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9 장. 갈보리

지성소

모세가 광야에서 불타는 떨기 나무에 가까이 다가 섰을 때 [너의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는 음성이 들려왔다. 이 장에서 우리는 온 땅에서 가장 거룩한 곳, 가장 깊은 경외감으로서가 아니면 아무도 가까이 하지 못했던 갈보리로 생각을 돌려보아야 할 것 같다. 이 일에 있어서는 복음서 기자들 자신이 좋은 모범이 되고 있다. 말로 표현하기에는 너무도 높고 깊은 사실을 다루고 있다는 것을 느낀 그들은 고상한 침묵과 온전한 절제로써 서술하고 있다. 그들의 서술은 말할 수 없이 예리하며 무서우리만큼 감동적이지만 감정을 비탄에 잠기게 하거나 격앙시키지는 않는다. 다만 그 고귀하고 경건한 침묵과 절제가 그들의 서술 전체를 특징지우고 있다. 이러한 조용함과 단순함은 그 서술이 주는 효력을 감소시키기는 커녕 헤아일 수 없을 만큼 강하게 하고 있다. 예를 하나만 들어 보자.[예수의 십자가 곁에는 그 모친이 섰는지라.] (요19:25)는 문장만큼 깊은 비통을 느끼게 하는 글을 어느 문장에서 읽어 보겠는가? 얼마나 절제되고 꾸밈없는 표현인가, 이 복음서 기자는 전혀 자세히 서술하려 하지 않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묘사는 마치 마법을 부린 것마냥 감당할 수 없으리만큼 감동적이다. 복음서는 우리를 온전한 경건으로 주님의 최후 순간의 지성소로 인도한다. 또한 복음서 기자의 단순하고 꾸밈없는 표현에서 모든 기독교인은 [눈물 흘리기에는 너무나 깊은 곳에 놓여 있는 사실들] 을 발견해 왔다.

자원하여 드린 희생

우리가 지난 두 장에서 살핀대로 예수님께서는 역사적인 세력들의 연합에 의해 사형 선고를 받으셨다. 교회와 국가 그리고 민중이 모두 그를 죽이기 위해 연합했다. 바리새인들의 무지와 관용 없는 데도,[가야바]에게서 예시된 제사장들의 배타성과 이기주의,[빌라도]에게서 구체화 된 로마 제국의 정책과 힘,예루살렘의 폭도들에게서 나타난 민중의 좌절감과 노여움 그리고 원한, 이러한 것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게 했다.그러나 이러한 역사적인 세력들이 최종적인 결정 요인이었다고 가정하는 것은 중대한 잘못이다. 예수님께서는 어떠한 세력에 밀려서 죽으신 것이 아니었다. 그는 패배하지 않은 영혼의 자유의사로 그 길을 가셨다. 갈보리에서 죽으신 분은 잔인한 환경의 절망적인 희생 제물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신약이 시종일관 주장하는대로 그 희생에서 예수님은 그 자신이 대제사장이었으며 그의 영혼을 자원하여 제단에 바치셨기 때문이다. 그는 말씀하시기를 [인자가 온 것은 자기 목숨을.. 주려 함이라]고 하셨다(막 10:45).또 다시 말씀하시기를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고 하셨다(요10;18).물론 예수님의 죽음에는 어떤 필연적인 요소가 있다. 즉 그는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죽임을 당하여야 하리라]고 말씀하셨다(눅 9:22).그러나 그 필연성은 폭력이나 억압에 의한 것이 아니라 인간에 대한 그의 애타는 사랑에 의한 필연성이었다. 왜냐하면 처음부터 예수님께서는 그 댓가를 충분히 아시고 기꺼이 수락하심으로 구속 사업을 떠맡으셨기 때문이다. 그가 마지막이 가까울수록 놀라울 정도로 침착하고 냉정하셨던 것은 여기에서 비롯되었다. 그를 재판하던 자들이 스스로 그를 상황의 지배자로 또한 그의 운명을 좌우하는 자로 상상했던 것 만큼 사실에서 동떨어진 것은 없다. 갈릴리 사역 당시부터 삶과 환경과 모든 새로이 닥치는 위험을 극복하셨던 예수님께서는 인간들의 악의의 채찍에 의해서, 또는 운명의 수레 바퀴에 어쩔 수 없이 끌려서가 아니라 그의 완성된 사업의 영광을 취하시려고 자발적으로 승리감에 차서 나아가셨던 순간에 최고의 정복자가 되셨다. 이것이 바로 "사람보다 강한 하나님의 약한 것이었다(고전 1:25).

