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의 왕통

본 문 : 마태복음 1:6-11

성경에는 많은 숫자가 나오며 수로서 구성되어 있습니다. 성경은 수의 비밀이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수학 책]입니다. 숫자 14는 구원 혹은 해방을 말해줍니다. 죄인은 구원이 필요합니다. 13은 죄를 의미하고, 14는 그 죄로부터의 해방 혹은 구원을 의미합니다. 애굽의 속박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그 달 14일에 구원받았습니다. 그래서 정월 14일 저녁은 여호와의 유월절입니다(레 23:5). 배를 타고 로마로 향하던 바울 일행이 유라굴로 태풍으로 죽음의 위기에 있을 때에도 14일만에 구원받았습니다. 14는 구원의 숫자이기 때문에 우연히 된 일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육체를 따라 태어난 이스마엘과, 약속을 따라 태어난 이삭 사이에는 14년이란 간격이 있습니다. 구원은 육체를 따라서 태어난 자와 약속을 따라서 태어난 자식의 차이를 14의 숫자로서 정해 두셨습니다. 1에서 14까지의 수를 더해 보십시오. 105가 됩니다. 창세기 4장 26절에는 [에노스]가 태어 난 후에 "그 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하였습니다. 5장 6절을 보면 셋이 에노스를 낳을 때에 나이가 공교롭게도 105세입니다. 이 숫자에 관심을 가져 보십시오.
요한일서 3장 14절에 "우리가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이 말씀은 희랍어의 14개 단어로 되어 있습니다. 사도행전 11장 14절의 "그가 너와 네 온 집의 구원 얻을 말씀을 네게 이르리라" 하신 말씀도 희랍어 단어 14개로 되어 있습니다. 이것들은 특별히 고안해낸 말씀들이 아닙니다.
예레미야 33장 1절에 보면, 예레미야가 감옥에 갇혀 있을 때에 주님은 2번째 찾아 오셔서 말씀 하십니다. 15절까지 하나님을 말하는 인칭대명사 [나]가 14번 나옵니다. 그리고 16절은 "그 날에 유다가 구원을 얻겠고 예루살렘이 안전히 거할 것이며"라고 합니다. [나]라고 하는 말이 14번 나온 후에 [구원]이라는 말이 곧 바로 나옵니다.
14라는 숫자가 구원과 관련 되었다는 기록은 성경에서 얼마든지 찾아 낼 수 있습니다. 우리는 마태복음의 족보에서도 14라는 숫자를 봅니다. 1장 17절은 "그런즉 모든 대 수가 아브라함부터 다윗까지 열 네 대요 다윗부터 바벨론으로 이거할 때까지 열 네 대요 바벨론으로 이거한 후부터 그리스도까지 열 네 대러라"라고 합니다.
구약성경을 대조해 보면 마태복음의 족보와 상치되는 점들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리스도의 족보에서 몇명의 이름이 탈락되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생소한 이름도 있습니다. 라합과 결혼한 살몬의 경우, 그의 이력은 구약에서 거의 소개되어 있지 않습니다. 또한 아미나답과 다윗까지의 사이에 많은 조상들의 이름이 생략 되었음도 알 수 있습니다. 요람과 웃시야의 사이에도 세사람이나 빠져 있습니다.
무슨 까닭일까요. 14라는 숫자에 맞추려는 의도인 것이 분명합니다. 마태가 이런 장난을 했을까요. 저는 그렇게 믿지 않습니다. 성경을 기록하는 마태의 손을 성령님이 인도하셨다면 하나님이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마태복음에 기록된 그리스도의 족보는 왕권을 가진 구원자라는 사실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족보 연구가 단순한 흥미거리는 아닙니다. 누가 누구를 낳았다는 기록에 그치는 것도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역사적 인물이라는 사실과 전인류의 구원자이시나 인간을 통하여 구원해 주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소란한 세대들로부터 평강의 그리스도를 보내 주셨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사실들을 깨우치지 못하면 그리스도의 족보를 공부하는 아무 보람이 없을 것입니다.

첫째, 왕으로서 다윗에 대하여 알아 보십시다(6절).
다윗왕을 공부하기 전에 그의 아버지 이새를 보아야 합니다. 성경은 이새에 대하여 많이 말하지 않지만 그에 대한 중요한 말을 합니다. 이사야 11장은 이새에 대하여 두 번 말합니다. 중복은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1절은 그리스도가 이새의 줄기에서 나온 새싹이라고 말합니다. 10절은 그리스도가 이새의 뿌리에서 나왔다고 합니다. 이새가 그리스도와 밀접한 관계임을 의미합니다. 이새 후에 우리는 다윗을 만나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그리스도의 조상이요 한편 그리스도 자신에게서 나온 자입니다.
