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세례

본 문 : 마태복음 3:11-17
고린도전서 13장 13절은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고 합니다.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야 말로 인간생활 속에 가장 중요한 영혼과 정신세계의 자양분입니다. 과연 믿음, 소망, 사랑없이 인간다운 생활을 영위할 수 있을까요. 인간이 인간다운 삶을 누리지 못하고 벌거숭이 생활을 하는 것은 이 세가지의 결핍해서 오는 병증들입니다. 이것은 소원해서 가져지는 것이 아닙니다. 힘쓰고 애써서 가져지는 것이 아니고 수단 방법을 강구해서 가져지는 것도 아닙니다. 인간의 자력으로는 가질 수 없다는 말입니다. 믿음, 소망, 사랑은 성령안에서 주어지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선물은 댓가로 받는 것이 아닌 거저 얻는 것이기 때문에 아무나 가질 수 없습니다. 여기에 인간의 고민이 있고 괴로움이 있습니다. 인간의 뜻이 아닌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할 때에만 이 선물을 가질 수 있습니다. 성령님은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선물입니다(행 2:38). 하나님은 그 "성령으로 믿음을 좇아 의의 소망을 기다리게 (갈 5:5)" 하시며 "성령의 능력으로 소망이 넘치게(롬 15:13)"하십니다. 우리는 "성령의 사랑으로(롬 15:30)" 서로 사랑하고 "성령으로 기뻐해야(마 10:21)"합니다. 예수님이 그러하셨으니 우리도 그러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성령을 주십니다(요일 3:24). 우리는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아야(엡 5;18)"합니다. 성령이 없으면 그리스도인이 아니며(롬 8:9) 그리스도인이 성령님을 떠나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문제는 우리가 어떻게 성령을 받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 귀중한 열쇠가 본문에 있습니다. 세례요한은 11절에서 "나는 너희로 회개케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주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요" 하였습니다. 본문은 예수님이 세례 받으신 장면을 말씀합니다. 그러나 세례가 주제는 아닙니다. 예수님의 세례를 통하여 하나님의 성령 주실 것을 약속하시는 귀중한 구절입니다. 그래서 본문은 성령의 장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본문을 통하여 인간생활에 영원한 자양분을 공급해 주시는 성령님을 어떻게 받을 수 있는 것인지 그 귀중한 교훈을 배워 보시도록 하십시다.

첫째, 예수님이 받으신 세례의 의미를 알아 보십시다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말에 의하면, 여리고의 동쪽 요단강의 한 여울에서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셨다고 합니다. 그곳은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하여 건넜고 그 후에 엘리야와 엘리사가 건넜던 바로 그 부근이라고 합니다. 나사렛으로부터 약 300리 떨어진 곳입니다. 예수께서는 요한에게서 세례를 받으시고자 나사렛을 출발하셨습니다. 300리의 여정이 결코 짧은 것은 아닙니다. 더구나 교통의 소통이 원활하지 못하던 때인 것을 생각해 보십시오. 당시 교통편의의 수단인 나귀나 낙타를 타는 것은 부요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은 필경 도보로 여행하셨을 것입니다. 주님은 요한의 설교를 듣기도 전에 세례 받으실 채비를 하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신 것은 요한의 설교를 듣고 그의 설교에 설복되어 결정하신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세례가 하나님의 의라고 하셨습니다. 의는 사람의 영향으로 말미암는 것이 아닙니다. 세례요한은 광야에서 설교하고 있었습니다. 마가복음 1장 4절은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요한의 설교를 듣고 감복한 많은 사람들이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 때에 예수님께서 세례요한 앞에 오셔서 세례주실 것을 요구 하셨습니다. 세례요한은 잠시 당황하였습니다. 즉시 세례 베풀기를 주저하였습니다. 오히려 자신이 예수님께로부터 세례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습니까. 전에 세례요한은 회개하고 죄 사함 얻기 위하여 세례 받으려고 자신 앞으로 나오는 사람들 중에서 세례 받기에 합당치 못한 사람들을 본 적이 있습니다.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입니다. 