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IR 연구물
베트남이야기
장 SM 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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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의 불교와 SG전략'
- 사이공을 중심으로 -
목 차
1. 들어가는 말
2. 문제 제기와 연구의 목적
3. 베트남에의 불교 전래와 발전
4. 베트남 불교의 특징
5. 사이공의 불교
6. 베트남 불교에 대한 SG전략
7. 나가는 말
[ 참고 목록 ]
1. 들어가는 말
인도차이나 지역에는 아직도 복음의 빚을 받지 못한 사람들이 많이 살고있다. 국가와 종족별로 살펴볼 때, 태국의 타이족, 캄보디아의 크메르족, 라오스의 라오족, 미얀마의 버마족 등이 모두 복음을 필요로 하는 국가와 종족이며, 거의 공통적으로 불교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본 인이 9년째 거주하며 사역 중인 베트남도 예외는 아니다. 주 종족인 비엣족(viet, 낀(kinh)족이라고도 함)도 여러 종교 중에서 불교를 가장 많이 신봉하고 있다. 인도차이나 전체의 인구로 볼 때, 2억 중 3/4인 1.5억 정도가 불교 신자인 것이다.
과거 인도의 힌두교로부터 시작된 불교가 오늘 날 하나의 거대한 종교, 철학, 정신적 영역을 이루어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불교를 주 타겟으로 하는 SG 단체나 연구 모임이 빈약함에 본 인은 늘 아쉬운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차제에, 인도차이나를 비롯한 아시아를 대상으로 불교권 SG 연구와 전략 모임이 발족되어 오늘 첫 포럼을 가지게 되었다.
본 인은 오늘의 발제에서 베트남의 불교를 일반적인 개념에서 고찰해보고, 이와 함께 베트남의 최대 도시인 사이공을 중심으로 한 불교를 구체적으로 살펴보기로 한다. 그리고 이에 상응한 SG 전략을 제시해본다.
2. 문제 제기와 연구의 목적
상기 주제의 연구를 진행함에 있어, 본 인은 다음과 같은 문제를 먼저 제기함으로 본 연구의 필요성을 강조해본다.
가. 최근 들어 불교가 단순한 종교라는 면보다는 정신 철학이나 뉴에이지 운동 등으로 위장하여 기독교의 영역을 위협하고 있는 것이 사실인가?
나. 최근 불교가 서양에서 많은 호감을 갖고 있으며, 실제적으로 미국이나 캐나다에서 불교 신자가 증가하는 것이 사실인가?
다. 우리나라의 환경과 현재 사역하는 SG 현장에 불교의 영향이 강한 것에 대하여 우리는 과소 평가하고 있지 않은가?
상기 질문과 함께 본인은 본 연구의 목적을 아래와 같이 정의한다.
인도차이나 지역에 분포된 불교의 거대한 아성을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무릎꿇게 하기 위한 시발점으로 베트남의 불교와 연관된 역사와 문화적 배경, 사이공의 불교를 분석하며 이를 근거로 시기 적절하며 효과 있는 SG 전략을 도출한다. 이러한 베트남 SG현장의 분석연구를 통해 인도차이나 및 아시아지역 SG사의 협력 사역에 이바지한다.
3. 베트남에의 불교 전래와 발전
베트남에 불교가 언제 유입되었는지에 대하여는 아직 정확히 알 수 없다. 그러나 현존하는 몇 가지 자료나 지리적 위치 등을 고려해 볼 때, 일반적으로 생각하기 쉬운 중국을 통한 육로보다는 인도와 남해를 통한 해로를 통해 들어왔던 것은 확실하다(송정남, 2000). 즉, 인도의 승려들에 의해 직접 전해졌다고 추론해 볼 수 있다. 이는 베트남이 중국보다 이전에 불교가 유입되었을 것이라는 학설을 뒷받침한다.
2세기부터 5세기 기간의 베트남 불교는 주로 인도 불교의 영향을 받았다. 그러나 5세기부터 베트남은 중국의 불교 영향을 많이 받게 되면서 귀족성을 띤 대승불교가 발전하게 되었다. 이에 반하여 상좌불교(대승불교에 비교하여 소승불교, 북방불교에 비교하여 남방불교라고 표현할 수도 있지만 어원에 가까운 상좌불교라고 지칭, 이 상좌불교는 베트남의 소수민족인 커메(Kho' me)족이 주류를 이루고 있기에 일명 '커메불교'라고도 함)는 10-12세기에 남방에서 스리랑카와 캄보디아를 거쳐 남부 베트남에 전해졌다(송정남, 같은 책).
