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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R 연구물

베트남의 종교-참족과 이슬람교
황JD님




1. 참족 내 이슬람교의 유입
2. 참족의 민속 이슬람교 - 바니교
3. 바니교 내의 성직자 계층
4. 바니교의 계율과 성례
5. 남부의 이슬람 참족 공동체



1. 참족 내 이슬람교의 유입

현재 참족 내의 이슬람교는 참족 민속 이슬람교인 바니교와 일반 이슬람교의 두 그룹으로 나뉘어 있다. 바니교 참족은 투언하이(Thuan Hai)성내에만 거주하고 있으나, 이슬람 참족은 안장(An Giang)성 뿐만 아니라, 투언하이(Thuan Hai)지역에도 일부 분포하고 있는데, 이들은 모두 1950년대 후반에 이슬람교로 개종한 이들이다. 이슬람교내의 이 두 그룹은 그 종교적 특징이 서로 매우 다른데, 종교 생활 영역에 있어 각자 따로 활동하고 있다. 투언하이(Thuan Hai) 지역의 참족은 남부의 이슬람 참족을 북부의 바니교 참족과 구분하기 위해 '짬비라우(Cham birau-새로운 참족)'라고 부른다.
1928년에 나온 책인, G, 마스페로(Maspero)의 'Le Royaume de Champa'에서는 언제 이슬람교가 참파국 내에 들어오게 되었는가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G. 마스페로(Maspero)는 '통사'내의 수록된 내용을 언급한 에드후버(Ed Huber)의 작품을 거론하면서, 에드후버(Ed Huber)가 참파국이 국가 연호를 알라아카바르(Alla akbar)라고 정한 사실로 미루어, 중국 송 왕조 시대에 참족이 이슬람교로 개종하였다고 주장하였던 것에 대해,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고 반박하였다.
'통사' 489권에는 참파 왕국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는데, 이 내용에는 '참파왕국 내의 야생 소들은 농사일에 사용하지 않고, 제사를 드리는 용도로만 사용하고 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막 죽어 가는 사람을 위해 성직자가 알라화껍밧(A-La-Hoa-Cap-Bat)이라는 주문을 외우는데, '통사'에서는 이 주문의 내용이 '신이여 어서 빨리 고통에서 벗어나게 해 주십시오!' 기원의 뜻을 품고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어 이 책의 내용에서는 이들 이슬람교 신자들이 의식을 행할 때마다 경전을 읽으며, 경전을 읽을 때마다 두 손을 귓밥에 갖다 대는 동작을 한다고 나와 있으며, 알라가 전지 전능한 신이라고 찬송하고 있는 대목을 미루어 보아서, 후버(Huber)의 의견이 맞을 수 있는 가능성도 있다. 많은 학자들은 사실상 후버(Huber)의 의견에 동승하여, 10세기 이후의 중국 송왕조 시대에 참파왕국 내에 이슬람교 신자들이 있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모든 학자들이 그 시대에 참족이 이슬람교를 추종했다는 가정에 동의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한가지 확실히 알 수 있는 사실은, 라바세(Ravaisse)에 의해 그 뜻이 해석된 두 개의 비문 즉, 1039년도의 연대로 추정되는 한 비문과 1025년에서 1035년 사이의 연도로 추정되는 또 다른 한 비문의 내용으로 미루어 보아, 10세기 중 참파 왕국의 판랑과 판리지역 내에 장사하기 위해 온 외국 이슬람교도들이 있었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마스페로(Maspero)는 한가지 의문을 제시하고 있는데, 그것은 중국의 여러 다른 도시에 비해 10세기에 이르러서야 이슬람교 상인들이 참파왕국 내에서 상업활동을 했다는 사실이 시기적으로 매우 늦은 감이 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마스페로(Maspero)는 동양을 대상으로 항해하는 이슬람교 상선들이 어쩔 수 없이 참파 왕국을 경유해야 되지만, 이전에 그렇게 하지 않았던 이유는 참파국이 이슬람교에 대해 적대감을 가지고 있는 국가이었거나, 혹은 큰 항구를 소유하고 있지 않았다던 지, 혹은 이전 시기가 정치적 변혁의 시기에 해당하기 때문일 수도 있다고 말한다. 그렇기 때문에, 알라 신을 신봉하는 참족이 생겨나게 된 시기는 그 다음 세기의 참파 왕국과 인도네시아 왕국과의 교류가 확장되기 시작한 때부터라고 마스페로(Maspero)는 주장한다.
결국 뽀울로(Po Ouloah-알라(Allah))에 관한 전설과, 1,000-1,036년 사이의 한 시기에 한 참파국의 왕이 이슬람교의 성지인 라멕(La Mecque)로 순례 여행을 했다는 사실 등이 아이모니에르(Aymonier)에 의해 발표되면서, 11세기가 바로 보편적인 참족 내 이슬람교 전파시기로 인정받게 되었다. 그러나 마스페로(Maspero)는 이슬람교가 참족이 추종하는 주 신앙으로 받아들여지기 시작한 연도를 1470년 이후로 잡고 있는데, 이때는 참파 왕국이 무너져 와해되어 가는 시대이기도 하다.
P.Y 모긴(Mauguin)은 참파 왕국 내 외국 이슬람교도들이 살았고, 951년 이후에 중국으로 파견된 참파국 사신들의 이름이 뿌(pu), 부(bu), 보(bo)라는 단어로 시작되는 사람들이 나타났는데, 이러한 이름은 아랍어의 아부(abu)에서 비롯된 변절 음으로서, 이러한 이름을 가진 사람들은 아랍 사람이거나 아니면 참족 내에 존재하는 이슬람교도 일수도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또한 중국의 꽝동(Quang Dong)성 지역에 뿌(pu)라는 이름을 가진 아주 유명한 이슬람교가정이 살고 있었는데, 이 가정은 그 전의 송 왕조 시대에 참파 왕국 내에서 살았던 가정이었다는 사실 또한 제시하고 있다. 또한 참파 왕국과 다이비엣(Dai Viet)간의 전쟁으로 인한 난리를 피하기 위해, 일단의 참족 무리들이 중국으로 피난을 갔는데, 이 무리를 인솔한 사람의 이름이 뿌로에(Pu-lo E)였다고 한다. 이러한 여러 사실을 통해 모긴(Mauguin)은 중동지역에서 온 외국 이슬람교 공동체가 10세기 중에 참파왕국 내에 분명히 존재하였었다고 주장한다. 이들 외국 이슬람교도들은 그들이 거주하고 있는 지역의 참족 뿐만 아니라, 남 중국에 있는 같은 이슬람교 그룹들과도 접촉하며 지냈다. 그리고 참족 왕들은 이러한 외국 이슬람교도들을 중국과의 외교관계나 상업관계를 위해 관리로 등용하여 사용하였다고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만으로 참족이 이슬람교의 영향을 받게 되었다는 단정을 내리기는 힘들다. 이에 대해 학자들은 참족 왕조와 일반 민중들이 마호멧트라는 천사의 존재를 믿었던 시기가 바로 참족이 이슬람 화된 시기라고 본다. 이러한 관점을 바탕으로 하여 학자 모긴(Mauguin)은 참족의 이슬람교 화는 17세기 후반에 이르러서야 이루어졌으며, 이슬람화가 참파왕국 내에 이제 막 이루어지면서부터는 참족 중 거의 절반에 이르는 수가 이슬람교를 추종하게 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20세기초의 여러 자료에 따르면, 베트남 참족의 단 1/3만이 이슬람교를 따르고 있는데, 이것은 아마도 다수의 이슬람교 참족이 캄보디아로 이주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이와 같이 참파국 내 중동 지역 출신의 외국 이슬람교 공동체의 존재로 참족은 처음으로 이슬람교와 접촉하게 되었다. 그러나 여기서 확실한 사실은 이러한 이슬람교 공동체 내의 상인들이 참족으로 하여금 이슬람교를 신봉하게 만들었다고 볼 수 없다. 왜냐하면, 이들 외국 이슬람교 상인들은 당시의 사회적 여건상 다소 비우호적인 상황에 있었기 때문에, 사업의 확장에 있어서 강력하게 상권을 유지해 나갈 수가 없었다. 이러한 연유로, 이슬람교 상인들은 적극적으로 자신들의 신앙을 전파할 수 없었다. 그러나 12 - 16세기에 이르러 참족 내 항해술이 발달하게 되면서, 해로를 통해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말레카 등의 국가와 많은 교류를 하게되었다. 그런데, 12세기 무렵의 참족이 접촉하고 있는 국가들 내에서는 이슬람교가 종교적으로 우세 상황에 있었으므로, 이로 인해 참족의 이슬람교와의 주요 접촉점이 마련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완전한 이슬람교로의 종교적인 변화는 참파국이 격동 및 변동의 시기로 접어들게 되면서 일부 민간인들이 그 새 종교를 받아들이면서 시작된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이에 대한 마스페로(Maspero)와 모긴(Mauguin)의 의견은, 참족이 이슬람교를 본격적으로 추종하게 된 시기를 17세기쯤으로 보는데, 이때 참파국은 이슬람교화의 길을 걷게 되었으며, 이 시기는 동시에 참파왕국이 극적으로 어려운 상황에 놓였던 시기와도 일치한다. 이 시기의 참파국은 전쟁에서 완전히 패하게 되었고, 왕조는 쇠약해져 갔으며, 경제와 정치는 혼란에 빠져 매우 복잡한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참파국 내에 그 명성을 누려오던 발라몬교의 종교적 위치는 날이 갈수록 그 위치가 땅에 떨어지기 시작하였고, 마호멧이라는 천사의 존재를 믿는 신도들의 수가 늘어나기 시작하였다.


