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0 장. 승 리

사망에 대한 승리

우리는 두 장면을 눈 앞에 그려보자. 그 하나는 예수님께서 갈보리에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날 밤 예루살렘에 있는 다락방에서 몇사람의 무리가 빗장을 지르고 문간을 막아 놓은 채 무서워 움추리고 있는 장면이다. 그돌 모두의 얼굴에는 공포가 있었다. 그러나 공포보다 더욱 뚜렷이 그 얼굴에 새겨져 있는 것은 절망적인,결정적인 회복될 수 없는 실의였다. 망연히 당혹한 표정으로 그들은 말없이 앉아 있었다. 그들은 너무나 상심해 있어서 말할 기력도 없었으며 마음이 무감각해져서 기도할 수도 없었다. 모든 것이 끝장에 다달아 있었다. 운명이 그들을 파멸시켰다.살아야 할 목적이 없었다. 이것은 극도로 비참한 패배의 장면이다.

여기에 또 다른 한 장면이 있다. 수주일 후였다. 바로 몇주일 전의 그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걸어 잠근 문 뒤에 숨어 있는 사람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거리에 나와 있었다.그들은 인간적인 아닌 놀라운 확신으로 불타고 있었다. 그들의 외침은 쇳소리 같이 쟁쟁울렸다. 그들은 세상이 듣지 않을 수 없는 메시지를 갖고 있었다. 그들은 전혀 두려움이 없었으며 감당할 수 없는 기쁨에 넘쳐 있었다. 그들은 온 지구를 정복할 것을 계획하고 있었다.

먼저 첫번째 장면을 본 다음 두번째 장면을 보라. 저기에서는 시들어버린 희망의 비참함을, 여기에서는 성도들의 용기를 볼 수 있다. 또한 거기에서는 우물쭈물하는 무익한 잔존자들을,여기에서는 전진하는 투쟁적인 교회의 핵심을 볼 수 있다. 그리고 이 사이에는 다만 짧은 기간이 있었을 뿐이었다.어떻게 해서 이와같이 놀라운, 거의 믿을 수 없는 변화가 이 사람들의 생애에 일어나게 되었는가? 우리는 이것을 설명할 수 있는가? 물론이다. 이 두 장면 사이에는 어떤 일이 일어났던 것이다. 즉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던 것이다.

나사렛 예수가 십자가에서 내리워져서 무덤에 눕혀졌을 때 만큼 모든 것이 완전히 파멸된 것처럼 보인 때가 없었다. "그는 십자가에 못박히시고 죽어 장사되었다"고 사도신경은 말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말들은 매우 결정적 느낌을 지니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만일 제자들이 앞일에 대해서 생각이라도 해보았다면 그들은 그들 자신이 한때 예수님의 명령을 좇아 그렇게 열심으로 떠났던 그 고향에 부끄러운 얼굴로 돌아가는 모습을 보았을 것이다. 또한 그들이 그와 같이 면목 없이 돌아갈 때 마을 거리에서 수근거리느니 조롱과 욕설을 상상으로 들었을 것이다. [베드로]는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고 말했지만 그 역시 그가 그만두었던 곳에서 옛생활을 다시 한다고 해도 이제는 결코 그것에 만족하지 못하리라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예수님에 대한 그의 체험이 그 사이에 끼어 들어서 그를 영영 다른 것에는 쓸모없는 인간으로 만들어 버렸다. 그리스도만 죽은 것이 아니라 기독교가 죽은 것이었다.그리고 그 무덤을 커다란 절망의 돌이 굴러와 막고 있었다.

