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CM webzine MIR | KCM | MIR home | 세계선교정보 | Webzine-MIR |
















중국 방문기(MIR)
차 영 숙


2002년 8월 11일 - 8월 22일

아침 7시부터 서둘러서 삼성동 공항터미널로 갔다. 그곳으로 가면 공항세가 50% 면제되기 때문에 리무진을 타고 짐도 이곳에서 부치면 더욱더 간편할 것 같아서 이곳으로 왔는데 한국 항공이 아니라서 그런지 못 부치고 그 무거운 짐을 갖고 들고 다니느라 많이 힘들었다.

그곳에 학생들을 위한 다과를 한상자 준비하고, 연길에 계신 분의 부탁으로 자녀들 책을 좀 준비하고 하니 가지고 가는 것도 없이 가방만 4개가 되었다.

한국에서 11시 40분 출발해서 심양 공항에 1시 30분 도착했다. 중국이 우리보다 한 시간 늦게 맞추어져 있었다. 중국의 전체 모든 시간을 북경 시간에 맞추었다고 한다. 공항에 내리니 마중 나오신 분이 계셔서 연길가는 공항세 50원 둘이 100원을 내고 4시 40분에 심양에서 연길로 출발이다. 그곳에서 조선족 할머니가 어린아기를 안고 그 옆에는 딸이 있었는데 청도에서 고향인 연길에 가시는 길이라고 한다. 청도에는 한국 기업들이 많이 들어와서 연길에 있는 조선족들이 많이 취업을 해서 가 있다고 한다. 연길은 심양에서 1시간 거리였는데 기차로는 14시간 거리라고 한다. 심양의 공항은 참 깨끗했다. 꼭 우리 인천 공항을 보는 것 같았는데 인천 공항 비슷하게 지었다고 한다. 그렇다고 인천만큼 큰 것은 아니다.

비행기 안에는 한국 사람들이 더 많은 것 같았다. 연길 가까이 오면서 비행기에서 내려다 보이는 많은 산들 그리고 옥수수밭이 왜 그렇게도 많은지 온 세상이 푸르고 아주 정겨웠다.
군데 군데 모여있는 빨간색 지붕과 빨간 벽돌로 똑같이 질서정연하게 지어진 집들이 보인다. 우리가 도착할 연길은 어디일까 연길에서 30분 거리라고 한다면 저곳이 혹시 용정은 아닐까 내려다보면서 오다 보니 벌써 공항에 다 착륙이다. 그렇게 말로만 듣던 곳 바로 이곳에 옌벤이라는 곳이구나. 내리는 모든 사람들이 중국말보다는 한국 말을 더 많이 하니 외국에를 온 것인지 한국을 이곳에다 옮겨 놓았는지 착각이 들 정도이다.

공항에서는 짐을 찾는데 30분이나 걸리지 않았나 싶다. 중국사람들은 만만디라고 하더니 그것을 체험하는 순간이다. 밖에서는 사람들이 기다리고 짐은 나오지를 않고 한참 기다려서 짐을 찾아서 나오니 우리를 마중나오신 분들이 두팀이 되었다. 연길에 계신 분에게 책들은 넘기고 우리는 다시 30분 거리에 있는 용정이라는 곳으로 갔다

교회에 도착하니 교회는 소망교회에서 지어준 교회라고 하는데 멀리서도 한눈에 보일 정도로 크고 웅장하게 지어졌다. 7-800명 석이 되는 곳으로 1층 대성전에는 유아실과 2층에도 좌석이 있는 흔히 한국 교회의 모습이었다. 그리고 교육관건물은 사무실 작은 예배실 등등 4층건물로 되어 있었다. 우리는 이곳에서 집사님들이 준비해주신 저녁식사는 그 옛날 어렸을 적에 먹었던 음식 맛이었다. 꼭 외갓집에 와서 먹는 식사 기분이라고나 할까 정말로 푸근하고 좋았다.

용정이라는 곳은 정말 의미가 깊은 곳이었다. 언젠가 어렸을 때에 북간도라는 드라마를 본 기억이 나는데 그때에 바로 용정이라는 곳에 대한 지명을 들었던 기억이 난다. 바로 그곳이 이곳이라니 우리의 60-70년대를 생각나게 하는 곳이다. 梨花호텔(사람들은 배꽃호텔이라고) 하는 곳에 묵었다. 침대는 어린아이들이 사용할만한 침대가 두개 나란히 있고 화장대에는 거울이 없는 책상 같았으며 텔레비전도 화질이 안 좋고 별로 나오는 것이 없었다. 화장실에 샤워 수도꼭지는 어떻게 틀면 물이 나오고 어떻게 틀면 나오지 않고 그러다가 꼭지가 떨어지고 낯선 곳에서의 밤이라 그런지 잠이 오지를 않았다. 그래도 피곤했는지 어떻게 잠을 자고 한국에서는 먹지 않던 아침 식사를 숙소에서 거저 주는 식사라 일찍 일어나서 호텔 식당에를 가니 뷔페처럼 차려놓았는데 두부를 꼭 눌러서 채를 썰어서 묻힌 것, 두부를 졸인 것 나물 종류들 앙꼬 없는 찐빵에다 밥 기장(조) 쌀을 미음처럼 끓여놓은 것 찐계란 등이 있었다. 반찬은 우리 입맛에 맞는 것 같았다. 이곳은 다양한 두부요리가 많았다. 모든 요리에서 두부가 빠진 적이 없었던 것 같았다. 처음에는 호기심에 이것저것 먹어보기도 했다. 우리가 아무 증서도 주지 않고 식사를 하려고 하니까. 조선족 처녀가 미터방이십니까 계속 하길래 미터방 미터방이라는 음식을 따로 주문하는 것이 있나 생각하다 보니 아하 아침이면 호실에 묵는 사람들은 식사 티켓을 주어야 하는데 그것이 없으니까 묻는 것이라는 것을 한참 생각한 끝에서야 알았을 정도로 얼마나 말을 빠르게 하는지 순간에 들을 때에는 알아 들을 수가 없었다.

