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은 누구신가?

저 자 : 주앙교회 이영제 목사

제10과 나()의 문이신 예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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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요한복음 10:1-10
”1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의 우리에 문으로 들어가지 아니하고 다른데로 넘어가는 자는 절도며 강도요 2 문으로 들어가는 이가 의 목자라 3 문지기는 그를 위하여 문을 열고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 4 자기 양을 다 내어 놓은 후에 앞서 가면 양들이 그의 음성을 아는고로 따라 오되 5 타인의 음성은 알지 못하는고로 타인을 따르지 아니하고 도리어 도망하느니라 6 예수께서 이 비유로 저희에게 말씀하셨으나 저희는 그 하신 말씀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니라 7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나는 양의 문이라 8 나보다 먼저 온 자는 다 절도요 강도니 양들이 듣지 아니하였느니라 9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얻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 10 도적이 오는 것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문은 왜 필요한 것입니까?
그것은 들여보낼 것과 들어가지 말아야 할 것을 거르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시험문제도 문, 답으로 말하는 것입니다. 먼저 질문을 하고 그리고 그것에 해당하는 정답을 말해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생활하는 집에 달린 문이 있는가 하면, 어떤 지방이나 지역을 출입하는 문도 있고, 나라를 드나드는 문도 있습니다. 그런데 문의 형태는 다르지만 한 가지 공통된 특징이 있습니다. 그것은 문으로 들어오는 사람만이 환영받고 보호받고 대접받는다는 점입니다. 밀입국자들이나 밀수를 하는 사람들은 정상적인 문을 통할 수 없습니다.

그림 : 사람은 평생을 문으로 드나들다 결국은 또 문으로 들어가야 되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 드나드는 문이 어느 문이었느냐에 따라서 마지막에 들어갈 문도 결정 나는 것 아니겠습니까? 이 땅의 하나님의 집인 교회, 기도하는 집에 열심히 출입한 사람은 천국 문이요, 세상의 넓은 유흥과 향락의 문으로만 출입한 사람은 지옥문일 것입니다.
예루살렘 성문 중에 양이나 짐승들이 들어가는 문이 따로 있었습니다. 이것이 ‘양의 문’입니다. 이 양의 문은 사람들이 드나드는 곳이 아니었습니다. 요한복음 5:2-3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양의 문’을 통과하셨습니다. 양의 문 곁에는 베데스다라고 하는 못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곳에서 놀라운 상황을 목격하십니다. “예루살렘에 있는 양문 곁에 히브리말로 베데스다라 하는 못이 있는데 거기 행각 다섯이 있고 3그 안에 많은 병자, 소경, 절뚝발이, 혈기 마른 자들이 누워 물의 동함을 기다리니”라고 했습니다. 가난하고 자기 몸조차 움직일 수 없는 그런 사람들이 모여있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이 B.C.586년 느부갓네살에 의해서 파괴되고 느헤미야 선지자가 재건축할 때 가장 먼저 수축한 것이 양의 문입니다(느3:1). 이스라엘의 각 지파별로 나누어 성문들을 수축하고 마지막으로 돌아오는 게 양의 문입니다. 의 문에서 시작해서 의 문에서 마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내가 의 문이다’고 말씀하십니다. “양의 문으로 들어가지 않고 다른 문으로 들어가는 사람은 다 도적이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양의 문’이라고 하신 데는 세 가지의 의미가 있습니다. 첫째는 예루살렘 성전의 문은 대제사장이나 서기관들처럼 자유롭게 출입할 수 있는 특권층이 있고, 평민이나 병자와 가난한 자들은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이들이 들어가려면 성전세금을 내고 들어갈 수 있으나 가난한 이들은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가난하고 병든 이들을 위해서, 짐승이 드나들던 의 문에 모여있는 자들을 위해서 오신 것입니다. 두 번째로 대제사장과 바리새인, 서기관들을 양의 문으로 들어가지 않는 자들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양을 약탈하는 도적이었습니다. 그래서 성전도 하나님께 기도하는 집이 아니라 장사하는 강도의 굴혈을 만들어 놓았던 것입니다. 셋째는 ‘양의 문’은 희생제물이 들어가는 곳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희생 제물이 되셔서 이 문으로 들어가심을 상징적으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친히 양의 문이 되셨고 우리가 어떤 문으로 들어가야 되는지를 알려주셨습니다.

