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윗까지 다윗부터 그리스도까지

본 문 : 마태복음 1:12-17

저는 군 복무를 하면서 쫄병 시절 보초를 설 때마다 그 지루함을 메꾸기 위하여 하나의 기발한 아이디어를 생각해 낸 적이 있습니다. 마태복음 1장을 암송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에게도 이런 경험이 있는지 알 수 없으나 저에게는 매우 독특한 경험이었습니다.
두터운 방한복으로 몸을 감싸고 방한모를 깊숙히 눌러 쓰고 미군부대에서 지급된 방한화를 신고 초소에 나가노라면 어떤 강추위에도 끄덕할 수 없는 완전무장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런데도 깊은 밤 전방의 추위는 보초서는 두 시간이 천년 만년 같은 시간의 단절을 가져다 줄만큼 혹독한 것이었습니다. 발가락 사이를 어김없이 찾아 오는 얼얼한 냉기가 동상이라는 선물을 안기고 갈 즈음 구세주가 오신 것보다 더 반가운 임무 교대의 순간이야 말로 무엇과도 바꿀 수 없을 것입니다.
몸이 추운 것이 아니라 마음이 추운 것입니다. 비록 신성한 국방의 의무라고는 하지만 냉전시대의 제물이 되어 젊은 날의 금싸라기 같은 3년 세월을 차압 당한 억울함에서 오는 공허를 냉기로 채운 까닭일 것입니다. 이런 허허벌판과 같은 마음의 단애를 걸어서 한끼 두끼 군대 밥을 채우노라면 어느덧 한 사람의 병사가 됩니다. 그래서 군대 고참은 결코 헐값으로 얻어진 것이 아니라는 교훈을 얻기도 합니다.
그즈음 저는 마태복음 1장을 암송함으로서 저만이 아는 기쁨을 간직하게 되었습니다. 마태복음 1장을 암송하는 것은 비록 젊의 날의 총기가 넘친다고 할지라도 쉬운 일이 아닙니다. 무료할 수 밖에 없는 시간을 발음하기에도 어려운 이름들을 외우느라 진땀을 쏟다보면 추위도 물러가고 야차 같은 시간의 수레바퀴도 순식간에 지나가 버리는 것이었습니다. 암송 자체가 즐거움을 가져다 준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족보 속에 나오는 인물들과 사귀는 비법을 터득한 것입니다. 그 인물들과 무언의 대화를 나누다 보면 이런 마음의 상상을 보다 더 오래 지속하고 싶은 유혹까지 생기니 말입니다. 그 경험들이 지금도 마태복음의 족보에 나오는 인물들과 친근감을 가지게해 줍니다. 마태복음 1장 1절에서 17절까지의 말씀을 가지고 설교하는 사람은 드물 것입니다. 읽는 것도 쉽지 않는 터에 설교할 생각까지도 가지지 아니할 것입니다. 단순한 이름들의 나열 속에서 무슨 설교의 재료를 찾겠습니까. 그러나 마태복음 1장에 있는 그 무미건조해 보이는 그리스도의 족보가 없었다면 우리는 구약성경의 상당 부분을 이해조차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예를 들면 맏아들이 후사가 없이 죽었다면 그 장자권을 얻기 위해, 미망인은 다음의 아들과 결혼해야 합니다. 아들들이 없다면 아버지 형제의 아들인 조카와도 결혼해야 합니다. 만약 딸들 뿐이라면 그 부모의 기업을 물려 줄 후사를 얻기 위해 꼭 조상 지파의 남자와만 결혼해야 합니다. 왜 우리의 상식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이런 규례들이 있어야만 했을까요. 그 비밀을 마태복음의 족보가 풀어 줍니다. 우리가 마태복음의 족보에 소홀히 한다면 하나님의 크신 뜻들을 간과해 버리고 말것입니다. 수박 겉핥는 신앙생활이 되어 버리고 말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이목을 집중해야할 그리스도의 족보의 하반부에 왔습니다. 이 발음하기 어려운 이름들을 통하여 큰 은혜 받으시기를 축원합니다.

