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배함

본 문 : 마태복음 2:9-12
우리는 지금 그리스도의 탄생편을 공부하고 있습니다. 몇회를 거듭하여 공부하는 중에,
첫번째로 그리스도의 출생은 신기한 별로 인도하신 하나님과 그 별을 따라온 박사들이 즉 하늘과 땅으로부터 왕으로 인정되신 것입니다.
두번째는 구약의 말씀을 잘 아는 유대의 박사들은 메시야에 관하여 지식적으로는 알았지만 믿고 순종하지는 않았습니다. 오히려 이방 박사와 무식한 목동들이 영의 눈을 떠서 아기 예수가 오시리라 한 메시야임을 알아보고 경배했다는 사실입니다.
세번째는 구약이 끝난 지 4여백년이 지난 후에 태어나신 예수님에 대하여 이방 땅에서 믿고 경배하는 자가 나왔듯이 하나님은 이 순간에도 사람들이 예상하지 못하던 곳에 당신의 사람들을 예비하신다는 것입니다.
네번째로 여행이 큰 모험이요 위험이었던 당시에 박사들이 먼 여행을 하여 마침내는 메시야를 보았듯이 우리도 신앙의 먼 여행 끝에 하나님을 볼 것이라는 소망을 주신 것입니다.
이러한 교훈들을 우리의 가슴에 새기면서 새해를 맞이하여 우리도 예수님과 함께 인생의 여행을 하는 새 출발의 이 아침이 되시기를 바라면서 오늘의 말씀으로 은혜를 함께 나누시겠습니다.

첫째, 인생의 길은 별에 의하여 인도함을 받는 여행길입니다(9-10).
동방에서 별을 보고 온 박사들은 예루살렘으로 왕을 경배하려 갔습니다. 이것은 별의 지시함이 아니라 사람의 천연적인 관념에 의한 것입니다. 예루살렘은 유다나라의 수도입니다. 하나님의 성전이 있습니다. 사람의 생각으로는 의연히 그럴듯합니다. 그러나 이것이 잘못입니다. 생명의 주님은 사람의 지혜로 찾게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를 주님께 인도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주님은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나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요 5:39)" 하셨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생명이십니다. 이 주님에 대하여 성경이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주님을 만나기 위하여 마땅히 성경을 찾아 보아야 할 것입니다. 언제나 인간적인 관념은 하나님의 노선으로부터 벗어나게 합니다. 사람의 생각과 하나님의 생각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여호와의 말씀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사 55:8)" 차이가 있다고 하십니다. 사람의 지혜로, 사람의 이론으로, 사람의 판단으로 길을 잘못 들어섰을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와야 합니다. 미혹 되었을 때에 우리에게는 성경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잘못된 길로 나아가면 올바른 길이 요구되는데 그것은 오직 한 권의 책인 성경 안에 있습니다. 동방의 박사들도 잘못된 곳인 예루살렘에 간 후에 성경을 통하여 그 길이 바로 잡아졌습니다. 성경으로부터 그들은 올바른 장소가 예루살렘이 아닌 베들레헴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만일 박사들이 자신들의 판단으로 잘못되지 않았더라면 틀림없이 별은 그들을 예수가 계신 베들레헴으로 곧바로 인도했을 것입니다. 그 귀한 사실이 즉시로 입증 되었습니다. 그들이 비로소 예수님이 계신 곳을 올바르게 알고 길을 돌이켰을 때에, 동방에서 보던 별이 문득 앞서 인도했습니다. 별은 가다가 아기 있는 곳 위에 머물러 섰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찾는 인간들을 미궁에서 헤매이게 하시지 않습니다. 언제나 명확하고 간결하게 인도해 주십니다. 다만 사람들이 헤매이는 것은 미혹에 이끌리기 때문입니다. 박사들은 별을 보고 가장 크게 기뻐하고 기뻐했습니다. 그러나 박사들이 기뻐하던 것만으로 족해서는 안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종종 주님을 알기 위해서는 성경을 알고 있는 것만으로 족하다고 말합니다. 그럴 수 있겠다고 생각하지만 우리는 한 발 더 나아가 보다 분명한 의미를 알아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그 말씀에 대한 산 이상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가지고 있고 그리스도는 가까이 다가오고 계시지만, 어떻게 그 분을 발견 하겠습니까. 성경 말씀만 알고 있어서는 안됩니다. 그리스도를 발견할 수 있는 기본 원리는 산 별 곧 하늘의 이상에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어떻게 이 별을 가지며 그 이상을 가질 수 있는지 성경을 더 깊이 상고해 보십시다. 성경은 우리에게 산 별이 그리스도임을 말합니다. 