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1 장. 생명의 주

1. 그리스도의 완성된 사역과 미완성 사역

이제 우리는 이야기의 끝 부분에 도달했다. 그러나 그리스도에 관한 이야기의 끝은 또 하나의 시작이다. 이 이야기를 기록한 복음서 기자들은 이 사실을 충분히 의식하고 있었다. 또한 복음서의 마지막 페이지를 끝내면서 거기에다가 [끝(Finis)]하고 쓸 생각은 결코 그들에게 떠오르지 않았다. 그들 모두는 펜을 놓고 복음서를 끝맺으면서 그들이 쓴 것은 아직도 일어나고 있는, 그리고 아직 태어나지 않은 수 없는 세대와 시대를 통해 계속되게 되어있는 이야기의 첫 부분 제1권이라고 생각했다. 그들 중 하나인 누가는 후일 다시 펜을 들어 제2권을 세상에 내어 놓았다. 그리고 사도들의 행전이라고 부른 제2권의 서문에서 그의 처음 기록에 대해 언급하기를 [내가 먼저 쓴 글에는 무릇 예수의 행하시며 가르치시기를 시작하심 부터... 의 길을 기록하였노라](행1:1-2)고 썼다. 왜냐하면 누가는 그가 이미 그 이야기의 많은 부분을 말했을지라도 그 뒤에 따를 훨씬 더 많은 부분이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물론 어떤 의미에서 지상에서의 예수님 사업은 그가그 아버지께로 돌아가셨을 때 끝났다.

[그의 모든 일이 끝났노라]고 우리는 즐거이 찬송하네 [예수께서 승천하셨네! 우리 왕께 영광]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사셨으매 다시 죽지 아니하시고]라고 말했다(롬6:9).이러한 모든 것은 끝났다. 지상에서의 봉사, 겟세마네의 고통, 체포와 재판, 골고다로 가는 고통의 길,십자가 위에서의 죽음,이러한 것들은 모두 끝났으며,결코 다시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이러한 일들은 역사적인 사건이었다. 이것들은 왔다가 사라졌다. 그것들은 한번, 다만 한번 일어났다. 죄의 완전한 댓가가 치루어졌다. 구속적 사랑의 계시는 완성되었으며 끝났다. 아무 것도 미완성으로 남은 것은 없었다. 아무 것도 덧붙여 질 것이 없었다. 우리는 결코 예수님보다 더 나아가기를 바랄 필요가 없다. 이러한 의미에서 어쨌든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가 갈보리에서,빈 무덤에서,그리고 승천에서 그 절정과 완성과 면류관을 발견한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것이 사실의 전부는 아니다. 왜냐하면 복음이 역사적 사실의 흔들리지 않는 반석주위에 단단히 그 뿌리를 감은채 역사 속에 안전하고 확고하게 뿌리박고 있는 반면 복음의 그리스도는 단순한 역사상의 인물 이상이히기 때문이다. 다메섹으로 가는 [다소]의 사울을 붙잡아 말에서 끌어 내려 땅바닥에 꿇어 앉히고, 그의 생애를 뒤바꾸어 놓았던 것은 역사적 사실에 대한 회고가 아니었다. 기독교의 메시지를 마치 요원의 불길처럼 온 땅에 퍼지게 했던 것은 지나간 추억이 아니었다. 인간으로 하여금 오순절의 제자들이 타올랐던 것처럼 찬송하게 하며[프란시스 파]의 수도사들이 찬송했던 것처럼 찬송하게 하고 [카비란터]의 순교자들이 죽었던 것처럼 순교하게 했던 것은 고귀한 모본에 대한 회상이 아니었다. 그리스도의 생애에 대한 첫번째 기록인 복음서의 뒤를 수백권의 기록이 뒤따랐다. 실제로 현재에도 예수님께서 잃은 자를 찾으시면서, 상한 마음을 싸매시고, 전능하신 주 하나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시면서 생의 혼잡한 거리를 지나다시시는 곳마다 그리스도의 이야기는 기록되고 있다. 갈보리의 수난이나 부활의 아침이 지나간 때에도 그 이야기는 끝나지 않았다. 이제 그 이야기는 다만 시작하였을 뿐이다.

