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은 누구신가?

저 자 : 주앙교회 이영제 목사

제15과 나의 생명이신 예수님


본문 : 요한복음 11:1-44
“... 38 이에 예수께서 다시 속으로 통분히 여기시며 무덤에 가시니 무덤이 굴이라 돌로 막았거늘 39 예수께서 가라사대 돌을 옮겨 놓으라 하시니 그 죽은 자의 누이 마르다가 가로되 주여 죽은 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 40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신대 41 돌을 옮겨 놓으니 예수께서 눈을 들어 우러러 보시고 가라사대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 42 항상 내 말을 들으시는 줄을 내가 알았나이다 그러나 이 말씀 하옵는 것은 둘러선 무리를 위함이니 곧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저희로 믿게 하려 함이니이다 43 이 말씀을 하시고 큰 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라 부르시니 44 죽은 자가 수족을 베로 동인채로 나오는데 그 얼굴은 수건에 싸였더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 하시니라”

그림 : 나사로의 부활 : (요11:38-44).12세기의 템페라로 크기는 21.5*24cm이며 아테네의 한 개인이 소장하고 있다. 나사로의 부활은 그리스도가 베푼 기적중에서 대표적인 기적의 하나로, 비잔틴 미술의 주제로 흔히 사용 되었다. 이 작품은 단순한 구도이면서도 주제의 내용을 간명하게 풀이하고 인물의 눈과 코를 강한 선으로 표시하고 있는데.도식화된 의복모양, 대담한 색채의 조합 등에서 11-12세기에 이르는 많은 작품들에 담긴 일종의 양식적인  경향들을 볼 수 있다.
예루살렘에서 약3km 떨어져 있는 베다니라는 마을에 나사로는 동생 마리아, 마르다하고 단촐하게 살고있었습니다. 이 마을은 문둥병자와 소외된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이었습니다.
요한은 “이 마리아는 향유를 주께 붓고 머리털로 주의 발을 씻기던 자요 병든 나사로는 그의 오라비러라”(2절)고 밝히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사건은 다음 12장에 나타납니다. 그러니까 지금은 예수께 향유를 부은 사건이 있기 전이며 나사로를 살리기 전이지만 예수님과 이들은 이미 각별한 사이였습니다. “예수께서 본래 마르다와 그 동생과 나사로를 사랑하시더니”(5절)라고 했습니다.
이 집안의 가장은 나사로 였습니다. 부모님이나 다른 가족의 언급이 없는 것으로 보아 나사로 가정 역시 어떤 어려움이 있어(어떤 심각한 질병) 이곳에 살고있는 듯 합니다.
그런데 가장 역할을 하던 나사로의 병세가 심상치 않았습니다. 두 여동생은 이 급보를 예수님께 알렸습니다. “예수께서 들으시고 가라사대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로 이를 인하여 영광을 얻게 하려 함이라 하시더라”(4절)고만 하셨습니다. 그리고는 지금 계신 곳(요10:40:요단강 저편 요한이 처음 세례주던 곳)에서 이틀이나 더 계셨습니다.