그들의 죄는 너무도 중하여서 세례 받을 자격이 없다고까지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꺼려했습니다. "이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우리는 3장 7절에서 세례요한의 노호(怒號)를 기억합니다. 지금은 경우가 다릅니다. 이제는 자신이 베푸는 세례가 예수님께는 합당치 않다는 것을 발견한 것입니다. 세례요한은 예수님의 무죄하심을 알고 있습니다. 죄 없으신 예수님은 세례 받으실 필요가 없습니다. 오히려 죄인인 자신이 예수님께로부터 세례를 받아야 할 것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것은 성령으로 인한 세례요한의 통찰력의 결과일 것입니다. 그러나 누가복음이 전해주는 뉘앙스에 의하면 세례요한은 예수님이 어떤 분인 가를 알고 있었던 것으로 전해집니다. 세례요한의 가정과 예수님의 가정은 아주 친밀했습니다. 30여년 전에 이 두 사람의 탄생에 얽힌 비화들은 두 사람 다 전해 듣고 있었을 것입니다. 성령으로 예수를 잉태한 마리아가 유대의 한 산중에 있는 세례요한의 어머니 엘리사벳을 방문했을 때에 뱃속의 세례요한이 꿈틀거리며 태속의 주님을 영접한 사실이 있습니다. 세례요한은 예수님이 자기의 친척이고, 자기보다 비록 여섯 달이 늦기는 하지만 자기의 출생 사건보다 더 놀라운 출생 사건을 통하여 태어나신 분이고, 어렸을 때부터 이미 성경에 능통하셨고, 그가 살아오신 생애가 자기를 능가하고 있다는 사실들을 헤아려 볼 때에 자신이 예수에게 세례를 베푼다는 것은 수치스러운 일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세례요한은 자기가 예수에게서 세례 받아야 할 것으로 알았고 또 그것은 도리에 맞기도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자신에게서 세례 받으시겠다고 한 것은 이해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여기서 세례요한이 쓰고 있는 말을 보면 세례 그 자체와 그 세례를 베푸는 사람과 받는 사람을 대조하고 있음이 틀림없습니다. 이것은 세례요한이 베푸는 세례에 대하여 자신이 잘 이해하고 있다는 뜻도 됩니다. 그렇습니다. 회개하고 세례 받으라고 해서 무조건 세례 받는다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성경 몇 줄 외우고 기독교 교리에 대하여 무엇 좀 안다고 하여 세례 받을 자격이 생기는 것도 아닙니다. 세례를 베풀라고 하신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그에 합당한 믿음을 가지고 그에 합당한 회개를 한 뒤에 그에 합당한 고백을 통하여 세례 받는 자리에 나아가야 합니다. 세례를 받으시겠다는 예수님께 대하여 그를 막으며 반문한 세례요한의 질문은 잘한 것입니다. 그것은 지금도 요긴합니다. 예수님께 마치 죄 있는 사람과 같이 아무런 설명도 없이 세례를 베풀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만약 이런 반문의 기회없이 아무 설명도 않고 무조건 세례를 베풀었다면 오늘날까지 예수님이 죄 없으신 분이라는 주장에 매우 난처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따라서 세례라는 의식 자체가 귀중한 교리가 되어 버리고 말았을 것입니다. 이 사실은 우리 자신들에게도 적용됩니다. 물론 우리들은 죄인이지만 무엇 때문에 세례 받는 것인줄도 알지 못한채 세례의식 자체에 매달리는 꼴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예수님은 세례요한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허락하라" 이 말은 이미 예수님이 세례요한에게 무엇인가 납득할 만한 말씀을 하셨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예수님이 세례요한에게 무엇을 말씀하셨는지 우리는 모릅니다. 또한 성경이 말하지 않는 것을 구구한 추측으로 이론을 만들어 낼 필요도 없습니다. 그러나 세례요한이 충분하게 납득하고 세례를 베풀었다는 사실은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 이 말씀 속에서 우리는 중요한 몇개의 단어를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우리]라고 하는 말입니다. 세례는 베푸는 사람이나 받는 사람이 세례의 의미를 충분히 납득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모든 의]라고 하는 말입니다. 세례 속에는 하나님의 모든 의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오늘날 이 말에 심한 반발을 일삼는 사람들이 있거니와 아무리 성경이 자기들의 구미에 맞지 않고 이미 세워놓은 이론에 맞지 않다고 할지라도 성경의 진리는 변경시킬 수 없습니다. 셋째는 [이루는 것이 합당하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세례라고 하는 의식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세례속에 포함되어 있는 하나님의 모든 의에 순종하는 행위라는 것을 암시합니다. 이 사실을 깨달은 세례요한은 예수님께 물속에 깊이 잠기게 하는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둘째, 예수님이 세례 받으신 후에 어떤 일이 일어 났습니까