첫째, 분산된 왕통의 쓰라림을 보여줍니다.
그리스도의 족보는 열 네 세대의 세 그룹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 세 구룹의 경계는 다윗까지와 다윗부터, 사로잡혀갈 때까지와 사로잡혀간 때부터, 그리고 그리스도의 오심까지입니다. 다윗은 열조세대의 마지막이고 왕들세대의 시작입니다(17절). 다윗은 하나님에 의하여 열조들의 시대를 마감하고 왕의 시대를 시작한 경계표로서 사용된 사람입니다. 다윗이야 말로 하나님의 백성들의 구원사에 있어 우뚝 솟은 위대한 구분을 보여줍니다. 훌륭한 사람이나 사건으로부터 멀어질수록 사람들은 점점 타락하기 마련입니다. 성경이 보여주는 사실은, 타락의 때에는 아브라함과 다윗이 그러했던 것처럼 세대를 나누는 경계표인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따라서 포로로 잡혀가는 그 자체가 하나의 경계표의 구실을 해줍니다. 하나님의 성민이 이방에게 포로로 잡혀가는 부끄러움, 그 수치가 경계표가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족보를 열 네 세대로 나누는 셋째 그룹의 경계표는 사람이 아니라 바벨론의 포로됨 그것입니다. 성경은 그 세대를 위한 경계표로서 하나님 앞에서 어떤 사람도 유용하지 못했음을 조심스럽게 보여줍니다. 이것은 수치스러운 일입니다. 좁게는 우리의 생애가, 그리고 넓게는 우리의 세대가 부끄러운 일로서 획을 긋게 된다면 얼마나 통분할 일일까요. 그리스도의 족보가 우리에게 그러한 위험을 경고하는 것입니다. 12절서부터 열거되는 열 네 세대의 마지막 그룹의 족보는 "바벨론으로 이거한 후"라는 말로서 시작합니다. 이것은 유대인들이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간 이후부터 족보가 열거된다는 뜻입니다. 다윗의 후손들이 왕노릇을 하다가 포로가 되어 종살이를 하게 되었다는 것을 말하려는 것입니다. 포로 생활이란 죽은 거나 다름없습니다. 포로로서 종살이하는 것은 더욱이나 그렇습니다. 인격을 저당 잡히고 인간으로서 최하의 대접을 받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조상들이 그러했습니다. 마태복음에 기록된 그리스도의 족보는 포로가 되어 조국을 등지고 이방 땅에 분산되었던 그들이 다시 한 백성으로 모이고 다윗의 왕통을 존속하게 된것은 하나님의 뛰어난 섭리이셨다는 것을 말하려는 것입니다. 본국으로 돌아 온 유대인은 자청해서 스룹바벨의 지배에 순종했습니다. 스룹바벨은 다윗의 계보 중에서 뛰어난 인물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방법을 통해서라도 왕권이 조각조각이 이어져 마침내는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까지 연장되게 하셨던 것입니다. 이것은 야곱이 "홀(왕의 지팡이)이 유대를 떠나지 아니하며 치리자의 지팡이가 그 발 사이에서 떠나지 아니하시기를 실로가 오시기까지 미치리니(창 49:10)"하고 예언하신 그대로입니다. 이 백성의 분산이 아무리 비참하고 슬픈 것이었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은혜는 꺼지지 않고 그 빛을 발하고 있었습니다. 우리의 생애에도 때로는 이스라엘의 바벨론 포로기와 같이 슬프고 부끄러운 일이 있었다고 할지라도 지금 회개하고 주께 순종하면 주님 사랑의 빛은 여전히 은혜의 날개가 되어 우리를 덮어주실 것입니다.

둘째, 스룹바벨의 영도력을 보여줍니다.
