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대학과 학원선교.......................이원설

1) 지식의 힘

잠언 24:5은 "지식 있는 자는 힘을 더하나니"라고 말씀한다. 공동번역은 이 구절을 "지식 있는 사람은 장사보다 강하다"라고 번역하고 있다. 이렇게 고대로부터 내려 온 지식과 힘의 상관성을 보다 명료하게 표현한 사람은 프란시스 베이콘이었다. 17세기 영국의 사상가인 베이콘은 "지식은 그 자체가 힘이다-knowledge itself is power"라는 명언을 그의 [종교적 명상록]에 남겼다.그와 동시대의 문호 세익스피어도 "지식의 날개 그것으로 천국까지 날을 수 있다"라고 공오(共嗚)했다. 그러나 그때까지 그들의 말을 이해했을 사람이 과연 몇 명이나 되었을까?17세기까지도 힘의 원천은 폭력 (군사력을 포함해서)이나.돈,富였지 지식이었다고는 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늘의 세계에서 지식은 힘의 가장 큰 근원이 되었다. 알빈 토플러의 [힘의 전이(轉移)-power Shift ] 말하듯이 오늘의 세계는 지식사회(kno- wledge society)로 변모하였다. 군사력(폭력)과 경제력(富)의 우열을 결정하는 가장 큰 요인은 지식이다. 정보사회에서의 지식은 자본금보다 더 중요한 가치가 있다. 피터 프락가의[제3의 파도]는 지식경제(Knowledge econo- my)의 중요성을, 다이엘 벨의 [지식문명의 구조]는 지식자산(Knowledge property)의 가치를 높이 평가하고 있다.

2)지식사회의 도래

오늘 우리는 지식발전시대에 살고 있다. 1994년 웨스레안대학의 도서관 직원 라이더(Fremont Rider)는 과거 200년간 저명한 대학 도서관의 장서증가율을 조사한 결과 인류가 가진 지식의 촐양은 매16년마다 배가되고 있음을 입증했다. 1963년 프라이스(Deredk price)는 [바벨론 이후의 과학]에서 17세기 이후 과학잡지와 논문의 증가율을 조사한 결과 과학지식의 배가의 시간을 15년으로 보았다.

다니엘벨은 이런 증가 현상을 과학,기술지식에만 국한할 것이 아니라 마하루프(Fritx Machlup)가 말하는 (1) 지식전문,직업상의 지식,직업상의 지식 등 (2)지적지식-인문상의 학식,(3) 종교적 지식-인간의 영혼구원 지식, (4)지적 기술-linear programing systems analysis,게임이론 등도 동시에 급증하고 있음을 지적하였다. 이런 견지에서 힐리아드(Robert Hilliard)는 과학기술지식의 배가추세는 6년으로 단축되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구체적 수치를 예를 들어 보자.
18세기 예일대 도서관의 장서수는 1,000여 권이었던 것이 오늘은 1,100만 권이 되었다. 모스크바대는 1,800만 권, 미국의 국회도서관은 3,000만 권을 보유하고 있다. 미국 정부 출판소가 1년에 출판하는 서적만도 10만 권이 넘는다. 작년 일년간 세계에서 간행된 과학,기술에 관한 논문만도 1,400만 종이 넘는다. 특히 컴퓨터의 대중화로 지식은 보편되고 있으며, 지식이 없으면 노동도 못하고 무기로 작동할 수 없는 시대에서 우리는 정보의 홍수 속에 살고 있다.