사무엘이 이새의 아들에게 기름부어 왕으로 삼기 위하여 왔을 때에, 이새는 일곱 아들을 그에게 보였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택하지 아니하셨습니다. 사무엘은 이새에게 여덟째 아들이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를 데려 오도록 했습니다. 그가 다윗입니다. 아직 어린 소년이었습니다. 사무엘은 그에게 기름부어 왕으로 삼았습니다.
다윗은 열조시대의 마지막입니다. 또한 왕의 세대의 첫번째입니다. 이 족보에 나오는 인물 중에서 오직 다윗만이 왕으로 불리어집니다. 다윗은 왕권을 가지고 두 시대의 경계표에 서있습니다. 한 시대의 끝임과 동시에 또 다른 한 시대의 시작입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상징입니다. 우리의 그리스도가 그러하셨습니다. 율법시대의 마침이 되시고 은혜시대의 시작이 되셨습니다. 그는 BC와 AD의 분수령이십니다.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의 풍성함을 누린다면 다윗처럼 우리들도 한 상황의 끝과 또 다른 상황의 시작이 될 것입니다.
다윗이 어떻게 역사의 한 물꼬를 막음과 동시에 또 다른 물꼬를 틀 수가 있었을까요. 그는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었습니다(삼상 13:14). 하나님은 어느 시대에도 다윗만큼 마음에 드는 이를 찾지 못하셨습니다. 그런 다윗에게도 허물은 있었습니다.
한 사람을 죽이고 그의 아내를 취한 것입니다. 곧 살인과 간음입니다. 다윗은 남편있는 밧세바와 통간했으며, 그 죄를 은폐하기 위하여 전쟁터에 나가 있는 충성스러운 부하, 즉 밧세바의 남편을 살해했습니다.
다윗은 간음과 살인 죄를 범한 후에 그를 정죄하려고 하나님이 보내신 나단 선지자에 의해 책망을 받았습니다. 그는 회개 했습니다. 침상이 ㅆ도록 눈물로 회개하는 그를 하나님은 용서하셨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사하심을 받은 후에 다시는 범죄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다윗의 위대한 점입니다. 주님을 낳으신 마리아가 복된 분이시라면, 다윗을 낳은 이새는 복된 사람입니다. 다윗은 주님을 상징한 사람이요, 주님의 왕권의 상징으로서 그 머리 위에 기름부음을 받은 사람입니다. 또한 그는 죄에서 돌이킨 후에 다시는 회개할 필요가 없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상징이 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새를 중요하게 취급한 것입니다. 다윗은 그의 범죄의 연고로 이방여인을 아내로 취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이 사실에 격분합니다. 어떻게 다윗처럼 기득권을 가진 사람이, 더구나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 그런 범죄를 할 수 있느냐고 분개합니다. 나무만 보고 숲은 보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우리의 그리스도도 그리하셨습니다. 그것이 사실이냐고요. 그렇습니다. 성경 어디에 그런 기록이 있느냐고요. 일일이 성경을 찾을 필요도 없습니다. 그리스도는 본시 죄가 없는 분이셨지만 우리의 죄를 몽땅 뒤집어 쓰시고 죄인이 되어 십자가 형벌로 돌아 가셨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고통 속에는 우리들의 비윤리적이고 반도덕적인 죄뿐만이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에 거역한 모든 영적인 죄들이 태산처럼 그를 짓누르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당하신 형벌은 우리의 죄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자신의 죄는 보지 않고 다윗의 죄만 보고서 고함치고 있습니다. 그야말로 자신의 눈에 있는 들보는 보지 않고 형제의 눈속에 있는 티만 보는것입니다. 다윗은 그리스도의 상징이었습니다. 다윗의 범죄로 이방여인 밧세바가 왕의 귀부인이 된것 같이 그리스도의 십자가 형벌로 하나님께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이방사람인 우리들 자신이 만왕의 왕인 그리스도의 신부가 된것입니다. 이방인 남편을 죽이고 그를 아내로 삼은 다윗왕의 왕후 밧세바는 구원 얻은 후사들의 맏누이입니다. 장자권의 획득을 위하여 이방여인으로 머물지 않고 하나님께로 돌이킨 밧세바를 포함하여 다말, 라합, 룻등의 여인은 오늘의 우리들 자신입니다. 우리들의 모습이 이들과 같아야 합니다. 다윗이 회개의 사람인것 같이 우리도 회개해야 합니다.

둘째, 성경에 있는 두 족보의 나누임에 대하여 알아 보십시다.
우리는 이제 성경을 어떤 눈으로 보게 되었습니까. 하나님은 허물을 찾으신다는 것입니다. 허물이 있는 곳에 사함이 있습니다. 허물이 없으면 사함도 없습니다. 나의 허물은 하나님의 용서를 필요로 하지만, 내게 허물이 없다면 하나님의 용서하시는 은혜는 소비할 길이 없습니다. 바울도 말하기를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다(롬 5:20)"고 하였습니다.