이곳에 사람들은 이북 사투리와 중국말하는 톤과 함께 섞여서 빨리 할때라든가 사투리에 익숙하지 못한 것은 한참 생각을 해봐야 할 때가 있지만 대체로는 조선족이 많이 사는 곳이라 의사소통하는 데에는 어려운 점이 없어서 좋았다.

가끔 택시나 니야카를 자전거 앞에다 달고 사람을 태우는 것이 있는데 시내는 1원이고 우리가 묵은 배꽃호텔까지는 다리를 넘는 시의 경계선이라 2원을 받는데 이 일을 하는 사람들은 한족도 섞여 있었다. 한족 사람들은 부지런해서 아침 새벽부터 나와서 그것도 1전을 벌기위해서 일한다고 한다. 그리고 그 번 돈은 절대로 한번 들어가면 나오지를 않는데 모아서 자식들만 위해서 온전히 사용한다고 한다. 아무리 돈을 쓰라고 해도 쓰지 않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말이 있다고 한다. 세비로 양복에 조선족은 1전이 없어도 누덕누덕 누덕이 옷을 입은 한족들의 주머니는 돈으로 가득 채워져 있다고 그럴 정도로 한족을 외모로 부자냐 아니냐를 판단한다는 것은 큰 실수일 것이다.

용정에 조선족들만 사는 줄 알았는데 한족들도 이곳으로 많이 이주해 와서 사는 것 같다.

연길에 계신 주성이 아빠와 엄마가 우리 호텔까지 택시를 대절해서 오셔서 일송정이라는 곳을 데리고 가셨다. 그곳은 용정 시내가 한눈에 보이고 그 가운데로 흐르는 해란강 줄기가 꼭 실지렁이 같이 비암산을 돌고 돌아 용정의 반대편인 평강벌 옛날에 평강공주와 바보온달이 살았다는 곳인데 이곳에서 나온 쌀을 마지막황제 부이가 먹었을 정도로 비옥한 땅이었다고 한다. 이곳은 온 천지가 산이며 쓸모없는 곳이었는데 우리 민족이 이곳으로 이주해오면서 이곳에 이렇게 농경지를 가꾸었다고 한다. 처음에는 두만강을 넘어서 이곳에 농사를 짓고 다시 돌아가곤 하다가 나중에는 이곳에 정착을 하면서 살게 되었는데 일제하에 조국에 돌아가 보지 못하고 또 남의 나라에서 사는 서러움이 있을 때마다 논, 밭일을 하면서 비암산 꼭대기에 고고하게 서있는 한 그루의 소나무를 바라보고 시름을 달래면서 일을 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이름도 일송정이라고 불렀는데 현재는 그렇게도 우람하던 소나무는 없어지고 그 자리에는 전각이 세워져 있고 그 옆에는 얼마 전에 심은 듯한 소나무가 심겨져 있을 뿐이다. 여러 가지 내려오는 이야기가 있는데 일본 사람들이 한국 사람이 신처럼 섬기는 소나무를 영물이라 생각하고 베어버렸는데 자꾸 새 싹이 돋아나서 또 자라자 나중에는 그곳에 후추 가루를 뿌려서 다시는 소나무가 자라지 못하게 했다는 이야기와, 어떤 사람이 그곳을 폭파시켰다고 하는 말을 한다. 하지만 무슨 이야기든 간에 이곳에 소나무가 굳세게 서있던 것만은 사실인가 보다. 그리고 이곳이 그 유명한 “선구자” 노래 가사의 고향이라고도 한다. 아마 많이 들었을 것이다. 말달리던 선구자라는 노래를 바로 이곳에서 지었다고 하니 그 가사만 들어도 가히 이곳이 얼마나 우리 한국사람들의 정신적인 지주 역할을 했는지 가히 짐작이 간다.

