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우 진
1. 나 같은 죄인의 혈통에서 순교의 자식들이 나오게 했으니 감사.
2. 허다한 많은 성도들 중에 어찌 이런 보배들을 주께서 하필 내게 맡겨 주셨으니 감사.
3. 3남3녀 중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두 아들 장자와 차자를 바치게 된 나의 축복을 감사.
4. 한 아들의 순교도 귀하다 하거늘 하물며 두 아들의 순교이리요. 김사.
5. 예수 믿다가 누워 죽는 것도 큰 복이라 하거늘 하물며 전도하다 총살 순교 당함이리요. 감사.
6. 미국 유학 가려고 준비하던 내 아들, 미국보다 더 좋은 천국에 갔으니 내 마음 안심되어 감사.
7. 나의 사랑하는 두 아들을 총살한 원수를 회개시켜 내 아들 삼고자 하는 사랑의 마음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
8. 내 두 아들의 순교로 말미암아 무수한 천국의 아들들이 생길 것이 믿어지니 감사.
9. 이 같은 역경 중에서 이상 여덟 가지 진리와 하나님의 사랑을 찾는 기쁜 마음, 여유 있는 믿음 주신 우리 주께 감사.
- 자신의 아들들의 순교를 접하고 느낀 9 가지 은혜로운 손양원 목사님의 감사 중에서
탐방 일정 (2002. 7. 29 ~ 2002. 7. 30)

영광 염산교회 -> 염광 야월교회 -> 여수 애양원 순교 유적지(애양병원, 애양원 역사박물관, 교회, 순교자묘지, 손양원목사 순교기념관 순교지 순으로, 토플하우스 제외) -> 오동도 -> 돌산대교 -> 성산교회
전남 영광군 염산면, 우뚝 선 산봉우리 틈새로 서해의 푸른 바닷물이 밀려 들어와 소금이 쌓이고 젓갈이 넘쳐나는 축복 받은 땅이다.
한 때 백제의 최초 불교 도래지로 원불교 창시자가 태어난 곳이기도 하지만 염산을 중심으로 기독교 또한 깊은 뿌리를 내린지 오래다.
1908년 당시 목포선교부에서 활동하던 유진 벨(한국명 배유지) 선교사가 서해안을 따라 올라가며 전도하다 이곳 포구에 상륙했고, 일진회에 대항하여 반일세력을 형성하던 문영국 정정옥 등이 복음을 듣고 야월리 아촌에다 훗날 이 지역 교회들의 모태가 된 염산리교회를 세웠다.
일제 치하에 계량학교를 설립하여 문맹퇴치운동을 벌이고, 신사참배를 거부하다 예배당 종을 빼앗기는 박해를 당하기도 했다. 그처럼 의연하고 당당한 역사를 지닌 교회이기에 성도들은 어떤 압박과 시련에도 굴하지 않는 기상을 가졌다. 1950년 발발한 민족상잔의 난리통에, 유례없이 무려 177명이나 되는 순교자들이 이 지역에서 배출된 것도 그런 바탕이 있어 가능했던 일이다.
영광 염산교회

가는 길 도중에 눈에 잘 띄도록, 붉은 글씨로 '기독교순교성지'라고 표시된 이정표는 바로 이곳을 가리키고 있다. 염산교회, 50여년 전 당시의 참혹했던 상황을 고스란히 품안에 간직하고 있는 역사의 증언대이다.
예배당으로 향하는 오르막길을 걷다보면 바다를 향해 세워진 순교기념비가 먼저 눈에 띈다. 김방호 김화순 허상 기삼도 노용길 노순기 노병규 장일영 김석산 장병태…. 77명에 이르는 순교자들의 흔적이 여기에 살아있다.
비석을 마주보고 선 아담한 건물에는 순교자료 전시관이라는 팻말이 붙어있다. 내부로 들어서면 순교자들의 면면에 대한 기록과 당시 상황을 재연한 그림 등이 촘촘하게 전시되어 있다. 특히 날이 선 죽창이나 밧줄로 동여맨 바윗돌 등 인민군과 좌익분자들이 성도들을 무참히 학살하는 데 사용된 도구들 앞에 서면 섬뜩한 느낌이 정수리까지 차오른다.