2. 참족의 민속 이슬람교 - 바니교

바니교는 베트남 참족의 고유 신앙으로서 이슬람교 신앙의 한 변형된 형태라고 볼 수 있다. 아이모니에르(Aymonier)의 저서 'Les Tchames et leurs religions'(1981)의 내용 중에 '바니(Bani)'라는 단어는 아랍어의 '베니(Beni)'라는 단어에서 비롯되었다고 나와있다. 이 '베니(Beni)'라는 단어는 '선지자의 아들들'이란 뜻을 가지고 있다. 현재 투언하이(Thuan Hai)성내 바니교 신도 수는 25,000명 정도이며, 같은 성내 48개 참족 공동체 마을 중에서 20여 개 마을이 바니교를 따르는 구 이슬람교 공동체이다.
투언하이(Thuan Hai)성내 참족은 판랑(Phan Rang), 판리(Phan Ri) 그리고 판티엣(Phan Thiet) 지역에 걸쳐 거주하고 있는데, 각 바니교 마을들은 이슬람교 의식과 교리실현에 있어 마을마다 상호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그러나 판티엣(Phan Thiet)지역에는 이슬람교 공동체가 없기 때문에, 판티엣(Phan Thiet)시 근처의 함투언박(Ham Thuan Bac)현 내의 말럼(Malam)공동체의 참족과는 외부적 혹은 형식적인 교류만을 가지고 있을 뿐이다.
바니교 신도들은 베트남 참족 내에만 있는 독특한 이슬람교 공동체를 구성하며, 투언하이(Thuan Hai)성 지역에 집중 거주하고 있다. 이들은 남부 지역의 이슬람 참족과 달리 별도의 종교생활을 영위하고 있으며, 다른 국가들의 이슬람 교인들과도 교류가 없다. 이들은 그들 나름대로의 특징적인 이슬람교 교리를 가지고 있는데, 이 교리 안에는 원 이슬람교 교리와는 전적으로 동떨어진 내용들이 많다.
투언하이(Thuan Hai)성 지역의 바니교 참족 마을 내에 있는 이슬람교 사원은 마을 주민들의 공동생활 중심지로서, 그들의 말로 탕므기(thang mugik)이라고 불린다. 옛적의 바니교 사원은 단지 초가 오두막 형태에 지나지 않았고, 폭은 6m에 길이는 8m정도였으며, 정면으로 베란다와 함께 8개 층의 돌계단이 놓여 있었다. 그리고 7개의 돌판이 놓여 있어, 사원으로 들어가는 성직자들이 기도 의식을 행하기 이전에 자신을 깨끗이 씻는 의식을 거치게 되어 있었다. 옛 사원의 내부에는 2개의 나무 기둥이 두 칸의 지붕을 지탱하고 있으며, 벽은 대나무를 엮어서 세웠고, 바닥은 발로 밟아 평평하게 다진 정도에 불과하였다. 그리고 사원의 정문 앞에 정결 의식을 위한 큰 항아리가 놓여 있으며, 예식의 시작을 알리는 북(hagar)이 놓여 있다. 예식이 진행되는 동안 사람들은 바닥에 자리를 깔아, 성직자들로 앉아 쉬도록 하거나 예식을 집행하도록 하였으며, 사원내의 들보에는 경전이 들어 있는 가방이 걸려 있었다. 그러나 요즈음의 모든 바니교 참족 마을에는 새로운 사원 건물이 세워져 있어, 그곳에서 마을 내 신도들의 예식을 집행한다. 이 새로운 이슬람교 사원은 겉보기에도 견고하게 지어져 있으나, 일반적인 이슬람 사원들과 같이 획일적인 모슬렘 건축 양식의 영향은 받지 않았다. 바니교 사원에는 하나의 큰 건물이 있으며, 사원이 차지하는 토지의 면적이 넓은 편이다. 사원 건물의 뼈대는 나무로 되어 있으며, 동-서 방향으로 놓여 있는데, 모든 창문은 동쪽 방향으로 열리도록 되어 있고, 벽과 바닥은 벽돌로 만들어져 있다. 또한 큰 건물 이외에 또 다른 별채가 하나 있는데, 이 별채는 두 칸의 지붕으로 덮여 있지만, 내부로 칸막이가 쳐져 있지 않으며, 남-북 방향으로 세워져 있다. 주 건물과 별관 사이에는 넓은 공터가 놓여 있다. 사원의 내부로는 거의 아무 장식 및 시설이 되어 있지 않은데, 유일한 내부 시설이라고는 미흐랍(mihrab)이라고 불리는 단상이 있을 뿐이다. 미흐랍(mihrab)은 원목을 이용해 만들어 졌으며, 그 높이가 사람의 머리를 조금 넘고, 폭은 1.5m 정도이다. 이 단상은 성직자들이 올라가 정경을 읽고, 예식을 인도하는데 쓰여진다. 여기에서 주의할 것은 이슬람교 사원내의 미흐랍(mihrab)은 주로 이믐(Imum)급에 속하는 성직자들이 예식을 인도할 때 사용되며, 그 오른쪽으로는 민바르(minbar)라고 불리는 또 하나의 단상이 있는데, 이것은 코띱(Khotip)급에 속하는 성직자들이 정경을 강론할 때 사용되어진다. 만약 바니교 사원 내에 민바르(minbar)가 없는 경우에는 미흐바르(mihbar)를 같이 사용하는데, 정경낭독과 기도의식이 미흐바르 단상에서 함께 행해지게 된다. 몇 몇 바니교 사원에는 침대 하나를 가져다 놓기도 하는데, 이 침대는 온그루(On Gru)인 바니교 내 최고 성직자가 휴식을 취할 때나 이슬람교 달력의 9월 중 금식 기간에 사용할 수 있도록 만들어 놓은 것이다. 이전에는 사원 정면으로 9개의 돌판이 있었으나, 지금은 시멘트로 만들어진 긴 의자 모양으로 바뀌었다. 각 사원 내에는 정결 의식 때 필요한 물을 얻기 위해 우물이나 작은 연못이 만들어져 있다.
