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IR 8기 조현정
장기적으로 세계인의 주목을 모으고 있는 가나안 팔레스타인땅.
지난 3월 27일 최대의 종교적 명절인 유월절 휴일에 200명이 모여있는 한 이스라엘 식당에서 폭탄 테러가 발생하여 20명이 죽고 100여명이 다치는 “유월절 대참사”가 일어난 이후 전운에 휩싸였던 이곳에서 최근에는 예닌 난민촌에 대한 이스라엘 군의 2주에 걸친 공격과 관련하여 ‘집단학살’ 의혹이 제기 되고 있습니다. 본 사건과 관련하여 로에드-라슨 유엔 특사는 지난 4월 18일 예닌 난민촌을 둘러본 뒤 “전혀 받아들일 수 없으며 믿기 어려울 정도로 끔찍하다.” 고 말한 바 있어 사태가 어느 정도인지 짐작하게 합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이 태어난 곳, 기독교와 이슬람교의 성지인 예루살렘은 천여 년 전과 다름없이 테러와 보복의 끝없는 전쟁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본 고에서는 이-팔 분쟁의 지금까지의 상황을 돌아보고 하나님의 시각으로 중보할 수 있게 되기를 기대해봅니다.
[글순서]
1. 갈등의 원인 (웹진 5월호)
2. 땅의 역사속으로 (웹진 5월호)
3. 이스라엘, 팔레스타인, 미국의 관계성 (웹진 6월호)
4. 이-팔 분쟁의 끝은? (웹진 6월호)
1. 갈등의 원인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분쟁의 역사는 성경시대부터 지금까지 2000년간 계속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들의 갈등의 원인은 매우 복합적이지만 가장 핵심적인 원인은 ‘땅’문제이다. 이 ‘땅’문제에는 종교적, 민족적, 제국주의적, 문명적 갈등 요인들이 모두 내포되어 있다.
유태인의 고향은 이스라엘땅 (에레츠 이스라엘)이다. 오랜 역사의 중요한 부분이 이곳에서 이루어졌으며, 그 가운데 초기 몇천 년의 역사는 성서에 기록되어 있었고 문화적 종교적 민족적 동질성이 형성되었으며, 대부분의 유대인들이 쫓겨난 후에도 수세기 동안 이 땅에서 몇몇의 유대인들이 명맥을 지켰다. 유태인들은 오랜 세월동안 뿔뿔이 흩어져 살면서도 이스라엘과 유태민족간의 유대감을 잃지 않았다. 1948년 이스라엘 국가의 성립으로 2000년 전에 잃어버린 이스라엘의 독립을 다시 찾게 됐다. (출처: 이스라엘 한국대사관)
유대인들은 과거 바빌론, 그리스, 로마, 이슬람에 의해 차례로 지배를 받은 후 십자군 전쟁의 소용돌이 후 오스만 투르크의 지배를 받게 된다.
그들은 세계 각지로 뿔뿔이 흩어졌고 2차 세계 대전중에는 나치의 표적이 되어 전세계 유대인의 절반이 넘는 숫자인6백만명에 이르는 유대인들이 가스실에서 죽어갔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언젠가는 고향으로 돌아갈 날을 기다리며 세계 경제를 주름잡는 무시할 수 없는 경제력을 키워나갔고 동, 서유럽에서 유대인이 탄압을 받아오면서 오랜 기간동안 잠재의식 속에 숨겨두었던 향토, 즉 ‘하나님이 약속해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생각해 냈을 때부터 갈등은 시작되었다.
2. 땅의 역사속으로
유대인들은 135년에 로마에 의해 팔레스타인에서 쫓겨나면서부터 1948년 이스라엘 건국까지 1800여년 동안 디아스포라 (이산)상태에서 차별과 탄압을 받으면서 살아왔다. 1880년대에 프랑스에서 드레퓌스 사건, 러시아에서 짜르 II세 암살 사건으로 유대인들이 대대적인 탄압을 받기 시작하자 그들은 유대 민족주의를 부르짖으며 팔레스타인으로 귀향하기 시작했다.
