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제 목사의 영국 방문기

2003.8.4일-15일
금번 영국 여행은 재영총신동문회 초청으로 2003년 8월 4일-15일간에 걸쳐 다녀오게 되었다. 제7회 재영 총신 동문회 가족 수련회가 8월 5일(화)-8월 8일(금)에 재영 총신 동문 가족 11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England의 중부에 위치한 Kidderminster의 Pionner Christian Centre 에서 있었다. 부족한 종은 이곳에서 특강을 부탁 받아 방문했다. 대부분 이곳에 계신 분들은 신학을 공부하시는 분, 선교사님, 그리고 한인목회를 하시는 목사님들이 함께 모이셨다.
영국을 다녀온 사진들은 KCM의 사진 게시판 겔러리의 영국에 올려놓았다.

영국에서의 일정을 간략하게 정리했습니다. 부족한 저를 위해서 여러모로 신경써 주시고 많은 시간을 할애해 주신 여러분들에게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 수련회 참가
  • WALES 토마스선교사 파송교회
  • WALES 민속 박물관, 카브츠
  • 브리스톨 하나로교회
  • 조지 뮐러(George Muller) 고아원
  • 존 웨슬리(Wesley, John)교회
  • BRISTOL 시내
  • 셰익스피어(Shakespeare) 생가
  • WEC본부, 위스트민스트사원, 런던
  • 대영박물관, 왕궁

    8월 4일(월) 도착

    런던의 2층버스 한국 출국하여 영국 히드로(London) 공항에 오후 6:00에 도착하여 정명선 선교사님이 마중 나오셔서 버밍햄(Birmingham)으로 이동했다. 다음날 수련회가 열리는 장소가 가까운 곳에 사시기 때문에 이곳으로 이동했다. 정명선 선교사님은 영국에서 무슬림 선교사역을 하는 GMS와 WEC 소속의 선교사님이다. 박성미 사모님과 큰 딸 '아름'이 동생 '다운'이가 있다. 정 선교사님 가족과 8월 13일 섹스피어 생가를 다녀왔다. 그리고 15일 돌아오기까지 WEC에서 하루 밤을 묶고, 정선교사님의 도움으로 런던의 여러 곳을 관광할 수 있었다.

    8월 5(화)-8(금)일(제7회 2003년 동문 수련회 시간표)

    수련회 단체사진 수련회 기간동안에는 부족한 종도 많은 은혜를 받았는데 주 강사님으로 한국에서 오신 인천제2교회 이건영목사님과 사모님의 모습에서 섬기는 종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교회와 목사님을 조금 소개하자면
    인천에서 두 번째로 세워진 장로교회이기에 제2교회라고 부릅니다. 또한 지난 54년 동안 담임목사님이 두 번 밖에 교체되지 않은 전통적이요, 모범적인 교회입니다. 즉 1대 담임 이승길 목사님(25대 총회장 역임)은 소천하시므로, 또한 2대 담임 이삼성 목사님(77회 총회장 역임)은 정년이 되어 은퇴하신 것이 유일한 교체 원인인 은혜로운 교회입니다. 그리고 현재 이건영목사님이 시무하고 계십니다. 이건영목사님은 철저하게 원로목사님과 장로님들을 섬기시며 뿐만 아니라 낮은 종의 모습이 우러러 나오는 보기드문 존경할 만한 분이십니다.
    이영제목사 특강 영국에서 짧은 교제였지만 이런 목사님을 뵐 수 있다는 기쁨과 아울러 영국에서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열심히 공부하시며 선교하시는 모습들은 저에게 많은 감명을 주었다. 제가 특강을 하러 갔다기보다는 더 많은 것을 배우고 온 좋은 시간들이었다.
    저는 특강 두번과 사모님들과 별도의 강의 시간을 가졌었습니다. 특별히 이 시간에 자유롭게 사모님과 나눈 시간은 사모님들이 좋아하셔서 참으로 감사했습니다.

    8월 8일(금)

