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키스탄선교................................

들어가는 말

파키스탄은 이슬람공화국이다. 파키스탄 선교연구의 출발점으로서 첫째 인도대륙의 이슬람 전개와 이슬람 통치를 개관하고자 한다. 둘째로 파키스탄 이슬람 공화국 형성과정을 검토한다. 셋째로 파키스탄 정부의 권력갈등 구조를 이해하고자 한다. 넷째로 파키스탄의 종교들을 간략하게나마 검토한다. 마지막으로 파키스탄의 한국선교사들을 언급하고자 한다.

1.인도대륙의 이슬람 전개와 이슬람 통치

인도대륙의 이슬람 도래는 주로 두 가지 길을 통하여 전개되었다. 하나는 주후 712년경부터 이라크에서부터 동남으로 해안을 거쳐 상인들을 중심으로 들어왔다. 초기에는 평화로운 접근으로 힌두교인과 공존을 하였던 것 같다. 아나마리 쉠밀은 그의 책[인도대륙의 이슬람교]에서 까씸 장군은 그의 인도대륙 점령시기에 힌두교인의 사원을 그냥 두었다고 하였다. 아랍 상인들은 힌두교인들과 함께 인도 남부 해안에 평화롭게 정착하였다고 했다. 다른 길은 주후 1000년경부터 중앙 아시아의 북서쪽에서 아프가니스탄과 캐시미르 가까이 있는 카이바르 고원지대를 통한 것이었다.1) 이 시기에 지하드 정신에 따라 가즈니 지역의 마하무드 왕은 북쪽 푼잡지대를 무력으로 점령하였다. 1750년경에는 인도대륙은 전적으로 이슬람 통치 아래 있게 되었다. 모걸 제국의 마지막 황제는 명목뿐이었지만 1857년까지 왕좌를 지키었다. 그러므로 8세기에서 19세기까지 긴 기간 동안 인도 대륙에서 이슬람 세력은 찬란한 문화를 발전시키면서 증가하였다.

파키스탄이 인도에서 분리할 때 인도대륙의 무슬림 교세는 전체 인구의 25%을 차지하였다 한다. 무슬림은 힌두인과 한 지역에 공존하면서 각각 다른 문화 발전을 이루었고 때로는 평화공존으로 또 때로는 억압된 폭력의 표출로 희생자들을 치르며 지내왔다.

인도대륙에서의 이슬람의 위치와 파키스탄 형성과정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무슬림 지도층의 서로 다른 두 가지태도로 인한 갈등을 집고 넘어가야 한다. 첫째, 이 갈등은 세속주의와 정통주의와의 마찰이라고 할 수 있다. 그 하나의 태도는 안정을 우선 순위에 둔 세속적 정책과 다른 하나는 이슬람적 주장을 한 이슬람 정책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두 다른 태도는 갈등과 진통으로 이어졌다. 예를 들면 모걸제국의 아크바르 황제는 인도대륙에서 힌두교,불교와 함께 공존을 위한 혼합주의적 국가종교를 시도하였다. 그 반대로 모걸제국의 아루방제브 황제는 순니파의 하나피 학파의 전통적 입장을 그의 정치에 적용하는 강력한 이슬람 주장을 하였다. 아루랑제브 황제 이후 사실상 인도대륙의 이슬람 통치는 쇠퇴기로 접어들게 되었다. 아우랑제브 이후 인도대륙은 서구의 세력에 따르게 되었고 1847년 영국은 인도대륙을 전적으로 통치하게 되었다. 무슬림들은 영국통치하에서 가난과 굴욕을 치르었다. 무슬림들은 이 시기에 드릉의 우루드어 사용을 할 수 없게 되었고 소수의 지식층은 영어를 모어처럼 사용하게 되었다. 무슬림 언어인 우르드어를 사용할 수 없게 된 것은 무슬림들에게 무슬림 정체성의 포기와 같이 느껴졌었다. 우르드어는 아랍어 다음으로 2억이 넘는 무슬림들이 쓰는 문학어인데,식민정치 때문에 사용이 금지되었던 것이다. 우르드어는 모걸제국의 쇠퇴시기에 하나의 이슬람 개혁운동이 새왈리 알라에 의하여 전개되었다. 그는 이슬람 공동체를 활성화하기 위하여 대폭적 개혁을 주장하였다. 그 대표적 제스처는 코란의 우르드어 번역이다. 이 개혁주의 동향은 알라가대학교에서 영어교육과 서구 학문을 강조하면서 동시에 우르드어를 가르치는 교육을 통하여 지속되었다. 이에 서구 학문의 도입에 반대하여 엄격한 울라마를 배출하는 무슬림 신학교가 설치되었다. 이러한 배경에 따라 2세기 인도대륙의 이슬람은 세속주의와 정통주의가 갈등을 가지게 되었다. 세속주의는 파키스탄의 초대 대통령인 무함마드 지나에 의하여 지속되었고 정통주의는 다수의 올라마에 의하여 주장되었다.

