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활란(金活蘭) 한국최초의 여자박사(이화여자전문학교 제7대 교장이됨)

[1899.2.27-1970.2.10]
인천에서 출생

1. 출생과 성장

김활란 "나는 인간의 생명이 영원 불멸하다는 것을 믿고 날마다 하나님께서 힘주시는 대로 더 좋은 생명의 길을 찾기 위해 살아왔소, 육체와 환경에 얽매인 것을 극복하면서 내 나름대로 승리의 길을 걸어 오느라 힘 썼습니다...." 이 말은 믿음의 교육자 김활란 박사의 마지막 유언이다.

장례식 대신 더욱 화려한 승리의 길로 환송하는 음악회를 열어 달라고 한 그녀는 경기도 인천 베다니마을에서 선비 김진윤과 초기 기도교 인이 박또라를 양친으로 출생하였다. 내리교회 전도부인 헬렌에게 전도받은 그녀의 어머니는 이를 온 가족에게 권유하여 가족 모두를 기독교신자가 되게 했다. 그녀는 어려서 어러미로부터 기독교적인 신앙교육을 받았고 7세때 세례명을 받고 세례명을 헬렌(Hellen)으로 받았는데 아버지가 활란이란 이름으로 고쳐주었다.

2. 학창시절

8세때인 1907년 인천 영화학교에 이듬해에 온 가족이 서울로 이주하여 이화학당에 전학하였다. 이때 이화학당은 창립 20주년을 맞고 있었다. 1885년 8월 전동에 초가집 아홉채와 버려진 땅 얼마를 사서 시작된 이화학당은 1886년 5월 31일 첫 학생을 맞아 이날을 개교기념일로 삼았다. 10세 때인 1908년에는 고등과에 진학하였고 1918년 3월 27일에 마침내 정동교회에서 졸업식을 가지게된 김활란은 이화학당의 유일한 제5회 졸업생으로 졸업했다. 졸업때 "여자의 고등교육과 가정과의 관련"이라는 제목의 졸업연설을하여 주위의 비상한 관심을 끌며 칭찬을 받았다.

3. 전도대구성, YWCA 조직

이후 모교인 이화학당에 몸을 담고 후진을 양육하는데에 헌신하게 되었다. 1920년 6월에는 자신과 이화학당의 학생 (김활란 홍에스터, 김 함나,윤성덕, 김보린, 김애은, 김신도)으로 구성된 7인 전도대를 결성, 여름방학을 이용하여 전도여행을 나섰다.

"예수님처럼 민족을 위해 필요한 때에는 목숨이라도 바칠 수 있어야 한다는것과 우리 민족이 잘사는 길과 건강, 교육, 사회, 경제를 개선시키는 것"을 최대목표로 삼은 7인 전도대는 YMCA 강당에서 전도비용 을 위한 모금 구령회를 열어 많은 의연금도 모았다. 이에 평양, 신의주, 선천, 안주, 곽산, 정주, 북진, 양시, 차령관, 강서 등지를 돌며 복음전도는 물론 여성계몽운동도 함께 전개했다. 전도대가 활동하는 마을마다 좋은 성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강연의 내용이 민족 정신을 고취하고 있다는 이유로 일제의 심한 제재를 받아야 했고 마침내는 도중에서 중단되고 말았다. 그후 1922년 김활란은 처음으로 외국 여행을 하게 되었다. 북경에서 열린 기독학생연합회의에 한국대표로 참석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김활란은 북경방문을 통해 많은 경험을 쌓게 되었다. 그리고 귀국후 YWCA 조직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낀 김유각경 등과 함께 한국 YWCA를 창설하였다. 이로써 이후 한국여성 운동의 기틀을 마련하게 되었다.

4.여성지도자로서의 성장(해외 유학)

이화학당의 선생이 된 김활란은 여러 동료 선생님들로부터 신뢰를 받았다. 그래서 아펜젤러 교장과 월터, 모리스, 칸로 등 여러 선교사들은 그녀를 한국여성을 위한 여성지도자로 키우기위해 미국에 유할을 보내기로 했다. 1922년 7월 그녀는 미국의 명문 감리교 대학인 오하이오 웨슬레안대학으로 유학을 떠난다. 미국에서의 생활은 장티푸스로 고생하는 등 만만치 않게 고난이 끊이지 않았지만 오로지 공부에만 열중했다.

