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주삼(梁柱三) 한국 감리교회 창설의 주역

1. 머릿말

양주삼(梁柱三) 양주삼은 1879년(고종 16년)1월 25일 평남 용강군 산남면 홍문리에서 가난한 선비 양정섭의 맏아들로 출생하였다. 어려서부터 조부에게 한문을 배웠고 이병준이란 한학자에게서 전통 유학을 배웠다. 그러나 부친의 축첩과 이에 따른 가정불화,조선조 말기 지방 관리들의 탐학에 따른 사회불안 등으로 십대에 그는 정신적인 방황을 하게 된다. 이 같은 상황 속에서 탈출하기 위한 종교적 구도 행위는 유교,불교를 통해 마지막엔 동학에까지 이르렀다. 그러나 어디에서도 영혼의 안식을 찾을 수 없었다.

2. 기독교 입문

그가 십 오륙세 쯤 되었을 때 용강에 낯선 인물들이 들어 와 이상한 敎를 전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용강의 식자들 사이에 이상한 책들이 나돌기 시작했다. 이 낯선 인물들은 미국인 선교사들이었고 이상한 '교'는 '예수교'였으며 이상한 책은 한문으로 된 기독교 서적들이었다. 장로교의 베어드(W.M Baird:裵偉良),감리교 선교사 노불(W.A.Noble:魯善乙)등이 평양에 본부를 두고 용강,삼화,진남포 등지에 선교활동을 벌이며 각처에 교회를 설립하였고 이들을 통해 중국 상해에서 기독교 문서들이 식자 층에 얽히고 있었던 것이다.

유교,불교,동학에서 실망을 느낀 소년 양주삼의 호기심을 끈 것이 바로 이 서양인의 종교 기독교였고 그를 이곳으로 이끈 책이 만궁공보란 잡지와 덕혜입문이란 전도서였다. 누구에게 전도를 받아서라기보다 책을 통한 구도행위로 기독교를 알게 된 후 1898년,열 아홉나이에 스스로 용강읍에 있는 교회를 찾아 갔으니 그것이 기독교인으로서 그의 삶의 시작이었다.

가족이 배척과 보다 넓은 세게에의 꿈을 이루기 위해 1899년 겨울 그는 집을 떠나 1900년 3월 인공 양장 전습소에 들어가 7개월 강습을 받으며 신 교육을 처음 맛보았고 이어 헐버트(H.B.Hulbert)와 콜리어(C.T.Collyer) 선교사의 소개장을 받아 들고 인천을 떠나 중국 상해 도착,1901년 5월 남감리교회에서 운영하는 중서서원에 입학하였다. 재학 중 파커 원장에게 세례를 받았고(1902.10.7),졸업(1905.6)후 영국 런던을 거쳐 1906년 1월에 미국에 도착하였다. 처음 몇 달은 뉴욕 지방에서 지내다가 샌프란시스코로 옮겨 샌프란시스코 한인 교회를 설립(1906년12월15일)하여 한인 교포들의 권익을 보호하며 교육까지 실시하는 종합적 사회사업 기구로 까지 발전시켰다. 양주삼은 이 교회 전도사 일을 보게 되었고 1907년 3월 샌프란시스코 지방회에서 정식 전도사 직첩을 받았다. 1908년에는 대도를 창간,재미 한인 교포들을 위한 계몽지로 키워 나갔다.

그러나 그는 미국 남감리회의 정식 전도사로까지 임명받은 이때까지도 목회자로서의 길은 생각지 않고 있었다. 그러다가 1909년 7월 어느날, 그는 기도중에 "하늘의 복음을 전하는 일을 평생의 사명으로 삼으라"는 소명을 듣게 되었고 이것으로 그의 고뇌는 끝났다. 그는 신학을 정식으로 공부하기로 작정하였다.

3. 목회자로서의 삶

샌프란시스코 한인회 전도사직을 사임하고 1910년 1월 벤더빌트 대학교신학부에 입학하여 1913년 6월에 졸업하였는데 재학중인 1912년 10월 집사 목사 안수를 받아 비로소 목사가 되었다. 밴더빌트 대학을 졸업한 후 1913년 9월 예일대학 신학부에 입학,1년간 수학하였고 1915년 1월,15년만에 귀국하였다.

귀국하자마자 그는 감리교 협성신학교 교수로 취임하였고 그해 6월 용강출신 감리교 여자 성경학원 교수 김매륜(1888-1980)과 결혼하였다. 그해 10월에는 남감리회 조선 매년회에에서 장로 목사 안수를 받았고 자교교회 담임도 겸하였다. 1916년 2월에는 협성신학교 기관지인 신학세계 창간에 참여,편집을 맡기도했다. 서울에서 신학교 교수,자교교회 목사<신학세계>편집인으로서의 바쁜 생활은 20개월 계속되었다.

