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살로니가후서(2thessalon)


IV. 실천적 교훈 (3:1-15)

1. 상호간에 요청되는 기도와 확신(3:1-5)

가, 기도의 요청

1종말로 형제들아 너희는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주의 말씀이 너희 가운데서와 같이 달음질하여 영광스럽게 되고 2또한 우리를 무리하고 악한 사람들에게서 건지시옵소서 하라 믿음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님이라.

지금가지 교리 곧 종말론적인 문제를 다루어 온 바울은, 이제 새로운 주제인 실천적인 문제로 전환한다. 그는 데살로니가전서에서와 마찬가지로 후서에서도 종말론을 실제적 교훈과 밀착시키고 있다.
먼저 그는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종말로 형제들아'(
살전4:1의 주석을 보라) 너희는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기'(현재 시상인 프로슈케스테,살전5:17의 주석을 보라)를 주의 말씀이 너희 가운데서와 같이 달음질하여 영광스럽게 되고(1절)라고 부탁한다.
사도로서의 바울의 위대성은 그가 성도들을 양육하고, 그들을 위해서 기도한다는 일방적인 우월감을 갖지 않고, 그들에게 자기를 위한 기도를 요청할 만큼 겸손한 마음을 가진 것에서도 나타난다(롬15:30,골4:23,몬22,고후1:11,빌1:19).
중보기도에 있어서 가장 우선적인 것은, 성도들을 양육하는 사명을 받은 교역자들을 위한 기도이다. 여기서 우리란 개인 자격으로서의 바울 자신과 실루아노 그리고 디모데가 아니라, 교역자로서의 그들을 가리키는 것이다.
바울이 요청하는 기도의 첫째 내용은 주의 말씀 곧 복음이 데살로니가 교회의 경우처럼 달음질하여(능동태 동사인 트레케,<시147:15,비교:살전1:8)즉 속히 퍼져 많은 개종자들을 얻게 됨으로써 복음이 영광스럽게 되고(수동태 동사인 독사제타이,<시8:5,히2:7)...이다.
다시 말하면, 복음이 어느 곳에서나 속히 퍼져, 그것을 받아들인 많은 사람들에게서 받으시는 영광이기도 하다.

교역자들은 일신상의 문제보다도 복음의 사역을 위해 기도를 요청할 줄 아는 겸손을 갖추어야 한다.
바울이 요청하는 기도의 둘째 내용은 또한 우리를 무리하고 악한 사람들에게서 건지시옵소서 하라(2절 상반)이다.
무리하고 '악한'(포네론,살전 5:22의 주석을 보라)의 전자는 아토폰으로서, 원래는 제자리에 놓이지 않은, 적당한 자리가 아닌, 실직하여, 부적당한, 맞지않는 등을 뜻하였다. 후기 헬라어에서는 이 말이 부적합한, 불의한, 왜곡된, 어그러진, 심술궃은 등의 윤리적인 의미를 갖게 되었다(프레임).

무리하고 악한 사람들에 대해(1) 후메내오나 알렉산더와 같은 이단자(딤전 1:20)라는 설(Chrysostom),1) (2) 일반적인 위선자나 거짓 형제들이라는 설(Zwingli),2) (3) 불신자라는 설(웨슬레,바일리),(4) 유대인과 이방인 불신자(행16:19-24,살전 2:15,살후1:8)라는 설(Best), 3) (5)본서를 쓰고 있을 당시에 괴롭혔던 고린도의 믿지 않는 유대인(행18:56121317)이라는 설4) 등이 있다.
어느 설을 취해도 틀릴 것은 없지만,(5) 설이 가장 적합하다.
건지시옵소서는 부정 과겨형인 뤼스토멘으로서, 데살로니가전서 1:10과 같은 뜻이다(살전 1:10의 주석을 보라).
바울이 독자들에게, 하나님께서 자기 일행을 불의하고 악한 핍박자들로부터 벗어나게 해 주시도록 기도를 부탁하는 이유는,믿음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님이라(2절 하반)는 말로 표현되어 있다.
믿음(헤 피스피스,)은 구원에 이르게 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인 복음을 믿는 믿음을 뜻하는 것이다. 다라서 바울의 요지는 모든 사람이 이 믿음을 가진 것은 아니라고 하는 것이다.
그는 로마서 10:16에서도 "그러나 저희가 다 복음을 순종치 아니하였도다. 이사야가 가로되 주여 우리의 전하는 바를 누가 믿었나이까 하였으니"라고 하였다.