최초의 제자들은 이 사실을 매우 분명하게 알고 있었다. 이제 그들이 지금 알고 있는대로의 예수님을 [온 세상의 왕좌]보다 낮은 자리에 둔다는 것은 생각할 수가 없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생의 통치자와 주인이 되셔야 함을 알았다. 그래서 그들은 [골고다의 수치]로부터 삼백년이 되기도 전에 가이사을 바쳤던 것이다. 외견상으로 볼 때 사랑의 무기 외에는 어떤 무기도 갖지 못한 이 소수의 사람들이 무력이란 무기를 가지고 또한 그것을 쓰려고 작정한 세상에 어떤 영향을 미친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으로 보였다. 이들이 물질주의와 세속주의 즉 바울이 말하는 [정사와 권세], 그리고 이 세상의 견고한 이기주의의 기득권에 대항하여 싸운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으로 보였다. 이들이 전대미문의 꿈을 그 눈길에 담고서 처음 발걸음을 내디뎠을 때에 세상은 이들을 그저 경멸하여 비웃었을 뿐이었다. 그러나 비웃음과 결명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계속 굳굳하게 마을에서 마을로 나라에서 나라로 나아가 드디어 로마의 문을 두드리게 되었을 때,세상은 이들을 심각하게 받아들이기 시작하고 이들의 길을 가로막으려고 했다. 그러나 이때즘에는 타오르는 불이나 고문대,또는 맹렬한 모욕도 모두가 소용없었다. 그 꿈이 승리하였으며 세상은 그 발아래 굴복하였다. 이것은 이들 자신이 이루어 놓은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것이라고 언제나 이들은 말했다. 그것은 그 첫권이 베들레헴과 갈릴리 그리고 갈보리의 이야기를 담았던 전기의 계속이었다. 여전히 지금도 행동하시는 그리스도, 강한데서 강한데로 나아가는 그리스도 살아 계셔서 이 지상에서 활동하고 계시는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것이었다.

이들이 옳았다. 이 사람들 속에 있는 그리스도의 생명만이 이들이 보여준 힘을 설명할 수 있다. 여러 차원에서 그 힘은 스스로를 나타내 보였다. 먼저 신체적 차원에서의 힘으로 나타났다.새롭고 상쾌한 기운이 그들의 몸에서 흘러나와 그들로 하여금 열심과 생동하는 힘으로 다른 사람들에게는 불가능하였을 일들을 이루어 내게 하였다. 그 다음 심적차원에서의 힘으로 나타났다. 그리스도를 최초로 따랐던 이들중 다수는 교양이 없고 무식한 자들이었런지 모른다. 그러나 세상이 이제껏 그 유례를 보지 못했던 독창력과 본질에 대한 파악력,결정의 솔직함을이들에게 주게된 어떤 일이 일어났다.