1.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어떤 문은 화려하게 보여서 두드렸는데 막상 들어가 보니 기대이하였습니다. 그러나 어떤 문은 것 모양은 화려하지 않았지만 들어가 보니 잘 들어왔다고 생각되는 문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제부터 문을 잘 선택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들어갈 문을 설명해 주십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마7:13-14)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눅 13:24) 이 문은 좁은 문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문은 다름 아닌 양의 문이었습니다. 병들고, 헐벗고, 굶주린 주님의 백성들이 들어가는 문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나는 양의 문이라”(요10:7)

여러분은 명문대학교 문이 넓은 문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아니면 좁은 문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좁은 문입니다. 아무나 들어가는 문이 아닙니다. 열심히 공부하고 노력한 학생들 중에서만 들어가는 것입니다. 천국의 문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열심히 산 사람만 들어가는 것입니다. 좋은 것, 귀한 것은 아무나 가지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간 자만이 갖게되는 것입니다.

2. 좁은 문으로 들어가지 않는 자들은 누구입니까?

오늘 본문 말씀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양의 우리에 문으로 들어가지 아니하고 다른데로 넘어가는 자는 절도며 강도요 문으로 들어가는 이가 양의 목자라”(요10:1-2)고 했습니다. “다른 데로 넘어가는 자는” 양의 문이신 예수님을 통하지 않고 들어가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절도”로 좀도둑을 말한 것입니다. 이 말은 가룟 유다에게 사용되었던 말입니다. “가난한 자들을 생각함이 아니요 저는 도적이라”(요12:6)고 했습니다. 목자 몰래 양을 훔쳐 가는 도둑입니다. “강도”는 바라바에게 사용되었던 말로 “저희가 또 소리질러 가로되 이 사람이 아니라 바라바라 하니 바라바는 강도러라”(요18:40)고 했습니다. 양을 강제로 빼앗아 가는 자들을 말한 것입니다.

양의 문이신 예수님을 통해서 들어가지 않고 하나님의 양을 도적질하고 강제로 빼앗아간 사람들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 때는 예수님께 적대적 행위를 한 대제사장, 바리새인, 서기관들이었습니다. 지금도 예수님의 양을 도적질하고 빼앗아 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바로 양의 문이신 예수그리스도의 좁은 문을 통하지 않고 자신들의 이익을 위하여 예수님을 수단으로 이용하며 자신들이 문이 되고자 하는 자들입니다. 또한 자기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지지 않고 넓은 길로만 가려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책임을 지지 않으려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정문을 피해가려는 사람들입니다.

3. 문은 열어야 합니다.

자동차 운전하시는 분들은 다들 한번쯤 경험한 일일 것입니다. 자동차 키를 차안에다 꽂아 놓고 문을 닫고 내린 것입니다. 저도 서너 번 이런 경험을 했습니다. 분명히 내 차인데 열쇠가 없어서 열지 못하는 것은 안타까운 일입니다. 열쇠가 없으니 차 문을 열 수도 없고, 타지도 못하니 갈 수도 없는 것입니다. 가만히 있을 수 없어서 차 도둑처럼 옆으로 긴 철사를 끼어서 열려고 시도합니다. 그러나 도둑이 아닌지라 쉽게 열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자물쇠는 열리기 위해서 있다”는 말이 있습니다.