바니교의 사원은 '신의 집(탕뽀(thang Po))'이라고도 불리는데, 이것은 각 성직자들이 그 사원에서 알라를 섬기는 신성한 예식을 행하기 때문일 것이다. 또한 '복이 있는 집(탕즈하르(thang Dhar))'이라고도 불리는데, 이것은 많은 신도들이 알라에게 복을 기원하며 예물을 드리고, 또한 그 마을내의 바니교 신도들에 의해 사원이 지어졌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원의 명칭으로 보아 우리는 바니교 사원이 바니 참족의 종교 및 사회 생활에 있어 어느 정도의 영향력을 끼치고 있는지를 짐작할 수가 있다.
일반적으로 바니교의 사원 문은 항상 열려 있지 않다. 문을 여는 경우는 규정에 따른 예배시간이나 집례 시간에만 해당된다. 각 의식 시 필요한 예물이나 경비는 마을 내에 있는 각 신도들이 그 비용을 대어야 한다. 이전에는 사원에 딸린 '하무탕므기(hamu thang mugik)'라고 불리는 전답이 있었는데, 이러한 전답들은 신도들이 헌정하였거나, 혹은 한 집의 상속자가 없이 대가 끊긴 경우 그 집의 소유로 되어 있는 전답을 사원의 소유로 돌린 경우였었다.
사원은 앞서 말한 종교적 목적 이외에도, 각 성직자들과 마을 구성원들이 함께 모여, 마을의 공사를 놓고 토론하는 장으로도 사용되어 진다. 일반적으로 각 예배시간에 모든 성직자들이 모인 가운데, 마을의 공사를 토론하는 경우가 많다.


3. 바니교 내의 성직자 계층

세계 다른 나라의 이슬람 공동체 내에는 베트남 바니교 참족 공동체처럼, 알라와 일반 신도들 사이에 중간 다리 역할을 하는 구별된 성직자 계층을 따로 두지 않는다.
이슬람교에서는 계율을 실천하고, 매주 열리는 성회 나 다른 중요 예식을 집행하기 위해 일정한 사람을 지정하여, 예식의 집행뿐만 아니라 경전을 가르치거나 여타 교리들을 맡아 가르치도록 한다. 여기에서 교리를 맡아 가르치는 사람을 코띱(Khotip)이라고 하며, 신도들의 예배의식을 진행하는 사람을 이맘(Imam), 신도들을 불러 예배의 시작을 알리는 사람을 무스진(Muszin)(참족은 이러한 사람을 빌란(Bilan)이라고 부른다)이라고 한다. 이러한 예식 및 가르치는 것과 관련된 일들을 일반적인 이슬람교에서는 어느 특정한 사람에게 전적으로 맡기지 않고, 자격이 있는 신도들 중 어떤 사람이라도 그 일을 맡아 볼 수 있게 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슬람교에서는 따로 종교적 직무만을 전념하는 성직자 계층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와는 반대로 투언하이(Thuan Hai)성 내의 바니교에서는 뽀아짜르(Po Achar)나 뽀짜르(Po Char)라고 불리는 성직자 계층이 따로 구별되어 있다. 이들 성직자 계층에 속하는 이는 흰색의 구별된 의복을 입으며, 의복 위로 숄을 걸치고, 머리를 민 후 머리에는 두건을 쓴다. 이들은 또한 먹는 것과 마시는 것 및 생활규칙에 있어 여러 가지 금기사항을 지킨다. 바니교의 성직자는 엄숙한 의식을 통과한 후 각 마을 내지 각 사원별로 임직되어진다.
바니교의 관습에 의하면, 어떤 한 청년이 성직자가 되고자 할 때, 그는 그의 마을 안에 있는 사원에서 임직식을 받아야 하는데, 여기서 그의 마을이란 그의 어머니 쪽의 고향을 의미한다. 그 후, 청년 성직자가 가정을 꾸려나갈 일정한 나이에 이르게 되었을 때, 그는 아내를 따라 아내의 집에 거주하게 되고, 아내의 가족들과 연합하게 되지만, 성직자 계층에 속하는 이로서, 그는 임직식을 받은 사원에 예식이 있을 때마다 돌아가서 예식을 집행하여야 하며, 또한 라무완(Ramuwan)기간(금식 절기로서 일반적으로 라마단(Ramadan)이라고 하나, 바니교 참족은 이를 라무완(Ramuwan)이라고 한다)에도 자신의 사원에 돌아와 금식절기를 지켜야 한다.
사원내에는 일종의 지도자 그룹이 형성되어 있는데, 이 지도자 그룹에는 성직자들과 일부 마을에서 투표로 뽑힌 권위 있는 인사들로 구성되며, 구성원의 임기는 3-5년이다. 이들은 종교적 규율과 관련된 문제뿐만 아니라, 마을 내 일상 생활에서 일어나는 문제를 처리하는 데에도 깊이 관여하고 있다. 아무튼 뽀짜르(Po Char)나 뽀아짜르(Po Achar)라고 불리는 성직자 계층의 존재는 바니 참족 사회의 또 다른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데, 바니교 성직자는 다음과 같은 네 가지 계층으로 나뉘어진다.