또한 그 힘도 도덕적 차원에서의 힘으로 나타났다. 그들 중 어떤 이들은 인간을 삼키며 멸망시키는 정욕에서부터 구함을 받았다. 어떤 이들은 맹렬하고 끈질긴 유혹과 싸워야 했으며 어떤 이들은 부패의 소굴이었던 도시에서 살아야만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 좁은 길을 흰옷을 입고 더럽히지 않은채 바로 예수님의 정결함과 같은 정결함을 지니고서 걸어갔다. 또한 그힘은 영적 차원에서의 힘으로 나타났다. 그들이 가는 곳마다 다른 사람들의 삶이 변화되었고 듣는 영혼들이 구원을 받았으며 능력있는 은헤의 역사가 나타났다. 그들은 일순간이라도 이 모든 힘이 그들에게서 나온 것이라고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그힘에 대한 그들의 설명은 즉시 믿을 수 없을만큼 단순하고 대담한 것이었다. 그 힘은 그들 속에 계신 그리스도였다. 그것은 그때에도 쓰여지고 있던 새로운 복음이었다. 그것은 그리스도에 관한 이야기에 있어서 새롭고 놀라운 국면이었다. 바로 이것 때문에 그들은 어떠한 것도 그들을 좌절시킬 수 없으며 그들의 모험을 패배시킬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스도의 기치를 높이 들고 하나님의 힘으로 전진하여 진리의 복음 빛이 온세상에 비치게 하리 슬픔과 죄와 더불어 싸워 그 사로잡힌 자를 자유케 하여 큰 물이 바다를 덮듯이 가득하게 하리.

그리스도로 왕을 삼으려는 열망

최초의 제자들로 하여금 세상에 나가 예수께서 하나님과 主되심을 증거하게 했던 것은 네 가지 사실로 나타난다. 이 네가지 사실은 오늘의 달라진 상황에서도 여전히 모든 진실한 제자들에게 증거할 의무를 지우고 있다.

그 첫째는 예수님 자신의 명령이었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마28;18-19). 이러한 세계적인 시야는 시초부터 예수님의 생활과 교훈의 특색이 되어왔다.(마5:148:1124:14, 26:13) 그러나 이와같이 분명하고 확정적인 명령이 이제 그들의 귀에 울리자 제자들은 주님께서 그들에게 요구하고 계신 것이 무엇인지 확실히 알게 되었다. 누가는 예수님께서 그 따르는 자들에게 그 명령을 주실 때[예루살렘에서부터 시작하여]란 말을 덧붙이신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눅 24:47).이것은 매우 흥미있는 암시,즉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것은 그가 있는 바로 그곳에서 부터 시작되어야 한다는 암시하고 할 수 있다. 예루살렘은 제자들이 그들의 선생을 버리고 도망했던 수치스런 실패의 장소였다. 이제 바로 그곳에서 그들은 모든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예수님을 증거하고 옹호하여야 했다. 예수님을 죽였던 바로 그 도시가 예수님 자신의 명령에 의해 맨 처음으로 복음을 받게 되었다는 것은 예수님에게 항상 있었던 사랑과 인내 그리고 용서의 정신과 훌륭하게 조화되는 일이라 하겠다. 그러나 그 메시지는 비록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였을지라도 온 세계로 퍼질 것이었다. 이것이 주님의 명령이었다. 그리고 그 들은 주님과의 교제가 그 명령을 순종하는 것에 달려 있다는 것을 알았다.

이 세상에서 하는 그리스도인의 모든 봉사의 배후에는 언제나 이 명령이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친구들에게 세상에서 자신을 증거해 줄 것을 부탁하시는 것이 아니다. 그는 그것을 의무적인 것으로 요구하고 계신다.[너희가 나의 명하는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요15:14).기독교란 그리스도를 천재나 예술가 또는 선생으로 존경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기독교는 그리스도를 명령하시는 분으로 생각하고 그에게 복종하는 것을 의미한다.[너희도 명령 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루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의 하여야 할 일을 한 것 뿐이라 할찌니라](눅17:10).사람들이 종종 말하듯이 본국에서 해야 할 일이 많이 있고 그들이 나아가는 길 뒷쪽에 아직도 점령하지 못한 요새가 많음에도 불구하고 왜 교회가 땅끝까지 복음을 전하러 가야하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없다고 말한다면,우리는 다음과 같이 즉 종교가 스스로를 전파하며 널리 퍼뜨리지 않는다는 것은 바로 그 종교의 죽음을 의미하며 또한 이 문제가 어떤 의미에서든지 아직도 여전히 미해결 문제이라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틀린 것이라고 대답해 주어야 한다. 강조해서 말하지만 이것은 미해결로 남아있는 문제가 아니다. 예수님의 중대한 명령은 그 문제를 단번에 결정지워 버렸다. 이 문제를 놓고 아직도 논쟁을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감히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잘못을 찾아내고 고치려는 자와 같다. 이것으로 그러한 주장의 논거는 파괴된다. 예수님의 판정은이미 내려졌다. 그리고 그는 그 판정에 순종할 것을 요구하신다.