우리 한국사람들은 어디를 가든지 질경이처럼 끈질지게 개척하면서 살았던 것 같다. 민족의 끈질기고 모진 인생살이에 가슴이 저려 옴을 느낀다. 그래도 우리 한국이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어지면서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자 이곳도 많이 정리되어 있었다. 조선족의 몇몇 아낙들은 이곳에서 옥수수와 과일 빵을 팔고 한국에서 온 사람들은 같은 동족이란 애틋한 마음으로 가지고 물건을 사준다 그들의 생활이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어주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우리의 마음과는 다르게 조선족들은 그렇게 반가운 것 같지는 않았다. 나의 선입견 때문일까 조국이라고 찾아간 곳에서 외국인이라는 사실 하나만으로 얼마나 많은 설움을 받았다는 소문이 퍼져서 그럴까 한국 사람을 대하는 태도도 그렇게 좋지는 않았다. 오직 물건을 팔아주는 한 고객에 불가한 것이지 우리 마음 같지는 않다는 느낌이다.

일송정을 보고 용드레 우물에 오니 공원으로 잘 만들어 놓았고 노인들이 우리나라 파고다 공원처럼 모여 장기를 두시고 계셨다. 이곳도 한 사람당 5원씩 돈을 받았다. 아니 일송정에서도 돈을 받았지만 그전에는 다 공짜 아니 관심도 없던 곳이 한국 사람들이 너무 많이 오니까 이렇게 돈을 받는 것이라고 한다. 용드레 우물은 물맛이 좋고 끊임없이 샘솟는 우물로 아주 좋은 곳이었는데 한국 사람이 개발을 해보겠다고 하다가 물줄기를 그만 시멘트로 막은 다음부터 물은 있지만 예전에 그 우물은 안되고 그저 전설로 이 우물에서 용이 살다가 하늘로 승천했다는 등의 이야기만 남아 있다고 한다. 용드레 우물 근처에는 대성중학교라고 윤동주 시인이라든가 문익환, 강원용 목사님 등이 다니셨다는 학교를 방문했다. 이곳도 여러 가지 사진들과 우리 목사님들의 빛바랜 사진들을 전시하는 전시회장을 만들고 또 설명하는 안내양까지 있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방문을 하면 그럴까 싶다.

빛바랜 사진들 속에서 아는 사진들 그리고 이름만 들었던 사람들의 모습을 보니 또 다른 감회가 짜릿하게 오는 것을 느끼면서 눈물이 나오려고 한다. 윤동주 시인의 젊디 젊은 모습을 보니 어쩌면 저리도 순수하게 잘 생겼을까 저런 청년이 29살의 꽃다운 나이에 일본 감옥에서 해방을 두달 앞두고 죽었다고 한다 사인은 2년동안 무슨 주사를 맞고 그에 외사촌과 함께 죽었다니 더욱더 안타까움이 이루 말할 수 없었다.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러움이없이 살기를 원했던 윤동주 시인은 나라 잃은 설움을 시로 품어내었던 것이다. 그는 비록 젊어서 죽었지만 그가 남긴 업적은 우리 가슴속에서 영원히 숨쉬고 있을 것이다. 다시 이곳을 나와서 윤동주 시인의 생가를 방문 했다. 용정에서도 좀 떨어진 곳이었는데 시멘트 포장도로에서 비포장도로 그리고 공사하는 곳이 많았다. 이곳도 방문자가 많으니까 서서히 포장도로를 하기 시작하고 있었다. 윤동주 시인의 생가 옆에 큰 창고 같은 건물이 허름하게 서 있었는데 이곳이 명동교회로 규암 김약연 목사님, 바로 윤동주 시인의 외삼촌이 된다고 한다. 그분이 이곳에 교회를 창립하고 하나님께 얼마나 많은 기도를 했을까 이 나라와 민족을 위해서 얼마나 나라를 사랑했으면 그에 유명한 명언으로는 “나의 행동이 나의 유언이다” 그는 곧 죽을지도 모른다는 마음으로 후학들에게 보여주기에 부끄러움이 없이 일을 하셨던 분 같았다. 명동교회는 우리 5-60년대 시골 교회를 상상하면 될 것 같다. 바닥은 마루이고 강대상등이 그전에 그대로 보존되어 있었다. 용정 시내에서 차로 30분 거리 정도에 있었다.. 그리고 넓은 뜰과 그 밑으로 윤동주 시인의 생가가 자리잡고 있었다. 동네는 그리 크지 않은 아주 전형적인 시골 동네 그대로였다. 안내하는 아줌마가 자꾸 사인을 하라고 하길래 하지 않고 헌금함에 헌금만 하고 김약연 목사님과 명동교회 창립에 대해서 여러 가지 기록들이 전시되어 있는 사진을 보고 나와서 다시 윤동주시인 생가에 가니 문이 잠겨 있었다. 아쉬움에 돌아서려니 아까 그 아줌마가 친절하게 문을 열어주어 들어가서 곳곳을 구경할 수가 있었다. 놀랍게도 베다니 기도파일을 번역하면서 한집에 동물이 함께 산다는 것에 대해서 이해를 못했는데 바로 이곳은 직사각형의 집으로 동물이 있는 방과 부엌, 부엌은 마루로 되어 있는데 마루 밑을 들어서 불을 땔 수 있게 되어 있었다. 마루를 내리면 불때는 어디에 있는지 모르게 만들어져 있었고, 방은 두개로 나누어져 있었다. 그 아줌마가 자꾸만 왔다는 발자취를 방명록에 기록하라고 하더니 보건비용으로 돈을 달라고 한다. 그저 가는 곳마다 돈 돈 돈이다. 이렇게 험하고 용정시내에서 먼 곳까지 어떤 사람들이 교회를 다녔으며 이곳에서 얼마나 많은 독립투사들이 머리를 조아리면서 조국의 독립을 위해서 일을 했고, 하나님께 울며 기도를 했을까. 모든 것이 자유로운 지금의 우리들은 어떤가라는 질문을 던져보게 된다.

