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
베다니 미전도종족
월드뉴스
세계기도정보
종합게시판

터키(Turkey)

 

* The JESUS Film Real video service (by Turkish)

Part 1 of 4

Part 2 of 4

Part 3 of 4

Part 4 of 4


전화 : 한국으로 직통 99-82-2(서울)-가입자번호

★ 터키의 일반현황 ★

1. 국명 - 터키(Republic of Turkey)
2. 면적 - 78만1천㎢(남한의 7.9배)
3. 수도 - 앙카라(Ankara)
4. 정체 - 공화국
5. 인구 - 5천284만5천명(1985년)
6. 도시화 - 53%(1985년)
7. 종교상황 - 모슬렘(99.5%), 정교회(0.23%), 천주교(0.22%), 개신교(0.02%)

시작에 앞서
그리스 아테네에서 1년 있으며 모은 자료입니다. 성지순례나 성경공부하며 도움이 되었으면 합니다.
더 자세한 자료들은 http://www.biblicalland.co.kr 을 참고하십시오
신앙의 발자취를 따라가며 그 사실을 확인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말씀이 지역과 그 역사를 통하여 생생하게 해석됨이 더 중요하리라 본다. 
나름대로 정리된 것을 적어보았다. 더 폭넓고 말씀의 현장에서 보는 해석들이 나왔으면하는 바람에서 시작한다.                 
98. 3. 이문범
 
성경적 터키지역 개관
터키지역은 구약시대에는 헷 왕국과 메대왕국이 주로 차지했던 땅이고 앗수르 바벨론등 모두가 탐내었던 지역이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이 지역에 상당한 시간 거주하였고 그의 본토, 고향으로 불리던 지역이다(지금의 하란지역). 
히브리인의 출발점이라 보아도 될만한 중요한 장소이다. 그후 신약시대에는 교회의 두 번째 중심지인 안디옥이 이곳에 위치하며 
이방인의 사도 바울이 이지역 다소출신으로 자신의 고향을 중심으로 이방인을 향한 첫 선교활동을 시작한 곳이다. 
이방인을 향한, 세계를 향한 복음의 출발점이다. 
그 후에도 수많은 교부와 신앙의 전통을 수호한 많은 인물들- 안디옥의 이나티우스, 서머나의 순교자 폴리갑, 
위대한 갑바도기아인들 마크리나, 대바실, 닛사의 그레고리,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 황금의 입 존 크리소스톰등-이 
이 지역에서 배출되었고 예루살렘 멸망후 초대교회의 신앙 거점들이 이 지역을 중심으로 형성되었고 신약전서의 
많은 부분이 이 지역을 대상으로 하였거나 관계하여 쓰여졌다(에베소서, 골로새서, 빌레몬서, 베드로전후서, 요한계시록, 요한복음, 
요한일이삼서, 사도행전, 디모데전후서, 고린도전서등).
 
 
 
<계시록 7교회 위치>
계시록 7 교회
에베소(Ephesus)
현재명: 에베소 '인내'
  에베소는 소아시아(지금의 터키) 서부 지역에서 가장 중요한 성읍이었다. 
  신약시대, 에베소에는 카이스터 강으로 통하는 항구가 있었으며, 이 강은 에게 해로 흐르고 있었다. 
  또한 에베소는 주요한 상업 도로들이 교차하는 곳에 위치해 있었기 때문에, 상업의 중심지가 되었다. 
 
   에베소 사람들은 로마의 여신 다이아나(헬라어로는 아데미 [아르테미스])에게 바쳐진 이교도의 신전을 자랑하고 있었다(행 19:23-31 참조). 
   바울은 에베소를 3년 동안 복음전도의 중심지로 삼았는데(행 19:10 참조), 그곳 교회는 분명히 얼마 동안 번창했었다. 
   그러나 이후에 그 교회는 계 2:1-7의 경고를 받을 필요가 있었다.
 
'에베소'의 특성은 다음과 같다. 
(1)상업상으로는 매우 중요한 교역의 중심지로서 소아시아에서 제일 부유한 도시이며  
   유프라테스에서 라오디게아를 경유하여 에베소까지 이르면서 동방의 산물이  종착하는  곳이었다. 
(2)종교적으로는 세계 7대 불가사의 중 하나인 아데미(Artemis) 여신상이  있어서 미신이 성행하였으며 황제 숭배가 행해지던 부도덕한 곳이었다. 
(3)정치적으로는 로마로부터 자치권을 인정받아 '스트라테고이'(Strategoi)라는 독자적 행정관이 있었고 민주적으로 
   선출된 통치 기관으로서 '불레'(Boule)라는 민회관과 순회 재판소가 있었다. 따라서 명목상 '버가모'가 소아시아의 수도였으나 
   실질적으로는 에베소가  소아시아의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 역할을 하였다(Mounce, Kraft, Kiddle). 
   이러한  에베소에 기독교 신앙이 전파된 것은 브리스길라와 아굴라에 의해서 이루어졌으며 또한  바울이 이 에베소 지역에 
   2년 간 머무르며 목회하였고 후에 디모데가 바울의  열심을  본받아 목회 활동을 함으로 예루살렘과 안디옥에 이어 
   기독교 선교의  중심지가  되었다(행19장; 딤전1:3, Ironside).
 
가. 지리적 배경
  아나톨리아의 다른 헬라식민지처럼 에베소도 에게해 해안에 위치하고 카이스터(Cayster) 강 하구에 위치하고 있다. 
  초기 거주흔적은 주전 1400-1300년경의 미케네인들의 무덤을 통하여 알 수 있다. 주거지의 역사와 발전은 2000년동안 지속되었고 
  4개의 시대로 구분될 수 있다. 
  4 시대는 3개의 지형적 특징을 가지고 있다; 현재 뷜뷜 다그(B l l Dagh), 파나일 다그(Panayir Dagh), 아야소룩(Ayasoluk)라고 불리는 작은 언덕들.  
   첫 번째 거주지는 고대 이오니아 인들 흔적이다. 
   스트라보에 따르면 안드로클루스(Androclus)부터 크로에수스(Croesus) 지배시기까지 헬라 식민지 개척자들이 파나일다그의 북쪽아래 정착하였다고 한다.  
   두 번째 시기 헬라도시는 크로에수스부터 리시마쿠스(Lysimachus, 주전 550-300)까지 아야소룩의 남서쪽 아데미신전 근처에 밀집하여 살았다.   
   세 번째 시기에는 리시마쿠스의 노력으로 뷜뷜다그와 파나일다그사이 계곡에 육중한 성벽을 쌓아 성을 방어하였다. 
   이 도시의 마지막 시대인 비잔틴 시대는 비잔틴 성곽안에 살려고 하는 사람들과 아야소룩에 재정착하려는 사람들로 나누어졌다. 
 
   완만한 구릉지와함께 한 강은 에베소를 항구로 도시로 발전케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그레코-로만 시대에 무역을 관장했던 항구들 중에는 파놀무스(Panormus)와 신성한 항구가 있었다(스트라보). 
   카이스터 강으로부터 내려오는 충적토(allunivium)는 주전 2세기 후반, 로마가 아시아를 차지하기까지 항해의 방해요소가되었다. 
   그러나 어떤 학자들은 이 충적토 문제를 잘못 해석하여 '신약시대에 에베소무역의 번성기는 없었고 
   깊은 경제적인 불황과 침체가 주전 몇세기 전부터 있어왔다'고 잘못 해석한다(Blaiklock). 
   그러나 스트라보는 에베소를 아우그투스 치하에 상업적인 뛰어난 도시로 묘사하며 타우루스(Taurus)의 서쪽, 
   소아시아의 가장 큰 상업 중심지라고 말한다. 마찬가지로 키케로(Cicero)도 아시아에 있는 로마 식민지 지역은 
   비길데없는 천연조건을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더욱이 문학작품과 비문들은 바울이 사역할 동안과 그 이후 
   얼마까지 항구가 지속적으로 중요한 역할하였다고 한다(적어도 5세기까지). 
 
   에베소의 천연적 조건들- 카이스터강, 바다, 피온산(Pion = 뷸뷸다그) 그리고 개천등-은 그들의 신화와 에베소 주화에 잘 묘사되었다. 
   스트라보는 에베소의 발전 조건들 중 하나가 위치의 중요성 때문이었다고 한다. 에베소는 좋은 해안의 위치와 수세기 동안 사용된 
   아나톨리아로 통과하는 주도로를 가지고 있었다. 그 도로는 에베소에서 동쪽으로 여행하는 모든 사람들이 사용하는 도로였다고 한다. 
   초기 기독교시대와 같이 로마의 공화정시대에도 에베소는 여행자가 길을 갈 때 중심으로 잡는 거점으로 이용되었다. 
   또한 에베소는 지역적인 도시발전의 중심지가 되었고 주변 위성도시를 성공적으로 만들었다; 메트로폴리스(중심지)는 북서쪽, 
   남쪽으로는 마그네시아(Magnesia)와 플리에네(Priene), 동쪽 40km에는 카이스터 계곡등. 그러나 미레투스같은 다른 이오니아 
   도시 같지 않게 에베소는 다른 지역에 식민지 도시를 건설하지 못하였다고 한다(헤카타에우스는 나일강에 한 섬이 에베소라고 말하기는 하지만).
 
나. 역사
에베소라는 이름이 최초로 언급된 것은 기원전 13세기경 헷족속 비문에서 아파사스라 불렸던 도시가 에베소가 아닌가 추정된다. 
에베소에서 미케네인의 흔적을 찾아볼 수는 있으나 본격적인 정착은 이오니아시대에 이루어졌다. 
코드루스(Codrus)의 왕 아데니안(Athenian)의 아들 안드로클루스(Androclus)의 지휘아래 주전 1,000년 초기에 그리스인의 유입이 있었다 전해진다. 
스트라보에 따르면 에베소를 포함한 '범 이오니아 연맹'이 이오니아인의 왕실 영지로 귀속되었다한다.  
다른 이오니아 도시들처럼 고대 에베소도 리디아 왕국의 지배아래 있었다. 
도시는 이오니아인의 가혹한 취급에도 불구하고 에베소의 아데미 신전의 건설에 최우선 후원자였던 리디아 왕 크로에수스(Croesus)에 의하여 공격당하였다. 
리디아는 동쪽 그리스 어느 도시보다 에베소를 아시아와 헬라문화가 혼합된 문화를 가진 도시로 만들었다. 
크로에수스가 다리우스(Cyrus)에게 패배한 이후 페르시아(바사)의 지배동안 에베소는 다른 이오니아 도시보다 페르시아와 더좋은 관계를 유지하였다. 
살라미에서 페르시아가 패하고(주전 480년) 후에 알렉산더의 후계자 리시마쿠스(Lysimachus)가 
에베소를 다스리는 시기(주전290년)사이 에베소는 다양한 에게해 내전에 관계되었다.
 
    리시마쿠스 강압아래 에베소는 파나일다그와 뷜뷜다그, 두 언덕사이로 이동한다. 
    주민들은 이동을 꺼렸지만 리시마쿠스는 전략적으로 길을 밀어버려 주민들을 이동하게 하였다. 
    리시마쿠스의 새로운 도시는 극장식(Hippodamian plan)으로 배열되었고 이 배열은 반세기 넘게 시민 정부와 도시 생활의 기초로 잘 남아있었다. 
    리시마쿠스는 또한 도시를 길이가 9km, 높이기 7m, 넓이가 3m가 넘는 육중한 성벽으로 쌓았다(아직도 일부가 남아있다). 
    리시마쿠스의 죽음(주전 280년경)과 로마가 아탈루스(Attalus III)의 전략으로 아시아를 전부 얻을 시기(주전 133년)사이 
    셀류시드와 프톨레미는 강압적으로 에베소와 서 아나톨리아를 다스리려고 하였다.
 
   로마 공화정동안 에베소는 로마와의 관계가 원만하지 못하였다. 로마의 관리들이 공화정 말기까지 있었지만 도시는 
   지역적인 봉기와 로마내의 분란 결과로 고통받았다. 에베소는 본도 왕 미드리다트가 반란을 주도하여 한 날에 
   로마인 80,000명을 죽인 사건에 동조한 혐의로 막대한 세금을 로마에 내야했다. 더욱이 곧 패배한 안토니와 클레오파트라를 대대적으로 환영하였다(주전 33-32).
 
   아우구스투스의 등극과 함께 에베소는 유명하고 번성하는 시기로 들어섰다.  
   로마가 다스리는 아시아의 수도로 아시아의 '제일이며 최상의 중심지'라는 칭호를 받게되었다. 
   아우구스투스의 획기적인 도시화는 건축물에서 잘 드러난다. 이 건축 활성화는 수로, 
   포장도로를 만들었고 아고라를 확장시키고 헬레니즘을 가져왔다. 
   에베소는 멤미우스(Memmius, 로마 술라 장군의 사위)과 아우구스투스의 양자로 입양된 아그립바(M. Vipsanius Agrippa)를 위한 
   승전 기념물을 만들어 정치적인 후원을 더하였다.  이런 건축물들은 로마식으로 지어졌다; 특히 아고라의 규격은 그 면을 잘보여준다(58 X 160m). 
   공공시설은 로마제국에 협조한다는 면을 잘 보여주듯 공회당(Royal Bacilica)와 로마와 쥴리아스 시져의 신전, 플라비안 신전(=도미니안 신전), 
   아우그스투스 신전등이 나란히 위치한다. 
 
   주후 1세기초에 에베소는 로마제국의 신전을 첫 번째로 하사 받는다.
   기지가 교대할때도 에베소에 가장 오래 머물고 아시아에 코이논(Koinon)이라 알려진 영향력 있는 지역 연구기관의 자리를 가졌다. 
   로마제국 제의의 아시아 지역 대제장 사무실은 에베소의 남녀로 임명되었다(그 당시 여자들은 공공 사무실을 개설하고 있었다고 추정된다). 
 
   일반적으로 에베소는 다른 로마 황제들의 계승기, 주전 1세기 후반부터 주후 2세기후반까지 번성하였다. 
   로마황제 베루스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팔티아인에대한 승리 후 2세기 중반 로마 군인들에게 뭍어 온 전염병은 에베소에 치명상을 입혔다. 
   제국과 잘 협조해온 에베소는 2, 3세기 로마제국을 특징지웠던 무능력과 잔혹함과 함께 하였다기보다는 황폐, 전염병으로 운명을 같이 하였다 할 수있다. 
   3세기 불행의 연속은 로마제국의 동쪽 국경을 약화시켰다. 이것은 정치와 행정가들의 암살과 
   기독교 박해, 메소포타미아의 파티아인, 러시아의 고트(Goth)족 침입 등을 가능케하였다.
   이 문제에 에베소는 다른 아나톨리아 도시들같이 고통을 당하였다. 
   해양으로 쳐들어온 고트 족은 아데미신전을 심각하게 손상시켰으며 그 이후로 전의 영화를 되찾지 못하였다. 
   4세기와 7세기의 심각한 지진은 리시마쿠스가 건설한 도시 일부분을 포기하게 하였다. 
   그러나 에베소는 사데나 버가모와 비교할 때 비잔틴 시대에는 두 번째 중심지인 아야솔룩 언덕과 작아지기는 하였으나 
   성안에 있는 항구 근처에 위치한 주거지와 함께 계속 존립하였다. 
   7-8세기에 아랍인의 침공을 받았고 1304년 터키인들 수중에 떨어졌다. 
   그 후 지진 등에 황폐화되어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다. 기독교 전통
   주후 1세기에 에베소는 기독교인에게 매우 중요한 장소가 된다. 사도바울이 2, 3차 전도여행 때 이 곳을 방문하여 교회를 세웠다. 
   또한 사도요한과 마리아는 에베소에서 말년을 보내었다. 
   64년 바울이 로마에서 순교하자 사도 요한은 그를 대신하여 에베소의 지도자가 되었고 버가모,
   서머나 등지에 선교를 하다가 로마로 끌려가 고문을 받고 밧모섬으로 유배되어 요한계시록을 썼다. 
   로마황제 도미티안이 암살되자 요한도 유배에서 풀려나 에베소로 돌아와 요한복음을 썼다. 
   요한은 자신의 뜻에 따라 에베소에 묻혔으며 비잔틴 시대에 그의 무덤이 있는 자리에 '사도 요한 교회'가 세워졌다. 
 
라. 유적
1. 박해 문: 이 문은 사도 요한 교회 앞에 세워진 것으로 대리석 대부분을 에베소 경기장에서 가져온 것인데 
                2-3세기 원형경기장에서 로마인들과 비기독교인 들은 야수와 전사들을 이용하여 기독교인을 박해했고 기독교가 공인되면서 
                기독교인들은 이 경기장으로 달려가  그 대리석을 부수어 박해의 문을 지었다고 한다. 
 
2. 사도 요한 교회: 324년 기독교가 공인되면서 에베소에 기독교가 널리 전파되자 요한의 무덤이 있던 자리에 목재로 된 교회가 세워졌다.  
                         그 후 비잔틴 황제인 유스티안(527-565)이 오늘날 볼 수 있는 교회로 증축하였다. 교회의 심장부인 본당(120X45m)은 
                         십자가 모양으로 되어있으며 그 곳에 사도 요한의 무덤이 위치한다.
 
3. 성모마리아 교회: 원래 건물은 곡물 교환소로 사용되다  4세기경 도시가 기울면서 이 버려진 건물 서쪽 부분에 교회를 세웠으며 
                           동쪽부분은 주교와 다른 직분자들의 처소가 되었다. 이 교회에서 431년 제 3차 종교회의가 열리면서 예수님의 인성과 신성, 
                           마리아에 대한 문제가 격론화 되었다. 네스토리우스는 안디옥 교회에 있을 때부터 예수님이 참 사람이며 
                           그리스도라는 것은 인정하나 참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으며 '동정녀 마리아는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의 어머니가 아니라 인간인 예수의 어머니'라는 주장을 하였다.  약 200명의 권위자들이 
                           3개월간 토론 끝에 네스토리우스를 이단으로 정죄하였다. 
                           (그러나 그의 교리는 계속되어 인디아 아라비아 터키 등으로 퍼졌으나 몽고 침입에 큰 타격을 받아 축소되었으나 
                           오늘날 쿠르드족 산간에 '앗시리아 기독교인'으로 존재한다) 
                           이 회의록에 마리아가 에베소에 왔으며 그 곳에 살다 묻혔다는 문구가 남아있다.  
                           그후 449년에도 종교회의가 이 곳에서 있었다. 
 
4. 주거 지역 : 파나일 아그의 서쪽 극장위에 위치

5. 아고라

6. 셀수스(Delsus)의 도서관

7. 경기장과 목욕탕 (1Co 4:9 9:24,25 15:32)
  1) 항구 경기장 (240X356)
  2) 베니우스 경기장(75X135)
  3) 동쪽 경기장(50X75)
  4) 바리우스 목욕탕(54X100)
  5) 스콜라스티키아 목욕탕
  6) 샘, 우물, 수로
  
8. 전통적인 신전들
  1) 아데미 신전 
  2)  헤스티아 신전
  3) 에라피스 신전
  4) 제우스와 성모 성전(Sanctuary of Zeus and Mother Goddess)
 
<성경>
행 18:19-21 2차 전도여행 중 바울이 에베소 회당에서 변론. (51년경)
행 18:24-28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아볼로를 전도함
행 19:1-20 3차 전도여행 중 세례를 줄 때 성령이 임하고 두란노 서원에서 2년이상 강론함.
행 19:21-41 아데미 신전 은장색 데메드리오가 소동을 일으킴
행 20:17-38 밀레도에서 에베소(30마일)장로들을 초청하여 고별 설교함
엡 1:1  바울이 에베소서 서신을 보내다
딤전 1:3  바울이 디모데를 머물게 하다
계 1:11  계시록 7교회 중 첫 번째 교회
고전 16:5-9,19 3차전도 여행 중 고린도전서를 에베소에서 기록함
 
계 2:1 에베소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오른 손에 일곱 별을 붙잡고 일곱 금촛대 사이에 다니시는 이가 가라사대
2:2 내가 네 행위와 수고와 네 인내를 알고 또 악한 자들을 용납지 아니한 것과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을 시험하여 그 거짓된 것을 네가 드러낸 것과
2:3 또 네가 참고 내 이름을 위하여 견디고 게으르지 아니한 것을 아노라
2:4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2:5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치 아니하면 내가 네게 임하여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
2:6 오직 네게 이것이 있으니 네가 니골라당의 행위를 미워하는도다 나도 이것을 미워하노라
2:7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과실을 주어먹게 하리라
 
(지리적 성경해석)
6 '니골라당'의 기원에 대해서는 두 가지 차원에서 이해된다.
  (1)역사적으로 이는 사도행전에 언급된(행6:5) 일곱 집사 가운데 한 사람인 니골라가 타락하여 만든 이단이라고  추측한다(Irenaeus, Tertullian, Alford). 
  (2)언어적으로 '니골라'에 해당하는 헬라어 '니콜라이톤'(Nikolai?tw/n)은 '백성'을 뜻하는 '라오스'(laoj)와 '없애다' 
     혹은 '정복하다'를 의미하는 '니카오'(nikaw)의 합성어로  구약성경에 기록된(민22:12) '발람'(~['l.B , '백성을 이긴')과 동일한 의미를 지닌다. 
     그래서 발람의 행위와 동일시하여 하나님의 백성들을 파괴하는 거짓 무리들로 추측한다(Bousset,Charles, Trench, Ewald).
 
서머나(Smyrna)
현재명: 이즈밀 '몰약'
 '서머나'는 에베소 북쪽 약 80km 지점에 있었고, 당시 인구가 약 20-30만 정도로 소아시아에서 가장  아름다운  항구  도시였다. 
 '서머나'란 말 가운데 '머'(Myrrh)는  '유향'이란 뜻으로 이곳은 향료 수출지로도  유명하였다. 또한 이곳은 호머(Homer)의 출생지이며 
 학문, 특히 과학과 의술이 발달한 도시였다. 종교적으로는 이교 문화와 종교의 집합처로 황제 숭배의 중심지였다.  
 따라서 서머나는 소아시아 도시들 가운데서 지리적으로나 정치, 경제, 문화적으로  우위를 차지하고 있었으나 그로 인해 복음이 순수하게 전달되지 못하고 
 황제 숭배가 성행하는 등 혼합화와 박해가 뒤따른 도시였다(Johnson, Kraft). 한편 '서머나 교회'에  대해서는 본 서신 외에 잘 알려진 것이 없으며 
 다만 '폴리갑의 생애'에서 바울이 이곳에  전도하였다고 전한다(Eusebius). 
 그리고 사도 요한의 제자이며 서머나 교회의 초대 감독이었던 폴리갑(B.C.155-166)이 이곳에서 순교하였다.
 
서머나는 파그로스(Pagros)산 기슧과 이즈밀 만의 남쪽 해안에 있는 멜라스(Melas) 강의 하구에 위치하고 있다. 
이곳은 계 2:8-11의 언급으로 인해 더욱 유명하다. 도시가 위치하고 있는 지역은 소아시아 고대 헬라 거주지 중 가장 중요한 위치 중 하나였다. 
주전 10세기부터 거주가 시작되어 1923년 터키에 의하여 쫓겨나기까지 헬라인들이 계속 거주해 왔다.
 
   헬라인들은 첫 번째로 시리로스(Sypylos) 산 북쪽과 파그로스 능선의 남쪽에 한하여 살았고 
   이우리스(Aeolis)인들은 첫 번째로 하구의 북쪽 서머나 지역, "고대 서머나"에 거주하였다.
   그들의 항구는 해안이었으며 아크로폴리스는 시피로스의 동쪽 능선에 놓여있었다. 
   이우리스인들은 주전 10세기 토착민으로 도착하여 거주하였던 것 같다; 
   그들은 남쪽까지 정착하였던 이오니아인(Ionian)들에 의하여 대치되는 주전 8세기말까지 우위를 점하고 있었다. 
   정확한지는 모르지만 에로도투스(Herodotus)에의하면 서머나 인들에 의하여 환영을 받는  클라조마이(Clazomenai)에서 온 
   한 이오니아인들이 이우리스인이 디오니시스의 축체를 벌리려 성밖으로 나간사이에 성 전체를 점령하였다고 한다. 
   그것은 분명히 주전 688년전에 일어났다. 
   왜냐하면 파우사니아스(Pausanias)는 올림픽의 첫 번째 권투시합에서 승리한 이오니아인인 오노마토스(Onomatos)가 서머나사람이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유적은 잘 발굴되었고 그것은 고대동안 중요한 장소였다는 것을 확인시켜준다. 
  도시는 약 500 가구 정도가 있는 3000m2의 넓이를 두르는 육중한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다. 
  그리고 잘 짜여진 정규 도로를 가지고 있지만 이것은 도시정부가 개인 소유권을 무시하고 정부에 요구에 순응하도록한 면을 보여준다.
 
   오노마토스의 승리 후 서머나는 시피로스의 북쪽 팤토루스(Pactolus) 강의 평야지대에 있는 사데(Sardis)를 수도로 한 
   리디아(Lydian) 왕국의 등장과 함께 고난을 겪는다.  이 갈등은 주전 600년 재난에 의해 끝을 맺는다.  
   도시는 점령되고 주민들은 추방당하며 전 거주민들은 평야에 있는 마을들로 흩어진다. 
   그러나 스파르타인에 의해 1세기 전에 같은 운명에 처했던 메세니아인(Messenian)들같이 서머나인들이라는 명칭은 계속 이어졌다. 
   이 시기를 통하여 서머나는 초기 이오닌아인들의 시와 이야기들 속에 등장한다. 
   어떤 이에 따르면 서머나가 호머의 이야기 전개과정 중 처음에 언급된 것을 보아 서머나가 호머의 고향이라고 한다.
 