이 사이에 나사로는 죽음의 시간이 다가왔고 결국 죽었습니다. 이 사실을 예수님도 알고 계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 그러나 내가 깨우러 가노라”(11절)고 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자고 있는 것이면 깨우면 될 정도로 병세가 호전된 것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밝히 이르시되 나사로가 죽었느니라”(14절)고 다시 말씀하셨습니다.
나사로의 두 여동생은 예수님이 속히 오시지 않고 이러한 급보를 들으시고도 그곳에서 이틀이나 더 머물고 계신 것을 이해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나사로는 결국 죽게되었습니다.
이러한 나사로의 죽음은 두 자매에게는 큰 충격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비탄에 잠긴 채 마리아마르다는 그래도 예수님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나사로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많은 유대인이 마르다마리아에게 그 오라비의 일로 위문하러”왔습니다. 이 때쯤에 예수님이 오신다는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마르다는 예수님을 맞이하러 나갔지만 마리아는 일어나 맞이하러 가지 않았습니다. 아마 예수님에 대한 섭섭함이 아직 그대로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마르다는 예수님이 함께 계셨다면 죽지 않을 수 있었다고 말하고 “그러나 나는 이제라도 주께서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하시는 것을 하나님이 주실 줄을 아나이다”(22절) 라고 고백했습니다. 대단한 믿음이요 고백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마르다는 예수께서 당장 나사로를 살려낸다고는 믿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마지막 날 부활에는 다시 살 줄을 내가 아나이다”(24절)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25-26절)고 즉석에서 질문하셨습니다. 마르다의 고백은 27절에서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줄 내가 믿나이다”라고 화답했습니다. 그리고 아직 달려나오지 않은 마리아를 찾으셨습니다. 예수께서 찾으신다는 말에 마리아는 급히 뛰어나갔습니다. 그리고는 마르다가 한 말하고 똑같이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 섭섭한 말을 토로합니다. “주께서 여기 계셨더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32절) 그리고 나사로의 죽음을 애도하는 유대인들과 마리아가 모두 울었습니다.

예수께서도 저들과 같이 슬퍼하시고 “심령에 통분히 여기시고”(33절) 계셨습니다(이 슬픔 속에는 분노와 어울려 노여움도 포함되어 있다). 사별의 슬픔에 잡힌 자매의 마음은 예수님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예수 자신도 비통함에 잡히신 것입니다. 우리는 이 죽음의 결과가 우연이 아닌 사단이 우리를 그리로 몰아간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바울은 고전15:26에 “맨 나중에 멸망받을 원수”라고 부르는 것에서 사망의 쇠사슬을 가히 상상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죄와 사망의 권세를 깨뜨리고도 남음이 있는데 ‘빛이 있으라’하시는 창조적 말씀처럼 ‘나사로야 나오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 아버지께 받은 예수께만 존재할 수 있는 창조적 말씀의 능력을 보여주고 계신 것입니다. 이 말씀에 사망의 권세도 계속해서 나사로를 붙잡아 놀 수는 없었습니다. “죽은 자가 수족을 베로 동인채로 나오는데 그 얼굴은 수건에 싸였더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 하시니라”(44절)
이것이 오늘 본문의 내용입니다. 우리는 본문을 통해서 예수님만이 가지고 계셨던 특징을 이해함으로 우리의 생명이신 예수님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1. 예수께서는 미래를 알고 계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보통 사람이 이해하지 못할 말씀을 나사로가 죽게될지도 모른다는 소식을 듣고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로 이를 인하여 영광을 얻게 하려 함이라 하시더라”(4절)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잠시 나사로의 죽음을 통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나사로의 죽음을 기다리신 것은 아니지만 그가 살아있을 때 급히 서둘러 길을 떠나시지 않았고 언제든지 그를 살리실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계셨기에, 또 하나님께서 그 기도를 응답해 주신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서둘러 길을 떠나지 않았던 것입니다.

나사로의 육체적 죽음과 살아나게 하심을 통해서 “곧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저희로 믿게 하려 함이니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육체적으로 죽은 자를 살려내실 수 있는 분은 창조자가 보내신 아들이라는 것을 믿을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바로 이 믿음은 “죽음에서 부활”하신 분으로 우리 모든 육체를 살려낼 수 있는 분이라는 확신을 보여주신 사건인 것입니다.

2. 예수님의 감사기도

“예수께서 눈을 들어 우러러 보시고 가라사대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 ”(41절) 이것은 우리의 기도모습과는 다릅니다. 예수님은 이미 하나님께 신적 권한을 부여받아 오신 분으로 나사로를 살리는 문제를 하나님께 간구할 필요성은 없었습니다. 다만 하나님께서 이미 이러한 권한을 부여해 주신 것에 대한 감사의 기도를 드리는 것이었습니다.