**짜르(Char), 아짜르(Achar) : 이들은 새로 성직자 그룹에 들어온 이들로서, 성직 경력과 능력에 따라 다시 네 개 계층으로 나뉘게 되는데, 즉 자막(Jamak), 딸라비(Talavi), 뽀싯(Posit), 뽀쁘롱(Po prong) 으로 나뉘며, 계층간의 승급의식은 라무완(Ramuwan)금식 기간에 이루어진다.

**코띱(Khotip), 띱(Tip) : 코띱(Khotip)은 토요일 오후 시간, 사원에서 매주 열리는 정기 성례시간에 교리를 가르치는 성직자를 말하며, 띱(Tip)은 일부 사원 내의 의식이나 일반 가정에서 행해지는 의식을 집행하는 임무를 가지고 있으나 교리를 가르치는 일은 맡지 않는다.

**이믐(Imun), 믐(Mum) : 이들은 토요일 오후의 사원 내 예배를 주관하는 이들이다. 바니교 내에서 믐(Mum)성직자가 되기 위해서는 최소한 15년의 성직 경륜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이 계층에 속하는 성직자들은 경전의 모든 내용에 대해 통달해 있으며, 또한 바니교 내의 모든 종교의식을 집행할 수 있는 능력을 소유한 자여야 한다. 믐(Mum)성직자들 중에서 도덕적 성품이 온전히 갖춰져 있고, 또한 재능 있는 성직자를 '40성인 참여'의식에서 따로 뽑아, 믐빠블루(Mum pah bluh-40인의 믐(Mum))로 세우게 된다. 이 '40인의 믐(Mum)'을 세우는 의식은 그 과정이 매우 엄숙하게 진행되며, 또한 지역 내의 모든 우두머리 성직자들이 참여한 가운데, 우두머리 성직자들의 만장 일치를 얻어야만 한다. 이 의식은 매년 하루나 이틀에 걸쳐 열리게 된다.

**뽀그루(Po Gru-우두머리 선생) : 바니교 지역에 있는 한 사원 당, 혹은 한 마을 당, 한 명의 유일하고 그 직위가 가장 높은 성직자이다. 이 우두머리 선생은 바니교 마을에서 일어나는 종교적, 사회적인 문제를 모두 결정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 있다. 그는 일반 가정에서 행해지는 예식의 날과 달을 결정할 수 있는 유일한 성직자이며, 동시에 기우제, 마을을 세우는 의식, 사원 건축의식 등의 특별하고 중요한 의식을 친히 주관하며, 또한 여러 성직자들에게 필요한 역할을 분배하는 일을 한다.

마을 내에서 일어나는 신도들 간의 문제나 종교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바니교 사원내에는 여러 성직자들과 투표로 뽑힌 일반 신도 대표들로 구성된 '영도자 위원회'가 따로 조직되어 있다. 이 '영도자 위원회'는 우두머리 선생이나, 모든 성직자들의 결정사항 등을 일반 신도들에게 알리고, 또한 일반 신도들의 의견이나 요구사항을 수렴하는 역할과 함께, 마을 내에서 일어나는 신도들간의 고소 건을 해결하는 역할을 한다. '영도자 위원회'내에는 짜르(Char)성직 계층에 속하는 이가 맡은 무딘(Mudin)직과 띱(Tip)성직 계층에 속하는 이가 맡은 띱딴(Tiptan), 믐(Mum)계급에 속하는 이가 맡은 뭄딴(Mumtan)직이 세워져 있다. 이 사원 내 '영도자 위원회'를 구성하는 인사들은 매우 민주적인 절차에 의해 뽑히게 되며, 각 구성원들의 임기는 모두 제각각인데, 보통 3-5년이 그 임기가 된다.
이슬람교 내에 성직자 계층이 따로 구분되어 있는 것은 투언하이(Thuan Hai)성 참족의 민속 이슬람교인 바니교 내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러한 특징은 참족 내에서 이슬람교가 발전해 나가면서, 발라몬교의 영향을 수렴하게 되어 나타난 현상이라고 볼 수 있다. 즉 다시 말해서 투언하이(Thuan Hai)성 내의 바니교는 일종의 참족 고유 문화의 영향을 받아 토속화된 이슬람교라고 말할 수 있는데, 이 바니교 내에 영향을 끼친 주요 문화적 요소에는 참족 민간 신앙과 발라몬교의 풍습 및 습관이 있다.