  알렉산더가 주전 334년 소아시아를 침입했을 때 그는 3세기동안 서머나에 계속 살았던 서머나인들을 발견했고 전통에 따르면 
  알렉산더는 새로운 장소이기는 하지만(현재의 서머나) 꿈에 그 도시를 재건하도록 영감을 받았다고 한다.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도 알렉산더는 그가 죽은 주전 323년까지 서머나에 어떤 특별한 조치도 하지 않았다. 
  결국 리시마쿠스(Lysimachus) 왕이 주전  301년 입수스(Ipsus) 전쟁 후  소아시아 서쪽의 중요성을 깨닫고 새로운 도시를 건설하기 시작하였다. 
  서머나의 첫 번째 작업은 주전 288/7년에 이루어졌다. 
  다음 세기동안 그 도시는 중요성을 인정받고 급속도로 발전하였다. 
  주전 281년 셀류시드(Seleucid) 왕조의 지배아래서도 국외의 협정과 국내의 작업을 자유롭게 할 수 있었다. 
  주전 190년대에는 셀류시드 왕인 안티오쿠스 3세에 대항하여 로마와 손을 잡았다.  
  주전 195년 서머나는 소아시아에서 첫 번째로 로마의 여신들을 위한 신전을 세웠다.  
  두 거대 힘사이의 이해관계에 재빠른 행동은 버가모 왕인 유멘스(Eumenes)와 함께 로마가 안티오쿠스를 이겼을 때 
  서머나를 더 좋은 위치의 도시로 올려놓았다. 
  로마가 버가모왕 아탈루스(Attalus) 3세가 주전 133년 죽은 후 안탈리아 서쪽을 직접 통치하였을 때도 
  서머나는 1세기동안 '자유도시'로 존재하였다. 
  주전 89-85년 서머나는 로마와 본도의 미트리다트(Mithridates) 4세와의 
  격렬한 전쟁에 휘말리어 결국 공물을 바치는 도시로 격하되었다. 
  이것은 서머나가 미트리다트에 속한 도시를 지원한 것에 대한 응징조치였다.
 
  다음 50년간은 로마에게 속한 소아시아의 시련기였다. 
  주전 73년 미트리다트의 재침략이 있었고  여러 로마 장군들이 내전에 필요한 군비를 충당하기 위하여 지역 도시들로부터 막대한 세금을 추징하였다; 
  주전 31-30년 아우구스투스의 안토니에게 패배 때, 주전 49년 시이저의 루비콘(Rubicon) 횡단 때 지원을 해야했고, 
  거기다 주전 41-39년까지는 파르타아인(Parthian)에게 지배를 받았다. 
  그러나 이런 사건들은 서머나를 완전히 황폐화시키는 못하였다. 
  지리학자 스트라보는 아우구스투스의 말기(주전 31-주후 14)와 티베리우스 초기(주후 14-37) 통치지역들을 묘사하면서 
  서머나를 '최고를 아름다운 도시'라고 묘사한다. 서머나는 로마가 중요시 여기는 4개도시 중 하나가된다(에베소, 사데, 버가모와 함께). 
  서머나는 로마의 다른 헬라도시들이 하는 것처럼 최고로 부유한 층에서 선출된 사람들로 구성된 불레라고 부르는 의회 정부를 가지고 있었다. 
  불레는 위원들의 위원회에의하여 운영되었고 그 주요 기능은 도시 위원 중에서 선출된 도시의 장관의 행정을 감독하는 것이었다. 
  가장 중요한 관리는 군사적인 행위와는 관계는 없는 장관(strategoi)직이있었고 의회와 대중집회(Popular assembly)의 
  비서, 재무관, 시장감독관, 경찰국장등이 있었다. 의회의 원로들도 약간의 영향력을 행사하였고 
  로마제국의 협력은 장관과 유명시민의 사무실과 지역 모임과 
  그의 사무원, 그리고 제국 제의를 하는 제사장들을 통하여 이루어졌다.
 
   로마 제의를 얼마나 가지고 있느냐는 그 도시가 로마지역 중 얼마나 중요한가를 나타내는 지표이기도하다. 
   주변 도시들 중 하나와 같이 서머나는 세 개의 신전을 허락 받았다 티베리우스, 하드리안, 카리칼라 하에서, 제사장들은 서머나 시민이거나 
   다른 도시 출신으로 제의를 종사하러 임용된다. 서머나는 신전의 관리인을 두고 제사장들은 그들 자신의 돈을 그들의 의무를 수행하는데 사용하였고 
   많은 돈이 필요한 도시의 제사는 도시당국으로부터 충당되었다.
  서머나는 2세기에 많은 서류들을 가지고 있다. 
  안토니우스 폴레모( M. Antonious Polemo)같은 이는 필로스트라투스와 아에리우스 아리스티드(Aelius Aristices)같은 이의 자서전을 써주었고 
  그의 저작은 아랍어로 번역되어 보존되기도 한다. 특히 '신성한 이야기들(The Sacred Tales)은 서머나의 지진과 질병들을 묘사하기도 한다.
   
   서머나에 관계된 두 유명한 순교자이야기가 전해져온다; 
   폴리갑의 순교(Acts of Polhcarp)와 피오니우스와 그의 교우들의 순교(Acts of Pionius and his companions)는 1세기 중반에 자리를 잡기 시작한 
   기독교 성장과 그들의 이웃, 특히 지방의 영향력 있는 유대인 사회와의 마찰을 잘 조명한다. 
   폴리갑은 155년에, 피오니우스는 250년에 순교하였다. 
   전자는 회당의 구성원들이 두드러진 역할을 하며 지방적인 핍박을 가할 때였고 후자는 데시우스 황제(249-251)의 칙령에 의하여 
   제국의 온 백성이 황제에게 제사할 것을 명령하던 때였다.
   두 작품은 모두 믿을만한 사본들을 가지고 있고 도시에 있었던 필연적인 갈등들
    - 기독교인과 비기독교인 뿐아니라 부자와 가난한자, 지방과 제국의 영향력사이의 갈등을 잘 보여준다. 
 
    3세기에는 페오니우스의 순교 외에  잘 알려진 사건이 없다. 그러나 의심 없이 그 도시는 정치적인 혼돈기 동안 
           다른 도시들과 마찬가지로 어려움을 겪었을 것이다. 
    그러나 서머나는 아시아의 가장 중요한 도시 중 하나로 남지만 그의 경쟁도시들은 빛을 잃어간다. 
    서머나는 7세기에 있었던 페르시아인의 침공에 심각한 타격은 입지 않은 듯하다. 또한 654년 이슬람 부대로부터도 결정적인 타격은 입지 않았다. 
    869년 대주교의 순위가 올려졌을 때 서머나 주교는 에베소와 동등하게 여겨졌고 13세기초에는 에게해 도시 중 최고의 위치를 점하였다. 
 
(성경)
계 2:8-11 일곱교회 중 2번째로 언급되었으며 칭찬만 받은 교회 중 하나이다.
  (그 이유에서인지 지금도 번창하여 터키의 3번째 도시로 200,000거주하며 1/3이 기독교인이다) 
2:8 서머나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처음이요 나중이요 죽었다가 살아나신 이가 가라사대
2:9 내가 네 환난과 궁핍을 아노니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니라 자칭 유대인이라 하는 자들의 훼방도 아노니 실상은 유대인이 아니요 사단의 회라
2:10 네가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 말라 볼지어다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서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 너희가 십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
2:11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자는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아니하리라
 
폴리갑의 순교
  155년까지 플리니가 트라이잔 황제로부터 받은 지시 
  - 기독교인들을 구태여 색출하지는 않으나 일단 고발되고 로마의 신들에게 예배하기를 거부할 경우에는 반드시 처벌한다 - 가 아직 유효하였다. 
   당신 서머나 상황을 직접 목격한 다음과 같은 증언이 남아있다. 당시 일단의 신자들이 로마의 신들을 예배하도록 강요받았는데 모두가 완강히 거부하였다. 
   이들은 혹심한 고문도 잘 견디어 내었다. 왜냐하면 이들은 " 그리스도 안에 피난처를 구하며 이 세상을 비웃었기 때문이었다" 
   노령의 게르마니쿠스가 재판정에 서게되었을 때 재판관은 그이 노령을 생각하여 고문과 죽음을 당하느니 개심하도록 권면하고 충고하였다. 
   그에 대하여 그는 대답하기를 그가 방금 목격한  이러한 부정의와 잔인한 폭행이 행해지는 이 세상에 더 이상 살고싶은 욕망이 없다고 말하였다. 
   또한 그 자신을 진실성을 증명하기 위하여 짐승들에게 와서 자기를 죽이라고 소리질렀다. 이러한 용기는 오히려 폭도들의 분노를 더욱 자극하였다. 
   이들은 소리지르기 시작하였다. "무신론자들에게 죽음을 (눈에 보이는 신들을 믿지 않는 이들) " "폴리갑을 데려 오라" 이 늙은 감독은 
   자기를 찾는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신자들의 충고에 따라 며칠 동안 숨어 지냈다. 그러나 또 다른 곳으로 피신처를 옮겼음에도 불구하고 
   그 장소가 발각되자 체포가 하나님의 뜻이라 생각하여 더 이상 피신하기를 거부하고 조용히 법원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었다.
   당시 재판을 주관하던 총독도 그를 훈계하여 가족과 노령을 생각해 황제를 예배하도록 종용하였다. 요한의 제자 폴리갑이 거부하였을 때 
   재판장은 폴리갑에게 "무신론자들은 물러가라"고 소리지르도록 명하였다. 이에 폴리갑은 바로 자기 주위에 있는 군중들에게 "무신론자들은 물러가라"고 
   소리 질렀다. 다시 재판관은 만약 폴리갑이 황제를 두고 맹세하고 그리스도를 저주하면 석방하겠다고 약속하였다. 
   그러나 폴리갑은 답변하기를 " 내가 86년동안 주를 섬겼으나 나를 한번도 저버리신 일이 없다. 
   어떻게 나를 구원하신 나의 왕을 저주할 수 있겠는가?" 라고 응답하였다.
   이들의 문답은 계속된다. 
   재판관이 그를 산채로 불태워 죽이겠다고 협박하자 폴리갑은 대답하기를 재판관이 붙은 불은 순간이지만 지옥의 영원한 불길은 꺼지지 않는다고 대답하였다. 
   마지막으로 그가 기둥에 묶이어 화형을 기다리고 있을 때 폴리갑은 하늘을  보고 큰 소리로 기도하였다. 
   " 전능하신 주 하나님.... 내가 이러한 영광을 받을 수 있도록 허락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다른 순교자들과 함께 그리스도의 잔에 참예할 수 있게 하여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를 위해 당신을 찬양하며 영광을 돌리나이다. 아멘."
 
   수년 전 안디옥의 익나티우스는 자신보다 어렸던 폴리갑 감독에게 감독으로서의 임무를 다하고 신앙을 굳게 지키도록 권면하고 순교지인 로마로 간 적이 있다. 
   이제 폴리갑은 그가 익나티우스의 기대와 모범을 따르기에 충분한 인물임을 증명하였다. 
 
   폴리갑의 순교에 관하여 특기할 만한 사실은 그가 처음에는 피신하였다는 것이다. 
   또한 당시 퀸툿라는 신자가 순교의 영광을 얻기 위하여 자발적으로 재판정에 섰다가 마지막 순간에 포기하였다는 기록도 남아있다. 
   이는 순교는 인간들이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에 의해 선택된 자들에게만 주어지는 특권이라는 초대교회 신자들의 믿음을 알 수 있다. 
     (곤잘레스의 초대교회사 중에서)
 

버가모(Pergamum)
현재명: Bergama
   '버가모'는 서머나 북쪽 약 100km되는 곳에 위치한 수도로 주전 130년 경에 로마의 식민지가 되었다. 
   이곳은  에베소와  서머나가 상업적으로 아시아의 중심 역할을 한 반면에 문화적인 측면에서 아시아의 중심부 역할을 했다. 
   그래서 의학교가 있었으며 장서 20여 만 권을 소장한 도서관이 있었으며 책을 만드는 종이인 양피지의 생산지였다. 
   종교적으로 치료의 신으로 이해되었던 '아에스쿨레피우스'(Aesclepius)라 불리는 뱀신과 주신인 '제우스'(Zeus), 
   그리고  아테네  신전 지도자 '디오니소스'(Dionysos) 등을 숭배하는 우상 숭배지였다.
 

(성경)
계 1:11  일곱교회 중 하나
계 2: 12,13 안디바가 순교한곳
2:12 버가모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죄우에 날선 검을 가진 이가 가라사대
2:13 네가 어디 사는 것을 내가 아노니 거기는 사단의 위가 있는 데라 네가 내 이름을 굳게 잡아서 내 충성된 증인 안디바가 너희 가운데 
      곧 사단의 거하는 곳에서 죽임을 당할 때에도 나를 믿는 믿음을 저버리지 아니하였도다
2:14 그러나 네게 두어 가지 책망할 것이 있나니 거기 네게 발람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 발람이 발락을 가르쳐 이스라엘 앞에
      올무를 놓아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였고 또 행음하게 하였느니라
2:15 이와 같이 네게도 니골라당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
2:16 그러므로 회개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속히 임하여 내 입의 검으로 그들과 싸우리라
2:17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감추었던 만나를 주고 또 흰 돌을 줄 터인데 
      그 돌 위에 새 이름을 기록한 것이 있나니 받는 자 밖에는 그 이름을 알 사람이 없느니라
 
(성경해석)
'사단의 위'에 대한 해석은 세 가지이다. 
(1)혹자는 버가모 지역의 대표적인 우상 신전 중 특별히 제우스 제단을 가리키는 것으로 해석한다(Deissmann).  
(2)혹자는 버가모 도시 자체가 언덕처럼 생겨서 평원 위로 솟아오른 모습이 하나의  제단처럼 보였기 때문에 붙여진 것으로 본다(Wood). 
(3)혹자는 버가모가 이방 신과 황제 숭배의 중심지였다는 사실을 가리키는 것으로 본다(Johnson, Mounce, Alford). 
 
터툴리안은 '안디바'가 버가모 교회의 명성 높은  감독으로 황제 숭배  거절로  인해  불에  타  순교한  것으로  주장하고  있다
 
두아디라(Thyatira)
현재명: Akhisar 
'두아디라'의 옛 이름은 '펠로피아'(Pelopia) 혹은 '유힙피아'(Euhiooia)이며, 현재는 '아킷살'(Akhissar=Wite castle)로 불리운다. 
이곳은 버가모와 서머나의 중간 지점에 위치해 있으며 공업 도시로  유명한  곳이었다.  주전 190년 경 로마의 식민지가 되었고 
태양신 '아폴로'(Apollo)와 '아데미'(Diana), '삼바다'(Sambatha) 등의 신전이 있었으며, 공업이 발달하게 된 동업 조합이  유명하였다. 
빌립보에서 개종한 자주 옷감 장사(혹은 염색업자) 루디아가 이곳 출신의  여인이었다(행16:14,  Johnson).  
염색업은 지금도 여전히 유명한 업종이고 고대유적에서도 염색업자에 관련된 비문 조각들이 발굴되었다. 
한편 두아디라 교회가 어떻게 설립되었는지 정확하게 알 수 없으나  바울이  에베소에 머물 때 전도하였거나 루디아가 전달하여 세워졌을 것으로 추측된다. 
 
(성경)
행 16:14   두아디라의 자주 옷감 장사 루디아가 빌립보에서 바울의 전도를 받다
계 1:11 2:18-28  일곱 교회 중 하나
 
계2:18 두아디라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그 눈이 불꽃 같고 그 발이 빛난 주석과 같은 하나님의 아들이 가라사대
2:19 내가 네게 사업과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를 아노니 네 나중 행위가 처음 것보다 많도다
2:20 그러나 네게 책망할 일이 있노라 자칭 선지자라 하는 여자 이세벨을 네가 용납함이니 
      그가 내 종들을 가르쳐 꾀어 행음하게 하 고 우상의 재물을 먹게 하는도다
2:21 또 내가 그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었으되 그 음행을 회개하고자 아니하는도다
2:22 볼지어다 내가 그를 침상에 던질 터이요 또 그로 더불어 간음하는 자들도 만일 그의 행위를 회개치 아니하면 큰 환난 가운데 던지고
2:23 또 내가 사망으로 그의 자녀를 죽이리니 모든 교회가 나는 사람의 뜻과 마음을 살피는 자인 줄 알지라 내가 너희 각 사람의 행 위대로 갚아주리라
2:24 두아디라에 남아 있어 이 교훈을 받지 아니하고 소위 사단의 깊은 것을 알지 못하는 너희에게 말하노니 다른 짐으로 너희에게 지울 것이 없노라
2:25 다만 너희에게 있는 것을 내가 올 때까지 굳게 잡으라
2:26 이기는 자와 끝까지 내 일을 지키는 그에게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리니
2:27 그가 철장을 가지고 저희를 다스려 질그릇 깨뜨리는 것과 같이 하리라 나도 내 아버지께 받은 것이 그러하니라
2:28 내가 또 그에게 새벽 별을 주리라
2:29 귀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성경해석)
    '눈이 불꽃 같고 그 발이 빛난 주석'과 같은 그리스도의 모습은 두아디라에서 숭배하던 태양신 '아폴로'와 
    거짓 예언자 '이세벨'(20절)을 염두에 두고 경고하시는 것으로  그들의 우상 숭배와 행음에 대해 반드시 심판하시리라는 사실을 암시한다. 
    당시 청동업이  발달한 두아디라에 사는 교인들에게는 이러한 그리스도의 모습은 생생한 화면처럼  
    느껴지는 계시로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1:14,15 주석 참조, Johnson, Ramsay).
 
   '하나님의 아들'이란 언급은 일곱 교회 서신의 서두에 나타난 그리스도의 모습 중에서 본 절에만 나타난다. 
   이는 시2:7을 반영한  것으로  그리스도의  품성의  위엄을  강조하며(Charles) 두아디라 지방의 우상이면서 제우스의 아들로 여겼던 
   아폴로나 황제와 대조를 이루어 오직 그리스도만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시사한다(Mounce, Lenski).
 
당시 두아디라에 성행했던 조합(組合)과 관련하여 우상의  제물을 먹고 성적 부도덕에 빠지는 일이 비일비재했으며 
그 거짓 선지자의 정체를 폭로하기 위해 구약성경의 이세벨이란 명칭을 상징적으로 사용한 듯하다(Alford,Johnson). 
 

사데
사데는 두아디라 남동 약 48km 지점에 위치한 도시로 현재 터키인 팤도루스(Pactolus)강가와 트모루스(Tmolus)산 기슧에 위치한다.  
루디아의 수도였다. 이 도시는 상업적으로 번창한 도시였다. 특히 염직 공업과 양털 염색, 금모래가 유명하여서 사치와 부의 도시로 전략하였고  
무역의 요충지가 되었다. 군사적인 면에서는 성채가 남쪽만을 제외하고 모두  암벽으로  되어 있어 난공 불락의 성을 이루고 있었기에 
상당히 안일한 생활을 영위하고 있었다. 사데 사람들은 그 안일함으로 인해 두 번 정복을 당하였다. 
B.C. 6세기 고레스(Cyrus)의 공격과 약 200년 후 안티오쿠스(Antiochus)의 침략이 그것이다. 
종교적으로 사데는 시벨리(Cybele) 여신을 섬겼고 황제 숭배가 극심하였다. 한편 사데 교회의 기원은  분명치 않으나 역사가들의 말에 의하면 
요한의  전도로 세워졌고 2세기에 이르러 변증가며 주석가로 유명했던 멜리토(Melito)가 이 교회의 감독이 됨으로 명성을 떨치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물질적 부요로 말미암아 내적인 피폐로 안일과 부도덕의 모습이  교회에까지 침투하였다.
 
(성경)
계 3:1-6  일곱 교회 중 하나로 실랄한 비판을 받은 교회
 
계 3:1 사데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하나님의 일곱 영과 일곱 별을 가진 이가 가라사대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
3:2 너는 일깨워 그 남은 바 죽게 된 것을 굳게 하라 내 하나님 앞에 네 행위의 온전한 것을 찾지 못하였노니
3:3 그러므로 네가 어떻게 받았으며 어떻게 들었는지 생각하고 지키어 회개하라 만일 일깨지 아니하면 
     내가 도적같이 이르리니 어느시에 네게 임할는지 네가 알지 못하리라
3:4 그러나 사데에 그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자 몇 명이 네게 있어 흰 옷을 입고 나와 함께 다니리니 그들은 합당한 자인 연고라
3:5 이기는 자는 이와 같이 흰 옷을 입을 것이요 내가 그 이름을 생명책에서 반드시 흐리지 아니하고 
     그 이름을 내 아버지 앞과 그 천사들 앞에서 시인하리라
3:6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성경해석)
'일깨워'  이는 사데 지역이 난공 불락의 천연 요새로 되어 있다는 사실로 인해 안일에 빠져  두번씩이나 점령을 당했던 사데 지역 사람들에게는 
특별한 경고가 되었을  것이다(Mounce, Lenski). 
사데 교회가 생명력을 상실한 사실을 단적으로 묘사한 '죽었다'는 표현은 사데에서 약 11km 떨어진  언덕같은  수많은 묘지를 암시한다. 
 옷에 대한 예는 양모 산업이 발달하여 옷에 대해 관심이  많던  사데 사람들에게는 매우 적절한 것이다.
  
 
빌라델비아(Philadelphia)
현재명: Allahshehr, "the city of God." 
 '빌라델비아'는 사데 동남쪽  약  40km 지점에 위치한 고원 도시로 포도 생산지로 유명하였다.  
 그곳은 서머나와 루디아  왕국으로부터 동방으로 가기 위해 제일 먼저 들러야 하는 도시로 '동방의 관문'이라  일컬어지기도 했다. 
 농업과 상업이 발달하여 경제적으로 상당한 부를 누렸으나 지진이  잦아 피해가 많았다. 몇 차례의 지진으로 거의 황폐화되었으나 도시는 여전히 건재하다. 
 또한 많은 신전과 종교적 행사가 있어 A.D.5세기에는  '작은  아테네'로 불렸다. 그러나 빌라델비아는 이교 신전과 종교 행사가 많고 
 2,3장에 나타난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가 위치한 지역 중 가장 짧은 역사를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B. C. 159-138) 
 아시아가 이슬람교도들에 의해 짓밟힐 때 유일한 기독교의 보루(堡壘)로서 신앙적인 면에서 가장 칭찬을 받은 지역이다(Lenski, Johnson).  
 한편  빌라델비아 교회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으며 단지 암미아(Ammia)라는 여선지자가 이  교회를 관할하면서(A.D. 100-160) 
 큰 부흥을 이룬 듯하다. 이 교회의  성장으로  흩어진 유대인들이 개종하는 역사도 있었으나 반면에 교회를 가장 반대하는 자들 역시 유대인들이었다
 
(성경)
계 3:7-12  일곱교회 중 하나로 칭찬 받은 교회
 
계 3:7 빌라델비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거룩하고 진실하사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이 
        곧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닫으면 열 사람 이 없는 그이가 가라사대
3:8 볼지어다 내가 네 앞에 열린 문을 두었으되 능히 닫을 사람이 없으리라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적은 능력을 가지고도 내 말을 지키며 내 이름을 배반치 아니하였도다
3:9 보라 사단의 회 곧 자칭 유대인이라 하나 그렇지 않고 거짓말하는 자들 중에서 
     몇을 네게 주어 저희로 와서 네 발 앞에 절하게 하고 내가 너를 사랑하는 줄을 알게 하리라
3:10 네가 나의 인내의 말씀을 지켰은즉 내가 또한 너를 지키어 시험의 때를 면하게 하리니 
      이는 장차 온 세상에 임하여 땅에 거하는자들을 시험할 때라
3:11 내가 속히 임하리니 네가 가진 것을 굳게 잡아 아무나 네 면류관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
3:12 이기는 자는 내 하나님 성전에 기둥이 되게 하리니 그가 결코 다시 나가지 아니하리라 
      내가 하나님의 이름과 하나님의 성 곧 하 늘에서 내 하나님께로부터 
      내려오는 새 예루살렘의 이름과 나의 새 이름을 그이 위에 기록하리라
3:13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성경해석)
'열린 문'에 대한 몇 가지 해석 중 하나는 남북으로 로마와 소아시아의 수도 에베소를 연결하는 
빌라델비아의 지리적 위치 때문에 이를 '선교의 문'으로 해석한다(Ramsay, Swete, Alford, Clarke, Charles, Holtzmann). 
 
라오디게아(Laodicea)
현재명: Eski-hissar or "old castle.
"라오디게아는  빌라델비아  동남쪽  약 72km, 에베소에서 동쪽으로 약 160km 지점에 위치한 도시로서 
프리기아(Phrygia)와 리디아(Lydia) 경계와 리쿠스(Lycus)의 제방 위에 위치한다.  
원래 이오스폴리스(Diospolis)와 로아스(Rhoas)로 불리다 도시를 재건한 시리아 왕(셀류시드) 안티오쿠스 2세의 부인 라오디스의 이름을 따 
라오디게아(Laodicea)로 불렸다  또한 맞은 편으로  10km  지점에는  히에라볼리가  약 14km 지점에 골로새가 위치해 있었는데 
이 세 곳은 바울 서신에서 밀접한 관련이 있는 곳이다(골4:13,16). 이곳의 특징은 교통의 요충지였을 뿐만 아니라 모직물 공업의  중심지였으며 
'브루기아 가루'라  알려진 안약과 의학교가 있었다. 또한  활발한  금융 거래로 풍요로운 생활을 누렸다. 그러나 이곳은 물 사정이 좋지 않아 
히에라볼리와 골로새로부터 항상 수로를 이용해 물을 공급받아야 했다. 한편 라오디게아 교회는  에바브라가 설립하였으며(골4:12,13) 
골로새 교회와 함께 바울이 지도하였다. 이 도시는 소아시아에서 매우 중요하고 번성한 도시중 하나로 초기 기독교시대 기독교의 주요 장소가 되었으나 
지금은 황폐화되었다. 
 