그러나 여기 저기 몇몇 사람의 마음속에는 그들이 갈보리에서 보았던 것이 그 마지막이 아니라는, 아니 마지막일 수 없다는 어렴풋한 생각이 감돌고 있었을런지도 모른다. [죤 메이스 필드]의 연극 [예수에 대한 심판]중에 놀라운 대화가 있다. 십자가 처형을 맡았던 병사들의 지휘관이 로마 백부장 [론기 누스]는 그날 일에 대한 보고를 하기 위하여 [빌라도]에게 돌아온다. 보고가 끝나자 [빌라도]의 아내인 [프로쿨라]는 백부장을 손짓해 불러서 어떻게 그 죄수가 죽었는가를 말해 달라고 간청한다. 백부장이 그 이야기를 해주자 그녀는 갑자기 그에게 묻는다. "당신은 그가 죽었다고 생각하세요?" "아닙니다. 부인, 전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론기누스]의 대답이다. "그렇다면 지금 그는 어디에 있어요?" '부인, 그는 지금 로마인이나 유대인들이 그의 진리를 방해하지 못하는 자유로운 세상에 있습니다. 이 지상에서 걸어다녔던 사람중 가장 깨끗하고 고상한 영혼을 지녔던 분이 죽어 달려 있는 십자가의 그늘 아래 서 있으면 우리는 한 음성이 내부에서 "이것이 마지막일 수는 없다"고 말해 주는 것을 듣는다. 그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었다. 사도신경의 위대하고 단순한 표현을 빌리면 "사흘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시며 하늘에 오르사 전능하신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신다."

부활은 역사적 사건

부활에 대한 증거는 논박의 여지가 없이 확실한 것이다. 물론 이 중요한 사건에 대한 여러 복음서의 기록에서 세부적인 차이가 발견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러한 차이는 그 이야기의 신빙성을 흔들리게 하거나 파괴하기는 커녕 실제로 그 신빙성을 높여주고 있다. 그 때의 상황을 생각해 보자. 제자들은 아직 예수님께서 살아계시다는 것을 발견하고 엄청난 놀라움과 당혹에 빠져있었다. 또한 그 사건을 눈으로 본 다른 증인들, 즉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사람들은 극도로 고조된 감정과 흥분속에서 살고 있었다. 후일 복음서 기자들이 이런 혼잡하고 찬란했던 순간들의 기억들을 모아 복음서 속에 기록하게 되었을 때 세부적인 차이가 생기게 되었다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해야만 할까? 이것이 조금이라도 그들 증언의 가치를 손상시키는가?이와는 반대로 만일 그러한 차이가 없었다면 우리는 훨씬 더 불안해 해야 할 이유를 가지게 되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럴 경우 여러 복음서 기록들이 의도적으로 일치하게끔 만들어 졌다는 결론을 물리치기가 어려웠을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여기에서 발견하는 것과 같은 피상적인 불일치가 대사건의 보도에서 생기게 될 수 밖에 없는 경로에 대한 좋은 예증을 제1차 세게대전의 경험에서 찾아볼 수 있다. 어떤 특별한 사건에 대한 목격자들이 각각 그 나름대로 그 사건을 묘사하곤 했다.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복음서의 증언은 문면상으로도 현실성과 진정성의 특색을 지니고 있다. 또한 그 증언은 그들 스스로 철저하게 확신했던 사람들의 증언이며 처음부터 끝까지 확신으로 일관되어 있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신지 불과 50일 후 사도들이 예루살렘에서 부활은 전파하기 시작했을 때 그들의 증언이 수천명으로 하여금 확신케 했다는 것은 특별히 중요하다. 사도들이 공공연히 선언하여 그러한 놀라운 결과들을 낳게 했던 사실들이 참된 것이 아니었다면 이들이 주장하는 사건이 바로 최근에 일어났던 것인 만큼 그들의 적이 그 사실에 도전하여 논박하려 했을 것이다. 예루살렘에는 그 새로운 움직임이 봉오리채 꺾어지는 것을 무엇보다 더 바랐던 사람들이 있었다. 만일 어떠한 수단으로든지 사도들의 메시지의 중심 주제를 불신하고 거짓임을 증명할 수 있었더라면 그들은 지체하지 아니하고 그렇게 했을 것이다. 그러나 사도들의 증언에 대하여 논박할만한 근거가 없었다. 만일 예수님께서 실제로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시지 않으셨다면 분명히 그때가 예수님께서 부홰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증명하기에 용이한 때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증명은 시도되지 않았다. 이와같이 예수님을 대적하던 자들 편에서 침묵을 지켰다는 사실 자체가 사도들이 선포하고 있던 복음의 진실성에 대한 최상의 증거가 된다. 그 사실들은 그것들이 도전될 수 없는 것들이었기 때문에 도전받지 않은 채로 있었다. 부활의 복음은 논쟁의 여지가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전혀 문서상의 증거를 떠나서도 한 뚜렷한 증거가 우리가 이미 언급한 바 있는 제자들 자신의 놀라운 변화 속에 나타나 있다. 부활 사건만이 이 사람들의 절망적이고 무익했던 생이 온전히 빛나고 승리에 찬 생에로 완전히 바뀌게 되었던 사실을 증명할 수 있다. 이 사실이야말로 부활 하건이 어떤 꾸며낸 이야기나 단순한 환상적 공상이라는 주장을 산산히 부서뜨리려는 견고한 반석이다. 선생을 잃은 제자들이 그가 그들에게 다시 나타났다는 이야기를 꾸며냈다는 주장은 제자들 자신의 생활에 의해 부정되며 또한 터무니없는 주장으로 드러나게 된다. 만들어 낸 이야기가 사람의 성격을 변화시키지는 못하며 거짓된 것을 위해 순교할 수는 없는 법이다. 제자들의 믿음을 순전히 환상적인 근거에서만 설명하려고 한 시도는 문제를 해결하기 보다는 더 많은 문제를 일으키는 것으로 그쳤다. 한가지, 단 한가지 그리스도께서 참으로 부활하셨다는 사실만이 이 열한 사람에게 일어났던 일을 믿을 있게 한다.

