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의 족보

본 문 : 마태복음1:2-6

사람마다 족보가 있습니다. 씨족 대대의 계통을 말합니다. 그 족보가 문서로 정리되어 있건 없건 모든 사람은 혈통이 있기 마련입니다. 그리고 그 족보는 하나일 뿐입니다. 성경에는 두개의 족보를 가진 분이 나옵니다.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주님의 족보는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마태복음의 족보는 아브라함부터 시작합니다. 아담과 그의 후손은 언급하지 않습니다. 누가복음은 예수 그리스도부터 아담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그 차이점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누가복음은 하나님의 구원에 관하여 기록하고 있습니다. 구원은 하나님이 창조하시고 아담에 의하여 타락한 모든 족속을 위한 것입니다. 반면에 마태복음은 하나님의 왕국에 대하여 기록했습니다. 이 왕국은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 즉 아브라함에 의하여 대표된 족속을 위한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마태복음은 아브라함부터 출발하지만 누가복음은 그 족보가 아담으로 거슬러 올라간 것입니다.
마태가 육신에 따른 그리스도의 선조들로 소개한 족보에는 다섯 명의 여인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유대인의 관례에 따르면 족보를 기록하는 사람은 여인의 이름을 쓰지 않습니다. 남자만이 족보에 오르게 됩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오랜 관습의 하나이기 때문에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종손만 간추린 이 족보 안에 있는 다섯 명의 여인들은 그들의 성향이 한편 손을 연상하게 합니다. 한 손에는 다섯 개의 손가락이 있습니다. 넷은 한무리이며 다른 하나는 홀로 있습니다. 이 다섯의 여인 중에서 넷은 재혼한 여인들입니다. 그들을 아시겠습니까.
다말은 유다의 며느리었습니다. 유다는 자기 며느리에게서 쌍둥이를 낳았습니다(창 38:24-30). 라합은 여리고의 창녀였습니다. 룻은 모압인었습니다. 가나안에 들어간 이스라엘 백성에게 모압인은 10대까지 주님의 회중에 들어가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습니다(신 23:3). 밧세바는 다윗왕과 통간하고 전쟁터에 있는 그의 남편을 죽게한 가나안 여인이었습니다.
이 간단한 족보는 왜 이런 여인들을 모두 언급했을까요? 그들이 우리의 대표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깨끗하지 않다고 생각 된다면 우리들도 깨끗하지 않습니다. 우리 자신의 근원을 추적해 보십시요. 우리들이 그 여인들 보다 낳은 것이 무엇일까요. 성경은 가장 나쁜 사람들을 그리스도의 혈통에 포함시켰습니다. 그렇게 해서 우리들도 그리스도의 혈통에 포함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해 주십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은혜입니까? 주님은 참으로 죄인들의 구주이십니다. 진심으로 주님을 찬양 하십시다.

성경에는 훌륭한 여인들도 많습니다. 만약 성경의 기자가 인간적인 역사가였다면, 그리고 여인들도 포함하기를 원했다면, 그리스도의 명예를 떨어뜨릴 불순한 여인들이 아닌 정숙한 여인들을 포함시켰을 것입니다.
만약 신성한 족보 속에 불순한 사람들의 이름이 깡끄리 자취를 감추었다면, 우리는 교회의 상황을 이해하지 못할 것입니다. 사람들은 교회는 신성하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교회 안에는 깨끗한 사람들이 많지 않다고 비난합니다. 옳은 말입니다. 그러나 자신은 매우 깨끗하고 순수하다고 생각지 마십시요. 우리는 아무도 순수하지 않습니다. 누구를 비난해도 좋을만큼 정당하지 못합니다. 그렇지만 그리스도의 혈통은 좋은 사람들과 나쁜 사람들 모두를 포함합니다. 사실은 좋은 사람들 보다 나쁜 사람들이 더 많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오늘의 교회입니다.
주님의 족보 속에는 재혼한 네명의 불결한 여인들 외에 두드러진 한 처녀의 모습도 있습니다. 곧 우리 주님의 모친 마리아입니다. 그는 순수하고 깨끗하고 좋았습니다. 이것은 한 손에 홀로 있는 엄지 손가락과 같습니다. 주님은 이 손을 붙잡고 당신의 왕국으로 우리들을 인도해 주십니다. 이것이 족보를 기록한 의미입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족보를 통하여 거룩한 빛을 들어 내시려는 것이 아니셨습니다. 오히려 그 목적의 실현에 유익되지 못할 것으로 보이는 수단으로 그 목적을 이루시는 놀라운 방식을 나타내신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족보를 살펴 보면서 이 거룩하신 주님의 뜻을 배우셔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며,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할 것입니다.