나. 지키시는 주

3주는 미쁘사 너희를 굳게 하시고 악한 자에게서 지키시리라.

바울의 관심은 어느덧 복음 사역자인 "우리"에서 성도들인 "너희"로 전환된다. 실상 [바울은 자신보다는 다른 사람들에 관한 염려가 더 많았던 사람이었다](칼빈).
그는 주는 미쁘사 너희를 굳게 하시고 악한 자에게서 지키시리라(3절)고 하여 깊고 진지한 사도적 관심을 보여 주고 있다.
미쁘사는 피스토스로서, 신실하다, 신뢰할만하다 등을 뜻한다(고전 1:9, 10:13,고후1:8,딤전 2:13,살전5:24,계1:5).

우리가 영원히 신뢰할 수 있는 대상은 오직 신실하신 주님 밖에는 없다. 아무리 신실한 인간 또는 가족이라 할지라도 인간이란 한계성을 가진 존재이기 때문에 영원한 신뢰의 대상이 될 수 없는 것이다. 이 점에 대해 이사야는 '너희는 인생을 의지하지 말라 그의 호흡은 코에 있나니 수에 칠 가치가 어디 있느뇨"(사2:22)라고 하였다.
굳게 하시고 스테릭세아로서, 믿음(사전 3:2) 과 행위를 굳세게 하신다는 뜻이다.
악한 자는 투 포네루로서, 남성(엡6:16,마13:19,요일2:13140으로 취하여 사단5)으로도 중성(롬12:9)으로 취하여 일반적인 악6)으로도 해석할 수 있다. 대부분의 학자들의 견해이자 후자를 포함시킬 수 있는 사단으로 해석해야 한다.
지키시리라는 퓌라크세이로서, 충분히 감시하여 지키다(행12:4), 안전하게 지키다(눅11:21),교훈 또는 계육을 지키다(갈6:13)등의 뜻이다.

다. 순종에 대한 확신

4너희에게 대하여는 우리의 명한 것을 너희가 행하고 또 행할 줄을 우리가 주 안에서 확신하노니.

원문에는, 그러나 우리가 주 안에서 확신하노니(페포이타멘 데 엔 퀴리오,)가 문장 앞에 쓰여져 강조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
"그러나"라는 접속사는 새로운 견해를 제시하는 것을 나타낸다. 즉 전절에서는 데살로니가 교인들에 대한 주의 신실성을 언급하였으나, 본절에서는 데살로니가 교인들의 신실성을 언급하고자 하는 것이다.
우리가 주 안에서 확신하노니란 주 안에서 비롯된 확신을 의미하는 것이다(갈 5:10,빌2:24,롬14:14). 즉 머리이신 그리스도와 조화를 이루고 또한 그의 몸을 이루는 정신(빌2:1-11,고전12:12-13:13)에 근거한 확신이요, 하나님께서 역사하실 것이란 확신이다.

진정한 의미에서 확신이란 자기 자신에게서 나온 확신이 아니라, 바울처럼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에 근거한 확신이라 할 수 있다.많은 기독교인들이 자기 확신과 믿음에 근거된 확신을 혼동함으로써 얼마나 많은 부작용을 일으키는지 모른다.
바울은 자신이 주 안에서 확신하는 내용에 대해, 너희에게 대하여는 '우리의 명한 것을'7) 너희가 행하고 또 행할 줄을 (4절 상반)이라고 설명한다.
행하고 또 행할 줄 (포이에이테 카이 포이에세테,)은 N,A,D 사본 등으 ㄹ따른 것이다. 그러나 G,F 사본 등에는 "행했고 또 행하는 줄"(에포이에사테 카이 포이에이테,)로 되어있고, B 사본에는 "행했고 또 행하고 또 행할줄"(에포이에사테 카이 포이에이테 카이 포이에세테,)로 되어 있다.
사본의 가치를 따지면 처음 것을 취해야 하겠지만, 의미상으로는 오히려 마지막 것을 취해야 한다. 즉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자신의 명한 것들 곧 주의 계명(마28:20)을 잘 행했고, 행하고 있고, 또한 행할 줄을 주 안에서 확신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교역자들을 통하여 행하도록 명령받은 주의 계명들을 행하는 것이야말로 기도에 응답받는 지름길이다. 이 점에 대해 요한은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그에게 받나니 이는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고 그 앞에서 기뻐하시는 것을 행함이라"(요일 3:22)고 하였다.