그러나 그 증거는 최초의 제자들을 지나서 [교회의 실제성(the fact of the christian Church)에서도 발견된다. 교회를 건립하게 한 힘이 부활신앙이었다는 것은 명백한 역사적 사실이다. 또한 교회가 예루살렘에서부터 온 땅의 정복을 위해 쏟아져 나왔을 때에도 그 추진력이 된 것은 부활의 메시지였다. 4복음서가 그 끝에서 취그바고 있는 놀라운 사실들의 진실성은 천구백년 동안의 교회사가 증거하고 있다. 왜냐하면 그 본질에 있어서 불멸성을 지니며 그 가능성에 있어서 무한하여 인간 영혼에 대한 그 가치에 있어서 필요불가결한 교회와 같은 영적운동에 완전히 그리고 순전히 사실이 아닌 어떤 것에서 생겨났거나 고취되었다고는 아무도 심각하게 믿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만일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지 않으셨다면 그의 이름을 가지고 있는 교회는 오래 전에 멸절되고 말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격심한 공격이 사회적,정치적, 지적 방면에서 수천년을 계속하여 교회에 가해져 왔기 때문이다. 교회는 여러 차례 절망적이고 죽은 것처럼 보였다.[흄][볼테르]등은 그 무덤을 파는 일에 분주했다. 그러나 교회는 언제나 그 무덤을 깨뜨리고 그 돌을 굴러 버렸다. 살아 게신 하나님의 교회의 이러한 역사는 다만 예수님의 부활 사실만이 설명할 수 있다.

이러한 방면의 증거도 유효하며 큰 중요성을 가지나 부활에 대한 절대적 증거, 즉 부활 사실을 신빙성 있는 것으로 만들기만 할 뿐 아니라 불가피한 사실로 만드는 것은 그리스도 자신의 인격이다. 최초의 놀라운 충격이 불변의 확신으로 된 후에 제자들이 보게된 것은 바로 그리스도 자신의 인격이었다. 예수님께서는 언제나 동일하시기 때문에 그가 바로 이전과 동일하신 분이 아닌 어떤 분으로 부활한다는 것은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일이었다. 제자중 하나가 옛일을 회상하면서 이 사실을 표현한대로 "그는 사망에 매여 있을 수 없었다(행2;24).