첫째, 아브라함, 이삭, 야곱, 세 족장에 대하여 생각하십시다(2절).
아브라함은 하나님께로부터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교회에 대한 헬라어 단어는 에클레시아(ecclesia)입니다. [부르심 받아 나온 자]들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교회 안에 있는 모든 성도들은 주께로부터 부르심 받아 나온 자들입니다. 아브라함은 바벨, 즉 거역과 우상숭배의 지역으로부터 그리스도로 예표된 좋은 땅으로 부르심 받았습니다. 우리들 또한 바벨, 즉 세상 안에서 타락했고 거역했으며 우상을 숭배했으나 그리스도의 부르심으로 하나님의 나라 안에 있습니다.
부르심 받은 아브라함은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믿음으로 의롭게 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에 의하여 생활한 사람의 모범입니다. 그래서 모든 믿는 자의 조상이 된것입니다. 우리도 믿음으로 아브라함의 나라 안에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을 본받아 사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합니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낳았습니다. 이삭에 관한 특별한 요점은 무엇입니까? 약속에 의하여 태어난 것입니다. 그는 아브라함의 유일한 후사이며 그리스도의 기업을 받은 것입니다(창 26:3-4).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한 아들을 약속하셨습니다. 그 약속은 더디었습니다. 사라는 그 약속을 돕기 위하여 하나의 제안을 했습니다. 하갈이라는 여종을 아브라함의 첩실로 밀어 넣은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얻은 아들이 이스마엘입니다. 이스마엘은 분명히 아브라함의 뿌리에서 태어났지만 약속의 자손은 아닙니다. 이것은 천연적인 관념입니다. 매우 선한 유혹입니다. 우리에게도 이런 관념은 종종 있습니다. 성경을 제처두고 "여기에 좋은 자료가 있다. 이런 방법으로 해보라" 참으로 그럴듯해 보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제안은 우리를 하나님의 약속으로부터 떠나게 합니다.
아브라함이 백세에 약속으로 얻은 이삭의 후손은 지금도 이스마엘의 후손으로부터 부단하게 고통을 받고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에서 한번 실수는 병가지상사가 아니라 영원한 실수인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이스마엘은 있습니다. 그것들이 우리를 좌절시킵니다. 작은 문제가 아닙니다.
이삭은 야곱을 낳았습니다. 야곱과 에서는 쌍둥이었습니다. 야곱은 빼앗는 자를 의미합니다. 다른 이들의 지위를 빼앗으며, 그들을 자기 아래 두고 그들 위로 올라가는 자들의 표상입니다.
야곱은 태어날 때에 에서의 발꿈치를 붙잡았습니다. 팥죽 한그릇으로 장자의 명분을 빼앗았습니다. 아버지를 속이고 장자의 축복을 독차지했습니다. 에서는 야곱의 쫓았으나 하나님이 야곱을 선택하셨기 때문에 그의 모든 노력은 허사였습니다. 천국은 침노하는 자가 빼앗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능동형이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향하여 적극적으로 탈취해 가는 용사이여야 합니다.