6세기부터 10세기 독립 시기까지의 베트남 불교는 중국의 지배로 인하여 중국 불교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이 때는 불교뿐만 아니라 모든 영역에서 베트남이 중국의 영향을 깊이 받았던 시기로, 베트남은 당나라에 중국의 많은 고승들이 구도를 목적으로 인도를 순례할 경우 반드시 거쳐야 했던 경유지였던 까닭에 이들로 인한 중국 불교의 전파가 활성화되었다.
중국의 속국에서 벗어난 이후 15세기까지의 기간은 베트남의 불교가 가장 발전했던 시기이다. 그 당시의 상류, 식자계급으로 인식되었던 승려들이 정치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다. 즉 승통이나 승록 등의 직책이 말해주듯이 승려들은 정치, 군사, 외교, 경제 등의 방면에서 왕의 고문 역할을 하였다. 이 시대의 두 인사는 불교의 발전에 이바지했는데, 팦투언(Phap Thuan)은 송나라와의 외교에서 두각을 나타냈고, 딘보린(Dinh Bo Linh)은 국가정립과 사회질서를 바로 세우기 위한 의도에서 당시 사회의 중심 세력이었던 불교를 국교로 삼고 승려의 승직을 두었다.
특히 리(Ly) 왕조(1009 - 1225년) 때의 불교는 가장 발전하였는데, 이러한 승불 정책에 힘입어 불교 건축문화가 발달하였다. 당시의 대표적인 불교 건축문화로는 1049년에 세워져 오늘날 수도 하노이(Hanoi)에 남아있는 일주사(一柱寺 : Chua mot cot)를 들 수 있다.
쩐(Tran) 왕조(1225 - 1400년)에서도 불교는 여전히 발전했으며, 특히 타이똥(Thai Tong) 때에 가장 발달하였다. 그는 불도를 교육시키기 위해 불경을 인쇄하고 불상을 제작하였다.
쩐 왕조 말 이후의 불교는 후 레(Le) 왕조(1400 - 1802년)가 유교를 국교로 삼았던 것에서 보듯이 쇠퇴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이는 기존에 정치화되었던 불교가 농민 속으로 파고드는 계기뿐만 아니라 순수한 종교 본연의 자세로 돌아가는 전기도 되었다. 이로써 마을에는 어느 때와 비교할 수 없이 많은 사원들이 세워졌다.
유교가 국교로 인정되었던 웬(Nguyen) 왕조(1802 - 1945년)에서도 불교는 민중을 중심으로 계속 발전하였다. 다만 왕에 따라 불교에 대한 인식의 차이를 보였다.
19세기의 하노이와 후에(Hue) 그리고 사이공(Saigon)은 불교의 중심지였다. 당시에 중국의 광동과 복건지방의 승려들이 베트남에서 활동하였는데, 하띠엔(Ha Tien)은 중국인 승려들의 활동지로 각광을 받았다. 중국인 승려들은 주로 화교들을 위해 활동하였다.
프랑스 식민시기의 베트남 불교는 크게 두 가지 특징으로 나타났다. 첫째는 기존의 각종 종교와 민간신앙을 결합한 새로운 종교의 출현이며, 둘째는 19세기 말에 스리랑카, 인도, 중국, 일본 등에서 시작된 불교갱신운동의 전개이다.
유교, 불교, 도교 등과 전통적인 민간신앙과의 결합에 의해 출현한 불교는 프랑스 식민지시대라는 환경이 말해주듯 민족주의적인 성격을 강하게 띠는 민족종교 내지는 신비주의적인 면이 많았는데, 까오다이(Cao Dai)교와 호아하오(Hoa Hao)불교 가 그 대표적이다.
불교갱신운동은 불교가 학문으로 인식되어 연구되기 시작한 것과 불교의 현대화를 목표로 서구의 사회단체들을 모방한 각종 조직들이 생겨난 것, 전도 방법에 있어 신문, 책과 같은 출판물이 국어(베트남어)를 통해 다양하게 만들어진 것들이다.
한편 불교의 다양한 종파와 조직의 난립 양상 가운데서 베트남 불교의 통일을 주장하는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는데, 1951년 후에에서 전국의 51개 대표들이 참석한 가운데 6개의 지회로 구성된 '베트남불교총회'(Tong hoi Phat giao Vietnam)가 조직되고 세계 불교와의 연대를 목적으로 '세계불교연우'(Lien huu Phat giao The gioi)에 가입했다.
프랑스의 침략은 베트남 불교의 침체를 가져왔는데, 식민지 하에서의 사원은 근왕운동, 유신운동, 동유운동 등 민족해방운동을 위한 거점으로 많이 이용되었기 때문에 식민 당국으로부터 탄압을 받았다.