    지목사님 울릉도 패를 권사님에게 전달 지성구목사님 가족(사모님, 하은, 성은, 예근)과 함께 수련회 장소에서 WALES로 이동했다. 지목사님은 백령도에서 오랬동안 목회하시고 백령도 기독교기념관의 일을 추진하던 중 토마스 목사님의 백령도 방문을 한 것을 계기로 영국에 자료조사차 다녀가신 후 이것이 인연이 되어 이곳으로 오게되셨다. 그러나 직접 차를 몰고 토마스목사님이 시무하셔고 파송한 이 교회를 찾는 일은 싶지 않았다. 잉글랜드에서 웨일즈로 넘어가 몇 Km 달리지 않아 토마스목사님의 교회가 있는 마을에 도착했다.
    토마스목사 교회 동네가 너무 한적하여 지나가는 사람을 발견하여 물어보기도 어려웠다. 작은 교회는 안내표지판이나 십자가도 없었다. 교회 입구에 예배안내가 전부였으며 교회로 들어섰을 때 교회 앞마당에는 무덤들이 즐비하였다. 서양의 교회들은 대부분은 교회 앞마당에 무덤들이 많이 있다. 이것은 성도들이 죽어서도 교회를 떠나지 않고 싶은 마음과 죽은 후에 교회에 묻힌 자들이 빨리 부활한다는? 이야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리고 유명인사나 간혹 교회에 기부나 헌금을 많이 한 사람은 교회 안에 묻힌 예도 많다. 섹스피어 역시 많은 돈을 교회에 내고(안내원의 말) 교회당 안에 묻혀있다. 토마스 목사님을 파송했던 모교회(Hanover United Reformed Church)라고는 얼 듯 보아 믿어지지 않았다. 너무나 시골의 작은 교회였다.

    토마스(Thomas, Robert Jermain 1840.9.7-1866.9.5) 목사
    토마스 목사교회 앞 무덤들 영국 런던선교회 소속 중국선교사로 한국 개신교 선교 개척자로 알려져 있다. 중국명 탁마사(托馬擊), 혹은 최난헌(崔蘭軒). 영국 웨일즈 지방에서 회중교회 목사의 아들로 출생하여 런던 뉴칼리지를 졸업하고 해외선교를 지망. 런던선교회에서 중국 선교사로 임명되어 목사안수를 받고 1863년 7월 21일 중국으로 출발했다. 상해에서 선교활동을 하였으나 선교부 관리자와의 갈등, 부인의 죽음 등으로 좌절, 1864년 l2월 런던선교회에 사표를 제출했다. 그 후 청국 세관에 취업하여 일하던 중 한국에서 온 천주교인들을 만나게 되어 한국말을 배우고 한국 선교를 결심했다.

    토마스교회 내부 1865년 9윌 제 l차로 한국 서해안에 방문하여 한문 성경을 반포하였고, 다시 런던선교회에 복직하여 북경선교부에서 파송을 받았으며 다시 한국 선교를 할 기회를 엿보던 중 마침내 1866년 미국상선 제너럴 셔먼호에 통역관으로 동승하여 한국으로 향했다. 이 배는 한국 관군의 제지를 무시하고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가다가 위기에 처하자 대포를 쏘아 한국인을 살상하기까지 했다. 이에 평양 관민들은 셔먼호를 공격하여 승선자 전원을 처형하였다. 토마스 선교사는 죽는 순간까지 한문성경을 전했다고 전해지며 이로써 개신교 최초의 '순교자'로 불리기도 한다. 훗날 이를 기념하여 대동 강변에 토마스 목사기념관이 세워지고 그 기념전도대가 조직되기도 하였다.
    더 자세한 자료는 http://kst.netian.com/jrch0004.htm에서 참고하기 바란다.

    당시에 영국에서 중국까지 배로 그리고 말을 타고 한참을 달렸어야 했다. 이런 여행의 피로가 결국 아내가 죽고만 것이다. 이런 멀고먼 길을 생각하면 또다시 조선의 작은 땅까지 누가 가라고 해도 가기 싫을 만큼 지쳤을 것인데 그는 한사코 조선 땅에 성경을 전하려고 했다. 영국의 큰 교회들이 즐비했었지만 그 교회들은 지금 많은 교회들이 팔리고 있으며 문을 닫았다. 그러나 웨일즈의 한적한 시골의 이 작은 교회를 보는 순간 감동하지 않을 수 있으랴!

    8월 9일(토)

    전시된 자동차 웨일즈 민속 박물관(St Fagan's, the Museum of Welsh Life)을 찾았다. 이곳은 왜 영국이 산업사회가 발전하게 되었는지를 한눈에 보여준다. 공기구들의 발전으로 결국 산업사회의 틀을 잡게되며 많은 분야에서 과학이 자연스럽게 발전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한국의 옛 선조들은 조용한 곳에서 그저 시나 쓰고 노래를 부르며 대장간 쟁이를 우습게 생각하고 있을 때 이들은 놀라운 발전을 거듭한다. 그리고 세계에서 최초로 지하철이 생긴다. 'Underground'라고 부른다. 영국의 지하철은 1870년에 탄생되었기 때문에 지하철 시설이 다소 좁고 낡은 것이 흠이지만 1870년대에 우리는 초가삼간도 없는 사람이 많았던 것을 생각하면 얼마나 오래 전에 그들이 산업사회를 주도했고 오늘날 세계에 그들의 언어를 보급했는지를 조금은 알 것 같다.