라. 기원

5주께서 너희 마음을 인도하여 하나님의 사랑과 그리스도의 인내에 들어가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바울은 독자들이 자신의 명한 것을 행하리라고 믿었지만, 그러나 그는 그들의 마음이 자신의 명령을 지키려고 하는 데에는 주의 도우심이 없어서는 안된다는 것을 확실히 하였다.
그래서 그는 주께서 너희 '마음'(살전 2:4의 주석을 보라) 을 '인도하여'(살전 3:11의 "직행하게 하옵시며"의 주석을 보라) 하나님의 '사랑'(아가펜, 살전1:3의 주석을 보라)과 그리스도의 '인내'(휘포모넨,살전1:3의 주석을 보라)에 들어가게 하시기를 원하노라(5절) 고 기원하는 것이다.
원문에는 문장 초두에 접속사인 데(그러나)가 있어 전절에 대해 약간의 반의를 나타내고 있다.

하나님의 사랑(텐 아가펜 투 테우,)에 대해서는 이를 주관적 속격으로 취하여, 하나님께서 인간을 사랑하시는 사랑으로 해석하는 설8)과 객관적 속격으로 취하여, 인간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랑으로 해석하는 설9)이 있다.
문법적으로 양쪽 설이 다 가능하지만, 본문에서는 본서 전체에 흐르는 사상으로 보아서 후설을 취해야 할 것이다.
그리스도의 인내(텐 휘포모넨 투 크리스투,)에 대해서도 (1) 이를 주관적 속격으로 취하여 그리스도께서 보여 주신 인내로 해석하는 설10),(2) 객관적 속격으로 취하여, 인간이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는 인내로 해석하는 설11)이 있으며, (3) 이외에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인내로 해석하는 설 ("Lange"12),바클레이)이 있다.
문법적으로는 (1)과 (2) 설이 다 가능하지만, 본서의 주된 논제 중 하나가 되는 그리스도의 재림이라는 점을 보아 (2) 설을 취해야 할 것이다.

우리의 마음이 주(그리스도)께 인도되지 않는 한, 우리는 결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으며 또한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는 인내를 보일 수 없다.
지금까지의 고찰 결과에 의하면, 바울의 위대성이란 성도들을 위해 기도하며, 양육한다는 일방적인 우월감을 갖지 않고, 그들에게 자기를 위한 기도를 요청할 만큼 겸손한 마음을 가졌다는 데 있다.
교역자로서의 바울이 자기 일행을 위해 요청하는 기도의 내용은, 복음이 어느 곳에서나 속히 퍼져, 그것을 받아들인 많은 사람들에게서 영광을 받게 되기를 바라는 것이다.
다음으로 그는 성도들에게 자기 일행을 왜곡되고 악한 사람들의 핍박에서 벗어나게 해 주시도록 기도해 달라고 요청한다. 그 이유는 모든 사람이 다 복음을 믿는 믿음이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바울에 의하면, 주께서는 신실하셔서 성도들의 신앙과 생활을 굳세게 해 주실 뿐만 아니라 사단에게서도 안전하게 지켜 주실 것이라고 한다.
이어서 바울은 독자들에 대해 자기가 명한 것들을 행했고, 행하고 있고, 또한 행할 줄을 주 안에서 확신한다고 말한다.
끝으로 바울은 독자들의 그러한 행위가 그들의 마음을 인도하시는 주의 도우심이 있어야만 가능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래서 그는 주께서 그들의 마음을 인도하여 하나니을 사랑하게 되고 또한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는 인내를 가능케 하기를 기원하고 있다.

2.규모 있게 행하라(3:6-15)

가,규모 없이 행하는 형제들

6형제들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명하노니 규모 없이 행하고 우리에게 받은 유전대로 행하지 아니하는 모든 형제에게서 떠나라 7어떻게 우리를 본받아야 할 것을 너희가 스스로 아나니 우리가 너희 가운데서 규모없이 행하지 아니하며 8누구에게서든지 양식을 값없이 먹지않고 오직 수고하고 애써 주야로 일함은 너희 아무에게도 누를 끼치지 아니하려 함이니 9우리에게 권리가 없는 것이 아니요 오직 스스로 너희에게 본을 주어 우리를 본받게 하려 함이니라 10우리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도 너희에게 명하기를 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 하였더니 11우리가 들은즉 너희 가운데 규모없이 행하여 도무지 일하지 아니하고 일만 만드는 자들이 있다 하니 12이런 자들에게 우리가 명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권하기를 종용히 일하여 자기 양식을 먹으라 하노라.

