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의 배경과 總論

1. 新約의 역사적 배경

1-1. 파사시대
1-2. 알렉산더 시대
1-3. 애굽시대
1-4. 수리아 시대
1-5. 마카비 시대
1-6. 로마시대

2. 新約聖經의 정치적 사회적 배경

2-1. 1.바벨론시대(626-539.B.C)
2-2. 페르샤시대(539-331 B.C)
2-3. 그리이스시대(331-63 B.C.)
2-4. 하스모니안 독립시대(167-163 B.C)
2-5. 로마의 통치시대(63 B.C.부터)

3. 문화적 종교적 배경

3-1. 유대교(Judaism)
3-2. 헬레니즘(Hellenism)
3-3. 로마의 제국주의(帝國主義)

4. 新約의 정경

4-1. 새 계약의 기원
4-2. 新約 聖經을 기록한 동기와 정경화의 과정
4-3. 정경 결정의 원리
4-4. 新約 聖經과 그 권위

新約의 역사적 배경

新約聖經을 연구하는데 있어 그 배경을 모르면 적합한 평가를 하기 어렵다. 따라서 福音과 사도행전에 전제되는 상황을 이해하려면 구약과 新約의 중간시대 즉 마카비 시대(Maccabean age)나, 나아가 바벨론 포로에서 복귀하는 시대로 되돌아 가야 할 것이다. 구약 聖經은 폐르샤 통치하의 이스라엘로 끝을 맺고, 新約聖經은 로마 지배하의 국가로 시작된다.

1.파사시대

바벨론 포로동안 파사인의 바벨론 정복으로 인해 유다는 여러 지도자들이 바뀌었다. 팔레스틴으로의 복귀는 고레스와 헙력함으로 가능했고, 세 사람의 지도자가 그 뜻을 불어 넣어 주었다. 세 지도자란 성전을 세운 에스라, 예루살렘의 성을 재건하고 민족의 경제적 및 영적인 생활을 일깨워 준 느혜미야이다.

단지 적은 수의 국민들만이 그들의 조상의 땅으로 돌아와 다시는 죄를 범치 않을 것을 결심했다. 그러나 그들은 예배와 십일조를 등한히 하게 되었다. 잡혼의 금지도, 안식일의 신성함도 무시하게 되었다(느13). 말라기 시대에 이르러 성직자들은 부패와 나태함을 인하여 심한 비난을 받았다. 이러한 쇠망의 또 다른 부분적 원인은 이스라엘이 혈통적으로 순수성을 잃은 사마리아인들의 성전재건 참여를 거절하므로 심한 적개심을 일으켰고, 요한福音 4장에 언급된 그리심 산에서 예배를 드리는 분열을 초래했다.

2.알렉산더 시대(332-301 B.C.)

이수스(Issus)와의 전쟁과 다리우스(Darius)를 동쪽으로 몰아낸 후에 알렉산더는 파사인을 다시 한번 전쟁터에서 맞아 싸우기 전에 수리아와 팔레스틴과 애굽을 정복하려고 했다. 지중해 동부지방 여러 나라들은 알렉산더와 그의 업적에 의해 영향받은 바 실로 크다.

전쟁을 좋아하는 아버지 필립의 뒤를 따라 철학자 아리스토틀과 협의하며,알렉산더는 그의 아버지보다 더 위대한 전쟁의 천재가 되었고, 그의 선생 아리스토틀 보다도 어떤 점에서 월등했다. 그의 당시의 전략 목적은 캘커스(Xerxes)의 지도아래 파사가 헬라를 침략한데 대한 보복이었으나 그의 원대한 목적은 동양을 헬라화 하려는 문화적인 것이었다. 전쟁에 철학자들과 과학자들이 그를 수행했다. 헬라 태생의 식민지 개척자들이 그의 군대의 뒤를 따랐다. 알렉산더는 동 서 헬라인과 야만인의 격차를 연결하기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고, 정복한 파사인을 높은 지위에 올리고 그도 동양여자들과 결혼했다.