염산교회 김태균 목사는 '전쟁 당시 학살된 민간인의 수가 5만 9000여명으로 집계되는데 그 중 2만 명이 영광 주민들이었답니다. 좌우익의 대립이 어느 지역보다 심했던 탓에 희생자가 유난히 많았지요. 이념 대립의 한 가운데 서있었던 교회의 피해가 막심했던 것도 피할 수 없는 결과였다고 봅니다'라고 설명한다.
전시관을 나와 예배당 아래쪽 염산포구로 향해본다. 불과 얼마 전까지도 포구에는 염산교회 성도들의 집단 순교현장인 배수관문이 남아있어 그 날의 참혹함을 상기시켜주었다. 이제 제방공사로 관문이 사라져버린 자리에는 어선들만 한가로이 떠있다. 주변에 늘어선 횟집과 젓갈집들을 찾는 보통의 관광객들은 이곳에서 아픈 과거 대신 평화로운 오늘을 맛볼 뿐이다.
영광 야월교회
야월교회가 단일교회 순교자 숫자가 영광에서 염산교회 77명보다는 작지만 온 교인이 한사람도 당시 교회다니며 사신 분중에서 남지 않고 순교하였고 교회가 불탔던 교회로서는 한국교회사에 유일한 교회다.
한국 교회사 호남편에서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영광군내에 있는 대부분의 교회가 수난을 당하고 또 많은 순교자를 낸 교회들이 많다. 그중에 야월교회는 최판섭 성도를 비롯해서 유년주일학교 학생까지 포함에서 65名의 순교자를 냈다. 야월교회는 교인을 잃고 또 교회당은 전소되고 말았다.
또 기독교대백과사전에는, 1950년 6.25사변으로 교회는 다시금 수난에 직면 했는데 특히 인근지역에서 암약하던 地方공산당들의 만행에 더 큰 피해를 입었다. 이때의 전도인이던 김영갑은 피난하였고 교회당은 공산당에게 징발당하여 교인들은 다시 지하교회의 형태로 신앙생활을 게속하였다.
이에 기독교인들과 우익 인사들이 환영행진을 하고 만세를 불렀다. 그러나 미처 후퇴치 못한 공산군과 地方공산당들은 인근 산속에 은거하고 있었고 국군을 환영한 기독교 인사들에 대한 보복계획이 추진되였다. 그해 10월 공산당들은 야월리에 난입 교인들을 교회당에 모아놓고 석유를 뿌린채 불을 질렀다. 이때에 조양현 조숙현 영수 최판섭, 최대섭 집사 그의 여동생 최판례를 비롯 어린아이까지 포함하여 65명의 교인들이 참살되었다. 고 기록되어져 있다.
88년도 구역예배지침서에는 '교회적인 참상의 실 예로 전남 영광 야월교회는 65명' 이렇게 숫자만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현지인의 증언에 의하면 51년 9월부터 10월까지 기독교 인사들에 보복 계획에 의하여 살해하였지만 핵심 인사들은 염산면 분주소도 체포 인도하여 실컷 두둘겨 반죽음 후에 손목을 위로하여 새끼줄로 묶여 돌을 채워서 바닷물에 띄워 죽게 하였고, 나중에 그 가족까지 심지어 어린이 갓난아기까지 바다 물에 빠뜨려 죽게 한 것이다.
1952년 음 1월 16일 공산당이 백수로 철수한 후에 경찰이 수복한 후에 한번에 80 여구를 매장한 시체들을 발굴할 때 호크와 쇠스랑으로 시신들을 들추어 모습을 알 수 없어서 입은 옷으로 확인하여 장사를 지냈다고 한다.
그리고 교회당은 1951년 10월 어느 날 오후 5시에 공비에 의하여 불 태워졌다
여수 애양원

당시 R.M.윌슨은 광주 제중원장직을 맡고 있었는데, 그가 10여 명의 한센병환자를 모아 수용하였다. 이것이 한국 최초의 한센병원인 광주나병원의 시작이었다. 1936년에는 명칭을 여수애양원으로 바꾸었다. 병원에 신학원을 설치하였는데, 일제의 강제 추방령 이후에는 선교사 보이어가 원장직을 맡아 이어갔다.
