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전도

본 문 : 마태복음 4:12-22
하늘에는 두 개의 태양이 있을 수 없습니다. 만약 두 개의 태양이 경쟁하듯 하늘을 밝히고 있다면 어떤 일이 생기겠습니까. 지구상의 모든 생태계는 균형을 잃고 파괴를 초래하고 말것입니다. 달이 아무리 밝아도 해만큼 밝을 수 없고 해가 뜨면 달은 빛을 잃기 마련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그렇게 정하여 놓으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신 일은 실수가 없고 하나님은 모든 일을 완전하게 하십니다. 세례요한의 전도의 말기는 예수님 전도의 초기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위하여 하시고자 하는 일은 일방적인 방식으로 "전파하는 일"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알고 있듯이 세례요한의 일이었습니다. 이 때에 또한 예수님이 전파하기 시작하셨는데 그 메시지는 세례요한이 전한 것과 같았습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3:2, 4:17)" 이것은 이 세상나라가 온전히 주와 그리스도의 나라가 될 때까지 전파되어질 주제입니다. 세례요한이 이 주제를 가지고 회개를 촉구하다가 잠잠하게 되었습니다. 저절로 사그라진 것이 아닙니다. 권력자들의 압박에 의하여 옥에 갇히고 그의 입이 침묵을 강요 당한 것입니다. 누가복음은 세례요한에 대하여 이렇게 기록합니다. "또 기타 여러가지로 권하여 백성에게 좋은 소식을 전하였으나 분봉왕 헤롯은 그 동생의 아내 헤로디아의 일과 또 그의 행한 모든 악한 일을 인하여 요한에게 책망을 받고 이 위에 한가지 악을 더하여 요한을 옥에 가두니라(3:18-20)" 세례요한이 옥에 갇혔다는 소문이 들렸습니다. 더 이상 말씀을 전파할 수 없게 된 사정을 아신 주님은 그의 사역을 위하여 자리를 뜨셨습니다. 광야에서 돌아와 갈릴리로 들어 가셨습니다. 이것은 세례요한이 예견한 일이었습니다. 예수님께 세례를 베푼 후 세례요한은 자기의 사명이 달빛과 같음을 깨달았습니다. 그 자신이 메시야의 길을 예비하려 온 자라고 했습니다.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요 3:30)" 달빛은 해가 뜰 때까지만 유효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세례요한의 사명의 비중에 있지 않습니다. 그의 전파하는 주제에 있습니다. 예수님이 하신 일은 태양과 같으나 그것은 단순히 세례요한의 자리를 대신한 것에 불과합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사명을 과소평가하려는 것이 아니라 세례요한의 메시지를 반복하는 복음의 영원성에 있습니다. 달이나 해는 빛을 비추는 것이 본래의 사명입니다. 달빛의 사명을 가진 세례요한이나 햇빛 같이 역사하신 주님의 사역이 다 같이 하나의 사명 곧 복음을 "전파하는" 일이었습니다. 여기에 우리의 감탄이 있고 우리의 감사가 있습니다. 해가 뜨면 달의 사역은 끝나는 것입니다. 어둠을 비추는 것은 빛입니다. 달빛이 진하여 햇빛이 될 때에 어둠은 더 이상 자리할 곳이 없습니다. 드디어 어둠은 물러가고 광명천지가 될 것입니다. 세례요한이 그 사명을 마칠 때에 예수님이 일어나서 천국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우리는 이제부터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한 "전파하는" 사역을 시작하신 예수님의 초기 전도에 대하여 공부하시게 됩니다.

