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금과 빛

본 문 : 마태복음 5:13-16
월남의 전쟁터에서 보았던 영화 한토막이 생각납니다. 오래 되어서 제목도 잊고 정확한 내용도 다 기억하기 어렵지만 대강의 줄거리는 이렇습니다. 주인공의 이름은 헨리이고 은행원으로서 안경없이는 전혀 앞을 보지 못할만큼 눈이 나쁜 사람입니다. 언제나 두툼한 돋보기를 끼고 다닙니다. 헨리는 부인을 가장 두려워합니다. 부인의 말이면 꼼짝을 못합니다. 그의 소원은 부인이나 높은 사람들이 참견하지 않는 곳에서 마음놓고 독서하는 것입니다. 글읽기를 얼마나 좋아하던지 직장에서 집사이를 오가는 동안 간판이란 간판은 모조리 읽고 외워 버립니다. 저녁을 먹은 후 신문을 읽으려 하면 부인이 소리 소리 지르며 야단입니다. 책을 읽다가 은행장에게 들켜서 야단을 맞기도 합니다. 이런 헨리에게 가장 소중하고 기다려 지는 시간이 있습니다. 곧 점심 때입니다. 그날도 점심 시간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렸습니다. 언제나 처럼 점심을 싼 보자기와 신문 그리고 매일 읽는 책들을 가지고 다른 사람이 보지 않는 틈을 타서 지하실로 갔습니다.
지하실에는 비어있는 커다란 철제금고가 하나 있습니다. 그는 금고 문을 열고 그 안으로 들어 갔습니다. 아무도 간섭할 이가 없는 자기만의 세계를 얻은 것입니다. 우선 점심을 먹은 후 마음 놓고 편히 앉아 신문도 읽고 책도 읽었습니다. 이때입니다. 굉장한 폭음이 들리고 온통 지하실이 뒤흔들렸습니다. 헨리는 그만 정신을 잃고 말았습니다. 겨우 정신을 차린 그는 더듬어서 안경을 찾아 쓰고 금고의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습니다.
수소폭탄이 떨어진 것입니다. 세상은 완전히 파괴되어 버렸습니다. 다만 그 혼자 지하실의 금고 안에 들어가 있었기 때문에 생명을 건진 것입니다. 그의 사무실에는 그토록 잔소리하던 은행장도 죽어 있습니다. 집으로 뛰어 갔습니다. 무섭게 굴던 아내도 집도 흔적조차 없어졌습니다. 그만 넋이 빠졌습니다. 얼마 후에 정신을 차려 살펴보니 주위에는 얼마든지 오래 먹을 수 있는 양식들이 온통 흩어져 있습니다. 이제 그는 그렇게 자유롭고 싶었던 그 자유를 얻은 것입니다. 먹을 것이 충분합니다. 잔소리하는 사람도 없습니다. 그러나 그는 끝없는 고독에 사로잡혔습니다. 그가 실망에 가득차서 걷고 있을 때에 책 한권이 그의 발길에 채였습니다. 눈을 들어 죄우를 보니 그가 서있는 자리는 시립 도시관이 있었던 곳입니다. 건물은 파괴 되었지만 책들이 길과 층계 위에 흩어져 있습니다. 그는 너무 기뻤습니다. 어쩔줄 몰랐습니다. 책들을 한곳으로 모았습니다. 시집, 소설책, 그리고 논문집들, 그는 수십년 걸려서도 다 읽을 수 없을만큼의 책들을 얻은 것입니다. 책도 넉넉합니다. 자유도 시간도 모두 나의 것입니다. 그가 소원하던 모든 것이 이루어졌습니다. 그 만족과 기쁨의 포만감이 가슴 속에 너무 뿌뜻하여 가만히 있을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이때에 그는 층계에 굴러있는 또 다른 책을 줍기 위해 허리를 굽히다가 그가 끼고 있던 안경이 시멘트 바닥에 떨어졌습니다. 돋보기 알이 산산히 부셔지고 말았습니다. 그가 절망에 찬 울음을 터뜨리는 것으로서 이 이야기는 끝을 맺습니다. 그 모든 것의 마지막 순간에 그에게 참으로 필요했던 것은 그 조그맣고 보잘것 없는 돋보기 안경이었던 것입니다. 사람에게 참으로 소중한 것은 때로는 보잘것 없는 것으로 생각하는 바로 그것들입니다. 본문에서 주님은 그리스도인을 가리켜서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라 "세상의 빛"이라 하십니다. 소금과 빛은 흔하디 흔한 것입니다. 너무도 많이 듣고 자주 쓰는 말이기도 합니다. 그 의미도 잘 알고 있습니다. 대수롭지 않게 여깁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이 늘 하는 말이라고 생각하는 통과의례적인 것이 되어 버립니다. 감정이입이 잘 안됩니다. 그러나 그것은 실천을 통하여 나타나는 것이어야 합니다. 우리는 참된 행복을 얻는 여덟가지의 복에 대하여 공부했습니다. 팔복의 중심은 인격입니다. 그 성도의 인격적 됨됨이가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들의 됨됨이가 됩니다.