그림설명 / 알렉산더와 테바이 명가의 부인인 티모클레시아의 일화를 묘사한 그림 17세 기 이탈리아의 화가 이루도메니키노 작품.
알렉산더가 팔레스틴으로 옴으로 전략상 중요한 땅은 헬라화(Hellenization)의 물결에 쏠리게 되었고, 이로 인해 유대인의 독특성도 해체되고 후에 국가는 완전히 갈라지게 되었다. 그러나 그의 팔레스틴 정복은 그가 다른 곳에서 받은 개인적인 숭배를 요구하지 않았기에 종교적인 위기를 불러 일으키지는 않았다.

알렉산더의 정력적인 생명은 30대 초반인 323년에 끊어졌다. 이 때문에 제국 통치 문제로 인한 헬라의 장군들간의 오랜 싸움은 끝이 났다. 그중 넷은 비록 톨레미는 실제로는 참여하지 않았지만 입수스(Ipsus) 전쟁(B.C.301)에서 적을 섬멸하자고 결속했다. 이들 중에 동쪽 넓은 영토를 통치한 셀레쿠스(Seleucus)와 수리아 애굽을 통치한 톨레미(Ptolemy)만이 유대인들의 운명에 영향을 끼쳤다. 팔레스틴은 톨레미가 한 세기간 통치하게 되었다. 그러니 수리아는 그를 끊임 없이 괴롭혔으므로 파레스틴은 두 왕국의 전쟁터가 되고 말았다.

3.애굽시대(B.C. 301-198 )

이 당시 애굽의 통치자들은 헬라인들이었다는 사실을 유의해야 한다.톨레미는 지혜있게 그 자신의 몫으로 양식이 충분하고 침략도 별로 없는 부분을 선택했다. 요세지인 알렉산드리아는 알렉산더와 그의 건축가에 의해 세워졌고 곧 상업과 문화로 이름난 헬레니즘 문화의 중심지로 급속히 성장하였다. 처음에 톨레미는 이곳에 큰 도서관을 건립했는데 이것은 약1000년 간이나 있었다.

이때 유대인과 헬라인은 별로 접촉이 없었는데 그것은 부분적으로 유대인이 선원을 직업으로 하지 않았기 때문이고, 할례받지 않은 사람들과 가까이 하지 않기 때문이라 하겠다. 그러나 이제 많은 유대인들이 애굽으로 옮아가서 헬라어를 배우고 헬라문학을 접하게 되었다. 요세프스에 의하면 유대인들은 마게도니아인과 같은 시민권을 받았다고 한다.

모세 오경(pentateuch)이 헬라어로 번역된 것은 필라델프스 통치 기간 동안이었다. 그후 구약의 다른 책들이 잇따라 번역되었다. 이 시기에 팔레스틴은 조용히 헬레니즘화 과정을 맛보게 되었다. 헬라어의 언어, 예술,축제나 놀이 등의 헬라적 생활 양식의 매력에 접하게 된 것이다. 그런가 하면 사람들은 원형극장이나 공동 목욕탕에 드나들게 되었다. 유대 민족의 예배를 간섭하려고 하지 않는한 이 문화적인 영향은 격렬한 반대 없이 진행되었다. 그 다음 시기에 예배에 대한 간섭이 있었으며, 팔레스틴의 유대민족이 그 뿌리에서부터 흔들리는 결과가 초래되었다.

4.수리아 시대(B.C.198-167)

애굽의 통치를 해치려는 수리아인들의 노력이 끝내 성공을 보게 되었다. 판네아스(Paneas)전쟁(198)에서 안디오커스대제(Antiochus the Great)는 스코파스(Scopas)와 그의 군대를 격퇴시켰다. 얼마 후에 안디오커스는 로마인에 의해 패배를 맛보고 공물을 마치게 되었다. 그의 계승자는 집정중에 재정상 곤난을 회복키 위해 예루살렘에 있는 성전의 보물을 약탈하려고 했다. 수리아와 유대 관계의 위기는 안디오커스 4세(Epiphanes)의 통치 동안에 생겼다. 그는 유대 민족 의 종교적인 생활까지를 규제하여서 완전히 헬레니즘화하여 강력한 국가를 소유하기를 갈망했다. 그는 화폐에 "신(神)은 왕 안디오커스를 승리자로 명시한다".고 새겨서 그의 신성을 과시했다.