(성경)
계 3:14-20       일곱교회 중 하나
골 2:1; 4:12-15       에바브라가 목회하고 바울이 골로새교회에게 서신을 함께하라고 한 교회
 
계 3:14 라오디게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아멘이시요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요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신 이가 가라사대
3:15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더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더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3:16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더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내치리라
3:17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
3:18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
3:19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
3:20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더불어 먹으리라
3:21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 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
3:22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성경해석)
'차다'는 것은 라오디게아의 물 사정이 좋지 않아 약 16km 떨어진 골로새로부터 냉수를 공급받는 사실을 염두에 둔 것으로 그들이 불신의 상태로 세상에 
속하였음을 시사한다. '더웁다'는 것은  인접한 히에라볼리의 온천수를 염두에 둔 것으로 신앙을 위한 열정을 비유한다
'미지근하여'라는  라오디게아 사람들은 히에라볼리로부터 끌어온 온천수와 골로새로부터 수로를 통해 가져온 찬물을 공급받는 과정에서 
물이 미지근하게 됨으로 식수로  사용하기에는  부적합하여 마시는 자마다 토하여 버렸다. 
 '가난'은 라오디게아인들이 금융업이 발달할 정도로 물질적인 부를 축척한 것과는 달리 영적으로는 그리스도를 섬길 수 없는 상태 곧
  하나님과  그리스도에 대해 알지 못하고 있음을 나타내며(2:9), 
'눈먼 것'은 라오디게아에 특수한 안약과 의학교가 잇었던 것과는 달리 영적 시각 장애자로 분별력을 잃은 것을 의미하고,  
'벌거벗은 것'은 라오디게아의 검정색 양모가 유명했던 것과는 달리 그들이 영적으로  벗은 모습임을 시사한다(Mounce).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 - 라오디게아는 광택있는 검은 양모 생산지로 유명하였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양모가 아닌 '흰 옷' 곧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는 의의 옷을 입고 영적으로  수치스럽게 벌거벗은 것을 가리라고 권면하신다. 
 한편 그리스도께서는 이 지역의 특산물인 안약을 사서 치유하라고 권면함으로 그들의 영적 시각 장애를 치유하고 자신을  온전히 바라보라고 권면하신다(골1:27; 2:3).
 

바울 선교지역
 안디옥
현재명: 안타키아
  행정 구역상 수리아 지역의 지중해에서 약 32Km 내륙 오론테스강가에  위치한  도시로서 예루살렘에서 북쪽으로 약 480Km의 거리에 위치해 있다. 
  안디옥이라는 지명은 여러 곳이 있었던 것으로 전해지며 성경에서는 비시디아 안디옥과 수리아 안디옥 두 곳이 언급되어 있다(13:14). 
  수리아 안디옥은 기원전 300년경에 셀류쿠스 니카토르 1세(Seleucus Nicator I)에 의해 세워졌고 그의 아버지 `안티오쿠스'(Antiochus)의 이름을 따라 
  도시의 이름을 지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안디옥은 A.D.1세기에 로마 제국 안에서 로마와 알레산드리아에 이어 인구 약 50만에 달하는 큰 도시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Josephus). 
  셀류시드왕조 때 수도로, 로마시대에 아시아 수도로 이용되었다. 빌립보와 같은 로마도시로 집정관이 다스린 로마시대 동쪽 제1의 도시이다. 
    지역의 위치상 안디옥은 동 서 문화가  혼합되어 상존했으며 전체 인구 중 1/7정도가 유대인들로 구성되었다. 
    A.D.37-41년에는  갈리굴라(Caligula) 통치 아래에서 많은 유대인들이 학살당했던 무서운 도시로도 알려져 있다. 
    신약성경에서 안디옥은 외국 선교의 전진기지로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데(13:1-3) 
    처음으로 기독교인이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어졌던  곳이며(11:26) 이방인 개종자의 할례 문제에 관한 논쟁이 처음있었던 곳이다(15:1,2;갈 2:11-21). 
    이와 같이 이방 지역 선교를 위한 중요한 기능을 담당했던  안디옥  교회는 초기에 바나바와 바울, 
    그리고 베드로에 의해 지도되었고  2세기에는  익나티우스와 데오빌로, 3,4세기에는 루시안, 데오도르, 크리소스톰(407년 사망) 등의 
    유명한  지도자들에  의해 지도되었다. 그래서 알렉산드리아, 로마와 함께 중요한 신학적 본산(本産)이 되었다.
 
    526, 528, 529, 540년에 있던 지진으로 폐허가 되었던 도시는 페르시아에게 넘어갔으나 유스티안 비잔틴 황제에의하여 탈환되었다가 636년 아랍인에게 넘어갔다.
    그후 셀쥭, 십자군, 아르메니안에의해 침공을 받았으나 이 중에서도 그 중요성은 유지되어 실크, 유리세공, 비누, 고리가공등이 번성하였다. 
    그러나 마물국 술탄이 1268년 황폐화시킨 후 다시 회복하지 못하고 1516년 터키가 차지했을 때는 작은 도시로 남았다. 
   주전 300년 5월 22일 도시가 세워질 때부터 많은 신전과 공공건물이 장식되었고 아폴로신전에서 열린 경기와 연회의 화려함과 극치는 동쪽 모두에 잘 알려졌다. 
   안디옥 고고학 박물관에는 로마모자이크 바닥이 남아있고 실피우스(Silpius) 산 정상에는 감히 접근할 수 없는 망대가 위치하고 그 망대는 몇 번 재건되었다. 
   산 기슭에 있는 성 베드로 동굴은 초대 안디옥 성도들이 모였던 장소로 여겨진다. 동굴 안에는 매우 낡은 아마 비잔틴 시대 것으로 보이는 모자이크가 있다. 
 
(성경)
행 6:5  니골라의 고향
행 11:19  흩어진 기독교인이 복음을 전한 곳
행 11:19-30 그리스도인이라 부름 받고 바나바와 사울 사역함
행 13:1-3 최초로 교회에서 선교사(바울과 바나바)를 파송하다
행 14:26-28 바울과 바나바가 선교보고를 하다
행 15:1-2 율법에 대한 문제로 변론이 일어나 해결을 위해 예루살렘으로 사람을 보냄
행 15:36-41 바울과 바나바가 갈라서다
 
밤빌리아 버가
현재명: Eski Kalessi. 
   바울 일행이 구브로 섬을 떠나 두 번째로 찾은 케스트루스(Cestrus)강가에 있는 밤빌리아는 
   지중해 북단에 있는 소아시아의 남쯤 해안에 접한 지역이다. 해안의 길이가 120km이며  내륙 쪽으로 폭이 
   48km 정도의 이 지역은 동편에는 길리기아, 서쪽에는 루기아, 북쪽에는 비시디아가 인접해 있다. 
   그리고 버가는 밤빌리아의 중심 도시로 해안에서  내륙 쪽으로 13km정도에 위치해 있다. 
   바울은 돌아오는  길에서  다시  이곳을  들르게  된다(14:25). 이곳에서의 바울 일행의 선교 행적에 관한 언급은 없다. 
   아마 별다른 성과가 없었을 것이다. 
 
(성경)
행 13:13-14  1차 전도여행 중 구브로 섬을 떠나 두 번째로 찾은 곳
행 14:25   1차 전도여행을 마치고 돌아올 때 다시 방문하다
 
비시디아 안디옥
 현재명: Yalobatch 
이곳은 안디옥 교회가 있는 수리아 안디옥과 구별되는 곳으로(11:27) 해발 약 100m에 달하는 고원지대이다. 
신약시대 비시디아의 북단에 위치한 도시이다. 오늘날의 터키 중남부 지방의 얄바크(Yalvach) 
근처의 폐허 지역을 말하며 당시에 이곳은 로마의 식민지였다. 바울은 3차전도 여행때에도 이곳을 들르게 된다(18:23).
 
(성경)
행 13:14  바울이 1차 전도여행중 유대인 회당을 방문하여 극심한 반대를 받다
행 14:21    //                  다시 방문하다
 
이고니온
 현재명: Konieh
   바울과 바나바는 안디옥으로부터  추방당하여  그곳에서  동쪽으로 약 120km정도의 거리에 위치한 
   이고니온(Iconium)으로 떠나게 된다. 
   이 곳 역시 B.C.  25년경 갈라디아가 로마의 한 도(道)로 복속될 때 로마에 합병되었다(F.F. Bruce). 
   이고니온(Iconium)은 헬라인에 의하여 도시국가로 변형되었는데 비옥한 고원지대(高原地帶)에 형성된 도시이다. 
   이곳은 당시 루가오니아(Lycaonia)의 수도였으며 로마로부터 자유로운 도시였으나 하드리안(Hadrian) 
   황제에  의해  식민지화되었다.  
   현재의 터키의 중요한 상업도시로 '코냐'(Konya)라 불리어진다.  
   이곳에도  역시 비시디아 안디옥처럼 유대인들이 많이 거주했으며 회당을 중심으로 하여 
   신앙 생활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성경)
행 13:50-51  1차 전도여행 중 안디옥에서 추방당하여 간곳
행 14:1-6  많은 사람들이 믿음
행 14:19;딤후 3:11 바울을 돌로 치려 이고니온 사람들이 동원됨
행 14:21   다시 방문 함
행 18:23   3차 전도 여행시도 방문하였을 것으로 추정
 
루스드라(Lystra)
현재명: Zoldera, Hatun Saray근처, hsi에서 남쪽으로 24마일(약 40km)
루가오니아의 중남부 지방에 위치한 성으로서 이고니온 성에서 약 38km 남쪽에 위치해 있다.  
이곳은 소수의 로마군이 지배하고 있는 전원 도시로 로마의 북쪽지역 방어기지 역할을 하였다.  
이곳은 해상을 통한 무역을 할 수 없었으므로 그곳 주민은 주로 농사와 목축에 의존했다.  
약간의 유대인들이 살고 있었으나 회당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Robertson).  
이곳에서 디모데와 그의 어머니 유니게가 살았고(16:2,3;딤후1:5) 바울 일행은 
그들로부터 도움을 받은 것 같다.
 
(성경)
행 14:2-20 앉은 뱅이를 고치고 제우스와 레르메스라는 칭호를 받음
  안디옥과 이고니온에서 무리가 와서 바울을 돌로 쳐 죽은 줄로알고 감
행 16:1,2 바울이 2차 전도 여행중 디모데를 만나 데려감
 
 더베(Derbe)
현재명: Kerti Huyuk, Suduraya 근처
    주니퍼(Juniper)나무라는 뜻으로 루스드라에서 동남쪽으로 약 30여km 떨어진 작은 마을로 
    이고니온(현 코냐)을 연결하는 도로선상에 위치한다. 길리기아와 인접한 곳으로 로마의 
    글라우디우스 황제의 이름을 따 글라우디우스 티베라  불리기도 한다.  
    바울은 이곳에서 1차 전도 여행을 마무리 짓고 안디옥으로 되돌아  가지만  
    그 후 제2차 전도 여행 때 다시 이곳을 방문하게 된다(16:1).  
    특히  이곳은  아시아까지 바울과 동행한 가이오의 출신지로 알려져 있다(20:4).
 

(성경)
행 14:6  1차 전도여행 중 근방을 방문함
행 16:1  2차 전도여행 중 방문 디모데 만남
행 18:23;19:1 2차 전도여행 중 돌아갈 때와 3차 여행 시작할 때 방문 추정
행 20:4  바울의 조카 가이오의 고향
 
안달리아
현재명 : Attalia 
항구도시(port city)로서 버가의 서남쪽 약 26km에 위치해 있는데 이 항구도시는 
B.C. 159-138에 버가몬의 왕으로 지냈던 아탈루스(Attalus II) 왕이 건설한 것이다(Jacquier). 
바울과 바나바가 이 도시를 찾은 것은 소아시아의 남단에서 이 도시가 가장 큰 항구도시로 
인구가 많아 전도 전략상 중요하다고 판단되었기 때문으로 짐작된다.
 
수리아와 길리기아
  행 15:41 바울의 행선지는 육로를 통해 북상하여 자신의 고향인 다소를 향한 것으로 보인다.  
  고향을 1차적으로 향했다는 점에서 바나바와 흡사한 점이 있다.  
  그러나 바울이 처음 여행을 제안했을 때 첫 방문지를 재방문하자고 하였던(36절) 계획이 
  수정되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바울의 2차 여행에서 바나바의  고향인  
  구브로가 빠져있다는 것은 바나바와의 감정적 대립 때문이 아닌가 하는 의혹도 갖게 한다.   
  그러나 바나바가 구브로로 떠났기 때문에 바울이 다시 그곳을 방문할 이유가 없어졌다고 볼 수 있다.  
  또 23절에서 언급된 바처럼 예루살렘으로부터 온 편지의 수신처가  수리아와 길리기아 지방에 있는 
  기독교인이었다는 점에서도 바울의  행선지는  자연스러울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 바울이 그 지역에 편지를 전하기 위해 그 길을 택했다든가 아니면 
  직접 편지를 전해준 사실이 언급되지 않았다.  
  어쨌든 본절에 비춰볼 때  바울의 2차 전도여행은 단순히 바나바에게 처음 제안했던 것과 같이(36절)  
  1차  여행지의 재방문이 아니라 기독교를 확장하기 위한 새로운 모험과 도전을 시작하는 대장정(大長程)의 출발이었다.
 
 무시아
헬레스폰트(Hellespont) 해협의 남쪽에 위치하고 있다.  
성경을 통해 보면  바울이 이곳에서 활동했다는 기록은 없는데 전승에 따르면  오네시보로(Onesiphorus)에  
의해 기독교의 영향을 받았다고 전해진다.

(성경)
행 16:7,8 바울과 실라가 2차  전도여행을 한 곳
 
다소
현재명: Tarsus
앗시리아의 왕 살단아팔루스(Sardanapalus)에의해 건설되었다. 
안디옥에서 북서쪽으로 약 12.9Km의  거리에  위치한 길리기아(Cilicia)의 중요한 도시로 무역이 성행했다. 
지중해를 중심으로 중계(中繼) 무역을 했으므로 헬라 철학을 비롯한 헬라 문화가 이곳에 자리를 잡았다. 
학교들이 발달하여 아테네아 알렉산드리아에 견줄만 하여 '비범한 도시'로 불렸다.  
그리고 이곳은 사울의 고향이기도 하다. 바나바는 이 곳에 있던 사울을 찾으러갔다. 
그가 간 뚜렷한 이유에 대해 밝히지 않고 있지만 안디옥 교회를 바나바 혼자 이끌 수 없었고, 
대상이 이방인이라는 점에서 이방인을 위해 부름받은(갈 1:16) 사울의 도움을 요청하기 위해 간 것으로 보인다.
 
(성경)
행 21:39;22:3 바울의 출신지
행 9:30  바울의 피신처
행 11:25  바나바가 바울을 데리려 간 곳
 
(알레산드리아) 드로아
현재명: Odun Iskelesi
주전 4세기 아티고누스(Antigonus, 알레산더의 장군중 한 명)에의하여 건설되어 
주전 133년에 로마의 지배를 받게되었다. 드로아는 미시아(Mysia) 해안가, 
소아시아 북서쪽에 위치한 고대 트로이(Troy)에서 가까운 곳에 위치한 도시이다(북쪽으로 약 4마일). 
여기서 아시아쪽을 전도하고 싶어하던 바울이 마게도니아 사람 환상을 본 뒤 유럽으로 넘어간 지점이고, 
3차 전도 여행을 거의 마쳤을 때 밤늦게까지 강론하다 위층에 졸다 떨어져 죽은 유두고를 살린 곳이다. 
또한 다른 사람들을 모두 보내고 매우 먼거리를 혼자 육지를 걸어 다음 항구(아소)까지 간 곳이다. 
   후에 콘스탄틴이 로마 수도를 삼으려다 비잔티움으로 결정한 뒤 도시가 급속도로 쇠퇴하였다. 
   주후 1세기 헤로데스 아티쿠스가 증여한 목용탕이있으며 펴허가 된 성벽들이 남아있다.
   대부분의 석조물들은 새 수도 건설물로 이용되었다. 현재는 많은 폐허가 해안을 덮고있고 숲이 우거져있다.
 
(성경)
행 16:8-11 바울이 이리와서 우리를 도우라는 마게도니아인 환상을 보다
행 20:5-13 바울이 7일동안 머물며 말씀을 가르친 곳, 유두고를 살림
고후 2:12 바울이 복음의 문이 열렸으나 디도를 못 만나 마게도냐로 가다
딤후 4:13 바울의 겉옷과 책이 있는 곳
          
골로새
현재명: Honas 
  바울 당시보다 수 백년 이전에, 골로새는 소아시아(현재의 터어키)의 주도적인 성읍이었다. 
  골로새는 루카스 강가에 위치해 있었으며, 에게해 해변이 에베소에서 유프라테스 강에 이르는 
  동서의 큰 무역로 상에 위치해 있었다. 주후 1세기에 이르러 골로새는 제 2류의 상업 도시로 축소되었으며, 
  그 이웃 도시인 라오디게아와 히에라볼리(4:13 참조)에게 세력이나 중요성에 있어서 오랫동안 눌려왔었다.
    주요 산업은 직물업으로 '골로시누스(colossinus)'라는 직물이 있을 정도로 유명하였고 
    해안에서 동쪽지방으로 이어주는 무역로는 이도시가 지속적인 발전을 하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많은 유대인들이 이 주변에 살고있었다(성전세를 낸 수치를 기준하면 약 7,500명의 유대 자유인이 이 주변 지역에 있었다).
  그러나 신약시대에 골로새가 중요시된 것은 바울이 에베소에서 3년간 전도하는 동안 
  에바브라가 회심하여 복음을 골로새에 전달한 사실 때문이었다(1:7,8; 행 19:10 참조). 
  이때 아직도 연륜이 오래 되지 않은 이 골로새 교회는 이단들의 공격 대상이 되었기 때문에 
  에바브라가 로마에 있는 바울을 방문하게 되었으며, 이로 인해 결국 바울이 골로새서를 쓰게 되었던 것이다.
  에바브라나 바울에 의해 개종된 다른 어떤 신자의 노력 결과로 라오디게아와 히에라볼리에도 
  교회가 이미 세워졌었다. 그 교회들 중의 어떤 것들은 가정 교회였다(4:15; 몬 2절 참조). 
  그런데 그 교회 구성원 대부분은 이방인들이었다.
 
(성경)
골 1:2  바울이 서신을 보낸 곳
골 1:7  에바브라가 복음을 가르친 곳
골4:9; 몬 1:22 빌레몬과 오네시모가 살았던 장소 
 
밀레도
밀레도(Miletus (Miletum,))는 에베소에서 약 50km떨어진 곳에 위치하여 그리스에서 시리아로 가던 
바울이 에베소 장로들을 모아 고별설교를 하던 곳이다. 항구 도시로 고대 이오니안의 수도였다. 
민델(Meander)강의 하구 근처에 위치한 방어가 용이한 반도에 위치였다. 
그러나 강하구에 밀려내려온 침적토가 쌓여 도시가 기울기 시작하였다. 
주전 11세기에 트로이의 동맹군인 카리아(Caria)인에 의해 거주되다 이오니아 연맹 12개 도시중 
가장 활발한 도시가 되었다. 진취적인 밀레도 이주민 중에는 금양모를 찾으러 나간 
아고나트스(그리스신화)도 있었다.  많은 전쟁과 정복이 있었고 가장 큰 정복은 그 도시를 바닥까지 
휩쓸어버린 페르시아인의 침략이었다. 밀레도는 본토인 히포데무스에의하여 재건되었다. 
바울당시 큰 유대인 공동체가 있었고 비잔틴시대에는 항구가 막히면서 급속도를 쇠퇴하였다. 
많은 헬라와 로마 비잔틴 시대 유적을 볼 수 있다: 거대한 극장, 델피온-아폴로 신전, 아고라, 
목욕탕, 경기장, 의회, 그리고 몇 개의 항구등. .
 
(성경)
행 20: 15-38 바울이 고별 설교를 한 곳
딤후 4:20 바울이 병들은 드로미모를 이 곳에 남겨 놓음
 

무라(Myra)
현재명: Demara
오래된 지중해안 도시로 안탈리아에서 남서쪽으로 125km떨어진 곳에 위치한다. 
무라 항은 애굽에서 오는 곡물을 로마로 보내는 항구로 유명했으며 무라 성읍은 항구로부터 내륙쪽으로 
약 3.2 Km거리에 있었다. 현재는 뎀라마을에서 흔적을 찾아복 수있고 아폴로 신전이 재건되어있다. 
비잔틴 시대에 성 니콜라스(Nicholas) 무덤 주변은 기독교인의 중심지가되었다. 
니콜라스는 2세기 디오클에티안 황제 핍박에 순교(?)한 크리스마스에 인기있는 산타클로스이다. 
그는 어린이와 선원을 위하는 수호성인으로 러시아에 알려졌다. 
그의 무덤은 비잔틴 폐허위에 지어진 성 니콜라스 교회 지하에 위치한다.

(성경)
행 27:5-6 바울이 로마로 호송되던 중 들려 알렉산드라행 배를 타다
 

히에라볼리(Hierapolis)
현재명:Pambuk-Kale, "Cotton Castle"
 브루기아(Phrygia)지역에 위치한 아나톨리아 평야의 서쪽지역에 있는 도시로 오늘날은 
 터키 제일의 온천인 파묵칼레 위쪽에 폐허로 남아있다. 
 특별히 로마시대에 번성하였고 유대인 공동체도 위치하였다. 
 빌립사도는 주후 80년 여기에서 순교하였고 비잔틴 시대에 이 도시가 주교가 있는 
 교회로 되었을 때 그를 위하여 큰 교회를 건축하였다. 
 교회 옆에는 많은 로마시대 유적- 목욕탕, 15,000명을 수용하는 극장, 아고라, 신전등-들이 위치한다. 
 히에라볼리는 특별히 로마시대동안 다양한 모양으로 꾸민 대규모 공동묘지로 유명하였다. 
 주요 요새는 11/12세기 비잔틴 흔적들이다.
 
(성경)
골 4:12,13 에바브라가 사역한 지역
 
* 참고 *
그리스 신들
 
 
 
구약지역
하란
현재명: 하란
하란이라는 지명은 히브리어 '마른'이나 아카드어 '도로'라는데서 유래하였다. 
하란은 '밧단'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기도하는데 (창 48:7) 하란과 같은 '도로'라는 의미이다. 
리브가가 있었던 '나홀의 성'은 현재의 셀루기(Seruj)로 하란에서 서쪽으로 55km떨어진 
틸나히리(Til-Nachiri)로 추정된다. 유브라데강스의 지류인 벨릭(Belik)강변에 위치하여 아브라함이 떠나온 
우르와는 940km 정도떨어진 곳이다. 이곳은 동서를 잇는 대상(隊商)로였다. 
 
주전 18/9세기, 갑바도기아 문서(Kultepe texts)의 앗시리아 상인의 사업편지와 법적인 문서에 
하란은 당시 중요한 교차로였다고 기록되어있다. 하란의 에훌훌(E-HULHUL)라 불리는 신전은 
메소포타미아의 달신, 신(Sin)을 섬기는 중심지였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신의 조상이 하란 주변에 살던 
셈족속이아니라 유랑하는 아람족속임을 고백한다(신 26:5). 그리고 아브라함은 하란 땅을 자신의 고향이라 부른다(창 24:4).  
갑바도기아 서판, 마리문서, 함무라비법조문등을 보면 아브라함때 하란은 
후리아인(Hurrian)과 아모리인들의 요소가 수메르-아카드인 기초하에 혼합된 문화를 가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함무라비때(주전 1728-1686)는 하란은 아모리 왕 앗디타킴(Asdi-takim)하에 있었다. 
마리문서에의하면 하란의 뫙들과 잘마쿰(Zalmaqum)의 왕들, 베냐민족의 족장들과 장로들이 
라란의 달신전에서 조약을 제결했다고한다. 아닷니라리 1세(주전 1307-1257)는 하란에 망대를 세웠고 
디글랏빌레셀 1세(주전 1115-1077)는 달신전을 꾸몄다. 하란은 왕하 19:12와 사 37:12에 
앗수르왕 산헤립이 히스기야 왕에게 보내는 편지가운데 언급된 것같이 
-"내 열조가 멸하신 열방 곧 고산과 하란과 레셉과 . . .", 앗수르왕 앗술단(Asshur-dan) 
3세에의하여 주전 763년 멸망하였다. 이 도시는 사르곤 2세(주전 721-705)에의하여 재건되었고 
엘삿핫돈(605)에의하여 신전이 수리되었다. 하란은 바벨론에의하여 앗수르의 수도 니느웨가 함락되었을 때 
3년간 앗수르의 수도역할을 하다가 주전 609년에 함락되었다. 바벨론은 달신전을 재건하였고 
그 제사장으로 나보니두스(Nabonidus)의 어머니를 임명하였다. 에스겔서에 두로와 함께 하란은 
유명한 상업도시라고 말한다. 그리스와 로마에는 칼래(Carrhai)로 알려졌다. 
 