제 2차 인도차이나 전쟁 기간은 베트남 불교역사에서 가장 변화가 많은 때였다. 공산 주의체제인 북부의 경우, 불교는 정부 조직인 종교위원회의 관리와 통제 하에 들어갔다. 불교의 모든 재산이 국유화되었고 사원과 승려의 수가 정돈되었다. 1954년의 제네바협정 이후 남부에서는 1964년 1월에 남부 베트남 불교보호연파위원회 소속 11개 단체 대표자 회의를 갖고 '통일베트남불교교회'(Giao hoi Phat giao Vietnam)를 설립하였다(송정남, 같은 책). 그 이전인 1963년에서 1965년까지 몇 명의 불교 승려들이 남 베트남의 불교억압정책에 대항하여 분신 자살을 하였는데, 이 일은 불교가 남 베트남 사회에서 지배적인 민중종교로 자리를 잡는 계기가 되었다(조흥국, 1996).
1975년 4월에 베트남을 공산화 통일한 하노이 정부는 1981년 11월, 베트남의 9개 불교종파들을 '베트남불교교회'(Giao hoi Phat giao Vietnam)로 통합했다(송정남, 같은 책). 그러나 이는 대부분의 불교도들의 호응을 받지 못한 일방적인 조치에 불과했다.
1993년 호치민시에서 열린 제 3회 '베트남불교회'의 발표에 의하면, 전 국민의 85%가 불교신자이며, 그 중 비구 및 비구니는 20,000명이었다. 그리고 1991년을 기준으로 4,374개의 사원이 있는데 그 중 150개는 메콩델타에 있는 '커메블교' 사원이다(조흥국, 같은 책).
오늘 날 베트남의 불교는 1천만 신도에 26,268명의 승려 그리고 14,353개의 사원을 갖고 있다. 이 중 '커메불교'는 1백만의 신도에 1만의 승려 그리고 440개의 사원이 있다(송정남, 같은 책).
4. 베트남 불교의 특징
베트남 불교의 전래와 발전을 통해 드러난 특징은 다음의 몇 가지로 표현할 수 있다.
가. 베트남 불교는 비슷한 시기에 유입된 유교, 도교 등과 충돌 없이 발전하여 베트남의 종교 발전에 공헌하였다. 이는 불교가 민간신앙과도 자연스럽게 결합하는 경향으로 나타나 베트남 불교의 다양성을 띠게 하였다. 지금도 이 세 종교(불교, 유교, 도교)는 '삼교일치(三敎一致)'라 하여 불교 사원에 불교의 성자 외에도 유교, 도교 영웅들을 신격화하여 신상으로 숭배하고 있다.
나. 베트남 불교는 민중과 함께 하였다. 처음에는 귀족성을 띠고 권력과 부를 취함으로써 종교 본연의 자세를 망각했던 불교가 비판과 개혁의 과정을 거치는 과정에서 일반 종교들간의 융화, 베트남인의 수용적인 민족성과 종교성에 의해 가능했다. 때문에 불교 사원이 우리나라처럼 박해를 인하여 깊은 산중에 있지 않고 지금까지 도시, 농촌에서 자연스럽게 민중과 공존하며, 생활의 일부가 되어 있다.
다. 베트남 불교는 일찍부터 사원전(寺院田)으로 경제 문제를 자체 해결하였다. 즉, 승관들에 의해서 관리되는 사원들에게는 토지가 주어졌으며, 이 사전(寺田)들은 사전(私田)의 성격을 띠었다. 이 제도는 캄보디아, 라오스와 태국의 승려들이 매일 민가에 나가서 탁발(托鉢)하거나 불자들이 사원에 음식을 시주함으로 식사를 해결하는 것과 대비가 된다(송정남, 같은 책). 다만 베트남에서도 탁발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주로 '커메불교'에 해당된다.
라. 베트남 불교는 호전적이고 진취적인, 상대적으로 종교심이 약한 비엣족을 배경으로 절대 다수의 신자를 확보하지 못했다. 반대로 캄보디아나 베트남 남부의 크메르족이 신봉하는 '커메불교'는 주민의 절대 다수를 신자로 확보했으며, 라오스의 라오족, 태국의 타이족, 미얀마의 버마족의 경우에도 불교는 절대 다수를 신자로 확보하였다. 이들은 공통적으로 소승불교(상좌불교)이나 베트남의 비엣족은 대승불교가 주류이다.