그렇습니다. 성도의 올바른 인격의 토대 위에서라야 비로소 세상에서의 삶의 원리와 사명도 주어지기 마련입니다. 우리가 사명을 가진 그리스도인이라면 소금과 빛의 사명을 잘 감당할 수 있어야 합니다. 잘 아는 말씀이지만 다시 한번 겸허한 마음으로 본문을 통하여 은혜를 받고 온전한 그리스도인의 역할을 다 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첫째, 소금의 사명입니다(13절)
팔복에 대하여 말씀을 마치신 주님은 제자들을 향하여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라고 하십니다. 지상에서 가장 염분이 많은 사해를 옆에 두고 사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는 소금이란 너무도 흔하고 값싼 것에 불과합니다. 사해는 염분기가 너무 많아서 사람이 들어 가서 헤엄을 칠 필요가 없습니다. 그저 가만히 있어도 둥둥 뜹니다. 그런 염기를 가득 머금은 바다이기 때문에 가장자리에는 소금덩어리가 떠다닙니다. 사람들은 소금을 만들기 위하여 조제하는 수고를 할 필요가 없습니다. 아무데서나 한 바가지 떠다가 쓰면 충분합니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라"고 말씀하실 때에 제자들은 웃었을지도 모릅니다. 자신들을 그렇게도 흔하고 흔해빠진 값싼 소금에 비유하셨으니 말입니다. 한편 소금은 고기를 썩지 않도록 저장하는데 사용합니다. 태고적부터 사람들은 이 방법을 터득하였고 가장 좋은 방법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있는 군중은 대부분 갈릴리 사람들입니다. 잡은 고기를 오랫동안 갈무리 하기 위하여 생선을 저리는 방법을 잘 아는 어부들이기도 합니다. 갈릴리에서 절인 생선은 로마 제국 전체에서도 유명했습니다. 예수님의 비유를 쉽게 이해했을 것입니다. 팔레스타인의 소금은 사해 바다가 아니더라도 지천이었습니다. 조그만 늪에서도 생산 되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순수하지 못했습니다. 한 바가지 푹 퍼다가 쓰고 남은 것은 아무데나 두기 마련입니다. 다른 물질이 많이 포함되어 있어서 햇빛이나 공기 중에 오래 노출되면 짠 맛이 다 없어집니다. 결국 다시 쓸 수 없게 됩니다.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하신 말씀은 이해하기 어려웠습니다. 소금은 맛을 잃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팔레스타인의 소금은 맛을 잃어버리기 십상이었습니다. 그만큼 그 지역은 불순물이 많이 섞인 소금이 흔했던 것입니다. 소금은 평범한 것이지만 사람에게는 혈액과 같아서 없어서는 안될 존재입니다. 피가 부족할 때에 식염주사를 맞습니다. 음식은 소금이라야 간을 맞춥니다. 옛날에 우리나라는 산악이 많아서 교통이 불편하고 물물의 교환이 어려웠습니다. 소금을 만들 재간이 없는 산간에서는 소금이 금보다 더 귀했습니다. 그래서 지금까지도 소금이 귀한 줄만 압니다. 예수님이 사신 팔레스타인은 가장 흔한 것이 소금이며 가장 평범한 것이 소금이었습니다. 이렇게 평범하지만 꼭 필요한 소금을 통하여 우리에게 교훈하시는 뜻은 무엇일까요. 그리스도인의 삶의 매력은 평범한 가운데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평범하지만 귀한 삶으로 살라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특수 인간처럼 살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 강박 관념 때문에 예수 믿기가 힘들다고 말합니다. 무엇인가 잘못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일부러 자신의 삶을 다르게 살려고 애써서 꾸밀 필요가 없습니다. 평범하게 사십시오. 그러나 가장 인생답게 사십시오.