(성경)
창 11:31   아브라함의 아버지 데라가 죽은 곳
창 12:4,5  아브라함이 가나안을 향하여 떠나다
창 24:10   아브라함의 종이 이삭을 아내를 찾으러 간 '나홀의 성' 근처(혹은 동일)
창 27:43;29:4-35   라반이 머물고 야곱이 찾아가 20년을 살았던 지역
왕하 19:12;사 37:12 앗수르에의하여 멸망된 성
겔 27:23   두로와 함께 무역한 도시
 
창 24:10  나홀의성에 이르러 
  아브라함의 동생  나홀(15절;11:26)이  거주하던  성읍  곧 메소포타미아의  하란에  도착하였음을 가리킨다(28:10). 
  하란과 가나안의 브엘세바는  20여일이 훨씬 더 소요되는 먼 길 (약800km)이다(하란에서 가나안 입구까지는 약 480Km정도의 거리).
 
창 31:40  내가 이와같이 낮에는 더위를 무릎쓰고 밤에는 추위를 당하여. . .
 하란은 아라비아 사막의 북쪽에  위치했기 때문에 낮과 밤의 일교차(日較差)가  극심했다(시 121:6;렘36:30). 
 그렇기 때문에 이 말은 인간의  한계를 벗어날 정도의 혹독한 더위와 추위 속에 몸서리쳤던 
 야곱의 북받힌 감정을 잘 드러내 준다. 한편  여기서 '더위'(br,xo,호레브)란  땅이 말라  
 갈라질 정도의  한재와  그러한 폭염  및 열기를  가리킨다(욥30:30;사 25:5). 
 그리고 '추위'(xr;q, 케라흐)란 원래 '매끈하다'는 의미로 얼음을 나타내는 말로서 영하의 날씨를 암시한다(욥38:29)
 
갈그미스(Carchemish )
현재명: 니므룻 다그
현재 앙카라에서 동쪽 800km 지점, 해발 2150m에위치한 갈그미스는 그모스(Chemosh)의 요새로 
유브라데스강 상류 서쪽편에 위치한다(렘 46:2 대하 35:20) 유브라데스강 높은 곳에 위치하여 
유브라데스 도로를 관장하는 히에라볼리로 추정된다. 한 때 헷 왕국의 수도였고 
나보포라살(Naopolassar)의 아들 바벨론 왕 느브갓네살이 이집트의 왕 바로 느고를 대파한 장소이다(주전 607년) 
그것은 주전 1600년의 비문에서 발견되었다. 주전 717년에 함락되었다. 그 후 주전 1세기 콘마게네(셀류시드) 왕 
안티오쿠스 1세의 무덤을 거대한 신상과 함께 이곳에 세웠다. 
    산 정상에는 원추형의 바위로된 언덕이 있고 그 동쪽과 서쪽에는 다섯 개의 신상이 있다. 
    신상 양쪽에는 독수리와 사자상과 제우스와 아폴로등의 신상들과 함께 안티오쿠스의 상동있다.
 
(성경)
대하 35:20 유브라데 강가에있는 도성
사 10:9  앗시리아 왕 사르곤이 점령하다
대하 35:20 이집트 바로 느고가 앗시리아를 도우려 올라간 성
렘 46:2  바로 느고가 바벨론에게 패한 장소

 
 
* 교회사의 중요 도시들 *
 
니케아(Nicaea)
현재명: 이즈닉, Iznik
이즈닉 호수의 동쪽면에 위치한 이즈닉 마을이 고대 니케아이다. 
니케아는 제 1회 세계 종교회의가 있었던 장소이다. 
전설에따르면 니케아는 포도를 재배하는 방법을 알려준 디오니수스(Dionysus) 신에의해 세웠졌고 
그래서인지 지금도 주변에 포도원을 많이 볼 수 있다. 주전 316년 리시마쿠스가 이 도시를 정복하고 
그의 아내 이름을 따라 니케아라 불렀다. 아랍, 비잔틴 오토만, 
20세기 그리스등 나라에의해 부셔졌던 성벽은 여전히 현 도시의 대부분을 두르고 있다. 
 
   니케아인으로 제일 유명한 인물은 니케아의 힙파쿠스(Hippachus, 주전 146-126)인데 
   그는 육안으로 볼 수 있는 108개의 별에대한 목록을 만들었다. 
   그는 천문학을 하란과 에뎃사의 선생들에게서 배웠고 경도와 위도의 교차점을 이용하여 위치를 밝히는 
   과학적인 방법을 발명하였다. 그는 또한 달과 지구의 크기를 측정하기위하여 시차(視差, parallax)를 이용하였다.
 
   초기 기독교의 성장에대하여 딜레마에 봉착했던 비두니아의 총독, 플리니(Pliny)는 트라얀(Trajan) 황제 때 
   니케아에 머물렀다. 그는 자신의 지역 기독교인에대한 보고를 했고 트라얀은 자비와 권위에 대한 충성을 동시에 요구하였다.
   플리니는  자신의 보고서에서 기독교인들은 동이 트기 전 함께 모여 그리스도가 마치 신이기가 한 것처럼 찬양하며 
   절도와 간음과 기타 부도덕한 범죄를 범치 않기로 다짐하는 비밀집회를 가졌고, 
   플리니가 이 집회를 금지하였을 때도 계속해서 '천하고 과도한 미신행위'를 계속하였다고 한다. 
   트라얀 황제는 기독교인에대한 법적 절차가 정립되지 않았고 죄의 성격을 볼 때 
   국가가 많은 시간과 정력을 낭비하면서까지 색출해야할 극악한 것이아니기에 고발이 접수되었을 때만 
   수사하고 그때도 신들에게 예배하지 않을 경우 처벌해야한다고 명령하였다. 
   이 법은 수세기동한 기독교인에대한 로마의 입장으로 굳어졌다.
 
   이즈닉의 주요 교차로에 성 소피아 박물관이 있다. 이 건물은 789년 제 7차 종교회의가 열렸던 장소이다. 
   폐허는 유스티안시대의 기초를 포함하고 있고 1331년 회교사원으로 되었다가
   15, 16세기에 불에타서 폐허로 있다가 터키과 그리스 전쟁 때 마지막으로 불탔다. 
   끝이 잘라진 회교사원 탑은 매년 봄마다 찾아오는 황세의 보금자리가 되었다. 
 
   제 1차 종교회의는 호수변에 있는 콘스탄틴의 궁전에서 열렸다. 
   궁전의 돌들은 도시의 남서쪽 모퉁이가 물에 침수되었음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이 건물의 모양을 추정하기 어렵다.
 
   16세기에 이즈닉의 도자기공들은  터키에서 가장 아름다은 타일을 만든는 사람들이었다. 
   색채감과 예술성있는 디자인에 더하여 토마토 색은 특이한 것이다: 
   1560-1620년에 이즈닉에서 생산된 타일에서만 이 색이 나타난다. 아일렌드 학자에의하면 
   이 이 기술은 1580년 로도스에 가기까지 했으나 이 색의 비밀 전수가 중지되면서 
   이 색은 더 이상 만들어 지지않았다. 어떤이들은 그 재료가 고갈되어 전수되지 못했다고 하나 
   아직 수수께끼로 남아있다.  이 타일은 이스탐불의 토카프 궁전 벽과, 이스탄불의 사원, 
   에딜렌의 셀리미예 사원에서 볼 수있다. 이즈닉의 고고학 발물관에서는  동전들과 석관과 함께 이 타일들을 잘 볼 수 있다.
 
칼케돈(Chalcedon)
현재명: Kadik y
현재 유럽 이스탐불, 옛 비잔티움 건너편 아시아 해안에 있는 이 도시는 전설에 따르면 비잔티움보다 
더 오래 전부터 사람들이 거주하였다고 한다. 어떤이들은 말하기를 이 곳에 사는 사람들이 
뭘 모르는 사람들이라 말하지만 많은이들이 그곳이 아시아 곧 메카에 가까운 지역이라 선호한다고 한다.
 
   성 유페미아(Euphemia,) 교회(아마 알트 욜(Alt  Yol)의 교차로 근처에 위치)는 
   451년 제 4차 종교회의(칼케톤 회의)가 열렸던 장소이다. 
   이 회의에서 로마 카톨릭과 그리스 정교에서 아르메니안과 시리안 정교회가 분리되었다. 
   건물의 돌들은 16세기 이스탄불의 거대한 사원인 슐레이만 사원을 짓기위해 사용되었다.   
   현재 도시는 부산한 도시로 변해있다.
 
콘스탄티노플(비잔티움)
현재명: 이스탄불
이스탄불은 종교적으로 가장 중요한 장소중 하나이다. 
신화에 관계된 장소로부터 성, 소피아 성당과 슐레이만 대제의 사원등, 
유대인과 기독교인, 회교도 사회가 공존하는 장소이다. 
주민들은 이교도, 혼합종교등 복장하고 말썽이 많은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종교와 정치에있어 오만하고 임시방편적이었다. 
이런 점중에도 이스탄불은 동서양의 문명뿐아니라 지리적인 다리역할을 한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이스탄불 재교는 유럽과 이시아를 이어준다. 고대 도시는 5세기의 성벽으로 둘러져있으며 
   현대 도시는 아시아 쪽까지 포함하는 넓은 지역으로 확대되었다. 
   이 곳에 대한 첫 번째 기록은 비자스(Byzas)라는 지도자와 그이 추종자들이 
   주전 667년 메가라(Megara)에서 현재 에라글리오 포인트(Seraglio Point)라 불리는 
   엄지 모양의 땅을 점령한데서 찾아볼수 있다. 
   후에 비잔틴의 주민들은 로마의 황제 콘스탄틴의 이름을 따라 도시의 이름을 
   콘스탄티노플이라 바꾸었다(주후 330년). 
   1100년동안 (리틴이 점령한 1204-1261년을 제외하고) 동로마 제국의 수도였고 
   서방 문명의 본보기였다. 무슬렘 터키인 슐탄 메흐메트 2세가 1453년 이 도시를 점령하면서 
   오토만 제국의 수도가 되었고 터키 공화정이 1923년 들어서 앙카라로 수도를 옮기기까지 계속되었다. 
   정치적인 상황이 변하였을 찌라도 이스탄불은 전세계에 영향을 계속 미치고 있다. 
 
   지리적으로 이스탄불은 많은 여행자들을 위하여 4개의 역사적인  주요 지역로 구분된다. 
   이들은 많은 비잔틴시대와 오토만 시대를 포함한다: 
   1) 성벽으로 둘러있는 고대 도시, 
   2) 황금나판의 불쪽 보스포루스의 유럽인 쪽에 놓은 '신도시', 
   3) 말마라 와 보스폴루스를 따라 북쪽으로 펼쳐진  칼드큐이(Kad k y)를 포함한 아시아쪽 이스탄불, 
   4) 말마라(Marmara) 바타에있는 공주 섬(the Princes' Island)이다. 
     또한 7개의 언덕으로 나누기도 하는데, 
     첫 번째 언덕에는  소피아 사원과 토카프 궁전, 청색 사원(Blue Mosque), 
     두 번째 언덕에는 덮여진 바잘(Covered Bazar) 불탄 기둑과 
     투루오스카니예 카미이(Nuruosmaniye Camii)가, 
     세 번쩨 언덕에는 이스탄불 대학과 슐레이만 대제의 사원 부속건물들이 있다. 
     네 번째 언덕은 슐탄 메흐메 2세의 신앙 사원으로 둘러있다. 
     다섯 번째는 세림 2세의 사원, 
     여섯 번째 언덕 정상은 도시 성벽의 에딜네(Edirne) 문이 있다. 
     일곱 번째 언덕은 한때 주방 정원이었던 장소이다. 
     좁은 보스포루스의 양쪽을 오가는 페리들은 동서양을 오가며 배들로 아마 세계에서 가장 바쁜 부두일 것이다. 
     말마라 해의 공주 섬과 이스탄불 북쪽의 흑해 도시들은 유명한 해수욕장이다. 
 
유적들은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고대 종교 장소
1. 세펜틴네 기둥(Sepentine Column): 한 때 델피에 있던 아폴로 신전 기둥이었다. 
   주전 479년 페르시아 전쟁에대한 기록이 적혀 있으며 콘스탄틴 대제가 옮겨 놓았다.
2. 고트(Goths)의 기둥: 고트 종과의 전쟁 승리를 기념한 것.
3. 성 이레네 성당의 기초는 아프로디테의 신전이었을 것으로 추정
4. 불탄 기둥: 콘스탄틴의 이교도와 기독교인 모두를 기쁘게하기위한 정치적인 행동으로 
   많은 종교적인 모습을 나물에 조각해 놓았다.
5. 갈라타에있는 성 죠오지 교회: 아프로디테 판데모스의 신정 장소 추정
6. 돌마바흐체 계곡: 아폴로 신전
7. 루메리 히살(Rumeli Hisar) 성 아래 계곡이 신전이었을 뿐아니라 그 언더게 허메(Hermes) 신전이 있었다.
 
기독교 장소들
1. 성 이레네 교회: 2차 종교회의(381)가 열렸던 장소
2. 성 소피아 성당: 넓이와 높이에서 당시 최고의 성당이었고 기독교 회교인에게 모두 중요한 장소이다.
3. 세례 요한 수도원(St. Jhn the Baptist of Studius) 
4. 성 세르지우스와 성 바쿠스 교회: 져스티안과 테오도라에 의해 527년 지어짐
5. The Kyriotissa church
6. Church of St, Marry of the Mongols
7. Church of St.. Savior in Chora
8. Church of the Virgin Pammakaristos
9. Church of St, George
10. Zoodochus Perge
11. Church fo St. Marry(시리아 정교회)
 
다수의 회교 장소와 박물관이 유명하다.
 
세계 종교회의들
1. 제 1차 종교회의 
연대: 325년
장소: 니케아의 콘슨탄틴의 궁전
내용: 니케아 신경: 예수님은 참 하나님이며 본질상 하나님과 하나이다. 교회는 이 고백을 거부하는 아리우스 파를 추방한다.
 
니케아 신경
우리는 눈에 보이거나 보이지 않는 일체의 사물들의 창조주인신 전능하신 성부, 한 하나님을 믿는다. 
또한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니, 하나님의 아들이시오, 성부의 본질로서 비롯된 하나님의 독생자이시며, 
하나님의 하나님이시오, 빛 중의 빛이시오, 
진정한 하나님이시니 그는 창조되지 않고 성부과 동일 본질로서 잉태되셨으니, 
그를 통하여 천상과 지사의 만물이 창조되었고 그는 우리 인간들과 우리들이 구원을 위해 이 땅에 내려 오셔서 
인간되심으로 고난을 받으시고 제 3일에 부활하시어 승천하셨으니 산자와 죽은자를 심판하러 오실 것이다. 
우리는 또한 성령을 믿는다. 
그러나 그가 존재하지 않을 때가 있었다고 말하는 자들, 잉태하기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자들, 
혹은 무에서 그가 비롯되었다는 자들, 혹은 하나님의 아들이 서로 다른 본질, 
혹은 정수(essence)라고 주장하는 자들, 
혹은 그가 창조되었거나 변화 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자들을 보편 교회는 저주하는 바이다.
 
2. 제 2차 종교회의 
연대: 381
장소: 콘스탄틴노플의 성 이레네(평화) 교회
내용: 니케아 신경의 재확립- 특히 삼위일체 교리 확림: 성부, 성장, 성령은 한 본질을 가진 세위(persons)이시다.
주창자들: 알렉산드리아릐 아다나시우스,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 가이사랴의 대바실, 그의 형제 니사의 그레고리.
 
3. 제 3차 종교회의
연대: 431
장소: 에베소의 이중 교회(Double Church/ 마리아 교회)
내용: 그리스도의 인성과 신성문제: 당시 콘스탄티노플의 주교였던 네스토리우스(원래 안디옥 주교)가 주장한 
 인성과 신성이 구별된다는 견해가 이단으로 확정됨
 
4. 제 5차 종교회의
연대: 451
장소: 칼케톤의 성 유페니아 교회
내용: 라틴 교회와 동방교회는 한 위이신 그리스도가 진정한 하나님이시오 진정한 사람이라는 것을 선포함. 
당시 참석치 않았던 동방 정교회(아르메니안, 시리안 정교회)는 혼성 본질을 주장하여 교회의 분리가 일어남. 
기독교가 멀리전파되며 문화와 언어의 차이가 점점 심하여져 의견통일은 점점 어려워져갔다.
 
5. 제 5차 종교회의
연대: 553년
장소: 콘스탄티노플의 성 소피아 교회
내용: 유스티안에의하여 모여진 회의는 그리스도의 본성에대해 재 확립
 
6. 제 6차 종교회의
연대: 680-681
장소: 콘스탄티노플의 성 소피아 교회
내용: 그리스도의 본질에대한 더 많은 토론
 
7. 제 7차 종교회의
연대: 787
장소: 니케아의 성 소피아 교회
내용: 아이콘(성화) 논쟁: 성화가 기독교 문화에서 사용될 수 있다고 하였으나 결국 서방교회(라틴)와 
동방 정교회의 분열이 발생하였다.
 
(알레산드리아) 드로아
현재명: Odun Iskelesi
주전 4세기 아티고누스(Antigonus, 알레산더의 장군중 한 명)에의하여 건설되어 주전 133년에 로마의 지배를 받게되었다. 
드로아는 미시아(Mysia) 해안가, 소아시아 북서쪽에 위치한 고대 트로이(Troy)에서 가까운 곳에 위치한 도시이다(북쪽으로 약 4마일). 
여기서 아시아쪽을 전도하고 싶어하던 바울이 마게도니아 사람 환상을 본 뒤 유럽으로 넘어간 지점이고, 
3차 전도 여행을 거의 마쳤을 때 밤늦게까지 강론하다 위층에 졸다 떨어져 죽은 유두고를 살린 곳이다. 
또한 다른 사람들을 모두 보내고 매우 먼거리를 혼자 육지를 걸어 다음 항구(아소)까지 간 곳이다. 
   후에 콘스탄틴이 로마 수도를 삼으려다 비잔티움으로 결정한 뒤 도시가 급속도로 쇠퇴하였다. 
   주후 1세기 헤로데스 아티쿠스가 증여한 목용탕이있으며 펴허가 된 성벽들이 남아있다. 
   대부분의 석조물들은 새 수도 건설물로 이용되었다. 현재는 많은 폐허가 해안을 덮고있고 숲이 우거져있다.
 
(성경)
행 16:8-11 바울이 이리와서 우리를 도우라는 마게도니아인 환상을 보다
행 20:5-13 바울이 7일동안 머물며 말씀을 가르친 곳, 유두고를 살림
고후 2:12 바울이 복음의 문이 열렸으나 디도를 못 만나 마게도냐로 가다
딤후 4:13 바울의 겉옷과 책이 있는 곳
 
 
 
참고서적
곤잘레스, J. L. 
   1987  초대교회사. 서영일역. 서울: 은성출판사.
 
유승삼(펴낸이)
   1997  세계를 간다. 터키. 그리스. 에게해, 해외여행가이드 22. 서울: 중앙 M & B.
 
Douglas, J. D.(ed.)
   1978  The New International Dictionary of the Christian Church. Michigan:Zonderna 
  Publishing House
 
Freedman, D. N.(ed.)
   1992  The Anchor Bible Dictionary, Vol 1-6. New York:Doubleday.
 
Gonen, R.
   1994  Biblical Holy Places; an Illustrated Guide. Jerusalem:Palphot LTD.
 
(성경자료모음 3.0a -호크마주석. 서울: 미래목회연구원, CD-ROM; Bible Works CD-ROM)
 
  
 
가자! 신앙의 뿌리를 찾아서
터키지역 순례: 
아브라함의 고향, 하란; 바울의 선교지; 7교회
 
 
주를 섬겨 금식할때에 성령이 가라사대 내가 불러 시키는 일(선교)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하시니 이에 금식하며 기도하고 두 사람에게 안수하여 
(선교지-현재의 터키지역 중심)보내니라.
(사도행전 13:2-3)
 

기간: 1998년 3월 17일(화) -27(목)
 
 
 
97.11.16. 이문범 제공
고린도
 
요약편
   
   바울 당시에 고린도 성읍의 인구는 자유인이 약 250,000명, 노예가 400,000명이었던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숫자상으로 고린도는 헬라의 중심 도시였다.
 
  1. 상업 - 고린도는 고린도 지협의 바로 외곽에 위치해 있었기 때문에 여행자들과 상인들의 교차로였다. 
               고린도에는 두 개의 항구가 있었다. 
               (1)하나가 겐그리아로서, 사론 만(Saronic Gulf) 동편 7.2km 지점에 위치해 있었고, 
               (2)또 하나는 레기움(Lechaiom)으로서, 고린도 만 서편 2.4km 지점에 위치해 있었다. 
                   상품들은 디올코스(Diolkos) 지협을 통해 운반되었는데, 
                   작은 선박들은 짐을 가득히 실은 채 도로 위로 지협을 가로질러 운반되었으며(길 위에로 당겨져 옮겨졌음), 
                   큰 선박들의 짐들은 이편에서 저편으로 수레에 실려 운송되었다. 
                   이달랴(이탈리아)와 서바나(스페인)에서 오는 상품들은 고린도를 통과하여 서쪽으로 이송되었으며, 
                   소아시아와 베니게(페니키아)와 애굽(이집트)에서 오는 상품들은 고린도를 통과하여 동쪽으로 이송되었다.
 
  2. 문화 - 물론 고린도가 아덴(아테네)과 같은 학문적인 도시는 아니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린도는 전형적인 헬라 문화의 특색을 지니고 있었다. 
               고린도 시민들은 헬라 철학에 관심을 갖고 있었으며, 지혜를 높이 평가했다.
 
  3. 종교 - 고린도에는 적어도 12개의 신전들이 세워져 있었다. 
               그 신전들이 바울 당시에 모두 사용되고 있었는지의 여부는 확실하게 알려져 있지는 않다. 
               그 신전들 중에서 가장 지독한 것 중 하나는, 사랑의 여신인 아프로디테 신전이었는데, 
               이 여신의 숭배자들은 종교적인 매음행위를 자행하곤 하였다. 
               고린도에 있는 극장의 북편으로 약 400m 쯤에 치료의 신인 아스클레피우스 신전이 서 있고, 
               주전 6세기에는 도시의 중앙에 아폴로 신전이 서 있었다. 
               유대인들은 이 도시에 하나의 회당을 세웠는데 글자가 새겨진 회당의 인방 돌이 옛 고린도의 박물관에 전시 중이다.
 
  4. 고린도 성의 부도덕성 - 당시 큰 상업 도시가 그러했듯이, 
    고린도 성읍도 개방적이고 무절제한 부도덕의 중심지였다. 
    더구나 아프로디테 여신의 숭배로 말미암아 매음행위가 종교의 미명하에 더욱 성행되고 있었다. 
    한때는 1,000명의 성별된 창녀들이 아프로디테 신전에서 봉사하고 있었다. 
    이처럼 고린도의 부도덕성은 널리 알려져 있었기 때문에, 
    '고린도인화 하다'라는 헬라어 동사는 '성적 부도덕을 행한다'는 것을 의미하게 되었다. 
    이와 같은 배경에 비추어 볼 때, 고린도 교회에 많은 성적인 문제들이 있었다는 사실은 하등에 이상할 것이 없다.
 
                                            NIV Study Bible 서론 고린도전서 서론 중에서.  
 
 이문범 제공
고린도 II
 
J. Murphy-O'Connor
 
   그리스의 펠로포네스 해안에 위치한 고린도(북위 35도56분, 경도 22분 56분)는 
   바울이 아굴라와 브리스길라를 만났고 말씀을 전하고 가르치려고 18개월을 머물렀던 도시이다(행 18:1-18)
 
   가. 지리적 배경
   첫 번째 정착민들은 물이 풍족하고 주변지역에서 우뚝솟아 기름진 평야지대를 감독하고 
   적의 공격으로부터 방어가 용이한 고린도의 아크로폴리스, 해변에서 203km 떨어진 바위산을 선택하였다. 
   그러나 우리가 보는 번성한 고린도는 해안 평지에서 고린도의 아크로폴리스지역(Acrocorinth, 575m)까지 
   두 개의 계단식 평지에 형성되어 4km2정도의 넓이를 가진다. 
   이 도시는 고린도 아크로폴리스에서 내려오는 지협(地峽)에 의하여 동서로 경계지어진다. 
   10km의 성벽은  그 가장자리를 따라 지어져 최적의 방어선을 구축하고 
   고린도 아크로폴리스에 의해 단단히 묶여져 있다. 
   건물이 지어진 지역은 결코 성벽을 넘어서지 않았고 여분의 공간은 
   위험 시기에 사람들에게 거주공간과 식량을 제공하였다. 
    고린도의 첫 번째 항구는 레기움으로 고린도 시와 그 항구인 
    레기움을 연결하는 긴 성벽은 전체길이가 2.5km이고 각 성벽이 1.2km로 평행으로 지어져있다. 
    인공적으로 바다를 두른 항구(double port)의 넓이는 460,000m2고 부두의 길이는 7km 이다. 
    지금은 항구의 아주 일부분이 발굴되어있다(Roux 1958: 103). 고린도의 두 번째 항구는 겐그리아이다. 
    고린도 동쪽으로 9km 떨어진 사론 만에 위치한다. 
    인공적인 이 항구는 30,000m2정도 되며 큰 건물들이 북쪽 방파제위에 우뚝 솟아있고 
    네 개 구역으로 된 저장 창고들은 남쪽의 인공 방파제 안쪽을 따라서 정렬되어있다. 
    (Sacraton, Shaw, and Ibrahim 1978: 14, 41).
 