애양원교회- 전남 여수시 율촌면 신풍리에 위치한 교회로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 여수노회 소속 교회로서 애양원의 부속 전도실로 출발하였으며 한센병자들이 모여 사는 곳이다. 애양원 한센병자 수용소는 미국남장로 교회 선교회의 전도 사업의 일부분으로 1909년 광주 양림에서 시작했으나 1925년, 이 곳으로 이전 확장되었다.
1939년에는 일제에 항거한 순천노회의 ‘원탁회사건’으로 손양원 목사와 장로들이 검거되었다. 1950년 6·25전쟁 때에는 목사 손양원이 애양원의 환자들과 함께 하다가 순교하였다. 1955년에는 한성신학교를 설립하였으나 곧 중단되었다. 이후에는 미국교회의 지원을 받아 나병환자 외에도 일반 환자도 진료하였다.
처음에는 9명으로 시작하였으나 시간이 흐름에 따라 1천 명이상을 수용하는 대규모의 한센병자 수용소가 되었다.
애양원 박물관- 애양원의 역사를 한 눈에 돌아볼 수 있게 되어있으며 애양원 초창기 병원으로 사용하던 건물을 개조한 것으로 1층은 유물전시관 및 세미나실, 2층은 사진 전시관으로 되어 있다.
한센병 환자들을 위한 병원으로 출발한 초창기 모습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병원 역사를 3단계로 구분하여 설명해놓은 코너와 초창기에 사용하던 수술실을 그대로 재현하는 등 1600여점에 이르는 사진들과 함께 진열되어 있다.
1909년 의료선교사 포사이트가 광주 부근 길가에 쓰러진 여자 환자를 치료한 사건을 계기로 윌슨 선교사에 의해 애양원 병원과 교회가 세워졌으며 지금까지 아름다운 사랑과 희생이 담긴 선교유적지로 자리매김을 하고 있다.
손양원 목사 순교기념관

손양원 목사의 생애
손양원 목사는 1902년 6월 3일, 경남 함안군 칠원면 구성리 653번지에서 손종일 장로와 김은주 집사 사이에 장남으로 출생 하였다.
1916년 3학년 때, 이러한 궁성 요배는 십계명 중에서 제1 계명을 범하는 것이라고 하여 궁성 요배를 하지 않음으로 퇴학을 당했다. 그러나 맹호은 선교사의 도움으로 복학을 하여 계속 학업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손 목사는 신학교 시절부터 신사 참배를 반대해 왔으며 특히 그가 졸업하던 해에 신사 참배가 총회에서 가결되는 것을 직접 목격하면서 눈물을 흘렸다.
그는 시간이 있을 해마다 주님의 뜻이 아닌 신사 참배를 강요하는 일본은 망한다고 주장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일본 경찰에게 있어서 손 목사는 눈에 깊이 박힌 가시와도 같은 존재였다. 그러나 손 목사가 시무하고 있는 교회가 보통 교회가 아니라 한센병자들이 모여 있다는 특수성 때문에 쉽게 건들일 수 있는 처지 또한 못되었다.
그러나 그런 세월이 오래 계속될 수는 없었다. 1940년 9월 25일, 손 목사는 수요 예배를 드리고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여수 경찰서에서 나온 형사 두 명에 의해서 연행되고 말았다. 처음에는 1년 6개월 형을 받았으나 구속 기간까지 하여 거의 3년의 세월이 흘렀갔다 그 때 손 목사에게 적용된 죄는 신사 참배 거부와 백성들을 선동했다는 것이었다.