우리의 선조들의 눈물로 일구어진 이곳 용정을 우리 학생들에게 탐방을 하게해서 다시 한번 조국에 대한 애국심을 고취시키는 장소로 만들면 어떨까라는 생각을 해보았다. 하지만 지금 40대 이상만 조금 생각할 뿐 지금 젊은 아이들은 도대체가 무슨 이야기인지 이해를 하지 못하고 감동도 주지 못한다고 한다. 일본 사람들은 사이판을 여행코스로 만들면서 일본이 옛날에 얼마나 강했으며 세계를 정복했던 이야기를 해주고 있는데 반해서 우리의 현실은 부끄러운 과거라서 이야기해주고 싶지 않은 것이 더 많아서 이야기를 하지 못하는 것인지 다시한번 생각해볼 문제다 아픈 과거일수록 더욱더 그 길을 가지 않도록 안내해주고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하게 만드는 것도 한 방법이 아닐까 생각을 또 한번 해보게 된다.

우리는 다시 연길 시내로 나와서 구경을 하였다. 이곳은 용정과는 다른 도시의 형태를 띠고 있었고 9월에 있을 연변 자치주 50주년 행사로 공사하는 곳이 많았다. 아파트도 새로 짓고 길도 넓게 정리가 되어지고 있었다. 정부에서 많은 돈을 이곳에 내려 보내서 그 돈을 다 써야 하기 때문에 이렇게 공사가 한창이라고 한다. 이곳 철거 구역에서 사는 사람들은 국가가 철거하겠다고 하면 당장 떠나야한다고 한다. 그렇치않으면 벌금을 물어야하기 때문에 시민들과 나라가 실랑이를 벌이는 일은 없다고 한다. 모든 땅이 국가의 땅이고 개인 소유가 허락되어있지 않기 때문에 보통 50년 상환으로 땅을 빌려서 건물을 짓고 언제든지 국가가 원하면 주어야한다고 한다. 좋은 제도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판단하기가 좀 그렇기는 한데 중국처럼 인구가 많은 큰 대륙은 그 방법이 최선의 방법은 아닐까 생각도 해본다.

연길 시장에 들르니 그곳으로 온 곳곳에 물건들이 다 모였다가 다시 지역으로 나가는 길림성에서 가장 큰 도시가 바로 연변이니 시장도 사람들로 북적그렸다. 생각보다 연변은 아주 컸다. 이렇게 대도시에서 사는 사람들을 한국의 시골 총각들과 결혼을 하라고 했으니 그들이 얼마 살지 못하고 뛰쳐 나오는 것도 무리는 아니겠다 싶다. 우리는 너무 연변을 몰랐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는 곳곳마다 간판은 조선족말과 한족말로 써있었고 한국에 배우들이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모습까지 간판에 그려져 있었다. 그곳은 순전히 한국음식점이라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 그렇게 해놓았다고도 한다. 한글 간판을 보고 한국 말을 하는 사람들을 만나고 외국이라는 생각보다 한국의 어느 한 지역을 방문한 기분같았다. 여러곳을 구경하고 다시 용정으로 택시를 타고 왔다. 택시비가 용정까지 40원인데 그곳에 사시는 분 도움으로 우리는 합승하는 조건으로 20원에 조선족 자매와 함께 타고 왔다. 그 자매는 엄마가 지금 한국에 나가 계시는데 자기는 지금 할머니집에 가는 길이라고 했다. 낯선 곳이라 택시를 타는 일도 겁이 났지만 말이 통하는 조선족 자매와 함께 동행하니 마음이 조금 놓이기도 했다. 무사히 숙소로 돌아왔다. 연길이나 용정 연변 자치주에 사는 많은 사람들이 신도시나 한국으로 나가 있는 사람들이 참 많다고 한다.

