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 장. 소명

1. 광야의 소리

젊은 한 영혼이 자기 생애의 사업을 결정 짓기 위하여는 여러 모양의 신비를 체험하게 된다. 어떤 사업 운영을 위해서나 교육사업, 특히 전도사업을 위하여 하나님으로부터 부름을 받은 그날은 그의 일생에 가장 중요한 날이라 하겠다. 여기에서 우리는 인류 역사상에 기념할만한 가장 위대한 인물이 소명을 받았다는 사실,즉 예수께서 세상을 구원하시려는 대 사업을 성취하시려고 부름을 받으신 사실을 생각하고자 한다. 복음서의 네 기자가 공통적으로 밝히는 한 가지 사실은 예수님의 전도 사업은 세례 요한의 선교 운동과 관계가 있으며 예수의 출현과 함께 요한의 활동은 끝나고 요한의 활동이 끝나면서 예수의 전도사업이 시작되었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의 전도사업을 연구하는 중에 광야에서 외쳤던 요한의 인물됨을 생각하고 그가 지니고 있는 신비와 능력이 어떤 것이었는지 살펴보자. 만일 위리가 그 당시 요단강가에서 외치던 세례 요한의 전도 활동에 직접 참가한 사람들에게 [세례요한의 신비와 그의 능력이 어떤 것이었느냐?]고 묻는다면 그들은 다음과 같은 세가지를 말해줄 것이다. 즉,그는 인간이었다. 그는 하나님의 사람이었다. 그는 어떤 위대한 사명을 가진 인간이었다라고,그는 인간이었다. 그에게는 항상 발랄한 생기와 도덕력이 빛나고 있었다. 그의 생활태도가 이를 증명한다. 그는 사람이 없는 거치른 빈들에 나가서 당시 종교가들이 자랑 삼아 입는 자주빛 부드럽고 화려한 예복을 거절하고 가장 소박하고 단순한 복장으로 몸을 가렸고, 인간의 생활이 그 물질의 풍부한 데 있지 않다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하여 메뚜기와 석청이를 먹고 살았다는 사실은(눅 12:15)의식주가 인생의 근본문제가 아니며 한 부대적인 것 뿐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그의 생활태도는 세계로 하여금 생의 바른 태도를 깨닫게 한다.

뿐만 아니라 사람이 출세하여 입신양명하는 것도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가 인생을 바르게 설명한 최후 진술은 예수님의 말씀[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마11:7)가 잘 묘사해 준다. 사람들에게 인망을 얻고 존경을 받는다는 것은 요한에게 있어서는 허무한 것이었다. 그의 영혼은 원만주의나 편리주의를 싫어했다. 옳은 일을 위해서는 자신이 고통을 당하는 일이 있어도 그 진실을 위하여 태도를 굽히지 않았다. 푸르타크 영웅전에 나오는 페리클레스가 다른 사람에게 찔림을 주지 않는 말은 해본 적이 없다고 한 것처럼 세례요한의 말이 그러했다.

당시 지도층에 있던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에게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로 하여금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한말이나 헤롯의 잘못을 직언으로 충고한 사실로 보아서 강직한 그의 성격을 알 수 있다. 헤롯이 처음에는 그를 두둔했고 칭찬하고 동정적인 태도를 보였다. 그는 왕이었기 때문에 빈들에 사는 가난한 예언자쯤은 마음대로 심문하고 처리할 수 있었다.따라서 요한은 그 왕에게 직언을 하지 않고라도 부드러운 말로 얼마든지 어두운 눈을 뜨게 할 방법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요한은 그런 방법을 쓰지 않았다. 그는 헤롯이라는 유대 왕 보다 만왕의 왕이신 다른 임금이 계심을 알고 있었다. 그가 만일 이 만왕의 왕에게 충성하는 사람이 아니었다면 [당신이 그 여자를 취한 것이 옳지 않습니다](마14:4)라고 단도직입적인 충고를 할 수 없었을 것이다. F.W.H.마이어는 세례요한의 바른 인다음과 같이 노래했다.

 세례 요한, 그는 오늘날까지도
 모든 여인의 아들 중에서
 가장 크고 훌륭한 사람이어라
 창조주 하나님이
 쇠로 만든 한 봉우리처럼
 언제나 지지 않고 우뚝 솟아
 붉게 빛난다.
그림 : 빈들의 세례요한 : 요한이 하나님의 어린양(그리스도)을 가리키고 있어 보는 자의 방향을 그 쪽으로 환기시키고 있다. 그 곁에서 자라나고 있는 열대 성의 환상적인 식물은 성인에게는 적으로 악마가 오는 귀문인 육욕의 세계를 상징하는 듯하다. 패널.유화. 48.5*40cm.