3) 지식의 무지혜화

여기에 역설이 있다. 지식의 증가에 역비례하여 사람은 지혜를 잃고 있다. 지식이 늘수록 사람은 점점 더 우매,우둔해지고 있다. 한국을 포함한 모든 사회는 점점 더 격심한 내분,혼란,범죄 등으로 얼룩지고 있다. 영국의 시인 하우스맨(Alfred Housman)의 말과 같이"지식을 얻고도 덕을 잃은-knowledge gained and virtue lost'현상이 오늘의 모습이다. 영국의 시인 코우퍼(William Cowper)는 "지식과 지혜는 같은 것이 아니다. 지식은 타인들에 관한 많은 생각을 하는 반면 지혜는 지식의 마음을 살펴서 얻어지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불교에서는 智(jnana)를 사물의 여실상을 바로 보는 눈,혜(慧)(Prajna)를 사념을 버리고 정을 택하는 마음으로 본다. 이런 견지에서 우리는 "지헤는 지식을 잘 선용할 수 있는 방법을 아는 지식"이라고 말한 소크라테스의 정의를 이해할 수 있다. 원자력을 예로 들어보자 1941년 미국의 맨하탄 프로젝트는 적어도 15,000여 명의 고급 두뇌를 집결하여 4년간의 노력으로 핵분열을 성공했고 드디어 원자탄을 만들었다. 하지만 그 가공한 힘을 인류는 선용하지 못해 왔다. 오늘도 북한당국은 핵폭탄 생산을 위해 광분하고 있지 않은가? 광도에 투하됐던 폭탄의 수만 배의 놀라운 파괴력을 가진 폭탄으로, 현재 강대국들이 보유하고 있는 것만 가지고도 인류를 30회 파멸할 수 있다고 하는데... 정치학이 그렇게 발전해도 세계각국의 정계가 혼란을 계속하고 있다. 경제학자의 수가 늘어나도 경제사정이 말이 아니다. 사회학의 발달이 사회안정을 가져오지 못하고 심리학자 자신들이 미쳐가고 있지 않은가? "지식은 덕과 연결되지 않을 때 악의 도구가 된다"라고 말한 플라톤의 명언이 기억된다. "지식이 변질되면 이미 지식이 아니다"라고 한 리톤(Bulwer Lytton)의 말이 기억된다. "성실성이 결여된 지식은 위험하고 무서운 기술이 된다"라고 한 존슨(Samuel Johnson)의 충고를 우리는 되새겨야 한다. 지식이 참 지혜와 연결되지 못할 때 그 지식은 오히려 무지만도 못한 악의 수단이 될 수 있다.

4) 이데올로기교육의 초극

지식시대의 도래에도 불구하고 교육이 지혜를 창출하지 못하고 역기능을 노정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그 원인이 너무나 다원적이기 때문에 단답을 말하기는 쉽지 않다. 하지만 이에 대한 성서적 해답은 너무나 확실하다. 잠언 1:7은 "야훼를 두려워하여 섬기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다. 어리석은 자는 교육을 받아 지혜로와지는 것을 멸시한다"라고 말씀한다. 그렇다. 여기에 오늘의 문제가 있다. 오늘의 교육은 탕자와 같이 그 근원에서 떠나 제멋대로 인간중심 세계관의 이데올로기적 방향에 따라 방황해 왔다. 미국의 교육은 듀이(John Dewey)의 프라이그메티즘이 말하는 실용주의의 가르침을 퓨리탄 전통보다 더 중시한 데에 오늘의 문제가 있다. 부름(Allan Bloom)의 [미국정신의 폐쇄성]이 말하는 "상대주의 절대화"가 하나님을 배제했고,60년대 학교에서 기도가 금지된 이후의 모습은 문교성의 [위기의 한 나라-A Nation at Risk]에 잘 나타나 있다. 소련의 레닌주의가 교육에 미친 해독은 이데올로기의 강요로 인한 학생들의 창의력 상실을 가져왔고 그 결과 소연방의 붕괴를 초래하고 있지 않은가.고르바쵸프의 저서 [페레스트로이카]도 이것을 시인하고 있다. 일본의 교육개혁이 80년대에 시도되었지만 그것을 주도한 인사중 한 사람인 나고야대학의 와다나베 총장은 "개혁 노력에서 얻은 결론은 새 방향을 아직 찾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라"고 나에게 실토한바 있다.