십자가의 거치는 것

여기에서 우리는 고대 세계에서 십자가 형벌이 어떤 뜻을 가진 것이었는가를 생각해 보는 것이 좋겠다. 세월이 지나감에 따라 기독교는 십자가에 아름다운 후광을 둘러 놓았다. 우리는 교회를 십자가 형태로 건축하며 국기에다 십자가 문장을 넣기도 한다. 죽은 자를 매장한 무덤 위에 십자가를 세우기도 한다. 우리는 붉은 십자가를 만들어 의료 사업의 상징으로 삼기도 한다. 시인들이나 찬송가 작가들은 [놀라운 십자가]나 복된 십자가]에 대해 노래로 들려 준다. 그러나 이러한 것으로 하여금 십자가가 본래 말할 수 없는 수치와 모욕의 형벌이었다는 사실을 은폐하게 해서는 안된다.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고 바울은 신명기의 말씀을 인용하여 말하고 있다(갈3:13,신21:23). 이것이 유대인들이 십자가에 대해 느꼈던 감정이었다. 로마인들의 느낌 역시 이것과 마찬가지였다. [형벌 중에 가장 잔인하고 무서운 것이다]라고 거의 공포의 전률을 느낄 수 있을 만큼 무서운 말들로써 [키케로]는 진술하고 있다. 다른 곳에서 그는 "결코 이런 형벌이 로마 시민의 몸에, 그들의 생각이나 눈에 뜨는 귀에도 가까이 오게 되지 않기를!"하고 기원했다. 동양의 半야만적인 국가에서 최초로 고안된 십자가 형벌은 로마인들에 의해 노예나 가장 파렴치한 범죄자에 대한 형벌로써 남아 있었다. 그것은 극에 달한 치욕의 죽음이었다. 고대 세계 사람들에게 그것은 교수대의 밧줄과 같은 것이었다. 최초의 사도들이 세계적인 복음 전도를 시작했을 때 유대인이나 이방인을 막론하고 어느 곳에서나 사도들이 당면해야 했던 한 가지 선입견,즉 거치는 돌인 십자가의 장애가 있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갈5:11,고전 23). 메시야가 죽어야 했다는 것도 믿기 어려운 일이었으나 그가 그러한 죽음을 당해야 했다는 것은 전혀 믿어지지 않는 일이었다. 그러나 사실이 그러했다. 그리스도의 손길이 닿은 것마다 - 십자가를 포함해서 - 광채와 아름다움으로 장식되고 변모되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께서 얼마나 무섭고 깊은 구렁에서 십자가를 높이 들어 세우셨는가를 결코 잊지 말아야겠다.

