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 장. 광 야

1. 이야기의 배경

예수의 광야 40년 시험에 대하여 알아두어야 할 몇가지 예비지식이 있다. 이 시험에 대한 기사가 어떻게 4권의 복음서에 모두 기록되었는가?예수님은 사람이 보이는 곳에서 멀리 떨어진 광야에서 사탄에게 시험을 받으셨다. 이 40주야를 예수님은 혼자 계셨다. 그런데도 이 이야기가 복음서에 기록되었다. 뿐만 아니라 이 기사는 생생하고 자세하게 기록되었다. 이 이야기를 어떻게 기록할 수 있었을까? 다만 한가지 분명하게 알 수 있는 것은 이 이야기가 예수님의 입으로 부터 친히 전해졌다는 사실이다.

그림 : 유대광야 : "그때에 예수께서 성령에게 이끌리어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러 광야로 가서 40일을 밤낮으로 금식하신 후에 주리신 지라 시험하는 자가 예 수께 나아와서 가로되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이 떡덩이 가 되게하라"(마4:13). 이것은 새벽에 촬영한 것으로 명암이 드러나 황량한 분위기를 잘 보여준다. 역사적으로 이러한 사막이나 산에서 위대한 지도자 들이 많이 나왔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이 사실을 이야기한 목적을 알아보아야 한다. 그 사실은 다른 사람들은 알 수 없도록 베일에 가리워진 사실이었다. 예수님은 그 지나간 이야기를 왜 모든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을까? 물론 누구의 호기심을 만족시키기 위한 것은 아니다. 또한 예수님의 전기를 호화롭게 하기 위하여 만들어 낸 한토막의 창작도 아니다. 따라서 복음서에 어떤 호의적인 사건을 제공하는 장으로 나타난 것도 아니다. 다만 이 문제에 대하여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두가지 이유가 있다.

마 4:1-11 시험받으시는 예수님

첫째 예수님은 이 이야기를 제자들에게 들려 줌으로 제자들도 그와 같은 시험을 받을 경우에 그를 본받아 그린 시험을 극복하게 하기 위하여 말씀하신 것으로 생각한다.

우리의 경험으로 보아도 어떤 사람이 자기가 겪은 어려운 시험을 극복한 이야기를 다른 사람에게 들려 주었을 때 그 이야기를 들은 사람에게 매우 유익한 교훈이 될 수 있다. 고로 예수님께서도 자기의 경험담을 제자들에게 이야기하심으로 그들의 신앙 생활에 도움이 컸을 것이다.

둘째로는 그의 40주야 격렬했던 투쟁이 그의 영혼에 기록된 영원한 표적이 되었기 때문에 이 사실은 예수님으로서는 덮어둘수 만은 없었을 것이다. 그 일을 회상할 때마다 그것은 어제 있었던 일처럼 분명하게 기억될 것이다. 거치른 들판 황량한 땅에서 홀로 외롭게 바위와 돌 틈에서 괴로움을 견디는 그 몸에 낮에는 오직 작렬하는 태앙이 그 온몸을 따갑게 하고 어둠이 깃들면서 부터 차가운 공기가 쇠약한 그 몸에 생기를 더욱 잃게하고 주린 짐승들의 울부짖음이 더욱 공포와 불안과 괴로움을 더하여 주었고극도에 달한 기아 현상을 이용하여 사탄은 극히 동정적이고 부드러운 음성으로 예수의 영혼에 유혹의 화살을 연달아 던지는 순간에도 예수님은 하나님의 은혜와 그를 이곳으로 인도한 천사들의 응원으로 이 시험을 이길 수 있었음은 참으로 잊어 버릴 수 없는 사건이었으며 따라서 그는 이 대사건을 제자들에게 말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다음으로 이 시험에는 어떤 뜻이 포함되어 있는 가를 살펴보자.