1924년 6월 김활란은 문학학사 학위를 받고 계속해서 보스턴 대학교대학원 철학과에 진학 1년만에 "철학과 종교의 관련성"이란 제목의 논문으로 석사학위를 취득했다. 활란은 자신이 공부하도록 길을 열어주신 하나님께 다시 한번 감사드렸다. 그동안 그녀는 1923년 6월 위싱파턴에서 개최된 여자기독교청년회세계대회(YWCA 세계대회)에 참석하기도 했다.

박사학위를 준비할 즈음, 이화학당의 아펜젤러 교장으로부터 귀국하여 모교를 도와달라는 부탁을 받고 귀국,이화여자전문학교 교수로 재직하며 영어와 종교과목을 가르쳤다. 그녀는 이화학당에 재작하며 1927년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개최된 태평양문제연구회의에 참석하는 것을 비롯, 1928년 1월 상해에서 열린 극동기독교지도자회의에 한국대표로 참석, 5월에는 미국 켄자스에서 개최된 북미기독교 감리회 대회에 참석, 1929년 일본 코오토에서 개최된 태평양문제여구회의 등에 참석하여 국위를 선양했다.

5. 한국최초의 여자박사

1930년 김활란은 아펜젤러 교장의 권유로 중단했던 공부를 계속하기위해 미국 유학길에 올라 콜롬비아 사범대학에서 박사과정을 밟아 1931년 "한국의 부흥을 위한 농어촌 교육"이란 제목의 논문으로 철학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한국최초의 여성박사학위 취득자가 된 그녀는 귀국하여 국내에서 대대적인 찬사와 경의를 불러일으켰다. 특히 항상 남자들의 그늘 속에서 눌려 살아야 했던 여성들에게 큰 희망을 안겨주는 상징이 되었다. 또한 그녀는 최초의 여자 박사로서 학생을 가르치고 학교의 어려운 사무를 처리하며 바쁜 나날을 보내면서도 주일이 되면 하루 종일 교회에나가 하나님께 찬양드리고 교회학교 교사로 봉사했다. 한편 1932년에는 미국 애틀란타의 북미가 기독교감리회대회에, 1930년에는 씰난섬의 여자기독교 청년회 동남아시아대회에도 참석했다.

6. 일제의 탄압과 수난(이화여자전문학교 제7대 교장이됨)

그동안 이화학당은 계속 발전하였다. 그런데 1936년부터는 가중된 일제의 기독교학교 탄압과 신사참배의 강요로 이화학당은 커다란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특히 외국인 선교사들이 스파이 짓을 한다는 이유로 감시하며 공공기관 운영을 금시시켰다. 그래서 이화학당의 아펜젤러 교장은 김활란 박사에게 교장직을 물려주기로 결정, 1939년 4월 김활란박사는 제7대 이화여자전문학교 교장으로 취임한다. 이때 그녀의 나이는 40세였다.

매우 어려운 시기에 커다란 책임을 지게 된 그녀는 더욱 열심히 기도하며 힘과 능력을 다해 학교를 위해 일했다. 그런데 설상가상으로 1940년 우리나라에 와 있는 외국인들에게 모두 본국으로 돌아가라는 추방령이 내려졌다.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도움을주던 선교사들이 떠나가자 이제는모든 일을 혼자 처리해야 했고 또 신사참배를 거부하는 다른 기독교학교들이 하나 둘 폐교되어 갔다. 그러나 김활란 박사는 어떤 고난이 닥쳐와도 이화는 이에 굴하지 않을것이라 결심하고 뜨거운 기도로 어려운 이 시기를 헤쳐나갔다. 그러나 세계2차대전이 막바지에 이르자 일본은 죄없는 우리 젊은이들을 전쟁터로 내모는 강연을 그녀에게 강요했다. 그녀는 결국 학교를 유지하기 위한 수단으로 본의 아니게 일제에 대한 협조를 감수해야 했다. 이는 그녀의 일생을 통해 가장 큰 회한이 되었다.