4. 바니교의 계율과 성례

성직자 계층의 근본적 존재 이유는 바로 그 종교의 계율을 일반 신도들에게 가르치는데 있을 것이다. 그러나 바니교의 이슬람적 신앙 및 계율 안에는 민간 신앙과 발라몬 교의 영향력이 다분히 함축되어 있는데, 그 예로 샤하다(Shahada-칼리마(Kalima))에 나오는 여러 가지 신조들이 바니교 참족 내에서 일종의 신앙적인 규범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으며, 일반적인 이슬람교 신앙 고백인 '유일신은 알라다. 그리고 모하멧은 그 알라가 보낸 사자이다.'라는 기본 신조는 사실상 바니교에 있어서 낯설고 다소 거리감이 있는 요소라고 할 수 있다. 또한 바니교 신자들은 농업의식에 있어서도, 리자느가르(Rija Nugar), 쁠라오빠산(Plao Pasan), 깝흘라우끄롱(Kap hlau krong)등과 같은 의식들을 행하고 있으며, 심지어 이런 의식들에 있어 바니교의 각 짜르(Char)성직자들 뿐만 아니라, 발라몬 교의 성직자들까지 함께 참여시켜, 농경 의식의 집례를 맡도록 하기도 한다. 또한 바니교 참족은 비, 바다, 산의 신등의 자연 신의 존재를 믿고 있는데, 즉 이들은 알라만이 유일신이라고 믿지 않는다.
일반 이슬람교의 모든 교리는 코란에 기록되어 있으며, 이외 경전으로 순나(Sunna), 하디스(Hadith)서에는 마호멧과 클리프(Clifes)의 가르침이 적혀 있으며 신도들의 실제 행위를 규정하는 내용들이 들어 있다. 그러나 바니교에서는 코란만을 유일한 경전으로 채택하고 있다. 그러나 바니교내의 코란은 그 원문의 의미가 이미 상실된 상황에 있으며, 바니교 성직자들도 코란 경전 내의 구절들의 의미와 그 가르침 및 종교적 원칙에 관한 사항들을 잘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원래 아랍어로 기록된 코란은 바니교 내에서 그 뜻이 변질되었는데, 즉 참족 문자를 사용하여 코란의 각 구절마다 주석을 달게 됨으로 원 의도와 뜻이 변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이 코란은 단지 어느 예식 때 어느 구절을 성직자로 하여금 읊게 하는가 에만 도움을 줄뿐이며, 코란을 가르치는 일에 있어서는 의식의 순서 중 경전을 읽을 때에 그 발음의 정확성을 더 중요시 하고, 어느 예식 때에는 어떠한 의식 행위가 이루어져야 하는가를 가르칠 뿐이다. 또한 다른 한 편으로 이 코란은 '신성하고 거룩한 책'이며, 알라 신에게서부터 하사받은 책이므로, 성직자들조차도 감히 그 책을 가지고 가서 읽거나 묵상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신성한 책을 지닐 수 있는 기간은 라무완(Ramuwan)절기에만 해당하는데, 이때 각 성직자들은 그 코란을 직접 손으로 적으며 묵상한다.
바니교 신도들은 날마다 하는 일정 기도 의식을 행하지 않는다. 그러나 성직자들은 일년 내내 일정 의식을 행하여야 하며, 이슬람력 9월의 금육(고기를 먹지 않는)기간에도 매일 일정한 의식을 드린다.
바니교는 매주 토요일에 예배의식을 가진다. 그러나 이슬람교력 11,12월에 해당하는 기간에는 정기적인 예배의식이 행하여지지 않는다. 그리고 12월 10일은 이슬람교 관습에 따라, 우리나라의 구정에 해당하는 아이드엘케비르(Aid El Kebir)이다. 보통 1년 중 3개월 동안 예배의식이 쉬기 때문에, 예배를 드리는 모든 달수는 9개월에 해당한다. 판리 지역에 있는 여섯 사원(안빈(An Binh), 민미(Minh Mi), 허우꽉(Hau Quach), 깐디엔(Canh Dien), 탄끼엣(Thanh Kiet), 짜우한(Chau Hanh)사원)에서는 각각 돌아가면서, 숫양(Sut Yang)의식을 여는데, 판랑 지역에 있는 각 바니교 사원들은 이 의식을 3년에 한번씩 치른다.
라무완(Ramuwan)기간은 바니 참족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절기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슬람교 율법에 규정되어 있는 것처럼, 모든 바니교 참족들이 금식에 참여하도록 의무가 규정되어 있지는 않다. 이 기간 내에 금식은 성직자들에게만 의무적으로 행해지도록 바니교는 규정하고 있는데, 이러한 금식도 라무완(Ramuwan)기간 인 이슬람교력 9월 중 첫 3일동안만 하면 된다. 라무완(Ramuwan)기간 중 행해지는 성직자들의 의식 중 가장 중요한 의식은 21시의 기도 의식일 것이다. 이 의식의 진행과 주관은 여러 성직자들이 나누어 맡게 되는데, 가령 라무완(Ramuwan)기간의 첫 3일 동안의 21시 의식은 믐(Mum)선생의 집행아래 행하여 지게 되고 16일과 22일의 21시 의식은 띱(Tip)선생의 집행아래 행하여 진다. 그리고 21시 의식 때마다, 빨라이(Palay-마을)내의 각 집이 돌아가며 음식을 준비하는데, 특히 성직자를 배출한 집에서는 각각 차례로 떡, 과일, 밥과 국을 사원으로 가져와, 사원 안에 있는 성직자들을 대접한다.
라무완(Ramuwan)기간 중에 성직자들은 사원 내에만 머물러야 하며, 집으로 돌아가지 못한다. 그리고 이들은 각 가정이 성직자들을 위해 준비해서 가져다 놓은 밥과 음식, 떡, 과일 등을 먹으면서 지낸다. 성직자들은 이러한 음식을 먹을 때, 손을 사용해서 먹으며, 모든 부분을 다 먹지 않고, 음식의 오른쪽의 반쪽 부분만 떼서 먹는다. 그리고 이 기간 내내 신체를 청결히 유지하여야 하며, 하루에 한번씩 목욕을 하고, 대변을 본 후에는 정성들여 자신의 몸을 다시 씻어야 하며, 소변을 본 후에는 손을 깨끗이 씻어 주어야 한다.