이 시험의 사실은 한치라도 과소 평가할 수 없는 사건이다. 이 사실을 강력하게 부각시키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 시험에 대하여는 하나의 문학적인 창작 기사이지 결코 우리가 일상 생활에서 경험하는 바사실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예수란 인물을 높이 평가하게 하기 위하여서도 이렇게 논리를 비약 시키고 있다.[만일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었다면 그는 언제나 아무런 고투 없이 바른 일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에게는 내면적인 정신적 고통 같은 것이 없었을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정말 그렇게 생각할 수 있을까? 아무런 노력 없이 다만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만으로 어떤 시험이든지 마음대로 훌륭하게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예수님께 영광을 돌리는 한면도 된다. 그러나 그보다는 어떤 어려운 일을 땀과 피로써 싸워 이겼다고 하면 그것이 더욱 자신을 영광스럽게 하는 일일 것이다. 전복음과 우리의 구원의 희망은 [모든 시험을 이기신 그리스도]와 긴밀한 관게를 가지고 있다. 그는 어떤 특수한 환경에서만 이기는 것이 아니라 여러가지 시험을 우리들처럼 받으셨다(히4:15).

이 극적인 사건이 상징적으로 기록되었다. 다만 우리가 분명하게 알아야 할 것은 이 사건이 전혀 예수님의 내적인 경험이라는 것이다(어린이들을 위하여 그린 그림처럼). 예수님 뒤에 시꺼먼 날개를 가진 거대한 마귀의 모양이 사실로 나타나지는 않았다. 우뚝한 어느 바위 위에 머리를 숙이고 맞잡은 두손은 긴장해 있고,조심스럽게 무릎을 꿇고 얼굴은 하늘을 향하여[오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하며 고통스러워 하시는 겟세마네 동산의 외로운 고투의 모습을 이 시험 장면에서 상상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고난의 장면을 무의미하게 바라 볼 수만은 없다.[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히2:18)한 말씀은 예수께서 광야에서 당하신 고통을 생각하면서 기록한 말이다.

이제 이 시험을 받으신 시간의 문제다. 이 시험은 언제 있었는가? 그때는 예수께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신 직후였다. 이 점이 이 사건을 이해하는데 상당한 도움을 준다. 세례를 받으실 때 일어난 일이 그로 하여금 광야로 나가서 시험을 받게 했다고 생각할 수 있다. 요단강 하류의 어느 장소에서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음성이 그의 심중에 부딪쳤기 때문에 그는 즉시 메시야의 능력을 스스로 깨닫게 되었다. 이 황홀한 발견을 그 몸에, 그 마음에 지닌 채 물에서 올라오셨다. 그리하여 그의 앞에 전개된 이 새로운 사실은 그에게 시험하는 자를 나타나게 했다.메시야의 이 권능,새롭고도 굉장히 큰 이 능력을 어떻게 사용할 수 있을까? 여기에 나타난 것이 사탄의 세가지 시험이다.

2. 첫째 시험과 (영육의 대결)

빈들에서 지낸 40주야의 금식과 고독의 생활, 기도와 명상으로 정력을 소모시킨 긴 기간이 지나간 어느날,그에게도 가장 절박한 한 욕망이 그를 괴롭혔다. 시장하다는 그것이다. 이 주림을 무엇으로 채울 수 있을까 하는 자문에의 대답으로 빠른 속도로 마귀가 그에게 제공하는 것은 [이 돌들로 떡을 만들면 되지 않겠느냐?]하는 것이었다.

이 시험은 세 곳의 진지로부터 집중되는 포격이다. 첫째, 그가 처음으로 가진 메시야의 능력이라는 것이 진지가 되어 공격 당하게 되었다. 메시야의 능력이야 말로 돌로써 떡을 만드는 그까짓 일쯤은 넉넉히 할 수 있지 않은가?그러니까 한번 시험해보라, 분명히 이 능력의 비상함을 사실로 증거하기 위하여 그 능력은 상상이나 꿈 이상의 힘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하나님의 아들! 너는 위대한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냐? 자 시험에 보아라 그 능력의 효과를 나타내 보일 가장 좋은 기회가 아닌가? 자 여기 돌들이 많이 있지 않느냐" 명령해라, 그것들이 떡이 되도록] 사탄은 이렇게 유혹했다.

둘째로 그가 해야할 사업이 색다른 진지로부터 공격을 받고 있었다.하나님은 당신의 일을 하시기 위하여 예수를 세상에 보내셨다. 앞으로 그가 해야 할 큰 사업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하나님이 아시는데.. 이 빈들에서 주려 죽어서야 되겠는가?만약 여기서 죽는다면 하나님의 위대한 계획은 수포로 돌아가지 않겠는가? 그리고 그렇게 되면 예수 자신이 하나님을 실망시키지 않겠는가 세상에서 해야할 일,인류의 구원사업과 하나님의 나라를 그 위대한 사명을 위하여 우선 육체적인 수난을 피해야 할 것이 아닌가? [돌로 떡을 만들어 그 수난을 피하라]고 유혹했다.