그는 단순히 하나의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을 섬기는 하나님의 사람이었다. 이 사실이 많은 무리로하여금 빈들에 있는 요한에게로 몰리게 했고, 그곳에 와서 비로소 가장 완전하고 참된 종교, 즉 그 내용으로나 표현에 있어서 바른 종교가 어떤 것임을 알게 되었다. 토마스 칼라일이 말한대로 [종교를 가르침에 있어서 맨처음과 맨나중에 가장 필요한 것은 종교를 가지고 있는 그 사람을 발견하는 것이다] 세례요한은 참종교를 가진 사람으로서 그의 전생애와 그 태도는 하나님을 호흡하고있었다. 세례 요한의 종교는 전혀 새로운 것이었다. 지금까지 저들은 서기관들에게서 종교를 배워왔지만 그것은 학문적인 번거로움과 복잡한 궤변, 내용이 빈약하고 믿음직스럽지 못한 것들만 논의하여왔다. 세례 요한은 새로운 음성으로 700년전의 아모스 선지자처럼 [사자가 부르짖을 때 누가 두려워하지 아니하며, 주께서 말씀하실 때에 누가 예언하지 않겠느 냐 (암3;8)고 한것처럼 모든 사람의 심장부를 꿰뚫는 진실한 부르짖음이었다. 아모스처럼 그도 [주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고 외쳤고,이것이 그로하여금 군중을 끌어들이는 힘이었으며 이렇게 불가항력적으로 놀라운 힘을 가진 그의 종교는 참 종교이며 그야말로 진실한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또한 하나의 사명을 위하여 사는 사람이었다. 그는 인간을 위한 불타는 사명감 때문에 자신의 문제를 완전히 잊어버리고 있었다. 그는 자기 개인을 잃어버렸고 자신이 전하는 진리 속에 자신이 삼키워져 버렸다.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이 상부 기관의 명령으로 그가 어떤 인물인가를 조사하러 나가서 누구게 하라]는 대답으로서 자신을 한번 나타났다가 없어지는 소리 소리라고 말했다.그의 사명은 무엇인가?부드럽고 온정이 어린 것이 아니었다.[회개하라 장차 올 진노에서 피하라] 하는 한마디 속에는 무서운 긴박성이 포함되어 있으며 또한 열정적인 애원이 포함되어 있었다.

요한이 부르짖고 외치는 말 한마디 그것은 다만 세계를 향하여 [회개하라 ]외치는 사명이었다.

2. 부흥운동

이제 우리는 이 설교자로부터 모여든 군중에기로 시선을 돌려보자.그는 자기를 따라오는 무리들을 따라오도록 강요하지 않았다. 그러나 무리들이 찾아오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은 여러 부류의 사람들이었다. 군인,세리,가난한 사람,슬픈 죄인 기관들도 있었다. 그러나 이렇게 모여든 무리들이 어떤 일을 한 것이 아니라 영원하신 하나님의 능력이 유대땅에 새로운 종교를 일으키게 했다는 것을 증거하고 있었다.

무리들이 세례요한에게 나온 동기는 과연 무엇이었겠는가? 호기심에 몰려나온 무리들도 물론 있었다. 예루살렘 시내에는 [당신은 광야에서 외치는 세례요한의 말을 들은 사람이구려]라는 말이 당시 유행어가 되어버렸고, 또 아덴서에서 들은 어떤 유명한 말 보다 새로운 이야기를 세례요한에게서 들을 수 있노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

사실 처음으로 종교를 찾는 사람은 어느 정도의 호기심이 움직이지 않는 바도 아니다. 부흥운동에는 단순히 분명한 영적 이유보다는 호기심으로 찾아오는 경우가 있음을 결코 부정할 수 없다. 예를 들어 삭개오는 같은 사람은 단순히 예수가 어떤 사람인가 보고싶은 호기심에서 나온 사람이지만 그것이 인연이 되어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할 수 있는 영혼이 되었다.

또 정치적인 이유로 나온 사람도 있었다. 이스라엘의 선교역사를 돌이켜 보건데 요한이 출현하기까지 약 2백여년간 예언자가 없는 침묵시대가 계속되다가 세례요한이 비로소 광야에서 외침으로서 긴 선교의 침묵을 깨뜨리었다. 이 사건은 새로운 민족운동이 발돋음하여[로마에 항거하여 우리는 일어나야 한다]는 슬로건 압박자에게 짓밟힌 이스라엘이 자유를 찾으려고 움직이던 민족운동자들이 공개된 요단강변의 부흥회에 모여 들고 있었다.