라무완(Ramuwan)달의 27일째 밤에는 마을 내의 존경받는 여러 인사들이 모여 모임을 갖는데, 이 모임에서 사람들은 짜르(Char)급 성직자 중에 '영도자 위원회'에 들어갈 능력있고 성품에 있어 온전한 한 성직자를 뽑는데, 이때 뽑혀진 성직자를 므딘(Mudin)이라고 하며, 뽑은 후 바로 므딘(Mudin) 임직식을 치른다. 그리고 29일과 30일째 밤의 자정을 지나, 다음 달의 첫째날 아침이 밝아 오면, 모든 성직자들은 함께 식사를 하며 채식기간인 라무완(Ramuwan)달을 끝내는 의식을 마지막으로 치르게 된다. 이 식사 중에 먹는 밥은 코코넛 물에 넣어 요리되어 지며, 음식 중에는 반드시 홍어(cf: 홍어는 몇 몇 의식에 있어 반드시 들어가야할 음식으로서 투언하이(Thuan Hai)성내 참족의 결혼식에서도 필수적으로 준비해야할 생선이다)와 달걀 및 오리알이 들어가 있어야 한다. 이 식사를 준비하기 위해 27일부터 마을 안 각 집에서는 햇쌀을 빻아서 준비하는데, 쌀을 빻을 때에는 반드시 7번을 빻아야 한다. 이렇게 준비된 음식 중의 일부는 30일 자정에 드리게 되며, 또 다른 음식들은 모두 합하여, 그 다음날 아침 모든 성직자들을 위해 제공한다. 이렇게 쌀을 빻아 밥을 만들어 제공하는 풍습은 '보시(Zakat)'를 위한 의무적인 전통에서 비롯된 것으로, 이러한 '보시'의 풍습은 라무완(Ramuwan)기간 중에 행해지는 한 의식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바니 참족은 그들의 성직자들에게 개개인적으로는 따로 '보시'를 하지 않는다.
참족의 역사를 살펴보면, 1,000년에서 1036년까지 제위한 뽀올로아(Po Auloah)왕이 성지인 라멕(La Mecque)을 다녀 왔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러한 역사적인 사실은 현재까지도 공공연히 인정되어온 사실이지만, 세계의 일반적인 이슬람권과 거의 교류를 단절해온 바니교 참족은 현재 일반인들뿐만 아니라 성직자들까지도 굳이 라멕(La Mecque)에 대한 성지 순례를 의무적인 사항으로 여기지 않고 있다.
세계의 일반적인 이슬람교 관습에 비교하여 볼 때, 바니교 참족은 그들과는 다른 고유의 관습을 가지고 있다.
가장 먼저 다른 점은 '할례 의식(Khotan)'으로서 일반적으로 이슬람권 사회에서는 절대적으로 중요시 여겨지고 엄중히 행해지는 의식이다. 이 의식을 바니교 참족인들은 소년들의 경우 까땃(Katat)의식이라고 하는데 15살에 행하여진다.
소녀들의 경우는 일정한 나이가 찬 경우에 할례 의식 대신 성인식이 행해지며, 이러한 의식을 까로(Karoh)의식이라고 한다. 소년들과 소녀들의 이 두 의식은 어느 일정한 날에 함께 치러지는데, 의식이 행해지는 날은 우두머리 성직자에 의해 결정되어 지며, 한 날 한시에 두 의식이 함께 행하여지지만, 소녀들을 위한 까로(Karoh)의식이 더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 의식의 순서는 먼저 큰 성직자가 대상자의 머리를 깎아준 다음, 성스러운 이름을 각 사람에게 지어준 뒤, 부모 및 친척들이 와서 이들 성인식을 치른 자녀들에게 여러 가지 선물을 주는 순서로 되어 있다. 이때 주는 선물은 현금이 될 수도 있고, 장신구나, 옷이 될 수도 있는데, 부요한 집 같은 경우에는 성인이 된 자녀에게 소나 전답을 선물로 주기도 한다. 이러한 선물은 후에 자녀가 결혼을 하게 될 때, 개인 소유의 재산을 형성하는데 도움을 주게 된다.
소년들에게 있어서의 할례 의식 및 성인식으로서의 까땃(Katat) 의식 중 행해지는 '할례'는 매우 상징적인 행위로서만 이루어진다. 이것은 실제 '할례'를 별로 중요시 여기지 않기 때문인데, 이 식이 '할례' 그 자체를 받기 위해서라기 보다는, 소년들이 까땃(Katat)의식을 치름으로 인해 성직자 계열에 들어갈 수 있는(신청할 수 있는) 기본적인 자격을 갖추게 되었다는데 더 큰 의의를 두고 있다. 만약 이후에 성직자가 되고자 한다면, 일정한 교육을 따로 받아야 한다.
바니 참족의 성인식이라고 할 수 있는 까로(Karoh)와 까땃(Katat)의식은 이슬람교에서 남성의 귀두를 자르는 할례의식에서 비롯된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러나 모계 중심 사회인 바니교 사회에서는 소년들을 위한 할례의식이 단지 부차적인 의식으로 여기며, 실제로 여성들이 혼인할 수 있는 자격을 가지게 되는 성인식에 해당하는 까로(Karoh) 의식을 더욱 중요한 의식으로 생각하고 있다.
장례식에 있어서도 이슬람교 장례식이 매우 간단한 형식으로 되어 있는 반면, 바니교의 장례식은 간단한 이슬람교의 원 장례식에 부합하지 않는 여러 가지 요소를 지니고 있다. 그러한 요소는 바로 장례식 내에 민간 신앙적 요소가 남아 있는 것으로 알 수 있는데, 즉 죽은 영혼이 음부로 내려가는 길을 열도록 주문을 외운다거나, 그 죽은 영혼이 다시 이 세상으로 돌아와서 살아 있는 사람들을 해치지 못하도록 일정한 의식을 행하고 또한 죽은 사람을 위하여 제물을 바쳐, 그 죽은자가 그 제물을 음부로 가지고 내려가도록 하는 의식이 바로 그런 요소라 할 수 있다. 그리고 발라몬 교의 장례 풍습 또한 바니교 참족 사이에서 계속적으로 지켜지고 있다.
이상 종합해서 말하자면, 바니교 신도들은 자신들이 알라 신을 따르고 마호멧의 존재를 믿는 이슬람교도라고 생각하지만, 실제 정통 이슬람교의 근본 원리와 신앙을 많이 떠나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렇게 되어진 것은 참족의 바니교가 외부 세계의 이슬람교와 완전히 교류를 단절하여 계속적으로 고립된 상황에 있었기 때문이며, 그렇게 하여 민간 신앙이나 발라몬교의 근본적인 영향을 강하게 받게 된 것이라 볼 수 있다.