유대의 헤레니즘화에 대한 충돌은 유대인 중에 헬레니즘화 지지파와 반대파 사이에 있었다. 헬레니즘화 지지파들은 안디오커스를 지원함으로 오히려 공세를 취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헬라적 삶의 양식을 반대하는 사람들에게 큰 압력이 미쳤다. 그러나 강제로 헬라화하려는 군주의 행동은 오히려 반항정신을 일깨웠고 폭동을 빚어냈다. 반대 그룹은 하시딤(Hasidim)(경건한 자들)이라고 알려졌다. 그들은 배교의 물결속에 있는 유대 관습과 종교를 보존하려는 자들이었다.

안디오커스가 애굽에 있을 때 그 상황은 절정에 이른다. 두 지방 사람들은 대제사장직을 놓고 싸웠고 그들 추종자들 사이에 싸움이 일어났다. 이러한 소동을 알고 왕은 유대가 그에 대해 반란을 일으키고 있다고 생각하고 돌아와 그의 군대들에게 공격하라고 했고 이로 인해 많은 목숨이 없어졌다. 이로 인해 기분이 상한 그는 왕의 법령에 의해 유대인을 완전히 헬라화하겠다고 마음먹고 유대주의 습관을 금지시켰다.

이에 반대하는 자들은 죽임을 당하거나 노예로 끌려갔다. 안식일을 지키는 것이나 할례, 성전예배는 금지 되었고, 성서는 파괴되었다. 마침내 168년 12월에 안디오커스는 성기(聖器)와 성전의 보물을 몰수하고 이교도 희생의 제단인 구리제 단(brazen altar)을 세워 돼지를 제물로 바쳤으니 유대인에겐 말할 수 없는 치욕이었다. 이로 인해 반항하다 순교한 사람도 많았다. 유대교가 이제 살아지는가 싶더니 갑자기 격렬한 힘으로 타 올랐다.

예루살렘을 떠나 모딘(modin)이란 곳에 머물고 있던 마타티아스(Mattathias)란 제사장은 이곳에서도 이 문제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헬라의 관원이 와서 이교도 예배를 주도하는 제사장이 되라는 말을 거절하고 다른 유대인이 그의 직책을 맡았을 때 그 유대인을 죽이고 헬라 관원도 죽였다. 그리고 그의 아들들을 데리고 두메 산골로 도망을 했다. 이 사건으로 방방곡곡에 반란이 일게 되었다.

5.마카비 시대(B.C.167-63)

다른 사람들도 바란에 참여하고 당국에 대한 게릴라전에 협조하였다. 처음 충실한 유대인들은 적들이 전쟁하는 날을 안식일로 택해서 하므로 고전을 면치 못했다. 그러나 마타티아스와 그의 아들들은 그의 무리들을 힘에는 힘으로 싸우라고 격려했다. 지금 안식일을 몇번 범하고 나중에 지키는 것이 적에 손에 죽는 것보다 나은 것이라 하였다. 마타티아스는 곧 죽었으나 그의 아들 유다 함머르(Hammerer) 마카비가 지휘하게 되었는데 숙련된 훌륭한 지도자였다. 점차 유대 인들은 게릴라전에서 공식적인 전투를 하게 되었고, 수리아 수비대에 의해 지켜지고 있는 요새 한 곳을 제외한 전 예루살렘을 관할하게 되었다. 지성소는 말끔히 치워지고 하나님께 바쳐졌다.

요나단이 그의 형 유다의 뒤를 이어 독립운동의 지도자가 되었다. 그는 국내의 친 헤레니즘파를 억누름과 동시에 유대 밖에서 무력을 사용할 줄 알았다. 유대인들은 그의 뒤를 이은 형제(동생) 시몬의 지도 아래서 정치적인 독립을 달성했다. 이 때가 143년 경이었고, 이 새 시대는 로마인들이 나라를 통치할 때까지의 약 80년간 계속되었다. 당분간 로마는 유대인들의 독립을 인정했고 간섭하지 않았다. 한편 시몬은 국민의회(國民議會)에 의해 훌륭한 선지자가 나올 때까지의 대제사장 軍지도자 국민의 통치자로 결정 되었다.

이두메아(Idumea)나 특히 이전에 종교적인 박해의 고통을 경험한 민족이 유대 밖의 사람들에게 행한 유대교 강제 부과 정책에는 다소 모순이 있었다. 군사력은 용병을 기용함으로 유지 되었는데 가끔 유대인의 적으로도 사용되었다. 외부의 침략이 없어 자유를 향유하였음에도 불구하고이 시기는 황금시대는 아니었다.