일상 생활에 관한 교훈을 구체적인 상황 속에서 다루고 있는 3:6-15은 본서의 중심부라고 말할 수 있다. 얼핏 보면 본서의 주요 내용이 재림에 관한 교설인 것 같으라, 사실상 바울이 더욱 중점을 둔 것은 재림에 관한 그릇된 주장, 즉 주의 재림이 이르렀다(2:2)고 주장하며 무위도식하는 교인들을 경계하는 일이었다.
그러한 의미에서 바울은 형제들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명하노니 규모 없이 행하고 우리에게 받은 유전대로 행하지 아니하는 모든 형제에게서 떠나라(6절)고 한다.
형제들이 자기의 명한 것을 잘 실행하리라고 확신한다고 한 바울(3;4)은, 이제 그러한 확신을 가지고 그들에게 자신의 권위가 아니라 '주 예수 그리스도'(
살전 1:1의 주석을 보라)의 '이름'(1:12의 주석을 보라) '행하고'(페라파툰토스,살전 2:12의 주석을 보라) 우리에게 받은 '유전'(파라도신, 2:15의 주석을 보라)대로 행하지 아니하는 모든 형제에게서 떠나라(6절)고 하는 것이다.
대다수의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바울이 명한 복음을 충실히 지켰으나(1:3,4,3:4),소수는 광신적인 신앙을 가지고 규모 없이 행하였다. 이러한 자들과의 변론이란 서로에게 아무 유익이 없는 것이다. 이런 경우에 요긴한 것은 대화가 아니라, 오히려 그들을 떠남으로써 그들로 하여금 잘못을 깨닫고 회개하도록 자극을 주는 일이다. 물론 우리의 떠남이란 그들과의 교제를 끊을 것을 의미한다. 바년에 우리의 마음은 여전히 그들의 영혼을 사랑해야 하며 그들을 위해 기도해 주어야 하는 것이다.
그와 비슷한 말씀으로 '만일 그들의 말도 듣지 않거든 교회에 말하고 교회의 말도 듣지 않거든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마18:17)와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니 이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딤후3:5)와 "누구든지 이 교훈을 가시지 않고 너희에게 나아가거든 그를 집에 들이지도 말고 인사도 말라"(요이 10)그리고 "내가 너희에게 쓴 것에 음행하는 자들을 사귀지 말라 하였거니와" (고전 5:9)등을 들 수 있다.
바울은 규모없이 행하고 자신이 전한 유전대로 행치않는 모든 교인들에게서 떠나려고 하는 이유(원문에는 7절 초두에 가르<왜냐하면)가 있다)에 대해,어떻게 우리를 '본받아야'(미메이스타이,살전 1:6의 주석을 보라)할 것을 너희에게 스스로 아나니 우리가 너희 가운데서 규모없이 행하지 아니하며(7절)누구에게든지 양식을 값없이 먹지 않고 오직 수고하고 애써 주야로 일함은 너희 아무에게도 누를 끼치지 아니하려 함이니(8절-살전2:9의 주석을 보라)라고 설명한다.

사려깊은 바울은 혹시 이 글을 읽는 교인들이 오해할까 염려하여, 우리에게 권리가 없는 것이 아니요 오직 스스로 너희에게 본을 주어 우리를 본받게 하려 함이니라(9절) 라고 분명하게 밝혀 준다.
권리는 엑수시안으로서, 행동의 자유를 의미한다(고전 9:5). 여기서부터 다른 사람과 관련하여 권위, 일반적으로 위임된 권세를 뜻하게 되었다(골1:13,유25). 본절의 경우에는 목자가 양들에게서 물질적인 대접을 받을 권리가 있음을 뜻하는 것이다. 즉 양들은 양육하도록 목자를 세우신 하나님께서 목자에게 양들의 물질적인 대접을 받을 권세를 위임하셨다는 것이다(자세한 것은 살전 2:9의 주석을 보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들 특히 무위도식하는 자들에게 '본'(뒤폰,살전1:7의 주석을 보라)을 보이기 위하여,손수 일을 하여 자급자족한 사도 바울은 충분히 본받을 만한 인물이다.
물론 이 말은 목회자의 부업을 장려하는 것이 아니다. 목회란 그의 성격상 목회자가 전력을 쏟아도 부족하기만 한 일인 것이다. 그런데 목회에 전력을 쏟아야 할 목회자가 부업,즉 먹고 사는 일에 신경을 쓸 수 밖에 없다면, 그 자체가 목회자와 양들 모두에게 불행스런 일인 것이다.
바울은 이전에 독자들에게 가르쳤던 교훈을 반복하여, "왜냐하면"(원문 초두에 가 있다)우리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도 너희에게 명하기를 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 하였더니(10절)라고 말한다.
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는 일반적으로 창세기 3:19의 근거한 유대인의 격언으로 이해되고 있다. 또한 [당시의 헬라 사회에도 이와 비슷한 격언이 있었다](Westein).1) 바울이 어느 쪽을 인용한 것인지 확실히 알 수는 없지만, 그것이 바울의 생활 신조이었음에도 틀림없다. 이러한 점에 있어서도 바울은 이론과 실천이 겸비된 인물임을 알 수 있다.