그리스도는 별이실 것이고(민 24:17) 그 분은 별로서 오셨습니다(마 2장). 또한 그 분은 별로서 계실 것이라고 합니다(계 22:16). 주님은 어두운 밤 하늘의 별처럼 빛나고 계십니다. "흑암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비취었는데(마 4:16)" 그것은 주님이 큰 광명의 별로서 비취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별이신 그리스도를 가질 수 있을까요. 별은 성경과 연관됩니다. 베드로후서가 그것을 말해줍니다. [분명한 예언의 말씀]에 주의하라고 합니다. 그리하면 우리 안에서 무언가가 떠오르 것이라고 합니다. "또 우리에게 더 확실한 예언이 있어 어두운데 비취는 등불과 같으니 날이 새어 샛별이 너희 마음에 떠오르기까지 너희가 이것을 주의하는 것이 가하니라(벧후 1:19)" 이 말은 단지 말씀을 읽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무언가 일어날 때까지 말씀 안으로 들어 가라는 것입니다. 동방의 박사들에게 제사장들은 단지 그 장소를 일러만 주었습니다 이것은 성경의 역할입니다. 헤롯은 장소를 찾아보라고만 하였습니다 이것은 설교자들의 역할입니다. 그러나 박사들은 그 장소를 찾기 위하여 출발하였습니다. 그 때에 별이 나타났습니다. 성경은 이것을 여명 곧 샛별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성경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을 별이라고 말합니다. 그리스도의 사자들을 별이라고도 합니다(계 1:20). 많은 사람을 옳은데로 돌아오게 하는 사람도 별이라고 합니다(단 12:3). 그들은 빛나는 사람들로서 옳은 길을 비춰주는 밤 하늘의 별과 같기 때문입니다. 별을 가지는 두번째 방법은 영과 교회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주 예수님이 새벽별이라고 말하는 요한계시록 22장 16절 바로 다음 구절은 "그 영과 신부가 말씀하시길..."이라고 말합니다. 새벽별은 그 영과 신부인 교회와 연관되어 있음을 증명합니다. 예수님은 일곱 영과 일곱 별을 가지고 계시며(계 3;1), 이 일곱 별은 일곱 교회의 사자들이기도 합니다(계 1:20) 별은 그 영과 연결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교회들과도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은 옳은 말입니다.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이며 교회의 생명은 영의 생명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성령과 교회와 그리스도는 떼어서 말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영은 교회를 통하여 역사하십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오시는 진리의 성령은 주님의 몸이신 그 교회에 부어 지십니다. 우리가 별을 발견하는 방법은 진리대로 순종하는 교회 안에서 그 가르치는 말씀인 성경을 통하여 성령님의 감화를 받아야 비로소 알게 되는 것입니다. "당을 지어 진리를 좇지 아니하고 불의를 좇는(롬 2:8)" 교파주의 안에서는 별을 발견할 수가 없습니다. 별이 없으면 예수 그리스도를 찾아갈 수 없습니다. 지식은 곧 실천을 가져다 주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의 별을 따라가는 순례의 길만이 완전한 그리스도인의 로정입니다.

둘째, 그리스도인은 주님께 경배하고 예물을 드리는 인생들입니다(11절).
동방의 박사들은 그리스도를 발견했을 뿐 아니라 또한 그 분께 경배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참된 경배의 요소를 알아야 하겠습니다. 이스라엘들로서는 어떤 사람도 다른 사람들로부터 경배받는 것이 허락되지 않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모욕하는 것이며 그 분을 경멸하는 것으로 간주 됩니다. 참 이스라엘은 오직 하나님께만 경배합니다. 그러나 박사들은 이스라엘로 태어나신 아기께 경배했으며 그 아이는 하나님이셨습니다. 이사야 9장 6절은 이미 이 아기에 대하여 예언하고 있습니다. "한 아이가 우리에게 났고... 그의 이름은...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칭하리라" 박사들에 의하여 발견된 아이는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불리우셨습니다. 박사들은 그 분께 경배했으며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드렸습니다. 이 박사들의 처신은 참으로 의미심장합니다. 그들이 왕을 대면한 광경을 성경은 자세히 기록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짧은 한 구절의 말씀으로도 우리는 박사들이 무엇을 하였는지 확연히 알 수 있습니다.