그러나 호기심이나 민족주의 동기로 보다 더 나은 동기에서 나온 사람들이 있었다. 곧 자기들의 죄를 자백하려고 나온 사람들이다. 이 사람들이 바로 세례요한이 원하는 사람들이었다. 그의 정열적인 설교가 있을 때마다 그에게 자신들의 비밀을 고하고 싶어 남아 있는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에 요한은 그 한사람 한사람을 일일히 접대하여 같이 이야기하는 중에 그들의 잠재해 있는 죄를 처리해주고, 자유와 평안과 깨끗함을 얻게 하려고 그들을 강으로 데리고 나가서 새생활의 표적으로 세례를 베풀었다.이렇게 새로운 생활의 기쁨을 맛본 사람들은 모두 자기들의 고향으로 돌아가 이 기쁨을 전하였다. 이것이 요한이 광야에서 베푼 부흥회의 결과였다.

3. 예수와 요한

이 부흥의 소식이 갈릴리 지방으로 전하여졌다. 나사렛 골목에도 알려졌다. 예수께서 일하고 게시는 그 목공소에도 이 소식은 들려왔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때가 이미 이른 것과 그가 그때까지 기다리던 시간이 된 것을 아셨다. 드디어 목수의 기구를 버리고 길을 떠났다. 그러나 요한에 대한 예수의 태도는 어떠했으며, 요한의 부흥에 대하여 예수께서 어떻게 생각했을까?여기에 대하여 가능할 수 있는 세가지 태도를 열거해 보자.

(1) 이를 경원할 수도 있다. 예수님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건대 이는 고백과 회개의 세례이므로 예수처럼 아무 고백할 것이나 회개할 것이 없는 사람에게는 무관한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하나님께서 보내신 축복이므로 매우 타당하지만 자기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일이라고 얼마든지 생각할 수 있다.

(2) 또한 세례요한이 하는 일을 비판하고 여기에 도전할 수도 있다. 세례요한이 외치는 복음은 진리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 불완전한 것이었다. 너무 부족하기에 예수님께서 묵인할 수 있었을까? 예수님의 입장에서 볼 때 세례요한에게는 두가지 결점을 생각할 수 있다.

첫째는 요한의 종교가 지나치게 [무엇을 하지 말라]는 소극적인 종교라는 점이다. 예수님께서 후에 언급하신 바대로 요한을 따르던 사람들은 장터에 앉아서 피리를 불어도 아무런 반응이 없는 무리였다. 사실 요한은 광야의 사람이요 금욕의 사람이며 자기 자신을 학대하던 사람이었고, 인생의 향락과 행복을 모르는 사람이었다.

[당신의 칭찬을 생각할 때마다 나는 당신의 기도를 더욱 생각하겠습니다]라고 자기 아버지에게 보낸 서신에서 말한 스콧틀란드의 문인 루이스 스티븐슨씨의 한 구절은 요한의 경우를 생각하게 하며, 요한의 종교는[너는 그것을 말라]의 종교였다.

또 다른 방향으로 비평하자면 요한의 종교는 공포 위에 서있는 종교라고 할 수 있다.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고 그는 외쳤는데 이러한 공포가 사람을 구원으로 인도하는 적당한 무기라고 할 수 있겠는가? 요한은 하나님의 진노의 불을 설교했다고 하면, 예수님은 하나님의 자애와 아버지의 성격을 설교했다. 이런 점에 대해서 예수님은 요한을 나쁘게 평할 수도 있었겠고 또 그를 반대할 수도 있었겠다.

앤드류,보나와 로버트.뮈레이.맥캔 두 사람은 어느날 다음과 같은 대화를 주고 받았다[지난 주일 설교 제목이 무엇이었던가?] 고 맥캔이 물었다.[악한 자는 지옥에 간다]라고 보나가 대답했다. 맥킨은 다시 [그 무시무시한 설교제목으로 부드러운 설교를 할 수 있던가?] 고 물었다.

세례요한의 경우에 있어서 그가 하나님의 진노를 설교할 때에는 온유한 심정보다는 일층 격분과 비난의 심정이 가득 차 있었을 것이며, 예수님은 같은 목적의 설교를 유순하고 사랑에 담긴 미소로서 할 수 있었을 것이다. 고로 요한의태도가 자기으 ㅣ태도와 동일하지 않다는 점에서 거부해 버릴 수도 있었겠다.