이것은 위대한 확신이었다. 이미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들과의 생활에 대한 연구에서 이 확신에 관여한 몇몇 요인을 드러내 보여 주었다.

제자들이 그들의 선생에 대해 언제나 깊이 느낀 것 중 한가지는 그의 순전한 생명력이었다. 요한은 [그 안에 생명이 있었다]고 말하고 있다(요1:4).베드로는 그를 [생명의 주](행3:15)로 부르고 있다. 복음서를 어느 곳이라도 펴 보라. 제일 먼저 발견하게 되는 것은 아침의 해처럼 빛나며 하나님의 생기처럼 생명력있는 어떤 분이 그곳에 있다는 것이다. 예수님과 접촉하게 된 사람은 누구나 그가 거대한 숨은 힘을 소유하고 계시며 아무리 그에게서 많은 것을 알아내더라도 그 뒤에 더 많은 것이 있다는 느낌을 가졌다. 이 사실을 그들이 예수님께 가지고 왔던 놀랍고도 대담한 요구가 설명해준다. 그 한 예로 문둥병은 널리 알려진 불치의 병이었다. 그러나 한 문둥병자는 단순히 [주여 원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마8:2).그들은 예수님께서 감다하지 못하는 상황이란 상상할 수 조차 없었다. 죽음까지도 굴복할 수 밖에 없을 것이었다.

그 위에 예수님의 사랑이 있었다. 제자들이 그를 알게 된 최초의 그날부터 그 사랑은 그 위에 불멸의 인을 지니고 있었다. 그 사랑은 이전에 바다에나 육지에나 어느 곳에도 결코 없었던 빛으로 온 세게를 가득하게 하였다. 그러한 사랑은 그 사랑을 받는 자에게서 결코 탈취될 수 없었다. 그 사랑은 그 사랑하는 자를 곁에 서서 지키기 위해 무덤을 깨뜨릴 것이었다.

그러나 저욱 중요한 것은 예수님의 무죄와 도덕적 완성이었다. 우리는 이미 예수님의 치유이적에 대한 연구에서 예수님의 능력있는 이적이 어떻게 그 자신의 무죄 사실과 연결되어 있으며 또한 그 사실에 의존하고 있었는가를 살펴보았다. 모든 인간중 에수님 한분에게서만 죄와의 결정적인 단절이 이루어졌다. 또한 죄의 부패와 습관에 의해 언제나 가로 막히고 좌절되었던 [물질에 대한 영의 지배력]이 그에게 있어서 온전히 자유롭게 되었다. 이와같이 이적의 역사가 예수님으로부터 자연스럽게 흘러나오게 되었다. 또한 가장 위대한 이적인 부활도 더 이상 불가능한 것이 아니었을 뿐 아니라 필연적인 것이 되었다.

이 제자들에게 있어서 결정적이었던 것은 예수님에 대한 개인적인 체험이었다. 그와 매일 가졌던 교제가 그들에게 예수님은 인간 이상이신 분이라는 것을 가르쳐 주었다. 또한 비록 갈보리의 십자가가 일시적으로 그 고귀한 믿음을 흐리게 했으나 그 믿음은 다시 밝게 빛나게 되었다. 하나님께 대하여 는던 것과 같은 감정을 예수님에게서 느끼게 된 그들은 이제 부활이 처음부터 확실한 것이었다는 것을 알았다. 왜냐하면 만일 예수님께서 죽어서 그것으로 모든 것이 끝나 버렸다면 하나님 자신이 죽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이와같이 부활에 대한 최후의 증거는 예수님 자신의 인격과 예수님에 대한 개인적 체험이다. 하나님께서 성육신하신 그리스도께서 [사망에 매여 있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예수께서 친구들과 재회하심