4. 십자가를 짊어진 사람

당시의 관례로는 잔인함의 극치로서,또한 그 형벌의 수치에 가하는 최후의 일격으로서 사형수로 하여금 자신의 십자가를 처형 장소에까지 지고 가게 했다. 그러나 갈보리에의 행렬이 이루어진 다음 그 행렬이 군중이 늘어선 거리를 지나 움직이기 시작했을 때 호송 책임자였던 로마의 백부장과 호송병들에게는 예수님께서 무거운 십자가를 갈보리까지 내내 지고 갈 수 없음이 분명히 드러나 보였다. 이미 당하신 무서운 채찍질에 기운이 진해지신 예수님은 (끝이 쇠로 되어 있는 로마인의 채찍으로 맞으신 탓이었다) 드디어 땅에 주저 앉으셨고 행렬은 멈추어졌다. 그러나 어느 로마인도 다른 로마인에게 십자가를 지라고 말한다는 것은 생각조차 못할 일이었다. 그 만큼 십자가는 치사스럽고 더러운 형틀이었다. 그래서 백부장은 그의 부하 모두를 지수가나서 길에 있던 낯선 사람에게 시선을 멈추었다. 그리고 그로 하여금 달갑지 않은 일을 떠맡게 했다(막 15:21). 때때로 한 인간의 중대한 순간이 갑자기 뛰어든다. 또한 운명이 전혀 뜻밖에 평범한 길목에서 기다리고 서있기도 한다. 구레네 사람 시몬] 의 경우가 바로 그러하였다. 그는 단순한 호기심으로 지나가는 군중을 지켜보기 위해 한 쪽 옆으로 비켜섰다. 그러자 그는 무엇이 일어나고 있는지 사태를 깨닫기도 전에 하나님 아들의 십자가를 지고 가고 있었다. 틀림없이 그의 첫 느낌은 그러한 오욕적인 일을 강제로 떠 맡게 된 데 대한 분노와 원망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먼 후일 그가 그 순간을 돌이켜 보았을 때 그 순간은 그 생애 최상의 영광을 허락하신 하나님께 감사해야 할 것이었다.

마가는 그를 [알렉산더와 루포의 아비]라고 불러 후일 사도 시대 교회의 저명한 두 인물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롬16;13 참조).이와같이 [시몬]의 삶을 변화시키고 그와 그의 가정을 기독교 신앙에 귀의하게 했던 것은 그가 주님의 십자가를 졌던 갈보리 언덕 길에서의 그 순간에대한 추억이었다고 우리는 결론지을 수 밖에 없다. 역사상 가장 중대한 사건을 기록한 곳에서 갑자기 등장했다가 다시 사라져버린 이 [구레네 사람]의 모습이 모든 기독교인들의 상상력을 사로잡아 왔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육신으로 계시던 날 동안 많은 남녀들이 그를 섬긴 모든봉사 가운데 이 사람의 붕사만이 홀로 우뚝 솟아나 있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들은 [그집 주인]이처럼 그의 원수들이 가까이 있을 때 그에게 피난처를 제공할 수도 있었다.또한 죄인이었던 여인처럼 그의 발 아래 앉아 옥합을 깨뜨릴 수도 있었다.그러나 다만 [시몬]만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졌다.