1943년 5월 17일, 만기 출옥할 날이 가까이 왔을 때 담당 검사는 손 목사를 불러 놓고 사상의 전환을 시도한 적이 있었다고 한다. 담당 검사는 손 목사에게 [덴꼬(轉向)] 해야 나간다는 위협을 하였다. 그러나 손 목사는 그 검사에게 전혀 굴하지 않고 [당신은 덴꼬가 문제이지만 나에게는 신꼬(信仰)가 문제이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손 목사는 끝내 그들의 신사 참배의 유혹과 핍박의 손길을 뿌리치고 거부하여 광주 형무소에서 경성 구금소,청주 구금소로 옮겨 다니면서 해방이 될 때까지 6년 간의 옥고를 치렀다. 그러나 그는 옥중에서도 기도, 찬송,성경 읽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고 옥중에서도 사랑을 실천하여 옥중 성자로 그 이름이 높았으며 간수들까지도 전도하여 많은 사람들을 주 앞으로 인도하였다
1948년 10월 19일이었다. 당시 제주 폭동 사태를 진압하기 위해서 여수에 집결했던 군인들 중 공산주의 사상에 물든 남로당 계열의 군인 일부가 반란을 일으켜 무고한 양민을 학살하는 반란군이 된 것이다. 이 세력에 동조했던 반란군들은 불과 4시간만에 여수 시내의 경찰서와 각 파출소, 군청, 역 등 주묘 기관을 장악할 정도로 기세가 등등했다.
순천까지도 반란군에 의해서 점령되면서 두 도시는 삽시간에 무법 천지가 되고 공산 폭도들의 세상이 되어 버렸다. 반란군들은 그 동안의 불만 세력과 좌익 추종 세력을 한데 묶어 인민 위원회를 만들어 자기들에게 동조하지 않는 사람이나 단체는 무조건 잡아죽이는 천인 공노할 민족 대학살의 광란극을 벌렸다
어제까지는 친구를 원수로 만들었고, 이웃이 적이 되어 고발하고 보복하는 인민 재판이 열리는가 하면 계속해서 인민 대회를 열어 공포의 분위기를 고조시켜 나갔다.
이 때에 손 목사의 두 아들 동인과 동신은 각각 순천 사범 학교와 순천 중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신앙과 민족 정신에 불타는 이 두 형제는 학교 안에서 기독교 복음을 전하며 기회가 있을 때마다 공산주의의 잘못을 폭로하였다. 그러기 때문에 자연히 학교의 공산 프락치들은 가장 먼저 그들을 색출하여 체포하였다. 그리하여 두 형제는 인민 재판에 회부되었다. 이 때에 두 형제는 서로 대신하여 죽기를 자원하였다. 그러자 잔인한 폭도들은 형제를 한꺼번에 무자비하게 총살하고 말았다.
애양원 교회에 손 목사의 두 아들이 반란군에 의해서 순교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진 것은 사고가 발생한 나흘 뒤인 10월 25일 이었다. 두 아들이 한꺼번에 변을 당했다는 급보를 전해들은 손목사 내외는 물론 애양원 식구들과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반란군이 어느 정도 진압된 26일에 애양원 성도들은 손 목사의 두 아들의 시신을 거두어 교회 앞에 시신을 안치한 후 다음날 27일, 애양원 성도들이 보는 앞에서 장례식을 치른 후 지금의 애양원 동산에 묻히게 되었다.
여수, 순천 반란이 진압된 후 정세는 바뀌었고 동인, 동신 형제를 죽인 자들 중의 하나인 '안재선'이라는 학생도 체포되어 총살을 당하게 되었다. 그 소식을 들은 손 목사는 계엄 사령관에게 찾아가서 '나의 죽은 아들들은 결코 자기들 때문에 친구가 죽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그 애들은 친구의 죄 때문에 이미 죽었습니다. 만일 이 학생을 죽인다면 그것은 동인, 동신 형제의 죽음을 값없이 만드는 것입니다.'라고 하면서 그 학생의 석 방을 간청하였다.
그리하여 그의 간청은 받아들여지게 되었고 손 목사는 그 학생을 손재선이라 하여 자신의 아들로 삼았다. 손 목사는 재선이를 부산의 고려 성경 고등 학교에 수학하도록 하여 전도사로 키워내는 놀라운 사랑의 역사를 보여 주었다.