박사들은 집에 들어가 아기와 그 모친 마리아의 함께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아기 왕을 본 순간 박사들의 마음은 어떠했을까요. 즉시 꿇어 엎드렸습니다. 아기께 경배했습니다. 자신들의 무릎, 손, 심지어는 입술까지 그의 앞에서 땅에 접촉 시킵니다. 이런 행동들은 바로 그 아기에게서 그들이 찾던 임금을 발견하였음을 보여 줍니다. 그리고 더욱 의미심장한 것은 그들이 드린 보배였습니다. 그들은 이 보배를 심히 먼 곳으로부터 조심스럽게 운반하여 왔습니다. 다른 모든 사람들에게 감추었다가 왕을 위하여 [열어 보인] 것입니다. 우리는 황금과 유향과 몰약의 의미를 알아야 합니다. 상전이나 왕을 만날 때에 특별한 예물을 가져오는 것은 고대 세계에서는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보통 그러한 예물은 서로가 주고받는게 상례였습니다. 이 장면은 고대세계에서 통상적으로 행해지던 관습이었다는게 암시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리스도의 지상명령(마 28:19)을 통하여 모든 이방인까지도 유대인의 교제에 동참하여 풍부한 결실을 맺게 되었다는 사실을 이해하셔야 합니다. 박사들이 바친 황금은 조공을, 유향은 존경을, 몰약은 보존을 의미한다고 해석하는 학자들이 있습니다. 황금은 인간이 가장 중요한 가치 관념을 나타낼 때에 쓰입니다. 유향은 반질반질하고 향내나는 고무로서 나무 껍질에 자국을 내어서 얻어집니다. 몰약은 아라비아와 그 밖에 몇 안되는 지역에서 자라는 나무에서 추출해 내는 것으로서 상당히 값지고 높이 평가되는 향기를 지닌 것입니다. 이 용도는 시체를 썩지 않도록 미이라를 만드는 방부제로서 쓰입니다. 이런 예물들의 성질로 보아 황금은 왕권을, 유향은 신성(神性)을, 몰약은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을 상징한다고 해석하기도 합니다. 성경의 예표론으로 보면 금은 신성한 본질을 상징합니다. 이것은 아기 예수가 신성한 본질을 가지고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그 분은 신성하셨습니다. 유향은 부활의 향기를 상징합니다. 부활은 죽음 후에 오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당신이 죽기 전에 이미 마리아와 마르다에게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 11:15). 따라서 주님은 죽기 전에도 부활이셨습니다. 사실 그리스도의 이 땅의 삶은 부활의 생애이셨습니다. 몰약은 죽음과 또한 죽음의 향기를 상징합니다. 인간에게는 사망의 향기라는 말이 있을 수 없습니다. 더럽고 고약한 냄새만이 있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주님께는 죽음의 향기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항상 십자가의 죽임아래 놓여 계셨습니다. 그의 생애는 십자가를 지시기까지의 33년 반의 생애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전 생애가 계속적으로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고귀한 몰약의 특성을 마지막 십자가에서 보이신 것입니다. 이 세가지 예물이 값 비싼 것은 사실이나 그 당시 그리 드문 예물은 아니었습니다. [보배합]이라는 단어는 [귀중품 상자] 또는 [보물 상자]를 의미합니다. 이 귀한 예물들이 보물 상자에 담겨져 오직 왕의 왕인 주님께만 보여졌습니다. 그리고 이 예물들은 예수의 가족이 애굽으로 피난갔을 때에 사용되어 도움을 주었을 것은 자명한 일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귀중한 교훈을 얻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어떠한 경우에도 그리스도께만 경배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다른 것을 그리스도와 같은 위치에 두고 경배의 대상으로 삼아서는 안됩니다. 또한 주님을 경배하는데는 그에 따르는 마땅한 예물이 있어야 합니다. 그것은 우리 세계에서 흔한 것들일 수 있지만 뜻과 정성이 담긴 고귀한 것이어야 합니다. 만왕의 왕을 뵈옵는데 빈 손을 보일 수가 없습니다.

셋째, 그리스도를 따르는 길은 다른 길로 가는 길입니다(12절).