5. 십자가의 명패

목적지에 도착하자 병정들은 그들의 일을 시작했다. 그들은 십자가를 땅에눕혀 놓았다. 그리고 예수님을 그 위에 놓고 손과 발에 못을 박았다. 그들은 그 십자가를 들어 올린 다음 땅에 파 놓은 구덩이 속에 떨어뜨렸다. 그 다음 일을 마태는 간단하나 너무나 많은 것을 암시하는 생생한 필치로 묘사하고 있다.[저희가 거기 앉아 그를 지키더라](마27:36). 그들은 그를 지켜 보았다. 그들은 세계를 바꾸어 놓을 사건과 얼굴을 마주 대하고 있었다. 그들이 알기만 하였다면 그들은 적나라하게 드러난 하나님의 위대한 마음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은 수많은 영혼들의 죄 값이 지불되고 있는 바로 그 현장과 직면하고 있었다. 그들은 최종적인 계시의 면전에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아무 것도 보지 못하였다. 그들은 주사위 노름을 하면서 그 긴 시간을 보냈다. 하나님을 인식하는 데는 언제나 도덕적,영적 자격의 제한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복음서의 기자 모두가 십자가에 매달려 돌아가시는 예수님의 머리 위에 명패가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범죄자가 처형될 때마다 그 죄의 성질은 공중에게 계시하는 것이 당시의 관례였다. 즉 그 죄인으로 하여금 정죄 받게 한 범죄 사실에 대한 간단한 설명을 형틀에 못박아 놓아서 지나가는 사람들로 하여금 그를 올려다 볼 때 무엇 때문에 그가 처형을 받게 되었는지 알도록 했다. 예수님께서는 그의 왕권에 대한 주장이 반역적이었으며 민중을 위험하게 하는 것이었다는 것 때문에 정죄되었다. 따라서 그의 머리 위에는 죄목으로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이라고 쓰여 있었다(요19:19). 그 자귀는 [빌라도]가 선택한 것이었다.우리가 그의 마음 속에 정확하게 어떤 생각이 있었는가를 알고 싶어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 칭호는 망상으로 인해 파멸하게 된 한 견습 목수에 대한 값싼 조롱이었을까? [가이사]와 맞서려고 생각했던 한 어리석은 인간에 대한 마지막 돌팔매였는가? 아니면 예수님을 조롱한 것이라기 보다는 [빌라도]가 멸시하고 굴욕 주기를 좋아했던 유대인들에 대한 조롱 즉 [이 예수는 너희같이 가엾은 노예에게 알맞는 왕이다]라는 조롱이었을까?이것이 그가 의도했던 의미였을런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그 명패를 읽는 유대인 제사장들이 그 속에 숨겨져 있는 모욕에 분개하여 즉시 [빌라도]에게 들어가서 그 명패를 떼어줄 것을 탄원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빌라도]는 그의 풍자로 인해 분개해하는 무리들을 보고 웃기만 했다. 그리고는 [나의 쓸 것을 썼다]라고 일축해 버렸다(요19:22). 그러나 [빌라도가]가 뜻한 것이 더 깊은 데 있을 수는 없는가? 예수님의 어떤 힘이나 위엄 또는 본래적인 신적 위엄이 [빌라도]의 마음을 움직이지는 않았을까? 예수님의 본질적 왕권에 대한 어떤 암시나, 예수님의 믿기지 않는 주장의 진실성에 대한 어렴풋한 깨달음이 이 행정관의 영혼 속에 떠올랐던 것은 것은 아닐까?그가 감히 그 자신에게도 고백할 수 없었던 깊은 본능적 직관에 따라 [왕 예수]라고 쓰지는 않았을까요? 이 문제야 어떻든 간에 우리가 빠뜨리고 지나갈 수 없는 것은 명패가 헬라어, 라틴어 히브리어의 세 가지 언어로 기록되었다는 사실의 의미이다. 물로 나이것은 군중 속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확실히 읽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교회느니 언제나 그 속에서 그리스도의 우주적 통치권의 상징을 보아왔다. 이 세 가지 언어는 세계적 언어였으며, 그 언어들은 하나의 주된 사상을 위해 봉사하고 있었다. 헬라어는 문화와 지식의 언어였다. 예수님께서 이러한 영역에서 왕이시라는 것을 그 명패는 말하고 있었다. 라틴어는 법률과 정치와 언어였다. 이곳에서도 예수님은 왕이셨다. 히브리어는 계시 종교의 언어였다. 여기에서도 예수님은 왕이셨다. 따라서 예수님은 그가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실 때에도 [그 머리에 많은 면류관을 쓰신]분이었던 것이다(계19:12).

6. 그는 자신을 구원하려 하지 않으셨다.