3. 예수님은 왜 나사로를 살리셨습니까?

나사로 이외에도 이미 다른 복음서에서 죽은 자를 살리신 두 가지 사건이 있었습니다. 야이로의 딸(막5:22-43)과 나인 성에서 한 과부의 아들(눅7:11-17)을 살리신 것입니다. 그러나 이 두 경우 죽은지 얼마 안되었기 때문에 사람들이 생각하기를 ‘기절’한 상태였다고 생각할 수 있는 소지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나사로는 무덤에 있은지 이미 나흘이라(17절)는 진술은 그가 죽었을 뿐만 아니라 이미 그 시체는 썩어가고 있는 과정이기 때문에 부활에 대한 더 확신을 만들어준 사건이 된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이 사건을 통해서 우리에게 “부활이요 생명”(25절)으로서 자신을 확실히 나타내신 것입니다.

4. 나사로를 살리신 동기

나사로를 우연하게 단순히 살리신 것은 아닙니다. 요한은 “예수께서 본래 마르다와 그 동생과 나사로를 사랑하시더니”(5절) 라고 했습니다. 또한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11절)고 하셨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사랑은 “눈물을 흘리시더라”(35절)로 확인되었습니다. “이에 유대인들이 말하되 보라 그를 어떻게 사랑하였는가”(36절) 했습니다.
성경에서 예수님이 눈물을 흘리신 기록은 딱 한번 더 나오는데 누가복음 19:41에 예루살렘 “성을 보시고 우시며” 뿐입니다. 자신이 십자가에 달리실 때도 눈물을 흘리시지는 않았습니다. 십자가를 지시기 위한 게세마네의 기도에서도 땀방울이 피 방울처럼 되었지만 눈물은 흘리지 않았습니다. 단순히 나사로의 죽음 때문만에 우신 것은 아닙니다. 죽은 나사로는 살리면 됩니다. 그런데 왜 우셨습니까? 그것은 사망(사단)의 권세가 저들을 감싸고 있는 것에 대한 안타까움과 우리를 향하신 사랑의 눈물이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영원토록 이 사망의 눈물을 거두시려고 오신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25-26)고 물으셨습니다. 이 질문은 마르다와 마리아에게만 하신 것은 아닙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들에게 하신 말씀이시기도 합니다. 어떻게 대답하시겠습니까? 마르다는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줄 내가 믿나이다”(27절)고 대답했습니다. 이 고백이 저와 여러분들의 고백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14:6) 예수 그리스도 외에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가져다 주실 분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리라”(골3:1-4)
원문의 “감취었음이니라”는 현존적 현재 완료형으로 그리스도와 함께 얻은 생명의 효과가 현재 주어진 것이며 영원함을 뜻하고 있습니다. 이 생명은 그리스도의 재림 때까지 세상에 대해서는 감추어진 영원한 비밀이며,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 전부터 하나님이 세우신 목적입니다(고전2:14, 요일3:2). 마지막 예수님 재림하실 때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리라”에 꼭 저와 여러분들이 함께 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성경은 우리가 죽어서만 천국에 빨리오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마4:17),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눅17:21), 고 하셨으며 주님이 가르쳐준 기도에서는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마6:10)라고 하셨습니다.
예수 믿고 이 땅의 축복을 받는 것도 중요하겠지만 더 중요한 것은 영원한 생명입니다. 이 땅의, 눈앞에 보이는 것 때문에 너무 조급해 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잠깐 지나가는 안개와 같을 뿐입니다. 영원한 생명을 먼저 얻으시기를 축원합니다.


  • 목차
  • 성경 본문별 index
  • 주제별 index
  • Top
    Study Bible
    KCM Home

    이영제목사, 주앙교회, 한국컴퓨터선교회 제공 / Copyrightⓒ2005 K.C.M Al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