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오전 8시30분부터 시작하여 12시까지 오후에는 1시 30분부터 시작하여 5시까지 강의가 시작 되었다. 이곳에는 금요일 오전까지 근무를 하고 토.일요일까지 는 공휴일이라고 한다. 주 5일째 근무가 이곳에서는 일찍부터 도입된 것 같다. 금요일 오후에는 축구를 했다. 이곳에 사람들은 축구를 참 좋아한다고 한다. 틈만 나면 학교 운동장으로 나가서 축구를 했다. 남자들뿐만 아니라 여자들도 얼마나 축구를 좋아하는지 연길 시내에서 축구를 하면 연변 주위의 먼곳에서부터 축구를 보려고 오는 여자들이 많다고 한다. 축구를 보면서 조금이라도 잘못하면 야! 야! 나와! 그리 해가지고 무슨 니가 축구 선수가 당장 치쁘르라 하면서 고함을 질러대고 축구공이 골대로 들어갈라치면 안타까운 마음에 옆에 있는 모르는 남자의 허벅지를 꼬집어 대면서 아야 아야 아이고 이를 어쩌나 들어가야 할틴디 하면 꼬집어서 경기가 끝나고 나면 옆에 있는 낯모르는 남자들의 허벅지는 멍이 들어 있을 정도라고 한다. 그러면 아~예 죄송합니다. 서로 미소로 답을 하면서 헤어질 정도로 아주 과격하게 축구를 여자들이 좋아하는 것 같다. 동네 축구를 해도 길을 가다가도 본다고 하니 얼마나 축구를 좋아하는지 알 것 같다. 그리고 중국은 여자들이 남자들보다 사회활동을 더 많이 하고 왕성하게 활동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 한족의 남자들은 가정일도 잘 한다고 한다. 하지만 조선족의 남자들은 한국이나 여기나 가정일을 도와주는 일은 잘 안하는 것 같았다. 그래 지나가는 말로 한족 남자와 조선족 여자가 만나면 환상의 커플인데, 한족 여자와 조선족 남자가 만났을 때에는 가정은 아주 개판이 된다는 말이 있듯이 한족의 남자들이 얼마나 가정일을 잘 하고 있는지 알 수 있는 부분이다.

또 우리는 북한이 보이는 도문을 향해서 먼 길을 달려갔다. 도로는 아주 잘 포장되어 있었다. 전에는 다른 길로 돌아서 갔었는데 지금은 직통거리로 아주 도로가 잘 포장되었다고 한다. 시원하게 펼쳐진 푸른 초원을 옆으로 하면서 도문을 향해서 달린다. 산은 산인데 그렇게 험하지 않고 중국 사람들 성격처람 완만한 경사로에 옥수수 등 농작물을 다 심겨져 있어서 그 넓은 땅이면서도 노는 땅이 없이 산이라 할지라도 다 농사를 짓고 있다는 것에 놀랐다. 도문 시내로 들어가기 전에 우리는 두만강 북한이 아주 가까이에서 보이는 곳에 가서 두만강 물에 발을 담그라고 비포장도로 길을 갔다. 이곳은 사람들이 오지 않는 곳인데 북한과 제일 가까운 곳이라면서 우리를 데리고 오신 것이다. 작은 촌락을 지나서 두만강에서 바라본 북한은 아주 가깝게 보였다. 겨울에 얼음이 얼으면 이 동네 사람들과 북한 사람들이 한 동네처럼 왕래하면서 살았을 것 같이 아주 가까운 거리에 바로 갈 수 없는 북한이 있었던 것이다. 두만강 물에 발을 담그고 저곳을 비자와 여권없이 마음대로 다닐수 있는 날이 언제나 오려는지 꼭 이렇게 돌고 돌아서 갈 수 없는 북녘을 바라보아야만 하는지 답답하기 이를때가 없다.

다시 아쉬움을 뒤로 하고 동네로 들어오니 한 조선족 가족이 굳이 자기 손녀딸을 사진 찍어 달라고 해서 한 장 찍어주고 도문으로 향했다. 도문시는 연길보다는 한창 못하지만 그래도 용정보다는 큰 도시같았다. 도문에도 큰 교회를 짓는 공사를 하고 있었는데 아마 한국 교회의 도움으로 짓고있는 것이라고 한다. 도문에는 북한과 한국을 연결하는 다리가 있었다. 그곳에도 차를 주차하니 금방 사람이 와서 돈을 내라고 한다. 전에는 입구에서 돈을 받았는데 없다고 좋아했더니 카메라로 사진을 찍으려고 하니 안내원이 와서는 사진을 찍으려면 돈을 내야한다고 한다. 이곳까지 와서 사진을 안 찍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 또 한번 북한 땅을 바라보고 아쉬움으로 다시 길을 재촉하여 연길로 돌아왔다. 연길에서 이곳까지 차로도 2시간 넘게 걸리는 거리를 북한의 탈북자들은 연길까지 그 먼 거리를 그것도 밤에만 산으로 해서 이동을 했다니 두려움과 배고픔이 어떠했을까 그리고 도착해도 특별한 보장이 있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도로에는 차들이 그렇게 많지가 않아서 시원하게 달릴 수가 있었다.

연길에서 주일을 지키기 위해 하룻밤을 묵고 주일날은 연길교회를 나갔다. 이 교회도 한국교회에서 지원을 해서 3500석이나 되는 큰 건물로 교회를 건축했는데 멀리서 한눈에 보일 정도로 크다 그래 중국 정부에서는 안되겠다 싶은지 연길 교회 앞 개울가에 기둥을 세워서 유흥가건물을 지어 조금이라도 보이지 않게 하려고 했지만 워낙 교회가 크다보니 멀리서 보이는데는 별 지장이 없었다.