마. 베트남 불교는 명목적인 신자가 많이 있다. 베트남을 소개하는 자료마다 전 인구의 50% 이상이 '불교'라고 되어있는데, 실질적인 자체 신도 수는 이에 큰 차이가 있다. 2001년에 발행된 '2000년도 베트남불교연감(Nien Giam Phat giao Vietnam 2000)'에 의하면 베트남의 불교 신자는 1천만 명인데, 이는 베트남 인구 7,800만 명(2000년 4월 현재) 중 12.8%에 불과하다. 50%라면 4,900만 명이어야 한다. 결국 3,900만 명은 명목적인 불교 신자라고 볼 수 있다. 즉, 조상 대대로 또는 가족 등 외부의 영향으로 종교 상 '불교'이지만 실제적으로는 자신이 불교 신도인지도 모르는 경우이다. 이 역시 주변국들의 불교와 다른 점이다.
5. 사이공의 불교
사이공은 현재 베트남의 최대 경제도시이자 구 월남민주공화국의 수도였다. 아울러 베트남 중남부를 대표하는 도시이며, 동남아시아 각 지역과의 교통, 무역 요충지이다. 자연스레 종교적인 면에서도 소위 '센터' 지역임을 고수하고 있다.
사이공에 불교가 전래된 것은 3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300년 전, 구체적으로 말하면 지금부터 304년 전인 1698년은 사이공이 상좌불교를 신봉하는 크메르왕국(지금의 캄보디아)의 영토에서 호전적으로 남하정책을 수행하던 웬(Nguyen) 왕조(지금의 베트남)의 영토로 복속되던 해였다. 베트남인들이 사이공 지역에 정착하기 시작한 것은 1623년 웬 왕조가 조세정책을 펼치면서부터이며, 1679년에는 웬 왕조로부터 정식으로 선출된 재상이 사이공의 관리를 위해 파견되기 시작하였다. 당시 인구는 10,000명 정도이었으나 웬 왕조로 영토를 복속시킨 1698년에는 200,000명의 인구가 거주하는 도시가 되었다(김남균, 제 1회 사이공포럼).
부언하면, 베트남인들이 정착하기 전 원주민인 크메르족은 상좌불교를 신봉하였고 사이공에 이거한 베트남인들은 종교보다는 도시형성과 국가건립에 관심이 있었다. 하여 지금까지도 베트남 전체적으로는 대승불교가 주류이지만 사이공과 메콩델타 지역은 상좌불교(커메불교)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
사이공의 경우 1954년에 300개였던 사원이 1975년에는 1,138개로 늘어났으며, 1975년 당시 17개의 불학원(Vien Phat hoc) 외에 불교학교인 2개의 전문대학교와 5개의 중등학교 그리고 1개의 초등학교가 있었다(송정남, 같은 책).
'2000년 베트남불교연감'에 따르면 사이공의 사원은 921개, 승려는 5,799명 그리고 신도 수는 1,646,200명이다. 이를 도표로 표현하면 다음과 같다.
6. 베트남 불교에 대한 SG전략
이상에서 살펴 본 베트남의 불교는 중국의 영향을 받은 대승불교를 중심으로 국가의 발전에 의한 방향으로 성장해 왔다. 한 편, 사이공을 중심으로 한 메콩델타의 상좌불교는 국가의 개념과는 거리가 먼 마을을 중심으로 순수한 종교로서의 불교로 성장해 왔다. 그리고 불교의 신도 수가 인구의 50%라고는 하지만 명목적인 신자가 많은 것도 사실이다.
위의 사실들을 근거로 베트남에서 불교를 대상으로 한 SG의 전략들을 다음과 같이 제시해 본다.
가. 베트남이라는 막연하고도 큰 집단을 지역, 종족, 종교, 계층 등의 타겟으로 세분화한다. 이는 해당 분야의 준비와 연구를 시작으로 시간과 노력은 최소화하며, 최대의 효과를 낼 수 있는 첫 단계이다. 특히, 종족과 종교는 대부분 연관성이 있으므로 집중적이고 전문적인 사역을 위해 타겟을 세분화하면 상당한 효과를 볼 수 있는데 불교 역시 예외가 아니다. 아울러, 같은 종족과 종교를 타겟으로 하는 사역자 간의 네트웍 형성도 매우 중요하다. 정보는 독점할 때보다 공유할 때, 그 가치가 크기 때문이다.
나. 도시는 현대 SG의 모판이다. 그 나라의 주요 도시 또는 거점 도시에는 각 종교와 종족이 분포되어 있다. 사이공은 그 대표적인 경우이며, 사이공을 통하지 않고는 중남부 및 베트남 SG의 대세를 장악할 수가 없다. 상기 도표에서 보듯이 사이공에서의 불교는 공식 인구의 1/3을 점유하고 있는 반면 개신교 공인교회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의 미약한 교세를 가지고 있다. 베트남에서는 사이공을 SG 모판(센터)으로 하는 불교 SG전략이 수립되어야 하겠다.
