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천우(南天祐) 감리교 목사 독립운동가

남천우 (1895-1969)
호는 일포(一抱). 강원도 홍천군 화천면 장평리에서 남상백의 3남으로 출생하였당. 어려서 한문을 수학하였고 1913년 고향에서 보통학교를 마친후 1915년 서울 휘문고보를 2년 수료했으며, 1917년 청년학관을 2년 수료하였다. 1919년 세례를 받고 기독교인이 되었다.

3.1운동 당시 홍천지구의 만세시위를 주동하였으며, 그해 상해 임시정부의 연통제 실시에 이어 강원도 단장으로 임명되어 지하운동에 투신하였다. 1920년부터 전도생활을 시작하여 조종(朝宗)구역장으로 시무하였고 1912년 전조사 직첩을 받았다. 1924년 양구 구역장으로 임명되고 1925년 집사목사 안수를 받았다.

1927년 독립운동단체인 신간회에 참여하여 양구지구 조직을 담당하였고 1928년 협성신학교를 졸업(14회)하였다. 이어 강원도 양구교회로 부임하였고 1929년 인제교회로 전임했으며, 동시에 인제 정의여학교 교감을 겸임했다. 1931년 홍천지방 감리사로 피택되고 당시 강원도 모곡에서 민족운동을 벌이던 한서 남궁억선생과 교분을 갖고 민족운동에 참여하던 중 1932년 기독교인을 중심으로 하는 독립운동 단체인 비밀결사 [십자가당]을 조직하고 그 당수가 되었다.

이는 기독교적인 진리의 실현을 전제로 하여 조국과 민족을 압제로부터 구하자는 뜻으로 조직되었ㅎ다. 1932년 3월 부터 그를 중심으로 유자훈(당시 홍천교회 목사).김경한.이윤석.김복동.어인손.김재인.남궁모 등 뜻을 같이 하는 20여명의 기독교인 애국지사들이 춘천 기독교여자관 지하실에서 비밀리에 회합하고 기족교 민족사회주의를 표방하는 정강을 초안함으로써 이 운동은 구체화 되었다.

이들은 그 구체적 활동으로 종교집회 및 비종교 집회를 통하여 일반 민중의 민족의식 각겅을 고취하는 활동을 비롯하여 농촌지역의 청년운동은 물론 당시 연희전문학교와 보성전문학교 학생들을 통해 방학을 이용한 농촌 계몽활동을 뒷받침하는 등의 적극적인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1933년 4월 일제에 의해 그 전모가 발각되고 많은 인사들이 투옥되었다. 이때 당수인 그는 3년여의 옥고를 치러야만 했다.

출옥 후 만주로 건너가 1936년 2월 부터 공주령 감리교회에서 교역했고, 1938년 1938년 만주감리교신학교 교수로 재직하였다. 39년 장로목사 안수를 받고 원산의 중청교회 목사로 부임하여, 42년 원산보혜고등성경학교장에 취임하고 이어 원산지방 감리사로 임명되었다. 43년 충남 대전 제일감리교회로 전임하였으며, 44년 대전보육원장에 취임하였다. 해방루 45년 9월 대전 이재동포 원호회장으로 선출되었고, 10월 건국준비 단체인 독립촉성국민회에 참가하여 충청남도 지부장으로 활동하였으며, 그해 11월 미군정청 충청남도 고문에 위촉되었다.

46년 충청남도 후생협회장에도 선임되고 독립촉성국민회를 대한민국회로 개편하자 충청남도 본부위원장이 되었다.47년 대전 중앙감리교회를 설립하고 이를 담임하였으며 충남 사회사업책임자로 활약하던 중 한때 미군정청에 투옥되었고 57년 자유당정부의 부정선거에 항의하다가 6개월의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58년 민주당 중앙위원에 피선되었으나, 60년 정계에서 은퇴하는 한편 대훈 농목장을 건립하고 이를 경영하였다. 그후 69년 6월 30일 노환으로 별세했다. 1977년에 정부로부터 독립유공자로 지정되어 정부표창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