1916년 9월,그는 연회 파송으로 개성으로 임지를 옮겨 윤치호가 상해의 중서서원을 본 따 설립한 한영서원(후의 송도학교)교사로 부임하였고 이듬해 부원장이 되어 1년간 봉직하였다.

1918년 [미국감리교 선교 1백주년기념사업]의 총무가 되어 5년에 걸친 전도 운동을 주관하였으며 1919년 9월에는 종교교회 담임목사가 되어 2년간 시무하였다. 이 기간중에 무엇보다도 1920년부터 시작한 만주.시베리아 선교사업이 크게 발전한 것이 획기적인 업적이었다.

1923년부터는 다시 협성신학교 교수로 취임하여 목회자를 양성하는 한편 만주,시베리아 선교관리자,철원지방 장로사,서울 지방 장로사 남감리호 조선연회장으로서 교회를 치리하였다.

이무렵 그는 국제적으로 한국의 감리교회를 대표하는 인물로 부각되었다. 연희전문학교 이사,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이사, 조선기독교 연합공의회 회장을 역임하였으며 한국교회 대표로미국 남감리회 총회,일본메도디스트교회 총회,예루살렘 국제선교대회에 각각 참석하였다.

이같은 교회 안에서의 지도적 위치를 확보한 양주삼 목사의 능력은 한국 안에서 남.북 감리회가 합동하여 [기독교 조선감리회]를 창설하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함으로 최대한 발휘되었다.

1927년 남북감리회 합동 연구위원회가 구성되었고 1930년 합동 전권위원회가 조직되어 본격적인 교회 합동을 추진하여 마침내 1930년 12월 2일 역사적인 통합 기독교조선감리회 탄생이 이루어졌다. 이 모든 과정에서 양주삼 목사는 합동연구위원,합동전권위원으로 활약하였음은 물론이고 합동 총회에서 그가 초대총리사로 선출되었다. 신학과 신앙과 목회정신을 겸비한 양주심 목사의 능력은 1934년 제2차 총회에서 총리사에 재선됨으로 입증되었다. 1938년 제3차 총회에서는 계속 그를 총리사로 추대하려는 움직임이 있었음에도 과감하게 김종우를 후계자로 세우고 퇴임의 용단을 내렸다. 이 기간중에도 그의 초교파적,국젝 활동은 계속되었다. 이화고등여학교 설립자,해주구세요양원 이사,송도고등보통학교 이사,숭덕학원 이사,조선기독교서회 이사를 역임했고 한국 교히 대표로 미국 북감리회 총회,중국 남감리회 창립50주년 기념대회,북감리회 동아대회,믹구 남감리회 총회에 각각 참석하였고,미국랜돌프 메이컨대학과,개릿신학대학에서 각각 명예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1938년 총리사직에서 물러난 후 그는 자원하여 만주 선교사업 관리자로 취임, 1920년대 시작한 만주 선교사업을 계속 추진하였다. 60노구를 이끌며 만주선교연회 산하 32교회,4천5백여교인을 돌보는 힘든 교역업무를 자진하여 맡았던 것이다. 그러나 대륙침략의 꿈을 실현하고 있던 일본 제국주의의 방해로 교회는 심각한 도전을 받게되었고 암흑기에 접어 들었다. 일제는 일선에서 물러 난 양주삼 목사를 다시 끌어 내 자신들의 정책 도구로 삼았다.

양박사는 이로 인해서 마음엔 없지만 감독직을 내어 놓은 후에도 여러가지 본의 아닌 협력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혁신교단의 창설을 비롯해서 교단의 크고 작은 일에는 언제나 그가 참여하지 않을 수 없었고 전임 감독이라는 이유 때문에 언제나 리스트에 오르내렸고 무엇보다도 가장 가슴아팠던 사건은 국내에서 한창 신사참배 문제가 거론되었을 때 어쩔 수 없이 앞에 나가 자진 신사참배를 주장하게 되었다(장병욱 한국감리교의 先驅者들 성광문화사,1978,162-3면).

그는 일제시대 희생자의 표본이었다. 말기엔 정춘수 통리사에 의해 목사직까지 박탈당하였고 교회 현장을 떠날 수 밖에 없었다.선교사들이 떠나고 난후 성서공회와 서회를 어떻게든 지키려 애썼으나 그것도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해방후 그는 "친일"의 오욕을 쓰게되고 반민특위에 걸려 서대문 형무소에 일시 수감되는 또 다른 아픔을 겪게 된다. 다행이 이승만 대통령의 특명으로 석방되기는 했으나 또다른 아픔을 겪어야 했다.

폐허가 되다시피한 서회와 성서공회를 되살리는데 힘을 기울이다가 6.25 사변이 터졌고 결국 1950년 8월 23일 남침한 공산군에게 체포되어 어디론가 끌려감으로 영원한 어둠 속에 잠겨지고 말았다. 그의 마지막 공직은 1949년10월부터 맡은 대한적십사자 총재였다. (이덕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