우리는 11시 예배 참석을 했는데 3부였고, 9시부터 드리는 예배에 사람들이 제일 많이 온다고 한다. 삼자교회인 연길교회의 예배는 한국의 예배나 별 차이는 없었다. 한국의 교회에 참석을 해서 예배를 드리는 것 같았고 예배 드리는 사람들의 모습이 어디선가 보았던 그런 사람들의 모습이었다. 모든 예배를 마치고 우리를 안내해준 주성이 아빠는 연길에 오면 연길 냉면을 먹어봐야 한다면서 시내 중심가에 위치한 진달래라는 식당엘 데리고 가셨는데 이곳에는 손님이 얼마나 많은지 한국에도 분점을 내려고 하고 있다고 한다. 그곳에 냉면 맛은 참 독특했다. 그리고 양도 많았고 중국식 탕수육은 새콤달콤하게 고기를 튀긴 것으로 기름이 줄줄 흘러나올정도로 기름이 많았고 맛이 아주 독특했는데 냉면과 고기를 함께 먹기에는 양이 참 많았었다. 여기저기 걸어다니다 보니 그것도 운동이라고 몹시 피곤해서 다시 주성이네 집으로 와서 푹 쉬면서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누고 내일은 백두산 천지를 보러 올라가기로 했다.

이곳에는 위성 안테나로 한국에 KBS는 잘 나온다고 한다. 비싼 안테나는 모든 방송이 다 나오지만 자기네는 싼 안테나로 KBS 한곳만 본다고 한다. 그래도 한국에 뉴스랑 여러 가지 부분을 접하니 타국에 있어서 그렇게 외롭지는 않고 물가가 싸니 사는데도 그렇게 부담스럽지가 않다고 한다.



백두산


(머리에 눈이 하얗게 덮여있다고 해서 백두산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백두산을 중국에서는 질 장자를 써서 장백산이라고 부른다.

연길에서 7시에 출발하여 잘 포장된 길을 4시간을 넘게 달렸다. 전에는 비포장도로로 7시간이나 더 걸리는 거리였는데 지금은 관광객이 많아져서 그런지 아주 잘 닦여있었다. 끝없이 산기슭에는 옥수수밭이 끝이 없고 논도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정말 중국산 농수산물이 한국에 물밀 듯이 몰려오는 것도 이해가 갔다. 비행기에서 내려다보았을 때에도 그렇게 옥수수밭이 끝이 없더니 낮은 산들이 많아서 옥수수를 많이 심는 것 같았다. 그래서 그런지 옥수수로 만든 식품들도 많았던 것 같다. 곳곳에는 빨간 벽돌집과 빨간 지붕의 집들이 똑같이 지어져있었는데 특이하게 지붕의 모양이 달랐다. 한족 집과 조선족 집의 지붕이 달라서 한눈에도 이집에 어느 종족이 사는지 알 수가 있었다. 지붕위에 굴뚝은 3-5개까지 있는 집들이다. 연료는 석탄을 때는데 바로 탄광에서 캐낸 석탄을 그대로 쓴다고 한다. 이렇게도 맑은 하늘도 겨울에는 연기로 인해서 뿌옇고 공기가 안좋다고 한다.

대체로 산과 들은 푸르렀고 끝없이 펼쳐지는 장시간의 거리를 가는 것으로 보아 얼마나 중국땅이 큰지를 실감나게 했다 길가에는 꿀통을 몇십개 나열해놓고 꿀을 파는 장사들이 많았는데 현지인 말로는 다 가짜라고 한다. 밑에서 다 만들어서 가지고 올라온다고 했다.

백두산 올라가는 길목에 쭉 벋은 나무사이로 2차선도로가 끝없이 펼쳐졌다. 언제나 백두산이 보이며 그 산을 올라가나 했더니 사실은 백두산을 오르고 있는 것이라고 했다. 그런데 꼭 평지를 달리는 기분이 들을 정도로 가는 길은 완만했다. 그래서 중국 사람들은 백두산을 길장자를 써서 장백산이라고 하지 않았나 싶다. 한참을 달려오니 장백산이라는 정문이 나타나고 그곳에서 사람과 차가 동시에 올라갈 수 있는 표를 샀는데 표 값이 많이 올랐다고 우리를 안내해주시던 분이 말씀하셨다. 이제 돈을 냈으니 이 차로 정상까지 가려니 했더니 또 천지를 가기전에 아까 들어왔던 똑같은 문이 있고 우측으로 장백폭포로 가는 길이 있었다.

