웃는 버릇이 생겼다는 것이다.
또한 잘못을 시인하지 않는 습관이 들었다고 한다. 당시의 사람들이 이유 없이 죽이고 또 잘못이 있다면 죽어야 된다고 말해 이들은 잘못을 시인하지 않는다.
그때의 이야기를 전해지는 것은 부르주아라고 말하는 사람들 위주로 모두 잡히는 데로 죽였다는 것이다. 인지손가락에 굳은살이 박혔으면 펜을 많이 사용한 사람이라고 죽이고, 손이 깨끗하면 죽이고, 얼굴이 희다고 죽이고, 안경 썼다고 죽이고, 피아노를 치고 기타를 칠 줄 알면 죽이고, 뚱뚱하다고 죽이고, 영어한마디만 하면 죽이고, 선생님 죽이고, 각 계층의 지도자급은 모두 죽이고, 심지어는 전통적으로 불교 국가인데 스님들도 거의 다 죽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들이 꿈꾼 나라는 무엇일까? 그것은 프놈펜 시내의 사람들을 강제로 시골로 이주시키고 환상적인 농업국가를 만들겠다는 것이다. 북한의 천리마 운동 같이 밤새도록 노동을 하게 하고 일정한 량의 일거리를 주어 그 일을 완료하게 했던 것이다.

프놈펜 시내의 학살현장이 발견된 것은 베트남이 침공하여 3일만에 프놈펜을 장악하면서 참혹한 현장이 그대로 드러났다. 너무 빨리 베트남이 들어왔기 때문에 각종 서류와 사진, 사람들을 이주시키지 못한 체 베트남 군이 들어온 것이다.

뚜올 슬랭(Tuol Sleng)박물관은 1975년 당시에 고등학교였는데 킬링필드의 주역 '폴포트'가 형무소로 개조하여 s-21로 불리면서 17,000여명의 인원을 수용했었으나 1979년 베트남 군이 이곳을 침공했을 때는 7명만이 생존해 있었다고 전해진다.
1975년 이후 3년 간 당시 인구 800만 중에 200만을 학살한 폴포트가 프놈펜시내 고등학교를 고문 및 처형장으로 만든 이곳엔 수감자들의 참혹한 죽음과 고문의 현장이 보존돼 있다. 이곳은 심문실, 고문실, 유치실로 만들어 혁명 정권의 악명 높은 숙청의 산실로 이용되었다. 이곳에는 직원이 1백 여명이나 되었는데, 타자수, 사서, 사진사, 전기기사, 대필사, 전직교사, 심문관 등으로 구성되어 혁명 정부의 충직한 집행 자로 활약하였다. 고문을 자행했던 보안대원, 심문관들은 대체로 교육을 받지 않은 어린 농부로 전투요원으로 맹위를 떨쳤던 혁명군의 첨병들이었다. 이들의 나이는 12-18세 가량의 청소년들이었다는 사실이 더욱 섬뜩하게 만든다.

사람들을 가두어 놓고 갖은 고문과 다양한 방법의 형을 집행한 증거들이 있었다. 아직도 핏자국과 냄새가 날 정도였다. 순진한 소녀의 사진은 왜 이들이 죽어야 했나를 도저희 누구도 설명할 수 없는 안타까움을 더했다. 죽은 사람들 중에는 상당수의 어린아이들도 포함되어있는데 폴포트는 복수를 우려해 어린이로부터 가족 전체를 죽인 것이다.

베트남 군이 들어오기 전에 증거를 없애려 했던 사람들은 몇 천명을 끌고 발에 쇠사슬을 채운상태에서 프놈펜 시내를 벗어나 몇 km까지 가서 숲이 약간 우거진 평지에서 닥치는 대로 죽였다.
이곳의 발굴 현장에서만 86개의 구덩이에서 8985개의 시체가 발굴되었다. 그 수는 해골의 수를 말하며 그 해골들만 모아놓은 탑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무참히 학살되었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해골들은 어린 아들로부터 골이 타박상을 입어 깨어진 것 등 이루 말할 수 없는 수많은 해골이 발견되었다. 말로만 듣던 킬링필드의 현장은 그 참혹함이 더해서 남자인 나도 그 날 밤은 몸서리가 처질 정도였다.