    영국의 주택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오늘날에도 검소하기 짝이 없다. 승용차는 작은 것과 좋은 차라는 것을 별로 신경 쓰지 않는 것 같다. 우리는 가끔 그들의 몸에 비해 작은 승용차를 타는 것을 보면서 의아해 하기도 한다. 그러나 정작 이들의 관심은 다른데 있었다.
    그것은 아름답게 꾸며진 정원(garden)이다. 영국 사람들은 아무리 작은 집이라도 정원 가꾸는 것을 즐기며 이것은 이들의 일상생활에 상당히 중요한 비중을 차지한다. 심지어 정원이 없는 집에서는 꽃 바구니를 매달아 그것을 가꾸기도 한다. 그래서 영국은 런던의 복잡한 시내에서부터 시골의 구석까지 전체가 잘 다듬어진 정원인 것이다.

    카브츠 시장 이런 이들의 관심은 '카부츠'(차의 트렁크를 일컫는 말)의 시장에서 알 수 있다. 카부츠는 영국 전역에 있는 것으로 우리의 장터와 같다고 보면 된다. 다만 물건을 파는 사람들이 거의 모두가 상업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사용하던 것을 가지고 나와 파는 것이다. 뜨거운 햇빛을 받아가며 무더운 여름도 아랑곳하지 않고 한 가족이 물건을 팔고 사는 모습은 이들의 오래된 하나의 전통이기도 하지만 결코 중고라고 막 버리지 않는 이들의 문화에서 많은 것을 느끼고 배우게 한다. 그래서인지 어떤 여행객은 영국의 카부츠를 보지 않으면 영국을 말하지 말라고 귀뜸해 주었다.

    8월 10일(주일)

    개척교회 웨일즈의 한 개척교회에서 주일오전 예배를 드렸다. 이 교회의 목회자는 영국의 큰 교회(건물만)에 담임하게 되었는데 그는 뜨거운 가슴을 막을 길이 없어 피켓을 들고 길거리에서 전도했다. 이런 영국의 목사를 찾아본 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런데 이것이 교회에서 문제가 되었다. 교회의 권위에 실추되기 때문에, 한마디로 창피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목사님을 쫓아내었다는 것이다. 왜 영국의 교회들이 오늘날처럼 되었는지 약간을 알 수 있는 일이다. 그래서 이 목사님은 텅텅빈 큰 교회건물들을 옆에 두고 작은 공간에 임시 막사처럼 교회를 세웠다. 이날은 영국에서 몇 십 년 만에 제일 더운 날이라고 한 날이다. 선풍기 하나가 강대상 옆에서 돌아갈 뿐이었는데 열을 식히는데는 역부족이었다. 그러나 땀의 뒤범벅이 되었어도 살아있는 그 느낌은 영국의 큰 성공회의 예식(형식?)적인 분위기에서 느낄 수 없는 것이었다.

    조지 바나(George Barna)는 이러한 현상을 '주전자 속의 개구리(Frog in the Kwttle)'라고 지적하였다. 곧 주전자 안의 미지근한 물 속에 개구리를 집어넣고 서서히 물을 데우면 개구리가 기분 좋게 죽어간다고 한다. 바나는 바로 이같은 이미지야말로 현대 서구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이라고 했다. 즉, 현상 유지(Status-quo)의식 안에 안거하여 편리와 기득권을 즐기는 동안에 우리는 실상 죽어가고 있다는 경고인 것이다.

    브리스톨 하나로 교회 예배를 마치고 지목사님의 사모님이 준비하신 샌드위치를 브리스톨(BRISTOL)로 가는 길가 휴개소(그렇지만 가든임)에서 먹고 떠났다. 나는 영국에서 돌아오기까지 내내(아니 지금도) 지성구 목사님과 사모님 그리고 아이들을 잊지 못했다. 정말 감사 드립니다. 특별히 사모님에게도 감사 드립니다. 브리스톨(BRISTOL)에 도착하여 브리스톨 하나로교회(BRISTOL HANARO KOREAN CHURCH) 조성택 담임목사님(정경임 사모님, 하은, 하영) 교회에서 주일예배(2시 30분) 말씀을 전했다. 한인교회들은 현지교회의 세를 내어 예배드리기 때문에 대부분 주일 낯 예배를 이 시간에 드린다. 무더운 날씨이지만 은혜로운 시간으로 예배를 마치고 사모님이 준비하신 맛있는 비빔밥을 먹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사모님의 요리 솜씨는 프로를 능가하는 것 같았다. 무더운 실내를 벗어나 시원한 들판으로 나갔다. 끝없이 펼쳐진 잔디밭위로 군데군데 나무숲이 형성되어 있었고 그곳에 자유롭게 앉아 휴식을 취하며 뛰어 노는 어린이들의 모습은 부러움 그 자체였다. 자유로운 초원 위에서 교우들과의 시간은 매우 인상 깊은 교재의 시간이 되었다.