첫째, 가버나움은 전도의 전진기지였습니다(12-16)
우리는 바로 앞에서 40일의 굶주림에도 불구하고 사탄의 유혹을 이기고 승리의 개선가를 부르신 정복자로서의 나사렛 예수를 보았습니다. 이제 그는 빛으로 역사하심을 보게 됩니다. 주님은 더 이상 광야에 계실 수 없습니다. 세례요한을 통하여 사막에 대로를 만드신 하나님은 그 고속도로를 통하여 예수를 도시의 세계로 내몰았습니다. 그러나 잠간! 성경은 우리를 어리둥절하게 합니다. 예수님이 돌아가신 곳은 번잡한 도성이 아니라 한적한 갈릴리였습니다. 그곳은 길을 벗어나 있었고 시골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자라나셨던 곳 나사렛으로 돌아가신 것입니다. 이것은 대단히 특기할 만한 일인 것처럼 보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세례요한과 같은 위대한 선지자에게 경배를 받은 후에(3:14), 하늘 그 자체로부터 공개적인 입증을 받은 후에(3:16-17), 광야에서 최고의 적대자를 이긴 후에(4:1-10), 누가 이 위대한 이스라엘의 임금이 "이방의 갈릴리"로 물러나리라고 생각인들 하였겠습니까? 갈릴리는 예수님 당시 사마리아 북쪽에 있던 팔레스티나의 한 도(道)였습니다. 본래는 갈릴리 호수 서쪽 납달리 산악지대의 지방 이름이었습니다. 열왕기상 9장 11절에 보면 솔로몬이 히람에게 준 20개의 성읍들의 지경으로 국한되어 있는 곳입니다. 포로 귀환 후에 점점 유대인의 증가와 인종의 혼합으로 새로운 방언이 생겨나기도 하여 갈릴리의 방언은 누가 들어도 단박에 알 수 있을만큼 그 액센트가 독특했습니다. 갈릴리는 그 당시 인구가 꽤 많았지만 유대인은 소수였고 주로 페니키아인들, 아랍인들, 헬라인들로 이루어졌습니다. 디베랴, 가버나움, 나사렛 등의 마을이 있었는데 주님 생애의 대부분은 이곳에서 보내셨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 중에서 가룟 유다를 제외한 대부분이 이곳 출신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일단 조용하고 한적한 시골로 물러 나셨습니다. 그것은 주님의 겸손을 보이신 것입니다. 또한 장차 큰 일을 위한 휴식과 준비 기간으로 삼으신 것입니다. 때가 차매 주님은 스불론과 납달리 지경 해변에 있는 가버나움으로 가셨습니다. 가버나움은 갈릴리 호수의 북서 해안에 있습니다. 지금도 가버나움의 정확한 위치에 대하여서는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습니다. "나움의 촌"이라는 뜻을 가진 이 지명이 구약성경에는 기록이 없는 것으로 보아 포로기 이후에 사용되어진듯 싶습니다. 신약성경은 예수님께 대하여 이 가버나움을 "자기 동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마 9:1). 예수님은 여기 저기 다니시는 여행의 여가에는 가버나움에서 사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고향으로 알려진 것입니다. 가버나움은 갈릴리 바다의 해안입니다. 설사 실제로 해안에 있지 아니하였을지라도 게네사렛의 아름다운 평야의 변두리 근방에 있었습니다. 호수의 깊은 침강(沈降)은 해안을 두른 그 평지에 남부의 온화한 기후를 조성시켜 줍니다. 예수의 시대에 이곳은 종려나무와 감람나무가 무성하였습니다. 과원과 포도원과 푸른 들판과 화려하게 만발한 꽃들이 벼랑에서 떨어져 부서지는 냇물의 급수를 받고 자랐습니다. 좀 떨어진 곳에 그 호수를 두른 언덕들이 푸른 빛을 띠었고 바다에는 고기를 잡는 배들로 뒤덮여 있습니다. 그야말로 한폭의 그림과 같이 아름다운 곳입니다. 여기에 바쁘고 활동적인 생활의 움직임이 약동하고 있었습니다. 가버나움 자체는 예수 사업의 중심이 되기에 매우 적합한 곳이었습니다. 이 도시는 다메섹에서 예루살렘과 이집트및 지중해에 이르는 대로상에 있었습니다. 이 고속도로를 따라 여행의 왕래가 매우 빈번했습니다. 여러나라에서 오는 사람들이 이 도시를 지나가면서 휴식을 취하기에 안성맞춤이었습니다. 실지로 이곳은 국제적인 휴양지이기도 했으며 번화한 유흥가가 형성되어 있기도 했습니다. 이런 이유들로 인하여 이곳에서는 모든 민족들, 모든 계급의 사람들, 부자와 위인과 가난한 자와 미천한 자 세리와 창녀 등을 무론하고 다양한 사람들을 만날 수가 있었습니다. 주님의 교훈과 기쁜 소식을 다른 나라들과 그들의 가정에 전하기에 가장 용이한 곳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주님은 이곳을 그의 전도의 전진기지로 삼으신 것입니다. 주님은 이곳을 주목하여 예언의 말씀을 상고하셨습니다. 그 말씀은 이사야서에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과 요단강 저편 해안 길과 이방의 갈릴리여 흑암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비취었도다" 성경은 복음을 큰 빛이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이 예언은 갈릴리 뿐만 아니라 모든 세계 어둠의 땅에 응할 예언이기도 합니다. 이방의 갈릴리는 가버나움을 중심으로 해서 사방에 흩어져 있는 지역들을 의미합니다. 이곳은 성경이 예언한 어둠의 땅기도 합니다. 