양아들로 삼았던 안재선 씨는 성경 학교 졸업 후 잠시 부산의 어느 교회 전도사로 있다가 말년에는 제주도에서 어물 도매 사업을 하다 1979년 12월 서울에서 별세했다. 손 목사님은 실로 주님이 주신 계명을 말씀 그대로 순종하고 복종하여 실천한 20세기 사랑의 사도요,성자였던 것이다.
1950년 뜻하지 않는 6·25동란이 이 땅 위에 발발했다. 파죽지세로 38선을 넘어 서울로 쳐들어온 북한군은 한강을 넘어 수원을 점령하고 대전을 빼앗고 대구로 진격하는 한편, 일부는 호남으로 진격하여 호남 일대도 점령하게 되었다. 이 때 교회도 문을 닫고 피난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손 목사는 피난하지 않고 교회에 남아 계속 교회 종을 치게 했으며, 자신이 강사가 되어 계속하여 교회에서 특별 집회를 했다. 집회의 주요 내용은 '잘 죽자'라는 것이 었다.
이 때 애양원 교회의 교인들은 손 목사를 피난시키려고 갖은 노력을 했으나 허락을 하지 않자 결국은 교회의 제직들과 교역자들 모두 함께 떠나자고 간청을 하였다. 우선 몸부터 피하고 보자는 제직들의 간청한 부탁을 거절할 수 없었던 손 목사는 함께 송별 예배를 드리고 배에 올라가 마지막 찬송을 부른 후 갑자기 혼자만 배에서 가방을 들고 뛰어 내려오는 것이다.
교인들이 '목사님, 왜 피난을 가지 않고 다시 배에서 내려가시는 겁니까?'라고 묻자, 손 목사는 '나는 원래 피난을 가지 않는다고 했지 않습니까? 주의 이름으로 죽는다면 얼마나 영광스럽겠습니까? 그리고 만일 내가 피신한다면 일천 명이나 되는 양떼들은 어떻게 합니까? 내가 만일 피신을 한다면 그들을 자살시 키는 것이나 다를 것이 무엇입니까?' 하며 피신하기를 완강히 거부하고 제직들만 보냈다고 한다.
그리하여 손 목사는 마침내 1950년 9월 13일 공산군에게 체포 되어 1950년 9월 28일 저녁11시 여수 근교 미평에서 총살당하여 순교의 영광을 간직하였다.
(출처: 애양원
http://www.aeyangwon.org/ )
소록도
소개 : 전남 고흥군 도양읍 봉암리 녹동6구 (녹동항 앞에 있는 섬 )
위치 : 전남 고흥군 도양읍
면적 : 4.42 ㎢
크기 : 해안선길이 14 km. 최고점 116 m
인구 : 1,578(1993)
내용 :
한센병(나병) 환자를 위한 국립소록도병원이 들어서 있는 섬으로 유명하다.
전남 고흥반도의 끝자락인 녹동항에서 1㎞가 채 안 되는 곳에 위치하고 있으며, 섬의 모양이 어린 사슴과 비슷하다고 하여 소록도라고 불리운다. 과거 한센병 환자들의 애환이 깃들어 있는 섬이지만 현재는 900여명의 환자들이 애환을 딛고 사랑과 희망을 가꾸고 있다. 섬의 면적은 여의도의 1.5배인 15만평 정도에 불과하지만 깨끗한 자연환경과 해안절경, 역사적 기념물 등 으로 인해 고흥군의 새로운 관광명소로 떠오르고 있다.
고흥반도를 가로질러 녹동항 부둣가에 서면 600미터 전방에 작은 사슴처럼 아름다운 섬 소록도가 한눈에 들어온다. 녹동항에서 소록도까지는 오전7시부터 오후 5시30분까지 15분 간격으로 선박이 운항된다. 이 배에 차를 싣고 들어갈 수는 있지만 섬에 도착하면 소록도병원 입구부터서는 도보 관람만 가능하다.