   이 두 항구를 차지하고 통제한다는 것은 펠로포네스와 그리스 본토를 연결하는 6km의 넓은 지협을 
   실질적으로 통제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들이 고린도를 고대 세계의 중요한 교차로로 만든 것이다(Strabo 8.6.20). 
   평지 가장자리의 경사지는 전통적으로 높은 생산성과 함께 부유함으로 유명하고 
   또한 동서와 남북 무역을 통한 세금 징수를 통하여 고린도의 금고는 항상 가득 찼었다. 
호머의 시대부터 고린도와 함께 한 수식어는 '부유한'이었다. 
오늘날 고린도는 고린도 운하의 서쪽 2.4km에 위치한 고린도만의 펠로포네스 해안의 작은 도시가 되었다. 
현 유적지는 1858년 지진으로 폐허가 되었다. 현대도시의 남서쪽 5.6km에 위치한 
'모든 그리스의 빛'이었던 고린도가 지금ㅊ  은 아가야 고린도지방의 가난한 도시가 되어버렸다.
 
   나. 발굴역사
   첫 번째 발굴은 독일 고고학 연구소에 의하여 이루어졌다(1886). 
   1896년 아테네의 고전 연구의 미국인 학교(American School of Classical Studies)가 
   그 장소에 대한 책임권을 따내 계속적인 발굴을 이끌었다. 서론적인 연구는 American Journal of Archeology 와 
   Hesperia에 나오고 최종보고는 '고린도'(1930-)이라는 제목으로 연재되고 있다. 
   신석기시대부터의 전시대 유물이 나왔다. 
   고린도 외의 주요 발굴은 지협(1952-60과 다시 1967-1978)과 겐그리아(1963-68)에 대하여 행해졌다.
   협곡에 대한 최종보고는 겝할드(Gebhard, 1973)와 브로닐(Broneer 1971; 1973)에 의해 출판되었고 
   스크란톤(Scranton)과 솨우(Shaw), 이브라힘(Ibrahim)은 겐그리아에 대하여 보고하였다(1978).
 
   다. 고린도의 역사
   고린도 역사는 길고 복잡하다 그러나 기본적인 구분은 주전 146년 말까지 온 
   그리스도시와 줄리아스 시이져(주전44년)에 의해 설립된 로마식민지 시대로 구분될 수 있다.
 
    500만년전의 도시의 기원과 그 연속되는 역사에 대하여는 살몬(J. P. Salmon)이 정리하였다(1984). 
    오랜 세월 고린도는 변화를 반대한다기보다는 오히려 변화를 희구하는 뛰어난 경영과 
    한편으로 예외적으로 다양하고 생산적인 경제 때문에 색다른 사회적, 정치적인 안정을 누려왔다. 
    고린도는 유명한 고린도인의 청동제품에 더하여 세라믹과 직물, 조선, 건축술이 유명하다. 
    동서 무역의 발전을 위하여 고린도와 사론만(Saronic gulfs)의 연결 운하는 주전 6세기 일찍이 논의되었다.  
    그러나 그 계획이 무효화되었을 때 페리안델(Periander 주전 625-585)은 가벼운 배가 
    한 쪽 바다에서 포장된 잘린 홈을 따라 달려서 다른 쪽 승강장으로 잡아당겨 옮겨지도록 하는 
    해협 포장도로(dilkos)를 만들었다. 해협의 서쪽에서 길이 460m되는 하나의 부두(dock)가 발굴되었다. 
    넓이는 3.4에서 6m로 다양하고 그 홈은 별도로 1.5m가 된다. 
    많은 횟수에 걸쳐 수선된 이 길은 적어도 주후 9세기까지 상품을 운송하는데 이용되었다. 
    이 편의시설은 상인들이 '말레를 지날 때는 네 집을 잊어 버리라"고 할만큼 위험하기로 이름난  
    말레 곶(Cape Maleae) 주위를 항해하는 것을 피하게 해 주었다.
 
   이러한 성공은 상대적으로 그들의 위치가 요충지가 아니고 그들이 거주지가 산업적이 아닌 
   이들의 질투를 필연적으로 불러일으킬 수밖에 없었다. 
   주전 5-4세기 아테네 작가들은 고린도를 상업화를 사랑하는 상징적인 도시로 언급하였다. 
   아리토파네스(Aristophanes)는 '간음하다'라는 동사를 가지고 '고린도인화 하다'라는 
   신조어(新造語)로 만들어내었다. 필레타에루스(Philetaerus)와 폴리오쿠스(Polichus)는 
   고린디안테스(Korinthiates), '매춘부와 노는 사람'이라는 연극을 썼다. 
   플라톤은 매춘부를 의미하는 고린디아 코레(Korinthia Kore), '고린도 소녀'라는 용어를 썼다 (Rest. 404d). 
   그러나 이런 신조어들은 지속되지는 못하였다. 
   왜냐하면 실제로 고린도는 그 동시대에 그렇게 나쁘지도 썩 좋지도 않은 도시였기 때문이다. 
   그 도시는 사랑의 여신, 아프로디테에게 드려진 도시도 아니었고 1000명의 
   성스러운 창녀들에 관한 스트라보(Strabo)의 이야기는 완전히 날조된 이야기임을 보여준다(Conxelmann 1967). 
 
   와이즈만(1979: 450-62)은 146년 고린도의 멸망으로 이끄는 사건에 대하여 잘 요약하였다. 
   로마가 두 번째 마게도야 전쟁(주전 200-196)후 그리스의 도시들에게 자유를 주고 다양한 동맹 안에서 
   연합하는 것까지 허용하였을지라도 후에 이것은 로마에게 위협이 되었다. 
   고린도가 주축을 이루고 있는 아가야 동맹을 깨고자한 로마의 시도에 대해 아가야 동맹은 
   주전 146년 스파르타를 징계하는 전쟁을 함으로서 독립을 선언하였다. 
   메텔루스(Metellus)가 세 아가야 군대를 패배시킨 후에 북쪽으로부터 해협으로 도달할 때 
   그는 사령관이라고 추정되는 루시우스 뭄미누스(Lucis Mummius) 집정관의 퇴각과 합세하였다. 
   아가야의 보루인 고린도는 노예들로부터 징집된 훈련되지 않은 14,000의 보병과
   600명의 기병으로 로마의 23,000의 보병과 3,500의 기병 그리고 원군에 대항하여야 했다. 
   전쟁결과는 예상되는 대로였다. 
 
  도시의 전리품은 목격자 폴리비우스(Polybius)에 의하여 기록되었으나 
  발굴 결과에 의하면 주전 79-77년 사이에 고린도를 방문한 키케로(Cicero)에 의해 확인된 것같이 
  도시가 완전히 멸망하거나 사람들이 멸절되거나 하진 않았다(와이즈만 1979: 494-95). 
  고린도는 비록 완전히 부셔졌더라도 천연적인 상업 중심지였고 뭄미우스는 재해을 피해 피하였던 
  시민들을 데리고 돌아왔을 것이 확실하다. 
 
   로마 식민지로서의 설립은 많은 고전 작가들이 줄리아스 시이져에 의한 공이라고 하며 
   아피안(Appian)은 카르타고의 약탈 후 102년째 주전 44년이라고 정확한 연대를 말하였다. 
   비문들은 그 새 도시의 이름을 Colonia Laus Julia Corinthiensis라고 보여준다. 
   그 도시가 로마에대한 위협 없이 1세기 넘게 평화를 되찾았기에 로마 시이져의 관심은 
   더 이상 군사적이거나 정치적인 것이 아니었다.  
   고린도의 경제적인 잠재성은 로마에도 잘 알려졌고 
   이것이 해협을 통과하는 운하를 만들려고까지 한 계획을 가졌음을 알려준다. 
 
   ***새로운 이주민의 대부분이 자유가 된 노예들이라는 스트라보의 주장은 
   그들을 '아포로이'-기회 부족으로 어떤 사회 경제적인 면에서 닫혀짐 느끼는 
   이들을 말할 때 쓰는 형용사-라고 부른 아피안(Appian)의 견해와 일치한다. 
   그러므로 그들은 로마인들이 아니라 그리스에서 온 다양한 사람들일 것이다. 
   새로운 식민지에서 그들은 가질 수 있는 모든 것을 가졌다. 멀리 이제 의미 없는 
   전 주인과 연결을 했을 것이고 그들의 자녀들은 자유를 누렸을 것이다. 
   이러한 배경아래 바울은 분열을 일삼는 고린도 교회에게 이렇게 말한다 
   1)"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고전 1:26)라고 말한다 
   2) 많은 믿는이가 아직 종의 상태에 있음을 보여준다 "
     고전 7:20 각 사람이 부르심을 받은 그 부르심 그대로 지내라 
               21 네가 종으로 있을 때에 부르심을 받았느냐 
     염려하지 말라 그러나 자유할 수 있거든 차라리 사용하라" 
   3) 출신이 안좋을수록 출신을 더욱따지기에 사도 바울이 자신의 사도됨을 더욱 강조해야했다 "
   고후 11:5 내가 지극히 큰 사도들보다 부족한 것이 조금도 없는 줄 생각하노라 
              6 내가 비록 말에는 졸하나 지식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이것을 우리가 모든 사람 가운데서 모든 일로 너희에게 나타내었노라")
   유대인, 그리스인, 로마인, 종, 자유인, 상인, 농업인등 다양한 사람들이 교회에 들어왔고 
   이들의 기독교를 보는 시각 또한 다양하여 많은 분열의 원인이 되었다 " 
   고전 1:10 형제들아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다 같은 말을 하고 너희 가운데 분쟁이 없이 같은 마음과 같 은 뜻으로 온전히 합하라"
 
집단행정에 있어서는 계획을 수행하기 위한 기술, 재정, 행정 집단이 있었다.  
그들의 기업과 공업은 비록 그들이 무덤을 약탈하는 것부터 시작하였을 찌라도 그들이 
발명한 청동 그릇과 적갈색(테라코타) 부조를 가지고 로마에 수익성 있는 상점을 빨리 만들어 번영 꾀하였다. 
전에 것에 대한 많은 수요는 약삭빠른 식민지 사람들에게 청동기 생산을 재개하도록 자극하였고 
다른 전통적인 공업들은 곧 재개되었다. 
 
   식민지가 안정된 기반을 다졌을 때 그리스와 지중해 동쪽의 주요 지방 기업가들의 관심을 끌었다. 
   주요 상업적인 상황하에 새로운 수도로 되고자하는 고취들은 더 많은 부를 산출하였고 
   설립된 지 50년도 안되어 고린도의 많은 시민들은 무시하지 못할 의미 있는 사람들이 되었다. 
   그 확실한 증거는 주전 7년에서 주후 3년사이 첫 번째 재개된 
   지협(地峽) 경기들(Isthmian Games)의 위원장으로 추정되는 L. Castricus Regulus를 기념하는
    비문에서 알 수 있다. 그는 한 세기동안 중지되었던 그 경기를 다시 재개하였고 
    고린도 모든 시민들에게 잔치를 배설하였다. 상업적인 발전은 금융의 편익을 요구하였고 
    주후 1세기 중반에는 고린도가 중요한 금융 중심지가 되었다. 
   고린도 교회는 부유하면서도 꽤나 인색하였던 듯하다 
   "고후 11:9 또 내가 너희에게 있어 용도가 부족하되 아무에게도 누를 끼치지 아니함은 
                마게도냐에서 온 형제들이 나의 부족한 것을 보충하였 음이라 내가 모든 일에 
                너희에게 폐를 끼치지 않기 위하여 스스 로 조심하였거니와 또 조심하리라" 
   마게도냐 교회들이 가난한 가운데서 연보를 풍성히 한 것을 알리면서 부유한 고리도는 
   그 체면에 맞는 보다 많은 헌금을 할 것을 요구한다. 
   "고후 9:4 혹 마게도냐인들이 나와 함께 가서 너희의 준비치 아니한 것을 보면 너희는 고사하고 
               우리가 이 믿던 것에 부끄러움을 당할까 두려워하노라"
 
   도시 확장은 그 도시가 얼마나 번영하였는가를 보여준다. 
   초기 식민지 정착자들은 옛 도시의 중심을 고대 경주장이 아직도 넓은 공간을 제공하고 있는 
   성전의 남쪽으로 옮겼다. 그 것은 공공 집회장소(forum)로 되었다. 
   남쪽 스토아, 글라우스의 우물, 피레네 샘(Peirene Fountain)같은 
   많은 고대 요소들은 통합되었고 새로운 구조물들이 급속히 등장하였다. 
   10개의 기념 건물들이 아우구스투스의 치세가 끝나기 전에 세워졌고  
   6개의 건물이 그의 승계자 티베리우스의 긴 치세동안 더하여졌다. 
   폐허가 된 성벽은 여전히 남아있었으나 단지 돌을 떠내는 채석장으로 사용되었다. 
   정치적으로 매우 안정된 시기에 성을 수선한다는 것은 완전히 비능률적인 투자로 보여졌다. 
   남쪽 스토아(시민들이 편안하게 모여 쉴 수 있는 공간으로 기둥과 지붕으로 이루어진 긴 복도형식이 일반적이다)에는
   달리기할 때 사용된 것으로 추정되는 발을 올려 놓은 출발 표시가 있다. 
   이 때문에 이 말씀은 고린도가 주최한 지협경기들과 연계하여 고린도인에게 자연스럽게 교훈되었을 것이다. 
   "고전 9:24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들이 다 달아날지라도 오직 상 얻는 자는 하나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도 얻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하라"
   많은 거물이 세워진 때를 같이하여 바울은 건축에 관계된 말씀을 자주 사용한다 
   "고전 3:10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내가 지혜로운 건축자와 같이 터를 닦아 두매
           다른 이가 그 위에 세우나 그러나 각각 어떻게 그 위에 세우기를 조심할지니라 
           11 이 닦아 둔 것 외에 능히 다른 터를 닦아 둘 자가 없으니 이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라"
 
   바울이 알았던 고린도는 로마의 베스피안 황제 때인 
   주후 77년에 지진에 의해 손상된 고린도가 아니었을 것이다. 
   제국의 도움에 의해 도시가 재건되었는데 이것에 감사하여 
   그 도시는 Colinia Julia Flavia Augusta Corinthiensis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 
   그러나 주후 2세기 초기에 본래의 이름을 되찾았다. 하드리안에 의한 세금면제는 
   주후 2세기 중반에 건축 붐을 일으켰다. 
   이런 상황은 Pausanias의 '그리스 묘사(Descripgion of Greece)'에 잘 묘사되었다.
 

   고린도에서 가장 매력적인 주거의 지역이며 휴양지는 고린도 아크로폴리스의 
   낮은 경사지위에 있는 Craneum의 부근이다. 전설에 따르면 그 곳은 견유학파의 
   디오게네스(Diogenes)가 그의 통안에 살았고 알렉산더가 그에게 오는 햇빛을 막았을 때 
   한 쪽으로 조금 움직여 주기를 요구했던 곳이라 한다. 
   ***휴양시설 대해서는 위의 버금가는 지역은 북쪽 성벽 안쪽에 있는 
   아스클레피온(Asclepieion- 치료의 신)과 Lerna 복합건물이다. 
   후기에 지어진 식당들은 
   고린도전서 8장 10절- "지식 있는 네가 우상의 집에 않아 먹는 것을 누구든지 보면 
                                그 약한 자들의 양심이 담력을 얻어 어찌 우상의 제물을 먹게 되지 않겠느냐"-에 나오는 
                                배경을 제공한 반면에 후에는 좋은 수영장들이 많이 지어졌다.
   아스클레피온 신전에는 그 신이 자신의 아픈 부위를 고쳐주는 것과 관련하여 
   많은 지체 조각품들이 실제 몸을 대신하여 드려졌다 (예: 손, 발, 눈, 유방, 머리 등)
   이는 바울이 다음과 같이 말한 배겨을 제공한다 
   "고전 12:14 몸은 한 지체뿐 아니요 여럿이니 
               15 만일 발이 이르되 나는 손이 아니니 몸에 붙지 아니하였다 할지라도 이로 인하여 몸에 붙지 아니한 것이 아니요 
               16 또 귀가 이르되 나는 눈이 아니니 몸에 붙지 아니하였다 할지라도 이로 인하여 몸에 붙지 아니한 것이 아니니 
               17 만일 온 몸이 눈이면 듣는 곳은 어디며 온 몸이 듣는 곳이면 냄새 맡는 곳은 어디뇨 . . . 
               27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 
 
   ****아가야가 주전 27년 상원의 지역으로 편성되었을 때 고린도는 
   이 지역 수도가 되었음을 추정할 수 있으나 어떤 직접적인 증거는 발견되지 않는다. 
   주후 15년 티베리우스는 아가야와 마케도니아를 모에시아의 제국 지역으로 편성하나 아가야는 
   주후 44년 글라디우스에 의하여 원로원으로 돌아간다. 
   그러므로 로마는 6월1일부터 다음해 5월 30일까지 1년 임기직의 총독을 보냈다. 
   최고로 유명한 총독은 갈리오(Lucius Iunius Gallio)이다; 
   이는 그의 개인적인 특징이나 업적 때문이 아니라 사도행전 18장 12절에 그 이름을 언급되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바울의 연대추정을 하는데 중요한 근거를 제공한다. 
   왜냐하면 그가 그의 임기를 마치기 전, 51년 여름에 바울이 고린도에서 그를 만났기 때문이다. 
 
   시정(市政)은 로마 공화정의 축소판이었다. 
   12종족으로 나눠져 있는 시민 선거인들은 4년직의 행정관을 뽑았고 퇴임자는 
   시의회의 구성원이 되었다. 이들 회의는 자유인에게 개방되었다. 
   상원의 행정장관들은 duoviri iure dicundo였고 58명의 년대(年代)가 알려졌다. 
   법률상의 의무들에 덧붙여 그들은 도시의 최고 행정장관이 된다. 
   매 5년마다 선출된 이들은 duoviri quinquennales로 알려지고 인구조사를 하고 
   도시 의회의 새 구성원으로 불리며 부가적인 임무들을 수행한다.
 
   ****그 상원 행정장관(duoviri)은 두 조영관(造營官 aediles)에 의하여 도움을 받는다. 
   그들은 도시사업 관리자 역할을 담당하고 상업과 재정 소송에 대한 업무를 맡는다. 
   주후 1세기 중반 것으로 보이는 극장 동쪽 포장구역의 비문에 에라스투스라는 이름의 조영관이 언급되었다. 
   그리고 에라스투스는 바울이 편지를 썼을 때 저급 공무원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롬 16:23 -이 성의 재무 에라스도와 형제. . .). 
   만약 그렇다면 그의 기독교 개종은 그의 출세에 큰 장해 요인이 되었을 것이다. 
 
   고린도가 수여하는 가장 큰 영예는 포세이돈의 성전이 있는 
   지협에서 매 2년 봄마다 열리는 지협(地峽) 경기의 의장(長)이었다. 
   범 헬라권에서 두 번째로 큰 이 경기는 주전 146년 시키욘(Sicyon)으로 넘어갔으나 
   새로운 식민지는 시작부터 고린도의 전통적인 권리임을 강조하였다. 
   왜냐하면 큰 경제적인 이익이 거대한 군중들로부터 흘러들어 오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고린도가 agonothetes라는 지협경기를 재정적으로 지원하는 사무소가 생길 만큼 
   고린도가 부유해 졌을 때 이루어졌다.
  ***바울은 주후 51년 이 경기에 참여하였는지 모른다; 
  고린도에 보낸 편지(고전 9:24-27)에 경기의 이미지만을 가지고 그 장면을 묘사하기란 어려울 것이다.  
  지협경기의 승리자가 시들은 셀러리(celery)로 된 관을 받는 사실은 
  바울로 하여금 영원한 면류관을 받은 구원을 생각하도록 자극하였을 것이다. 
  "고전 9:25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저희는 썩을 면류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것을 얻고자 하노라 26 그러므로 내가 달음질하기를 향방 없는 것같이 아니하고 
  싸우기를 허공을 치는 것같이 아니하여"
 
   공무원들과 수혜자들의 공급하는 정보들에 대해 사무적인 글들이 많이 발견되었고 
   켄트는 하드리안 시대(117-38)의 104 비문을 정리하였는데 그 중 101개는 라틴어로 
   단지 3개만이 그리스어로 쓰여졌다; 그 후에는 39개가 그리스어로 17개가 라틴어였다. 
   라틴어가 사무용어로 많이 사용되었을 찌라도 그 것은 사무용어일 뿐 교역과 상업용어는 
   헬라어였고 인구가 팽창할수록 구어(口語)는 헬라어가 되었다. 
   그러나 사무적 용어로서의 장려는 주후 2세기까지는 계속된다. 
 
   고린도의 종교적이고 종족적인 다양성은 유물들에 의하여 잘 그려져 있다. 
   제국의 의식은 광장(forum)바로 옆 성전에서 이행되었을 뿐아니라 지협 경기들과 관계되어있다. 
   가이사랴에서도 행해진 4년마다 열리는 경주는 아우구스투스에 의하여 열리게되었는데 티베리우스 치하에는 
   제국적인 경기도 등장하였다. 많은 성소들이 그리스의 신들인 아폴로 아테나, 
   아프로디테, 아스클레피오스, 데메텔, 코레, 팔라이몬, 시시푸스에게 제사를 드렸다. 
   이집트의 영향으로 인해 이시스와 사라피스를 숭배하기도 하였다.  
   **유대인 사회에 대한 실질적인 증거는 후에(아마 주후 4-5세기)에 나타나고 불충분하다; 
   단지 한 대리석 아치(홍예)굽에 lulab와 etrog에 의해 분리된 세 촛대(메노라)가  새겨져 있고 
   상인방으로 재 사용된 처마를 장식하는 돌에 [sina]goge hebr[aion] (회당 유대인)이 쓰여져 있을 뿐이다. 
 
   초기 기독교 시대부터 유대인들의 유적이 완전히 전무한 것은 놀라운 일이다 
   왜냐하면 필로는 고린도에 크고 활발한 유대인 사회가 있었다고 설명한다. 
   유대인들은 아마도 주전 146년 시기온(Sicyon)으로 도망했을 것이다(마카비전서 15:23). 
   그렇다면 그들은 새로운 식민지의 거주민 중에 합세하였을 것이다. 
   고린도가 주후 19년 티베리우스에 의한 로마로부터 유대인 축출로 인해 이익을 보았는지는 
   의문점으로 남는다. 사도행전 18장 2절 글라디우스의 칙령(주후 41년)에 의해 유대인들이 
   고린도에 왔다는 누가의 힌트는 상당히 회의적으로 취급된다(Murphy O'Connor 1983a: 130-40). 
   유대인 사회는 주후 67년 이후로 급속히 성장한다; 요셉푸스에 따르면 베스피안은 
   유대인 죄수 6,000명을 네로가 시작한 운하건설을 위하여 보낸다. 
   그들 대부분은 비록 많은 양의 일을 이루었을 찌라도 운하건설이 결국 오랫동안 지속되지 못하였기에 
   결국 자유인이 되었을 것이다. 다른 유대인들은 유대인 제 2차 반란 때(132-35)에 왔다. 
   고린도의 유대인들은 고린도 시민과 동등하지는 않아도 politeuma라 불리는 시민에 준하는 대우를 받았다. 
   
   그러나 사도행전 18: 4절에 "안식일마다 바울이 (고린도)회당에서 강론항고 유대인과 헬라인을 권면하니라"고 
   한 점을 보아 많은 유대인과 회당이 이미 존재하였음을 알 수 있다.
 
   현대 작가들은 식민지인 고린도의 도덕성을 주전 4세기 아테네의 작가들이 헐뜯은 말을 그대로 수용하려한다. 
   만약 우리가 크리소스톰이 단지 아덴의 상황이 더 악하다고 지적한 언급과 뱀파이어의 올가미에 있는 
   소년의 단순한 이야기 같은 논쟁이 되는 증거들을 배제한다면 남는 것은 연극을 위해 그려볼 만한  
   아풀리우스(Apuleius)의 당나귀와 성교하는 음탕한 여인 이야기만 남는다. 
   사실 이 이야기는 그리스 소설도 아니었고 고린도가 그렇게 음란에 특별한 문제를 가진다는 것은 무리가 있는 것 같다. 
   스트라보는 '모든 사람은 고린도로 항해하지 않는다'라는 속담을 
   성적인 문제와 연결을 시켰지만 호라스(Horace)는 그 진정한 뜻은 처녀성을 잃는 것이 
   위험한 것이 아니라 급격히 커지는 도시의 흉악한 경쟁에 자신의 내의를 잃어버릴 위험을 말한다고 명백히 설명하였다. 
 
   *****바울이 살기에 쉽지 않은 도시를 그의 주요 선교센터를 삼음에 있어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대한 약점을 비판하면서도 자신의 신뢰를 주장한다(고후 7장).  
   사실 고린도는 여러 위험들을 능가하는 이익들을 제공한다.  편리한 교통, 엄청난 수의 방문객들은 
   그들의 고향으로 돌아갈 때 복음을 개종하여 복음을 전파할 가능성가지고 있었다.  
   아테네는 비교적 교통이 뜸한 지역임에 반하여 고린도는 열려있었으며 
   그곳 사람들은 따지기를 좋아했다; 바울당시 기독교 사회와 바울간의 관계가 충분히 말해 주듯 
   그들은 새로운 것에 대해 쉽게 받아들이려하지 않았고 수동적이지도 않았다.
   
   
* 유적과 관련된 성경의 교훈 *
 

The Anchor Bible Dictionary I권 1134-39쪽에서 발췌함.
 