예수님은 세례요한에 의하여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세례요한은 더 이상 자신이 예수님에게 세례를 베풀 자격이 없다는 등의 고집을 피우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진리를 깨달은 사람의 태도입니다. 진리는 이론이 아닙니다. 진리는 순종을 요구할 뿐입니다. 누구든지 그것이 옳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진리입니다 하고 인정한다면 곧 그 진리대로 순종해야합니다. 진리는 지식에 머물러 있지 않고 곧 행동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세례요한이 예수님께 세례를 베풀고 물에서 올라 오실새, 이제까지 수많은 세례를 베풀면서도 경험하지 못했던 놀라운 사실이 발생했습니다. 하늘이 열렸습니다. 여러분 하늘이 갈라지는 것을 보신 적이 있습니까. 신약성경에는 하늘이 갈라지는 모습을 본 사람들이 여럿 있습니다. 최초의 순교자 스데반이 하늘이 갈라지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의기양양하게 순교했습니다. 하늘이 갈라질 때에 하나님 보좌 우편에 서서 순교자 스데반을 축복하시며 순교의 영광을 잃지 않도록 끝까지 격려하시는 주님의 모습이 보였습니다. 예루살렘의 망나니 사울도 하늘이 갈라지는 것을 보았습니다. 진리를 알지 못한채 저희의 전통적인 종교의 교리와 믿음만이 제일인줄 알고 그리스도인들을 해치기를 좌충우돌하던 사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이 경험을 했습니다. 해 같이 빛나는 주님을 바라보고서는 그만 꺼꾸러진채 사울은 영원히 죽고 새 사람 바울로 살아났습니다. 그 후에도 그는 삼층천의 하늘까지 달려가 보는 엄청난 경험을 했습니다. 열 두 순교자들의 영광의 면류관 속에서 오직 홀로 끝까지 살아서 그리스도의 메신저로서의 자기의 사명을 다했던 사도요한도 하늘이 갈라지는 것을 보았습니다. 나무 한그루 풀 한 포기 살 수 없는 북해의 고도 바윗섬에서 사도요한은 갈라진 하늘 사이를 왕래하는 경이로운 경험을 했습니다. 이런 모든 것들은 평범한 상태가 아닌 진리와의 싸움에서 얻은 전리품들입니다. 오늘날도 비상한 영적 진리의 싸움에서 승자에게 주는 상급은 하늘이 갈라지는 것을 보는 경험입니다. 하늘이 갈라지고 하나님의 성령이 예수님 위에 내려 오셨습니다. 그것은 비둘기의 형상과 같았습니다. 성령님은 삼일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신이십니다. 신이신 성령님은 인간의 눈으로 볼 수 없습니다. 볼 수 없는 성령 하나님을 볼 수 있도록 역사하셨습니다. 그것이 비둘기 같이 내리시는 성령이십니다. 성령은 비둘기가 아닙니다. 따라서 비둘기의 형상도 아닙니다. 성령을 비둘기 형상으로 표시해서 섬김의 표상으로 삼고 있는 것은 잘못입니다. 강대상에나 중요한 기독교 표식의 문신용으로 비둘기 형상을 사용하여 성령으로 대치하는 것은 큰 잘못입니다. 이것은 우상을 섬기고자 하는 마음으로부터 기인한 것입니다. 혹여 이런 유혹을 받는 분들이 있다면 자신의 신앙을 냉철하게 판단해 보고 올바른 진리에 서는 믿음을 가져야할 것입니다. 그것은 비둘기 같이 보였을 뿐입니다. 눈으로 볼 수 없는 성령님을 비둘기 같이 보이시게 한것은 비둘기로 이해시키려 하심이 아닙니다. 거기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세례를 받으면 이와 같이 성령을 주신다는 표식입니다. 그렇다면 주님 자신도 세례를 받아야만 성령을 받으실까요. 아닙니다. 세례요한은 주님을 성령으로 세례하시는 분이라고 소개했습니다. 주님 자신도 당신이 성령을 보내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이것은 세례를 통하여 성령주시는 주님의 약속을 주님 자신이 친히 모델이 되어 우리에게 본으로 삼아주신 것입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사실입니까. 세례가 그렇게도 중요합니까. 그렇습니다. 세례는 중요합니다. 세례는 주님의 모든 의를 우리에게 입혀주시는 약속의 의식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받으신 세례는 회개를 요구하는 죄 사함의 세례가 아니었습니다. 주님은 죄 사함 받을 필요가 없습니다. 애초에 죄가 없으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주님이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세례에는 죄 사함 외에도 또 하나의 약속이 있습니다. 성령을 선물로 받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 승천하신 후에 오순절을 당하여 사도들은 약속하신 성령을 받았습니다. 성령으로 세례를 받은 그들의 제 일성은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행 2:28)"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그리고 이 약속이 성취되는 것이 구원입니다.