이제 우리는 부활의 실제성에서 부활하신 주님의 나타니심에 대한 기록으로 넘어가기로 한다.예수님께서 죽으신 후 그를 처음 본 사람은 막달라 마리아였다(요20:1.11,마28:19 참조).세상에서 생겼던 가장 중대한 소식,인류의 전생활을 변화시키고 왕좌를 무너뜨리며 나라에 혁명을 일으킬 소식,오늘날에도 여전히 온 세상을 영원한 소망으로 감싸며 부활주일 아침 모든 기독교인들에게 새로운 감동을 주는 소식을 제일 먼저 한 보잘것없는 비천한 여인에게, 일곱 귀신이 그에게서 나갔던 여인,용서받은 마음 외에는 그녀를 눈에 띄게 할 아무 것도 못했던,그리고 그녀의 사랑 외엔 아무 권리도 갖지 못했던 여인에게 주어졌다. 막달라 마리아는 동이 트기 전 예수님의 죽은 시체 곁에 앉아 있기라도 하려고 나왔다. 그녀는 죽은 시체 외에는 모든 것이 사라져버렸다는 말을 속으로 되풀이하고 있었다. 예수님의 음성은 이제 다시는 들리지 않을 것이며 그 눈빛은 더 이상 빛나지 않으리라. 생명을 주던 그 영혼은 영원히 사라져 버렸으며 남은 것은 그의 죽은 시체 뿐, 사랑과 감사 도착했을 때는 그 시체마저 간 곳이 없었다. 이 순간은 그녀의 처절함이 극에 달한 순간이었다.[사람이 내 주를 가져다가 어디 두었는지 내가 알지 못함이니이다.]눈물에 가리워 그녀의 눈은 곁에 서계신 분을 알아보지 못하였다. 그러나 그가 그녀의 이름을 불렀을 때 그녀는 알아 보았다. [예수께서 마리아야 하시거늘 마리아가 돌이켜 히브리 말로 [랍오니]여 하니라(이는 선생님이라)].그녀가 구함을 받고 용서받은 것이 컸던 만큼 그녀의 사랑도 지극했다. 예수님은 언제나 그를 가장 사랑하는 자에게 나타나신다.

누가는 [엠마오]로 가는 길에서의 그리스도에 관한 한 아름다운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다(눅 24;13이하).우리 생에서 생길 수 있는 모든 실망가운데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실망만큼 심한 것은 없다. 황혼의 햇살은 맞으며 고향으로 돌아가던 [글로바]와 그 친구의 마음을 무겁게 하고 있던 실망이 바로 이러한 실망이었다. 그들은 상심하여 사라져버린 희망에 대해 서로 이야기하고 있었다. 행복했던 때의 추억이 그들의 마음 속에 밀려들었다. 그렇게 젊고 강하고 확고하며 하나님 같았던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그들은 이 사람이 장차 오실 왕이며 수만 영혼의 지도자라고 확신했었다. [우리는 이 사람이 이스라엘을 구속할 자라고 바랐노라]이제 그 기대는 실망과 비탄,그리고 후회로 끝나고 말았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종종 인간들이 그가 영원히 가고 없다고 생각하는 그때 가장 가까운 곳에 계신다. 그들이 도중에서 자기들과 동행하게 된 낯선 사람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 동안 그들의 마음은 뜨거워지기 시작했다. 거의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들은 여행의 목적에 도착하였다. 예루살렘에서 엠마오로 가는 길이 그날밤 처럼 가까왔던 때는 예전엔 없었다.같이 가는 동안 그들의 우울을 그렇게 신비하게 달래주고 즐거움을 싹트게 하였던 그 낯선 사람과 그냥 헤어지기가 어려웠다. 그 어떤 것에 이끌려 그들은 조금 더 함께 있고 싶어서 식사에 초대했다. 그때 어떤 일이 일어났다. 그것은 그가 떡을 떼실 때의 낯익은 행동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빵을 드실때 못자국이 나 있는 그의 손 때문이었을까?아니면 빵을 드실 때 못자국이 나 있는 그의 손 때문이었을까? 그 무엇 때문이었던 간에 그들 눈앞에 드리워져 있던 휘장이 찢어졌으며 그들은 예수를 알아보고 불렀다.