광야에서와 그의 전생애를 통해 예수님을 시험했던 사탄은 이제 그의 최후의 공격을 퍼부으려 하고 있었다. [산 헤드린 공회]의 회원들은 그리스도를 정죄한 것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그가 고통받으시는 것을 즐거운 듯이 바라 보기 위해 갈보리까지 나왔다. 그리고 그를 조롱하기 시작했다.[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었든 십자가에서 내려 오라](마6:2740).이것은 조롱이 아니었다. 유혹이었다. 이것은 이중적인 유혹이었다. 즉 예수님으로 하여금 고난의 잔을 끝까지 맛보지 못하게 하려는 곧 죄의 댓가가 완전히 치루어지기 전에 도피하게 하려는 유혹이었다. 그러나 또한 그것은 이 이상의 것이었다. 그것은 제 십 일시 이 순간에 사람들로 하여금 믿게 할 만한 찬란하고 극적인 어떤 일을 하게 하려는 유혹이었다.[지금 십자가에서 내려 올찌어다.그러면 우리가 믿겠노라.]고 군중들은 외쳤다. 이것이야 말로 예수님에게 있어서 참으로 아픈 곳을 찌르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적 행하기를 절하셨다. 왜냐하면 이전 광야에서 그는 단호하게 이와같이 극적인 방식으로 그의 왕국을 오게하지 않기로 결정하셨기 때문이었다. 또한 무리들이 심한 조롱으로 [저가 남을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마27:42)라고 외쳤을 때 그들은 그들이 알고 있던 것 보다 더 깊은 진리를 말하고 있었다. 그들의 말은 사실이었다. 사랑의 최종적 계시를 주심으로써 세상을 구원하려고 열망하신 예수님께서 그 자신을 구원하려 하시지 않았고 또한 구원하실 수 없었다는 것이 바로 복음의 중심적 사상이다. 로마인들이 그 손에 박으니 못에 의해서가 아니라 마음 속에 있던 완전한 사랑에 의해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달려 계셨으며 그 일이 다 끝나기까지 단단히 달려 계셨다. 그가 자신을 구원하기를 거절하신 것이 세상의 구원이 되었다.

7. 강도의 죽음

예수님께서는 혼자 죽으신 것이 아니었다. 아마 예수님의 양편 십자가에 강도를 매달게 한 것은 더 이상의 조롱과 모욕을 주려고 한 예수님을 대적하던 자들의 욕망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비록 그들이 깨닫지 못하였을지라도 그 행위에는 특이한 적절함이 있었다. 예수님은 평생 동안 죄인들의 친구이셨으며 죽음의 자리에서도 그들과 떨어져 있지 않으셨다. 하나님께서 처음에 그 아들을 불러 세상의 구주가 되게 하셨을 때 하나님 자신이 예수님의 사랑과 멸망하는 영혼들의 수치를 끊을 수 없게끔 연결하셨다. 또한 하나님께서 연결하신 것을 사람이 나눌 수 없는 법이다. 그래서 갈보리 언덕에 세워진 예수님의 십자가 좌우편에는 두 행악자가 십자가들이 세워졌다(눅 23:33). 이와같이 여러 세기의 시선을 모으게 된 이르없는 이 두 사람은 누구였는가? 아마 그들은 예수님의 선한 사마리아인 이야기가 상기시켜 주듯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가는 길에서 횡행하던 자들과 같은 난폭자였을 것이다. 그리고 폭도[바라바]의 동료였을 것이다. 왜냐하면 [바라바]가 주도했던 혁명 운동은 처음에는 애국적인 열심으로 로마 통치에 대항했으나 그후 약탈과 살인,범죄 집단으로 전락해버렸기 때문이었다. 예수님과 나란히 십자가에 달려 있으면서 죽어가던 두 강도는 그를 욕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가운데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에게서 풍겨오는 그 무엇이 그중 하나를 잠잠하게 했다. 그 무서운 고통을 신음소리 내지 않고 견디며 죽음의 그늘 아래에서도 이상하리만큼 고귀한 왕의 위엄을 지니고 있는 이 사람은 그 수족에 못을 박는 자들을 위하여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라고 기도하는 이 사람은 누구인가? 다시 그리고 또 다시 그 강도는 그 맑고 사랑이 가득한 얼굴을 바라보기 위해 고개를 돌렸다. 도대체 이 사람은 누구일까? 별안간 저 깊은 곳에서부터 믿음이 솟구쳐 올랐다. [주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눅 23:42) 바로 마지막 순간, 겉으로 보기에는 모든 것이 실패로 끝나고 화려한 의식이나 예식도 없었던 그 때에 단 한사람, 죽음이 임박한 때에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본능적으로 그가 왕좌에로 나아가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절대적인 왕적 위엄에 대한 놀라운 찬사였다고 할 수 있다. 예수님께서 이에 대답하여 말씀하시기를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하셨다. 이로써 예수님은 그가 생명을 바쳐 선포하려고 하신 진리, 즉 고통과 결박에 얽매여 희망이 없는 어떤 영혼이라도 일순간에 티끌이나 잿더미같은 生에서부터 바로 사죄로 말미암은 완전한 해방에로 나아갈 수 있으며 성도의 흰 옷을 입을 수 있다는 진리에 최종적인 印을 치셨다.