6.로마시대(B.C.63 이후)

로마는 얼마동안 애굽과 소아시아에서, 후에는 수리아에서 활약했다. 로마가 유대인들의 문제에 개입한 것은 왕위를 놓고 다투던 아리스토부루스(Aristobulus),힐카누스(Hyrcanus)형제가 다메섹에서 폼페이(Pompey)에게 항복하고서 국민이 그들을 반대하고 제사장의 법도를 신설하는 대표자를 보낸데 반대해 당혹케 된 때이다. 폼페이는 적절한 때에 결정을 하겠다고 약속했다. 그가 예루살렘으로 오자 그 민족들은 의견이 여럿으로 갈렸고 문밖의 로마 군대를 보고 마음이 ㅍ치 않았다. 아리스토부르스(Aristobulus)파가 그가 성전 지역으로 들어가는데 방해하자 폼페이는 무력을 사용했다. 이 사건으로 수천명이 죽고 로마의 점령은 잔혹성을 나타내기 시작했 다. 유대인에게는 많은 공물이 부과되고 헤스모네안 규약에 의해 점령지의 많은 도시인들은 놓여나 수리아 영토의 관할하에 놓이게 되었다.

유대인들이 로마 권력에 대항해 싸울 투사로서 왕가 사람들을 믿고 있는 한 반란의 위험은 분명히 있었다. 아리스토부루스와 그의 두 아들이 살아있는 동안 독립의 염원은 꼭 폭발할 듯하였다. 로마 정치의 혼란은 유대인들이 자기들의 통치로 복귀할 수 있으리라 믿게 했다. 공화국은 원로원이 효과적인 지도력을 상실하고지도자의 무력과 민중의 지지를 수단으로 권력을 차지하려는 데서 큰 시련에 빠지게 되었다. 폼페이,시저,크라수스는 B.C.60년에 제1회 3두 정치를 결성했다. 의견이 엇갈리자 시저는 집정관으로 우세한 위치를 차지했다.

팔레스틴에 그는 몇몇 중요한 변화를 일으켰다. 대제사장인 힐카누스는 정치적인 지위를 다시 얻게 되었다. 힐카누스의 지도 아래 있는 사람들이 충성스런 행동과 평화적인 의도로 인해서 시저와 다른 로마 관리들은 유대인들에게 한걸음 양보해서 세금을 줄여주고 몇몇 지역을 복귀시켜 주고 안식일의 법을 이유로 군복무 의무를 면제해 주었다. 소아시아에 있는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의 성전을 받드는 등 그들의 종교관습을 지키는데 방해를 받지 않게 되었다. 이러한 것들은 정복 민족의 종교생활을 간섭하지 않는다는 로마인들의 정책과 일치하는 것이었다.


新約聖經의 정치적 사회적 배경

예수님의 초기 추종자들은 다 파레스틴에 사는 유대인들이었다. 그의 열두 제자들은 가룟 유다만 남방 출신이었고 다른 열한 제자는 다 갈릴리 출신이었다. 심지어 新約聖經의 모든 기록자들은 누가를 제외한 모두가 유대인이었다. 이스라엘 나라는 1만 평방 마일 밖에 안되는 스위스 보다 작은 나라이다. 그러나 이스라엘 역사는 한국의 역사만큼 복잡하게 외세와 관련되어 있었다. 그것은 그 주변에 바벨론, 페르샤, 그리고 에집트 등 많은 강대국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그들의 정치적 문화적 배경을 중심으로 간단히 살펴 보도록 하겠다. 그 순서는 바벨론-페르샤-그리스시대, 그 중에서도 알렉산더 대왕의 사후에 이스라엘 통치를 위하여 서고 다투었던 프톨레미 왕조와 셀루커스 왕조, 그리고 그후 100년동안 독립을 유지했던 마카비시대, 끝으로 로마시대의 정치적 사회적 측면 순으로 살펴 보도록 하겠다.