우리나라의 교육도 예외일 수 없다. 해방 후 남북간의 이데올로기적 대립은 남한으로 하여금 반공이데올로기,그 후 유신이데올로기 교육 등으로 점철되어 왔다. 북한에서는 공산이데올로기를 거쳐서 지금은 주체이데올로기 교육으로 민중의 생각이 오도되어 왔다. 이런 이데올로기교육의 배후에는 집권층과 기득권자들의 숨은 목적이 도사리고 있음도 자명하다. 이런 인본주의적 정치이데올로기의 강요는 학생들의 건전한 사고를 저해했고 바른 인격형성에 걸림돌이 되었다. 이제 이데올로기시대는 종언을 고하고 있다. 원래 ideology란 낱말은 프랑스 혁명 당시,혁명정권이 당톤 등의 중간파에서 로베스피엘 등의 극좌파를 좌경했다가 1974년 테르미돌 반동으로 우서회하는 혼란을 보고 트레이시(Destutt de Tracy)가 조어한 말이었다. 곧 인간이 이성을 갖고 미래사회의 비전을 이념화하여 역사 속에 구체화하면 지상에 유토피아를 건설할 수 있다는 주장이었다. 이런 견지에서 보면 19세기-20세기는 '이데올로기시대'였음이 자명해진다.

그러나 인본주의적 이데올로기가 브르진스키의 명작 [거대한 선패(先敗)]로 끝날 것을 예언한 저서는 1960년 출간된 벨의 [이데올로기의 종언]이었고 1979년 시카고에서 출판된 제 저서의 타이틀도 [이데올로기의 超克-Beyond Ideology]이었다. 이제 이데올로기가 종언된 오늘날 한국의 교육지표는 무엇이 되어야 할까? 1885년부터 우리 교육부는 교육정객의회를 활발하게 움직였다. 지금은 중앙교육판의회가 그 사업을 맡고 있다. 여러 가지 개혁안들이 논의되었다. 교육안의 과감한 증액,실험중심 과학교육,교사들의 처우개선,평생교육,대학입시 개선, 교과교사 양성,행정의 민주화 등등... 모든 중요한 과제들이다. 그러나 진정한 인간교육이 이뤄지지 않으면 이 모든 개혁이 기대하는 효과를 가져오지 못한다. 그러면 어떻게 지식과 지혜를 동시에 가르치는 인간교육을 할 수 있을까? 여기에서 인간중심 세계관이 말하는 어떤 이데올로기를 주입하기 위한 교육은 이미 무효함이 드러났다. 3공시절의 국민윤리교육도 미흡하다. 그러면 이데올로기시대가 종언한 오늘날 어떤 방향의 지표가 '참교육'을 가능케 할 수 있을 것인가?

5) 하나님 중심 세계관의 교육

모든 지식과 지혜의 근원이신 하나님 중심으로 교육이 돌아오지 아니하면 참된 인간교육이 이뤄질 수 없다. 그렇다면 기독교학교의 사명은 지대하다. 하나님께 대한 신앙은 종교적이고 추상적이다. 그러나 가장 현실적이고 구체성을 가지고 있다. 하나님을 신앙할 때만이

(1) 자연관-자연을 무시무종(無始無終)한 영원한 실재로 보고 경배의 대상으로 삼지 아니하고 피조물로서 인간의 이해의 대상으로 보게 되며,

(2) 인간관-자연의 일부로서 미생물로부터 진화한 동물이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대로 특별하게 창조된 인격을 가진 존재,그러나 원죄를 지닌 생애(a living soul)로 보게 되며,

(3) 자연을 약탈과 파괴의 대상이 아닌 관리의 책임을 인간이 가진 것을 알게 되며,

(4) 역사관-역사는 하나님의 시간 속에서 사람을 소명(calling)하여 섭리하는 곧 시작(origin),과정(process)과 목적지(goal)가 있음을 알게 된다.

곧 하나님 중심 세계관은 자연관, 인생관,역사관뿐 아니라 물질관,가정관,사회관,정치관,선악과,교육관 등 모든 '관'의 근본이 된다. 이런 관들이 바르게 성립되어야 사람이 바르게 사물을 판단하고 바르게 행동할 수 있다. 나의 주장이 비현실적으로 들릴지 모른다. 하지만 기독교교육에서는 국어 과학,역사,사회 등 모든 과목의 밑바닥에는 하나님 중심 세계관을 기초로 한 자연관,인간관,사회관,가정관,역사관 등을 학생들의 마음에 심어주는 노력이 있어야겠다는 주장을 강하게 되풀이하고 싶다. 지금까지 그런 교육을 안했다는 말이 아니라 더욱 강화해야겠다는 말이다. 지금 미국에서도 13개 대학이 "기독교신앙과 학문"을 연계시키기 위한 consortium을 조직하였고, 또 82개 대학이 같은 목적으로 coalition을 조직하여 성서와 역사,성서와 심리학,성서와 생물학등이 교재를 개발했다.

