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굽으로 피난하심

본 문 : 마태복음 2:13-23
옛적에 시내 광야에서 불기둥과 구름기둥으로 이스라엘을 인도하시던 하나님은 오늘도 변함없이 인류의 역사를 지배하시며 바른 길을 보여 주십니다. 헤롯의 칼날아래서 어린 예수의 생명이 위급해지자 요셉의 가족을 애굽으로 도피시키십니다. 하나님은 아기 예수만을 보호하시고 장래를 보장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 예수로 구원 받은 그리스도인은 지금도 하나님의 보호의 손길아래 있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에게 바른 길을 보이시며 옳게 살아가도록 인도하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이 지배하시는 인류의 역사상에 나타난 허다한 오류를 보게 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지시가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그 지시에 대한 인류의 불순종과 반역적 범죄의 결과들입니다. 그러면서도 사람들은 그 잘못이 하나님께 있는양 원망하고 불평합니다. 하나님은 요셉의 가족을 애굽으로 이끄시기도 하고 또 이끌어 내시기도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섭리이십니다. 본문을 통하여 이런 오묘하신 섭리들을 보면서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할 것인가 생각해 보시겠습니다.

첫째, 이 세상살이는 피난살이의 역정입니다(13-15절).
그리스도는 베들레헴에서 발견 되셨습니다. 이 발견은 어려움을 초래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이 어려움을 사용하여 아기예수를 애굽으로 옮기십니다. 호세아 11장 1절은 예수를 애굽에서 부르리라고 예언했습니다. 만약 베들레헴에서 발생한 어려움이 아니었더라면 주께서 애굽으로 피할 어떤 근거도 없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주께서 애굽으로 피하셔야 할 근거가 되는 헤롯의 박해를 주의해서 보아야 합니다. 박사들이 떠난 후에 주의 사자는 요셉에게 현몽합니다. 헤롯의 음모를 피하여 애굽으로 피난케 합니다. 매우 의미있는 일입니다. 박사들은 큰 실수를 하였지만 예언을 성취할 기회가 되게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 하나님은 실패를 변하여 성공되게 하십니다. 애굽은 아프리카의 나일강 유역, 특히 하류의 델타 지역에 번영한 세계 최고(最古)의 문명 발상지입니다. 히브리 사람들은 미스라임(창 10:6)이라고 했는데 동쪽이라는 뜻입니다. 동은 홍해, 서는 아라비아 사막, 북은 지중해, 남은 협곡으로서 비교적 고립된 지역입니다.
애굽인 자신들은 이 땅을 [검은 땅]이라고 부르며 희랍의 철학자 헤로도투스는 [강의 선물]이라고도 했습니다. 역사적으로는 출애굽 사건으로 밀접한 관계를 가지며, 예표론적으로는 세상을 상징합니다. 애굽은 항상 [이 세상과 그 부요]의 표징입니다. 요한계시록 11장 8절은 애굽을 소돔과 동일하게 십자가가 서있는 장소로 계시합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애굽에서 도피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주의 사자가 요셉에게 현몽하여 가로되 헤롯이 아기를 찾아 죽이려 하니 일어나 아기와 그 모친을 데리고 애굽으로 피하여 내가 네게 이르기까지 거기 있으라" 하십니다. 동방의 박사들이 찾아와서 경배하던 기쁨은 순간이고 대신 헤롯의 노함에 대한 공포가 찾아 왔습니다. 베들레헴의 조용하던 날들은 저물고 두려움으로 피난해야 하는 밤이 다가왔습니다. "일어나" 이 말은 즉시 떠나라는 뜻입니다. 요셉이 애굽을 향하여 떠난 것은 밤이었습니다. 그 일은 또한 시급하게 수행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베들레헴의 사람들은 이 모든 일들을 알지 못했을 것입니다. 밤 그 시에 요셉은 어린 아기와 예수의 모친 마리아를 데리고 애굽으로 피신했습니다. 이스라엘은 항상 기근이나 압박을 피하려고 애굽 땅으로 갔습니다. 베들레헴에서는 곧장 4백여리를 가야 애굽의 경계선을 넘을 수 있습니다. 거기서 또한 8백여리를 가면 나일 강변에 닿을 수 있습니다. 피난하기 쉬운 거리가 아닙니다. 그 당시 나일 강변의 주변에는 백여만명이나 되는 유대인들이 살았습니다. 인구가 30만명 정도 되는 알렉산드리아 시에는 그 인구의 5분지 1이나 2쯤의 유대인들이 차지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이들은 모두 유대의 학정을 피하여 망명한 것입니다. 애굽 또한 안전을 약속해 주는 땅은 아닙니다. 오히려 속박의 땅이요 폭정이 날뛰며 하나님 백성들의 적이 들끓는 곳입니다. 이런 땅으로 이스라엘 이 무더기로 피신해야만 했으니 어처구니 없기도 합니다. 이런 것을 가르켜서 역사의 아이러니라고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예수께서도 애굽으로 피신하셨으나 살해 당하지 않고 오히려 보호를 받았습니다. 이것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비상한 초인적인 수단보다는 평범한 방법을 통하여 당신의 백성들을 보호하시는가 봅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피신 시키십니다. 거룩한 땅이 아닌 이방의 땅에서 당신의 백성을 양육하십니다. 엘리야가 시돈 땅에서 그랬고 16세기 청교도들이 아메리카를 찾아온 것이 그와 같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의 적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의 삶은 피난살이 하는 역정입니다. 주님 말씀하시기를 "또 너희가 내 이름을 인하여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 나중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이 동리에서 너희를 핍박하거든 저 동리로 피하라 내가 진실로 이르노니 이스라엘 모든 동리를 다 다니지 못하여 인자가 오리라(마 10:22-23)" 지금도 진실로 그리스도의 말씀만을 순종하고 실천한다면 심한 핍박이 있을 것입니다. 아기 예수가 애굽으로 피난하여 생명의 보존을 받은 것처럼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그 원수들 중에서 생명을 보존해 주실 것입니다.