1.바벨론시대(626-539.B.C)

앗수르가 북왕국인 이스라엘을 점령(722 B.C)한 뒤 남왕국인 유다는 단순히 정치적 실제로서만 겨우 명맥을 유지하여 왔다. 그러다가 바벨론이 에집트를 점령한 뒤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은 유다를 정치적으로 통치하기 시작했다(605 B.C). 이 때 다니엘을 비롯하여 많은 사람들이 포로로 잡혀왔다(단1:1-6). 성전의 기물들은 몰수되어 바벨론으로 실려갔다.

얼마후 유대왕 여호야김이 바벨론에 반항했으나 붙들려 잡혀갔고, 그의 아들 여호야긴이 또 반항(597.B.C)했으나 붙잡혔기에 석 달 정권으로 끝나고 말았다.

이 때 왕 뿐 아니라 그의 어머니와 아내들과 군대들의 장성들과 군인, 그리고 많은 기술자들이 끌려갔다(왕하24:6-16). 당시의 선지자인 젊은 에스겔(겔1:2)도 끌려갔다.

느부갓네살은 여호야긴의 숙부인 마타니아(Mattaniah)를 시드기야로 개명하여 왕위에 올려 놓았다(왕하24:17-20). 그러나 시드기야는 예레미야 선지자의 충고를 어기고 애굽과 동맹을 맺어 바벨론에 대항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이에 목전에서 아들들이 잡혀 죽는 것을 보았고 자신의 양눈도 뽑혀 소경이 된 후에 쇠사슬에 묶여 바벨론으로 잡혀갔다. 이 때 그 아름답던 솔로몬의 성전은 불타버리고 예루살렘 성의 벽은 파괴되었으며, 남은 국민들은 세번째 포로로 잡혀갔다 (586 B.C,왕하25:1-21). 이리하여 사울에서 시작한 유다의 500년 왕국은 종막을 고하게 된 것이다.

반 세기 후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간 이스라엘 백성들은 70년 동안의 포로 생활(605-535 B.C)을 하게 되었다. 당시의 주요한 사건으로는 예루살렘의 솔로몬 성전이 무너지자 성전 예배의식은 없어지고, 회당(Synagogue)에 모여 예배드리며 구약 聖經을 연구하고 친교를 가지기 시작하였다는 점이다. 이 회당 모임을 통하여 유대교가 체계화 되기 시작하여 후에 바울의 선교활동의 중심지가 된 것이다. 당시에 일어난 것 가운데 또 하나 중요한 것은 서기관(Scribe)들의 계급이 생기게 된 것이다.

제사장들이 예배를 인도할 수 없게 되자 서기관들이 구약 聖經을 베끼며(copy) 연구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서기관들은 유대교를 연구하는 신학자들이 된 것이다. 끝으로 바벨론 포로시대의 산물로서 디아스포라(Diaspora)를 들지 않을 수 없다. 디아스포라란 해외에 흩어져 사는 유대인, 즉 70년의 포로생활 후 본국 귀환이 허락된 후 바벨론에 그대로 남아서 살기를 작정한 사람들을 말한다. 그런데 이들이 후에 新約敎會의 핵심이 되었다.

2.페르샤시대(539-331 B.C)

바벨론이 페르샤의 고레스 왕에 의해 멸망되자 고레스 왕은 바벨론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본국으로 돌아가 성전을 재건축할 것을 허락하는 칙령을 내렸다(스1-4장). 그리하여 포로로 잡혀갔던 이스라엘 백성은 세번에 걸쳐 귀환하게 되었는데 제1차 귀환(536 B.C.)은 스룹바벨의 인솔로, 제2차 귀환(458 B.C)은 에스라 인솔로, 제 3차 귀환(445 B.C)은 느혜미야 인솔로 이루어졌다.

해방의 기쁨을 안겨준 고레스가 죽고 캄비세스(Cambyses)가 즉위했으나 8년 안에 죽고 그후 다리오 1세가 즉위하여 35년 동안 통치하게 되었다. 그 당시 학개, 스가랴 등의 선지자들이 나타나 성전 건축을 연기한 이스라엘 백성의 죄를 신랄히 꾸짖었다. 마침 다리오가 법정 기록에서 고레스의 칙령을 발견하여 예루살렘 성전 건축을 위해 정부의 기금으로 보조하도록 허락했다(스6:7-12). 그리하여 성전재건이 완성되니 때는 516-515 B.C.이었다. 이 성전은 후에 헤롯 1 세에 의해 확장되었으며(요2:20). A.D.70년 로마의 디도(Titus)대장에 의해서 예루살렘이 멸망하기까지 계속되었다.