2. 파키스탄 형성

파키스탄 형성배경에는 주로 세속주의를 주장한 알라가대학교에서 서구학문을 한 사이어드 아하마드 계보의 세력이 핵심을 이루었다. 사이어드 아하마드(1817-1898)는 전통적인 무슬림 가정에서 성장하여 판사의 신분을 누리면서 서구의 학문과 이슬람교의 "샤리아"를 조화시키려는 노력을 하였다. 그 실현을 위하여 알라가대학교를 설립하였고 영국대학을 모델로 하면서 아랍어,우루드어와 이슬람교를 필수과목으로 정하였다. 그는 서구학문을 도입하면서 동시에 무슬림학자들을 배출하는 것을 목표로 하였다. 그 다음으로 파키스탄 형성에 크게 공헌한 인물로는 무함마드 익끄발(1873-1938)이 있다. 그는 시인으로서 우르드어로 시를 썼으며 그는 자기 생전에 보지 못한 파키스탄 형성을 꿈꾸면서 시를 썼고 인도대륙의 무슬림들을 일깨웠다. 그는 퍼탄 지역,푼잡 지역, 즐로찌스탄 지역,씬드 지역이 하나의 국가로 연합되기를 꿈꾸었고 궁극적으로 무슬림들은 인도대륙에서 분리 독립되어 하나의 국가로서 무슬림 정체를 표현하여야 한다고 보았다. 세속주의자들 이외에도 파키스탄 형성 배경에는 파키스탄 분리 독립운동을 제원한 무슬림인 소수의 울라마들이 있었다.

파키스탄이라는 새로운 국가형성을 주장한 이들은 다양한 동기들을 가지고 있었다. 그 동기들을 요약해 보면 첫째 인도대륙에서 무슬림이 소수 공동체로 존속할 경우 힌두교인의 경제적 및 정치적 지배를 받게 될 것을 두려워하였다. 둘째 무슬림들은 힌두교가 강제로 무슬림을 개종하게 하여 힌두교의 계층 밖의 사람들과 같이 억합할 것을 우려하였다. 셋째로 무슬림들은 우르드어를 전적으로 사용하기 위하여 분리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즉 무슬림 정체를 위하여 힌두교의 언어인 힌디어 대신에 우르드어 사용이 필연적이라고 보았다. 넷째로 가장 중요한 동기는, 세속주의이거나 정통주의이거나 무슬림들은 다 이슬람의 정체가 무슬림이 절대 다수를 이루는 독립국가 안에서만 표현될 수 있다고 믿었던 데 있다.