둘째, 생명구원에는 그만큼 희생이 있다는 것입니다(16-18절).
헤롯은 박사들에게 속은줄 알고 심히 노하였습니다. 사람을 보내어 베들레헴과 그 모든 지경 안에 있는 사내 아이를 박사들에게 자세히 알아본 그 때를 표준하여 두 살부터 그 아래로 다 죽이게 했습니다. 너무도 끔찍한 일입니다. 만인의 생명을 살리시려고 오신 주님을 향하여 사탄은 이와 같이 어린 생명들을 죽음의 볼모로 잡은 것입니다. 이 잔악한 학살극의 주인공으로 헤롯이 발탁되기에는 안성맞춤이었습니다. 그것은 헤롯의 성격을 바로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헤롯은 자기의 권위를 손상시키며 위협하는데 대한 질투심으로 대제사장을 두 사람이나 죽였습니다. 아저씨와, 자신의 부인, 그리고 세 아들을 살육하기도했습니다. 그 외에도 수많은 사람들을 죽였습니다. 그는 자기가 죽으면 사람들이 기뻐할까 두려워서 자기의 지경내에 있는 모든 도시의 유지들을 여리고의 큰 원형극장에 잡아 가두고 죽이도록 했습니다. 다른 사람아닌 자기의 누이 살로메와 그의 남편을 시켰습니다. 이것은 온 땅이 자기의 죽음을 통탄히 여기도록 연극을 꾸미게 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헤롯의 음모는 실패로 끝나고 말았습니다. 오늘날도 반기독의 역천자들이 많습니다. 그들은 먼저 학대의 칼날을 휘두르기 전에 헤롯의 실패를 교훈삼아야 할 것입니다. 헤롯은 사람만 보고 하나님은 보지 못했습니다. 예수의 탄생은 창세 전에 예정되었고 선지자들을 통하여 이미 예고 되었습니다. 비록 미천한 말구유에 누어 계시지만 어떤 강대함의 권력으로도 이기지 못할 하나님의 능력이십니다. 헤롯은 그 배후에 계신 하나님은 보지 못하고 산간 소읍 미약한 촌에 탄생한 촌민의 아이로만 생각했기에 실패한 것입니다. 헤롯은 제 욕심만 생각하고 의는 생각지 못한 것입니다. 당시 유대교는 종교적으로 부패하여 목자없는 양같이 갈 바를 알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정치적으로는 로마의 압박을 당하여 노예생활로서 인간정신은 피폐할대로 피폐해 있었습니다. 이럴 때일수록 제 욕심만을 챙기기에는 안성맞춤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실수였습니다. 하나님은 바로 이런 길잃은 양의 목자이시며 눌린 자의 해방이시라는 사실입니다. 만일 예수님이 어디로 피신하셨는지 베들레헴의 주민들이 알고 있었다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요. 헤롯의 칼날이 다가왔을 때에 제 자식을 살리기 위하여 일러 바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은밀하게 예수를 피신시켰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베들레헴 근처의 주민들은 자기의 자식들이 왜 살육 당하는지 그 이유도 알지 못한체 금쪽 같은 자식들을 잃은 것입니다. 결국 헤롯은 죄 없는 제 백성만 죽였고, 예수는 죽이지 못했습니다. 오늘날도 헤롯과 같이 무모한 만행을 일삼는 무리들이 있습니다. 정치계 뿐만 아니라 종교계도 마찬가지입니다. 특히 대교회주의자들의 마음뿌리에는 헤롯과 같은 야심을 가진 자들이 많습니다. 제 힘있는 것만 생각하고 하나님의 사람들을 돌아보지 아니합니다. 아니 그런 것은 오히려 자신들의 출세에 걸리적거리는 존재로 여겨서 말살해 버리려고 합니다. 요셉이 마리아와 함께 아이를 데리고 애굽으로 피했기 때문에 어린 예수는 순교, 즉 박사들의 실수로 야기된 학살을 면했습니다. 사탄은 학살을 일으킬 기회를 엿보는데 있어서 항상 바쁩니다. 또한 충격적인 것은 예수 한 사람의 생명을 살리려고 수많은 유아들의 생명이 희생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 심지어는 사탄까지도 다스리는 주권자이시며 원수의 계략으로부터 자신의 사랑하는 아들을 보호하십니다. 하나님의 주권으로 어린 예수는 보전 되었습니다. 그와 같이 하나님은 당신을 믿고 섬기며 그의 뜻을 좇는 모든 하나님의 사람들의 생명을 지키시며 보존해 주십니다.