그 후 켈케스(Xerxes)가 뒤를 잇게 되니 그가 에스더의 남편인 아하수에로 왕이다. 그는 헬라인들에게는 적개심을 가졌으나, 에스더와 모르드개의 노력에 힘입어 모든 유대인을 없애려는 하만의 음모에서 유대인들을 구한 구원자가 되었다. 그의 후계자인 아닥사스다(Artaxerxes) 1세가 서기관 에스라에게 팔레스틴에 돌아가 율법을 가르치도록 허락했다(스7장-10장).

에스라가 귀국한 후(485 B.C.)얼마 안있어 느헤미야가 돌아와(445 B.C).예루살렘성을 재건함으로써 새로운 종교적 붐이 일어났다. 이와 같은 모세 오경에 의한 종교개혁은 제사(祭司)이며 학자인 에스라와 평신도이면서 총독인 느혜미야에 의해 성취되었다.

그들은 죄의 회개와 이방인들과 결혼한 사람들은 헤어지도록 했고, 안식일과 안식년의 엄수, 성전의 재정적 후원(스8장-10장)을 하도록 했다. 이 일이 완성되자 느혜미야는 폐르샤로 돌아갔으나, 두번째 돌아왔을 때 국민의 해이한 신앙을 보고 재훈련을 명하니(느13장) 이것이 구약에 기록된 역사의 마지막이다. 그뿐 아니라 예언자의 시대도 종말을 고하게 되어 세례요한이 나타나기까지 400여년 동안은 예언자가 없는 침묵의 시대가 된다.

3.그리이스시대(331-63 B.C.)

마게돈의 빌립(Philip)이 헬라제국의 기초를 놓았다. 본래 헬라는 도시국가였는데 그의 이전에는 아무도 이 도시국가들을 통합하지 못했다. 빌립이 죽자 그의 아들 알렉산더는 짧은 시일 내에 지중해를 줌심으로 모든 나라를 차례로 점령했다. 팔레스틴과 에집트도 점령했다. 그러나 예루살렘만은 그대로 두었다고 한다.

전설에 의하면 당시의 대제사장인 자두아(Jaddua)가 다니엘 8장의 예언을 통하여 알렉산더가 폐르샤를 점령할 것을 보여 주었기 때문이라고 하는데 그 사실성 여부는 알기가 어렵다.

정복 왕 알렉산더가 그리이스로 돌아오는 도중 323 B.C.여름 말라리아와 과음으로 쓰러지자 온 천하는 그의 부하 장성들의 놀음판이 되었다. 알렉산더는 일찍 죽었지만 그의 공헌은 대단히 컸다. 무엇보다도 헬라 문화의 보급과 언어의 보급은 헬라 문명을 동방으로 소개함으로써 글자 그대로 세계 문화를 형성했다는 점이다. 그리하여 헬라 문화는 무려 600여년 동안(300 B.C-A.D.300) 지중해를 중심으로 한 당시의 세계를 지배하게 되었으며, 헬라어는 당시의 세계어로 발전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新約聖經이 당시의 세계어인 헬라어로 그것도 코이네(Koine)헬라어로 기록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마침내 헬라 왕국은 네 장군들이 나누어 가지게 되었다. 프톨레미(Ptolemy)는 에집트를, 안티파테(Antipater)는 마케도니아와 그리스를, 리시마쿠스(Lysimachus)는 동북부에 있는 트리키아를, 셀루커스(Seleucus)는 수리아를 각기 차지하게 되었다. 팔레스틴은 처음에 프톨레미와 셀루커스 사이의 경합지였으나 마침내 프톨레미의 통치 하에 들어갔다(285 B.C).

그러나 80년 뒤 자칭 헬라문화의 사도라고 부르는 셀루커스 왕조에 의하여 통치받게 되었다. 당시 가장 유명한 왕은 안티오커스 에피파네스(Antiochus 1V Epiphanes)였다. 그는 로마에 볼모로 12년간 잡혔다 온 모세 율법에 충실한 자들을 다 개종시키거나 다 없애려 했다(168 B.C.). 그래서 안식일을 지키는 자나 할례를 행하는 자, 히브리어로 기록된 聖經을 가진 자들을 사형에 처하였다. 그리고는 곳곳에 이방의 신상을 세웠다.