    8월 11일(월)

    조지 뮐러 고아원 건물 조성택 목사님의 안내로 조지 뮐러(George Muller)가 세운 고아원과 그의 기념관을 방문했다. 한마디로 생각외에 엄청난 규모였다. 지금은 고아들이 없기 때문에 건물들의 대부분을 시 정부가 교양학교로 운영하고 있지만 당시의 그대로 남아있었다.

    조지 뮐러(George Muller1806-1898)
    조지 뮐러 기념관 프러시아에서 출생한 그는 경건치 못한 청소년 시절을 보냈으나 돌발적으로 회심한 후에 그의 생애를 전적으로 하나님께 헌신했다. 그는 유대인에게 전도하려는 열망이 있었고, 히브리어 공부에 진보를 나타내어 적성인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래서 런던에 있는 유대인 협회에서 일하려 했으나 신앙 양심상 포기했다.
    그는 데보샤이어에 잠시 머물면서 주님의 쓰임을 받았고, 그곳에서 크레이크(Henry Craik)를 만나 1866년에 그와 사별하기까지 30여년간 변함없는 우애와 동역으로 다윗과 요나단의 우정을 능가했다.
    크레이크는 그의 아버지가 교장으로 재직하던 학교(Parochial School)를 거쳐 성 안드레 대학교(ST. Andrew University)에서 수학했으며, 헬라어 ·라틴어에 능통했고, 성마리아 대학에서도 학문을 닦은 지성 청년이었으며, 1826년에 구원을 받게 되면서 그의 학우들에게 열렬하게 전도했다. 그 후 에딘버러로 옮겨 그로브스의 가정에 2년간 가정교사로 있으면서 경건의 훈련에 절호의 기회가 되었다.
    조지 뮐러 고아원 앨범 이 무렵 뮐러와 만나게 되어 동역을 시작하게 되자 풍성한 열매를 주셨고, 1832년 이들 두사람과 다른 형제, 그리고 네 자매 모두 7사람이 베데스다 교회에 모이기 시작하면서 평생 동역을 하게 되었다. 이미 그들은 기성교회의 전통에서 탈피하여 유아세례 ·성직자 제도 ·국가에서 받는 급료 등을 폐지했고 모든 성도들이 교파와 계급을 초월하여 성찬에 참여케 했다.
    브리스톨에서 주님의 축복을 체험하는 어간에 그는 고아들을 돌보고자 하는 심령의 매임을 받았다. 1834년에 소규모로 시작된 이 사업은 해를 거듭할수록 확장되어갔다. 그는 시작부터 이 일에 필요한 어떠한 도움도 사람에게 알리거나 요청하지 아니하고 오로지 하나님께 요청하기로 원칙을 세웠다. 이로써 하나님은 예나 이제나 기도에 응답하시는 분이심을 증거하는 것이 고아원 사업 이상으로 중요하다고 확신했다.
    그는 하나님이 공급해 주시는 대로(어떤 경우에도 빚을 지지 않았고) 3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시설을 아쉴리 다운(Ashly down)에 마련했고, 2차, 3차, 4차, 5차로 시설은 계속 확장되어 마침내 2,050명의 고아들과 직원이 거처할 수 있도록 확장되었고, 그들의 필요를 적시에 채워주시는 체험 속에 65년간 경영함으로써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
    이러한 주님의 도우심은 때로 장기간에 걸쳐 응답되기도 했지만 가끔 그 날, 그때에 공급되기도 했다. 언젠가 어느 형제가 이 고아원을 들러서 하룻밤을 자고 갔다. 그 날 아침 식사 후에 그 형제는 뮐러의 손에 봉투를 쥐어주고 떠나갔다. 실은 그 날 점심을 준비할 돈이 한푼도 없었던 때에 주님이 공급하셨던 것이다.
    언젠가 고아원에는 아침 식사를 준비할 돈이 없었다. 뮐러는 다만 무릎을 끓고 일용할 양식을 위해 기도하고 있었다. 새벽부터 내리기 시작한 비가 때아닌 소낙비로 쏟아지는 이른 아침에 음식을 가득 실은 마차가 고아원으로 들어섰다. 인근 공장에서 종업원들과 함께 야유회를 계획하였으나 폭우로 불가능하게 되자 고아들에게 보내주기로 결정했던 것이다. 65년간, 순간순간 주님의 공급을 체험했던 기록이 "The Lord's dealings with George Muller"에 한권으로 편집 수록되어 있다.
    그의 만년(1874~1892)에는 그의 사위인 라이트(James Wright)에게 고아원 사업을 인계하고 영국은 물론 유럽전역과 미국, 카나다, 호주, 인도, 중국 등 세계 각국을 여행하면서 복음을 전하고 성도들의 신앙과 사랑을 격려했다.
    그는 교파를 초월하여 주님을 사랑하는 자들을 사랑했고, 그를 초청하는 어느 곳에나 주님의 은혜를 끼쳤다. 그의 메시지는 지극히 단순했으며, 사람의 지혜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에 의지했다.
    1898년 3월 10일 이른 아침에 그는 지상에서의 수고를 그치고 만왕의 왕을 뵙기 위해 급히 떠났다. 전날 저녁에도 일상 업무에 분주했고 평상시와 같이 기도회에 참석하였던 그가 눈깜박할 사이에 아무런 고통도 모른 채 부르심을 받았던 것이다.
    - 앞서간 형제들에서(엠마오) -