18, 19세기는 유럽에 산업혁명에 의한 근대화, 민족주의, 제국주의가 팽배해 있었고, 사회주의가 발흥하던 시기이다. 특히 영국과 프랑스는 아시아와 아프리카로의 제국주의 침투를 위한 전진기지로서 팔레스타인 지역을 둘러싸고 치열한 각축전을 벌였다. 영국은 제1차 세계대전중에 후세인-맥마흔 서한, 사이크스- 피코협정, 발포어 선언, 종전직후인 1920년에는 산 레모 조약을 통해 결국 팔레스타인 지역을 위임통치하게 되었다. 산 레모 조약으로 프랑스는 시리아-레바논 지역을 위임통치하게 되었다. 위임통치 기간에도 유대인들은 계속 이주했고,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나치의 유대인 학살을 피해 대대적으로 이주했다. 그 대부분은 미국으로 이주했으나 일부는 팔레스타인으로 귀향하여 1948년 5월 14일에 이스라엘이라는 국가를 건설한 것이다.
1948년 5월 14일 오후4시, 영국의 위임통치가 끝났을 때 바이즈만이 다윗의 기를 올리고 이스라엘 국가 건설을 선포하자 몇 시간 후 이집트, 요르단, 시리아, 레바논, 이라크의 아랍군대가 이스라엘을 공격함으로써 4차에 걸친 중동전쟁은 시작되었다. 4차에 걸친 중동전쟁, 특히 3차 중동전쟁에서 이스라엘은 시나이반도 전체와 요르단강 서안지역 및 동예루살렘, 그리고 레바논의 골란고원까지 점령해버렸다. 4차 중동전쟁이 끝나면서 미국의 중재로 긴 평화협상이 진행되어 1978년에 이스라엘과 이집트가 캠프 데이비드 평화협전에 합의했다. 이는 1980년대말부터 전개된 세계의 냉전 체제 종식과 걸프전으로 인한 중동지역 질서의 개편 등에 힘입어 중동에서의 평화를 갈망하던 모든 사람들의 노력에 의해서였다. 이 합의안에 의하여 1984년 이스라엘은 여리고와 가자 지구에서 군이 철수했고 1987년 팔레스타인은 자치 의회 구성을 위한 총선을 실시하며 요단강 서안 지구의 다른 점령 지역으로 자치가 확대되었다. 그로부터 10년후인 1997년에 인티파다(민중봉기)가 발생하여 1000여명 이상이 사망했다. 1991년 마드리드 협상을 시작으로 하여 2000년 7월 캠프데이비드 협상까지 클린턴 행정부는 비교적 공정한 입장에서 이스라엘과 PLO를 중재했다.
1993년 8월 29일에는 오슬로에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은 반세기 동안의 갈등과 증오로 얼룩진 불행의 시대를 마감하기 위하여 팔레스타인 자치안이 합의된 것으로 그 내용은 팔레스타인이 폭력을 중단하는 대신 이스라엘은 1967년 전쟁에서 점령한 요르단강 서안과 가자지구에 팔레스타인 자치 정부 수립을 허용한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불안정한 평화’이긴 했지만 1990년대는 팔레스타인 지역에 평화적 공존에 대한 희망이 충만했던 평화과정(peace process) 시기였다..
그러나1999년으로 예정되었던 팔레스타인의 자치정부 수립이 지지부진해지고, 2000년 샤론정권, 2001년 부시정권이 들어오면서 중동평화협상은 원점으로 돌아갔다. 중동지역의 분쟁은 언제나 세계의 관심사였지만 이번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분쟁이 심각한 이유가 이것이다.
2000년 9월 말에 발생한 제2차 인티파다의 직접적 원인은 보수 강경론자인 아리엘 샤론 당시 리쿠드당 당수가 도예루살렘의 신전언덕에 위치한 알 아크사 사원을 방문하여 ‘예루살렘은 불리할 수 없는 이스라엘의 영원한 수도’라고 주장한 데 대한 아랍인들의 시위와 이스라엘군의 강격대응이었다. 7월 25일 캠프데이비드 협상이 결렬돈 상태에서 발생한 샤론의 이러한 행위와 주장은 동예루살렘을 ‘독립 팔레스타인 국가의 수도’로 낙점해 놓고 협상에 임하고 있는 아랍인들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2,3,4차 중동전쟁에 참전한 군출신, 1980년대 요르단 서안 가자지구에 최대 규모 이스라엘 정착촌을 건설한 주역, 레바논 전쟁의 주도자, 아랍인에게 불도저-피의 인간으로 인식되어 있으며, 리쿠드당 내에서의 당권투쟁과 노동당의 바라크 수상과의 정권투쟁에 있던 샤론이 알 아크사 사원을 방문하여 공개한 과격 발언은 시한폭탄과 같은 것이었다. 이것이 2000년 9월에 시작되어 현재까지 아랍인 1100명 이상, 유대인 320명 이상이 사망했고, 현재도 진행중인 제2차 인티파다의 원인이다. (Daum 기획글 인용)
( 6월호 웹진에서 계속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