베트남이 캄보디아를 쳐들어간 이유에 대해서 캄보디아에서 들은 이야기로는 예전의 땅을 찾겠다며 먼저 베트남을 침공했다는 것이다. 미국과의 전쟁을 마친지 얼마 안된 베트남은 내분수습에 시간이 필요했고 이후 우기가 끝나자마자 곧바로 쳐들어가 3일만에 프놈펜을 장악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베트남에서의 이야기는 베트남계와 중국계통의 종족을 대량 학살했기 때문에 쳐들어갔다고 한다. 이유야 어쨌든 베트남의 침공으로 킬링필드는 종결되었고 어떤 의미에선 구세주가 되었던 것이다.

공산혁명의 명분으로 무참히 죽인 생명

1975년-1979년1월사이 폴포트 정권 공산치하에서 캄보디아 전체인구의 1/3이 희생되었다. 엄청난 민족 대 학살의 신호탄은 자기들간의 의견 조율 실패에서 일어났다고 전해진다. 1976년 9월 소집된 공산당 중앙위원 회의에서의 캄보디아 공산당 창설기념일에 대한 이견에서 시작되었다.
첫 번째 의견은 폴포트 자신이 1960년 서열 2위로 캄보디아 노동당 KWP을 창설했을 때를 희망했으나, 또 다른 의견은 1951년 베트맹 공산당의 지배적인 영향 하에 창설된 크메르 인민 혁명당 KPRP을 창설 일로 하자는 주장이 제기 되었다.

이에 노한 폴포트는 1951년 안에 동조했던 두 명의 고위 간부 케오 미아스( Keo Meas )와 논 수온(Non Suon)이 당 지도부를 배반하였다는 죄목으로 체포되어 혁명정권의 악명 높은 심문센타 뚜올 슬랭(Tuol Sleng)으로 끌려가 처형되었다.
폴포트는 두 명의 고위 당 간부를 숙청한 이후부터 미세균이 침투하여 당이 병들었다면서 악덕 세균 색출을 지시했다. 악덕 세균으로 간주되는 자들은 혁명에 반대하는 사람들, 당내 반 혁명분자, 전 정권의 관리와 군인들, 전직 교수 및 교사, 지식인, 의사와 약사, 중산층 등이 목표가 되었다. 그리고 베트맹이 주도할 때 공산주의 운동에 가담했던 당원들, 그리고 베트남 국경지대인 동부지역에 연관된 관리나 그 지역 사령관이나 군인들 등이 숙청되었고, 그리고 중국의 '문화혁명'에 자극을 받은 폴포트가 공무원, 교사, 영어를 하는 자, 교육을 받은 적이 있는 학생, 안경을 쓴 사람, 손에 못이 안 박힌 사람, 외국서적을 가진 사람, 양담배를 피웠던 사람 등은 부르주아로 분류되어 처형하였으며, 국내에 있던 외국인들과 월남인들도 간첩의 협의로 모두 처형되었다.

이 심문센터에 끌려온 사람은 거의 무고한 사람이었다. 심문을 받은 사람은 다른 3명의 이름을 자술서에 적었고, 또 들어오는 사람은 다시 3명을 불러야 했고 심문 받은 모든 사람은 반혁명의 죄를 뒤집어쓰고 처형되었다.
당시 이 심문센터 한 곳에서 약 2만 명이 처형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는데, 심문센터 근처에 있는 노동자들은 이곳은 "들어가지만 나오지는 못 하는 곳" 이라고 이야기 하고있다. 이곳에 들어가 살아남은 사람은 약 10여명으로 추정될 뿐이다.