셋째, 그리스도인들은 모두 나사렛 사람들입니다(19-23절).
예수는 애굽에서 나사렛으로 돌아 오셨습니다. 요셉은 사자의 현몽을 받았으며 이것은 복음서에서 네번째입니다. 헤롯이 죽은 후에 주의 사자는 요셉에게 이스라엘 땅으로 귀환하도록 하였습니다. 헤롯은 그가 왕위에 있은지 37년 만에 곧 그가 일흔 살 되던 해에 죽었습니다. 마음 속에 타는 듯한 공포심이 그를 지치게 하였습니다. 그의 병든 몸에서 나는 냄새가 너무 고약하여 그를 시중들던 하인들까지도 가까이 머물 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그의 최후는 참으로 비참하였다고 합니다. 생애의 애착을 가진 그 욕심장이가 자살까지 하려고 했다니 말입니다. 아기의 목숨을 찾던 자들이 죽었습니다. 예수의 목숨을 노리는 자들은 비단 헤롯만이 아닙니다. 헤롯 이후로도 그리스도를 반대하던 그 수많은 사람들, 박해하고, 협박하던 사람들, 그리스도를 불신하고 비평한 문헌, 기관, 권력자들과 가지 각색의 사람들이 예수의 생명을 빼앗으려고 온갖 수단과 방법을 다 썼으나 그들은 죽었고 이스라엘의 왕은 살아서 지금도 우리의 마음 속에 계십니다. 요셉은 일어나 아기와 그 모친을 데리고 이스라엘 땅으로 들어 왔습니다. 요셉은 아마도 헤롯 안디바가 이스라엘 전체를 다스릴 것으로 예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헤롯대왕은 뒤늦게 그의 뜻을 바꾸어 버렸습니다. 세 아들에게 나라를 삼등분하여 다스리게한 것입니다. 아켈라오는 유대와 이두매와 사마리아의 임금이 되고, 안티파스는 갈릴리와 베뢰아를 얻었으며, 빌립은 트라코니티스와 바다니아와 아우라니티스를 맡았습니다. 로마황제 아구스도는 이들을 인정하였고, 분봉왕의 칭호를 주었습니다. 그들은 아버지의 이름을 따라 헤롯왕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아켈라오에게는 왕의 칭호를 주지 않았습니다. 다만 그 땅을 훌륭하게 다스리면 줄 것을 약속했습니다. 아켈라오는 매우 포악한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집정하자 마자 그의 본성을 드러냈습니다. 삼천명의 유대인을 장막절 성전에서 학살해 버렸습니다. 이유는 자기 아버지의 야만스런 통치에 항의하고 의로운 다스림을 요구했기 때문입니다. 요셉은 자신의 고향인 베들레헴에서 살고 싶었겠지만 이런 까닭에 나사렛으로 돌아가 살게 되었습니다. 이 동네는 높은 언덕들로 둘러 쌓여있는 외딴 지역이었습니다. 여기서 예수께서는 삼십세가 되시기까지 은밀한 가운데 사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작은 역사의 기록을 정리하고 지나가십시다. 마리아는 나사렛에서 예수를 잉태했습니다. 미가서 5장 2절의 예언에 따르면 그리스도는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셔야 합니다. 나사렛 거주자가 어떻게 베들레헴에 가서 그리스도를 분만할 수 있었을까요. 당시는 여행이 쉽지 않을 때입니다. 더구나 만삭된 몸으로 그 예언이 어떻게 이루어질지 궁금합니다. 역사의 주인이신 하나님은 주권적인 안배를 하십니다. 로마의 황제 아구스도가 모든 속국에 첫번째의 인구조사를 하게한 것입니다. 모든 이들은 각자의 고향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요셉도 만삭의 아내를 이끌고 그의 고향인 베들레헴으로 갔습니다. 베들레헴에 도착 즉시 아이를 분만했습니다. 그러나 동방에서 온 박사들의 실수로 헤롯의 분노를 사게되고 유아 학살을 피하여 애굽으로 피난을 하게 됩니다. 이렇게 해서 호세아의 예언이 성취된 것입니다.