7. 해방과 이화여자대학교 (종합대학으로)

1945년 8월 15일 정오! 라디오에서 중대발표가 있다고 했다. 그 중대발표는 일본이 무조건 항복한다는 내용이었다.

"해방,해방! 드디어 해방이 됐다."
온 국민들이 해방의 기쁨으로 태극기를 손에 들고 거리로 나왔다. 해방이 되자 우리나라의 지도자들은 나라의 재건을 위해 열심히 노력했다. 김활란박사도 그해 12월 대한촉성부인회를 조직하여 독립정부수립에 크게 기여했다. 한편 김박사는 이화학당의 발전을 위해 더욱 노력했다.먼저 이화전문 학교를 종합대학으로 발전시키기 위해 한림원, 예림원, 행림원, 등의 3개 단과대학으로 나눠 종합대학교가 되기 위한 준비에 박차를 가하며 이를 인가 받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1945년 10월 1일 드디어 신촌에 자리한 이화학교 정문에 "이화여자대학교"라는 새 간판이 걸렸다. 비록 정식허가를 받지 않았지만 종합대학으로서의 첫 학기가 시작된 것이다.

각지에 흩어져 있던 선생님과 학생들이 밝은 모습으로 모여 이제는 어느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고 오직 공부하는 데에만 열중할 수 있게되었다. 이와 더불어 김활란 박사는 대외적으로 1946년에는 항주에서 열린 여자기독교청년회 세계대회에 참석하여 세계여성지도력 속에 한국을 심었고 1949년 3월 보스톤대학에서 명예법학박사 학위를 받고, 9월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국제연합(UN)총회에 참석하여 국제무대에서 한국국위를 선양했다.

대내적으로는 한국여자기독교청년회연합회 재단이상장에 선임되어 YWCA 사업에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했으며 1950년에는 대한공보처장에 임명되었고, 대한민국여학사협회를 창립하여 초대회장으로 추대되는 등 다양한 활동을 펼쳤다.

8. 6.25와 다양한 대내외적 활동

1950년 6월25일 6.25전쟁 때 김활란 박사는 많은 고난을 겪으면서 전쟁중에도 1951년 9월 1일 피난지인 부산에서 학교문을 다시 열게 된다. 피난생활의 어려움 속에서도 공부를 하겠다는 의욕으로 모인 학생들과 선생님들은 모두 학교를 열게 되었다는 것에 하나님께 감사하며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한편 김활란 박사는 1951년 전시 국민홍보외교동맹 전체위원장을 역임했으며 그해 4월에 대한민국간외교사절로 미국을 방문하여 외교사절의 임무를 훌륭히 수행했으며 5월에는 모교인 웨슬리언대학에서 명예법학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또 1953년에는 영국정부의 초청으로 런던에서 열린 언론인대회에 한국대표로 참석했고 그해 유네스코한국위원회 집행위원에 선임되기도 했다. 1954년에는 미국국제기독교선교위원회에 참석했으며 6월에는 코넬대학에서 명예법학박사학위를 받음으로써 보스턴. 웨슬리.코넬 등 세곳에서 명예학법학박사학위를 취득했다. 또한 그해 7월 국제기독교선교위원회 부위원장을 비롯 기독교대한감리회이사 및 실행위원, 한미재단이사, 교수자격심사위원, 대한교육심사위원회 부위원장 등을 역임했다.

1955년에는 중앙교육위원회 위원, 기독교방송국후원회 이사장, 한국4H구락부위원회 이사로도 활양까이 컸으며 1956년부터 1959년까지 4차례에 걸쳐 국제연합회총회의 한국대표로 파견되었고 1959년에는 대한적십사자 부총재로 임명되어 일본거주 교포의 북송을 반대하기 위해 부총재로 임명되어 일본거주 교포의 북송을 반대하기 위해 제니바 국제적십자사 본부를 방문하기도 하였다.