도시민의 추방과 4년 계획

크메르 루즈 공산 게릴라의 프놈펜 입성으로 내전은 끝나고 도시민들은 새로운 점령군의 활동에 큰 기대를 걸어 평온한 가운데 기쁨에 들떠 있었다. 베트남 스타일의 군복에 근엄하면서도 진지한 그들의 모습에 프놈펜 거리를 가득 메운 시민들은 환영으로 그들을 맞아 주었다. 그리고 그들 대부분은 15세 이하의 어린 소년들이었다.
그러나 그 환희도 잠시, 도시민들은 그 날 오후부터 혁명군이 짜놓은 각본대로 농경지대와 시골지역으로 추방되기 시작하였다.

이후 2개월 간 전국적으로 2~3백만 명의 인구가 농부로 신분이 바뀌어 시골지역으로 이동되었다. 그들의 긴 이동행군은 정말 힘들었고 이동 중 노약자와 환자 그리고 어린이들은 말라리아와 풍토병에 시달리기도 하고 그런 과정에서 죽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냉정하게도 대열에서 이탈한 사람들에게는 짐승보다도 더 차갑게 대했다. 추방 길을 인솔한 부대 원은 대부분 시아누크 정부와 논놀 정권시대의 가난한 하층민들로 1970 ~ 1975년 사이에 캄보디아 공산당에 가입하여 무산계급의 혁명을 교육받으며 착취계급에 대한 증오를 키웠던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도시민 추방 정책은 프놈펜 점령 수개월 전에 당 지도부에 의하여 결정되었는데, 그 배후엔 몇 가지의 정치적 계산이 깔려 있었다.

첫째는 당시 프놈펜의 인구는 각 지방에서 몰려던 피난민으로 2백만이 넘어 식량이 절대 부족하였고 , 혁명에 반감을 가지고 있는 중산층 이상 도시민들을 효과적으로 관리할 수 가 없었다.
둘째는 혁명 지도부 인사들의 안정성이 고려되었다. 이들은 오랫동안 지하활동과 산악생활에 익숙하면서 노출된 도시 생활을 불안해하였다.
셋째는 혁명 지도부가 도시를 반혁명의 토양과 혁명의 장애물로 인식하면서 반혁명의 온상을 갈아 업고 혁명정권의 기반을 다지려 했던 것이다.

4개 년 계획은 원래 모든 분야에서 사회주의를 건설하기 위한 계획이었다. 이 계획에 의하면 모든 캄보디아의 농토를 집단 농장화 하여 농업 생산량을 증대시키고 잉여 생산물을 수출하여 얻은 이익금으로 1차 경공업을 육성시키고 2차로 중공업을 발전시켜 세상에서 하나뿐인 완전한 자립국가를 만들어 1980년까지는 모든 사람이 매일 휴식을 즐기게 한다는 내용이었다. 이 계획은 구 소련의 "집단 농장제도" 와 중국의 "대약진 운동" 그리고 북한의 "주체사상"을 혼합한 공산혁명 정권의 야심찬 계획이었는데, 결국 환상으로 끝나고 말았다.

국제사회는 이지경이 되도록 방관자적 역할만을 해야했을까?
미국은 베트남 전쟁의 악몽을 떨쳐버리지 못한 상황에서 그것도 명문이 없는 남의 나라 싸움에 참여하는 것에 대해서 국민들의 여론이 좋지 않았을 것이다. 또한 이 싸움에 끼어 들어 얻어낼 것이 없는 상황에서 누구도 선 듯 나서지 않은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죄 없는 사람들만 왜 죽어야 하는지도 모르고 이유 없이 인구의 약 30%가 그렇게 죽어갔다.

무엇으로도 설명될 수 없는 이 무차별 학살은 아직도 많은 사람들을 떨게 하고 있으며 캄보디아의 다양한 문제로 남아있는 것이다. 그 중에 하나는 가정이 무너졌다는 것이다. 어떤 가정은 어린이만 남아있는 가정 어떤 가정은 어른만 있는 가정, 그래서 이들은 가정에서의 교육을 받지 못해 어린 나이에 성관계를 갖고 에이즈의 천국이 되어있다. 이런 상처로 인해 이들에게 가족사항이나 직업 등을 묻는 것은 실례가 된다는 것이다.