    뮐러의 책상 뮐러의 박물관은 당시 뮐러가 집무하던 책상의 모습 그대로 그리고 당시 찍은 사진들이 연대별로 정리되어 있었다. 고아원에서 18세 이상이 되면 나가야 되는데 이 때 함께 들려보냈던 철가방도 있었다.
    이곳에서 유학을 하고 있는 홍성인 목사님, 이현희 사모님께서 점심을 준비해 주셔서 감사했습니다. 사실 다니다 보면 먹는 일 만큼 큰 일이 없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때마다 관심을 가져 주시는 분들이 있었다는 것은 저에게는 너무 과분한 대접이었습니다. 제가 다녀간 뒤로 혹, 한 딸씩 굶고 계신 것은 아닌지?

    웨슬리 교회 오후에는 웨슬리(감리교창시자)가 시무 했던 교회를 방문하게 되었다. 방문했을 때는 교회문이 잠겨있어서 안타깝게 교회 안을 들어가 보지 못하고 밖에서 철장 문 사이로 안으로 들여다보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습니다. 교회안에 물끄러미 서있는 웨슬리의 동상만 쳐다보고 왔다. 그러나 당시의 웨슬리는 영국 성공회의 형식주의 틀에서 벗어나 그리스도의 완전한데로 나아가자는 뜻에서 출발한 교회이다.

    존 웨슬리(Wesley, John, 1703.6.17-1791.3.2)
    영국 성공회의 주교 S.웨슬리의 15째 아들로 영국 링컨셔에서 태어났다. 감리교 신자를 뜻하는 메서디스트(Methodist)는 본래의 뜻은 '격식주의자'이다. 존 웨슬리와 동생 찰스 웨슬리의 지도 아래 옥스퍼드 대학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신성클럽(the Holy Club) 회원들이 일반 영국교회(성공회) 신자들에 견주어 신앙 생활과 성경 공부에서 규칙적이고 꼼꼼하고 조직적이라는 데서 붙은 이름이다. 원래는 여느 성공회 신자들이 다소 경멸의 뉘앙스를 담아 부르던 별명이었지만, 웨슬리는 오히려 이 이름에다 자부심을 담았다.
    1735년 동생과 함께 미국 조지아주(州)의 선교사로 건너갔는데, 그 동안에 모라비아 교도들의 신앙에서 크게 감동을 받고 전도에 힘썼으나 실효를 못 거두고, 1737년 귀국하였다.
    그후 독일 경건파인 모라비아 교도의 집회에서 마침내 뜨거운 회심(回心)을 경험한 후, 모라비안의 본거지인 독일의 '헤른포트 형제단'을 방문하고 돌아와 본격적으로 전도활동을 벌였다. 사람들에게 종교적 체험과 성결한 생활을 역설하며, '그리스도교인의 완전'을 설교하는 한편, 당시 전 영국 사회에서 번지던 산업혁명을 배경으로 하여 대규모적인 신앙운동을 전개하였다. 이 운동이 그가 죽은 뒤 메서디스트 교회로 정착되었다.
    성공회 주교의 아들이었던 웨슬리는 당초 영국 교회에서 나올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러나 성공회 측에서 그의 교회 내 설교를 금지하고 메서디스트들의 안수를 거절하자, 웨슬리는 추종자들에게 스스로 안수를 베풀어 미국에 선교사로 보냈고, 그 뒤로 감리교회는 독립적 교파를 이루게 되었다.

    8월 12일(화)

    BRISTOL에서 열차를 타고 다시 버밍햄(Birmingham)의 정명선 선교사님 댁으로 돌아왔다. BRISTOL에서 하루만 있으려고 했는데 사모님의 맛있는 음식 덕분에 주책없이 하루를 더 지냈다. 우리 속담에 ?떠나는 손님의 뒤 꼭지가 아름답다?라는 말이 있는데 그래도 제 뒷모습이 아름답게 비쳐졌으면 하는 마음이다. 금번 수련회 회장님으로 준비하랴 교회 일이 한 두 가지 정신 없으시지 않으실 텐데 저를 돌보아 주신 은혜 감사 드린다.