같은 날 밤 예루살렘에서는 지도자 없이 방황하던 제자들이 그들의 선생과 재회하게 되었다. [모인 곳에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셨더라](요20:19,비교 눅 24:36)그 중요한 순간에 제자들 중 두사람, 유다와 도마가 빠져 있었다. 사도행전의 신중하고 엄숙한 표현을 빌리면 유다는 [제곳으로]갔다(행1:35).그러나 도마는 어디에 있었는가? 틀림없이 그런 자신의 깊은 슬픔을 생각하면서 동료 제자들과 함께 있는 것까지도 견딜 수 없어진 나머지 어둠 속에서 혼자 배회하고 있었을 것이다. 어쩌면 그는 인적 없는 갈보리의 언덕 길을 걷고 있었을런지 모른다. 그 다음날 아침 베드로와 요한이 얼굴에 새로운 빛을 띠고 그를 만나 그 놀라운 소식을 알려 주었을 때 그는 그들을 슬픈 빛으로 바라보며 그들이 잘못 안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일주일 후에 그는 그 다락방에 있었다. 그러고 언제나 정직한 의심에 대해서는 오래 참으시는 예수님께서 스스로 자신을 나타내신 것은 특별히 헤매고 있는 그의 제자 한 사람을 위한 것이었다. 도마는 이제 다른 제자들이 보았던 것을 스스로 보았으며 그들이 체험했던 것을 체험하게 되었다.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라는 외침과 함께 도마는 한밤중같이 어두웠던 의심을 그의 마음에서 쓸어버렸다.

부활하신 주님의 나타나심에 대한 복음서 기자들의 이야기를 읽을 때 우리는 이 남녀들이 목격했던 예수님은 확실히 예전에 그들이 알았던 사랑하던 바로 그 선생님이었으나 그럼에도 어떤 차이가 있다는 주목할만한 사실을 느끼게 된다. 이제 예수님과 그들 사이에는 어떤 격의가 있었다. [나를 만지지 말라고 그는 말씀하시었다(요20:17).그것은 사이가 멀어진 것이라고 불리울 수는 없었으나 적어도 그들과의 교제에 있어서 한장이 닫히고 새로운 장,더 높은 차원의 교제가 시작되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했다. 통상적인 시공간의 제한에 그는 더 이상 매이지 않으셨다. 그는 이해할 수 없는 방법으로 그들에게 오시고 또한 가셨다(눅 24;36,요20:19).동산에서의 막달라 마리아나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의 이야기에서 이미 살핀대로 그를 알아보는 것이 언제나 즉시 이루어지지는 않았다. [그들이 예수를 뵈옵고...오히려 의심하는 자도 있더라](마28:17).[예수께서 다른 모양으로 저희에게 나타나시리니](막16:1-) [저희가 그 보는 것을 영으로 생각하는지라](눅24:37).[예수께서 바닷가에 서셨으나 제자들이 예수신 줄 알지 못하는지라](요21:4). 그는 동일하셨으나 또한 달라지시기도 하셨다. 그는 여전히 에전에 갈릴리의 밀밭 사이를 그와 함께 걷고 밤이면 함께 노숙하던 자들의 친구이셨으며, 들의 백합화나 공중의 새들로부터,멍에나 쟁기,촛불,그리고 놀면서 외쳐대는 어린 아이들로부터 잊지 못할 교훈을 그들에게 가르쳐 주시던 선생이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어떤 변화를 의식했다. 그러나 그들이 그것을 이해하게 되었을 때 그것은 다만 기대되었던 것에 지나지 않았다. 왜냐하면 갈보리에서의 죽음이 그를 그들에게서 앝아간 이래 그는 긴 여행중에 계셨기 때문이었다. 그는 누구라도 한번 가면 다시 그 장벽을 넘을 수 없는 미지의 나라에서부터 돌아오셨던 것이다. 그 미지의 나라의 숨결이 그 의 주위에 가득했다. 그는 더 이상 좁고 시공간의 제한을 받는 물질세게에 속하시지 않으셨다. 그는 더 넓고 높은 세계,그 홀로 참되며 영원한 영의 세계에 속하셨다.