6) 하나님 중심 세계관교육의 사례

우선 하나님중심의 과학교육,사회,역사교육의 사례만을 간략하게 소개하고 한다.

A) 하나님 중심 세계관과 과학교육
근대과학사상이 어떻게 서구문명에서 배태되었을까?
이 질문에 대한 명확한 해답을 얻기란 불가능하다. 현대과학의 기원은 그보다 더 옛날로 소급하여 볼 때 수 없이 많은 원인들이 교호작용을 일으켜 왔으며, 그 모든 원인들을 가려내어 상호작용 과정을 기술하기란 너무나 어려운 과업이기 때문이다. 이런 견지에서 쿤(Thomas Kuhn)의 [과학혁명의 구조(The Structure of Scienific Revolution)는 매우 유익한 시사점을 우리에게 준다. 쿤에 의하면 과학은 사실(facts)에 근거를 두는 것이 아니라 파라다임(paradigm-어형변화례와 같은 가설의 모델)에 기초하고 있다고 한다. 과학자는 자기가 머리 속에 이미 지닌 파라다임을 통하여 사물을 보고,분석하고,연구하여 결론을 도출한다. 천동설을 믿는 중세의 과학자들과 지동설을 믿는 근세의 과학자들은 같은 현상을 보는 시각이 달랐으며, 이어서 그들이 발견한 과학적 지식도 큰 차이를 보였다. 쿤에 의하면 파라다임은 과학학설이 아니다. 그것은 검증 가능의 어떤 가설 혹은 법칙에 유사한 일반론(law-like generalization)이 아니다. 파라다임은 과학적 이론의 방향과 의미를 부여하는 기본이다. 쿤의 파라다임이론은 여러 면에서 도전을 받아왔지만 그 근본이 아직 흔들리지 않고 있다고 보여진다. 과학자들에게 있어서 파라다임은 자연을 관찰하는 눈,곧 넓게 보아 세계관과 유사한 내용을 가졌다. 그것은 자연계에 관한 여러 기본가설들을 조직적으로 종합한 큰 가설로서 한 사회의 대다수의 과학자들이 의식적 또는 무의식적으로 공유하는 것이다. 이런 견지에서 보면 한 문명의 과학발전은 그 민족이 가진 세계관과 밀접한 상관성을 가지고 있다고 보여진다. 고대 이집트,메소포타미아,중국 문명 등은 수학,의학,천문학 등의 발달에 큰 기여를 하였다. 하지만 그들의 세계관은 자연중심적이어서 자연을 이해의 대상으로 연구하기 보다는 오히려 숭배의 대상으로 생각하거나 혹은 자연의 신비로운 힘에 압도되었기 때문에 고대문명들의 과학적 기여는 지대했지만 과학을 체계화하지 못한 연유도 그런 체계를 탄생시키고 받들 만한 세계관적 기반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보여진다.

성서적 세계관은 과학정신을 발전시키는 데 어떤 공헌을 했는가?
모리스(Henry Morris)는 "전적으로 현대과학은 기독교 신론(Christian theism)으로부터 성장했다. 왜냐하면 효과적 과학연구는 의식적 혹은 무의식적으로 성서적 세계관을 그 바탕으로 하기 때문이다. 원인은 같은 결과를 초래한다는 사실,자연현상은 우리가 지성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자연법칙을 기본으로 하고 있다는 사실 등을 자명한 이치로 확인시켜주고 있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물론 이런 주장은 성서만이 과학사상을 발생시킨다는 말이 아니다.기독교물리학,기독교생문학,기독교과학,기독교수학 등이 있을 수 있다는 말도 아니다. 예컨대 모세는 위대한 하나님의 사자였지만 그가 화학자,물리학자,생물학자였다는 말은 할 수 없다. 그가 당대의 천문학자,수학자보다 더 많은 천문학적 혹은 수학적 지식을 가졌다는 증거는 더욱이 없다.

