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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의 전쟁, 그 역사속으로   
                           제작 : 정 종 엽       사진: 터이쩡


 과거의 역사는 문득 우리가 걷고 있는 길의 방향들을 돌아보게 한다.
 여기 가던 걸음 잠시 멈추고 숫한 영화들을 통해 보아왔던 익숙한 장면들의 실제가 생생하게 보전되어 있는
 베트남 현지에 있는 전쟁 박물관을 찾아보았다.
 박물관을 돌아보고 안내하듯이 글을 적어보았는데 아무쪼록 보는이에게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

베트남 현대사 개요


1887년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의 성립
1954년 디엔비엔푸 전투 종결 (프랑스 식민지 67년)
1965년 미국, 북베트남 폭격 개시
1975년 미국 완전철수 (미국 베트남전쟁 10년)

1965년 베트남에 한국군 파병
1973년 베트남 파병 한국군 철수 (한국군 파병 8년)


베트남의 현대사는 전쟁으로 얼룩진 너무나도 처참한 역사이다.
그리고 그 전쟁이후 지금까지도 가난한 나라이다.

그리고 이땅에는 감옥이 아직도 그 전쟁의 상처의 흔적을 간직하고 있다.
오른쪽의 사진이 현존하는 감옥의 모습이다.




 [사진1] 현존하는 감옥의 모습




[사진 2] 당시 감옥의 모습

[사진 3] 처형도구였던 단두대의 모습



  베트남 전쟁의 시작


 1950년 6월30일 미국 공군의 C-47 화물 수송기 8대가
 군수물자를 싣고 사이공 공항에 처음으로 도착 프랑스를 지원
 1953년 7월말 한반도에서 미국이 휴전협정을 맺자, 제네바 협정체결
 1954년 6월 응오 딘 지엠 수상의 내각 구성 1956년 10월 합법적으로
 막강한 권한을 행사하는 독재정치를 함.

 베트남 전쟁의 확대는 미국의 개입으로 인해 일어난다.
 1961년 5월 케네디 대통령은 린든 존슨 부통령과 400명의 특수부대를
 사이공에 파견 동남아시아의 공산화를 막고자함


 왼쪽의 사진은 역시 그 당시의 감옥의 모습임

























[사진 4] 처형장면
1964년 8월초 통깅만 해상에서 순찰 중이던 미국 구축함 매독스호가 북베트남의 어뢰정으로부터 공격을 받아 존슨 대통령은 북베트남에 대한 폭격과 남베트남에 지상군을 투입하게 된다.








[사진 5] 지상작전
1966년 1967년에 걸쳐 미국의 북폭의 증가와 지상군의 증강으로 전쟁은 확대 되었지만 교착상태에 빠짐.
라오스를 통해 북에서 남으로 내려오는 이른바 '호찌민 통로'에 대한 포격은 대단했지만 지상군의 작전이 뒤따르지 않아 별다른 효과는 없었다.




[사진 6] 반미 혁명 전사
Vo Song Nhan
감옥에 있는 모습인데 눈초리가 굉장히 맵다고 한다.











[사진 7] 전쟁상황
위의 사진들은 전쟁당시에 찍은 처참한 모습들이다.














[사진 8] 군사지휘
우리나라는 박정희 정부가 자진하여 군대를 파견
1965년 2월하순 공병부대와 자체 경비병력으로 구성된 한국군 비둘기부대 2천명이 남베트남에 파견됨
전투병력은 육군 2개 연대 규모의 맹호부대(11월20일 꾸이년)와 해병 1개 여단 규모의 청룡부대(10월9일 냐짱)로 편성되어 도착





[사진9] 미군 병력1


[사진 10] 미군 병력2

 
[사진 11] 미군 병력3

미군과 우방국들의 우세한 병력..그러나..

1965년 18만4천명이던 미국병력은 1966년 36만명에 이르렀고 1967년 48만 5천명에 달했다.
1968년 미군의 수가 최고조헤 달해 약 54만명이었고 제3국의 군대도 1966년 5만2천명 이상으로 증가하고 이후 최고조에는 6만9천명이 되었다

그 가운데 가장 많은 수를 차지한 것은 한국군으로 1970년까지 연평균 4만8,500명 정도의 병력이 베트남에 주둔했다.

그 때 사이공정부군 80만명은 미군의 보조적인 역할밖에는 할 수 밖에 없을 정도로 무능했었다.