세째로 예수는 사람을 사랑한다는 입장에서 공격을 당하였다. 이 주림의 사실은 빈들에서 금식하고 있는 예수에게만 닥쳐온 사실이 아니다. 로마의 치하에 압박을 당하고 있는 약하고 가난한 유대백성 전체가 양식이 없어 굶주리는 형편이었다. 만일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주림에 허덕이는 백성들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돌로 떡을 만들어 우리에게 나누어 주면 좋지 않겠는가? 이 기적의 요구는 예수자신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그가 전도사업을 하는 동안 유대땅 방방곡곡에서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다 필요한 일이기 때문에 그의 지상 운동은 육체를 먹이는 일까지 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리고 이렇게 그 육체의 문제를 해결해 주면 예수를 떠나서는 먹을 것을 얻을 수 없는 줄 알기 때문에 배신자가 없을 것이 아닌가? 이렇듯 친밀한 관계로 우리들의 인망을 얻은 후에 하늘나라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면 그 효과가 적중하지 않겠는가?

먼저 이 땅위에 천국을 건설하고 그리고 나서 하늘의 낙원을 건설하는 것이 정당한 순거가 아닌가?[사람을 사랑하는 증거를 돌로서 떡을 만들어 먹이므로 구체적으로 보여 주라]고 사탄은 말하고 있다.

사탄은 매우 교묘한 존재였다. 그럴듯한 말로 예수를 꼬였다. 얼핏 생각하면 사탄의 말을 듣는 것이 옳은 것 같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그 유혹에 속지않고 [노우]라고 거절 하셨다. 그 거절의 이유로서 우리는 다음의 두가지를 들 수 있다.

그가 만일 사탄의 권고를 수락했다고 한다면 그가 만일 육체의 요구대로 돌로 떡을 만들어 먹고 피곤한 육체가 새힘을 얻어 광야를 떠나서 활발한 기상으로 거리에 나타나 많은 사람들을 만났다고 한다면 그리스도는 고통과 결핍의 재난으로 신음하는 우리들과는 영원히 만날 수 없는 존재가 되어 버리고 말았을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향하여 이런 찬양의 노래를 부를 수 없었을 것이다.

우리의 고통을 알아주시고 우리의 괴로움을 함께 느끼시는 주님의 모습이 지금 보이네 그의 눈물과 안타까이 부르짖는 음성이 지금도 공중에서 들려오누나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영원한 우리의 형제가 되시고 동지가 되시려고 사탄의 유혹을 물리치셨다. 사탄을 물리친 또 하나의 이유는 그는 사람들의 영혼을 구원하시러 세상에 오셨고, 다른 사람의 비위나 맞추기 위해서 아첨하러 오시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예수님은 우리들의 물질적인 요구와 필요성, 그리고 사회적인 환경과 조건에 대해서 무관심한 분은 아니시다. 그는 인류사에 기록된 어떤 개혁자나 정치가 자선가 보다도 사람들의 육체적인 문제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신 분이시다. 육체의 조건을 몸소 느끼는 제자들 보다 오히려 더 적극성을 가지신 분으로서 인간의 빵문제에 이르기까지 그렇게 적극적인 관심을 보이신 분은 지금까지 다른 곳에서 찾아볼 수 없다. 지금 우리에게는 생활하기에 편리한 주택, 아름다운 환경, 그리스도의 정신으로 화한 사회의 질서까지 해결된 사실을 본다. 이상적인 사회와 개인은 오로지 그리스도의 정신으로 부터만 온다는 것을 우리는 안다.

그러나 우리가 여기에서 문제시하는 중요한 것은 예수님이 비록 이땅에 사는 사람들을 위하여 지상 천국을 몸소 이루시고자 하는 간절한 욕망을 가지고 계시기는 하지만 그 자신이 돌로서 떡을 만들어 먹으라는 사탄의 유혹에 대하여는 단순히, 거절하셨다. 그 이유는 그가 세상에 오신 목적이 사람에게 아첨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로 하여금 자기에게 나오도록 하는데 목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사람에게는 그 육체가 느끼는 주림과 목마름 이상으로 더 깊고 더 강한 심령의 주림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계셨다.영혼의 주림을 채우는 길은 빵이나 물질이 아니다. 그것은 다만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 하나님 자신이 우리에게 주시는 그 자신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로서 우리 영혼의 주림을 채울 수 있다.