무함마드 익끄발의 예언을 옮긴이는 무함마드 지나(1876-1948)였다. 이들의 사상적 교량은 우르드였고 이 언어 사용은 모든 무슬림들을 단합시키고 교육시키는데 절대적 역할을 하였다. 무함마드 지나는 파키스탄의 아버지라고 불리운다. 지나는 1940년 이슬람연맹(Muslim League)정당의 초대 회장으로 선출되었을 때 그의 취임사에서 파키스탄이라는 이슬람 국가 형성을 암시하였다. 그는 무슬림과 힌두교인이 서로 같은지역에 있으나 서로 이질적 가치관과 문화 속에 살고 있음을 지적하였다. 구 종교인들은 같은 도시와 같은 농촌에 살지만 서로 같은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같은 상에서 음식을 먹지 않으며 결혼도 같은 종교권에서만 한다.이름으로도 무슬림과 힌두교인은 구별된다. 장례에서도 힌두교인은 화장을 하고, 무슬림들은 시신을 무덤에 묻는다.

영국이 인도대륙의 독립을 선언하자 힌두교인과 무슬림간에 충돌이 심화되었고 힌두교 지도자들은 간디를 위시하여 힌두교를 부흥시키려 하였다. 힌디어를 인도대륙의 언어로 정하며 힌두 문화화하려고 하였다. 무슬림들의 저항과 독립투쟁은 분명해졌다. 무슬림들은 다수 공동체가 아닌 소수 공동체의 열등감 사회적 차별은 이슬람 정신에 위배되는 것으로 보았으며 종내는 이슬람공화국을 설립하기에 이르렀다. 파키스탄은 1947년 8월 15일 1억4천4백만의 인구를 가진 이슬람 공화국이 지나의 지도력으로 힌두교의 인도대륙에서 신생국가로 탄생하였다. 당시 파키스탄은 서파키스탄과 동파키스탄(방들라데시)으로 구분되었고 지리적으로 인도를 가운데 둔 두 지역으로 형성되었다. 1971년에는 내란과 3회에 걸친 인도와의 전재으로 동파키스탄은 방글라데시로 분리 독립하였다.

파키스탄은 선교지리학적으로 볼 때 매우 중요한 나라이다. 북으로는 중국을 경계로 하고 있고 옛 비단길이 통하는 곳이며 히말라야 산맥이 펼쳐 있다. 8125미터의 낭가-파르바드는 세게에서 가장 높은 아름다운 산맥이며 세계 등반가들의 꿈의 지역이다. 서 북쪽으로는 아프가니스탄이 있고 이 지역을 통하여 초기 이슬람 접촉과 전개가 이루어졌던 곳이다. 험한 산악지대로 퍼탄 사람들이 주로 정착하고 있으며 이들은 현재도 자치권을 주장하고 있다. 이곳은 아프가니스탄의 난민들이 모여 있는 지역이며 동북쪽으로는 푼잡지역이다. 인도와의 경계선 때문에 인도와의 분쟁에서 희생자들이 많았던 곳이다. 아열대지역이므로 농사를 많이 짓고 파키스탄에서는 기후조건이 가장 좋은 곳이므로 교육도시들이 발달하였고 인구도 가장 밀접하여 있다. 기독교인들이 가장 몰려 있는 지역이기도 하다. 서남쪽으로는 이란과 경계를 이루고 있다. 불로찌스탄으로 알려진 이 지역은 가장 살기 어려운 지역으로서 사막과 고지가 섞여 있으며 인구분포가 다른 지역보다 낮다. 동남지역은 씬드지역인데 인도와 경계를 이루고 있고 인더스 강이 바다로 흐르는 지역으로서 사막이지만 강변은 비옥하고 과수와 목장이 아름답다.운하시설이 잘 되어서 목축뿐만 아니라 농사도 지을 수 있다. 씬드사람들은 북쪽 퍼탄과 푼잡 사람들과는 달리 여유가 있고 동작이 느리고 피부가 덜 까맣다. 그들은 느릿한 몸짓으로 살아간다. 이 지역에는 문명 발상지인 모헨조다로가 있고 기독교가 가장 먼저 들어온 곳이다. 그리고 유일한 항구 카라치가 있다. 씬드는 필자의 선교지였다.