제자들은 세상에 내 보내어 증거하게 했던 두번째 사실은 상황의 위급함이었다. 그들은 세상의 종말이 가까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 종말은 그들이 살아있는 동안에 올지도 모랐다. 바로 예수님께서 그들 중 어떤 사람은 인자가 그 왕국으로 오는 것을 볼 때까지 죽음을 맛보지 않으리라고는 그들에게 확언하지 않으셨던가?(마16:28)[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이 일이 다 이루리라](막 13:30)는 예수님이 말씀이 그들 마음속에 새겨져 있지 않았던가? 조말이 오기 전에 온 세계의 복음화가 이루어져야 한다면 분명히 시간은 촉박했다.[또 복음이 먼저 만국에 전파되어야 할 것이니라](막 13:10). 왕 그리스도의 사업은 분별없는 세상이 멸망해 가는 지금 서두를 것을 요구하고 있다.어느 곳에서나 사람들은 어둠과 죽음의 그림 속에서 희망없이,믿음없이,절망적인 파멸속에 앉아있었다. 그리고 종말은 서둘러 오고 있었다. 이러한 위급한 상황이 그리스도의 제자들로 하여금 뛰쳐 나가 복음을 전파하게 했다.

이것 역시 오늘의 그리스도인들에게 복음 증거의 의무를 지우고 있다. 오늘의 세계적 상황 속에서 발견하는 한 가지 놀라운 요소는 사람들에게서 나타나는 옛 신앙과 윤리 체계의 붕괴이다. 이들에게는 아무런 지침 원리도 없으며 마치 나침판이나 키도 없이 폭풍의 바다위에 떠있는 배와 같다. 만일 우리가 이 상황을 그리스도와 대면하게끔 하지 않는다면 이 상황이 결국 우리를 압도하여 세계를 혼한 속에 빠뜨릴 것이라는 생각은 단순히 기우에 불과한 것이 아니다. 오늘의 시대는 예수님과 함께하며 그를 믿는 자 모두가 위급한 상황에 의해 자신이 이 세상에서 예수님에 대한 산 증인이 되도록 부름을 받고 있다는 것을 느껴야 할 때이다.

제자들로 하여금 뛰쳐 나가 복음을 전하게 했던 세번째 사실은 복음의 영광이었다. 그들은 세상에서 그 유례가 없었던 어떤 것을 발견했다. 복음 속에는 예를 들자면 용서의 기이함이 있었다. 다른 종교들은 죄를 지은 자들에게 힘들고 고통스런 노력으로 천천히 다시 도덕적인 고상함에 이를 수 있는 길을 말해 주었으나 기독교는 가장 누추하고 더러운 영혼을 감싸 주시는 공포로 인하여 항상 얽매여 왔다. 그러나 여기 그리스도께서 사망을 정복하셨기 때문에 죽음의 냉혹한 얼굴 앞에서 미소 지을 수 있었던 사람들이 있다. 더우기 세상 사람들의 반 이상은 하나님을 질투심 많고 위협적이며 달래기 힘든 폭군으로 생각하였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께서는 사랑이시며 오직 사랑만이시며 영원히 사랑이시라는 것을 알았다. 또한 이 사실에 대한 깨달음이 말할 수 없는 기쁨으로 그들의 마음을 떨리게 했다. 그들은 세상이 꿈꾸어 보지도 못한 한 실재를 발견했다. 그것은 바로 복음의 영광이었으며 이것이 그들로 하여금 뛰쳐 나가 온 세상을 불타 오르게 하도록 하였다.