5. 남부의 이슬람 참족 공동체

15-19세기간에 걸친 역사적 변동으로 인해 참족은 그들의 고향땅을 떠나 캄보디아 및 태국, 인도네시아 등의 지역으로 향하게 되었다. 19세기 중 특히 1854년과 1858년에 이르러 캄보디아 정권의 박해와 핍박으로 인해, 캄보디아 내 참족 중 일부가 다시 베트남 내의 띠엔(Tien)강 좌측지역, 까땀봉(katambong)섬과 짜우독(Chau Doc) 및 허우(Hau)강변 지역에 와서 거주하게 되었다. 당시 베트남의 원씨 왕조는 '신민 위병'정책 즉, 민간인들로 하여금 국경을 보호하는 저지선으로 삼는다는 정책으로 인해, 참족으로 하여금 국경지역에 정착하도록 유도하였다. 그리하여 참족은 빈기(Binh Gi)수로 지역 근처와 그 후방으로 5,000명의 인구가 사는 일곱 개 마을, 즉 짜우장(Chau Giang), 까땀봉(Katambong), 품소아이(Phum Soai), 라마(Lama), 까꼬이(Kakoi), 까꼬끼(KaCoki), 사바우(Sabau)마을을 세우게 되었고, 이들 마을은 다시 9개의 행정 단위로 나뉘게 되어 당시 짜우장(Chau Giang)에 주둔하던 연합군의 관리 아래 놓이게 되었다.
떠이닌(Tay Ninh)에 있는 참족 마을은, 마르셀네르(Marcel Ner)의 주장에 따르면, 이들 마을 구성원들은 원례 참족 왕과 그를 호위하던 무리 및 수행원들의 후예로, 17세기에 캄보디아로 이주하였던 자들인데, 이 후 이들 무리 중 일부가 다시 베트남으로 향하여, 현재의 떠이닌(Tay Ninh)지역에 정착하여 마을을 이루게 된 것이라고 한다.
이와 같이 짜우독(Chau Doc)과 떠이닌(Tay Ninh)지역의 참족은 남부 이슬람 참족의 주요 구성원들이라고 할 수 있다. 여러 자료에 의하면, 이들 참족이 캄보디아로 이주한 그 당시에는 아직 이슬람교를 알지 못했고, 안다 하더라도 극히 소수에 그친 정도였다고 한다. 그러나 이들이 캄보디아 지역내에 거주하면서, 현재에도 여전히 이슬람교를 따르는 자바(Java)인들(보르네오(Borneo), 수마트라(Sumatra), 미낭까바우(Minang Kabau)인들)과 말레이 인들(싱가폴에서 탕가누(Tangganu), 태국지역의 사람들까지)과의 접촉이 계속 이루어지게 되었는데, 이러한 접촉으로 인해 이슬람 신도들이 참족 내에 들어와 그들의 교를 전파하여, 참족으로 하여금 모하멧을 추종하게 만들었다. 이렇게 자바(Java)와 말레이 이슬람 교도들과의 관계는, 남부 이슬람 참족으로 하여금 동남아 이슬람권뿐만 아니라, 세계의 주요 이슬람권과도 계속적으로 접촉케 하는 역할을 하였다.
이러한 외부 이슬람권과의 지속적인 관계는 남부 이슬람 참족이 투언하이(Thuan Hai)의 바니교 참족보다 더욱 정통적이고 근본적인 이슬람교의 원칙을 고수하도록 하였다. 20세기 초까지만 하더라도, 참족과 말레이 자바(Java)인들은 각자 고유의 영역을 유지하며 살았었다. 그러나 말레이와 자바(Java)인들은 원래 순수한 인종이라기 보다는, 여러 인종이 섞인 혼혈이 많았는데, 이것은 말레이나 자바(Java)인의 남자들이 참족, 크메르족 내지 비엣족 여성과 결혼을 많이 하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특별히 말레이, 자바(Java)남자들과 크메르 여자간에 결혼하여 낳은 후손들을 참족은 자바쿠르(Java-Kur)라고 부른다. 20세기 중반에 이르러서는 이 자바쿠르(Java-Kur)인종이 참족 공동체 내로 유입되기 시작하면서, 점점 그 인종적 특징이 쇠퇴하여 갔다.
1936년의 통계에 의하면, 짜우독(Chau Doc)의 참족 수는 6,000명이었으며, 떠이닌(Tay Ninh)에는 1,000명이 있었다. 그 뒤 25년이 지난후의 1963년의 통계에는 Chau Doc의 참족이 12,700명, 떠이닌(Tay Ninh)의 참족이 1,760명으로 집계되었다. 그리고 통일된 이후의 1976년 2월의 통계에 의하면, 안장(An Giang)성내 짜우독(Chau Doc)참족은 8,656명이었고, 1979년 10월의 인구는 11,995명을 기록하였다. 그리고 떠이닌(Tay Ninh)지역의 참족은, 떠이닌(Tay Ninh) 바로 옆의 마을 하나 외에도 구 바오박(Bao Bac), 신 바오박(Bao Bac), 그리고 수오이자이(Suoi Giay)의 세게 마을을 형성하여 살게 되었다.
1945년까지만 하더라도 호치민 시내에 있는 이슬람교도는 거의 대부분 국적이 인도, 파키스탄, 말레이시아가 대부분이었으나, 이들 외국인들이 일정하게 이슬람 참족과 교류관계를 가지기 시작하면서, 호치민 지역과 남부 지역의 참족 이슬람교가 본격적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이들 외국인 이슬람교도들은 호치민 시내에 처음으로 세 채의 이슬람 사원을 건설했는데, 즉, 1885년에 세워진 남끼코이응이아(Nam Ky Khoi Nghia) 45번지에 지어진 사원과, 1932년에 지어진 동주(Dong Du) 66번지의 사원, 그리고 1935년에 지어진 응우엔짜이(Nguyen Trai) 641번지에 소재해 있는 사원이 바로 그것이다. 1945년 이후 짜우독(Chau Doc)지역의 참족이 새로이 사이공 시내로 이주하기 시작하였다. 이에 대한 통계를 살펴보면, 1968년에는 사이공 시내에 6,575명의 참족이, 1976년에는 4,067명, 1979년에는 2,991명, 그리고 1989년 초에는 4,357명으로 집계되었다.
호치민시를 비롯한 베트남 남부 지역에는 모두 30여개의 사원이 있다. 그리고 만약 바니교 사원을 제외한 투언하이(Thuan Hai)성내에 소재한 이슬람교 사원까지 함친다면, 그 수가 모두 34개에 이르게 된다. (cf: 투언하이(Thuan Hai)성내에는 모두 4개의 정통 이슬람교 사원이 있다.) 이 중 짜우독(Chau Doc)지역에 모두 12개의 사원이, 호치민 시내에 모두 7개의 사원, 떠이닌(Tay Ninh)지역의 2개 사원, 그리고 투언하이(Thuan Hai) 성내의 판랑 지역에 4개의 사원이 있다. 짜우독(Chau Doc)과 호치민시, 떠이닌(Tay Ninh)성에 있는 각 이슬람 사원에서는 아랍문자와 코란 경전을 어린 학생들에게 가르치는 학교가 운영되고 있다.