3. 파키스탄정부

1) 1947-1971:
1947년 이후 거의 25년간 파키스탄은 새 정부 정비, 난민문제,카쉬미르 문제들로 긍긍하였다. 새 정부는 지나 대통령과 아윱 칸 대통령 그리고 즐르휘카르 알리 부토의 집권을 통하여 헌법재정과 개정으로 진통을 겪으면서 이슬람요소들을 강조하는 공통점을 유지하였다. 새 정부는 세속주의와 정통주의의 갈등은 해소되지 못한 채 동파키스탄의 결별시기까지 지속되었다.

2) 1971-1977:
부토 정권은 사회주의로 평가되었었지만, 실제로는 이슬람요소가 강화된 때다. 그는 모든 기독교 교육기관들을 국유화함으로써 간접적으로 기독교인들을 탄압하였다. 교육기관에 아랍어는 필수과목으로 설정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반대 정당들은 그를 이슬람에 관하여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집권자라고 비판을 하였고 부터 정권은 이에 대한 반응으로 아하미디아파를 비이슬람공동체로 선포하였고 음주금지,도박과 경마 금지, 나이트 클럽의 금지를 선포하였다. 이러한 대응에도 불구하고 부토정권의 반대파들은 연합정당을 만들어서 Pakistan National Alliance(PNA)라고 칭하였고 이 PNA는 부토의 정당, Pakistan People's Party(PPP)와 심각한 대립세력이 되었다. 1977년 총선거에서 부토는 부정선거 고발로 인하여 실권하였고 갈등 끝에 투옥되고 처형되었다.

3) 1977-1988 :
1977년 7월 5일 지아 올 학그는 계엄령을 선포하고 정권교체에 성공하였다. 그의 정당의 주 세력은 즈마엇대 이슬람이었고 이것은 "샤리아"에 의한 정치를 의미하였다. 예를 들면 후드드가 강조되었다. 절도범은 오른 손목이 절단되는 책벌을 받는 것이었다. 폭행을 자행하지 않은 고속도로의 약탈은 30대의 태형이 주어졌다. 간음죄는 기혼자일 경우는 돌로 쳐 죽이고 그렇지 않은 경우는 100대의 태형, 거짓비방은 80대의 태령,음주는 80대의 태형을 책벌로 정한것이다. 지아 올 학그 정권은 부토정권 때보다 강한 이슬람화, 원리주의에 근거한 이슬람화를 목표로 하였다. 이슬람의 다섯기둥은 정부 관리들에게 필수적이었다.

4) 1988- 현재
1988년 12월 즐르휘카르 부토수상의 딸, 베나지느 부토가 정권을 잡았고 여성으로서 파키스탄 역사에 한 획을 그었다. 그 후 1990년 8월까지 집권하였고 실권의 3년을 반대 정당 Pakistan Muslim League(PML)지도자 주네조 집권하에 지냈으며,다시 1993년 10월 PPP정권을 회복하여다. 베나지르 부토 정권은 그의 부친의 정책과는 달리 모든 교육기관과 기업체들을 국유화했던 정책을 자유자제로 변경하였다.(Nationalization/den-ation-alization).그 밖에도 여성의 인권을 위한 꾸준한 개혁을 시도하고 있다.부토수상은 이미 1971년 여성정치가의 꿈을 가지고 무슬림 여권선언서를 발표한 바 있었다.2) 위의 4시기를 통하여 본 파키스탄 정부는 다양한 정책들을 시도하면서 공통적으로 이슬람 부흥을 목적으로 함을 보여준다. 그러나 현재 이슬람화가 성공인가 아니면 실패인가라는 많은 파키스탄 지성인들의 고민이되고 있다. 그들은 종족간의 내란과 방글라데시의 분리 독립과 파키스탄의 다른 종교인들,특히 기독교인들과 힌두교인들의 불안을 목격하면서 이슬람화의 의미를 묻는다고 본다. 특히 지아 울 학그 정권은 파키스탄 민족주의를 강조하면서 이슬람화를 강조하였고 이것은 실패로 나타났다.3) 국가와 민족간의 차이가 있음을 간과한 것이다. 파키스탄은 170이상의 종족들로 구성되었고 그중 가장 큰 종족들이 자기들의 지역어와 문화를 지키면서 파키스탄 국가 안에 존속하고 있는 것이다. 파키스탄 형성 이후 인도와의 3회에 걸친 전쟁과 불안한 정부의 교체와 군 계엄령 정치, 그리고 이슬람 원리주의자들의 권위와 군력의 행사는 파키스탄의 불안한 정세를 더해 주었고 경제발전의 걸림돌이 되었다.