4. 부활의 내면적 의미

우리는 이 장에서 부활의 사실성과 이 사실이 처음 알려지게 했던 부활하신 주님의 나타나심을 취급해 왔다. 이제 우리는 최종적으로 이 사실의 내면적 의미를 살펴보기로 한다. 분명히 이와 같은 사건은 제자들이나 교회 뿐만 아니라 전 세게에 대한 어떤 결과 또는 의미를 가지고 있을 것임이 틀림없다. 예수님의 부활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먼저 부활은 그 아들에 대한 하나님의 입증이었다. 제자들이나 가서 부활하신 주님을 전파하며 선포할 때에 그들은 의미 심장하게 능동태가 아니라 수동태를 사용하여 그 사건을 묘사하였다. 그들은 꼭 [그가 부활하셨다]가 아니라 [죽은 자 가운데서 일으켜지셨다]고 말했다. 이것은 그들이 깊은 영적 통찰력으로 그 일어나 사건이 바로 하나님의 행위이며 하나님의 오른팔이 그 사랑하는 아들을 위해 행하신 일이었음을 알았기 때문이었다(행2;24,32,3:15,4:10,롬6:49,고전15;15).흉악범의 죽음을 당하신 예수가 메시야라는 것은 정통파 유대인의 생각에는 충격적일 뿐 아니라 실제로 참람한 것이었다. 예수님에 대해 은밀한 기대를 가졌던 많은 경건한 사람들도 틀림없이 십자가 형벌로 인해 그의 거짓됨이 드러났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 부활에서 예수님에 대하여 품어왔던 가장 고귀하고 대담한 희망에 대한 하나님의 확증과 예수님의 메시야 권에 대한 하나님의 인치심, 그리고 그의 아들에 대한 하나님의 최종적인 입증이 나타났다.

부활은 더 나아가서 의에 대한 입증이었다. 대담하고 용감하게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건부를 선과 진리,그리고 사랑의 절대적 타당성에 거셨다. 이것들의 중요성을 그는 항상 말씀하셨다. 이것들을 위해 그는 [자기 헌신]의 마지막 한계에 이르기까지 자신의 생을 바치셨으며 이것들에 대한 믿음을 위해 그는 기꺼이 죽을 각오가 되어 있었다. 죄 없으신 예수님께서 만일 무덤에 머물러 계셨다면 이 세상은 도덕적으로 혼란하며 善이란 한낱 신기루이며 도의심이란 해로운 망상에 지나지 않는 것이라는 결론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부활하신 날 새벽 온 우주가 하나의 위대한 행도에 의해 고상하고 이기심 없는 생활 방식을 보증하고 확인하였다. 이제는 우주자체가 선한 싸움을 싸우는 인간 편에 있게 되었다. 예수께서는 부활하셨으며 이로써 의가 입증되었다.

부활은 영생에 대한 보증이었다. 비기독교인들은 기독교인들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것을 지켜보면서 여러 가지에 의해 감동을 받으나 가장 감명을 받는 것은 기독교인들의 죽음에 대한 경멸이다. 그러나 사망의 왕에게서 그 권세를 박탈하신 분은 부활하신 그리스도였다.[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리라](요14:2-3). 만일 죽음이 이러한 것이라면 두려워 할 여지가 어디에 있겠는가 사망에 대한 예수님의 승리는 그를 믿는 자들의 승리를 포함하고 있었다. [내가 살았으므로 너희도 살겠음이라](요14:19). 부활하신 날 아침은 영생을 밝히 드러낸 아침이었다. 이제 기독교인들은 사망이 패배하여 넘어진 것을 보면서 시편 기자와 함께 [하나님이 즐거이 부르는 중에 올라 가심이여 여호와께서 나팔 소리 중에 올라가시도다](시47:5)라고 말할 수 있게 되었다.