각국의 여행객들이 왕래하는 중요한 상업의 중심지로서 지나치게 분주하고 많은 사람들이 사는 곳입니다. 휴양하기 좋은 연안도시로서 홍등가가 즐비하고 자기들의 잇권을 챙기기에 여념없는 사람들이 갖은 죄악을 빚어내고 있었습니다. 당시 죄인의 대명사로 불리우는 직업을 가진 사람들, 예컨데 장사꾼, 관세를 받는 세리들, 홍등가의 여인들, 권력으로 짓누루려는 정치부로카, 이런 사람들 밑에 깔려 있는 계몽되지 못한 무지한 주민들, 그들이 흑암 가운데 있는 백성들로 서술되기에 마땅합니다. 그래서 그 지역은 사망의 그늘이 드리운 곳입니다. 바로 여기에서부터 영원한 생명을 주는 복음의 큰 빛이 비쳐오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전도는 각종 죄악의 사람들이 구토해내는 냄새와 오물로 얼룩진 곳에서 그 생명의 빛을 발하게 됩니다. 서울은 각색 인종의 쓰레기장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그 한복판에 살고 있다면 우리는 예수의 복음을 전하는 빛의 전달자로서의 사명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둘째, 예수의 전도는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다는 것입니다(17)
대개 세례요한의 전도 기간은 6개월에서 1년 사이로 잡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세례요한이 전도를 시작한지 6개월쯤 지나서 그에게 세례를 받으신 것으로 계산됩니다. 주님은 세례를 받고 광야로 나가서 마귀로부터 단련을 받으신 후 나사렛으로 돌아 가셨습니다. 주님은 나사렛에서 즉시 가버나움으로 가서 전도를 시작하신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이 나사렛에서 얼마를 머무르셨는지 우리는 모릅니다. 그러나 그 기간이 단시일은 아닙니다. 주님은 상당 기간 나사렛에서 가버나움 전도를 계획하고 준비하셨습니다. 전도는 시급한 일입니다. 온 천하를 주고도 바꿀 수 없는 생명을 구원하는 일이니 지체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조급하게 서둘러서는 안됩니다. 돌다리도 두드려 보고 지나가는 조심성과 아는 길도 물어서 가는 여유가 있어야 합니다. 모세의 80년 준비와 연단의 기간을 교훈 삼으시기 바랍니다. 40년은 세상 지식을 쌓고 40년은 하나님 앞에서 인격을 연마했습니다. 전도는 지상의 명령입니다. 그리스도인 최고의 사명입니다. 그러나 경거망동해서는 안됩니다. 먼저는 무엇을 전할 것인지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어떻게 전할 것인지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주님이 그렇게 하셨습니다. 먼저 한적한 나사렛에서 그 전도를 준비 하셨습니다. 그리고 자리를 옮겨서 번잡한 가버나움에서 전도를 시작하신 것입니다. 주님은 비로소 입을 열어 말씀하셨습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 이 메시지는 새로운 것이 아닙니다. 이미 세례요한이 입이 닳도록 써먹은 것입니다. 우리 같으면 어떻게 했을까요. 내용을 바꾸었을 것입니다. 방법도 바꾸었을 것입니다. 청중들의 귀에 산뜻하고 새롭게 들릴 말을 준비했을 것입니다. 세례요한보다 더 어필하고 권위있어 보이고 능력있어 보이는 말로 대체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같은 말을 하셨습니다. 그것은 주님의 겸손이 아닙니다. 복음의 내용이기 때문에 하나님 자신이라도 바꾸지 아니하실 것입니다. 바울도 말하기를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갈 1:8)" 하였습니다. 한 입으로 두 말을 할 수 없습니다. 어느 것 하나는 거짓 말일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전도자가 복음의 내용을 자꾸 바꾼다면 그것은 거짓 사도입니다. 그런데 우리 주변에는 이런 변신에 능통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오늘은 이 말을 하고 내일은 저 말을 합니다. 성경이 귀에 걸면 귀고리가 되고 코에 걸면 코거리가 됩니다. 사람의 지식과 사상에 따라 이런 해석도 되고 저런 해석도 됩니다. 오늘은 이런 능력의 칼을 휘두르고 내일은 저런 능력의 칼을 휘드릅니다. 오늘은 이런 방법이 계발되고 내일은 저런 방법이 계발됩니다. 과연 청중을 끌고 재물을 ㄲ어내고 권위를 높일 수 있는 일이라면 수단과 방법에 구별이 없습니다. 이런 장광설에 현혹되어 아멘을 외치고 할렐루야를 연호하고 종교적인 희열을 맛보려고 고열에 들뜬 사람처럼 눈동자가 희번뜩거리는 신자라면 과연 "하나님이 오늘날까지 저희에게 혼미한 심령과 보지 못할 눈과 듣지 못할 귀를 주셨다 함과 같으니라(롬 11:8)" 하신 말씀을 이해할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우리의 주변에 이런 현실들이 수없이 도사리고 있음을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오직 성경이 말하는 것은 말하고 성경이 잠잠한 것은 잠잠하여 복음외에 다른 말을 해서는 안됩니다.