희랍의 옛 격언에 [횃불을 가진 자는 그 불을 다른 사람에게 전해주어야 한다]는 말이 있다. 오늘날 그가 신앙하는 복음이 인류의 마음속에 들어 온 가장 영광스러운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제자라면 누구나 그 복음의 선포자가 되어야 할 의무가 있다. [카이로]의 [템플 가드너]가 표현한대로 [만일 그리스도께서 그러한 기도(겟세마네와 갈보리에서의기도)를 하신 것이 사실이라면 당연히 온 세계가 그것을 알지 않으면 안된다]는 이것이 선교 사명에 대한 진정한 호소이다. 기독교 메시지의 한 가운데는 숭고하고 사람을 끄는,그리고 경모할 만한 예수 그리스도 자신의 모습이 우뚝 솟아 있다. 복음의 이러한 영광은 우리로 하여금 증거하지 아니할 수 없게 만들어야 한다.

네번째 사실은(실제로 이것이 다른 세가지를 포함한다. 최초의 기독교 신조 속에 구체적으로 표현되었던[예수는 구주시다]라는 확신이었다. 바로 기독교의 최초 설교는 [너희가 십자가에 못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행2:36)는 말에서 그 절정에 이른다. 바로 예수님이 주되신 이 사실이 모든 것의 핵심이었다.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주된 것을... 우리가 전파함이라](고후 4;5) 는 바울의 진술에 초대교회 모든 설교의 주제가 요약되어 있다.[예수는 주이시다]라는 단수난 고백이 초대 교회의 유일한 신조이었다(롬 10:9,고전 12:3,행10:36).이천년 동안의 기독교 역사는 이 칭호를 흔히 듣는 말로 만들어 그것이 우리에게 주는 경이감이 띵무디게 한 것 같다.그러나 최초의 제자들이 구약으로 부터[主]란 칭호를 빌려 (주란 말은 히브리어[여호와]의 헬라어 번역이다] 그들이 갈릴리에서 함께 길을 걸어 다녔던 그들의 선생에게 그 칭호를 적용했을 때 그들이 의미했던 것은 그들에게 온갖 것을 베풀어 주셨던 친구 예수님이 장차 온 인류를 심판하는 재판장이 될 것이라는 것이었다. 그들이 그 억양하나까지 알고 사랑했던 그 음성이 마치 나팔소리처럼 온 세계를 일깨울 것이라는 것이었다.세상의 나라가 그의 것이 될 것이며 그는 참으로 주가 될 것이라는 것이었다. 그들의 선생이 전에 그랬던 것처럼 그 제자들도 사람에게서 종종 멸시 받고 배척당하였을런지 모른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겪으면서도 그들은 그들의 꿈을 잃지 않았으며, 그들의 지도자를 위해 시저가 생각해 보지도 못했을만큼 광대한 왕국을 바라보면서 그를 위해 [알렉산더]의 세계정복을 무색하게 할 세계적 전략을 계획하였다.

제자들은 그들을 대적하고 경멸하는 바로 그 세상에서 함께 모였을 때 그들은 [그는 만유의 주시라]고 속삭였으며 그들이 쓴 암호는 [마라나다](주여 오시옵소서)였다(고전 16:22,비교계22:20).[예수는 주님이시다]라는 신조는 그 후에 생겨난 어떠한 신앙 고백보다 훨씬 간단한 것이지만 그 의미나 세상을 뒤흔든 효과에 있어서 결코 덜 심오한 것이 아니다.이 고백을 충실히 적용한다는 것은 먼저 개인 생활의 모든 분야 위에, 그리고 세상 모든 사람의 생활 위에 예수님의 절대적 주권을 주장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 고백은 그리스도를 위한 온 우주의 왕좌를 의미한다. 또한 그 시초에 그랬던 것과 마찬가지로 지금도 여전히 대담한 주장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실제성과 정직하게 직면했던 사람이라면 누구도 그 왕좌가 당연히 그리스도의 것임을 의미하지 못한다. 그 왕좌는 값주고 사신 것이었다.