    버밍햄 성당 버밍햄에 기차역까지 마중 나오신 정명선 선교사님의 안내로 버밍햄(Birmingham)의 시내를 관광했다. 시청과 버밍햄의 성공회(Birmingham Cathedral)당을 들러 보았다. 성공회가 세워지던 시기에는 지방에 성공회 교회가 있느냐에 따라 그 지방이 시로 인정받느냐 못 받느냐 하는 잣대가 되었다고 한다. 그 정도로 영국에서의 성공회는 중요한 교회였다. 물론 지금도 성공회의 총수는 여왕이다. 카톨릭에서 나오면서 자체적인 독립을 확보하기 위해서 교황 대신 자신들의 왕을 교황화 한 것이다. 버밍햄의 성공회 건물도 다른 성공회들 건물 모두가 거의 비슷한 형태로 지어졌다. 화려한 스테인드글라스와 파이프오르간은 이곳이 원조인 듯 싶다. 크고 웅장한 성당 내부는 생각보다 공간은 넓지는 않다. 우리의 교회 모습처럼 많은 사람들을 위한 공간이라기 보다는 장식을 위한 성전이라는 느낌이 더 강하다.

    버밍행의 거리 버밍햄의 시내에서 얼듯 보면 불교 같은 메시지를 전하는 듯 하였지만 자세히 가보니 불교도 아닌 이상한 동양의 도를 전한다면 책상 위에 펴놓고 전도책자와 사진들을 보여주고 있었다. 이곳에 사람들은 관심 있게 지켜보고 있다. 버밍햄의 시청앞 광장은 자유로운 공원과도 같았다. 자유를 만끽하는 사람들처럼 분수대 앞과 거리에 자유로운 옷차림으로 휴식을 취하는 이들에게서 우리네처럼 것 치래나 남을 의식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들에게는 질서가 있고 그 자유를 지킬 줄 아는 성숙된 시민의식이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8월 13일(수)

    섹스피어가 뭍힌 교회 정명선 선교사님 가족과 함께 셰익스피어가 살았다는 생가를 방문했다. 첫 번째 들른 곳은 셰익스피어가 묻힌 HOLY TRINITY 교회이다. 이 교회는 셰익스피어가 많이 지냈다는 큰딸의 집하고 불과 200-300m 정도 되어 보였다. 그가 이 교회를 다닌 것이 분명하며 그리고 이 교회에 묻혀 있는 것이다. 큰딸의 남편은 의사였는데 당시에 그가 연구한 자료들과 사용한 의료도구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조금 더가면 그가 살았다는 집과 죽은 집이 있다. 그런데 그의 생전에 이 집이 다른 사람에게 팔렸었는데 셰익스피어가 죽자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그래서 셰익스피어일가는 그 집을 다시 사려고 했으나 그 집주인은 팔지 않았다. 그리고 많은 관광객이 오는 것을 불편에 했다고 전한다. 섹스피어 생가 그러나 영국정부는 그가 많은 돈을 벌고있다는 판단에 따라 세금을 내라고 하자 이 집 주인은 그 집을 불살라 버렸다. 이 사람은 바로 성공회의 은퇴한 주교였다. 그래서 지금도 셰익스피어의 집은 한쪽의 일부가 없다. 영국에는 '인도를 다 준대도 셰익스피어와 바꾸지 않겠다'는 말이 있다. 그만큼 셰익스피어를 사랑하고 존경하는 대표적인 표현이라고 하겠다.
    우리 나라는 가끔 정치인들이 어느 술집에서 어떤 이야기를 나누었다는 것이 대서특필된다. 우리 나라처럼 정치에 관심이 많은 국민도 없을 것이다. 그렇다고 정치가 정말 정치다운 것도 아닌데 말이다. 그런 대중의 심리를 언론은 제빨리 보도한다. 사실 지나고 나면 뭐하나 유익한 것이 별로 없는 그런것만 전하게 된 꼴이다. 그리고 몇십년을 골방에서 연구한 문학작품이나 기술개발의 이야기는 저 귀퉁이에 보일까 말까한 정도로 나온다. 무론 그것도 보이는 것이 특이할만할 정도로 말이다. 우리같은면 셰익스피어을 얼른 줄테니 인도는 잃지 않겠다고 했을 것이다. 이것이 영국과 한국의 차이일 것이다.
    오늘도 전 세계에서 온 관광객들로 셰익스피어가 지냈던 이곳은 사람들로 북적인다. 셰익스피어가 죽고난 이후부터 밀려든 물결이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는 것이며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셰익스피어 [Shakespeare, William, 1564.4.26 - 1616.4.23]
    섹스피어 생가에서 정명선 선교사님 가족 자세한 것은 셰익스피어 공식 홈페이지
    empas 백과사전를 참고하기 바란다.