단지 여기서 주장되어야 할 점은 하나님중심 세계관은 과학적 연구를 촉진하는 지적 풍토를 조성한다는 역사적 사실이다. 자연중심 세계관과 같이 자연을 숭배의 대상으로 보는 오류를 범하지 않고 동시에 인간중심 세계관과 같이 인간이 자연을 마음대로 파괴,약탈해도 된다는 오만을 가지지 않고, 자연을 이해와 진리탐구의 대상으로 보고 연구하는 정신풍토를 만들기 때문에 과학이 발달할 수 있다는 주장이다. 하나님중심 세계관은 사람에게 주어진 지능을 잘 개발하면 사람은 자연을 다스리는 능력을 생리적으로 소유하고 있다는 자신감을 우리에게 준다.

그러므로 영국의 수리철학자 와이트헤드(A.N.Whitehead)는 과학의 체계화가 될 수 있다는 확신을 서구인들이 가지게 된 배경은 그들이 의식적 혹은 무의식적으로 성서적 세계관을 받아들이게 된데서 연유했음을 지적하였다.

이런 견지에서 볼 때 현대과학의 출현이 16세기 종교개혁시대와 일치한다는 사실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중세의 자연관은 비성서적 미신과 잘못된 자연관을 전통으로 가득하였다. 르네상스의 휴메니스트들이 그런 자연관을 깨기 시작했고 당대의 예술가(특히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경우와 같이),또는 과학자들이 자연현상을 보다 엄밀하게 관찰,조사하기 시작했지만 체계화된 과학을 탄생시키는 데는 미흡했다. 그러나 종교개혁이 시작되면서 성서적 하나님중심 세게관이 재확립되고 그에 따라 자연관,인간관 등이 바르게 수립되면서 과학연구의 정신적 기반이 확고하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B) 하나님 중심 세계관과 사회.역사교육(1)
기독교 세계관이 근대적 자본주의 경제체제 탄생에 어떤 영향을 끼쳤느냐에 대한 학계의 논쟁은 오랫동안 지속되어 왔지만 아직도 쟁점이 많이 남아 있다.특히 베버(Max Weber)의 명저([프레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이 1905년에 출간된 후 이 문제에 관한 논쟁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어디서 어떤 동인에 의해 근본적 자본주의 제도-회사,공장,은행,노조,시장 채권, 주식,보험,사회보장 제도 등이 무수히 포함되어 합리적으로 운행되는-가 성립됐을까? 자본주의제도가 단순하게 이윤의 극대화를 위한 경쟁이라면 고대문명들이 그것을 이미 수천년 전에 발전시켰을 것이 아닌가?이윤추구는 사람의 욕심에 근거한 것이며 모든 경제활동은 이기심의 근대화에 근거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부자를 자본가라고 부르지 않는다.

어찌하여 근대적 자본주의 제도가 서구문명에서 탄생했을까?
베버는 자본주의 기원을 연구한 결과 그것이 마르크스가 유물사관에 이야기하는 것같이 모든 경제가 필연적으로 도달하는 경제발전의 단계가 아니라 서구사회가 지녔던 어떤 정신 위에서 발생했음을 지적했다. 자본가는 단순하게 돈이 많은 사람이 아니라 돈을 열심히,정직하게 벌고 그것을 재투자할 뿐 아니라 유익한 사회복지를 위하여 바칠 수 있는 사업가를 지칭한다고 말했다. 역설적 이야기지만 자본주ㄹ를 받드는 정신은 탐욕이 아니라 금욕주의인 것이다. 금욕주의와 연게성을 발견한 데서 베버의 위대성이 있다.