8. 요단강물의 범람

이러한 고통의 마지막 시간 동안에 예수님의 영혼이 하나님께서 그 얼굴을 숨기신 것 같아 두려워 떨었던 순간이 있었다. [나의 하나님이여, 나의 하나님이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마27:46,시22:1 참조)외침이 터져 나왔을 때 우리로서는 예수님의 생각과 심정이 어떠했는가를 결코 완전히 이해하기를 바랄 수는 없다. 그 어둡고 신비했던 순간은 예수님께서 일생 동안 스스로 인간들과 동일해지려는 노력의 절정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런지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그 이상이었다.우리는 여기에서 모든 인간들이 범한 죄의 말할 수 없는 수치와 공포가 그의 죄없으신 마음을 내려 눌렀다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것도 그 비통한 외침의 깊이르리 헤아리지는 못한다. 우리는 다만 멀리 서서 머리를 숙이고 그리스도로 하여금 그 흑암을 홀로 건너 가시도록 버려둘 수 밖에 없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그가 믿음의 최후 한계에 다달았을 때에도 그의 믿음은 쓰러지기를 거부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정적을 뚫고 지나는 그의 외침 소리는 여전히 "나의 하나님,나의 하나님"이었기 때문이다.

그 외침 소리가 지난 다음 이번에는 마치 승리자의 음성으로 [다 이루었다](모든 것이 끝났다)는 외침 소리가 들려왔다.(요19:30).이 말은 그 때 갈보리 언덕에 있던 사람들 모두가 하고 있던 말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얼마나 다른 뜻을 가지는가? 병정들에게도 모든 것이 끝났다. 이제 그들은 병영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예수님의 어머니와 막달라 마리아 그리고 마지막까지 그를 사랑했던 가엾은 남은 무리들에게도 모든 것이 끝났다. 이제 그들은 결코 그전과 같지 않을 세상으로 지쳐서 돌아가게 되었다. 그를 조종하던 제사장들과 무리들에게도 모든 것이 끝났다. 그들은 이제 그들의 복수가 끝난 것을 자축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가운데 십자가에 달려 있던 그 사람이 갑자기 눈을 들어 하늘로 향하시고 숨을 거두시면서 다 이루었다고 외쳤을 때는 흑암의 왕국 전체가 그 뿌리채 흔들렸을 것임에 틀림없다. 왜냐하면 예수님에게 있어서 끝났다는 의미는 오랫동안 힘들었던 생이가 이와같이 거친 종말로 끝나게 되었다는 것이 아니며, 또한 그 외침이 단순히 안도의 한숨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예수님에게 있어서는 그의 사업이 끝났으며 사탄의 왕국이 끝났고 세상을 구속하는 일이 끝났다는 의미였다. 또한 그 외침은 이러한 성취에 대한 승리의 확언이었으며 승리의 외침이었다. 그 기쁜 외침과 함께 그리스도의 영혼은 그 아버지의 면전으로 달리셨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맡겨 주신 사업을 끝내심으로 그는 지상에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셨다.