돌로 떡을 만드시려 하지 않았기 때문에 광야에서 당하셨던 배고픔으로,인간의 죄로 인해 흘리셨던 눈물로 핏방울 같이 떨어졌던 겟세마네에서의 땀으로, 사망으로 그의 몸을 부서뜨렸던 쓰린 십자가로,잃어버린 세상을 그대로 버려두기를 단호히 거부했던 영원한 사랑으로 사신 것이었다. 인류의 대장이신 분이 스스로 낮아지셔서 사병과 같이 되셨다. 그는 일반 사병 그 훈련을 견디어 내셨다. 그가 지금 말을 타고 군대의 맨 앞장에 서 계신다면 그것은 언젠가 그가 도보로 행군하셨던 때문이다.장차 그가 모든 인류 위에 왕이 되시기로 되어있다면 그것은 그가 처음에 우리를 형제라고 부르시기를 부끄러워 하지 않으셨기 때문이다. [이러므로]바울은 이 한마디에 예수님의 고난과 슬픔의 전 내력을 잘 요약하고 있다.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셨다](빌2:9). 참으로 그리스도의 주권은 값을 주고 사신 것이었다. 이 그리스도는 큰 시련을 겪으신 분이었다. 따라서 이제 그는 왕좌에 앉게 된 것이다. 우리의 양심은 그 왕좌가 마땅히 그에게 주어진 것이라고 증거한다. 예수님께서 그 수하에 부하들을, 그의 명령을 행하는 보이지 않는 군대를 거느리고 계시며, 그 배후에 왕국의 모든 위엄과 무게를 지니고 계신 것을 본능적으로 느꼈던 가장 깊고 참된 모든 것으로 그의 왕국은 결코 쇠하지 않으며 장차 하늘과 땅의 온 우주가 그말을 주로 시인할 것이라는 것을 느끼며 안다.

예수께서 다스리스다

그 날은 아직 밝아오지 않았다. 그러나 천천히 그리고 한결같이 가까이 다가오고 있다. 이미 생이 서로 만나는 곳에 예수님께서 우뚝 서 계시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먼저 국가가 서로 만나는 곳에 예수님께서 우뚝 서 계신다. [칠레]의 영토와 [아르헨티나]의 영토가 맞닿는 [안데스]산백 높은 곳에 못쓰게 된 대포를 녹여 만든 거대한 그리스도의 동상이 서 있다. 그 동상 아래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새겨져 있다. [차라리 이 산들의 위치에서 생의 투쟁의 고난과 위험을 겪으셨다.그는 이 무너진 티끌이 될지언정 [아르헨티나]국민과 [칠레]국민은 그들이 구속주 그리스도의 발 아래에서 맹세한 평화를 깨뜨리지 않을 것이다]그 다음 계급이 서로 만나는 곳에 예수님께서 우뚝 서계신다. 구세군을 창설한 [부스]목사는 어떤 사람의 팔도 부자와 가난한 자에게 동시에 손을 뻗어 닿을만큼 길지는 못하다고 주장하곤 했다. 물론 인간의 팔은 그렇게 할 수 없을런지 모른다. 그러나 갈보리 십자가 위에서 넓게 벌려졌던 그 팔은 그 사이에 그러나 갈보리 십자가 위에서 넓게 벌려졌던 그 팔은 그 사이에 맞닿는다. 문학이 서로 만나는 곳에 예수님께서 우뚝 서계신다. 이천년 동안 예수님과 그의 피흘린 손과 발, 그리고 그의 타오르는 듯한 눈길이 세계의 문학에서 떠난 적이 없었다. 여미문학의 두 거장이었던 [칼라일]과 [에머슨]이 칼라일의 집에서 함께 만난 적이 있었다. 그들이 우주의 모든 일들을 논하면서 언덕 위를 걷고 있었을 때 조그만 시골 교회가 저 아래에서 시야에 들어왔다. [칼라일]은 멈추어 섰다. 그리고 [에머슨]을 돌아다 보면서 말하기를 [그리스도께서는 나무 위에 달려 죽어셨지요. 바로 그것이 저기에 있는 [던스코어커크]교회를 세웠고 또한 당신과 나르 띵이렇게 만나게 했습니다. 이렇게 보면 시간이란 다만 상대적으로 존재하는 것인가 봅니다.]라고 하였다.