둘째, 유다와 다말을 생각해 보십시다(3절).
야곱의 열 두 아들 중에서 유다만 족보의 명단에 올랐습니다. 이유는 유다 지파가 치리자의 지팡이인 "홀이 유다를 떠나지 아니 할 것(창 49;10)"이라는 예언 때문입니다. 야곱의 첫째 아들은 르우벤입니다. 그는 첫째 아들의 몫, 즉 장자권을 가져야했습니다. 장자권은 세가지 요소가 있습니다. 두 배의 몫의 땅, 제사장 직분, 왕의 직분이 그것입니다. 르우벤은 첫째 아들이었지만 자신의 더럽혀짐으로 인하여 장자권을 잃어 버렸습니다. 오늘날 선택 받은 그리스도인들이 자만에서 깨어나야할 중요한 교훈입니다.
두 배의 몫의 땅은 요셉에게로 갔습니다. 그의 순결함으로 인한 것입니다. 요셉은 야곱과 가장 가까웠으며, 그의 아버지의 마음에 합한 아들이었습니다. 요셉의 두 아들 므낫세와 에브라임이 각각 땅의 분깃을 받았습니다. 두 아들을 통하여 요셉은 좋은 땅의 두 몫을 상속 받은 것입니다.
장자권의 제사장 직분의 몫은 레위에게로 갔습니다. 출애굽기 32장에 나오는 금송아지 우상 사건을 생각해 보십시오. 이스라엘 열 세 지파 중에서 오직 레위 지파만이 모세 편에 섰습니다. 그의 자손들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하였으며, 하나님의 갈망을 성취하기 위하여 자기 부모와 형제들과 자녀들을 잊어 버리고 오직 하나님만 바라 보았습니다. 그 결과 장자권의 제사장 직분의 몫을 받았습니다.
장자권의 또 다른 몫인 왕의 직분이 유다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그 이유를 창세기 49장 10절에서 찾아 보십시오. 요셉이 그의 형제들의 모의 아래에서 고통 당하고 있을 때 유다는 그를 돌보았습니다. 또한 그는 어려울 때에 베냐민을 돌보았습니다. 이것은 왕의 목자적인 성품입니다.
우리는 [장자의 교회]입니다(히 12:23). 우리 성도들의 장자권 역시 세가지입니다. 그리스도의 두 배의 몫, 제사장 직분, 왕의 직분이 그것입니다.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우리가 온전히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두 배의 몫으로 그리스도 자신을 누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대단한 축복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또한 하나님의 제사장들이며 왕들입니다.
다음 생각해 볼 것은 다말입니다. 다말은 시아버지와 근친상간을 통해 잉태하는 축복을 받은 여인입니다. 도덕적으로 보면 통탄할 일이며 윤리적으로 말한다면 끔찍한 일입니다. 아무도 이것을 의롭다고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다말의 행위를 선하다고는 말하지 않지만 의로왔다고 주장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관념입니다.
다말은 유다의 맏아들의 아내였습니다. 이 아들은 장자의 권리를 상속 받아야 했으나 주님 보시기에 악했으므로 그의 생명을 빼앗겼습니다. 유다의 둘째 아들도 죽고 말았습니다. 유다는 장자권을 물려 받도록 아들을 낳기 위해 다음의 아들을 다말과 결혼시켜야 했습니다. 유다는 그 책임을 다하지 않았습니다. 다말은 속은 것입니다.
다말은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장자권을 얻기 위해 부적당한 수단까지 사용한 것입니다. 거리의 여자로 분장하고 양털을 깎으로 오는 유다를 유혹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시아버지의 아이를 잉태하게된 것입니다. 다말은 장자권을 얻기 위해 최선을 다한 여인의 상징입니다.
장자권을 얻는 것은 그리스도를 얻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얻기 위해서는 최선의 길이 아니더라도 취해야 합니다. 다말은 부적당한 방법으로 장자권을 획득했습니다. 그러나 성경의 신성한 기록 안에서 다말은 나쁜 이름이 아닙니다. 이 교훈은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를 사모하고 그를 추구하려 한다면, 그래서 참으로 그리스도를 얻으려는 길은, 그것이 어떤 것이든지 바른 길이라는 것입니다. 다말의 행위는 유다의 왕통을 이어준 것입니다.

셋째, 베레스와 세라에 대하여 알아 보십시다(3절).
다말은 쌍둥이를 잉태했습니다. 베레스와 세라입니다. 출산하려는 순간 세라가 먼저 나오려고 했지만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그가 자기 손을 내밀었고 산파는 큰 아들이라는 표시로 붉은 실을 매어 두었지만 베레스가 그를 제치고 큰 아들이된 것입니다.
먼저가 나중이 되고 나중이 먼저되었습니다. 산파는 깜짝 놀랐습니다. 이것은 장자권에 대한 좋은 예입니다. 베레스는 장자권을 상속했습니다. 사람은 그를 택하지 않았지만 하나님이 택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장자권이 사람의 노력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택에 있음을 입증합니다. 다말과 쌍둥이 아들은 우리에게 장자권이 무엇이라는 것을 잘 설명해 줍니다.
곧 주님이 오십니다. 주님 오시면 무덤에 있는 자들이 부활합니다. 그 부활에도 순서가 있습니다. "먼저는 첫 열매인 그리스도요 다음에는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그에게 붙은 자요 그 후에는 나중이니(고전 15:23-24)"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장자요 또한 부활에서 장자권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장자이신 그리스도에게 붙은 장자들의 교회입니다. 성도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장자권을 에서와 같이 허술히 여기지 마십시요.