짜우독(Chau Doc)과 떠이닌(Tay Ninh)지역 내의 이슬람 사원은 마을 공동 생활의 중심지 역할을 하며, 또한 잠악(Jam ak)의식이 열리는 곳이기도 하다. 이 잠악(Jam ak)의식은 매주 토요일에 열리는 예배 의식을 말하는 것으로 예배의식 자체가 그 지역내의 신도들을 관리하는 역할을 하는데, 이 예배의식시에는 마을내의 모든 신도들이 사원에 와서 예배에 참석해야 한다. 하나의 빨라이(Palay-마을)나 하나의 잠악(Jam ak)의식은 하껨(Hakem), 응엡(Ngep)에 의하여 관리되어지며, 한 촌락(뿍(puk);마을보다 더욱 작은 단위)의 종교 생활을 담당하는 일부 아흘리(Ahly)급 성직자들도 자신이 속한 촌락의 잠악(Jam ak)의식을 주관한다.
하껨(Hakem)은 신도들 중 이슬람교 교리 및 관습에 정통한 이로서, 타인의 모범이 되며, 사회적인 위신을 지니고 있는 한 신도가 맡게 된다. 이 하껨(Hakem)은 신도들의 모임에서 투표로 뽑힌 후, 죽을 때까지 그 직책을 맡게 된다. 하껨(Hakem)의 업무는 먼저 큰 사원 및, 수라오(Surao-작은 사원, 즉 여성을 위한 사원을 말함)를 관리하는 것이다. 그리고 신도들이 마땅해 지켜야할 종교적 의무를 가리키며, 잠악(Jam ak)시간 내에 마을 내에서 일어나는 상호 분쟁과 고소 사건을 해결하는 역할도 한다.
하껨(Hakem)과 비슷한 임무를 맡고 있는 아흘리(Ahly)는 수라오(Surao)를 돌보고 신도들로 하여금 마을 내에서 그들의 종교적 의무를 실천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한다. 호치민 시내에 있는 각 사원에는 앞서 말한 하껨(Hakem), 응엡(Ngep), 아흘리(Ahly)의 세 직책 외에도 따로 '사원 관리 위원회'를 구성하기도 하며, 또한 주요 세 직책 외에도 재정과 예물 헌납, 교육등의 역할을 맡은 직분들도 세워져 있다. 이러한 직분 외에도 이슬람 교리를 잘 이해하고 통달하여, 여러 예식의 사회를 맡아 진행하는 이믐(Imum), 교리를 가르치는 역할을 맡은 코띱(Khotip), 코란과 아랍 문자를 따로 가르치는 뚜온(Tuon), 그리고 성지 순례를 한번 다녀온 사람들의 그룹인 하지(Hadji)선생들이 있다.
남부의 이슬람 참족 신도들은 종교적 본분을 엄격히 지켜야 한다. 이슬람 참족 사회 및 경제, 문화 내에서는 그 종교의 영향이 매우 크다고 볼 수 있는데, 즉 이슬람교 자체가 각 개인과 마을 그리고 전체 주민 모두간의 관계 형성에 있어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즉, 남부 이슬람 참족들은 그들의 모든 생애가 전적으로 이슬람교 신앙에 의해 좌지 우지된다고 생각한다. 이들은 알라의 절대적인 구원을 믿으며, 말세와, 그리고 그 말세에 있을 심판도 믿는다. 그리하여 이들은 정성을 기울여, 알라가 심판의 날에 자신을 구원할 수 있도록 자신에게 주어진 종교적인 본분을 다 하기 위해 노력한다. 보통 이들은 하루에 다섯 번씩 기도를 하며, 이 중 최소한 3번은 큰 사원과 수라오(Surao)에서 혹은 어느 일정한 고정적인 장소에서 기도시간을 가져야 한다. 토요일 오후가 되면, 남자 신도들은 자신을 깨끗이 씻고 의복을 정제한 후 예배에 참석하기 위해 큰 사원으로 간다. 여성들은 기도 시간을 수라오(Surao)나 집에서 가질 수 있다. 또한 이슬람 참족들은 라마단(Ramadan)금식 절기를 엄격히 준수하며, 순례의 길에 오르는 것을 소망한다. 1936년 이후 짜우독(Chau Doc)참족들 사이에 성지순례에 대한 붐이 일어나기 시작하였는데, 이것은 성지순례가 그들에게 행운을 가져다 줄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그 뿐 아니라, 성지 순례의 여정을 마치고 돌아온 뒤에는, 그들 사회 내에서 하지(Hadji)라는 호칭으로 불릴 수 있는 동시에, 우러러 존경받는 계층에 속할 수가 있다. 그리하여 특히 1967-1970년사이 에는 사이공과 짜우독(Chau Doc)내에 거주하는 참족들 사이에 성지 순례에 오르는 것이 일종의 유행처럼 번지게 되었다. 이에 대한 구체적인 통계자료는 그러한 사실을 잘 알게 해주는데, 즉 1965년에는 참족 중 11명이 성지 순례 길에 나섰던 것이, 1967년에는 77명으로 늘어났고, 1968년에는 32명이, 그리고 1969년에는 193명이나 성지 순례를 다녀오게 되었다. 이러한 성지순례에 대한 경비는 한 개인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성지 순례에 가는 대상자의 여러 친족들이 함께 돈을 대줌으로서 경비를 충당하게 된다. 이슬람 참족은 코란을 절대적으로 신봉하며, 그 안에 이슬람교적 교리의 원칙뿐 아니라, 사회, 법률, 도덕, 논리 등에 관한 모든 내용이 함축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전에 이들은 코란을 체계적으로 가르칠 수 있는 교육 체계를 구성하였으며, 이를 위해 사원 내 자체적으로 한 개 혹은 몇 개의 자체 교실을 가지게 되었다. 이러한 이슬람교 교리의 가르침에 있어서 짜우장(Chau Giang) 지역이 베트남 남부와 캄보디아 내 참족들에게 있어 일종의 교리 강연의 중심지로서의 역할을 감당하고 있다. 그러나 아랍 문자로 적혀진 코란의 원문을 이해하기가 워낙 난해하기 때문에, 이슬람 참족은 말레이 문자로 적혀진 코란 강요 서적에 의존하여, 코란을 연구한다.


끝.



[ Webzine MIR 2003년 2월호 Index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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