4. 파키스탄의 종교들

파키스탄은 이슬람 공화국으로 '샤리아'에 근거하여 이슬람화 정치를 시도해왔다. 1977년 이후 지금까지 강한 극단적 이슬람 정당에 크게 좌우되어 왔다. 점진적으로 '샤리아'법이 헌법의 자리를 차지함에 따라 파키스탄의 다른 종교인들이 박해와 억압을 받게 되었다. 이것은 초기 파키스탄 형성 때의 지나 정권과 아윱 칸 정권 때와는 달리 상당히 심각한 상황을 빚어주고 있다. UN 의 공식 멤버로서 파키스탄 헌법은 종교의 자유를 공식적으로는 인정하고 있다. 그런데 파키스탄 다수의 울리마에 의하면 배교자는 죽음의 처벌을 받게 되어 있고 코란과 예언자 무함마드에 대한 모독도 죽음의 벌을 받게 된다. 실제 지난 1994년 14세의 살라마트 마시와 44세의 래해마트 마시는 여론과 탄원으로 간신히 석방되었으나 본토에 있지 못하고 독일에 망명하고 있다는 보도가 있었다.4)

1) 이슬람
파키스탄 인구는 1990년 122,666,000, 1995년은 141,599,000이다.5) 그중 이슬람은 96.7%의 교세를 가지고 있고 순니가 67.6%,쉬아가 26.1%(이스마일리도 포함함),아하미디아는 공식발표는 0.13% 그러나 비공식 자료에는 3%(줄르휘카르 부토정권 시기에 아하미디아는 비무슬림으로 선포되었다)이다. 아하미디아는 정부 보도에서는 무슬림으로 인정되지 않으며 다른 소수 종교 공동체와 마찬가지로 박해와 억압의 대상이 되어왔다. 이들은 비밀리에 자기들의 소속을 지키고 있다.

2) 힌두교
힌두교인은 1.5%이다.이들은 주로 씬드 사막지역의 계층 밖의 천민으로 바스띠를 이루고 산다. 주로 유랑민들로 인더스 강가를 따라 목축을 하며, 더러 농사로 생계를 유지하는 아주 가난한 사람들이다. 거의 100% 문맹이다. 이들은 꼴리,아오와리,바그리,오드,다트키로 전적으로 미전도종족이다. 북 푼잡 지역에서는 쭈르하가 복음화되어 현재 기독교 교세를 형성한 사례 이외에 아직도 힌두교 계층 밖에 종족들은 문맹, 가난, 소외의 상황에 있다.

3) 기타종교
전체 인구의 0.1%로 정령숭배,바하이,조로아스터교,불교를 들수 있다.