(3) 그러나 예수님께서 세례요한에게 대하여 적극적인 태도를 보여 주었음을 우리는 다음에서 알 수 있다. 그는 결코 요한을 반대하거나 경원하거나 비판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그는 하나님의 놀라운 겸손을 그 마음에 가지시고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러 가셨다. 너무나 감격에 넘친 요한은 [내가 당신에게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당신이 내게로 오시나이까?]하고 어쩔줄 몰라했다.

어느날 해질 무렵, 요한을 찾아온 무리가 각기 집으로 돌아간 뒤, 피곤한 몸을 쉬지 않고그대로 기도의 시간으로 바치고 있을 때, 외로운 그의 눈앞에 빛나는 하나님의 얼굴이 갑자기 나타나고, 그 얼굴에서 비치는 빛은 그의 전신을 뜨겁게 충격시켜 그 영광스럽게 찬란한 얼굴 앞에서 감히 머리를 들 수 없음을 느끼게 했다.그러나 그 하나님의 아들 예수는 겸손하게도[내가 그대에게 세례를 받아야 하겠]고 말씀하셨다. 요한은 [어찌 이 일을 내가 할 수 있겠습니까?] 하고 주저했지만 [이제 허락하라, 우리가 이와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하셨다. 요한은 이 고상한 겸손에 감동되어 예수님께 세례를 베풀었다. 한 인간이 그의 주님께 세례를 베푸는 이 영광스러운 광경은 하늘의 천사들도 보고싶은 마음이 간절했을 것이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가 기뻐하는 자라]하신 하늘의 음성은 바로 이 광경을 바라보던 천사들의 입에서 흘러나온 노래일 것이다.

4. 예수 세례의 내적 의미

죄인이 받아야 할 세례를 죄 없으신 예수께서 받으셨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며, 이 신비로운 장면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흑자들은 이 광경에 대하여 지상에 있는 그의 형제들이 지은 죄에 대한 뉘우침은 예수님도 의식했기 때문에 회개의 세례를 받으셨다고 한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죄에 대한 의식을 가질 수 없으리라 만큼 결백하신 분이기에 이들이 말하는 회개와 세례들은 부당하다고 말한다.

당시 세례요한을 중심으로 전국적인 부흥운동이 일어나고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은 요한의 활동에 대하여 어느 정도 빚을 지고 있는 것같은 생각을 가지셨다.

그때까지 유대의 종교계는 침체상태에서 싸늘하리만큼 식어버린 무관심과 태만의 시대를 보내고 있었다. 갑자기 요한을 중심으로 신앙활동의 새아침을 맞이하고 있었다. 남녀노유를 막론하고 오랫동안 유대민중은 종교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되었고,또한 여기에 신경을 쏟을수록 자신들의 죄 문제를 방관만 할 수는 없었다. 마치 시냇물을 사모하는 목마른 사슴처럼 모든 심령은 영적 은혜에 대한 기갈을 해소해 보고저 하나님께 간절한 마음으로 부르짖을 수 밖에 없었다. 이러한 전국민적인 종교의 관심은 예수님 자신이 일으키려는 천국 고통에 큰 희망을 던져준 것이 사실이다. 비록 세례요한의전도 운동이 어느 면에는 부족한 점이 있다. 하더라도 그 운동이 예수님의 새로운 천국 복음운동을 위하여는 절대로 필요한 준비였다.

요한은 진실로 선구자였다. 예수님께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셨다는 사실은 예수님자신의 사업 일부분을 요한이 먼저 했다고 인정하는 일종의 선구자에게 대한 빚을 갚는다는 심정과 그리고 요한의 활동은 하나님의 성령운동을 실제 전국적으로 일으켰다는 인정으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셨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 만으로 대답이 충분하지는 않다. 예수님은 자기의 목적인 죄인과 멀리 떨어져 게신 분이 아니다. 그는 어디까지나 죄인의 곁에 서있는 분임을 여러 사람에게 알리시려고 요단강까지 세례 받으러 나가셨다고 생각할 수 있다. 죄 없으신 예수께서 죄인이 받은 세례를 받는다는 것은 에수님의 사랑,즉 그 위대한 구속의 행동을 보여주신 것이다. 그 다음해 예수님은 [세리와 죄인의 친구]라는 별명을 듣게 되었는데 이에 대한 사랑의 사실을 미리 예언자적으로 보여주셨다고 하겠다.