    1. 생애
    2. 작품
    3. 명성과 평가

    8월 14일(목)

    WEC 본부 입구 버밍햄(Birmingham)에서 숙소를 WEC 본부가 있는 Bulstrode, Oxford Rd, Gerrards Cross, Bucks, SL9 8SZ, UK로 옮겼다. WEC International은 현재 55여 개국에서 모인 약 2,100명의 선교사가 복음이 필요한 미전도지역 및 10/40창 지역을 중심으로 85여개국에서 선교사역을 펼치고 있는 세계적인 단체이다. 특히 국제자료정보실(International Department for Equipping and Advance)은 전 세계의 모든 나라에 대해 연구하여 각 나라에 대한 전체적 상세한 정보를 제공하는 선교정보 리서치 센터이다. 이 센터를 통해 '세계기도정보(Operation World)', '땅위의 교회는 생각보다 큽니다(The Church is Bigger Than You Think)'와 같은 책들이 출판되었다.
    WEC 본부 건물 이런 국제적인 선교단체에서 하룻밤 묵어간다는 것은 필자로선 매우 뜻깊은 일이었다. 숙소를 배정 받아 찾아가는 길은 디귿 자 모양의 건물이라 상당히 복잡했다. 처음 찾아가는 사람은 1주일정도 있어야 파악이 된다고 한다. 이런 구조의 건물에 약 200여 개의 방이 있고 로비와 세미나와 예배를 드릴 수 있는 얼 듯 보아 100여명 남짓 들어갈 수 있는 공간이 있었다. 그러나 1층의 작은 방들은 각 팀별로 사역을 관리하는 작은 방들이 제각기 있었다. 그리고 건물 옆의 부속건물 같은 곳에는 각종 기계들이 즐비했는데 각종 농기계들 그리고 지프차가 몇 대 있었다. 이 차들은 아프리카의 각 국가의 승인 형식이 다르기 때문에 필요할 경우 그곳에 맡도록 수리하여 보내진다고 한다. 본부는 입구서부터 건물까지 1km는 족히 넘어 보였으며 사방으로 잘 다듬어진 드넓은 가든이 펼쳐져 있었다. 이 가든을 위해서 전문적인 선교사 2명이 봉사한다고 한다. 식당에서 주방장으로 봉사하는 분도 영국의 시골에서 목회하고 은퇴하신 목사님 부부가 주방을 맡아 봉사하며 섬기고 있다고 한다. WEC의 기본정신은 각자가 자원으로 경비를 마련하여 사용하도록 되어있으며 어떤 프로젝트을 만들어 선교사가 개인적으로 모금활동을 하지 못하도록 되어있다. WEC 선교사는 기본으로 정한 선교비의 후원금이 미달될 경우 본부에서 50%의 선교비를 채워서 보내준다고 한다. 이런 비용을 합하여 1개월에 약 7000만원-1억 정도의 경비가 소요된다고 한다. WEC의 선교사가 되려면 WEC이 인정할 수 있는 신학교에서 2년 이상 반드시 부부가 공부했어야 한다. 이것은 부부를 함께 선교사로 보기 때문이다. 그리고 WEC에서 정한 훈련을 마치면 선교사 될 수 있는데 각 팀별로 활동하기 때문에 자신이 속할 팀의 허락을 별도로 얻어야 가능하다.(이상은 대략 전해들은 내용을 정리한 것이기 때문에 자세한 것은 WEC의 홈페이지나 직접 문의하기 바란다. WEC한국지부)

    웨스트민스트 성당 WEC에 도착하여 짐을 풀고 자동차로 기차역까지 와서 주차하고 기차로 런던시내 관광을 위해서 약 40분 정도 걸려서 이동했다. 영국은 철도가 발전된 나라로 작은 기차와 전철이 잘 발달되어 있어 편리했다. 제일먼저 찾은 곳은 국회의사당(BIG BEN)과 마주보고 있는 웨스트민스트사원 이었다. 이 성당은 대표적인 영국성공회 건물이며 왕궁의 중요한 행사 또한 이곳에서 치러진다. 다이애나의 장래식도 이 성당에서 이루어졌는데 바로 그 자리에서 예배를 드릴 수 있는 기회가 왔다. 그래서 이 성당의 내부, 상당히 안에까지 들어갈 수 있었다. 2층에는 아마 세계에서 제일 거대한 파이프 오르간일 것이다. 그것이 있고 그곳 뒤쪽으로 성가내가 양쪽으로 앉는 곳이 있는데 바로 그 앞자리에 앉게되었다. 찬양예배로 드려졌는데 웅장한 파이프 오르간의 반주와 찬양대의 성가는 성전내부에 조용히 메아리치며 들려오는 그 소리는 다른 곳에서는 이런 음이 나올 수 없는, 감상하기 어려운 소리였다. 무엇보다도 이 성당이 생긴 이래로 한번도 예배가 끊이지 않고 1000년을 들여왔다는 것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바로 그 자리에서 드리는 예배란 감격 그 자체였다. 하지만 성공회의 의식이 지나치게 많고 설교의 시간이 거의 없어 아쉬움을 남겼다.
    놀이기구 이 성당 앞을 빨리 떠나지 못하고 서성거리다 런던의 강을 따라가는 유람선(Circular Cruise)을 타고 국회의사당(BIG BEN)에서 놀이기구(THE LONDON EYE)가 바라보이는 곳을 지나 TOWER BRIDGE 다리를 지나갔다. 이 다리는 높은 배가 지날 때 들어올려지는 다리였다. 런던에서 다시 WEC의 본부로 저녁에 이동했다. 숙소는 화장실이 밖에 있었는데 잘못하다가는 길을 잃을까 염려되어 쉽게 밖으로 나가지 못하고 하루를 지냈다.