4) 기독교
기독교 교세는 1.7%이다. 그러나 비공식적으로 2.-3%까지 된다고 한다. 기독교 전개는 개신교 선교로서는 1833년부터이다.가톨릭교회와 선교는 별도로 깊이 있게 다루어져야 할 중요한 제목이다. 개신교 선교는 미국 장로교 선교사 로우리 목사와 사모가 캘커타에 도착하여 푼잡 지역에 있는 씨크교도들을 대상으로 선교를 시작한 것이 그 출발이다. 로우리 부인은 병으로 선교지에서 세상을 떠났고 로우리 선교사도 말라리아로 시달리다가 귀국하여 장로교 해외선교부를 조직하였다. 1849년부터는 찰스 포먼과 존 뉴톤이 본격적으로 푼잡지역 중심으로 선교활동을 전개하였고 성공회 대표선교부(CMS)가 씬드지역에,감리교가 카라치 중심으로 사역을 시작하였다.

그후 대부분의 교단들이 들어와 활동을 하였다. 의료선교,기독교 변론선교 등을 시도하였지만 교회개척은 극히 어려웠고 초기에는 교인수가 극히 적었다. 그러나 1890년에서 1930년에는 힌두교의 쭈르하 종족이 거의 전부 집단 개종을 하여 현재 파키스탄 교세의 80%이상을 차지하게 되었다.6) 쭈르하 계층의 개종이야기는 [파키스탄,나의 사랑]에서 이야기로 소개되었다.7) 파키스탄 교회에 관하여 도시교회,농촌교회,변두리교회에 관하여 이야기를 이미 소개해 놓은 것이 있다.8)

교단교회는 51개에서 2,883개의 교회들이 있다.9) 개신교 선교사들은 72선교부에서 736명이 파송되어 있다.대표적인 국제 선교부는 Interserve,TEAM, CMS,SIM,OM등이 있다. 현재 대부분의 선교사들은 아직도 서구 선교사들이며,10%미만의 아시아 선교사들이 80년대 후반부터 증가 추세를 보이고 있다.

맺는 말

파키스탄에서 한국교회의 파송으로 선교사역을 시작한지 35년이 되었다. 이제 파키스탄 선교활동을 전반적으로 보고하고 후원하는 협력기구와 연구차원의 직업이 필요하다. 한국선교사들이 이슬람권 상황에 맞는 선교이론과 실제를 펴 나가기 위하여 체계적인 후원과 훈련이 요구된다. 지금까지는 선교사들 자체 내에서 친교정도 이외는 함께 선교정책을 의논 검토하고 선교활동을 평가하는 시간을 갖지 못한 채 분산되어 사역에 전념하고 있는 실정이다. 파키스탄 선교사들은 1994년 7월부터 파키스탄 연구회라는 친교및 협력을 위한 모임을 가지고 서로 소식을 나누고 있다. 국내에서 파키스탄에 선교사들을 파송하고 후원하는 선교부와 관련자들이 함께 모여 장기적 선교사역에 대한 비전과 지난 날의 선교활동을 평가하는 시간을 마련하는 것이 요구된다. 오늘과 내일의 파키스탄 한국선교사들을 위하여 파키스탄 선교의 실제를 보여주는 자료집이 발간되어야 한다.

최근에 파키스탄 선교에 관심 있고 이슬람권 선교를 중요시하는 교회지도자들과 선교사들이 뜻을 합하여 CCC. 파키스탄기도회, 이슬람연구소 등 선한사마리아선교회를 설치하기 위한 기도를 하고 있다. 이러한 선교회는 다음과 같은 사역 목표를 두게 되기를 바란다. 첫째 파키스탄을 비롯한 이슬람권에 파송된 한국선교사들의 선교활동의 활성화를 위한 연구와 후원 및 협력을 하는 것이다.둘째, 파키스탄 교회지도자들과 좋은 관계를 열고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함께 선교정책을 세우는 것이다. 셋째 이슬람권 선교사들의 평생선교훈련을 위한 프로그램을 만드는 것이다. 넷째 국내 이슬람권 관련자들과 만나고 함께 선교활동을 하는 것이다.다섯째 이슬람권 선교사들을 위한 선교관을 마련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