토마스(p 331)에 의하면 [아주 초기 시대부터 게으른 자에게 음식을 주지 않는 것은 교회 안에서의 전통적인 징계의 형태였다]고 한다.
명하기를은 미완료 과거형인 파텡겔로멘으로서, 이전에 여러 번 반복하여 명한 것을 뜻한다.
바울이 그토록 강조했던 명령은 그대로 준행되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독자들에게 준행하지 않는 교인들에게서 떠나라고 하였던 것이다(3:6). 이 점에 대해 그는 우리가 들은즉 너희 가운데 규모 없이 행하여 도무지 일하지 아니하고 일만 만드는 자들이 있다 하니(11절)라고 탄식한다.
원문 초두에는 "왜냐하면"(가르)이란 접속사가 있어서 6절의 이유를 설명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데살로니가전서에 대한 회답 또는 사람을 통해 바울이 들은 내용은, 독자들 중에 규모 없이 행하여,자기 할 일은 하지 않고 분주하게 쏘다니다면서 남의 일에 간섭하여 말썽만 부리는 자들이 있다는 것이다. 원문에는 '전혀 일하지 않지만 분주한 몸들이라'는 풍자적 표현으로 되어 있다.
바울은 이런 자들에게 우리가 명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권하기를 종용히 일하여 자기 양식을 먹으라 하노라(12절)라고 하였다.
바울은 이미 여러번 규모 없는 자들에 대한 경고를 주었었다. 그러나 데사로니가 교인들 중에는 여전히 일은 하지 않고 일만 만드는 자들, 즉 규모 없이 행하는 자들이 있었다. 그 때문에 바울은 자기의 명령고 권고를 더욱 권위 있게 하기 위해서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살전 1:2의 주석을 보라)라고 한 것이다.
그 내용은 생계를 남에게 의존하는 광신적인 신앙 생활과 분주하게 쏘다니며 말썽만 부리는 규모 없는 생활을 청산하고, 조용히 자기 일에 충실하여 생계를 유지하는 것이다.

나. 바로잡기 위한 의절

13형제들아 너희는 선을 행하다가 낙심치 말라 14누가 이 편지에 한 우리 말을 순종치 아니하거든 그 사람을 지목하여 사귀게 말고 저로 하여금 부끄럽게 하라 15 그러나 원수와 같이 생각지 말고 형제 같이 권하라.

이제 바울은 논조를 바꾸어, 규모없는 자들을 제외한 대다수의 데살로니가 교인들에 대해, 형제들아 너희는 선을 행하다가 낙심치 말라(13절)고 권면한다.
선을 행하다가는 현재 분사형인 칼로포이운테스로서, 신약에서는 이곳에만 사용되었으며, 악에 대립되는 일체의 선을 포함하는 말이다.
낙심치 말라는 메 엥카케세테로서, 행할 의사를 잃지 말라는 뜻이다.