월말이 되면 월급을 받습니다. 월급 때마다 그 감격이 얼마나 큽니까? 월급을 영어로 "샐러리"라고 합니다. 샐러리라는 말의 본래의 뜻은 솔트 먼니(Salt Money) 곧 "소금 돈"이라는 것입니다 한 달을 일하면서 이런 일도 보고 저런 일도 ㄲ습니다. 그만 두고 싶을 때도 있고 일하는 것이 지겨울 때도 있습니다. 그 고생 끝에 받는 월급이기에 더 감격이 큽니다. 이런 보람을 이루는 삶이 소금 삶입니다. 주님은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 되라" 하시지 않았습니다. 구체적인 행위를 통해서, 그 삶을 통해서 소금처럼 살라는 것이 아닙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하십니다. 그리스도인은 소금처럼 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소금입니다. 지극히 평범한 가운데 귀한 사명을 다하는 삶입니다. 썩을 것을 썩지 않게 하면서도 소위 티내지 않는 너무도 자연스러운 삶, 그것이 모든 사람에게 매력을 주어 그리스도 안으로 이끌어 들이는 그런 삶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둘째, 빛의 사명입니다(14-15절)
누구나 이름이 있습니다. 그 이름은 평생을 따라 다닙니다. 죽은 후에도 이름 석자는 남습니다.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고 했습니다. 세상을 떠난 후에도 이름 석자 남기는 것에 삶에 이유를 걸었습니다. "좋은 이름" 그것은 갓 탄생한 생명에게 안겨주는 첫 선물입니다. 그러기에 "좋은 이름" 짓기에 골몰합니다. 어버이는 깊이 생각한 끝에 이름을 짓습니다. 기왕이면 좋은 이름을 지어 주고 싶은 것입니다. 이름은 우선 뜻이 깊어야 합니다. 어감도 좋고 부르기도 좋아야 합니다. 항렬에 따라서 이름을 짓기도 합니다. 작명을 전문으로 하는 직업도 생겨나고 훌륭한 작명은 훌륭한 명성을 남기는 일로 이해되기도 합니다. 이렇게 짓기 어려운 것이 이름인데 주님은 "귀한 이름"을 우리에게 거푸 지어 주십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라고 작명하신 주님은 곧 이어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나는 세상의 빛(요 8:12)"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이름을 "세상의 빛"이라고 하십니다. 주님과 같은 항렬입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이 감격을 어떻게 주체하시렵니까?
빛은 스스로가 밝습니다. 사람의 양심은 빛과 같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양심적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먼저 마음씨가 밝아야 합니다. 흐리터분하거나 구질구질한 구석이 없어야 합니다. 그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어렵지도 않습니다. 빛이라고 지어주신 주님이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빛은 다른 사람을 밝게 비추어 줍니다. 마음이 밝으면 접촉하는 사람의 마음도 밝게해 줍니다 덕이 높은 어른과 마주 있으면 자기도 모르게 옷깃이 여며지는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을 만난 막달라 마리아 같고(눅 7:36-38), 삭개오 같습니다(눅 19장). 우리 사회는 이렇듯 마음 속으로 "파고 드는 빛"이 요구됩니다. 그 빛이 있어야만 휘청거리는 이 세상이 바로 잡힙니다. 씰룩거리는 윤리관이 제 정신을 되찾게 됩니다.