주님은 날마다 기쁨을 찾으십니다. 용서하시는 은혜를 소비하시는 것이 기쁨이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선한 것이 오도록 악을 행하자]해서는 안됩니다. 언제나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운전하는 사람이 사고를 기대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어디서 불의의 사고가 날지 모릅니다. 인생 길에도 수없는 죄악의 복병들이 있습니다. 주님의 눈에 바르게 행하려고 하지만 조만간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릅니다.
하나님께 감사하십시다. 우리가 범죄할지라도 회개할 길이 있습니다. 내가 회개하면 하나님은 언제나 용서하실 준비를 하고 계시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을 깨닫는 것이 은혜입니다. 그리고 이 사실을 깨닫게 하는 것이 복음입니다. 이 사실을 깨달은 은혜의 복음 위에서 하나님의 역사를 계속 공부해 보십시다.
"다윗은 솔로몬을 낳았습니다" 이 부분을 누가복음 3장 31절과 비교하여 보십시오. [나단은 다윗의 아들이었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된 사실입니까. 나단 또한 다윗의 아들이었습니다. 마태복음에 있는 족보는 다윗의 아들이 솔로몬이라고 말하고, 누가복음에 있는 족보는 다윗의 아들이 나단이라고 말합니다. 역대상 3장 5절을 보면 이 둘은 동일인이 아닙니다. 누가복음은 다윗의 아들 나단으로부터 시작하여 주님의 모친 마리아에 이르는 계보를 기록하고, 마태복음은 다윗의 아들 솔로몬 즉 요셉 조상의 계보를 기록합니다. 다윗의 아들 대에서 족보가 둘로 나누인 것입니다. 하나는 예수님의 아버지 즉 남편의 계보가 되고, 또 하나는 예수님의 어머니 즉 아내의 노선입니다. 재미있는 것은 예수님에게서 이 둘이 하나가 된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의 족보가 가지고 있는 비밀입니다. 마리아와 요셉은 모두 다윗의 후손들입니다. 그들은 동일한 선조로부터 두 계보로 이어져 왔습니다. 그리고 마리아와 요셉은 약혼했으며, 그리스도를 낳으신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솔로몬과 나단 둘 모두를 통하여 다윗의 후손으로 이어집니다.
나단과 솔로몬은 다윗이 예루살렘을 도읍지로 정한 후에 밧세바에게서 낳은 네 아들 중에서 두 아들입니다. 그러나 이야기는 나단과 솔로몬 사이에 상당한 긴박감을 줍니다. 다윗이 밧세바에게서 낳은 네 아들 중 나단은 셋째이지만, 솔로몬은 사실상 다섯째가 됩니다.
다윗은 밧세바에게서 네번째의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 때 나단 선지자의 정죄를 받고 회개할 때에 하나님은 다윗의 범죄의 연고로 네째 아들이 깊이 병들게 하셨습니다. 다윗은 이를 위하여 금식, 절식을 하며 하나님께 매달려 기도했지만 그만 죽고 말았습니다. 죽은 아들 대신으로 주신 자식이 솔로몬입니다. 솔로몬이라는 이름은 [평화로운]을 의미합니다. 또한 [여디디야]라는 이름도 가지고 있는데 그 뜻은 [주님의 사랑하시는 자]입니다. 성경의 두 족보가 하나는 다윗이 회개하기 이전의 자식으로부터 시작 되었고, 또 하나는 회개한 후에 낳은 자식으로부터 시작된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대단히 중요한 교훈을 줍니다. 나단의 계보를 통하여는 동정녀 마리아로 인하여 그리스도를 주셨지만, 솔론몬의 계보를 통하여 보여 주시는 것은 주님의 성전을 건축하는 일입니다. 다윗이 오매불망 소원하면서도 이루지 못했던 성전 건축의 꿈을 솔로몬이 성취한 것입니다. 회개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는 십자가의 주님이 요구 되지만, 회개의 관문을 통과한 이들에게는 평화로운 왕권을 가진 주님을 모시고 살 성전을 건축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교회를 건축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이야 말로 [주님의 사랑하시는 자]들입니다. 나단과 솔로몬 사이에는 큰 간격이 있습니다. 회개라는 봇물입니다. 다윗이 침상이 썩도록 통회한 그 물입니다. 이 회개의 강물을 건넌 사람만이 그리스도를 모시기 위한 몸(교회)을 건축하는 사람들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께서 두 족보를 가지신 이유입니다.

셋째, 솔로몬을 통한 왕통의 계보를 보십시다(7절-11절).