헤롯이 죽은 후에 요셉은 또 다른 꿈에서 거룩한 땅으로 돌아가라는 지시를 받습니다. 요셉이 돌아와서 헤롯의 아들 아켈라오가 권세를 잡았다는 것을 알았을 때에 베들레헴 주위의 영토에 남아있기를 두려워했습니다. 그는 나사렛으로 갔으며 예수는 거기서 자랐습니다. 이렇게 해서 예수는 나사렛 사람이라고 불리우게 되었습니다. 이 모든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하나님은 예수님이 인간 안으로 태어나셨을 때에 내밀한 방법으로 행하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구원을 위하여 한 아기를 보내 주실 것을 약속 하셨습니다. 사람들은 주님이 어떤 방법으로 오실지 몰랐습니다. 그리스도는 베들레헴에 태어나실 것이 예언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아무도 그가 탄생하셨다는 소식을 듣고서도 베들레헴으로 가보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그들 가운데 감추인 방법으로 하셨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우리가 온전한 자들 중에서 지혜를 말하노니 이는 세상의 지혜가 아니요 또 이 세상의 없어질 관원의 지혜도 아니요 오직 비밀한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지혜를 말하는 것이니 곧 감취었던 것인데 하나님이 우리의 영광을 위하사 만세 전에 미리 정하신 것이라 이 지혜는 이 세대의 관원이 하나도 알지 못하였나니 만일 알았더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박지 아니하였으리라(고전 2:6-8)"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왜 그리하셨을까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도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도 생각지 못하게(고전 2:9)" 하셨습니다. 오직 성령을 통하여서만 깨닫게 하신 것입니다.
몇가지 예를 들어 보십시다. 빌립이 예수님을 만났을 때에 그는 예수님이 메시야인 것을 깨달았습니다. 친구 나다나엘에게 갔습니다. 그가 메시야를 만났으며 그분은 요셉의 아들이요 나사렛 사람이라고 말했습니다. 나다나엘은 즉시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올 수 있겠느냐(요 1:45)"고 했습니다. 빌립이 무엇인가 그리스도에 대하여 잘못 전하고 있습니까. 빌립은 단지 예수가 요셉의 아들이요 나사렛 사람으로만 알고 있었습니다. 나다나엘은 실망했지만 사실 예수님은 베들레헴 출생이셨습니다. 또 다른 경우는 예수를 알려고 왔던 니고데모가 예수에 대하여 바리새인들과 따지려 할 때입니다. 바리새인들은 그에게 "너도 갈릴리에서 왔느냐(요 7:52)"고 물었습니다. 갈릴리는 이방 지역입니다. 성경은 [이방의 갈릴리](마 4:15)이라고 말합니다. 사람들은 예수가 갈릴리에서 온 것으로 압니다. 갈릴리에서는 선지자가 나오지 않습니다. 겉으로 보기에 예수님은 나사렛에서 오셨지만 사실은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외적으로는 뛰어나신 것이 아무 것도 없으십니다. 작은 나사렛에서 사셨으며 그곳은 이방의 갈릴리라고 불리우는데 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나다나엘처럼 [와서 보면] 그리스도를 발견하게 됩니다. 니고데모처럼 [와서 들으면] 그리스도를 믿게 됩니다. 이것이 바울이 말하는 하나님의 비밀입니다.
오늘 우리도 예수님처럼 보잘것 없는 나사렛 사람들입니다.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올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사실입니다. 우리는 내 자신이 내 보일 것이 없는 것으로 슬퍼하지 마십시다. 단지 우리 자신은 더욱 깊숙히 감춰져야만 합니다. 내 안에 계신 그리스도를 나타내 보이심으로서 비로소 인정 받는 그리스도인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예수의 생명도 무수한 희생을 치루면서 보존 되었습니다. 우리의 생명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하나님은 천지의 조물주이신 주님 자신의 몸을 십자가의 희생제물로 내어 놓으셨습니다. 우리의 생명은 이렇게 해서 얻은 것입니다. 우리는 이제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 그러나 한편 세상의 한 복판에 있습니다. 원수를 피해 도망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원수의 수중에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은 더욱 감취어져야 합니다. 감취인 것에서 빛이나고 박석에서 보석이 나옵니다. 나사렛 사람 예수에게 와서 보고 주로 알았듯이 보잘것 없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을 보고 그리스도를 발견하게 하는 것이 우리의 임무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성도를 가리켜서 그리스도를 나타내는 향기라고 했습니다. 모양은 없지만 그 안에 그리스도의 능력을 지니고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어디서든지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삶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1992. 1. 19. - 설 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