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orean

제1장 근대 이전의 기독교와의 접촉
제2장 한국에 있어 카톨릭
제3장 수난 당하는 카톨릭
제4장 한국의 protestant church
제5장 한국 기독교인의 발생과 집회
제6장 한국 프로 테스탄트의 형성과 부흥
제7장 일제 치하에서의 교회
제8장 한국 교회의 수난사
제9장 한국 교회 재건과 분열

한국기독교회사(요약) M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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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중개종 : 한국교회는 초기부터 민족운동에서 적극 참여하였다. 사진은 독 립협회 사건으로 투옥된 민족지도자들인데 1907년 경 이들은 대거 기독교로 개종하여 기독교의 기도자들이 되었다.









문용기의사 기념비 : 3.1운동때 이리 만세시위를 주동하면서 순국한 기독교 인 문용기의 기념비. 이리 소재.
1. 십자가를 걸머진 교회
우리나라는 민족운동이나 독립운동은 교회의 움직임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기독교의 교리 - 유일신 사상과 또한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았기 때 문에 인간의 자유와 존엄성을 귀하게 여겼다.
이러한 사상 때문에 일제는 기독교를 다른 종교보다 더 탄압했다.
그 당시 교회는 일본 침략에 항거하는 강력한 조직체가 되었고 이를 눈치챈 일 제는 기독교를 말살하려는 음모를 꾸밈.

(기독교 말살 정책) - 1910년 12월 27일 일본의 데라우찌 총독이 압록강 철교를 놓고 그 준공식에 참석하러 갔다. 그곳에 가던 기차는 선천역에 한 번 정지하게 된다. 헌데 이 때 기독교 지도자들이 데라우찌를 암살한 음모를 꾸몄다고 거짓 소문을 퍼뜨려 많은 지도자들을 체포하였다.
그당시 인구 2000만명중 크리스챤이 18만명이 넘었다.
700명을 체포하고 그 가운데서 105인을 유죄 판결을 내렸다. 105인은 여러차례 감형으로 형기를 마치고 나오게 된다.
105인중 94명이 기독교인이었다. 이것이 105인 사건이다. 저들이 평양역에 도착했을 때 9000명이 나와서 그들을 환영했다.

2. 3.1운동을 통한 교회의 애국 운동.
1918년 파리에서 세계 평화 회의가 열렸을 때 미국의 윌슨 대통령이 '민족 자 결 주의'를 내세웠다.
이것으로 인해 우리 민족은 여러 가지 생각을 하면서 '왜 우리가 일제의 압력 하에 살아야 하는가?' 라는 회의를 품게됨.

그후 1년이 지난 1919년 3.1운동이 일어났을 때 33인중 16명이 크리스챤이었 다. 대부분 기독교인이 앞장섰고 이 운동은 비폭력 무저항 주의로 기독교 정신 에 의해 진행되었다. 일본의 헌병과 경찰들은 기독교인들을 투옥시키고, 체포, 교회를 파괴시킴. 이 운동이 막바지에 이르렀을 때, 4월 15일 12시경 수원 부근 제암리 교회에 일본헌병이 몰려와 교민들을 모이게 하고 창문에 못을 박고 교회 주변에 불을 지르고 나오려는 사람들은 칼로 찌르고 죽였다. 많은 교회가 이와 같은 일을 당함. 1919년 일본 보고에 의하면 파괴된 교회가 17개, 일부 파괴된 교회는24개, 그외에 교회에 큰 손해를 본 곳이 41개, 교회 재산 피해가 3만불이 었다. 장로교 보고에 의해 체포된 목사, 장로수가 134명 교인수가 3천 8백 4명, 사살된 신도수가 47명, 감리교 기타 다른 교회의 신도들을 합친수는 타 종교의 신도 숫자를 합친 숫자보다 많았다.이일을 통해 교회는 많은 피해를 봤지만 또 한 많은 사람들이 교회로 돌아오게 되었다.

3. 선교사의 관여도.
일제는 독립운동 배후에 선교사들이 관여하고, 조종하고 있다고 판단했다.
당시 선교사들은 조선 독립운동의 열렬한 후원자였다. 평양 숭실학교에 모우리 모펫이라는 교수가 있었는데 일제가 그를 잡아갔다. 피신하는 학생들을 은둔 시켜 준 죄였다. 호주에서 온 선교사들도 독립운동 시위에 동향을 미국 선교회 에 보고하고 총독과 일제의 잔악상을 세계에 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