 
 아덴
아덴(Athens)은 에게해의 지류 샤론만에 위치하였으며 피라에우스(Piraeus)항구에서 약 8km 떨어진 내륙도시이다.  
북쪽으로는 파르네스 산, 동쪽으로는  펜텔리쿠스 산, 남동쪽으로는 히멧투 산이 둘러싸고 있는 
좁은 평지에 자리잡은  이  도시는 아티카의 영웅 데세우스에 의해 건설되었으며 아테네(Athene) 여신을  
기념하기  위해 '아덴'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페리클레스(B.C.495-239)에 의해 
이 도시는 전성기를 맞아 파르테논(Parthenon) 신전을 비롯한 수많은 사원과 건축물들이 건축되었다.   
아울러 문학, 철학, 과학, 수사학 등이 꽃을 피웠으며 민주주의의 기초가 내려지기도 하였다.  
그러나 펠로폰네수스 전쟁(B.C.431-404)으로 인하여 아덴은 빛을 잃었다.   
그렇지만 그 문학적, 역사적 명성은 그대로 남아 수세기 동안 지속되었다.   
바울이  이 도시를 방문하였을 때는 찬란했던 옛 영광이 사그라든 뒤였다.  
그러나 그 화려한  명성만은 계속 지속되고 있던 터라 그 도시민들의 자부심은 대단하였다.
 
 
빌립보
빌립보는 그리스의 북쪽 네압볼리(Neapolice; 신도시)에서 로마로 가는 고대도로인 
에그나티아(Egnatia) 길을 따라 북서쪽으로 약 16km 떨어진 레카니스(Lekanis) 산에 
위치한 옛 마게도냐의 수도이다. 원래 크레니데스(    i   ; '샘')로 알려진 드라게(Thrace)사람들이 
주를 이룬 마을이었으나 알렉산더 대왕의 부친인 마게도냐 왕 빌립 2세가 
이 도시에 사람들을 이동시키면서(주전 358-57) 자신의 이름을 따라 '빌립보'라고 명명하였다. 
빌립 2세가 암살되고 그 뒤를 이은 알렉산더 대왕은 도시를 증축하고 많은 사람들을 이주 시켰다. 
   주전 167년 헬라가 로마에게 넘어간 후 빌립보는 로마의 한 도시로 편성되었다가 
   주전 42년, 빌립보에서 큰 전쟁이 발발한다. 율리우스 시이져를 암살한 부르터스와 카시우스가 
   이끄는 로마군과 안토니와 옥타비아누스의 군대가 충돌한다. 
   결국 빌립보 전쟁에서 승리한 옥타비아누스는 로마 황제의 자리에 올라 '가이사 아구스도'가 되었다. 
 
   빌립보 시민은 로마시민권을 가졌고 많은 시민들이 로마군을 제대한 사람들이었다.  빌립보 시민들은 
   변방에 있는 땅을 수여받고서 그 대가로 전방 지역 성읍에서 군사 임무를 수행한 퇴역 장병들과 
   로마전역에 용맹한 군인으로 이름이 나있던 드라게인(Thracian), 주변지역에 살던 헬라인, 
   그리고 소아시아에서 온 그리스인(예; 두아디라의 루디아)들이었다. 
   퇴역군인 및 정치적인 영향으로 라틴어가 많이 이용되었지만 주 언어는 헬라어였다고 추정된다. 
   역사가 람세이(Ramsay)는 의사 누가가 빌립보 출신이라고 하였다.
 
   빌립보 성은 도시의 서쪽에 위치한 해발 1,956m인 팡게오(Pangeo) 산에 있는 
   금광을 생산한 도시로 유명하였다; 빌립 2세는 이 곳에서 년간 1,000달란트 이상의 금을 채광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로마시대 특히 옥타비아누스 시대에는 로마가 바로 정복하였던 북쪽지역을 방어하기위한 
   군사도시로 또한 동방, 비쟌티움에서 로마로 가는 길목으로 이용되었다.
 
빌립보에는 다이아나(헬라의 아데미 신; 사냥의 신)와 관련된 드라게인의 
바쿠스(Bacchus; 헬라의 디오니수스 신; 술의 신)과 말탄 영웅이 대표적인 우상이었다. 
주후 1세기에는 시에서 서쪽으로 2km 떨어진 곳에 수입된 값비싼 대리석으로 치장된 
이집트 신들을 섬기는 장소가 세워졌다. 또한 에그나티아 길의 남쪽 400m지점에 위치한 목욕탕건물에서 나온 
다섯 개의 비문에의하면 그 곳이 주후 1세기경에는 바쿠스신과 그와 관계된 
리벨( Liber), 리베라(Libera), 헤라클레스(Herculus)를 섬기는 장소였음을 나타내 준다. 
 
성경의 역사
행 16: 12-15 두아디라의 자색옷감장사 루디아를 만나 예수믿게하다(유럽의 최초 기독교인)
행 16: 16-40 빌립보 감옥에 갇혔다 간수와 그의 가족을 예수 믿게하다.
빌 1:1 -  바울의 옥중서신
 
역사, 지리적 성경해석
1. 유럽의 첫걸음
주전 42년, 빌립보 전투(바쿠스와 옥타비아누스); 로마를 왕정으로 바꾸며 아구스도를 탄생시켰다.
   로마의 역사를 바꾸어 놓은 장소는 주후 49년, 복음전파 차원에서 유럽 대륙의 역사를 바꾸어 놓는 시발점이 되었다.
 
2. 바울의 후원자들
행 16:14 . . . 루디아라 하는 한 여자가 말을 듣고 있을 때 주께서 그 마음을 열어 
  바울의 말을 듣게 하신지라.
빌 4:3        또한 나와 멍에를 같이 한 네게 구하노니 복음에 나와 함께 힘쓰던 여인들을 
  돕고 . . .
 빌립보의 첫 신자는 여인이었고 그 여인들은 바울의 복음전파에 적극적인 후원자가 되었다. 
 마게도냐 교회 특히 빌립보 교회가 데살로니가에서 사역할때(빌 4:16)와 고린도에서 사역할 때 
 바울을 물질적으로 후원(고후 11:9)하는데 아마 그 중요한 후원자는 루디아와 같은 여인들이었을 것이다. 
 
3. 로마 시민권
행 16:21 로마 사람인 우리가 받지도 못하고 행하지도 못할 풍속을 전한다. . .
빌 3:20  그러나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 .
   빌립보 시민들은 로마인임을 스스로 자랑했고, 로마인의 옷을 입었으며, 종종 라틴어를 사용하기도 하였다. 
   틀림없이 이것은 바울이 신자들의 시민권이 하늘에 있다고 언급한 말의 배경이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빌립보 성이 로마의 식민지였다는 사실은 그곳에 그다지 유대인들이 없었으며, 
   따라서 그곳에 회당이 설립되지 않았고 바울이 빌립보서에서 구약을 인용하지 않은 사실의 이유가 되기도 한다.
 
4. 바울과 빌립보 감옥
행 16:34 그 밤 그 시각에 간수가 그들을 데려다가 그 맞은 자리를 씻어 주고 
  자기와 그 온 가족이 다 세례를 받은 후,
빌 1:13  이러므로 나의 매임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시위대 안과 그 밖의 
  모든 사람에게 나타났으니
   바울이 빌립보에서 전도한 사람들 중 간수와 그의 가족이 제일 큰 구성원중 하나였을 것이다.  
   그러므로 로마 옥중에서 빌립보 사람들에게 자신의 매인 것이 복음을 전하는데 유익함을 말하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것이다. 그들도 바울이 옥에 갇힘으로 전도 받은 이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형제 중 다수가 나의 매임을 말미암아 주 안에서 신뢰함으로 겁없이 
   하나님 말씀을 담대해 전하게되었다(빌 1:14)"고 하였다. 
   바울은 유럽에 이르러 빌립보에서 첫 번째로 옥에 갇혔고 
   이제는 로마, 유럽의 마지막 감옥에서 첫 번째 감옥이었던 장소에 편지를 쓴다. 
   옥에 갇혀있던 바울은 빌립보 감옥을 생각하며 더욱 용기를 얻었을 것이고 
   물질적으로 후원을 아끼지 않는 그들이 대견해 보였을 것이다. 그러기에 다른 옥중서신과 달리 
   빌립보서는 옥 중에 있으면서도 빌립보서에는 큰 기쁨 담아 보낼 수 있었을 것이다.
"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빌 4:4)
 
암비볼리(Amphipolis)
빌립보  남서쪽  약 53km 지점에 있는 도시로서 B.C167-146년 무렵에는  마게도냐  북부지방의  수도였다.  
이곳은 빌립보 지방보다 크고 요충지(要衝地)였으나 바울일행은 단지 지나가는 정도로 그친다.  
아볼로니아(Apollonia)
암비볼리에서 약 43km 정도 떨어져 있는데 이 곳은 갈라디아에 있는 '아볼로니아'와는 다른 곳이다. 
 
  데살로니가
  데살로니가는 데르마 만의 갑(岬)에 위치한 부산한 항구도시였다. 데살로니가 성읍은 
  유명한 에그나티아 가도와 북쪽으로 다뉴브에 이르는 대로를 연결하는 지점에 위치한 
  중요한 성읍으로서 교통과 무역의 중심지였다. 그 성읍의 인구는 20만 명에 이르렀고, 
  마게도냐의 최대 도시였다. 주전 167년 마게도냐가 로마에 패하면서 수도가 암비볼리(Amphipolis)로 되었다가 
  주전 146년부터 데살로니가가 마게도냐 지방의 수도가 되었다. 
   이곳은 아볼로니아 남서쪽 64km지점이며 데르마이크만(Thermaic Gulf)에 위치해 전략적 요충지였고 
   마게도냐 지방의 수도였다.   데살로니가(Thessalonica)는 마게도냐 내륙의 풍요로운 농경지를 
   동쪽에 있는 육로와 해로에 연결시켜  주었다.  
   그래서 키케로(Cicero, B.C.106-43)는 이곳을 '우리 영토의 심장부'라고 했다.  
   이 도시는 B.C.42년 빌립보 부근의 싸움에서 옥타비아누스(Octavianus)에게 가담했기  때문에 
   자유시(Civitaslibera)의 특권이 주어졌다.  또 데살로니가는 인구 약 20만의 도시로 
   정치, 경제의 중심지여서 자연히 많은 사람들로 붐볐으며 유대와 유사한 점이 많았다(살전2:14-16).  
   그래서 바울과 실라는 이곳을 발칸 반도 전역에 복음을 전하기  위한 전략적 요충지로 보았다(살전1:7,8).  
   그러므로 그들은  빌립보에서의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빌립보에서 160여km나 떨어져 있는 
   이 도시에 사력을 다하여 들어왔던  것이다(R.N.Longenecker).
 
  데살로니가 교회의 배경은 행 17:1-9에서 찾아볼 수 있다. 
  바울이 데살로니가의 유대인 회당에서 전도사역을 시작한 것을 볼 때, 
  이 새로 설립된 데살로니가 교회에는 일부 유대인들도 포함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1:9,10, 행 17:4은 이 교회의 주된 구성원들이 이방인이었음을 나타내 주고 있다.
   
베뢰아 
데살로니가 남서쪽 약 80km 지점, 마게도냐 평원 남쪽 올림푸스 산맥  기슭의 조그마한 언덕에 위치했다.  
당시 이 도시에는 많은 인구가 살고 있기는  하였으나 정치적으로 그렇게 큰 비중을 차지하지는 못하였다.
 
1998. 8.            이문범 제공


밧 모 섬(Patmos)
지리적 배경
도데까니스(Dodecanese) 지역의 최북단에 위치한 밧모섬은 북쪽으로 이카리아(Icaria)와 
      사모스(Samos)가, 동쪽으로는 레입소이(Leipsoi), 남쪽으로는 레로스(Leros)가 자리잡고 있다. 
      길게 늘어진 섬은 길이가 12.5km로 약간 굽은 리본모양을 가지고 에게해를 향해 뻗쳐있다. 
      이러한 모양을로 인해 바닷물이 섬깊숙히 들어오면서 셀 수 없는 만(灣)을 형성한다. 
      꾸불꾸불한 모양의 해안을 모두 편다면 전체 길이가 65km나된다. 
      폭이 가장 좁은 부분은 중간 부분으로 섬을 거의 갈라 놓을듯하다. 
      가장 높은 산은 남쪽에 위치한 해발 269m의 프로피티스 일리아스(Profitis Ilias)산이다. 
 
현재의 밧모섬은 19세기에 이곳을 방문한 여행자들이 그린 책에 나오는 모양과는 조금 다르다. 
섬 전체가 제주도와 갈릴리 바다근처와 같은 검은 회갈색의 현무암으로 되어있고 약간의 풍화된 
토양을 제외하고 섬 전체가 완만한 능선을 가진 바위산으로 이루어졌다. 그래도 언덕과 바다 사이에 
있는 약간의 녹지는 지형을 부드럽게 만든다. 아데미의 열열한 사랑을 받던 
셀레네(Selene; 그리스이 달신)의 섬인 밧모는 거의 일년내내 생명의 빛을 발하는 태양을 맞으며 
그 몸을 바다에 담그고 있다. 좋은 일조량으로 밧모는 겨울 동안에도 온화한 날씨를 가지고 
여룸에는 북풍의 영향으로 시원하고 상쾌하다. 보다 작은 섬이 점점이 흩어져있는 
동쪽에는 에게해의 검붉은 물결이 흰 파도를 일으킨다. 현대의 건축물들은 코라(Chora)와 스칼라(Skala)에 집중되어있다.
성 요한 수도원은 이곳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밧모섬의 주요 특징은 고요함이다. 
수도원의 종소리와 승객을 태운 뱃고동만이 이따금 섬의 정적을 깬다. 
 
밧모섬 면적은 34km2이고 주민은 약 3,000명정도이다. 
교회적으로는 세계관구(Ecumeical Patriarchate)에 속하고 
성 요한 수도원의 대주교가 관할하는 지역이다. 
밧모섬에서 아테네의 항구 삐레아까지 뱃길은 163마일이고 
배는 레로스, 칼림노스, 코스, 로도스, 사모스를 연결한다. 
 
밧모섬은 지중해성 기후 영향으로 강우량이 적은 편이다. 
전체 섬이 얇은 풀과 다양한 관목, 크고작은 나무들로 덮혀있다. 
소나무, 싸이프러스, 아루부투스(철쭉과), 유카리스, 위성류와 석류같은 과일나무들도 존재한다. 
농가에서는 토양과 기후에 적합한 감귤류가 많이 재배되고 스칼라 항구와 섬 이곳저곳의 작은 정원에서 포도도 재배된다. 
 
역사
신화: 신화에 따르면 라트모스(Latmos) 산근처에 있는 카리아(Caria)에 방문한 에데미는 
셀레네가 바다에 비추는 빛을 보고 반하였다. 셀레네는 해저에서 섬을 올려 줄 것을 아데미에게 요구했고 
아폴로와 제우스가 달(셀레네 신)을 빛을 보며 사랑에 빠진 아데미를 위해 이 섬을 해저 깊은 곳에서 올렸다. 
태양(헤리오스;      )은 이 섬을 말리고 그곳에 생명력을 주어 사람들이 거주할 수 있는 곳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그래서 라트모스라는 이름에서 밧모(Patmos)라는 이름이 유래하였고 한다. 
 
또하나의 신화와 관계하여 아버지 아가멤논을 죽인 어머니 클리템네스트라를 죽이고 
푸리에스에게 쫓기던 오레스테스는 이곳에 피신하였다. 피신한 오레스테스는 
현재 수도원이 있는 장소에 아데미신전을 지었다고 한다. 
 
고대: 그리스 원주민인 카리안, 레레기안, 펠라스기안들이 주전 
3,000년경에 와서 주변 섬들을 식민지로 삼았다. 
그러나 섬의 진정한 거주자들은 이오니안을 뒤따라 온 도리안이었다. 
주전 4세기에 이오니안은 이곳에 발전된 문명을 만들고 마을과 카스텔리(Kasteli)위에 
아크로폴리스를 만들어 섬을 수출무역의 중심지로 만들었다. 
한 때 12,000-15,000의 주민이 거주하며 제우스, 아폴로, 아데미, 디오니소스 신전도 있었다. 
 
로마시대: 로마시대 밧모는 로마에서 에베소로 오는 정규항로 근처에 있었을지라도 잘 이용되지 않았다. 
주후 2세기 로마인들은 밧모섬을 귀양지로 만들었다. 
 
(요한의 밧모 유배)
요한은 갈릴리에서 고기를 잡던 어부였다. 
주님께서 요한을 부른 뒤 그는 베드로, 야고보과 함께 제자들 중 핵심인물이 되었다. 
그러므로 요한은 중요한 사건(야이로의 딸을 살림, 변화산, 겟세마네 기도)이 있을 때마다
예수님으로부터 선별된 인물로 대접받았다.
물에 익숙하였던 요한은 예수님이 갈릴리 주변을 옮겨다니며 전도하실 때 
유능한 노잡이가 되었을 것이다. 그는 교통수단인 배를 수배하고 운전하였을 것다. 
그래서인지 그는 예수님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았다. 
요한복음에 따르면 요한이 대제사장과 친분이 있었던 점과 아버지가 배를 가지고 있는 선주였다는 것을 보면 
요한이 어느정도 유력한 집안에 속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시몬 베드로와 또 다른 제자 하나가 예수를 따르니 
이 제자는 대제사장과 아는 사람이라 예수와 함께 대제사장의 집 뜰에 들어가고(요 18:15)
 
그러나 그의 성격은 매우 과격하여 형제 야고보와 함께 '우뢰의 아들'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 요한은 베드로와 함께 하루에 5,000명이 넘는 사람을 전도할 만큼 
큰 능력을 얻었으나 그는 곧 슬픈 소식을 접한다. 그의 형제 야고보가 헤롯 아그립바에게 순교를 당한 것이다. 
이런 소식에도 불구하고 베드로와 한 조가 된 요한은 사마리아에서 복음을 확고히 하는 등 활동을 왕성하게 한다. 
언제부터인가 베드로와 따로 행동하던 요한은 바울과 베드로가 순교후 에베소에 와서 복음을 전하였다. 
그곳에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를 데려와 모시고 살면서 요한복음과 요한 서신들(1-3서)를 기록하였다. 
 
주후 81-96년 도미티안 황제의 기독교 박해기간 사도 요한은 밧모섬으로 유배되었다. 
요한은 그의 제자 프로코로스와 함께 '계시의 동굴'에서 있을 때 계시를 받아 요한계시록을 썼다. 
또한 요한의 가르침으로  많은 주민들이 기독교인이 되었다. 
 
나 요한은 너희 형제요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라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의 
증거를 인하여 밧모라 하는 섬에 있었더니 (계 1:9)
 
96년 도미티안 박해가 끝나 새 황제 네르바에의해 풀려난 요한은 에베소로 돌아갔다. 
그는 그곳에서 99세까지 장수하다가 104년에 하나님 곁으로 갔다. 
지금도 그의 무덤이 에베소 요한교회에 남아있다. 
그리스 정교회는 5월 8일에 그를 기념하고 9월 26일 그의 변화(metastasis)를 축하한다. 
 
4세기 콘스탄틴 대제 이후 순례지가 된 밧모는 7세기 비잔틴과 사라센의 갈등 속에 약탈당하기도 했다. 
주후 6-9세기까지 밧모섬은 다른 주변 섬들과 마찬가지로 해적들의 침입에 어려움을 겪었다. 
 
비잔틴: 주후 11세기에 호시오스 크리스토둘로스가 여기 도착하였고 
          그는 주변의 고요와 아름다움에 매료되어 요한 수도원을 세웠다. 
          이 수도원은 계속되는 아랍인들의 공격과 터키의 지배에도 불구하고 계속 그 특권을 유지할  수 있었다. 
 
터키시대 - 현재: 16세기에 이르러 밧모는 새로운 번영의 전기를 맞았다. 스칼라는 주 항구가 되었다.  
	저장소가 지어졌고 코라에 더 튼튼한 성채가 세워졌다. 주민들은 증가했고 
	그리스어를 공부하는 유명한 파트미안 학교가 설립되었다. 
	얼마후 그리스가 터키로부터 독립하였다. 
	그러나 다른 도데카네스 섬들과 같이 밧모는 1948년 3월까지 이탈리아 영에 들어갔다.
 
밧모의 성화
그리스 정교회 최고의 성화들이 밧모에 있다. 
사도 요한과 요한 수도원 설립자, 호시오스(축복된) 크리토둘로스의 성화는 밧모의 전통유산 중 
가장 가치있는 것이다. 사도 요한을 따라다니며 그의 생활과 기적을 기록하였던 
프로코로스(Prochoros)에 관한 성화도 중요한 것이다. 
프로코로스는 후에 니코메디아의 감독이 되었다. 
 
문화
1. 파트미안 학교
마카리오스 칼로엘라스(Makarios Kaloyeras) 보제신부에 의하여 수도원 내부에 설립된 파트미안 학교는 
18세기 이 곳의 역사 중 가장 중요한 사건이었다. 
오늘날 이 학교는 계시의 동굴 바로 위에 위치한다. 
1713년 계시의 수도원 건물에서 시작한 이 학교의 명성은 급속히 퍼져 그리스뿐아니라 
세계 각국의 학생들이 이곳을 찾아 왔다. 이 학교는 그리스어와 정교회 신학을 가르치는 
헬레니즘에 명성있는 학교가 되었다. 1912-1947년 이 지역이 이탈리아에게 점령되어 
잠시 학업이 중단된 것외에는 많은 학생들이 이곳에 찾아와 헬라문명을 배웠다. 
많은 정교회 지도자, 학자, 과학자등이 이곳에서 배출되었고 무엇보다 중요한 
그리스의 독립운동가들이 많이 배출되었는데 
그중 최고의 인물이 피리키 에태리아(Philiki Etaireia)의 세 설립자 중 한명인 한토스(Emmanuel Xanthos)이다. 
 
2. 부활절
부활절에 갖는 정교회의식은 비잔틴 전통을 잘 이어받은 밧모의 가장 큰 있는 의식이다. 
예식은 매일 저녁 9시에 시작하여 적합한 본문을 읽으며 수시간 계속된다.
 
부활절 주간 화요일 오전 11시에 한토스 광장에 '의식 대야'가 운반된다. 
예수님의 고난의식을 가지려 할 때는 각지에서 많은 사람이 이에 참석하기 위하여 온다. 
예루살렘에서도 행해지는 이 의식은 신약성경에 근거한 것이다. 
세족식이 거행되고 성경을 낭독하면서 질문하고 대답하는 형식의 의식을 가진다. 
수도원장이 예수님 역할을 하고 수도원의 가장 젊은 수도승이 가룟 유다 역할을 한다. 
수도원장이 겟세마네 기도를 마치면 파티미안 신학교 학생들은 찬양한다. 
목요일에는 복음서들을 읽다 십자가 행진부분에서 끝난다. 
금요일에는 십자가 강하(降下)의식을 가지고 부활을 준비한다. 
수도원장은 화려한 옷을 입고 장미꽃잎을 뿌리며 종려나무 관으로 의식장 주변을 꾸며 놓는다. 
토요일은 부활절 초를 준비하고 자정에 불을 밝힌 후 '예수 부활 되셨네라고 인사한다. 
이때 박수갈채와 징을 치는 소리를 듣는다. 
그러면서 부활절의식들(찬송, 낭송, 크리소트톰의 문답식설교, 식탁의 교제)이 행하여지며 부활의 즐거움을 함께한다. 
 
계시의 동굴
밧모섬은 예수님의 사랑하는 제자 요한이 계시를 받아 요한계시록을 기록한 섬이다. 
항구 스칼라에서 코라로 올라가는 길 중간에 계시의 동굴이 있는데 현재는 계시 수도원으로 덮혀이다. 
이 동굴은 또한 정교회와 천주교간의 우호적 대화가 있었던 장소이다. 
 
동굴로 내려가다보면 내부 정원을 통과하여 몇 계단을 내려가는데 이때 만나는  
오른쪽에 만나는 예배소가 성 알테미오스(18세기) 예배소이다. 
계속 내려가다 교회 앞 넓은 홀(나르텍스)의 오른 쪽 돔과 성 안나 종탑을 왼쪽에 보게된다. 
더 내려가면 성안나 교회 입구와 동굴에 이른다. 입구에 있는 비문은 인상적이다. 
 
"이 장소가 초라함에도 불구하고 이곳은 하나님의 전이요 하늘의 전이다"
 
앞으로 곧장 들어가면 성 안나 교회에 이른다. 전통에 따르면 11세기에 이곳에 
 호시우스 크리스토둘로스는 성모 마리아의 어머니 안나를 기념할 뿐아니라 
  어머니 마리아, 또 자기를 밧모를 가도록 도와 준 당시 황제의 어머니 안나를 기념한 것이라한다. 
   교회 오른 쪽에 고대 동굴의 경사진 천장이 있는데 시작하는 천장 부근에 3가닥으로 갈라진 틈이 있다. 
   이것은 성 삼위일체를 상징하고 이 방향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고 한다. 
 
주의 날에 내가 성령에 감동하여 내 뒤에서 나는 나팔소리 같은 큰 음성을 들으니 (계 1:10)
 
계시를 들을 때 요한은 동굴이 좁아지는 쪽 한 홈에 머리를 대고 기도하였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요한의 초상화를 보면 이마에 굳은 살이 박혀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요한이 기도후 일어설 때 짚었다는 홈이 머리를 두던 홈 오른 쪽에 남아있다(요한은 분명히 오른 손잡이였을 것이다!). 
오른 쪽을 쳐다보면 사람이 서서 책을 둘 만한 천연 장소가 있는데 전통에 따르면 
이곳에서 요한의 제자 프로코로스가 그의 선생이 지시하는 모든 것을 기록하였다고한다. 
 
생각해 볼만한 지리적 성경해석
1. 요한은 섬에서 갈리리 바다모양과 가장 비슷한 형태의 바다를 볼 수 있는 곳에 
자신의 수양처를 만들었다. 다른 지역과 달리 이곳이 갈릴리와 같은 현무암으로 되어있다는 것도 기억하라.
 