    8월 15일(금) 영국에서의 마지막 날

    대영박물관 오늘 아침에도 어제와 같이 WEC에서 런던으로 기차로 이동했다. 어제 다 관광하지 못한 영국의 대영 박물관을 보는 것이 첫 번째 일이었다. 영국에 가면 오래 전부터 생각한 것이 꼭 이 박물관을 들려보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부족한 종이 지난 1997년 3월 14일 러시아를 방문했을 때 에르메타쉬(겨울궁전) 박물관 관람했는데 이 박물관은 영국 대영 박물관, 프랑스 루브르박물관과 함께 세계3대 박물관 중의 하나로 알려지고 있다. 정명선 선교사님의 큰 딸 아름이는 영국에서 가르칠 때 선생님이 러시아에 세계에서 제일 큰 박물관이 있다고 말했다고 한다. 필자가 이제 세계에서 제일 크다는 두 번째의 대영박물관을 관람하고 싶은 심정은 언제 또 이 먼 나라까지 올 수 있겠나 하는 생각에서 꼭 보고 가고자 했던 것이다. 런던 어느곳이나 관광객들로 붐볐는데 이곳인들 한산하겠는가? 하지만 관람을 하는데는 큰 무리는 없었다.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입구 앞에 거대하게 전시한 것은 도서관이었다. 사실 별달리 구경할 것도 없는, 다만 넓은 공간에 둘려가며 놓여있는 책은 얼른 보아도 어머 어마한 책이었다. 그러나 이들은 그 많은 책을 단순히 전시하기 위해서만 소장한 것은 아니었다. 지금도 책을 대여하고 운영되고 있는 것이다. 대영 전시관 앞에 많은 사람들이 제일 싶게 볼 수 있는 그 자리에 책을 전시한 영국 사람의 생각을 알 것 같았다.
    대영박물관 도서관 그리고 그 왼쪽으로 대부분의 전시장이 마련되어 있는데 제일 많은 유물은 이집트의 것이었다. 얼른 보아도 역사적인 가치가 배어 나오는 이집트의 상형문자 돌비(필자의 무식?) 들은 어디 역사책에서 많이 본 것 같은 것들이었다. 그리고 로마의 것들 이루다 설명할 수 없는 것들이 그곳에 있다고만 해두자. 그러나 근래에 한국관이 별도로 생겼다고 해서 찾았으나 실망 그 자체였다. 물론 중요한 문화재를 그곳으로 옮겨 전시할 수는 없겠으나 오히려 어떤 의미에선 없는 것이 나은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나게 할 정도로 빈약했다.
    클린턴과 함께 비교할 수 없지만 러시아 빼째르부르크의 에르메타쉬(겨울궁전) 박물관과 비교한다면 러시아의 것이 그림과 예술품 위주로 모아 전시되어 있다면 영국의 것은 이집트를 중심으로 역사적인 자료와 실물 위주로 되어있는 것이 특징이라 하겠다.
    MADAME TUSSAUDS을 들렸다. 이곳은 세계의 유명인들을 실제의 것과 같이 인형으로 만들어 전시하는 곳으로 유명하다. 그들과 함께 몇 개의 사진을 찍어 보았는데 다 찍고 지금에 안 사실이지만 인형이 실제처럼 보이기 하기 위해서는 인형이 향한 방향과 눈을 잘 살펴서 그쪽을 향해서 찍어야 된다. 인형과 사진 찍히는 사람의 눈빛 방향이 일치하면 진짜처럼 보일 가능성이 더 있다. 왕궁 그리고 돌아오는 길에 마지막으로 왕궁이 있는 곳을 들렸다. 영국근위병의 근무교대 모습은 제대로 볼 수 없었지만 그 분위기는 느낄 수 있었다. 왕궁 앞에는 전쟁기념탑과 조형물이 있었고 옆쪽으로는 넓은 공원이 조성되어 있었다.

    이러한 일정을 잘 준비해 주시고 수고해 주신 재영총신동문회장 조성택 목사님과 GMS, WEC소속의 정명선 선교사님, Wales의 지성구 목사님, 그리고 재영총신동문회의 여러 목사님 선교사님에게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2003년 8월 16일 이영제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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