끝으로 부활은 그리스도께서 영원히 살아계심을 의미한다. 부활하신 후 말할 수 없이 즐거웠던 사십일간이 끝나고 예수님의 육체적 현현이 그쳤을 때에도 제자들은 그들이 예수님을 잃어버린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매일 예수님 자신의 말씀이 그들의 체험 속에서 실증되었다. [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함께 있으리라](마28:20).그들의 파란곡절 많은 모든 봉사활동을 통해서 그들을 버티어 준 것은 사라지지 않는 과거의 추억이 아니라 생생한 현실적 임재와 매일매일의 교제였다. 사망이 난폭하게 닥쳐 오는 것을 그들이 보았을 때에 그들을 붙잡아 준 것은 예수님의 손이었다. 그들의 체험만이 유일하게 그랬던 것은 아니었다. 제자들이 살았던 시대 이레로 수많은 남녀들이 그리스도와 함께 걸으며 이야기해 왔다.이것은 이적이 아니다 만일 그리스도께서 참으로 부활하셨다면 즉 그가 지금도 살아 계셨다면 그의 친구들이 종종 그를 대면하여 만나는 것보다 더 자연스러운 일이 어디에 있겠는가? 이러한 교제는 부활의 직접적인 결과이다. 어떤 날 [매튜 아놀드](는 (mattew arnold)자기도 모르게 외쳤다.

오, 그 위대했던 시대에 살았더라면 그 영광이 새로이 하늘과 땅을 가득 채우며 나의 황홀한 영혼을 사로 잡았을 것을! 이제 그는 죽었다. 그 오랜 동안을 [시리아]의 쓸쓸한 마을에 그는 묻혀 누워 있었다. 그리고 그의 무덤 위를 [시리아]의 별들만이 반짝이는 눈으로 내려다 본다. [아놀드]는 잘못 알았다. 그는 전혀 결정적으로 잘못 알았다. 왜 산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는가? 그리스도는 살아계신다. [버밍험]의 위대한 설교자였던 故[데일]박사는 어느 날 그가 부활주일의 설교를 준비하는 동안 어떻게 부활의 사실성이 이전에 결코 그랬떤 것이 없었던 만큼 강렬하게 그에게 엄습해 왔는가를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살아계신다!] 라고 나는 속으로 말했다. [그는 살아계신다!]그리고는 잠간 있다가 다시 말했다. [그는 살아계신다! ]잠깐 후에 다시 말했다. [그는 살아계신다! 과연 이것이 사실일까? 내가 지금 살아있는 것처럼 실제로 살아계실까?]나는 일어나 걸으면서 되풀이 했다. [그리스도께서 살아계신다! 그리스도께서 살아계신다!]맨처음에 그 사실은 이상하고 그의 진실이 아닌 것처럼 영광의 광채처럼 나를 휩쌌다. 참으로 그리스도께서 살아계신다. 지금 이 순간에도 수천의 사람들에게 이 사실이 단순한 이론이나 불확실한 소문이 아니라 확증된 불가침의 체험이 되고 있다.만일 그들이 한때 패배했던 그곳에서 승리의 삶을 살고 있다면 그것은 부활하신 아침에 동산의 꽃밭을 거니시던 부활하신 주님을 그들이 발견했기 때문이다.

매일 성경

 
고린도전서 15:8-9   부활하신 주님의 나타나심
 요한복음   20:11-18 무덤에 간 막달라 마리아
 누가복음   24:13-35 [엠마오]길의 그리스도
 요한복음   20:19-23 잠긴 문 뒤에서
 요한복음   20:24-31 도마의 믿음
 요한복음   21:1-14  갈릴리 호숫가에서
 사도행전    2:29-36 부활의 복음

 

토론을 위한 문제

1.당신은 부활에 대한 주요 증거로서 어떤 것을 제시하겠는가?

2.바울은 [만일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시지 아니하셨으면 너희는 아직 너희 죄 가운데 있느니라]고 말했다. 어째서 그런가?

3.[몸이 다시 사는 것을 믿으며]라는 사도신경 중의 말의 의미는 무엇인가?

4.아직도 부활을 부정하는 편에 서 있는 기독교이들이 너무 많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