다. 베트남의 불교가 프랑스 식민지시대를 거치면서 인재 양성과 사회 구제사업 및 출판을 통한 포교에 힘썼는데, 이것이 상당한 효과를 보았다고 본다. 특히, 각종 교육 사업의 실현으로 현재 사이공 시내에는 불교대학과 전문대학, 초급대학 등이 정규 교육과정으로 인정받고 있다. 이를 살펴볼 때, 개신교에서도 타종교에 대한 SG 훈련을 시도할 필요가 있다. 즉, 막연한 제자 훈련이나 목표 없는 협력이 아닌 확실한 전도와 간증을 통해 적진(베트남의 불교권)을 교란시킬 수 있는 소수 정예를 양성하고 파송해야 하겠다. 이를 위해 비교종교학과 엘렝틱스 등은 필수이다.
라. 베트남의 불교를 타겟으로 사역하고자 할 때, 남 중국과 라오스, 캄보디아 및 태국, 미얀마, 스리랑카 등과의 협력, 호환 사역은 매우 효과적이다. 이는 불교라는 종교적인 연관과 함께 주 종족의 언어와 문화의 유사성으로 볼 때, 충분한 가치가 있다. 예를 들어, 베트남의 상좌불교를 타겟으로 하는 SG사는 크메르어를 배우고 캄보디아와 협력 사역을 할 필요가 있다. 이를 통해, 훨씬 더 숙련된 제자를 양성함은 물론 SG사 스스로 해당 사역에 대한 자긍심과 정체성이 향상될 수 있다.
7. 나가는 말
베트남은 인구 7,800만 명으로 인도차이나와 아시아 그리고 전 세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 과거 몽고와 프랑스 그리고 미국의 침략을 단호히 물리쳤던 역사를 자부심으로 간직하고 있으며 천혜의 부존자원과 풍부한 인적자원은 21세기를 아시아의 세기라고 할 때, 그 중 한 몫을 차지하는 요인으로 작용함에 부족함이 없다.
그러나 하나님의 축복 앞에는 아직도 빈약하다. 전 국민의 1-2%라는 미약한 개신교세, 아직도 개신교를 미국과 자본주의의 앞잡이로 보는 시각, 사회주의 정권의 현지 교회 및 SG사에 대한 불이익 행사 그리고 무엇보다도 진리를 위한 헌신이 미약한 국민성 등은 개신교 SG의 애로 사항이다.
본 고에서는 베트남 SG를 위한 관점을 일반적인 개념에서 탈피하여 베트남 불교를 타겟으로 삼아보았다. '최선의 공격은 최선의 수비'라는 말이 있다. 소극적인 방어나 현상 유지보다는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작전과 전략에 의한 공격이 필요하다. 이러한 개념에서 베트남의 불교는 얼마든지 공략해 볼 수 있는 타겟으로 생각한다. 다만, 이러한 개념이 실제적인 SG 사역으로 이어지기 위해서는 오늘과 같은 연구와 분석이 선행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를 근거로 지역적인 적용 단계를 거쳐 각 SG사들의 이해와 수용이 요청된다. 나아가 팀을 이루어 또는 협력과 연합을 통해 고지를 향해 나아갈 때, 우리의 승리는 보장된다고 믿는다.
특히, 사이공은 베트남 국내 및 해외와의 관문 도시이다. 인구 700만의 큰 성읍이다. 불교 사원 921개 대 개신교 공인교회 43개, 승려 5,799명 대 개신교 목회자 70여명, 불교 신도 1,646,200명 대 개신교 성도 43,000명이라는 간단한 도식으로 보아도 사이공의 불교와 기독교는 일단 양적으로 큰 차이가 있다. 물론, 양적인 것만이 중요한 것은 아니지만 모든 사람에게 복음을 듣게 해야하는 보편성을 생각할 때, 사이공의 개신교는 훨씬 더 많은 수고와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이는 기존의 현지 교회 교역자들과 외국 SG사들이 같이 져야 할 부담인 것이다.
이제 이러한 중 차대한 사명 앞에 오늘의 출발을 감사하며, 다음의 말씀으로 본 고를 맺는다. '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사이공)에는 좌우를 분변치 못하는 자가 십이만(칠백만)여 명이요 육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아끼는 것이 어찌 합당치 아니하냐' (욘 4:11). 끝
참고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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