북부 베트남 사회는 북폭을 계기로 더욱 단결했으며 하노이 정부는 '국가방위'라는 슬로건으로 인민대중을 쉽사리 동원할 수 있었다.

소련과 중국의 군사원조 역시 하노이 측에 상당한 도움이 되었다.
특히 소련이나 중국으로부터 들여온 무기의 대부분은 호찌민 통로를 경유하여 베트공에 전달되었다.

하노이 정부가 수십만의 노동자를 동원하여 이 통로의 보수와 유지에 막대한 노력을 기울였기 때문에 존슨 미국 정부 이 통로에 대한 집중적인 공습감행도 큰 효과를 보지 못했다.

하노이 정부의 병력은 징병제도를 통해 충분히 공급되었 1968년 베트공과 하노이 정부군수는 30만으로 비정규군과 합치면 모두 60만명 가까이 되었다.

결국 전쟁에 이길 수 있다는 워싱턴의 환상은 1968년 1월31일 베트콩의 '뗏 공세'(구정공세)로 여지없이 무너지고 말았다.

왼쪽의 사진들은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미군 폭격기들의 모습이다.










[사진 12] 베트남의 여전사들
베트남의 승세

북베트남에 대한 폭격은 하노이를 굴복시킬 만큼의 효과를 거둘 수 없었던 이유 중의 한가지 중요한 사실은 당시 일인당 5천 달러 가까운 소득의 생활수준을 향유하고 있던 미국인들로서는 연간 일인당 소득이 50달러도 채 되지 않는 베트남 사람들이 어느 정도까지 고통을 감내할 수 있는지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미국의 정책 입안자들은 당시 자국의 수준을 고려하여 이 정도면  하노이측이 굴복할 것이라고 판단했던 것 같다.
 20여년전 프랑스군이  디엔 비엔 푸에서 실패한 이유도 이와 유사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뗏 공세와 그 영향

베트남어로 구정을 의미하는 Tet 뗏은 우리의 설과 추석을 합한 것만큼 큰 명절이다.
전에는 뗏을 전후하여 2주일 가량 휴전하는 것이 관례처럼 되어 있었다.
이를 이용하여 베트콩과 하노이 정규군 약 8만명은 사이공 정부와 미군의 세력기반이었던 미국대사관 구내까지 침투하여 건물을 점거하려다 미군의 반격을 받고 24시간 뒤에 물러났다.

베트콩이 가장 오래 점령했던 도시는 중부의 후에로 미군은 격렬한 시가전 끝에 거의 25일 만에 이를 되찾았다.

단순히 인명피해만 본다면 하노이 정부군과 베트콩이 패배한 쪽이지만 미국은 정치적으로 큰 타격을 입었다.

오른쪽 사진[사진 13] 들은 전쟁당시의 미군 지상군의 대포, 도저, 대공포 등으로 박물관에 전시되어 전쟁당시의 비참한 모습을 이야기해주는 듯하다.













[사진 13] 미군 지상군의 대포, 도저

 전쟁은 종말을 향해


미국의 지원이 끊기자 사이공 정부 내에서는 반 티에우 세력이 점증했다.

하노이 정부의 남부군 사령관인 반 띠엔 중은 1975년 3월 초 우선 반메투웃에 대한 대대적 공격을 감행했다. 하노이 지도자들도 깜짝 놀랄 정도로 사이공 정부군은 제대로 응전도 해보지 않고 무너져 버렸다.

1973년 동맹군은 곧 철수를 시작하여 미군은 3월 말까지 전원 베트남을 떠났다.

한국군은 1971년부터 1만명씩 병력을 감축하여 1973년 1월27일 파리 평화협정이 체결된 뒤에는 2,500명 정도만을 남겨 놓았다가 1975년 4월 말 남부 베트남이 공산화되기 직전 철수했다.
1973년 11월 미국 의회는 미군의 해외파병에 대한 대통령의 권한을 대폭 축소하는 법안을 통과시켜 미국의 재개입은 사실상 불가능해졌다. 새법령은 해외파병을 해야 할 때에도 반드시 의회와 상의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설상가상으로 닉슨은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1974년8월 대통령직을 사임하기에 이르렀다.
미국의 재개입이 불가능함을 확인한 하노이 정부는 1975년 1월 사이공 정부군에 대한 전면전에 돌입했다.