우리가 성령의 도우심으로 선을 행할 때, 좋은 반응을 기대하는 것이 오히려 어리석다고 할 정도로 세상은 불의와 죄악으로 가득 차 있다. 실제로 교회 역사를 보면,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그들의 선행에도 불구하고 불신자들로부터 불신과 오해와 질시, 그리고 핍박을 받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점에 대해 {칼빈은 [온 세상은 옳은 길에서 빗나가게 만드는 장애물로 꽉 차 있다]라고 말한다. 바울은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선을 행하다가 낙심하지 말라고 하는 것이다. 즉 [행할 의사를 잃지 말라는 뜻이다](흑기)
우리가 낙심하지 말라야 할 또 하나의 이유는,피곤하지 (에크루오) 않으면, 즉 [행할 힘을 잃지 않으면](흑기) 선행의 수확을 거둘 때가 반드시 오기 때문이다.사실상 선을 행하는데 있어서 가장 큰 장애물은 스스로 낙심하는 것이다. 칼빈의 말대로 [목표에 도달하지 못한다면 선행을 시작하는 것은 아무런 가치가 없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선을 행하기 위해 지속적인 노력과 끝없는 인내가 필요하다.(스템, 렌스키,헨드릭슨). 다시 말하면, 선이 생활화 되도록 늘 성령의 인도와 도우심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이 일을 가능케 하는 방법은, 이미 받은 하나님의 구속 은헤를 항상 기억하는 것과 반드시 선행의 수확을 거둘 때가 있음을 확신하는 것이다. 시편기자는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그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시126:5-6)라고 노래하였다](갈6:9의 주석).
다음으로 바울은 누가 이 편지에 한 우리 말을 순종치 아니하거든 그 사람을 지목하여 사귀지 말고 저로 하여금 부끄럽게 하라(14절)고 권면한다.
이 편지가 데살로니가전서인지 데살로니가후서인지 확실히 알 수 없다. 그러나 본서 3:6-12에서 줄곧 규모 없는 자들에 관한 문제가 취급된 것을 미루어 데살로니가후서를 가리키는 것 같다.
그렇다고 하면 우리 말도 본서 3:6-12을 가리키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여기에 언급된 바울의 교훈과 명령을 거역하는 사람에 대해서, 바울은 단호하게 그 사람을 지목하여 사귀지 말고(14절 중반)라고 말한다.
지목하여는 세메이우스테로서, 본래 '표적을 만들다'의 뜻인데, 여기서는 투톤과 함께 앞서 말한 사람, 즉 바울의 교훈이나 명령을 복종하지 않는 사람을 잘 인식하고 기억해 두라는 뜻이다(김용옥). 사귀지 말고는 메 쉬나나미그뉘스타이로서, '아무도 그와 친밀히 교제하지 말라'는 뜻이다(프레임).

그러한 사람과 교제하지 말라고 하는 목적에 대해 바울은 저로 하여금 부끄럽게 하라(14절 하반)고 한다. 죄와 잘못에 대해 부끄러움을 느끼는 것은 회개에 이르는 길이다. 바울의 의도는 그러한 자와의 의절 그 자체가 아니라, 그러한 자를 바로잡기 위한 의절을 가르친 것이다. 또 한가지는 [건전한 다수가 그런 악풍에 물들지 않게 하기 위한 것이다](칼빈).
항상 바울의 목적은 인간을 파멸케 하는 것이 아니라 구원받게 하는 것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바울은 그러나 원수와 같이 생각지 말고 형제 같이 권하라(15절)고 당부하는 것이다.
권하라는 데살로니전선 5:14의"권계하며"와 같은 말이다.

지금까지의 고찰 결과에 의하면, 바울은 자신의 권위가 아니라 주의 권위로 형제들에게 명령하고 있다. 그 내용은 규모 없이 행하고 유전대로 행치 않는 모든 형제와 관계를 끊음으로써, 그들로 하여금 잘못을 깨닫고 회개하도록 자극을 주라는 것이다.
관계를 끊어야 하는 이유는 독자들 자신이 바울 일행의 규모 있는 행실 즉, 주야로 수고하고 애써 일하여 생계를 꾸려 나가는 것을 본받아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바울 일행이 그렇게 한 것은 양들에게서 물질적인 대접을 받을 권리가 없어서가 아니다. 하나님께서 위임한 충분한 권리가 있었지만, 양들, 특히 규모 없는 자들에게 본을 보이기 위함이었다.
바울은 이전에도 '일하기 싫거든 먹지도 하라'고 여러 번 반복하여 가르쳤지만, 여전히 무위도식하는 자들이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들은 자기 일은 전혀 하지 않고 분주히 쏘다니면서 말썽만 일으켰다. 그래서 바울은 그들에게 그러한 생활을 청산하고, 조용히 자기 일에 충실하여 생계를 유지하라고 주 안에서 명령하는 것이다.
끝으로 바울은 규모 없는 자들을 제외한 대다수의 교인들에게 선을 행하다가 낙심치 말라고 권면한다. 또한 그는 본서에 쓴 자신의 말을 순종치 않는 자드을 잘 인식하여 교제하지 말라고 권면한다. 그러나 그들을 바로잡는 것이 목적이므로, 그들을 원수 같이 생각하지 말고 형제와 같이 권면해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