천지에 가려면 다시 이곳에서 찝차로 차를 갈아타야 한다고 한다. 전에는 다 올라갔었는데 한번 관광버스가 구르는 바람에 사람들이 다 죽고 오직 한 사람만 살았는데 그 사람은 잠을 자다가 놀라서 뛰어내린 사람이었다고 한다. 그 이후 이곳을 운행하는 찝차를 만들었고 비용은 1인당 80원이다. 우리 일행은 공안들이 점심을 먹으러 가는 틈을 타서 올라가기로 하고 먼저 장백폭포를 구경하기로 하고 가니 입구에 사람들이 뜨겁게 흐르는 온천물에 발을 담그고 계란들을 까먹고 있었다. 7시에 대강 밥을 먹고 4시간 넘게 달려오느라고 정말 배가 몹시 고팠다. 이럴 줄 알았으면 먹을 것을 사가지고 오는 것인데 하는 아쉬움이 남았지만, 어쩌랴. 금강산도 식후경이라고 너무 배가 고프니 그 아름다운 풍경도 만사가 귀찮을 정도였다. 사람들이 먹는 계란이 너무 먹고 싶을 정도로.. 그리고 한 움막 같은 곳에 엄청난 계란과 옥수수를 물에 담가놓고 있었다. 우리는 계란을 6알에 10원 굉장히 비싸게 받는 것이라고 했다. 그래도 이곳에 오면 또 온천물에 삶은 계란을 먹는 것이라고 해서 우리도 까먹으면서 발을 담그니 너무나 뜨거워서 담글 수가 없었다. 잠깐 담그고 장백폭포로 향했다. 그런데 그곳에서도 또 10원이라는 입장료가 있었다. 아까 냈으면 다 되었지 싶었는데 그게 아닌가보다 멀리서 바라본 장백폭포의 줄기가 정말 장관이었다. 가까이에서 보는 폭포의 우람함은 그림에서 보았던 나이아가랴 폭포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겠지만 밑에서 물이 떨어지는 것을 보니 그 웅장함이 우리를 압도하는 것 같았다. 주위를 보면 모래 아니 석탄가루 비슷한 것이 흘러내리는 것 같은 산이라 사람들이 오를 수는 없을 것 같았다. 나무하나 없고 풀 한포기 자라지 못한 산꼭대기에서 어떻게 이러한 물이 흐르고 있는지 궁금했다. 중국에 아가씨들이 한복을 입고 장백폭포라는 돌 푯말 앞에서 사진을 찍고 있었다. 우리도 몇 방을 열심히 찍고 내려오니 장뇌삼을 파시는 분들이 있었다. 진짜인지 가짜인지 알수 없지만 관광객에게 판매하기 위해서 어설픈 한국 말을 배워서 이곳까지 올라와서 장사를 하는 것이다. 우리는 다시 천지를 향해서 차를 타고 행여 공안들이 없어서 그대로 통과를 했으면 싶은 마음에 점심때에 그곳으로 향했다. 너무 힘들고 배고프고 지쳐서 제발 그냥 통과를 했으면 하는 기도를 하고 앞에 오니 공안들이 그냥 있었다. 그래도 한번 걸리면 말고 하면서 통과를 하니 잡지를 않아서 우리는 천지를 향해서 감사하는 마음으로 달렸다. 굽이굽이 산정상을 향해서 올라가면서 보니 가는 길은 조그만 풀들과 꽃들과 작은 풀들만 있었다. 산에서 내려다보이는 아래 세상은 아~하 정말 보기 좋았다고 하신 하나님의 말씀이 떠오르듯이 참 아름답고 가슴이 탁트이는 기분이라고나 할까 까마득히 내려다보이는 아래 세상을 바라보면서 구름 속을 지나서 달려간다. 가는 길에 검은 구름이 있자 어째 천지 보기가 힘들겠다고 사기 아저씨가 말하자 그래도 힘들게 왔는데 행여 천지를 보지 못하면 어쩌나 기도가 절로 나온다. 천지에 도착하니 공사를 하기 위해서 쌓아놓은 모래위에서 사람들이 무언가 구경을 하고 있다. 아무리 둘러보아도 천지가 될 만한 곳은 없는데 어디에 있을까.... 사람들이 모래위를 기어올라가고 꼭대기에 있는 사람들이 소리를 친다. 빨리 올라오라고 구름이 오고 있다고 안되지 모처럼 올라와서 천지를 못본다면 하는 마음으로 얼마나 단숨에 올라갔는지 다리가 마음같이 움직여지질 않는다. 간신히 엉금 엉금 기어서 올라간 모래 언덕 위에서 본 천지는 어떻게 이런 곳에 이렇게도 큰 호수가 생겼는지 너무 놀라고 경이로웠다.

찬송가 40장의 주 하나님 지으신 모든 세계..... 주님의 높고 위대하심을 내 영혼이 찬양하네...
78장 참 아름다워라 주님의 세계는.... 찬송이 절로 나올 정도로 놀랍고 아름다웠다.