바벨론으로 이거한 후에 여고냐는 스알디엘을 낳았습니다. 스알디엘은 스룹바벨을 낳았습니다. 여고냐는 여호야긴의 또 다른 이름입니다. 여고냐는 스알디엘의 아버지입니다. 스알디엘은 스룹바벨의 아버지입니다. 이것은 마태복음의 기록과 함께 에스라서 3장 2절, 5장 2절과 느헤미야 12장 1절, 학개서 1장 1절, 2장 2절등에 나오는 사실과 같습니다. 그러나 역대상 3장 19절에 보면 스룹바벨을 브다야의 아들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부다야는 스알디엘의 형제입니다. 그러므로 스알디엘은 스룹바벨의 삼촌인 것입니다. 어찌된 셈입니까. 여기서 우리는 신명기 25장 5절과 6절에 나오는 계대(繼代)결혼에 관해서 재미있는 사실을 이해하게 됩니다. 계대결혼이란 어떤 사람이 후사가 없이 죽게되면 그의 형제가 그의 후사가 되는 아들을 낳기 위하여 그의 아내와 결혼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미 공부한 바와 같이 유다는 이 의무를 다하기 위하여 며느리 다말에게 막내아들을 남편으로 주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유다가 그 의무를 이행하지 아니 함으로서 다말은 시아버지를 속이고 그 시아버지에게서 직접 후사를 받아 낸 것입니다. 스룹바벨의 경우가 또 이 한 예입니다. 스알디엘은 브다야의 형입니다. 스알디엘은 후사가 없이 죽었습니다. 브다야는 당연히 "그 형제의 집세우기(신 25:9)"를 위하여 그 형수와 결혼했을 것입니다. 그 결과 스룹바벨을 낳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스룹바벨은 그리스도의 예표가 됩니다. 그리스도는 우리 대신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 가심으로서 우리로 하나님의 후사가 되도록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를 이어주신 분입니다. 에스라 5장 1절과 2절은 유대인들이 바벨론 포로에서 자유를 얻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올 때에 스룹바벨이 그들 인도자 중의 한 사람이었음을 말합니다. 스룹바벨은 귀향하는 유대인의 지도자였습니다. 또한 귀향 즉시 성전을 건축하는 데에 있어서도 인도자였습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사실입니다. 유대인들이 바벨론의 포로된 것은 마땅히 그들의 범법의 결과였습니다. 그들은 이방의 땅에 뼈를 묻고 영원히 유랑의 민족이 되어버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만약 그들이 고국으로 돌아옴이 없었다면 우리의 그리스도께서 베들레험에서 탄생하시기란 불가능하셨을 것입니다. 구약성경은 다윗의 자손인 그리스도가 베들레험에서 태어나시리라고 예언하고 있습니다(미 5:2). 가령 유대인들 중 아무도 유대 땅으로 돌아오지 않은채 그리스도께서 베들레험에 태어나실 때가 이르렀다고 하십시다. 그러면 그곳에는 아무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탄생은 불가능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족보를 통하여 우리는 왜 하나님께서 바벨론의 포로를 유대로 돌리도록 명하셨는지 이해하게 됩니다. 포로를 돌리라는 하나님의 명령은 단지 성전의 건축에만 있지 않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베들레험에 태어나시기 위한 준비였던 것입니다. 스룹바벨은 다윗의 왕통을 잇기 위하여 [집 세우기]로 태어났고, 유대인을 이끌고 본토로 돌아 온 사람입니다. 성전을 건축하는 인도자였습니다. 스룹바벨을 통하여 이루어졌던 일련의 일들은 모두 그리스도를 상징하고 있습니다. 지금도 그 상황은 똑 같습니다. 어떤 이들은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바벨론에 남아 있는 것과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는 것이 무슨 차이가 있느냐? 우리가 하나님을 경배하고 영 안에서 행하고 있다면 어디에 있던지 마찬가지가 아니냐? 그런 사람들에게는 괜찮을지 모르나 그리스도께는 그렇지 않습니다. 주님은 특별한 요구를 하고 계십니다. 바벨론은 세상을 상징합니다. 세상에서는 전적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특정한 장소에 모일 것이 요구됩니다. 그것이 우리가 매 주의 날 교회로 모이는 이유입니다. 세상 지헤와 방법으로는 결코 하나님을 섬길 수 없습니다. 옛 길 선한 길을 찾기 위하여 우리는 항상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와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가 환원하자고 외치는 이유입니다.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으로 다시 돌아와야 했던 것처럼 그리스도인들도 합당한 교회의 생활로 돌아오는 것이 필요합니다.