3. 둘째 시험(인망의 유혹)

둘째번 시험 역시 매우 의미심장하다. 광야에서 유혹을 물리쳤다 하여 사탄이 영원히 물러가 버린 것이 아니었다. 그에게는 우리와 동일한 인간성이 뚜렷이 현존하고 있었기 때문에 사탄은 그의 일생에 한번만 찾아오지 않았다. 여러차례 찾아와서 현세적인 찬란하고 황홀한 광경으로 그를 매혹 시키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하필이면 십자가에 못박혀 죽어야 하다니 웬말입니까? 선생님 하는 제자 한 사람은 이렇게 간곡히 애원했다.(마16:22) 여기에서도 현세적인 아름다움과 안일로 그를 시험하였다. 이때에 예수님께서는 큰소리로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고 단호하게 외치셨다.

이 시험이야 말로 모든 긴장들이 무력하게 될 정도로 강력한 것이었다. 그뿐 아니라 이와같은 시험은 다시 갈보리 산상에서 심각하게 대두되었다. 십자가에 매달려 참을 수 없는 인간적 고통을 경험하고 있을 때[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십자가에서 내려 오라](마27:40)는 조롱이었다.

시험에 져서 물러간 사탄은 그 한번에 물러가지 않는다. 기회만 있으면 꼭같은 시험을 계속 반복한다. 그래서 누가복음 기자는 [마귀가 모든 시험을 다한 후에 얼마 동안 떠라가니라] (눅4:13)고 기록했다. 이렇듯 반복되는 시험은 사탄의 가장 유능한 무기이므로 우리도 일상생활에서 이런 경우를 경험하고 있다.

이 둘째의 시험을 이해하기 위하여는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주야로 그의 지상생활의 사명과 그것을 이룩할 방법에 대한 문제를 심각하게 생각하고 계셨다는 사실을 우리는 예비지식으로 알아야 한다. 그는 하나님께서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자기를 보내심을 안다. 그러나 이 맡겨주신 사명을 어떻게 잘 감당할 수 있을까?그는 자신의 설교에 대한 반응을 더듬어 보았을 것이다.

무리에게 과연 납득이 잘되겠는가? 그 말씀의 반응이 효과적일까? 생각하면 할수록 그에게는 책임감이 무거웠을 것이다. 어느 길이 보다 효과적일까? 그가 상상의 날개를 이리 저리 펴고있을때 선뜩 나타난 존재가 사탄이다. 그는 이 기회를 포착하여 예수에게 보다 확실하고 효과적인 방법을 가르쳐 준다고 호언장담하였다. 하필이면 단조롭고 심심하고 무미건조한 방법으로 복음을 전할 필요가 있겠는가? 보다 극적인 장면,휘황찬란하고 매력적인 장면이 있지 않겠는가? 누가 보고 들어도 모두 감탄할만한 특별한 방법이 있지 않겠는가? 그런 방법은 얼마든지 있다. 계속적으로 속삭이면서 사탄이 그에게 제시해준 드라마틱한 방법 그것은 매우 높은 성전 꼭대기에 올라가서 거기에서 뛰어 내려도 머리털 한오라기 상하지 않는 기상천외의 모험을 보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번에도[노우]하고 거절하셨다. 왜냐? 그것은 마태복음에 기록된대로[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치말라](마4:7)하신 하나님의 말씀이 있기 때문이었다.

성전에서 뛰어내려 그 사실로 인망을 얻는 것은 하나님을 선회하는 방법이 아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얼굴과 강한 몸에 도전의 화살을 날리는 행위이다. 그런 행위를 예수님은 하실 수 없었던 그것이 곧 죄이기 때문이다.