넷째, 라합을 생각해 보십시다(5절).
라합은 여리고의 여인입니다. 여리고는 하나님에 의해 영원토록 저주 받은 땅입니다. 라합은 그 땅의 창녀였습니다(수 2:1). 세상에서 이 여인보다 더 형편이 나쁜 사람도 있을까요. 그러나 라합은 그리스도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어떻게 창녀가 그리스도의 조상이 될 수 있단 말입니까.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하나의 원칙을 찾아야 합니다. 이스라엘에 의하여 점령 당한 여리고는 라합의 가족과 그의 소유를 제외하고는 모두 멸망 되었습니다. 라합이 구원 받은 것은 하나님의 백성에게 돌이켰기 때문입니다(수 6:22-25). 그녀는 하나님과 그 백성에게 돌이킨 후에 유다 지파 군대의 인도자요, 정탐군으로 여리고에 보내졌던 살몬과 결혼했습니다. 보아스라 이름하는 경건한 사람을 낳으므로서 라합은 그리스도의 족보에 든 것입니다..
이 원칙은 우리에게도 적용됩니다. 하나님의 회중에 들려면 먼저 우리의 형편이 어떠하던지 하나님의 백성에게로 돌이켜야 합니다. 그리고 영적인 의미에 있어서 합당한 사람과 결혼해야 합니다. 또한 그분의 자녀를 낳아야 합니다. 이것이 영적인 원칙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이미 하나님의 백성에게로 돌이킨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와 결혼한 사이입니다. 성경은 교회를 그리스도의 아내라고 합니다. 그러나 아직 방심해서는 안됩니다. 경건한 자녀를 낳아야 그리스도의 족보에 들 수 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증인으로서 전도해야 한다는 명령에 등한해서는 안됩니다. 전도만이 영적 참 자녀를 낳게됩니다.

다섯째, 보아스와 룻을 생각해 보십시다(5절).
보아스에 대하여 자세히 알려면 룻기를 읽어야합니다. 룻기는 참으로 좋은 이야기입니다. 보아스는 그리스도의 예표이며 룻은 교회의 예표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보아스와 룻을 만나면 친근해집니다.
룻은 나오미의 며느리었습니다. 나오미는 남편을 따라 자식과 함께 이스라엘을 떠나 이방에서 살았습니다. 이방여인 둘을 두 아들의 며느리로 삼았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남자들이 이방여인과 결혼하는 것을 지독히도 싫어 하십니다. 남편도 죽고 두 자식도 죽었습니다. 즉 그들은 장자권을 모두 잃어버린 것입니다.
나오미는 고향으로 돌아 가기를 작정했습니다. 룻은 시어미를 따랐습니다. 고향에 돌아 왔지만 기업이 없습니다. 그 기업을 이어준 사람이 보아스입니다. 보아스는 친척의 기업을 잇기 위해 그 사람의 과부와 결혼했습니다. 그리하여 그리스도와 밀접하게 족보에 든 조상이 되었습니다. 보아스는 자신의 장자권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장자권도 귀중하게 보아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줍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장자이시지만 또한 우리의 장자권을 구속해 주신 분입니다. 그래서 보아스는 그리스도의 예표가 됩니다.
나오미는 창조주 하나님을 떠나서 세상에 속한 사람들의 상징입니다. 비록 하나님께로 돌이켰지만 구속해 주는 사람이 없다면 그의 기업을 이을 수 없을 것입니다. 비록 우리가 하나님 안에 있기를 소원하지만 십자가에서 우리 대신 희생제물이 되신 그리스도의 공로가 없었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리스도의 고난 당하심으로 주신 구속의 은혜를 등한히 여겨서는 안됩니다. 과연 사람이 "이같이 큰 구원을 등한히 여기면 어찌 피하리요(히 2:3)" 무서운 심판의 결과만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족보에서 보아야 할 것은 룻입니다. 룻은 좋은 여인이지만 큰 결점이 있습니다. 그녀의 근본은 근친상간에 속합니다. 룻은 모압 족속입니다. 모압은 소돔에서 구원 받은 롯이 그의 딸들과 근친상간으로 낳은 아들입니다(창 19:30-38). 그래서 주님의 총회에서 제외되었습니다(신 23;3).
룻은 하나님의 총회에 들어 올 수 없었지만 하나님을 추구하고 그의 백성되기를 갈망했습니다. 사람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 배경이 어떠하든지 간에 하나님을 추구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갈망하면 그리스도의 장자권 안에 들어 올 위치에 놓인다는 것입니다. 룻은 하나님의 백성들 가운데서 경건한 사람인 보아스와 결혼하여 다윗왕의 할아버지인 오벳을 낳았습니다.
보아스는 재미있는 배경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의 어머니는 가나안 여인으로서 창녀였던 라합이며, 그의 부인 룻은 모압 여인입니다. 둘 모두 이방인었습니다. 그 보아스로 인하여 그들은 하나님의 총회에 연결 되었습니다. 우리의 그리스도가 하시는 일이 이것입니다. 우리의 미천한 근본을 생각해 보면 참으로 우리 주님 그리스도께 영광을 돌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할렐루야 주님을 찬양 하십시다. 1991. 12. 1. -설 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