9. 선교활동과 수상경력

김활란은 4.19와 5.16혁명을 보내며 이화를 위해 새 인바눌이 필요함을 느끼고 1961년 이화여자대학교 총장직을 그녀의 아끼고 사랑하던 제자 김옥길에게 맡긴다. 총장직에서 물러난 김박사는 재단이사장으로 이화여자대학교에 남아 "교양과 여성"이라는 특별강의를 하며 이화를 위해 마지막까지 헌신한다. 또한 김활란 박사는 또 다른 새로운 삶을 시작한다. 즉 하나님의 말씀과 사랑을 전하기 위하여 1961년 초교파적으로 금란전도협회를 조직하여 전도활동을 펼치려 한다. 전국의 농촌 구석구석을 찾아 다니는 긴 전도여행을 시작을 하려하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하려는 전도의 사명감을 가지고 전도사업을 구체적으로 행하려던 김바사는 신경염으로 몸져눕는 커다란 시련을 겪는다.

이런 와중에 김박사는 1963년 8월 정부로부터 "문화공로상"을 수상했고 이어 같은 달에 또 아시아의 노벧상이라는 라몬 막사이사이를 기념하기 위해 필리핀에서 주는 공익부문의 "막사이사이상"을 수상한다. 또 그해 10월 미국감리교에서 운영하는 다락방이 주는 "다락방상"을 수상했다. 이 다락방상은 세계적으로 저명한 기도교 지도자에게 주어지는상으로 동양인으로는 김활란 박사가 처음이다. 건강을 어느 정도 횝고한 김활란 박사는 미국에서 다락방상을받고 온뒤 수상기념으로 신촌에 "다락방전도협회"를 설립하여 병으로 중단했던 전도활동에 박차를 가한다. 1961년에 조직된 금란전도대는 충주 부여 인천 원주 전주 포천 대전 신탄진 등 전국을 돌며 하나님의 은혜를 전파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널리 전한다.

일생을 하나님의 뜻안에서 살아온 김박사의 진실한 증언에 모두들 마음의 문을 열고 주님을 영접하였다. 그래서 김박사가 전도활동을 하는 곳마다 커다란 성황을 이루었다. 전도여행은 3년이나 계속된다. 한편 김박사는 1964년 5월 미국 웨스턴하우스의 타임캡슐에 넣을 자료편찬을 위한 교육부문위원으로 위촉되었다. 이것은 50피트의 땅속에 인류의 현제업적에 관한 자료를 정리하여 묻어두고 5천년후에 인류에게 전하는 작업인데 세게적 편찬위원 33인 중에 한국인으로는 유일하게 선임된 것이다.

10. 장례식을 대신한 음악회

김활란박사는 너무 오랫동안 무리하게 전도활동을 하여 다시 자리에눕게 된다. 너무 많은 나이와 병이 겹쳐 의식을 잃은채 여러날 병석에누워 많은 사람들의 정성스러운 간호를 받지만 끝내 회복하지 못하고 1920년 2월 10일 저녁 여덟시 제자들과 친지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김활란 박사는 주님의 품에 안기었다. 깨끗하고 헌신적인 일생을 살았던 김박사의 소천 소식이 뉴스로 전국에 방송되자 많은 사람들이 슬퍼했다.

김박사의 장례식은 평소의 유언인 "장례식 대신 더 풍성한 생명의 길로 환송해 주는 환송예배를 해주기 바란다. 그리고 거기에 적합하게 모든 승리와 웅장하고 신나는 음악회가 되기를 원한다"는 부탁에 따라 이화여자대학교 대강당에서 웅장한 환송 음악회가 장례식을 대신했다. 그리고 정부에서는 그녀의 영전에 대한민국외교공로상 최고훈장을 추서했다. 일생을 독신으로 오직 한국의 복음화운동과 교육일선에서 헌신한 그녀는 기독교의 정신을 모든 생애를 통해 몸소 실천한 세계적인 인물로 평가되고 있다.

  • 근대여성의 지도자 김활란(LG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