빛은 어둠을 물리치고 모두를 보게 합니다. 우리 자신이 빛이라면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본을 따라서 무지와 편견을 걷어 치우고 생명의 길을 모든 사람에게 보여 주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빛을 받아서 빛나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 그리스도인들이 함께 모여서 큰 횃불을 이루는 그리스도의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주님은 빛이 있으면 산위의 동네가 숨기우지 못할 것이라고 하십니다. 옛날의 도시들은 산 위에 건설 되었습니다. 침략이 잦은 시절이라 적군으로부터 방어하기 좋은 잇점을 살린 것입니다. 예루살렘이나 사마리아도 산 위에 세워졌습니다. 산 위에 있는 도시는 자연히 노출됩니다. 공기도 좋고 경관도 좋습니다. 지금 주님이 앉아서 수많은 군중들에게 가르치고 있는 장소가 다볼산이 맞다면,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기우지 못할 것이요" 하시면서 손가락으로 가리키고 있는 도시는 "사페드"일 것입니다. 사페드는 해발 200여 미터 높이의 언덕으로 팔레스타인에서 가장 아름다운 전망 가운데 하나를 내려다 볼 수 있습니다. 빛이 있으면 그 아름다움을 숨기우지 못할 것입니다. 누구든지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지 않습니다. "말"이란 유대인의 집에서는 어디에나 있는 매우 흔한 양을 재는 큰 통입니다. 열 되가 들어가는 통입니다. 어떤 번역에는 뒷박이라고 했으나 잘못된 것입니다. 옛날 우리의 시골에도 이런 말들은 흔했습니다. 등불을 켜서 말 아래 감추지 않습니다. 등불은 밝히기 위하여 켜는 것이지 감추기 위하여 켜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인다운 행실을 보이지 못하고 감춰진 생활을 한다면 우스운 일입니다. 등불은 등경 위에 둡니다. 그래야 집안 모든 사람이 그 불빛 아래에서 활동하게 됩니다. 그 당시의 등은 발달하지 못한 천연 그대로의 것이었습니다. 등피도 없이 둥글넙적한 접시 위에 올리브 기름을 부어 비벼서 만든 심지로 불을 켰습니다. 촛불은 아직 발명되지 못한 때입니다. 촛불이라고 번역된 성경은 잘못된 것입니다. 주님이 "빛"을 말씀하신 것은 빛 자체를 역설하시려는 것이 아닙니다. 그 역할을 말씀하시려는 것입니다. "세상의 소금"이라는 말이 "세상의 부패"를 전제하듯이 "세상의 빛"은 "세상의 어두움"을 전제합니다. 빛은 스스로 자신을 태워야만 빛을 발할 수 있습니다. 소금이 되기 위해서는 녹아야 하듯이 빛이 되려면 타야만 합니다. 그때에야 우리는 소금이 되고 빛이 됩니다. 빛은 또한 독특합니다. 소금이나 빛이 그 자체의 독특성을 상실한다면 아무 짝에도 쓸데 없습니다. 소금이 부패한 곳에 있어야 하듯이 빛은 어두운 곳에 있어야 합니다. 어두움에 동화 되어서도 안되고 타협해서도 안됩니다. 세상에 속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이 세상에 굳게 서십시오. 이 세상을 도피하지 말고 그리스도인의 온당한 삶을 사십시오. 그것이 우리의 사명입니다.