2. 일곱교회에 편지를 쓸 때도 밧모에서 가장 가까운 지점에서 시작하여 시계방향으로 돌면서 
7교회 이름을 언급하였다. 사사기의 배열과 연결해 보는 것도 흥미롭다.
 
3. 자주 나오는 보석들의 색깔등은 백옥같은 바다의 색깔을 연상케한다. 
 표현들이 현장을 반영하였을 것이라는 추정을 가능케한다.
 
4. . . . ?
 
이문범 제공

니고볼리(Nicopolice; 현재명 Smytoula)
니고볼리라는 이름을 가진 도시는 그레코로만 시대에 헬라어를 사용했던 지역에 흔히 볼 수 있는 이름이다. 
왜냐하면 많은 지도자들이 전쟁의 승리를 기념하여 이 이름을 많은 도시에 부여하였기 때문이다 
- 니고볼리는 '승리의 도시'라는 뜻이다. 이 이름으로 불렸던 도시들은 에피루스, 소아시아, 이집트, (유대)에서 발견된다. 
주후 63년에서 65년경에 사도 바울은 디도를 니고볼리(이들 도시중 하나)에서 만나기를 원한다(디도서 3:12). 
사도 바울이 말한 니고볼리를 알아내기 위해서는 그 곳이 겨울을 나기에 좋은 곳이며 
또한 서신서를 기록하기에 적합한 곳이라는 것이다. 
 
   본도(Pontus)의 니고볼리는 주전 66년 폼페이 장군이 미드리닷(Mithridates)을 이긴 장소로 
   로마 교통의 중심지이며 주후 1세기에 번창하였다(Strabo 12.555). 그러나 그것은 그레테 섬으로부터 
   그리고 바울의 알려진 여정과는 너무 멀다.  비시니아(Bithynia)나 실리시아(Cilicia)의 니고볼리는 
   겨울을 나기에는 부적합한 장소이다(Pliny HN 5.150; Strabo 14.676). 
   이집트의 델타(Delta)지역의 알렉산드리아근처, 니고볼리는 가이사 아우구스도에 의해서 세워졌고(요세푸스 고대사 5.11.15) 
   겨울을 나기에 적합한 기후를 제공하나 바울의 알려진 여정 속에 넣기에는 큰 무리가 있다. 
   바울시대 이후에 로마 지도자들에 의하여 세워진 니고볼리라는 도시들이 있으나 
   이것은 디도와 바울사이에는 아무 관계가 없는 장소이다.
 
   가장 적합한 장소를 추정한다며  에피루스(Epirus)의 니고볼리이다; 
   이 니고볼리는 아가야의 니고볼리로도 알려져 있다. 
   이 다른 이름은 프톨레미가 에피루스의 니고볼리라 부른(Geog. 3.13) 반면에 타키투스(Ann. 2.53)가 
   그 것을 아가야 사람의 도시로 묘사한데서 유래했다. 
   이 두 용어- 에피루스와 아가야-는 오늘날 그리스의 큰 지방들을 가리킨다. 
   이 도시는 그리스 반도의 서쪽, 이탈리아 반도의 남쪽 끝에서 바다건너 
   북위 39도 2분, (경도) 20도 44분에 위치한다. 이 도시는 악티움(Actium) 만의 협부에 지어졌다. 
   주전 31년에 아우구스도는 이 만에서 안토니(Mark Anthony) 장군과의 접전하여 승리한 뒤 이 도시를 세웠다. 
   그러므로 이는 명백히 로마의 식민지로 되었고 주전 29년 니고볼리의 주요 걸작품은 
   넵튠(해신(海神), 그리스신화의 포세이돈에 해당함)과 마르스(군신(軍神), 
   그리스신화의 아레스에 해당함)에게 헌납되었다. 그 기념물에는 해전(海戰)에서 포획한 
   뱃머리에 있던 수양의 머리가 조각되었다. 이 니고볼리는 그 근방의 무역을 주관하였고  
   매 4년마다 열리는 올림픽 경기의 개최지이기도 하였다. 아우구스도와 좋은 관계를 맺기를 원했던 
   헤롯대왕은 많은 공공 건물을 그곳에 세웠을 뿐아니라 그곳 신전에 
   막대한 기부를 하였다(요세푸스, 고대사 16.5.3). 
   주후 89년에 이 도시는 망명 철학자 에픽테투스(Epictetus)의 거처가 되기도 하였다(Aulus Gellius Attic Night 15.11.5). 
   이 장소에는 오늘날 그리스 도시 스밀투라(Smyltoula) 자리잡고 있다. 
 
   바울이 로마의 감옥에서 풀려난 뒤 니고볼리에서 디도를 만나기로 한 의도는 
   그가 복음전파 활동을 계속하고 있었음 시사한다. 바울은 밀레투스(Miletus)와 
   고린도를 들른 후 그가 한 번 잡혔고 다시 잡힐 로마- 당시 네로는 로마에서 로마의 대화재에 대한 책임을 
   기독교인에게 전가시키고 심한 핍박을 가하고 있었다-로 가기 위하여 니고볼리로 향하였다. 
   알렉산드리누스 사본(Codex Alexandrinus)은 디도서가 니고볼리에서 보내졌다고 언급을 하나 
   이 언급은 다른 고대 사본들과 부합하지 않는다. 디도서 3장 12절은 바울이 니고볼리가 아닌 
   니고볼리 근처에 있었다고 말한다. 일반적으로 디도서는 고린도에서 쓰여진 것으로 알려진다.
로버트( Robert W. Smith)
The Anchor Bible Dictionary IV권 1108쪽에서 발췌함.
 

그레테
지리
그레테는 그리스 남쪽 지중해 상의 가장 큰 섬중 하나로 길이가 256km 넓이가 64km정도 된다. 
그레테는 에게해와 리비아해를 경계지으며 유럽과 아프리카를 구분하는 점이된다. 
많은 섬들과 깊은 계곡이 있고 계곡사이에는 기름진 기름진 토양이 형성되었다.  
이 계곡 중사마리아 협곡은 유럽에서 가장 길고 깊은 계곡으로 대자연의 기적이라고 일컬어진다. 
지역마다 변화무쌍한 지형을 가지고 있는데 어떤 곳이 황량하다 싶으면 다른 곳은 숲이 우거져 온화함을 더해준다. 
 
마을들은 과일나무와 채소로 가득채워져있다. 올리브나무, 오렌지, 포도원, 각종 채소들이 자란다.
 
오래된 돌로 진어진 농가, 수도원 산능선의 마을들, 성채, 경사지에 남은 교회들의 잔재같은 것이 
그레테의 시골 풍경이다. 해안은 때때로 험하여 사람들이 접근 못한 바위들로 되있기도 
하지만 끝없는 모래와 자갈로 된 해안이 많이 존재한다. 그레테는 여러 야생식물로 유명하다. 
밤나무, 상수리, 싸이프러스, 야자나무, 상수리나무 숲이 이곳저곳 위치한다. 
바위가 많은 지역에는 각종 약초와 그레테 염소라 불리는 '크리크리'가 자란다. 
 
역사
위에서 언급한 환경을 기초로 그레테가 최고로 번성한 시기는 미노아 문명(그레테 문명) 때이다. 
주전 2800-1150년 동안 그레테는 지중헤에서 가장 번성한 문명을 이루었다. 미노아인들은 궁전들을 지었는데 
유명한 크노소스, 파이스노스, 말리아, 자크로스가 그 당시(주전 1700-1450) 지어졌다. 
그들의 벽화와 도자기는 예술의 극치를 보여준다. 그러나 이 문명은 주전 1450년 산토리니에서 발생한 
화산폭팔로 끝을 맺게된다. 그러나 이 것이 끝은 아니었다. 배를 이용한 상업은 계속이루어졌다. 
페니키아, 시리아, 이집트인은 그들의 주요 무역대상이었다. 아가야인(미케네 문명)과 도리아인의 침입으로 
신도시인 라토와 압테라가 세워졌다. 라토(Lato)는 주전 7세기에 가장 중요한 도시가 되었다. 
로마가 다스리 시기(주후 69-330)에는 골틴(Gortyn)이 특출난 도시역할을 하였다. 
기독교는 일찍이 이 곳에 전파되었다. 유대인이 많이 살고 있었던 이 곳(행 2:11)에 
누가 복음을 전했는지 모르지만 바울이 디도를 보낸 것을 보아 바울이 전한 장소가 아닌가한다. 
 
배가 더디 가 여러 날만에 간신히 니도 맞은 편에 이르러 풍세가 더 허락지 아니하므로 
살모네 앞을 지나 그레데 해안을 의지하 고 행선하여 간신히 그 연안을 지나 
미항(Kali Limenes)이라는 곳에 이르니 라새아성에서 가깝더라 여러 날이 걸려 금식하는 절기가 
이미 지났으므로 행선하기가 위태한지라 바울이 저희를 권하여 말하되 
   "여러분이여 내가 보니 이번 행선이 하물과 배만 아니라 우리 생명에도 타격과 많은 손해가 있으리라" 
   하되 백부장이 선장과 선주의 말을 바울의 말보다 더 믿더라
그 항구가 과동하기에 불편하므로 거기서 떠나 아무쪼록 뵈닉스에 가서 과동하자 하는 자가 더 많으니 
뵈닉스는 그레데 항구라 한 편은 동북을,한 편은 동남을 향하였더라
44행 27:13 남풍이 순하게 불매 저희가 득의한 줄 알고 닻을 감아 그레데 해변을 가까이 하고 행선하더니 
얼마 못되어 섬 가운데로서 유라굴로라는 광풍이 대작하니 
    (행 27:7 -14)
 
바울은 로마로 호송될 때 그레테를 거쳐서갔다. 그래서 아직도 미항근처의 산능선에는 
바울을 기념한 교회가 위치해 있다. 오래된 교회는 세련되지 않고 지붕도 없는 상태이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이 곳에 바울이 잠시 머물며 복음을 전하였다고 한다.
그레테인의 특성은 바울이 디도서에 편지을 보내며 에피네니데스(주전 6세기)의 말을 인용하여 
부정적으로 얼마를 썼지만 그레테에서는 노벨문학상을 받은 카잔자키스등 유명한 인물들이 많이 배출되었다. 
디도의 사역으로 어느정도 변화된 사람들이 있어나 보다!
 
그레데인 중에 어떤 선지자가 말하되 그레데인들은 항상 거짓말장이며 악한 짐승이며 
배만 위하는 게으름장이라 하니 이 증거가 참되도다 
그러므로 네가 저희를 엄히 꾸짖으라 이는 저희로 하여금 믿음을 온전케 하고 (딛 1:12-13)
 
잊지 말하야할 역사적 사실 중 하나는 그레테인의 최초의 조상(미노아 문명)은 헬라인이 아니라는 것이다. 
창세기에서도 언급하였듯이 이곳에 이주한 것은 함족이다. 
 
함의 아들은 구스와 미스라임과 붓과 가나안이요 (창 10:6) 
 
미스라임은 루딤과 아나밈과 르하빔과 납두힘과 바드루심과 가슬루힘과 갑도림을 낳았더라 
(블레셋이 가슬루힘에게서 나왔더라) (창 10:13-14)
 
이 함족은 고고학 증거에의해서도 밝혀졌던 서부 셈족언어를 사용하였다. 
미노아 문명이 쇠퇴하고 해양민족이 이동할 때 그레테(그렛사람, 갑돌사람)인들은
이동하여 가나안까지 들어왔다. 아모스 선지자는 이것을 증명한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이스라엘 자손들아 너희는 내게 구스 족속같지 아니하냐 
내가 이스라엘을 애굽 땅에서 블레셋 사람을, 갑돌에서, 아람 사람을 길에서 올라 오게 하지 아니하였느냐 
     (암 9:7)
 

 


     제목 : 터키 선교상황
   자료원 : 강신찬 기성해외선교부
   발행일 : 94년 08월 18일

Ⅰ. 터키의 일반적 상황

1. 역 사

터키 공화국의 과거는 크게 2가지, 즉 터키 민족의 이동사와 터키 가 현재 차지하고 있는 아나퇴아(소아시아)와 트래이스(트라키아) 양 반도의 역사로 나누어 볼 수 있다. 기록상 터키의 역사는 기원전 2,000년 경 중앙 아시아의 동북부에서 시작된다. 터키족들은 중앙아 시아 동북부에서 점차 서쪽으로 이동하여 오면서 16개 군주국을 이 룩하였다. 터키인들이 현재의 아나토리아 반도를 중심으로 정착하게 된 것은 기원후 10∼11세기 경이었다.

아나토리아 반도는 흑해, 마르마라해, 에게해 및 지중해로 둘러싸 인 반도이다. 역사적으로 과거에 아시아에서 서쪽으로 가는 문화적인 교통로(일명 실크로드) 역할을 하였기 때문에 이 반도를 아시아와 유 럽간의 교량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터키 도처에는 지금도 캐러반 사 라이(대상들의 숙소)가 남아 있다.

아나토리아 반도에는 기록상 B.C.1500년 경 청동기 시대에 도시국 가가 생성발전하여, B.C.1900∼1200년에는 쵸룸지역(앙카라 동북방)을 중심으로 히타이드 제국이 번성하였다. B.C.1200년 이후에는 해안지 대의 희랍문화를 비롯하여 서부 및 중부 아나토리아 지역에서 프리 지아 오아조가 흥왕했으며 또한 우랄투스, 리디아, 이오니아왕조들도 아니토리아 반도에 수많은 문화유적을 나겼다. 로마와 비잔티움(동로 마 제국) 문명의 유적과 유물에 관하여는 이미 널리 알려진 바와 같 다. 아나토리아 반도에는 약 30개 민족이 거주한 기록이 있고 그중 15개 민족이 문화 유적과 유물을 남겼다.

터키 민족이 아나토리아 반도에 처음으로 이룩한 왕국은 셀측 제 국(A.D. 10세기)이고, 그 다음에 이룩한 오토만 제국(1281∼1922)은 술탄 메르멧이 1453년 동로마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현 이스탄 불)을 정복함으로써 그 위세를 더욱 높이게 되었으며, 그리하여 현재 의 아랍 지역은 물론 비엔나 이남, 유고, 흑해 북방 등 동부 유럽에 까지 뻗치는 세계적인 대제국을 이룩하여 당시 서구 등 주변에 커다 란 위협이 되었고, 또 많은 유학생을 받아들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막강했던 오토만 제국의 국력도 17세기 이후부터 점차 쇠티하기 시 작하였다. 제1차 세계대전시 오토만 제국은 패전국인 독일측에 가담 하여 연학국측의 세브르(Sevre)조약(1920.8)으로 아나토리아 고원의 일부만을 차지하는 소수민족으로 전락하는 비운을 맞이하게 되었다. 그러나 오늘날 터키 민족의 국부로 일컬어지는 무스타파 케말파샤가 1920년 임시정부를 수립하고 연합국측에 의해 불열된 조국 및 터키 인의 손상된 명예를 되찾기 위한 실지(失地) 회복전쟁을 주도하였다. 그는 이 전쟁을 승리로 이끌면서 새로운 터키 민족주의를 탄생시켰 다. 그 후 1923년 연합국측과 로잔협정을 체결하여 오토만제국을 소 멸하고 1923년에 현재의 터키 공화국을 수립하게 되어 오늘에 이르 게 되었다.

2. 지 리

터키는 우리 나라와 비슷한 북위 36℃∼42℃ 사이에 위치하며, 흑 해와 마르마라해 및 지중해를 연결하는 보스포러스와 다다넬스 양해 협을 사이에 두고 트레이스 지방으로 불리는 유럽 부분 일부와 아라 토리아로 불리는 아시아 부분으로 구분되어 있다. 터키는 소련, 이란, 이락, 시리아, 그리스 및 불가리아와 국경을 접하고 있는데 시리아와 는 877㎞의 가장 긴 국경을 접하고 있는 반면 가장 짧게 접하고 있 는 나라는 그리스로서 212㎞이며, 소년과는 610㎞의 국경을 접하고 있다. 터키의 국토면적은 779,452㎢(프랑스와 영국을 합한 넓이와 비 슷함)로서 이 중 97%가 아시아에, 나머지가 유럽에 위치하고 있다. 터키의 동서 횡단거리는 1,600㎞, 남북 종담 거리는 550㎞에 달한다.

3. 기 후

국토의 3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남부 해안선을 따라 산악 지형이 형성되어 있고 중부는 고원지대이며 따라서 다양한 기후 분포도를 보이고 있다. 터키는 전체적으로 우리 나라보다 건조한 편이며 청명 한 날이 많다. 내륙 특히 동부지방은 대륙성 기후이며 해안지방은 지 중해성 및 해양성 기후를 나타낸다. 지중해 및 에게해 연안은 영평균 기혼이 22℃∼24℃ 정도로 연중 고른 분포의 강우량을 보이고 있다. 내륙지방인 아나토리아 고원 지대는 여름은 건조하며 겨울은 춥고 눈이 많이 온다.

4. 인 문

1) 인구 : '89년도 인구조사에 따르면 5,500만명에 달하고 인구밀도 는 71명/㎢이다. 대부분이 이스탄불, 지중해 및 흑해 지역에 밀집되어 있는 편이며 중부 및 동부지방에는 광활한 벌판이 많다.

2) 행정구역 : 터키는 67개의 도로 나누어져 있는데 각 도의 이름 을 가진 도시가 대부분 그 도의 도청 소재지이다. (예, 이스탄불도의 도청소재지는 이스탄불임) 각 도별 인구분포는 이스탄불이 1,000만명 이 넘고, 수도 앙카라 330여만, 이즈밀에 230여만명이 밀집되어 살고 있다.

3) 언어 : 공용어는 터키어이지만 그 외에 쿠르드어도 일부지역에 서 사용되고 있다. 터키어는 우랄 알타이러족중 알타이계에 속하며 우리말과 문장구성, 문법 등에서 상당부분 유사성을 가지고 있다.

4) 종교 : 99%가 이슬람 교도이고 헌법상 정치와 종교를 분리하고 있다. 그러나 타종교에 대해서는 철저히 배타적이며 선교를 허용하고 있지 않다. 단, 소수민족 교회는 로잔협정에 의해 인정하고 있다.

5. 정치 및 경제

연간 60∼70%에 이르는 만성적인 인플레와 500억불에 달하는 외 채부담과 계속적인 무역적자 등으로 경제가 불안정하며 영토 반환을 요구하는 쿠르드족의 테러 등으로 정치및 사회 불안을 가중시키고 있다

6. 한국과의 관계

한국어와 터키어는 일본 및 핀랜드의 언어와 함께 우랄 알타이어계 에 속한다. 지금까지도 면면히 지속되고 있는 한-터 양국어의 동질성 은 한-터 양 민족이 중앙 아시아의 동북방에서 그 연원을 같이 한다 고 하는 주장을 뒷받침하는 바라고 하겠다. 외잘 수상의 설명에 따르 면 터키계 언어는 터키 영토 이외에 소련내에서 7,500만명 이상, 중 국에서 5,000만명 이상, 이란에서 1,500만명 이상, 그 외에 구오토만 제국 영역에 남아있는 터키계 주민들을 모두 합하면 현재 약 2억에 달하는 인구에 의하여 사용되고 있다고 한다.

알마 아타(소련령) 주변에 살고 있는 조선인 후예들은 터키계와 함 께 살고 있는 것이다. 또한 터키 내에 살고 있는 약 500만명으로 추 산되는 탈탈계 터키인 가운데는 우리 나라 사람으로 착각할 만큼 외 모가 비슷한 사람도 적지 않다. 더우기 터키군 1개 여단 병력이 6.25 전쟁에 참전하여 용맹을 떨친 역사적 사실은 지금도 터키인들에게 생생히 기억되고 있으며, 터키는 국제무대에서 한국의 주요 외교 정 책을 가장 적극적으로 지지해 오고있는 우방중의 하나이다. 양국간에 는 사증면제협정(1972.5)을 비롯 문화협정(1974.5)등 각종 협정이 체 결되어 있다.

Ⅱ. 터키의 선교적 상황

1. 과거의 선교역사

1) 초창기 터키의 기독교 : 대체로 오늘날의 터키 지역을 망라하고 있는 소아시아 지역은 초대교회 시대에 완전히 복음화되었던 바로 그 지역들 중의 하나이다. 계시록에 등장하는 일곱교회를 비롯하여 예수님의 제자들이 최초로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리워졌던 안디옥(현 ANTAKYA), 사도 바울의 고향인 다소, 갈라디아(현 수도 앙카라지 역), 그 외 사도 바울이 선교여행시 방문했던 많은 도시들이 오늘날 터키 공화국의 영역에 속해 있다. 당시, 복음이 전파된 지역이 그렇 게 광범위했기 때문에 사도 바울은 골로새 교회에 보낸 그의 편지에 서 "이 복음은 천하 만민에게 전파된 바요"(골1:23)라고 말했을 정도 였다. 그러나 이단들과 차지도 덥지도 않은 신앙, 은둔적인 수도원 생활, 전도를 강조하지 않은 그런 생활 자세 등으로 인해 그당시 영 적 생활을 침체시킴으로 말미암아 영적 생명력은 한없이 약화되고 말았다. A.D.312년에 로마의 '콘스탄틴' 황제의 회심이 있은 후로 A.D.325년에는 그가 현재의 터키 이즈닉시에서 '니케아 종교회의'를 주재하게 되었고 A.D.334년 콘스탄틴은 제국의 수도를 로마에서 비 잔티움으로 옮겼는데 그 때부터 비잔티움은 '콘스탄티노플'(현재 이스 탄불)이라 불리워졌다. 그 후 콘스탄틴 대제가 기독교를 장려함에 따 라 테오도시우스 황제(A.D.378∼398)는 보다 적극적으로 기독교를 강 화했고 그 결과 회심의 경험도 없는 수천 수만의 사람들이 자신을 크리스찬이라고 칭하기 시작했다. 이리하여 초대교회 당시 거룩한 성 도들에게 전해졌던 기독교 신앙은 결국 타락의 길로 접어들게 되었 다. 이러한 영향 속에서 기독교는 점차 정치에 관여하게 되었고, 로 마 제국이 동과 서로 갈라지게 되자 기독교 또한 그 후 수세기 동안 두 가지 형태로 변화되어 그중 하느는 로마의 영향 아래 라틴어를 사용하는 서유럽의 기독교가 되었고, 다른 하나는 콘스탄티노플의 영 향하에 희랍어를 사용하는 동유럽의 기독교가 되었다.

2) 터키를 향한 최초의 현대적 선교 : 1820년에 3개 종파를 대표하 는 '미국 해외선교협회'가 터키 제국내에서 사역을 시작했다. 당시 터 키 제국의 영토는 발칸 반도와 북아프리카일대의 모슬렘 거주지역, 현재의 터키, 시리아, 레바논, 이스라엘, 요르단과 사우디 아라비아의 일부 지역까지였다. 처음부터 이들의 사역의 대상은 주로 대규모 희 랍인들과 아르메니아 소수 민족들이었다. 당시 그들은 고대의 그레고 리안 교회(아르메니안)와 그리스 정교의 신앙이 부활되면 이들이 주 위의 모슬렘들을 예수님께로 인도할 것으로 기대했다. 1820년에 최초 의 선교사 파손과 피스크가 스미르나에 상륙했다. 그들은 대부분이 구교와 이슬람교뿐인 지중해의 남부와 북부에는 개신교 선교사가 단 한명도 없었다고 보고했다. 또한 2천만명의 인구를 가진 터키 제국 안에 지속적인 선교본부가 하나도 없고 그들만이 유일한 선교사라고 보고했다. 그 후 1850년에 이르러는 선교센타들이 널리 설립되었고 현재의 터키 지역만을 예로 든다면 서머나, 콘스탄티노플, 버사, 트라 브존 에르즈룸, 시바스, 가지안텝, 마르딘, 안디옥, 다소, 케사레아 등 지에서 사역하는 선교사들의 수가 증가되기 시작했다. 의료와 교육선 교를 중시하여 대량의 문서가 출판, 보급되기 시작했고 1860년까지는 150여종의 작품들이 희랍어, 터키어, 아르메니아어, 시리아어, 아랍어 로 번역되었다. 그리고 이 무렵에 성경도 현대 터키어와 아르메니아 어로 번역되었다. 또 한때 유명 무실했던 기독교인의 회심이 일어나 자 옛부터 신앙을 고수해온 교회들은 새로운 이단들에 관심을 기울 였다. 1846년 아르메니안 교회는 개신교 신자들을 모두 파문했는데, 그 해 7월 파문된 그들이 이스탄불에 최초의 복음주의적인 아르메니 안 교회를 창립하였다. 14년 후에는 45개의복음주의 교회가 생겼고 20세기 초반까지 약 200여 교회에 2만명 정도의 성도가 생겨났다. 미국 선교협회의 원래 계획은 부흥된 아르메니안 교회로 하여금 스스로 모슬렘들에게 전도하게 한다는 것이었으나 이런 일은 사실상 일어나지 않았다. 수세기 동안 이류 민족으로 전락된 아르메니아인들 오선 터키인들에게 전도할 엄두도 내지 못했다. 그러나 많은 소슬렘 들이 선교사들과의 개인접촉과 서적을 통하여 새로운 복음주의 교회 의 단순한 예배형식에 감명을 받게 되었다. 1856년 이전에는 모슬렘 이 기독교로 개종하면 즉시 처형을 당했다. 1843년에는 한 아르메니 아인이 한 때 모슬렘이라 선언했다가 이제 이를 철회했다는 죄목으 로 콘스탄티노플 거리에서 교수형에 처해졌고, 10년 후에 다시 복음 을 받아들인 두 명의 모슬렘(알레프, 안들아노플)이 처형되었다. 이 사건으로 각국의 압력을 받게 된 술탄 정부는 1856년에 '종교자유 칙 령'을 발표하였다. 이 칙령 발표후 몇년간은 터키 역사에서 모슬렘들 이 기독교로 개종하게 된 유일하고도 특별한 시기였는데, 1860년까지 콘스탄티노플에 15명의 개종자가 생겨났다.