만일 예수가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렸다고 생각해 보자. 과연 사탄의 말대로 효과적인 인망을 얻을 수 있었을까?지극히 적은 한 영혼을 구원의 자리로 인도할 수 있었을까? 물론 그 일이 뛰어 내린 직후에는 굉장한 박수 갈채를 받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박수갈채가 그들의 영혼과 예수를 영원토록 맺어 주는 줄은 될 수 없었을 것이다. 사람들은 언제나 상상 이상의 사건에 대하여 갈채를 보내는 습성이 있다. 그러나 구원의 문제는 상상할 수 있는 지능의 문제가 아니라 인격의 중심인 마음과 영혼을 움직이도록 충격을 주는데 있다. 고로 뛰어 내리는 것이 절대적으로 소기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다시 생각해 보자 예수님은 사람의 저급한 감정 민족이나 감상적인 인상을 주기를 즐겨 하시는 이는 결코 아닐. 갑자기 공중에서 큰소리로 그의 말씀을 전하고, 하늘의 발들을 갑자기 정지시키기도 하고 하늘에서 큰 불이 쏟아지게 하고 자연의 모습을 돌변시키는 따위의 신기한 행동을 하여 사람들의 인망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만이 아니라 일반 사람조차 그런 방식으로 하는 일이 절대적으로 종교에는 불필요하다는 것을 잘 안다. 이제와 같은 정신은 그리스도의 정신이 아니다. 헤롯의 정신이었다(눅 23:8).

끝으로 한가지 더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예수는 결코 인간의지의 자유를 거스리려 하시지 않았다.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 내린다는 것은 인간으로서 자유의지를 현장에서 꺾어버리는 행위이다. 정상적인 인간의 생각과 판단으로는 그런 일을 할 수가 없다. 신앙고백은 이런 표적을 시도하여 강제로 받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사탄의 유혹을 단호하게 거절하셨다. 만일 그가 자기의 진실한 사랑과 선으로 인간을 구원할 수 있었다면 사탄의 요구대로 요술을 부리고 기술이나 연기로써 구원사업을 성취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구원 사업은 어디까지나 진실한 일이다. 이 일을 완성시키는 방법도 진실하지 않으면 안된다. 사람이 자기 의지로 결정지어서 예수님에게로 온다는 일만이 진실한 일이다. 그래서 요한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볼찌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리로 들어가리라](계3:20).

4. 세째 시험(타협의 길)

이 시험 역시 예수님의 일생에 있어서 중요한 한면을 차지한다. 예수님의 일생의 목적은 이 넓은 하나님께로,세상 모든 나라와 그 영광을 하나님의 영광의 보좌에 연결시키는 일이다. 이 대사업을 성취하는 교묘한 방법론을 사탄은 다시 제공한다. 즉 가장 쉬운 길,가장 확실성이 있는 길, 신앙의 힘을 항상 감소시켜 세상의 세력을 얻는 좋은 길이 있다고 소근거렸다.[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고.[그렇게 하면 너의 꿈이 모두 이루어진다]고.

그러나 예수님은 이번에도 [사탄아 물러가라]고 호통을 쳤다. 소근 거리는 그 타협을 거절해 버렸다. 왜 그랬을까? 그 이유는 타협이라는 것은 종교의 주검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초대 교회는 일찍부터 주예수의 생애를 본받아 세워졌다.동방에서 일어난 종교가 대 로마에 들어오게 되자 다른 어떤 종교보다도 이 예수의 교도들은 심한 박해를 당하였다. 오시리스키벨, 또는 다른 우상의 종교들이 로마에 들어올때 그들은 모두 환영했었다. 그러나 팔레스타인에서 일어난 예수교라는 이름 없는 종교가 제국의 거리에 들어오자 마자 로마는 이 예수와 맞서 싸우려고 임전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왜 그런 현상이 일어나게 되었는가? 오시리스나 다른 종교는 로마인의 정신과 생활 풍습과 잘 타협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종교가 못박혀 죽은 일개 나사렛 청년 죄수의 이름으로 들어와서는 대 로마제국의 영광과 즐거움을 외면하고 독선의 길을 걷고 있었다. 빈들에서 시험을 받으실 때부터 예수의 종교는 [전체냐?아니냐?] 의 양단의 태도가 있을 뿐 타협이라는 것을 몰랐다.