솔로몬은 르호보암을 낳았습니다. 르호보암에게서 다윗왕국은 분열되었습니다. 북부 왕국은 이스라엘이라는 우주적인 이름을 가졌는데 그것은 이스라엘 열 지파로 구성되었기 때문입니다. 지방적인 이름을 가진 남부 유다왕국은 겨우 유다와 베냐민 두 지파 뿐이었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이스라엘 열 지파로 구성된 북부왕국에서는 그리스도의 족보에 든 왕이 없습니다. 그들은 우주적인 이름과 다수를 포함하고 있었지만 그리스도와 관련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사실 북부왕국에서는 선한 왕이 한 사람도 나지 못했습니다. 이 족보가 우리에게 묻고 있는 것은, 당신은 그리스도의 노선에 속해 있는가? 아니면 더 크고 더 우주적이고 더 좋아 보이지만 그리스도이 노선 밖에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르호보암은 아비야를 낳고 아비야는 아사를 낳고 아사는 여호사밧을 낳고 여호사밧은 요람을 낳고 요람은 웃시야를 낳았습니다. 만약 족보가 이런 식으로 계속 되었다면 우리는 그리스도의 족보에서 아무런 의미도 찾지 못할 것입니다. 여기에는 어떤 패턴도 없고, 선한 왕이든 악한 왕이든 편견없이 그리스도의 혈통을 이루고 있는 왕은 모두 기록 되었다는 것뿐입니다.
그러나 요람과 웃시야 대에서 우리는 중요한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역대상 3장(11-12절)을 마태복음의 족보와 비교해 보십시오. "그 아들은 요람이요 그 아들은 아하시야요 그 아들은 요아스요 그 아들은 아마샤요 그 아들은 아사랴요" 여기 아사랴는 웃시야를 말합니다. 요람에서 웃시야까지의 아하시야, 요아스, 아마샤, 삼대가 그리스도의 족보에서 제거되었습니다.
무슨 까닭입니까? 북부 이스라엘왕 아합은 왕후 이세벨로 인하여 성경에서 알려진 사람입니다. 이세벨은 성경에 나오는 여인 중에서 가장 사악합니다. 이세벨은 마귀와 하나였기 때문에 우상과 관련하여 남편을 부패 시켰으며, 하나님의 백성을 망하게 하였습니다. 그들은 딸을 낳아서 유다왕 요람과 결혼시켰습니다. 이 여인은 요람에게 우상 숭배와 우상과 하나 되는 것을 가르쳤습니다. 따라서 그의 가족은 부패되었습니다. 출애굽기 20장 5절에 의거하여 요람의 자손 삼 대가 그리스도의 계보에서 끊어진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의 중요한 교훈을 배우게 됩니다. 사람이 얼마나 악하느냐?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법을 어떻게 어기느냐? 하는 것입니다. 유다의 악한 왕들은 모두 그리스도의 족보에 포함 되었지만, 우상 숭배하는 자는 그의 자손 삼사 대가 저주를 받을 것이라는 율법에 의하여 요람 자손의 삼 대는 그리스도의 족보에서 끊어진 것입니다. 하나님은 질투하십니다. 우상 숭배자는 용납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관련되려면 우상 숭배에 연루 되어서는 안됩니다. 탐심은 곧 우상 숭배입니다(골 3:5). 11절에 보면 또 한 세대가 그리스도의 족보에서 탈락되었습니다. 요시야는 여고냐를 낳았다고 합니다. 요시야는 여호야김의 아버지입니다. 여호야김은 그의 아들 여호야긴에게 왕위를 물려 주었습니다. 그 여호야긴이 마태복음의 족보에서 말하는 여고냐입니다.
여고냐는 왕이 된지 겨우 3개월만에 바벨론 포로로 잡혀 갔기 때문에 그의 형제 시드기야가 대신하여 예루살렘의 최후 때까지 유다를 통치했습니다. 그래서 마태는 여고냐와 그의 형제라고 쓴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의 혈통이 시드기야가 아닌 여고냐로 이어지기 때문에 시디기야의 이름은 기록되지 않은 것입니다. 여호야김은 어디로 갔습니까? 왜 그리스도의 계보에서 빠져야만 했을까요. 그는 애굽의 바로에 의하여 왕으로 세움을 받고 바로를 위해 세금을 늑봉했기 때문입니다(왕하 23:34-35). 애굽은 세상을 상징합니다. 세상과 관련되어 세상을 섬긴 사람은 그리스도의 족보에 들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족보가 부릅 뜬 눈으로 우리를 경계하는 것은 우상을 숭배하고 세상을 섬김으로 세상 것으로 치부하는 사람은 그리스도의 왕국에 속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 무서운 사실을 깨닫고 오직 기록된 성경의 명령을 따라 주님만을 섬기시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1991. 12. 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