셋째, 착한 행실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게 해야 합니다(16절)
가인과 아벨이 제사를 드렸습니다. 하나님은 가인의 제사를 물리치시고 아벨의 제물만을 열납하셨습니다. 왜 그렇게 하셨는지 알기 어렵습니다. 사람들의 추측은 마음에 없는 형식적인 제물을 하나님이 원치 않으시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유야 어찌 되었건 이것은 인류의 시초에 가장 큰 사건이 되었습니다. 이일을 가인은 자기 반성의 기회로 삼지 않았습니다. 마음에 노(怒)를 발합니다. 악은 사람이 부를 때에 찾아 오는 것이 아닙니다. 선을 행치 않을 때에 옵니다. 병을 피하는 최선의 방법은 건강을 증진시키는데 있다는 말과 상통합니다. 선행에 게으른 가인은 죄를 문전에 부를 뿐 아니라 그 죄를 사모하기까지 하였습니다. 서양 속담에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은 악한 일을 하고 있는 것이다" 라는 말이 생각납니다. 가인은 그가 살고 있는 세상에 아무런 책임 의식이 없었습니다. 오히려 질투의 불꽃이 일어 그 심정의 고뇌를 폭발시켰습니다. 죄 없는 동생을 죽이고 말았습니다. 그는 아벨의 무죄를 압니다. 그러나 동생의 순결을 투기해서 죽인 것입니다(요일 3:12). 하나님이 가인을 찾아 오셨습니다.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내가 알지 못합니다. 내가 아우를 지키는 자입니까" 그는 살인의 죄에 위장의 죄까지 더했습니다. 형제의 관계에 있어서 도덕적 의무를 무시하므로서 책임을 회피한 것입니다. 이것이 현대인이 가진 병증 중에서도 가장 깊이 곪아 있는 증상입니다. 자기 손으로 죽인 동생의 소재를 물으시는 하나님께 그 책임마저 회피합니다. 그 무책임한 도피근성을 봅니다. 그리스도교는 도피의 종교가 아닙니다. 산속의 불교와의 차이가 이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사회와의 관계 속에서 자기의 존재 의의를 찾습니다. 그러므로 책임회피는 곧 인생 도피 행위입니다. 공중나는 새에게 먹을 것을 주시고 들에 백합화도 입히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찮은 미물이나 들풀도 제 책임을 다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새는 노래하는 책임을 다하고 꽃은 곱게 피는 책임을 다합니다. 유독 사람만이 책임을 회피하려 듭니다. 주님은 그리스도인의 도피주의를 경고하십니다. 소금이 되고 빛이 되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사회적 책임을 다하라는 말씀입니다. 라인홀드 본 타덴은 "그리스도인은 그가 처한 세계에서 발생하는 모든 일에 책임이 있다. 조직화 된 종교 자체에 대한 관심만으로 참다운 기능이 마비된 상태에서 벗어나 교회는 정치, 경제, 문화 등 각 부문으로 침투하는 것을 목표 삼아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공산주의가 일어난 것은 그리스도인들이 충실한 그리스도인의 책임을 다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에서도 4,19를 위시해서 일련의 불행한 사건들이 계속해서 일어난 정치적 격동은 그리스도인들이 그 몫을 감당하지 못한 때문이라는 자성의 소리도 있습니다. 교파의 장벽을 쌓아 놓고 자기 교회나 지키고 거대한 건물이나 짓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사명이 아닙니다. 이미 주님이 전제하신 썩은 세상에, 어둠의 세상에 소금이 되고, 빛이 되는 것입니다. 세상이 살벌할수록 산골 기도원에 들어가서 제 몸보신을 위한 기도나 하는 것이 그리스도교가 아닙니다. 이 시대를 책임지지 못한 죄책이 앞서고 그래서 자기 몸을 녹이고 불살라서 세상을 밝히는 사명을 다하는 것입니다. 잘난 체하는 허식의 빛이 아닙니다. 자연스러운 삶을 통하여 책임을 다하는 빛이 되어야 합니다. 작은 불ㄲ 하나가 어둠을 밝힙니다. 나 같은 무능한 것이 무엇을 하겠는가 하는 나약한 자포자기를 버리고 그리스도의 빛을 받아서 이 세상으로 되쏘아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일입니다. "세상의 소금" "세상의 빛"으로서의 이름 값을 다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