문을 열려면 두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하나는 열쇠를 가지고 있으면 됩니다. 베드로는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16:16)라는 대답으로 예수님으로부터 천국의 열쇠를 부여받았습니다.(마16:19) 그리고 이 열쇠는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이 곧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닫으면 열 사람이 없는”(계3:7) 예수그리스도께서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마스터키가 있습니다. 그러나 “화 있을진저 너희 율법사여 너희가 지식의 열쇠를 가져가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또 들어가자 하는 자도 막았느니라 하시니라”(눅11:52) 율법사들은 예수님의 키만이 열린다는 것을 몰랐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지식이 열쇠인줄 알았습니다. 그리고 불행한 결과를 낳고 있습니다. 자신들 뿐 아니라 다른 자들도 막는 어리석음을 범했습니다.
또 하나는 안에서 열어주면 됩니다.
“문지기는 그를 위하여 문을 열고”(요10:3)라고 했습니다. “그”는 누구입니까? 자신들의 양입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온 양들입니다. 목자의 음성을 알아듣고 몰려온 양들입니다. 바로 예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고 목자의 음성을 들은 양들입니다.
그렇게 안타깝게 자동차 문을 열려고 하는데 차안에 어린 딸이 있는 것입니다. 그는 너무 어려서 닫혀진 문을 잘 열지 못합니다. 그래서 아빠는 창문 옆에 달린 것을 올리라고 차 밖에서 손짓을 합니다. 그리고 문을 열었습니다. 그런데 아빠가 아니면 딸이 문을 열어주겠습니까? 열어주지 않습니다. 하물며 우리 주님께서는 어떻겠습니까. 철저하게 을 가려내십니다. 우리 우화에 여우가 손에 밀가루를 바르고 어머니로 둔갑하여 문을 열어달라고 하는 내용이 있습니다. 우리는 양의 탈을 쓴 사단에게 속아서는 안됩니다. 주님은 제일 확실한 문지기이신 것입니다. 아무리 주여! 주여! 만을 외치고 주님 뜻대로 살지 않은 자들도 가려내십니다(마7:21).
“집 주인이 일어나 문을 한 번 닫은 후에 너희가 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며 주여 열어 주소서 하면 저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는 너희가 어디로서 온 자인지 알지 못하노라 하리니”(눅13:25) 저와 여러분들은 그 문에 있을 때 주님께서 문을 열어주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우리가 주님의 음성을 알아듣고 문 앞에서 기다려야 합니다.

4. 예수님을 통해서 들어가면 구원과 꼴을 얻습니다.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얻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요10:9)고 했습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들어가는 자에게는 자유롭게 왕래하며 꼴을 얻을 수 있습니다. ‘J. 스트루더’라는 사람은 “이 세상에서 40년을 허비한 후에야 나는 이러한 확실한 결론을 얻을 수 있었다. 천국보다 더 명확한 곳이 어디 있으며, 지옥보다 더 혼란스러운 곳이 어디 있으랴!”고 했습니다. “들어가며 나오며”는 자유를 말한 것입니다. 공산주의의 제일 큰 단점이 무엇입니까? 바로 자유가 없다는 것입니다.

“구원을 얻고(소데세타이)”로 단순히 구원을 받는다는 의미를 넘어서 안전하게 보호받는다는 의미입니다. 뿐만이 아닙니다. 양이 원하는 꼴을 주십니다. 우리의 필요를 아시고 채워주십니다.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면 이 모든 복이 네게 임하며 네게 미치리니 3성읍에서도 복을 받고 들에서도 복을 받을 것이며 4네 몸의 소생과 네 토지의 소산과 네 짐승의 새끼와 우양의 새끼가 복을 받을 것이며 5네 광주리와 떡반죽 그릇이 복을 받을 것이며 6네가 들어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을 것이니라”(신28:2-6)고 했습니다. 이러한 축복을 주는데 조건은 하나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면”입니다. 복이 임하는데 먼저 장소가 구분되지 않습니다. 들어가며 나가며 어디에서든지 입니다. 하나님의 축복은 집에서만이 아닙니다. 사회에서도, 직장에서도 마찬가지로 주십니다.

이생의 축복과 영생의 축복이 이와 같이 임하십니다. 엄청난 축복이 아닐 수 없습니다. 좁은 문을 선택하실 때 이와 같은 축복을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그에 따른 축복을 준비하고 계신 분입니다. 그저 우리를 고생시키려고 좁은 문으로 유도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양의 문”이신 예수그리스도를 통해서 그의 음성을 따라 순종하여 그 문을 열고 들어가 이생과 영생의 축복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공은 나에게 넘어왔습니다. 이러한 축복을 받기 위해서는 내가 주님의 음성에 응답할 차례입니다.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계3:20) 이 문은 상호 열려야 합니다. 나도 열고 주님도 열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미 주님은 열어놓고 계십니다. 이제 나의 차례입니다. 찬송가 336장 후렴 “오 사랑의 예수님 내 맘을 곧 엽니다. 곧 들어와 나와 동거하며 내 생명이 되소서”가 저와 여러분들의 고백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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