고 오형석 선교사 선교센타

이 땅에 복음의 씨앗을 심기 위해 한국 선교사들의 행렬이 1993년 이후 이어졌다.
고 오형석 선교사는 1995년 1월 캄보디아 땅으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 파송으로 낯설고 물설은 타국 땅에서 3년 가까이 눈물로 복음을 뿌려오던 중에 한국을 방문하고 다시 캄보디아로 가던 중 1997년 9월 베트남 항공기 815편이, 캄보디아 포첸통 공항에 착륙하려던 직전에 부터 갑자기 쏟아 붙는 폭우로 인해 시야를 알 수 없어 비행기가 추락해 사랑하는 아내, 그리고 두 아들과 함께 선교지인 캄보디아에서 순교했다. 그는 사고 전날 한국을 떠나면서 성도들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캄보디아는 선교의 오지다.
매우 위험하고 어려운 곳이기에 더욱 선교활동이 필요하다.
선교활동이 자유롭고 편안한 곳이라면 나는 이곳을 선교지로 택하지 않았을 것이다]


고 오형철 선교사를 기념하기 위해 그가 구입해 놓은 부지 위에 선교 센타를 세웠다.

이곳에서는 현재 인천제2교회(http://www.che2.or.kr/)에서 함께 교역자 생활을 했던 김항철(ppcam@hanmail.net), 홍정미 선교사가 후임으로 사역하고 있다.

이 선교센타에서는 1년 성경공부과정을 특별 제자양육과 같이 집중적으로 훈련시키고 있으며 전도활동도 함께 진행중이며 어린이 문행퇴치교육와 청년 영어교육을 위해서 프놈펜에서 50km 떨어진 껌뽕짬에서 매주 월요일 이곳 센타에 와서 토요일까지 열심히 가르치는 나리 선생님의 열심 속에 어린 학생들의 하루도 거르지 않고 열심히 캄보디아 문자를 익히고 있다. 껌뽕짬 주일학교에는 150명 이상이 모여 변변한 의자 하나 없이 땅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초롱초롱한 눈망울로 귀를 쫑긋 세우고 말씀을 듣는 이들의 모습은 모두 아기 천사를 보는 듯 하다고 한다.

이제 이 땅은 복음을 자유롭게 전하도록 허락했다. 교회도 세우고 전도도 할 수 있다. 머쩍게 웃는 저 웃음 뒤로는 누구도 치유할 수 없는 아픈 가슴을 안고 있다. 이유 없는 죽음을 맞이한 그들에게 있어서 자신들을 위해 오히려 목숨을 내어주었다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야기는 더 없는 기쁨의 위안과 치료가 될 것이다.

금번 캄보디아 방문을 위해 이병관 선교사님(현 선교사회 회장), 오태근 선교사님(총무)을 비롯해 캄보디아의 모든 선교사님들에게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특별히 이병관 선교사님(http://koreamission.net/cambodiacef/cef.htm)은 현재 암 수술을 받으시고 계속해서 치료를 받으시고 있습니다. 이런 와중에도 저희(KCM)사무실에 수술 후 하루만에 찾아오셔서 캄보디아 방문일정을 꼼꼼히 챙겨주셨습니다. 아울러 건강 회복을 위해서 여러분들의 기도를 부탁드립니다.


관련인물
폴포트 (Pol Pot) [1925.5.19~1998.4.15]
1928년 5월 25일 프놈펜 북부에서 90여 마일 떨어진 캄퐁 톰(Kompong Thom )주 프랙 스바우브(Prek Sbauv) 마을에서 양부모가 크메르족인 아버지 팬 살로쓰(Pen Saloth)와 어머니 속 넴(Sok Nen) 사이에서 9남매중 여덟번째로 태어났다. 프놈펜기술학교를 졸업하고 1949∼1953년 프랑스에서 유학하고 귀국한 후 지방에서 반정부투쟁에 가담하였다. 1960년 공산당창당대회에서 중앙상임위원에 선출되고 1963년 제2차 당대회에서 서기장이 되었다. 1970년 5월 민족해방군 최고사령부 부의장 겸 작전부장이 되었으며 1975년 6월 중국을 방문한 뒤 1976년 1월 제4차 당대회에서 서기로 재선되었다. 그해 4월 중국의 지원을 받아 민주캄보디아의 총리가 되었으나, 1979년 친(親)베트남군에 의한 프놈펜 함락 후 해임되고 게릴라군 최고위원회 의장 겸 총사령관을 지내다가 1985년 총사령관직을 사임하였다.