박사들은 예수님을 경배한 후 다른 길로 돌아가도록 하나님의 경고를 받았습니다. 이 경고는 꿈을 통하여 주어졌습니다. 이 꿈은 복음서에서 두 번째 나오는 장면입니다. 당시는 꿈이나 천사의 현현을 통하여 하나님의 명령이 지시되던 때입니다. 오늘날 너무 꿈에 의지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물론 꿈이라는 것을 너무 무시해서도 안되겠지만 하나님의 지시를 꿈에만 의존해서도 안될 것입니다. 이 다른 길은 원래의 길이 아닌 바른 길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발견하고 그 분을 만난 후에는 원래의 길로 갈 수 없습니다. 항상 다른 길로 가야 합니다. 그 길은 주님이 지시하시는 올바른 길입니다. 동방의 박사들의 귀로가 어떤 길이었는지는 모릅니다. 아마도 그들은 예루살렘을 피하여 사해의 북단으로 돌아갔거나 아니면 사해의 남단으로 돌아갔을 것입니다. 어떤 길도 예루살렘을 거쳐가는 길보다는 험하고 어려운 코스입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시사해주는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사람들은 종교적인 것을 좋아하지만 하나님은 종교적인 것을 원치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대중적이고 상식적인 것을 좋아합니다. 그런 것들은 쉽게 이해하고, 쉽게 용납하고, 쉽게 순종합니다. 예루살렘은 종교적인 도시입니다. 거기에는 거대하고 화려한 성전이 있고 신령하게 보이는 복색을 한 제사장과 서기관들이 우글거립니다. 따라서 종교에 기생하는 권력층이 두텁게 층을 이루어서 권력의 젖을 빨고 있습니다. 각국으로부터 모여든 사람들이 국제적인 분위기를 이루어서 예루살렘의 종교를 더욱 화려하고 멋깔스럽게 치장해 주고 사람들의 눈을 황홀하게 만족시켜 줍니다. 거기에는 충분히 잇권을 챙길 수 있는 다양한 유혹거리들이 있습니다. 오늘날도 종교적인 색채를 짙게 깔고 경전을 외우며 화려하고도 거룩해 뵈는 건물과 복식으로 사람들의 우위를 점하여 대교회로 발전한 교회들이 수두룩합니다. 이런 교회들일수록 그 문은 미어 터질듯이 사람들이 모여들고 성공적인 목회자상을 자랑합니다. 오늘날 교회는 참으로 들어 가기가 대단히 쉽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마 7:13-14). 물론 좁은 문이라고 해서 모두 생명의 문일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넓은 문일수록 하나님의 진리와 담을 쌓고 있다는 사실은 확실합니다. 왜냐하면 진리는 보편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그러면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부드러운 옷 입은 사람이냐 부드러운 옷을 입은 자들은 왕궁에 있느니라 그러면 너희가 어찌하여 나갔더냐 선지자를 보려더냐(마 11:7-9)" 그렇습니다. 광야에는 선지자가 있습니다. 동방박사들의 귀로는 외로운 광야의 길었습니다. 생명의 길, 진리의 길에는 분명히 고독이 있습니다. 어려움이 있습니다. 힘듦이 있습니다. 그것을 마다하면 결코 주님이 원하시는 길로 나갈 수 없습니다. 세례요한은 주님의 길을 예비하고 그의 첩경을 평탄케 하려고 온 사람입니다. 그는 광야에 살았습니다. 약대 털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띠를 띠고 음식은 메뚜기와 석청이었습니다. 부드럽고 탐스럽고 풍요로운 모습이 아닙니다. 결국에는 옥중에서 순교했습니다. 주님은 세례요한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요한보다 큰이가 일어남이 없도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저보다 크니라(마 11:11)" 우리가 세례요한 같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세례요한이 따른 길의 원리를 우리도 좇을 수는 있습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세례요한보다 더 위대할 수는 없지만 주님 앞에서는 그보다 훨씬 더 위대한 상급을 받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자신이 추구하는 안일의 길이 아니라 주님이 지시하는 진리의 길을 걷는 것입니다. 그것은 외로운 순례의 길입니다. 그러나 구도자가 걸어가야 할 길입니다. 내가 지금 생명의 말씀의 길을 걷고 있는지, 진리의 올바른 길을 걷고 있는지 겸손하게 생각해 보아야 할 엄숙한 시간입니다. 지금 여러분 가슴속에 하늘에 빛나는 별이 있습니까.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충만되어 있습니까. 그래서 주님께 흡족할만한 예물로 주님을 경배하십니까. 우리 믿음의 보배합을 열어 마음껏 주님을 기쁘시게 하십시다. 그리고 우리의 가는 길이 어떤 외롭고 힘든 길이라고 할지라도 이 어두운 인생의 밤길을 하늘의 별을 보고 주님 품에 안기시기까지 낙심하지 말고 꾸준하게 걸어 가십시다. 1992. 1. 5 -설 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