하지만 자본주의가 필요로 하는 금욕주의는 고행을 통한 단순한 금욕생활이 아니다. 인도에도 그런 형의 은둥자들은 얼마든지 있었다. 하지만 인도의 금욕사상이 자본주의를 탄생시키지는 못했다. 자본주의의 밑바탕이 되는 금욕주의는 사업가가 가지는 소명의식과 연계가 되어야 한다. 사업가가 자기의 욕심을 만족시키기 앞서 자기자신에게는 인색하면서도 공익을 위해선 관대한 마음가짐 곧 사업을 사명으로 여기고 헌신하는 정신이 요청된다. 베버는 그런 소명의식의 기초를 기독교 신앙에서 찾았다.

프로테스탄트의 교리를 연구한 결과로 얻어진 결론은 칼빈(John Calvin)의 예정론이 자본주의의 기업정신을 뒷받침하는 정신적 지주가 되어 왔다는 사실도 깨달았다. 칼빈신학에 있어서 예정론은 주된 교리가 아니다.오히려 칼빈의 예정설은 그의 주된 주장이었던 하나님의 절대주권설에서 추론된 필연적 결론이었다.

개인은 우연하게 지상에 탄생된 것이 아니라 그 출생부터가 하나님의 영원한 예정이 실현된 것이며 태어날 때 이미 창조주의 선물(gift)로서 재능(talent)받은 것이며,사람은 이 재능을 개발하여 직업(vocation,Beruf)를 선택한다. 그러나 직업은 단순하게 먹고 살기 위한 방편이 아니라 하나님의 소명이다.

직업에는 귀천이 있을 수 없다. 사농공상의 여러 직업이 고하가 있는 것이 아니라 모두 평등하다는 것이다. 그럴진대 상업에 종사하는 이른바 '장사꾼'이 교회의 목회자보다 천한 직업일 수가 없다. 여기에서 상인의 사회적 지위가 고양되는 결과가 나타난다. 상인과 목회자가 하나님의 소명을 받은 직업이라는 데는 동등하다.

여기에서 직업윤리(work ethic)가 생긴다. 상인은 장사를 할 때 고객을 속이지 않고 양심적으로 바르게 상행위를 하게 된다. 상행위에 도덕성이 부여되어 윤리적 상업풍토가 이뤄진다. 기타의 모든 직업인들도 직업을 먹고 살기 위한 수단이 아닌 하나님의 소명을 위한 헌신(a form of devotion unto God)이 된다. 이런 경제윤리가 지배하는 경제계는 발전하지 않을 수 없다.

성경이야말로 경제구조를 바르게 수립하고 그것을 발전시키는 원동력이 될 수 있었다. 하나님중심 세계관을 가지고 자연을 바로 보고,물질을 관리하는 일은 경제의 정신적 초석을 놓는 결과를 가져온다. 하나님을 중심하는 생활을 할 때 바른 (1) 자원관,(20노동관,(3)물질관,(4)분배관) 등이 수립될 수 있기 때문이다.

C) 하나님중심 세계관 사회.역사교육(2)
하나님 중심 세계관은 정치적인 면으로도 권력의 비신성화(desacraliza -tion)을 일으킨다. 고대문명들 가운데 그리이스를 제외한 대부분의 나라들이 민주주의를 발전시키지 못했던 가장 큰 원인은 왕권이 신성시된 데 있었다. 예컨대 이집트의 바로는 라(Ra) 신의 후예로 신봉되었기 때문에 그의 권위는 불가침적으로 신성시되었다. 중국의 천자는 '하늘의 아들'로서 자연계,인간계,영계를 조화있게 조절하는 천부적 능력을 가졌던 것으로 믿었다. 인도의 왕들도 역사를 섭리하는 비시뉴(Visnu) 신의 후예로서 그들의 대권은 도전받을 수 없는 절대성을 가지고 있었다. 로마의 황제들도 역시 신적 존재로 숭배되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출애굽기야말로 민주주의 시발점으로 보는 것이 사실과 더 가까울 것 같다. 출애굽기 사회야말로 민주주의 효시를 다음 몇가지 점에서 우리에게 보여 주었다.