1978년 12월 24일 베트남은 해군과 공군을 위시하여 10만 명의 군사로 캄보디아에 전면 공격을 개시 하였다. 베트남의 입장에선 전쟁이 행군이나 다를 바 없었다. 미군이 철수 하면서 남기고간 전투기를 비롯해 수 많은 첨단 장비로 무장한 베트남군을 상대하기는 캄보디아군은 허수아비나 마찬가지인 부대였다. 베트남군이 프놈펜에 당도하자 결사항전을 외쳤으나 그때는 이미 전위를 상실한 상태로 어느 누구에게도 도움 받지 못하고 그들의 환상의 공산주의는 종말을 고하고 북부 산악 지대로 도피하여 게릴라전을 계속 하다가 간혹있는 게릴라 전으로 활동을 벌였지만 역부족이었고, 그리고 폴포트는 현대사의 새로운 비극을 연출해놓고 잔혹한 학살행위에 대한 사과 성명 한차례 발표하지도 않고 1998년 태국 국경의 한 정글 지역에서 이름도 없이 생을 마감하였다.

시아누크 [Sihanouk, Norodom, 1922.10.31 ~]
프놈펜에서 출생했다. 사이공 및 파리에서 교육을 받았다. 1941년 4월 조부인 국왕 모니본 사망으로 왕위에 올랐다. 당시 프랑스 보호국이던 캄보디아의 독립을 염원하여 1945년 독립을 선언하고, 1949년 프랑스연합 내에서 캄보디아 독립을 획득하였다. 1955년 3월 왕위를 아버지 수라마리트에게 양위하고, 9월 총선거에서 압승하여 수상 겸 외무장관으로 취임, 국내적으로는 정치쇄신, 대외적으로는 중립주의 외교를 표방하였다. 1960년 4월 국왕이 사망하였을 때 왕위계승을 하지 않고 국가원수로 취임하였다. 따라서 캄보디아는 입헌군주국이지만 왕이 없는 상태였다.

1955년 이래 인민사회주의연합을 이끌며 거듭 내각수반으로서 정치의 중심을 감당하였고, 왕제(王制)사회주의의 추진을 내세웠다. 1954년 제네바 회의에서는 군사동맹 불체결을 선언하고, 1957년 영세중립법을 공포하였다. 1961년 라오스국제회의를 제창, 그 중립화에 공헌하였다. 1970년 3월 외유 중에 우파(右派)인 론놀 등에 의한 쿠데타로 국가원수직을 박탈당하고, 5월 베이징[北京]에서 캄보디아 민족연합정부를 세우고 망명정권의 수반이 되었다. 내전을 일으켰던 공산 크메르루주군(軍)이 캄보디아를 장악함에 따라, 1975년 9월 귀국하여 그들의 지지을 받고 국가원수직에 복귀하였으나 1976년 4월 크메르루주의 독재 강화로 사임하고, 중국에 망명객으로 머물었다.

1979년 2월 헹 삼린 정권을 앞세우고 캄푸챠를 장악한 베트남군을 몰아내기 위하여 1982년 반(反)베트남파가 집결하여 수립한 민주캄보디아연합의 불안정한 망명연립정부의 대통령이 되었다. 국외에서 국가회복운동의 지도자로서 투쟁을 계속해오다가, 1991년 귀국하여 과도정부인 캄보디아 민족평의회 의장에 선출되었으며 1993년 9월 입헌군주제로 환원하는 헌법개정으로 왕위에 복귀하였다. <관련인물 출처:두산세계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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