셋째, 아홉 명의 무명인들의 기록입니다.
스룹바벨의 아들은 아비훗입니다. 스룹바벨은 유명인으로서 성경 곳곳에서 이름은 빛내고 있는데 그의 아들 아비훗의 기록은 찾기가 쉽지 않습니다. 아비훗 뿐만 아니라 아비훗부터 야곱에 이르기까지 무려 아홉명의 이름은 생소하기까지 합니다. 만일 이 아홉 명의 이름이 그리스도의 족보에 실리지 않았더라면 그들은 우리에게 전혀 알려지지 않았을 자들입니다. 왜 그들의 이름이 그리스도의 족보에 실렸을까요? 이 세번째 족보의 목록도 열 네 대를 채우기 위함이었을까요. 그렇다면 말이 안됩니다. 이 목록에서도 다른 그룹에서와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의 조상들 중에 여러 명의 이름들이 생략되었습니다. 아니 자세히 보면 열 네 대가 아닌 열 세 대를 말하고 있습니다. 오히려 한 세대가 누락되어 있습니다. 실수였을까요. 고의였을까요. 내용인 즉은 이렇습니다. 그리스도의 족보는 곧 우리들의 족보입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의 축소판입니다. 그리스도의 족보에는 특이하게 네 명의 이방여인들이 나옵니다. 한결 같이 불결합니다. 그러면서도 그들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계보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시아버지와 통간하여 그리스도의 족보를 이어주는가 하면, 하필이면 간통한 여인과의 낳은 자손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계보가 이어지기도 합니다. 참으로 역사의 아이러니칼한 면모들입니다. 계대결혼을 통한 [집 세우기]로 대가 이어지기도 했습니다. 그중에서도 아무 기록을 낳지 못한 무명인들의 이름이 대거 기록된 것은, 그리스도의 족보는 인물중심 족보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왕통을 잇고 그리스도의 계보에 들었으면 기록되어져야 한다는 당연성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아무리 유명하고 훌륭한 업적을 남겼다고 하더라도, 그리고 그 치적이 사계에 널리 회자되어 칭송을 받는다고 할지라도 그리스도의 계보에 들지 아니하면 전혀 무용하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바울처럼 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모두가 바울처럼 되기는 쉽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리스도의 족보 속에 든 아홉 명의 조상들처럼 이름 석자도 남길 수 없는 무명인들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의 계보에 서 있다면 마땅히 그 이름이 족보에 기록된다는 것입니다. 또한 비록 바벨론 유수기와 같이 우리의 생애가 부끄러움으로 점철되어 있더라도 그리스도께로 돌이킬 희망이 있다는 것이 이 족보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입니다. 무엇보다도 이 세번째 그룹의 족보에서 열 네 대로 이어지는 패턴이 깨어지고 열 세 대만 기록된 것은 또 다른 의미를 줍니다. 마태의 계보에서는 "야곱은 요셉을 낳으니라(16절)"고 말하지만 누가복음 3장 23절은 요셉은 헬리의 아들이라고 말합니다. 요셉은 과연 누구의 아들일까요. 누가복음의 기록은 "법에 의하면", 우리 말 번역은 "사람들이 아는 대로는"이라고 했습니다. 요셉은 실제로 헬리의 아들이 아니라 법에 따라서 그의 아들로 여겨졌다는 것입니다. 요셉은 마리아의 아버지인 헬리의 사위었습니다. 요셉은 민수기 27장 1절로부터 8절까지의 경우에 따라서 헬리의 기업을 물려 받은 것입니다. 부모가 기업을 물려줄 후사로 아들이 없다면 그 기업은 딸들에게로 돌려져야 합니다. 그러나 딸들은 그 기업을 그 지파 안에서 지키기 위하여 같은 지파 안의 남자와만 결혼해야 합니다. 마리아와 요셉의 경우가 그러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다윗의 아들 대에서 나누어졌던 그리스도의 두 계보가 요셉과 마리아를 통하여 하나로 된것입니다. 