왼쪽으로 북한 초소가 보인다. 저쪽으로 오면 이렇게 힘들게 많은 비용을 들이지 않고 올수 있는 것을 우리는 이렇게 돌고 돌아서 온 것이다. 천지는 밑에 물이 우물처럼 샘이 솟는다고 한마디로 살아 있는 물인 것이다. 이런 곳이 세계에서 3군데 밖에 없다고 하니 정말 신기하고 놀라울 뿐이다. 이렇게도 높은 산꼭대기에 우물이 있다니 우물도 이렇게 큰 호수 같은 우물이 말이다. 오직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것 같았다. 부랴부랴 사진 찍느라고 감상도 제대로 해보지 못하고 갈길이 멀어서 다시 내려올 수밖에 없었다. 갈 때는 몰랐는데 계속 내려오는 길이다. 사기(이곳은 기사를 사기라고 부른다) 말로는 이렇게 계속 연길까지 내려가기만 한다고 하는 말에 얼마나 장백산이 긴지 새삼 느끼게 했고 길 장자를 쓰는 이유가 바로 이런 이유가 아닌가 싶다. 3시반 강원도식당에 들려서 버섯볶음(처음 보는 버섯임 송이도 아니고 비슷하게 생겼지만 작은 고추같이 생겼음)과 더덕무침, 된장찌개 깻잎 정신없이 배가 고파서 밥을 먹었다. 옆 식탁에는 한국에서 온 청년들(크리스챤들)이 있었다. 식사를 끝내고 다시 연길에 오니 6시가 넘었다.

천지는 아래에서 비가와도 올라가면 맑은 천지를 볼 수 있고, 어느 때는 해가 쨍해도 올라가면 구름에 천지를 볼 수 없다고 한다. 그만큼 천지는 아무에게나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기를 꺼리듯이 말이다. 밑에서는 천지에서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어쩌면 우리의 인생과도 같다. 우리가 앞날을 모르듯이 모든 것은 살아봐야 알듯이 말이다. 그래서 천지를 영산이라고 사람들은 부르는가 보다. 밑에서는 용암물이 흘러내리고 폭포는 차가운 물이 떨어지고 도대체 천지 밑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이렇게 모래 산에서 물이 샘 솟는 것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우리는 교회에서 식사하면서 천지를 본 것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자가용으로 천지까지 올라갔다고 하니까 목사님께서 아~ 하나님의 은혜네요. 천지를 본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살아서 돌아온 것에 대해서 감사해야 한다고 했다. 왜냐하면 찝차가 아니면 산을 내려올 때 계속 브레이크를 밟아야 하니까 나중에는 브레이크가 파열되어서 작동이 안되기 때문에 차사고가 나는 것이라고 했다. 그 말을 들으니 하나님께서 천지를 보게 하시고 또 이렇게 무사히 살아서 돌아온 것에 대해서 다시한번 감사를 드렸다.

이곳에 와서 많은 사람들과 교제하고 14시간 혹은 20시간씩 기차를 타고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자 모인 사람들의 뜨거운 열정과 신앙심에 나또한 많은 도전을 받았다. 하지못하는 운동이지만 저들과 하나가 되기 위해서 우리는 열심히 함께 했다. 그들을 가르친 것 보다는 너무나 많은 것을 알다 보니 시간이 너무나 짧았다. 많은 교제의 시간 속에서 하나님께서 얼마나 중국을 사랑하시고 중국에서 역사하시는지를 느끼면서 이러다가 우리 한국의 기독교가 중국보다 뒤지는 것은 아닐까 하는 두려움도 함께 있었다. 아직도 한국에 복음을 전해야할 대상들이 너무나 많은데 중국은 인구도 많지만 교회도 그냥 생기면 성도들이 늘어나는 것 같았다. 중국 사람들도 복받는 것을 많이 좋아하다보니 축복을 받기 위해서 교회로 몰려드는 사람들도 많은 것 같았다. 중국교회의 부흥이 소름끼치도록 나를 감동시키고 흥분되게 만든다.

“주여 그렇게도 한국 사람들이 중국의 복음을 위해서 기도하더니 이렇게 역사를 하는군요. 우리의 기도는 헛되지 않았습니다.” 앞으로 더 많은 복음 전파를 위해서 먼저 우리 나라가 더욱더 믿음위에 굳건히 서야된다고 생각을 하니 마음이 조급해졌다. 어서 빨리 한국이 더 많이 복음화 되어야 할텐데. 먼저 믿은 우리가 더욱더 믿음의 본을 보여주어야 할텐데 하는 마음들이.....이번 중국의 방문은 짧은 기간이었지만 많은 것을 배우고 느끼며 깨닫게 해주는 시간들이었다. 함께 했던 얼굴들이 떠오른다. 다시 만날 때에는 어떤 모습들이 되어 있을까 복음을 위해서 하늘나라 확장을 위해서 좋은 만남들이 되었기를 바라고 앞으로도 계속 지속되는 만남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이 글을 마치려고 한다.

중국에 성도들은 [임마누엘]을 좋아하고 교회에는 다 이 글을 써넣는다고 했다.


[ Webzine MIR 2002년 9월호 Index ]

Copyright KCM. All right reserved. 2001 ~ 2003.
위에 게재된 모든 글의 저작권은 KCM에 있습니다. 허락없이 복사/인용할 수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