예수님의 이러한 결단이 있던 때부터 그의 갈보리 고난의 길은 피할 수 없는 사정이었다. 비타협이 가는 길에는 언제나 십자가의 고난이 기다리고 있다. 로마제국의 기독교 박해는 그리스천들을 불태워 죽이고 동굴 속에 끌어다 감금시켜 놓고 원형극장에 끌어 내어 굶주린 사자들과 싸우게하는 잔인한 형을 내렸는가 하면 어떻게든 크리스천들이 스스로 그리스도를 비난하게 하기 위하여 되는대로 감옥에 감금시켰다. 그래도 기독교 신자들이 굴하지 않는 이유는 예수께서 광야에서 사탄과 더불어 타협하지 아니하시고 그 영광의 길을 피하여 십자가에 돌아가신 그 모습을 본받아 전 크리스천들은 로마 정부에 비타협적 태도로 맞섰던 것이다. 이 역사가 교회로 하여금 우리의 주 예수 그리스도처럼 무덤 문을 깨트리고 사망에서 승리하여 승리의 길을 걷게 한 이유였다. 사탄의 시험에 타협을 거절하신 예수님의 길은 참으로 어려운 길이었다. 그것은 지루한 길이요,희생이 요구되는 길이었다. 그러나 그 길만이 하나님께 충성하는 길이었기에 그 길을 택하셨던 것이다.

5. 실제적 결론 두개

이 시험은 우리에게 두가지 중요한 사실을 알려준다. 첫째로, 시험을 당하는 것은 죄가 아니다.사람들은 시험을 받을 때에 베드로나 요한처럼 쉽게 낙망해 버린다. 처음 예수님을 따를 때는 아름다운 꿈을 가지고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예수를 따라 나섰으나 한번 저들에게 고난이 부딪칠 때 저들 자신이 사도의 직을 가졌다는 사실조차 망각해 버리고 돌이킬 수 없는 죄를 범한 것같이 생각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자신이 시험 받으신 이야기를 들려 주신 다음부터는 그 염려의 가시는 그들 마음에서 뽑혀져 버렸다.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깨끗하고 숭고한 영혼을 소유하신 예수님, 또 그의 눈앞에 닥쳐올 견딜 수 없는 시험을 겪으시는 그 노고를 짊어지신 예수님은 단한번이지만 그러나 그 시험을 이기심으로 어떤 시험에서도 승리하실 것을 믿어지게 한다. 그러므로 오느날 우리가 여러모르 시험을 받고있지만 시험을 받는 그 자체가 죄가 아니라는 것을 우리에게 알려준다.

둘째로, 자기가 받으신 시험이 우리에게 어떤 효과를 주는가를 히브리 기자가 알려준다.[자기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을 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시나니(히2:18). 베드로와 요한, 그 밖의 다른 제자들은 예수님과 날마다 같이 살고 있다는 사실을 새로이 입증한다.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저들은 세상에 대한 애정을 끊어버리고 세속적인 사라가을 지양시켜 놓고 흠이 없는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바꾸어 그리스도가 걸어가신 길을 그들도 걸어갔다. 섬광처럼 빛나는 그리스도의 폭발적인 인격에 접하여 교제하므로 그들은 세상의 모든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꾸어 가고 있었다. 하나님의 승리만을 제공해 주는 그리스도의 위로는 저들의 약한 생활에 적용되어 제자들로 하여금 새로운 생기를 얻게하였다. 이 힘은 저들의 차디 찬 비인격적,비영감적인 도덕법규에 의거하지 아니하고 다만 찬란하고 화려하고 칭찬할만한 영혼의 사랑을 끝없이 계속하므로 그들에게 임한 것이다. [그리스도는 그들에게 있어서 영광의 희망이요 오직 그리스도만이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는 것을 고백하고 있었다. 이것이 어제나 오늘,그리고 영원토록 자랑할 수 있는 그리스도교의 중심이며, 그 심장이었다.

매일 성경


 야고보서  1:1-12   시험을 참는 자의 복
 마태복음  4:1-11   광야의 세가지 시험
 고린도 전서 10:11-21 타협의 길은 없다.
 마태복음 16:21-24  이후의 시험 26:36-41      
 베드로전서 2:19-25  무죄하신 예수
 히브리서 4:11-16    그의 형제들처럼 시험받으심
 히브리서 2:10-18    시험 받는 자들을 구하실 수 있음

 

토론을 위한 문제

1.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었다면 그가 받은 시험이 진짜 시험일 수 있을까?

2. 광야의 시험은 어떤 의미에서 잘못된 메시야관을 드러내는가?

3. 교회는 오늘날 어떤 방법으로 이런 시험에 대처해야 하는가?

4. 마귀의 존재를 믿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