이리하여 1858년 교회선교협회(C.M.S)에서 모슬렘 특별전도를 위 해 4명의 선교사를 파송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신앙의 자유와 말씀의 열정은 1864년의 어느 주일날 일단으 개종자들이 예배를 마치고 나 오다가 체포되어 투옥됨으로써 끝나고 말았다. 성경협회의 사무실은 폐쇄되고 각종 서적은 압수되었으며 선교사들도 집에서 쫓겨나고 말 았다. 신앙의 자유는 단기간에 그치고 이후부터 모슬렘 전도는 강력 한 반대에 부딪히게 되었다.

그 후 터키를 향해 본격적으로 선교활동을 시작한 것은 1900년 이 후 독일 동방선교회(G.O.M) 가 터키와 페르시아에서 선교활동을 시 작하면서부터였다. 그러나 1차 세계대전에 따른 정치적 급변으로 인 해 야기된 대학살과 약 115만명의 그리스인(다수으 기독교인 포함)들 의 귀국으로 인해 터키에는 현재 인구중 고작 0.7%의 기독교인만 명 목상으로 남아 있을 뿐이다.

2. 현재의 선교현황



  1) 터키내 선교사수
    국가 및 선교사수 :  12개국 14개 단체에서 파송된 140명 정도로 추정
    주요선교단체  :  C.C.C., O.M,  WEC,  I.M,  P.I,  YOUTH  OF  MISSION, HOPE 등
    주요사역내용 : 캠퍼스 선교, 교회개척, 의료  및 전문인 선교, 어린이 선교 등

  2) 한인 사역자수 : 총 14명
    지역별 : 이스탄불 9명, 이즈밀 3명, 앙카라 2명
    소속별 : 예장합동 3명, 개혁  1명, 고신 1명, 통합 1명, 기성 2명
             기타 평신도 선교단체 소속
    신분별 : 목회자 6명, 평신도 8명
    성  별 : 남11명, 여3명
    혼인별 : 기혼 10명, 미혼 4명(남1명, 여3명)
    연령별 : 20대 1명, 30대 8명, 40대 5명
    주요사역 내용 : 캠퍼스선교, 교회개척, 부녀자, 어린이선교

  3) 기타 : 1∼2년내 10여명의 한인 선교사 추가 입국 예정

  4) 터키인 교회수 및 교인수
    지역별 : 이스탄불 5개처,  이즈밀 1개처, 앙카라 1개처 총 5개처
             소에서 약 350명 정도 도임
    예배처소 : 기존건물이  있는 교회가 4개, 타국  영사관 부속교회 1개

  5) 한인교회 현황
    기역별 교회수 및  교인수 : 이즈탄불 1개소 - 장년35명,  어린이
                              20명, 이즈밀 1개소-장년20명, 어린이
                              10명
    한인교회의 선교적  역할 : 민족교회로서의  한인 선교사역 후원
                             및 현지인교회  지원(이스탄불 한인교
                             회의 경우 연간 7,000불 지원)  선교사
                             초임부임시 정착 후원

  6) 선교 사역상의 문제점
    현지 제도상의 문제 : 자국민에게 전도시 강제 추방
                         개종한 자국민은 모든  공직 및  직장에서 추방.
                         가족, 친척들로부터 경제적 고립
                         사회나 친구들로부터 고립
    사역 현장에서의  문제 : 지하교회의  비밀선교 활동으로 제한된 만남
                            개종한 형제, 자매들의 결혼 문제, 특히 자매들이 절대부족
                           한인 사역자들 간의 갈등 및  팀웍의 부조화
                           선교사와 본국 파송단체와의 갈등
                           선교사 신분 노출시 추방 또는  극우 모슬렘의 테러 위협 
선교사 개인의 문제 : 언어의 장벽 및 자녀교육 문제
                         거주비자 취득의 어려움(단기3개월∼장기1년)

3. 미래의 선교전망

1) 향후 터키의 선교전망
지리적 조건 : 아시아와 유럽의 연결고리로서 문물교류 활동 등으 로 기독교문화의 접목이 용이 정치적 조건 : 유럽공동체(E.C)가입을 위한 대서방 유화정책의 일 환으로 종교적 탄압 감소 세대의 변화 : 해외유학등 신교육 세대의 등장으로 기독교에 대한 이미지 변화의 가속화와 함께 T.V., 영화등 대중매체의 기독교성 홍 보물 보급확산으로 관심 유발 한국교회의 관심 : 성지순례 등을 통한 터키 선교의 관심 고조 및 선교사 파송이 점증하고 있음

2) 중앙 아시아 선교를 위한 터키의 위치
소련 연방의 붕괴로 인한 독립국들중 투르크멘이스탄을 비롯 카자 키스난, 우즈벡키스탄 등 터지족들이 주종을 이루는 국가들과 기타 중앙 사시아에산재한 2억에 가까운 터키족들을 위한 선교훈련센터가 이스탄불에 세워져 2명의 한인선교사가 훈련에 동참하고 있다.

3) 한국교회의 관심과 지원
선교 2세기를 향한 한국인에 의한 세계선교가 아직도 초기단계 수 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가장 큰 이유중의 하나가 이합집산적인 단체들의 난립과 그러한 단체들으 경쟁적인 실적주의에 의해 선교사 들이 소신있는 사역을 수행하지 못하기 때문임을 인정해야 할 것이 다. 선교 현지에서 가장 큰 문제는 타종교에 의한 탄압보다는 동역자 들간의 갈등과 영역다툼 등 내분에 의해 발생되는 요인이 더 심각함 을 볼 수 있는데 이는 개인적 소영웅주의와 이를 부추기는 파송기관 의 분별없는 소치 때문임을 생각할 때 그리스도 안에서의 겸손한 자 성이 절대적으로 요구된다고 하겠다. 이러한 모습들 때문에 외국선교 단체들은 한국인 사역자들을 경원시할 뿐 아니라 특히 팀에 소속된 경우 결코 지도자로 세우려 하지 않고 수동적인 역할만 맡겨주게 된 다. 더우기 선교사나 단체들이 숙지한 정보를 공유하려 하지 않고 독 점하여 하기 때문에 현지에서 독점하려 하기 때문에 현지에서 낭비 되는 인적, 물적 낭비 또한 적지 않다.

따라서, 이제 파송기관과 선교사들은 현지에서 상호 소속에 구애됨 이 없이 협력사역을 도모할 수 있는 정책적 대안을 제시하고, 선교가 개인의 명예나 단체의 영달을 위한 것이 아니라 주님 나라의 확장을 위해 적그리스와 싸우는 영적전쟁이라는 사실을 인식해야 할 것이다. 이에 후원 단체들은 선교사 개인이나 단체의 지엽적인 목적을 위한 투자에 관점에서 과감히 탈피하여 선교현지에서 한인사역자 공동체 를 위한 사역을 염두에 두고 지원하는 것이 바람직하며, 현지 사역자 공동체의 결성을 통해 집약된 의견과 정확한 정보를 수집함으로써 정책결정에 제대로 반영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제목 : < 터어키 > 선교센타 설립 본격화
   자료원 : 기성
   발행일 : 94년 04월 08일

▣ 터어키 소아시아편지 이터키 선교사

밖에는 때늦은 첫 눈이 소담스럽게 내리고 있습니다. 매년 11월이면 첫 눈을 보게 되는데 금년은 이상난동과 가뭄으로 가뜩이나 메마른 마음 들을 더욱 염려스럽게 하더니 이제 목마름을 적셔 주는군요. 아모스 선 지자는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고 아모스 8장 11절에서 말씀하셨는데, 정말 이 땅은 주님의 말씀이 없어서 지금도 수많은 영혼이 죽어가고 있습니다.

선교사역을 보고 드립니다

석달 만에 성도님들께 인사를 여쭙는 것 같습니다. 정말 죄송스러운 마음을 가둘 길이 없습니다. 작년 11월 이후 여러가지 일들에 쫓기다 보 니 기도중에 뵙는 일외에는 달리 안부를 여쭙기가 쉽지가 않았습니다. 이미 보고드린바와 같이 작년 12월 19일 다섯명의 형제 자매들이 세례를 받았습니다. 본래 7명이 작정을 하고 준비를 하였는데, 그중 두명은 구 원에 대한 확신에 아직 미흡한 부분이 있어서 다음 기회로 미루고 다섯명 만 세례식에 참례하였습니다. 이 일을 위해 멀리 영국에서 김석천목사님 께서 연말의 바쁜 일정도 뒤로 하신 채 오셔서 침례해 주심으로 저희에 게 큰 격려가 되었고, 또한 서울제일교회의 이신복 목사님께서는 세례식 경비 일체를 부담해 주셔서 세례식후에 축하연까지 준비할 수 있게 되어 모두들 감사했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주님께서 다섯 이름이 당신의 생 명책에 기록되어 짐을 보시고 더욱 기뻐 하셨으리라 믿으면서 영광을 올 려 드립니다. 세례식이 끝난 후 이들 다섯명은 현지인교회 목사님과 협 의 후에 양육을 교회에 이양하였고 지금은 전신이 불구인 자페르만 양육 하고 있습니다. 비록 이번 기회에 세례를 받진 못하였지만 자페르는 계속 신앙이 성장해 나갈 뿐만 아니라 자페르를 통하여 여러 사람이 계속 전 도를 받고 교회에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그의 동생 에르랄을 비롯하여 부모님이 교회에 발을 들여놓기 시작하였고 그 뿐 아니라 매주 한 두명의 청년들이 자페르를 통해 저에게 연결되어져서 복음을 듣기 시작했습니다. 인간의 머리로는 도무지 측량 할 수 없는 하나님의 섭리를 다시 한번 절 감하게 되었습니다. 멀쩡하고 잘 생긴 사람도 얼마든지 있는데 자페르와 같이 앉은뱅이를 사용하심은 물론, 더욱이 저같이 쓸모 없는 자를 왜 이곳 까지 보내셨는가를 생각하면 눈물이 앞을 가립니다. 이신복목사님 내외 분과 저희가 유럽을 돌면서 기회 있을 때 마다 함께 찬양 드렸던 찬송 가 410장을 저의 신앙고백으로 주님께 올려 드릴 뿐입니다. "아 하나님의 은혜로 이 쓸데 없는 자, 왜 사용하여 주는지 난 알 수 없도다"

선교센타 설립의 본격화

계속하여 감당해야 할 일 같은 쌓이는데 지금의 방법으로는 성장에 한 개가 있어 그동안 구상해 오던 선교센타 설립을 본격화 하기로 하고 기도 하던 중 주님께서 구체적인 방향을 제시해 주셔서 준비한지 석달만에 거 의 모양새를 갖출 수 있게 되었고, 본부의 승인과 더불어 개원식만 남겨 두고 있습니다. 이 땅에서는 선교센타라는 공식 명칭을 사용할 수 없으 므로, 외형적으로는 성지연구소라는 간판을 걸고, 내면적으로는 교회와 성경학교, 그리고 개종자의 직업훈련 및 선교 접촉점을 위한 각종 프로그 램을 운용하는 복합적인 선교센타로서의 기능을 감당하게 됩니다. 이와 더불어 한인 선교사들을 위한 보수교육 프로그램 제공은 물론 선교자료 창구, 휴게실, 체력단련실, 도서실등의 기능도 점차적으로 갖추어 나갈 계 획입니다. 이 모든 시설과 프로그램의 운영을 위한 자금조달을 위해 기 도하던 중 뜻하지 않게 (물론 주님의 계획하에 이루어진 일임) 그리스 에서 성지여행사를 경영하는 집사님이 터키 지역을 담당할 파트너가 되 어달라는 제안을 해옴으로서 사실상 문제의 일부를 해결 할 수 있게 되 었습니다. 현재 터키에는 몇개의 여행사가 운영되고 있는데 개인의 영리 에만 집착하여 사실상

성지순례의 뜻과는 거리가 먼 관광 차원을 벗어나지 못하였던 것이 사 실이고, 더욱이 성지를 안내하는 가이드가 모슬렘 신자이거나 비신앙인 이 다수여서 이를 바라보는 저희 선교사들에게는 큰 부담거리였던 차에 그리스를 중심으로 터키, 이스라엘 지역을 대상으로 오랫동안 성지여행사 를 운영해 오고 있던 집사님이 사업확장과 함께 한국교회 성도들에게 성 지를 바로 알리자는 목적으로 터키지역 파트너로 저를 지목하여 부탁하 게 된 것입니다. 저 역시 그 위치에 동의하여 그 일을 맡되, 저는 선교 센타 운영을 맡기로 하고, 여행사 경영부분은 제가 예비선교사로 양육하 고 있는 오00자매가 과거 여행사 운영에 관여한 경험이 있어서 그 일을 담당하기로 하였습니다. 그런데 사무실도 준비되지 못한 상황에서 일거 리가 밀려드는데, 시작단계에 불과함에도 불구하고 많은 순례객들을 주 님께서 맡기시기 시작하셨습니다. 한달간은 오00자매가 집에서 이일을 처리하다가, 결국 지난 1월 주님께서 선교센타로 쓰기에 적합한 50여평 의 공간을 허락하셔서 그곳에다 사무실과 선교센타를 위한 기본 시설작업 을 모두 마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 일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여러가지 의 많은 부분들이 너무 힘들고 견디기 어려워 몇번씩이나 포기 할까도 생 각했지만, 그 때마다 후원교회와 중동선교회 그리고 동료선교사들의 격려 와 기도의 뒤받침으로 마침내 이기고 또 이길 수 있게 되었습니다. 무엇 보다도 힘들었던 것은, 은행의 중역으로 있는 화티형제가 지난번 세례 받은 사실을 은행장에게 고발하겠다는 사탄의 최후 발악적인 협박에 제 자신이 많이 흔들렸는데, 오히려 당사자인 화티와 오00자매는 조금도 두 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그리스찬임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며 어떤 고난도 감 수하겠다는 의연한 모습을 보여주어서 너무나 대견스러워 많은 눈물을 흘 렸습니다. 이 엄청난 시련의 과정을 통해 제가 받은 은혜는 너무나 컸 습니다. 물론 주님이 끝까지 신뢰해 주셨다는 사실이 너무 감사했습니 다. 이제 주님의 권세와 우리의 요동치 않는 믿음에 눌려 사탄은 물러갔 습니다. 그러나 이 선교센타를 통해 이루어질 주님의 크나 큰 역사를 알 고 있는 사탄이, 또 우리의 연약함을 틈타서 다시 공격해 올 것이 분명 하기 때문에 잠시도 방심할 수가 없습니다. 물론 지금 당장 선교센타에 채워야 할 물질도 많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필요한 것은 여 러분의 기도입니다. 이 프로젝트는 사실상 터키 전역에서 처음 시행되는 사업입니다. 그러기에 그 중요성은 더욱 크다고 봅니다. 운영을 맡고 있 는 저희에게 지혜를 주시기를, 그리고 보다 위험스러워진 저희의 신변 안 전을 위해서도 기도해 주십시오.

인간적으로는 왜 이런 고생을 굳이 사서 하는 건지 후회도 되지만, 고린도전서 15장 19절 말씀에 기록된 대로 "우리의 바라는 것이 이 땅 뿐이면 우리가 불쌍하기 위를 데 없지만" 주님 나라의 소망 때문에 이어 진 31절 말씀처럼"날마다 죽기로"작정하였습니다. 또한 저희가 비겁해지 지 않도록 기도해 주십시요. 오00자매와 화티 부부는 계획했던 대로 이 번 주중 무디성경학교 연구과정에 등록하고 예비선교사로서의 첫걸음을 내디디게 됩니다. 이 과정이 끝나면 한국이나 미국에서 정규 신학과정을 이수할 계획입니다. 이들의 지속적인 성장을 위해 계속 기도해주십시요. 그리고 여러분들의 기도의 응답으로 혜영이 형제들에게 호적을 만들어 주 겠다는 결정을 한국 정부로부터 통보 받고 수속에 들어갔습니다. 주님, 그리고 여러분 감사합니다. 이 일을 위해 이름없이 모든 것을 뒷바라지 해주고 계신 집사님, 정말 감사합니다. 주님께서 L집사님의 아름다운 마 음을 받으실 것입니다. 혜영이 오빠 장희는 12월에 술집을 그만두게하고 대학에 들어갈 수 있도록 검정고시를 준비시키고 있습니다. 장희는 혜영 이와 달리 일찍부터 사회 생활에 젖었기에 거칠고 염려되는 부분이 적지 않지만 말씀과 사랑안에 교정되어 가리라고 믿고 정성을 쏟아 부을 생각 입니다. 요즘 바쁜 일들에 쫓겨 중풍병으로 앓고 있는 알리형제를 방문 하지 못한게 오래인데 날마다 눈물로 저를 기다린다는 연락을 받고 제 마 음이 무겁습니다. 하나있는 자식에게 조차 관심을 가질 여유 없는 제 자 신이 조금은 한심스러운지 아내에게 종종 핀잔을 듣기도 하는데, 정말 옆 에서 누군가가 조금이라도 일을 거들어 주었으면 하는 바램이 간절할 때 가 많습니다. 하지만 목사님의 새벽부터 늦은 밤에 이르는 수고를 생각 할 때 그것마저 호사스런 불평 같아서 되삼킬 뿐입니다. 더욱이 두 눈 을 잃고 두 손 마저 잃어버리신 박창운목사님을 얼마전에 이곳에서 뵙 고, 그분의 자서전을 선물로 받아 읽은 적이 있는데, 제 자신이 너무 부끄러워 한참 동안을 그냥 운적이 있습니다. 정말 내가 하는 일은 아무 것도 없는데, 혹시 라도 네 자신이 주장되고 혹이라도 내 생각이 주님을 앞서게 될까 늘 두렵습니다. 부족한 저를 위해 더욱 많은 기도를 부탁 드립니다. 아직도 그치지 않는 눈발이 주님의 은혜인양 늦은 밤길을 환히 비춥니다. 저 순결한 빛이 이 어리석은 백성에게 이사야서 1장 18절의 말씀처럼 "주홍 같은 죄를 희게하시는 주님의 자비"로서 임하시기를 소망 하며 새해 늦은 문안 인사를 교회와 성도님들에게 올려드립니다. 마라 나타!

이터키 선교사 올림



     제목 : 터어키에서 온 기도편지
   자료원 : 예장합동 김원호 김세도  선교사
   국가명 : 터어키
   발행일 : 93년 10월 01일

교회의 머리되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문안드립니다. 일상적인 상황같으나 깊은 영적인 진리를 깨닫게 하시는 주님의 손길 을 힘입어 보고를 드리며, 기도의 힘을 모으기를 간곡히 요청해 드립 니다.

상황보고

6월 27일(주):마을 부인 2명 교회방문 경제적으로 어려운 마을 주변의 사람들이 가끔 교회의 문을 두드립니 다. 단순히 구제로 끝나지 않고 전도의 좋은 기회로 삼으며 복음과 함 께 물질을 나누고 있습니다.

7월 4일(주)-10일(토):터어키 전체 크리스찬 어린이 캠프' 제이틴부르노교회에서는 학부모겸 교사 3명, 어린이 14명이 참석하였 습니다. 매년 열리는 이 캠프에 올해는 약 100명 가량이 참석하고 네 덜란드의 교회와 내년에는 한국 교회의 지원을 기대하며 기도해 봅니 다.

7월 24일(토)-8월7일(토):터어키 전체 크리스찬 캠프 제이틴 부르루교회의 "오르한"과"세밀"의 주관으로 해마다 열리는 이 캠프는 함께 부푼 기대를 갖게 하는데 올해에도 귀한 간증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이러한 간증들이 터어키내 일반잡지에 게재되기도 하여 머뭇거리는 사람들에게 자극과 도전을 주고 있습니다.

7월 30일 (금) -8월 3일(화) :중앙아시아 여름 단기팀'오리엔테이션 제이튼 부르누교회에서 열기로 예정되었으나 주변 무슬림들의 방해로 취소됨.

'오엠'선교회에서 주관하고 각국의 선교사들과 한국, 불가리아,터어 키에서온 훈련생들로 구성된 연합팀인 이번 단기팀의 오리엔테이션이 제이틴부르누교회에서는 열리지 못하였으나 교회 부젼 무슬림들의 잠 복된 반응을 다시한번 볼 수 있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8월 28일(수):교회내에 중앙아시아 성경 반입 이번 단기팀이 중앙아시아에 운반하기 위해 독일에서 2대의 미니버스 로 운송하여 본 교회에 보관하게 되었습니다. 중앙아시아의 키르기즈 어,위즈벡어,투르크멘어,카자크어로 번역된 성경전서 혹은 쪽 복음들 은 단기팀 만큼 귀중한 자료들이었습니다.

7월 29일(목) 오전: 교회에 경찰들 방문 및 조사 교회에 성경을 반입하는 것을 지켜본 무슬림들이 경찰에 신고하여 조 사를 의뢰하여 오게되었던 것입니다. 교히내의 어떠한 활동도 허락한 다는 '집회 허가서'를 직접 발부한 경찰 당국은 단지 무슬림들의 소요 에 원인을 제공할 어떤 근거라도 있는 지를 확인하는데 그쳤습니다. 각국 언어로 된 성경을 한 권씩 견본으로 가져갔지만, 터어키 내에서 성경을 많이 가지고 있다는 자체가 문제가 되는 상황은 오래전의 일입 니다. 이스탄불에도 2-3개의 기독교 서점에서 합법적으로 성경을 공개 판매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7월 30일(금) 오후: 무슬림 과격 청년들 교회에 돌을 던지기 시작. 경찰당국에서 집회와 성경 반입이 아무런 법적 하자가 없다는듯 반응 이 없자 물리적으로 집회를 무산시키려고 돌을던져 교회 유리창을 깨 기 시작하였습니다. 교회내에서는 마침 단기선교팀들의 식사 준비를 위해 대기중이던 '넬잔'부인이 혼자 있었으나 교회 사무실에서 기도중 이었으므로 인명 피해없이 소요가 그쳤습니다. 오리엔테이션은 타 교 회에서 실시되었습니다.

8월 1일 (주일) :김세도 목사 주일예배 첫 설교 터어키어로 설교 원고를 준비하지 못한 탓에 설교 도중 시종일관 한선화 선교사(김원호 목사 사모) 통역으로 마칠 수 있었습니다. 터어키 에서 설교및 강의를 터어키어로 자유롭게 할 수 있으려면 2년정도의 언어 훈련이 필요하다는 선배 선교사의 조언을 확인하는 좋은기회였습니다.

8월 5일(목) :김세도 목사 가정 득남

8월 13일(금): 아라 형제 가정 쌍둥이 출산

남녀 쌍둥이를 얻게 되었으나 남자 아기의 체중이 1.5KG 인데다가 병 원에서 생존 불가능 판정을 내려서 온 교인들이 위해서 기도중에 있습 니다. 감사하게도 '아라'형제부부는 평강 가운데 주님께 모든것을 맡 기고 있습니다.

8월 15일(주):한국에서 지도자 훈련을 받기 위해 간 일행 귀국. 본교회 장로회의 일원인 김원호 목사의 인솔로, 역시 장로회의 또 다 른 일원인 "세밀"전도사 불가리아 터어키인 목사. 전도사(하산,레팔, 세닫)이 한국에서 70일간의 훈련을 마치고 귀국했습니다. 창성교회(예장합동,당회장 :김건식목사)에서 선교지의 지도자 훈련을 위한 임상 프로그램으롬 실시된 이번 훈련은 하나님께서 한국 교회에 주신 교회 성장의 요인들을 경험케 하고 이를 선교지의 교회에서 응용 해보는 것을 그 근본 취지로 하였습니다. 새벽 기도회,산상기도회, 금식기도 등의 기도와 제자훈련,심방, 구역 예배 등, 목회 전반에 걸친 종합 후련이 터어키에 또 다시 부흥운동으 로 이어져 예배 등 목회 전반에 걸친 종합 훈련이 터어키에 또 다시 부흐운동으로 이어져 '제2의 안디옥 교회' '제2의 성령 행전'이 재현 되기를 기도해 주십시오.

미국의 김의환 목사 부부, 괌의 조환 목사 부부 방문.

아프리카의 선교대회차 귀국 길에 잠시 방문하시어 말씀을 통해 성도 들께 주님의 위로와 선교의 비젼을 나누었습니다.

동네 과격 청년과 아이들 주일학교 예배시 방문하여 위협. 찬양드리는 어린 주일학교 학생들에게 와서 교회를 폭파하여 문을 닫게 만들겠다고 위협하고 돌아갔습니다. 교회 출입문 입구 1층에 주 일학교 하는 여교사만이 어린이들과 함께 두려움으로 이 현장에 있게 되었습니다. 예배후 회의를 통해, 주일학교 예배실을 지하로 옮기기로 하였으나 이 과격 청년들의 위협은 끊이지 않을 전말입니다. 아무쪼록 어린아이로부터 노년에 이르기까지, 주님의 몸된 교회에 계속되는 주 위의 풍랑에 믿음으로 주님을 의지하고 주님의 명령으로 풍랑이 잠잠 해 질 수 있음을 신뢰할 수 있도록 기도해 주십시오.

여러분들과 저희들은 갈릴리 호수위의 제자들과 같이 믿음으로 이 풍 랑을 이기기를 원하시는 주님의 기대앞에 함께 서있습니다.


KCM Home | 세계선교정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