세례 받는 것과 성령 받는 일은 별개의 사건이 아닙니다. 그것은 동시적입니다.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 오실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같이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 여기 [물에서 올라 오실새] 하신 표현은 강 언덕으로 올라 왔다는 말이 아닙니다. 물속에 잠기었다가 물 밖으로 나왔다는 뜻입니다.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즉시 물에서 나왔다는 사실 뿐만 아니라 성령의 내리심도 역시 즉각적이었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예수님의 세례와 성령님의 내리심은 본래 같은 이야기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 말씀은 동시적인 사건으로 해석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어디서나 물과 성령이 동시적인 것으로 나타내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3장 5절은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하였습니다. 물은 세례이고 성령님은 이 세례받는 것과 동시적인 사건속에 개입하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에베소서 5장 26절은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여기 물로 씻었다는 것은 세례를 말합니다.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신 것은 성령으로 중생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이해가 더딜지라도 우리는 하나님 말씀의 공식에 감탄할 줄도 알아야 합니다. 요한일서 5장 7절에서 성령은 진리라고 했습니다. 요한복음 17장 17절은 진리가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여기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신 것이 성령중생이라는 사실에 저항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것을 병행구인 디도서 3장 5절이 더 분명하게 말해줍니다.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이라고 했습니다. 중생의 씻음은 세례를 말합니다. 세례중생을 부정하는 많은 사람들에게는 미안한 노릇이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바꿀 수는 없습니다. 중생은 물의 세례와 동시적으로 이루어 지는 성령이 임하는 사건입니다. 이 놀라운 사실을 예수님은 그의 전도의 시작에서 예시하십니다. 성경은 오직 세례를 통하여 성령을 받는다고 말합니다. 누구든지 세례 받는 사람이 성령을 받습니다. 그 영이 그 안에 있는 사람을 성경은 그리스도인이라고 합니다(롬 8:9). 그리스도인은 성령을 좇아 행해야 합니다(갈 5:16). 성령을 소멸해서는 안됩니다(살전 5;19). 오직 성령의 가르치신 것으로 하고(고전 2:13),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으로 순종해야(벧전 1:2)합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성령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고 그 성령 주시기를 기뻐하십니다. 그러나 한가지 슬픈 것은 성경의 진리도 모르고 그리스도의 약속의 말씀에 순종하지도 않은 사람들이 성령 받았다고 자천하는 것입니다. 교회에 출석한다고 해서 그리스도인은 아닙니다. 어떤 영적 능력들을 행한다고 해서 성령의 은사는 아닙니다. 오늘날은 거짓 영들의 역사가 많은 기적들을 행사하고 있다는 사실에 스스로 경각심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지금은 성령의 능력들을 행사하는 때가 아니라 성령의 열매를 나타내어야 할 시기입니다. 추수 때가 가까왔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위하여 늘 하늘 문을 여십니다. 예수님의 전도를 시작하실 때에 하늘이 열렸고 전도 사역을 다 마친 후에도 그를 영접하시려고 하늘 문을 여셨습니다.
지금도 하나님은 말씀대로 순종하여 세례를 받으면 하늘 문을 여시고 약속하신 성령님을 주십니다. 그리고 기쁘게 말씀 하십니다. "이는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누가 세례받지 아니하고서도 죄 사함을 받으며 성령을 받을 수 있다고 주장할 수 있겠습니까. 오직 믿고 세례를 받아야 구원을 받습니다(막 16:16). 믿음으로 회개하여 세례 받고 성령을 선물로 받았으면 성령을 소멸치 말아야 합니다. 성령 안에서 행하여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열매맺는 성도들이 되어야 합니다. 아직 세례 받지 못한 교인이 있으면 지금 회개하고 세례를 받아야 합니다. 그리하여 성령을 선물로 받고 새 생명 안에 사는 그리스도인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1992. 2. 2. -설 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