예수님께서는 종교가 서로 만나는 곳에 우뚝 서 계신다.1928년 예루살렘에서 [세계 선교회담]이 개최되기 직전에 모든 비기독교적인 종교에 대한 철저하고 광범한 조사가 실시되었다. 그 결과는 어떠하였는가? [죤 모트]의 말을 비리면 [비기독교적 종교들을 취급하는 일에 있어서 우리가 좀 더 개방된 마음을 가지며 정직하고 공평하며 관대해 질수록 그만큼 더욱 고귀한 그리스도께서 그의 절대적 독특성과 충족성,최고성,보편성 속에 드러나 보인다. 어떤 저명한 [힌두교]인은 [스탠리 죤스]에게 온 세상 사람의 마음에 심각하게 명령하는 분은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아무도 없다]고 말했다. 이미 모든 시대가 함께 만나는 곳에 예수님께서 우뚝 서 계신다. 한 번이라도 옛님을 만나보고 자신의 생활 속에서 그의 능력을 체험해 본 사람에게는 우주의 모든 문들이 그 머리를 들어 그 왕을 들어오시게 할 그날이 가까워 오고 있다는 사실이 무엇보다 분명한 일이다.

이 모든 사실은 참되다. 그것이 참되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의 이야기의 매 장에서 우리에게 부딪쳐 오는 한가지 도전이 있다.[그는 내 생의 지배자이시며 주님이신가?] 매년 수십만의 젊은이들이 첫 성찬에 참여하면서 공적인 신앙고백을 한다. 말하자면 매년 수많은 젊은이들은 공중 앞에 서서 그들이 그리스도를 만유의 주고 받아들이겠다는 서약을 하는 것이다. 만일 수 많은 젊은이들이 온 힘을 기울여 그리스도를 증거한다면 어떤 일이 일어나겠는가 생각해 보라! 만일 우리의 삶이 [만일],[그러나]등의 조건이나 보류없이 참으로 철저하게 그의 것이 된다면 어떤 일이 생길 것인가 생각해 보라! 이것이 우리에게 무엇을 의미할 것인가를 생각해 보라. 우리 주위의 세상에 그리고 그리스도에게 무엇을 의미할 것인가를 생각해 보라.

오, 저기 거룩한 무리와 함께 그의 발 아래 엎드리고저! 영원한 노래를 함께 부르며 만유의 주께 면류관 바치리.

매일 성경


 마태복음  28:16-20   사도들의 사명
 요한복음  16;1-15    그리스도의 영
 사도행전   1:1-12    예수님의 승천
 고린도전서 12:1-6    주님되신 예수
 골로새서  1:16-20    예수님과 우주
 계시록   19:11-16    정복한 것과 정복해야 할 것
 계시록   22:12-21    주님의 재림

 

토론을 위한 문제

1.오순절에 실로 무엇이 일어났는가?

2.세계 선교와 기독교인의 연합과의 연관성에 대해 토론해 보라.

3.[예수는 주님이시다]라는 신앙고백은 국가정치와 국제정치에 어떤 관계를 가지는가?

4.오늘의 교히는 재림교리를 충분히 강조하고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