첫째,모세가 이스라엘민족의 지도자로서 이집트의 바로에게 항거한 것은 정치권력의 비신격화를 위한 민권혁명이었다고 볼 수 있다. 하나님의 창조를 믿는 모세에게 있어서 바로는 신적존재가 아니라 '보통사람'과 같은 유한성과 죄성을 지닌 인간에 불과했다. 통치자가 한 민족을 노예로 혹사함은 하나님의 뜻에 어긋난다고 모세는 믿었던 것이다.

둘째,출애굽기는 인간의 자유가 사람의 생명과 견줄 가치를 지녔음을 보여 주었다. 애굽에서 노예생활을 할 때에는 최저의 경제생활이 보장됐지만 사막을 통하여 홍해를 건너 광야를 헤매었던 '민족해방'의 과정은 그때까지 가졌던 모든 것을 버려야 하는 위험이 수반되었다. 하지만 자유롭게 산다는 것은 어떤 위허을 감수하면서도 얻어야 할 소중한 가치가 있는 것임을 보여 주었다.

셋째, 평등사상이나,출애굽기 사회는 만인평등의 사회였다. 모세는 자기의 권력을 신격화하지 않았다. 자기가 율법을 선포했으면서도도 그 법을 어겼을 때, 그 결과로서 가나안 복지에 들어갈 수 없었다. 법 밑에 평등이라는 철저한 민주사상을 몸소 보여주었던 것이다. 법보다 높아지는 통치자가 인정되는 사회에서는 결코 민주주의가 실현될 수 없음을 보여준 것이다.

넷째, 계약사상이다. 모세의 율법은 일반적 명령이 아니었다. 십계명을 행할 때,그 결과로 혜택을 받은 것은 그것을 지키는 사람 자신이었다. 또 그것을 지키는 사람을 축복하겠다는 하나님의 약속과 그것을 지키겠다는 사람의 약속이 계약 형태로 나타났던 것이 모세의 율법이며,이 계약사상은 후일 루소 등의 민약론(民約論)이 바탕이 되었다. 이제 (1) 권력의 비신격화,(2) 자유사상,(3)평등사상,(4)계약사상 등이 "하나님의 형상"로 창조된 인간존중사상과 합쳐질 때,민주주의 제도가 탄생될 수 있었다. 기독교적 진리가 정치이념의 근간을 이루어서 (1) 권력의 비신격화, (2) 자유신장 (3) 평등사상의 실현, (4) 계약사상의 존종,(5)인권사상의 향상 등이 추구되면 그만큼 민주주의 상관성을 발견할 수 있다.

7) 맺는 말

2000년을 앞 둔 현재의 특징은 역사변동의 가속화,총체적 변화,지구촌 변혁,질적인 역사변동,이와 같은 현상은 이데올로기 대립시대를 종식시키고 "영적,위기''정신적 공허'로 위기의 시대를 표출시켰다. 한국의미래도 불확실하다. 영적 위기와 정신적 공백에서 비롯된 한국 미래의 위기에 대한 대응은 어떤 비젼과 희망을 선택하느냐에 달려 있다. 그것은 하나님 초석으로 내면화되어 개인적으로 집단적으로 하나님나라를 신장하는 일이다. 이런 시점에서 기독교교육의 특이한 사명이 재확인되어야 한다.자연가학,인문,사회과학,예.체 등의 모든 과목들을 가르침에 있어서 하나님 중심 세계관이 그 기본이 되어 학생들이 하나님 중심 자연관,인생관,가정관,사회관,물질관,과학관,기술관 등을 내면화할 수 있도록 하어야 지식과 지혜를 모두 갖춘 인격형성이 이뤄질 수 있다. 서기택 교장선생님의 말씀과 같이 하나님의 말슴이 바탕이 되지 않는 인간교육은 결코 성사할 수 없다. 이제 이데올로기시대가 종언한 오늘 곧 모든 교육체제가 지표를 잃고 있는 오늘날 하나님 중심 세계관 교육은 과거 어느 때 보다도 그 효력을 나타낼 수 있을 것으로 믿는다. '하나님 중심 세계관 교육'을 통하여 이룩된 과학발전,경제사상,정치안정에 개인적 집단적,민족적차원의 하나님 나라 신장만이 미래사회의 도전 속에 한국교회가 대응할 수 있는 길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