1975년 3월19일 꽝찌시가 3월25일에는 후에마저 북베트남군의 손에 떨어졌다.3월29일 남베트남 제2의 도시 다낭은 후퇴하는 사이공 정부군과 피난민이 뒤섞인 혼란의 와중에 함람되었다.

3월25일 하노이 정치국은 전략을 바꾸어 5월 중순 우기가 시작되기 전에 사이공을 함락시키기로 결정했다. 이리하여 4월부터 사이공 점령을 위한 하노이 정부의 마지막이자 최대의 공세인 '호찌민 작전'이 개시되었다. 이때 사이공은 대혼란에 빠졌고 미군 비행기는 사이공 정부의 주요관리와 가족들을 철수시키기 시작했다.

티에우는 4월21일 대통령직을 사임하고 부통령인 쩐반 흐응이 그 직을 물려받았다. 흐응은 곧 북베트남군과 협상을 시도했으나 실패하자 4월26일 다시 온건파인 즈엉반 민에게 대통령직을 위임했다. 민 역시 협상을 시도했지만 거절당하고 말았다.

4월30일 마침내 사이공마저 하노이 군대에 점령됨에 따라 베트남 공화국은 종말을 고하게 되었다.






   전쟁이 남긴 것들

전쟁의 대가는 엄청났다. 인명피해만 해도 사이공 정부군이 11만명이상이 전사 49만9천명이 부상, 민간인도 41만5천명이 사망한 것으로 추산된다. 1995년 하노이 정부는 정부군과 베트콩을 포함하여 110만명이 사망하고 60만명이 부상당했다고 발표했다.여기에 산업시설의 파괴까지 고려하면 베트남 전역은 거의 황폐화되었다

하노이 정부가 해결해야 할 문제는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남부사회를 사회주의 체제로 전환시켜 모든 상공업 부문은 국영화하고, 농촌경제는 집단농장체제로 새로운 사회주의 문화의 뿌리를 내려 남부를 북부와 통합하는 일 역시 시급한 과제였다.

척유능한 전략가요 전사이긴 했지만 행정가는 아니어서 문제를 너무 졸속하게 해결하려 하다가 오히려 더 많은 문제점을 낳았다.

공산화 뒤에 일어난 농업생산력 저하와 그로 인한 빈곤은 수십만의 베트남인을 이른바 '보트 피플'로 국외로 내몰았다. 하노이 지도자들이 자신의 미숙함을 깨닫기 10년의 세월이 지난후 1986년 마침내 '도이머이' 정책이 채택되면서 베트남 사회는 겨우 안정을 되찾기 시작했다.





 


        [사진 14] 전쟁이 남긴 것들









   전쟁박물관에 게시된 글 :
" 전쟁은 다 끝났으나 너무나 많은 이들이 불행하게 되었다.
베트남에는 전쟁이 끝난이후 지금까지 수많은 이들이 전쟁의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다.
고엽제 피해, 탄흔의 통증 후유증, 신체와 정신에 고스란히 남아 있는 상처의 흔적들, 실종된 수많은 이들, 무수히 많은 고아들 등등...그리고 더 많은 것들이..더 많이 아직도 남아 우리들에게 이야기 하고 있다.

1987년 1월부터 새로운 개혁정책에 시작하여 시장경제원리를 받아들인 베트남은 매년 매번 아주 크게 변화하게 있다. 1995년 베트남은 ASEAN에 가입하고, 미국과 정상적인 관계를 맺게된다. 외국투자자본이 증가하고, 혁신적인 상업발전을 이루게 된 반면에 너무나 오랫동안 끌어왔던 전쟁때문에 베트남 경제는 아직 회복되지 못하고 있다.

국가경제력회복, dong bang song Cuu Long(동방송 끄우롱)으로부터 풍부한 농산물 수확, 북부지방에서 천연자원, 필요한 노동력 확보, 농업국가에서 공업국가로의 변화추진이 2020년의 국가 지상목표이다. "


  박물관을 나오며


이땅에 총과 칼로 찾아왔던 이들이 이제는 사업가로 변신하여 수많은 교민들이 이곳에서 살고 있다. 우리와 너무나 비슷한 베트남 사람들에게 이제는 따뜻한 하나님의 사랑과 재건의 손길로 다가갈 때가 되었다. 회사에서 학교에서 따뜻한 부활의 종소리가 베트남에 있는 모든 교회들에서 풍성하게 울려 나기를 간절히 기도한다.

- 제작 : 정종엽

- 편집 : 터이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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