요셉의 계보는 왕족의 혈통을 나타내기에 충분합니다. 요셉은 마리아의 남편이고 마리아는 예수님의 어머니이십니다. 요셉이 그리스도와의 혈연 관계로 나타나지는 않았지만 예수님이 "마리아에게서... 나시니라" 하신 표현 그대로 다윗왕의 왕통을 이어 받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직 해결해야 할 하나의 문제가 있습니다. 주님은 육체로는 "성령으로 잉태한 여인"에게서 태어 나셨습니다. 이것은 창세기 3장의 예언 그대로입니다. 여자의 후손에게서 한 이기는 자가 나올 것입니다. 그가 마리아에게서 태어나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마태복음의 기록은 매우 독특게 이 세번째 그룹의 맨 마지막으로 마리아를 내세워 열 네 세대를 채우고 있습니다.

넷째, 열 네 세대의 세 그룹이 가지는 의미는 무엇일까요.
17절은 열 네 세대의 세 그룹을 언급합니다. 이것은 유대인들의 기억력을 돕기 위한 목적으로 어떤 도식을 따라서 족보를 정리하는 관례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어떤 의미를 암시함에 틀림없습니다. 왜냐하면 [열 네 대]라는 표현은 이 족보에서 독자들의 주의를 강력하게 끌기 위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열 넷은 열에다 넷을 더한 것입니다. 넷은 피조물을 상징합니다. 요한계시록 7장 1절에 보면 [땅의 네 모퉁이]와 [사방의 바람]을 봅니다. 성경에는 하나님의 피조물과 관계되는 넷이라는 숫자를 얼마든지 찾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광명으로 징조와 사시와 일자와 연한을 이루라 하셨습니다. 일년 가운데는 사 계절이 있습니다. 밤낮 하루동안에도 두 번의 밀물과 두 번의 썰물로서 네 번의 조수가 있습니다. 에덴동산에서 발원한 강은 네 개의 근원이 되었습니다. 열이라는 슷자는 충만을 나타냅니다. 마태복음 25장 1절에는 열 처녀의 비유가 나옵니다. 하나님은 십계명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충만하신 법입니다. 유대인들이 기업물림을 할 때에는 성읍장로의 열 명을 증인으로 세웠습니다. 손과 발을 보십시오. 열 개의 손가락과 열 개의 발가락을 가지고 있습니다. 열이라는 수는 충만을 의미하고 열 넷은 충만한 피조물을 상징합니다. 다시 말하면 구원 받은 새로운 피조물들, 죄에서 해방되고 하나님의 은혜 충만한 피조물들을 말합니다. 열 네 세대의 세 배는 삼일 하나님, 그분 자신의 충만한 피조물들과의 연합하심을 가리킵니다. 이것은 매우 의미가 깊습니다. 삼위 하나님의 인격은 아버지와 아들과 영입니다. 마태복음의 계보는 세 부분, 즉 열조의 부분은 성부 하나님과 부합되고, 열왕의 부분은 성자 하나님과 부합되고, 마지막 세번째 그룹의 일반인들은 성령 하나님과 부합되기도 합니다. 무엇이든지 하나님과 함께 하지 아니한 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마태복음의 족보가 주는 의미는 그리스도는 하나님께로부터 왔으며, 따라서 그리스도는 우리들의 충만이라는 사실을 말해 줍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반열에 서지 않으면 그리스도 안에 들어 갈 수 없으며, 우리의 부족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의 반열을 추구할 때에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충만함을 얻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구원이며 우리의 해방이십니다. 오직 그리스도만을 추구하여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충만된 그리스도인 생활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1991. 12. 15. -설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