국립소록도병원의 역사는 1916년 일본 명치천황이 하사한 기금으로 설립된 소록도 자혜의원에서 시작되는데, 이 병원은 당시 조선 내의 유일한 한센병 전문의원이었다. 이곳의 중앙공원은 1936년 12월부터 3년 4개월 동안 연인원 6만여 명의 환자들이 강제 동원되어 6천평 규모로 조성되었다. 지금도 공원 안에 들어서면 환자들이 직접 가꾸어 놓은 갖가지 모양의 나무들과 함께 전체적으로 잘 정돈된 빼어난 조경이 보는 이의 감탄을 자아낸다. 그리고 공원 곳곳에는 환자들의 아픔을 간직한 역사기념물들이 잘 보존되어 있다.
공원 입구에는 일제 때의 원장이 이곳에 수용된 한센병 환자들을 불법 감금하고 출감하는 날에는 예외 없이 장제로 정관수술을 시행했던 감금실과 검시실이 있다. 이 검시실 앞에는 25세 젊은 나이에 강제로 정관수술을 받은 환자의 애절한 시가 남아 있어 보는 이의 마음을 아프게 한다. 또한 소록도병원의 역사와 환자들의 생활상을 보여주는 갖가지 자료가 전시된 생활자료관에서는 한센병에 대한 올바른 이해와 함께 인간의 존엄성을 다시 한번 생각게 한다.
이밖에도 공원내에는 나환자 시인 한하운의 보리피리시비, 일본인이면서 조선 환자들을 가족처럼 아껴주며 헌신적으로 보살핌으로써 소록도의 슈바이처라 일컬어지는 하나이젠키치 원장의 창덕비, 그리고 [한센병은 낫는다]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는 구라탑 등 환자들의 애환과 박애정신을 엿볼 수 있는 기념물들이 세워져있다.
한센병의 원인이 규명되기도 전에 외국인 선교사는 이 땅에 한센병 환자들을 치료하기 위해 자신을 바쳤다. 그들은 자신의 이름 대신 예수님의 이름을 이 땅에 남겼다.
* 한센병에 대하여...
한센병(Hansen’s disease)은 나균에 의하여 피부외 말초신경에 주로 침범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기타 부위의 조직에 침범만성전염성 면역 질환이다. 1871년 노르웨이의 의사 A.G.H.한센이 나환자의 나결절의 조직에서 결핵균 비슷한 세균이 모여 있는 것을 발견하여,1874년 Bacillus leprae 라 명명함으로써 유래하였다.
일찍이 한의학에서는 가라(痂癩) ·풍병(風病) ·대풍라(大風癩)라 하였고, 치료가 불가능했던 시대에는 문둥병 또는 천형병(天刑病)이라 하였다. 현대의 학술적 분야에서는 나병으로 하되 사회적 분야에서는 한센병이라고 통칭한다.
현대의 학술적 분야에서는 나병으로 하되 사회적 분야에서는 한센병이라고 통칭한다.
한센병 환자의 신체적 장애는 수, 족, 안면, 안, 비, 후두, 남자의 고환 파괴, 여성 유방 등으로 나타난다.
치료는 주로 약물에 의한 치료를 실시하며 조기에 치료함으로써 단기간 내에 후유증 없이 완치시킬 수 있으나 조기치료의 시기를 놓치면 병의 치료기간도 길어지고, 병의 진행으로 인한 후유증으로 불구를 면치 못하게 된다.
글을 맺으면서...
선교 유적지 탐방을 하기에는 1박 2일에 너무나도 짧은 여정이었지만 거기서 느낀 벅찬 감동은 말로 형용할 수 없다.
하나님의 말씀과 저희의 가진 증거를 인하여 죽은 그들 앞에서 자신의 안일함과 유익만을 추구해오던 나는 숙연해 질 수밖에 없었다.
천국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거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
(마 24 : 14)는 말씀을 되새기며, 사랑의 빚진 자로써 그들이 소유했던 하나님의 사랑을 아직도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전해야겠다.
(참고자료: 영세교회 고등부 여름 수련회 가이드북, 손동희 <<나의 아버지 손양원 목사>>, 애양원 홈페이지, 두산세계대백과 EnCyb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