9. 세상에 대해 십자가가 갖는 의미

갈보리 언덕의 걸구한 땅에 서서 눈을 들어 십자가를 바라볼 때 우리는 천구백년 동안 인류의 양심이 마치 자석에 끌리듯이 한 장면에로 끌려 왔는지 또한 왜 기독교인들이 언제나 모든 것의 핵심이 이곳에 있다고 생각해 왔는지르리 이해하게 된다. 예수님 자신이 그의 죽음에 의해 지상을 정결케 하는 구원의 능력이 모든 이해를 초월하여 활동하게 될 것이라는 것을 아셨고 또한 공공연히 확언하셨다. 그 능력은 주로 두 방면으로 활동해 왔다. 한편으로 예수님의 죽음은 죄의 참 성격을 드러내주었다. 우리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히게 했던 죄악들이 결코 낯설거나 전혀 변태적인 것이 아니였음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가야바]의 이기주의나 [빌리도]의 두려움, 그리고 헤롯의 불순함, 군중들의 분노와 원한, 이러한 죄들이 죄없으신 분과 접촉하게 되었을 때 고의적으로 그를 죽일 것을 모의했다.

말하자면 예수님께서는 일상의 평범한 죄들에 의하여 십자가에 못박히셨다. 우리 모두가 이 일에 동참한 자들이다. 우리가 갈보리 언덕에 설때에 우리의 마음과 양심은 그곳에 보이는 광경이 바로 우리 자신에 의해 행해진 것이며 우리가 가볍게 생각하는 죄들이 언제나 하나님 아들을 십자가에 못박는다는 사실을 말해 준다. 위대한 기독교적 사상을 인용하여 말한다면 이러한 의미에서 어린 양은 [창세 이후로 죽임을 당하시며](계13:8)오늘날에는 죽임을 당하고 계신다. [파스칼]은 [예수님은 세상 끝날까지 고통 중에 게실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오,깨뜨려 주옵소서 나의 굳은 마음을! 나의 연약한 自己愛와 교만의 죄가 그를 죽이는 [빌라도]와 [유다]로다. 우리 주 예수님, 그를 십자가에 못 박도다.

이와같이 예수님의 십자가는 죄의 진정한 성격과 진상을 드러내 준다. 또한 그렇게 함으로써 구원의 회개를 낳게 한다. 이것이 십자가 능력의 큰 비밀의 하나이다.

다른 한편으로 그리스도의 죽음은 전능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계시해 준다. 진노하신 하나님을 달래거나 그의 마음을 바구어 우리를 사랑하게 하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죽으신 것이 아니었다. 그러한 생각은 전혀 비기독교적인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영원불변하시다.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도록 설득 당해야했던 때는 한 순간도 없었다. 예수님의 갈보리 수난은 결코 하나가링을 사랑에로 이끌기 위한 유인이 아니었다. 갈보리의 수난은 하나님 자신의 사랑이 행동화된 것이었다. 땅속에서 보이지 않은 채 타고 있는 불이 때때로 갑작스럽게 화산으로부터 쏟아져 나오는 것과 마찬가지로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사랑은 그 절정에 순간에 하나님께서 그 내밀한 존재에 있어서 영원히 어떠하신 분인지를 보여 주면서 역사속에 순전한 불꽃으로 뛰어들어 왔다. 십자가는 영원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계시해 준다. 또한 은혜를 현실화하며 사랑을 필요로 하는 영혼에게 사랑을 얻게 해준다. 십자가는 죄인들을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며 세상을 하나님의 발 아래 엎드리게 한다.

매일 성경


 마태복음 27:27-37  고난의 길
 요한복음 19:19-23  십자가 위의 명패
 누가복음 23:39-43  회개한 강도
 마태복음 27:39-50  최후의 유혹
 누가복음 23:46-53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묻히심
 골로새서  2:10-15  죄에 대한 승리로서의 십자가
 로마서    5:1-11   사랑의 계시로서의 십자가

 

토론을 위한 문제

1.십자가에 어떻게 어둠의 세력이 행한 것인 동시에 하나님의 뜻일 수가 있는가?

2.바울은 십자가를 [유대인에게는 거치는 것이요.헬라인에게는 어리석은 것이다.]라고 표현했다. 이 말씀에 대해 토론해 보라.]

3.[그리스도께서는 세상 끝날까지 고통중에 계실 것이다]라는 [파스칼]의 말은 어떤 의미에서 진실일 수 있는가?

4.[구레네]사람 [시몬]의 반응과 그 미래가 어떠했으리라고 생각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