예수님은 언제나 자신의 인망을 등한시 하시고 가난한 사람,도움을 받아야 할 사람,버림 받은 사람들과 한자리 하시기를 즐겨하시고, 두 강도의 사이에서 죽는 천한 죽음을 택하시고 그 일생의 모습이 언제나 죄인과 같이 행동하셨으며 또한 세례 받으시는 이 장면도 그러했다. 옛날 이사야가[범죄자 중의 하나로 헤아림을 받았나니라](사53:12)한 예언은 예수의 지금 형편을 가장 바로 본 것이다. 그는 항상 모든 죄인의 대표자처럼 생활하셨다. 요단강에서도 그느 ㄴ죄인의 곁을 떠나지 아니하시고 죄인의 수치를 자기의 수치로 삼으시고 그들의 괴로움을 자신의 괴로움으로 생각하시고 그들의 차모히를 자기의 참회로, 그리고 그들의 죄짐을 자기가 짊어지고 가야 할 것으로 생각하셨다.

그 영원한 짐을 짊어지시고 갈보리 십자가에 매달리신 최초의 짐이 바로 이 세례라고 하겠다. 그러므로 예수의 세례는 영원한 구속의 능력을 가진 사랑으로서 언제라도 차별대우가 없으며, 자기와 다른 사람을 동등하게 생각하는 그런 사람임을 보여준다. 이스라엘 백성이 죄를 범하였을 때, 모세도 자기 자신의 결백만 주장하지 않고 [원컨대 주의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도말하옵소서](출 32:32)라고 부르짖었다.

바울 역시 자기 민족의 죄를 탄식하며 [내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라](롬9:3)라고 부르짖었고,죠지,폭스는 [모든 사람이 받는 세례를 내가 받아 그들이 요구하는 바가 무엇인지 알고 그들의 슬픔을 내가 느껴야 하겠습니다]라고 기도했다.

일생을 나환자를 위하여 봉사하다가 그도 마침내 문둥이가 되어 생애를 마친 성 다미엔은 [내 사랑하는 형제들에게 설교할 때마다 나는 당신들처럼 "나의 형제들이여"하지 않고 나는 언제나 "우리 문둥이들은"하고 부릅니다]라고 형제와 자기를 동일시하고 있다. 그는 또 말하기를 사람들이 나를 동정하고 또 나를 불행하다고 생각하지만 그러나 나는 모든 선교사들 중에 가장 행복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라고 말했다.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실 때, 환상과 소리, 이 두가지 신비의 사실이 나타났다. 하늘에서 소리가 났고, 비둘기와 환상이 나타나 성령이 임하심을 보여주었다. 이 환상과 소리는 그의 나사렛 [ 침묵의 생할]에 이제 종지부를 찍고 그의 활동이 시작되었다는 알림이며, 성령이 임하심을 그가 받아 거룩한 소명에 응하여 복음사업을 실현시킬 것을 의미함이다.

[내 사랑하는 아들이여 내 기뻐하는 자라,] 이 하늘의 소리로 부터 메시야의 지상 사업은 시작되었다. 그 환상은 메시야 직책 받으심을 증명하는 것이다. 홍수처럼 넘치는 능력이 그 영혼의 언덕에 넘쳐 흘렀고, 태초에 무에서 유를 창조하신 그 무한의 능력이(창1;1)그에게 임하여 [어디를 가도 피할 수 없는 주의 영](시139:7) 옛날 이사야의 예언대로 [주 여호와의 신이 나에게 임하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사61:1)는 말씀을 그에게서 응하게 하려는 것이었다. 그는 물에서 올라와서 아버지 하나님의 부름에 응하여 하나님의 능력이 인류에게 구원을 가져오신 증거를 친히 보여주셨다.

매일 성경


 사무엘상  3:1-10   하나님이 부르심
 누가복음 1:59-80   전구의 탄생
 요한복음 1:15-28   광야의 한 음성
 마태복음 3:1-12    부흥의 시작
 요한복음 1:29-37   보라,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
 마탭고음 3;13-17   예수께서 세례 받으심
 마가복음 6:14-29   세례요한의 죽음

 

토론을 위한 문제

1.요한의 세례는 오늘의 기독교 세례와 어떤 점에서 달랐는가? 2.무죄하신 예수께서 어째서 죄 사하는 세례를 받으셨는가? 3.두려움은 사람을 구원으로 인도하는 동기로써 적합한가? 4.오늘 하나님의 소명(부르심)의 참 표적은 어떤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