셋째, 예수님은 제자들을 택하셨습니다(18-22)
세례요한은 제자들을 택하여 가르쳤습니다. 예수님도 제자들을 택하셨습니다. 세례요한을 본 받으셨을까요. 결코 그렇게 생각되지 않습니다. 세례요한의 방법이 하나님의 방법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바라보는 사람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만 합니다. 사람의 비위나 그 요구에 맞추려고 애쓰지 않습니다. 우리 중에 어떤 전도자는 새로운 교회에 부임하면 전임자가 했던 목회방침을 하루 아침에 모두 뜯어 고쳐 버립니다. 자기 의향에 맞지 않아서 하는 것도 있지만 그렇게 해야 새로 온 전도자의 권위가 서는 일로 아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 결과 교회는 분란이 일어나고 불화가 가득차게 됩니다. 그것은 사람의 지혜도 아닙니다. 예수님은 갈릴리 해변에 다니시다가 베드로라고 하는 시몬과 안드레를 만나셨습니다. 그들은 어부였습니다. 바다에 그물 던지는 것을 보시고 "나를 따라 오너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19)" 그들은 그물을 버려두고 예수를 좇았습니다.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도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주님이 요구하시는 사람은 제사장들처럼 교만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학자들처럼 이론가도 아니고 정치가 같은 모사도 아닙니다. 문학자 같은 감상주의 인물도 아니고 다만 진실하고 질박한 사람이라야 합니다. 주님은 외모를 보시지 않습니다. 그러나 여기 선택된 네 사람이 모두 그렇게 진리에 열정을 가진 질박한 사람들만은 아니었습니다. 이들은 본래 세례요한의 제자들이었습니다. 세례요한이 예수를 메시야로 증거할 때에 옛 선생을 배반하고 그 때에 예수를 따라왔던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예수를 좇기 위하여 부모 처자 사업을 다버리고 일심으로 예수만을 따라다닌 사람들도 아니었습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매우 고약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배신자요 유유부단하고 멍청하고 무식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소위 우리 식으로 말하면 과연 예수를 좇아서 얻을 것이 있을런지 통박을 재기에 급급한 사람들었습니다. 근 일년이 되도록 그들은 예수의 제자의 흉내만 낼 뿐 여전히 바다에 가서 고기잡고 그물을 깁는 본래의 사업에 더 열중하던 자들입니다. 과연 저런 사람들이 무엇을 할 수 있을런지 믿기워지지 못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도 저것들을 제자라고 소망을 버리지 않고 그들이 손들고 돌아 오기만을 기다리며 인내하시는 주님의 모습이 되려 안타깝기만 하던 그런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누가복음 5장에 보면 밤새 고기잡이에 헛수고했던 그들이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깊은 바다로 가서 그것도 한 낮에 그물을 내렸으나 그물이 찢어지도록 고기가 잡힌 사건을 보고(눅 5:1-11) 비로소 주님의 제자로서 결단을 내렸습니다. 그들은 부모와 처자와 배와 그물을 그대로 버려두고 맨손으로 주님의 제자의 길을 좇은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소명은 돌연적입니다. 그리고 그 소명을 받은 자는 일각이라도 지체할 수 없게 됩니다. 이것은 마치 국가의 출정 명령을 받은 군인이 촌각도 지체할 수 없음과 같습니다. 부모와 처자를 다 버리고 싸움터로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여기 베드로를 위시한 네 사람이 비로소 이런 사람이 된것입니다. 우리 중에 혹시 그리스도인으로서 발동이 늦게 걸린다고 해서 제 소명의 사실을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다고 해서 멸시하고 무시해서는 안됩니다. 주님이 오래 참고 기다리시듯이 하나님은 지금도 회개하는 한 사람을 위하여 오래 참고 기다리시는 것입니다. 세례요한은 갔습니다. 그는 가되 메시야의 대로를 충분하게 닦아놓고 갔습니다. 제 할일을 다하고 간것입니다. 달빛은 지고 의의 태양이 떠올랐습니다. 우리 주님이 친히 전도의 일군이 되셨습니다. 그는 세례요한이 외치던 그 말을 외쳤습니다. 아무도 예수를 앵무새라고 하지 않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세례요한의 제자를 당신의 제자로 삼았습니다. 아무도 예수가 세례요한의 것을 탈취했다고 말하지 않을 것입니다. 아! 이렇게 완벽하게 하나님의 일을 한 세례요한이 부럽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세례요한의 제자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어야 합니다. 세례요한이 "전파하는" 자였고, 예수님이 "전파하는" 분이셨다면 우리에게도 오직 "전파하는" 일만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복음을 전하는 그리스도인의 사명을 다하는 거룩한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 드립니다. 1992. 2. 16 - 설 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