랍바(Rabbah) - 암몬 - 빌라델비아 - 암만


뜻: 큰 도성
랍바는 옛 암몬족속의 도시로 오늘날의 요르단의 수도인 암만과  동일시되고 있다. 
다윗도 랍바를 정복하고 암몬족속을 지배하였었다. 얍복강 상류 60-90미터 언덕, 비옥한 아데이안만 북안에 건설된 요해의 도시.
요단강 동쪽 37km 지점으로 암만(Amman)이다. 헬레니즘 때는 빌라델비아로, 로마시대 이후부터는 암만으로 불렀다.

(1) 암몬의 수도(삼하12:26).

(2) 바산의 철 침상이 있었다.

(3) 다윗의 용사 우리아가 이 성을 공격하다 죽고 다윗과 요압이 점령 (삼하11:1, 12:26).

(4) 얼마 안되어 다시 빼앗겼다(삼하17:27).

* 주후 66년 유대인의 혁며에 의하여 황무지가 되었다.

요르단 왕국의 수도로서 현재 150만 명이 넘는 대도시이다. 암만은 현대의 하시미트 요르단 왕국 (Hashemite Kingdom of Jordan)의 수도로서 행정부와 왕궁(까스르 라가단 : Qasr Raghadan)이 자리하고 있으며, 구약성경 신명기에서 처음으로 언급되고 있는 고대 근동의 주요한 고대도시의 하나이다.

구약시대 '암몬의 랍바 성읍(신 3:11)' 이라고 불렸던 이곳은 물이 풍족한 지역이었으며, 지금부터 약 9천년전, 신석기 시대부터 사람들이 모여들어 살기 시작했다. '랍바' 란 단어는 '주요 도시' 또는 '수도' 란 의미를 지닌다.

이곳 랍바가 역사무대의 전면에 등장한 것은 기원전 13세기 암몬 왕국의 수도가 되면서 였다. 랍바를 중심으로 했던 암몬 왕국은 요단강을 사이에 두고 이스라엘과 인접해 있었다. 두 나라는 적대적 경쟁 관계여서 전쟁이 끊이지 않았다. 이스라엘에 위협적인 존재였던 암몬 왕국은 주전 8세기 말, 앗시리아 제국에게 정복당한 후 4백년 이상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졌다.

'암몬' 은 롯의 후손(창 19:38)들로서 '나의 백성의 아들(벤 암미)' 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으며, 출애굽 당시 이스라엘 족속들의 가나안 진입과 관련하여 암몬 자손의 땅을 지나 여러 중요 도시들을 점령하였다는 기록이 있다.(민 21:24-35, 신 2:19-37) 이 시기에 암몬은 이미 강한 나라로 성장해 있었으며 그 경계는 견고하였다. (민 21 : 24)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세암몬 자손의 땅 절반 곧 랍바 앞의 아로엘까지를 자손에게 분배하였다. (수 13:24-28) 암몬 족속과 이스라엘 족속은 서로 적대적 관계에 있었으며, 따라서 종종 전쟁이 벌어졌다. 여호수아에서 사울 왕까지 이르는 사사시대 동안(1,200 - 1.025 B.C.) 암몬 족속들은 모압에글론왕과 동맹을 맺고 여러 차례 이스라엘을 공격하여 여리고를 18년 동안, 에훗에 의해 퇴각될 때까지 점령하기도 하였다. (삿 3:12-30)

사사 입다의 시기(삿 10:6-12:6)에 다시 이스라엘을 공격했으며, 사울왕 때(기원전 1,025년경)에 암몬나하스요단강 서편지역 '야베스 길르앗'까지 침입해 들어왔다. (삼상 11) 다윗의 암몬 정벌의 기록이 있는가 하면, (삼하 10:1-14) 솔로몬(c. 970-945 B.C.)은 그의 후비와 빈장들 중에 암몬 여인을 취했고, 그들의 영향으로 암몬 사람의 가증한 몰렉을 쫓고, 예루살렘 근처 실로암에 신전을 지었으며, (왕상 11:1, 6, 7) 그 여인들 중의 한 사람, 즉 르호보암 왕의 모친의 이름은 '나아마'로 암몬 사람이었다. (왕상 14:21) 여호사밧 왕(876-849 B.C.) 때, 모압에돔과 동맹을 맺고 이스라엘을 공격하였고, (대하 20장) 웃시야왕(785-740 B.C.) 때에는 유다에 조공을 바쳤으며, (대하 26:8) 요담왕 때는 암몬을 다시금 정벌하여 통치를 강화하였다. (대하 27:5)

로마 원형 극장:시내 중심가로부터 5분 거리의 공원에 자리하고 있는 로마 원형 극장은 암만이 로마 도시의 하나인 필라델피아로 기능했을 당시의 유산들 중에 파손되지 않고 남아 있는 것의 하나이다. AD 2세기에 건설된 것으로, 약 6,000여명을 수용할 수 있으며 현재까지 공연장으로 사용되고 있는 곳이다. 암만의 동쪽 언덕을 깎아서 곧바로 만들어져 있으며 무대의 양쪽 옆으로는 '전통 장식 및 의상 박물관'과 '민속 박물관'이 각각 자리하고 있다. 알렉산더 이후 랍바 암만은 기원전 259년에 프톨레미 왕조에 의해 통치되면서 '필라델피아' 라는 이름으로 불려 지게 되는데, 이는 프톨레미 2세의 이름인 '필라델푸스(Philadelphus, 283 -246 b.c.)' 의 이름을 따른 것이다. 제논 파피루스에서는 이 도시를 '비르타(Birta)' , 즉 '성곽 거주지' 라 불렀다. 기원전 218년 안티오쿠스 3세는 이 성을 포위하고 수로를 차단하여 정복하였으나, 기원전 1세기부터 점차 강력한 정치적 영향력을 뻗치기 시작한 나바테안 때문에 오랫동안 지배하지 못하였다. 하스모니안 왕조의 알렉산더 야나이가 여러 차례 정복을 시도하였으나 성공하지 못하였으며, 기원전 63년에 로마의 폼페이가 이 성을 점령하고 데카폴리스의 하나로 지정되면서 필라델피아는 로마 시대의 가장 많은 사람들이 왕래하는 도시가 되었으며, '비아 노바 트라야나(Via Nova Traiana)' 의 중심지로서 홍해다메섹을 연결하는 통로가 되었다.

기원 후 4세기초에서 7세기초에 이르는 [비잔틴] 시대에는 기독교 전파와 함께 교회들이 건설되면서 필라델피아는 주교가 있는 요단강 동편 지역 교회의 중심도시가 되었으며, 니케아 공의회(주후 325)와 칼케돈 공의회(주후 451)에 대표를 보내기도 하였다. 아크로폴리스 서쪽에 세워진 성 엘리야 교회와 성 조지 교회는 6세기에 가장 잘 알려진 교회였다.

635년 아랍의 통치가 시작되면서 움마야드 시대(661-750)를 거쳐 압바시드(750-969), 파티미드(969- 1071), 십자군(1099-1268), 마멜룩(1263-1516), 오토만(1516-1918) 시대를 지나 영국 위임 통치 기간동안 자치 정부를 인정받은 요르단 왕국이 독립한 이후 요르단의 수도로 선택되어 지금에 이르러서는 요르단 최대의 도시로서, 이스라엘의 점령지 서안지구와 가자지구를 연결하는 정치, 경제적 전략지로서 기능하고 있으며, 지금은 인구 160만 명이 넘는 도시로 성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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