더우기 예루살렘 성전 가운데 신상을 세우고 유대인들이 가장 싫어하는 돼지의 피로 제단을 적시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그를 (나타난 신)이란 뜻을 가지는 (에피파네스)란 이름 대신 (미친 놈)이란 뜻의 (에피마네스 Epimmanes)라고 부를 정도였다. 이런 불경한 행동은 그 후에도 게속되었다.

4.하스모니안 독립시대(167-163 B.C)

처음에는 잔인한 행동에 대하여 소극적으로 대하고 처형을 받았으나 점차 여기에 대항하여 싸우려는 각오가 생기기 시작하였다. 마침내 모딘(Modin)이란 마을에 (마티디아스)란 늙은 제사장이 그의 다섯 아들 유다,요나단, 시몬 등과 함께 일어나 수리아의 관원을 죽이고 마카비 혁명을 일으켜 본격적인 독립운동을 가지게 되었다. 처음엔 계속해서 실패했으나, 차츰 인원도 늘고 전술도 밝아져 수리아의 군대를 물리치게 되고 예루살렘을 해방시켰다. 이때부터 소위 하스 모니안 의 통치가 시작된 것이다. 이 승리를 기념한 것이 (하누카:Hanukkah) 절기로서 빛의 절기라고 부른다.

그러나 셋째 아들인 시몬이 죽자 그의 아들인 요한 힐카너스(Hyrcanus)가 대제사장 겸 왕의 자리에 앉게 됨으로서 63년 B.C.에 로마의 손에 통치권을 넘겨주기까지 질투와 의심과 욕심으로 멍든 정치를 하게 되었다.

당시 두 개의 종교적 정치적 당파가 생기게 되었다. 하나는 하시딤(Hasidim)이라고 불리우는 보수파(保守派)로서 그들은 유대의 종교적 국가적 자유를 유지하면서 헬라문화에 대하여 저항하는 자들로서 이 분리주의자들이 후일에 바리새인들이라고 불리우게 되었다. 반면 두번째 당은 헬라주의적 경향을 가진 사두개인들이었다. 이 두 당의 특징에 대하여는 종교적 배경을 말할 때 하기로 한다.

5.로마의 통치시대(63 B.C.부터)

힐카너스 2세가 그의 동생인 아리스토뷰로스(Aristobulus) 2세에 의하여 불의로 축출되자 아라비아로 망명하였다. 이때 헤롯 1세의 아버지요, 이두메 사람인 안티파터와 알게 되었다. 안티파터의 충고로 아라비아의 군대를 이용하여 자기를 축출했던 동생 아리스토뷰로스 2세를 물리치려 했다. 눈치를 챈 로마가 힐카너스 2세를 도왔고, 그는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왕이요 대제사장이 되었다. 이로 인해 아티파터의 가문은 팔레스틴의 정치에 영향력을 행사하게 된 것이다. 바로 이때 축출된 아리스토뷰로스 2세의 아들인 안티고너스(Antigonus)가 팔티안들과 공모하여 예루살렘을 되찾게 되자 젊은 헤롯 1세는 로마로 도망가서 당시 로마의 통치자 중에 하나인 안토니(Antony)의 환심을 사게 되어 유대인의 왕이란 칭호를 받게 되었다. 그는 로마의 힘을 빌어 예루살렘으로 돌아오니, 명맥만 유지하던 하스모니안 (즉 마카비) 가문의 통치에 종막을 고하게 되었고, 유대는 로마의 속국이 되었다.

헤롯은 유능한 정치인이었으나 잔인하여 열 아내 중 둘을 죽였고 처남 하나, 세 아들, 그리고 장모를 죽인 사람이다. 더우기 베들레헴에 있는 두 살 이하의 사내 아이들을 죽인 자이다(마2;16). 그는 죽을 때(4 B.C) 국민들이 울지 않을 것을 염려하여 많은 유능한 지도자들을 가두어 두었으며, 그가 죽은 뒤 다 죽여서 국민들이 울도록 하려 했으나 갑자기 죽었기 때문에 실패하기도 했다. 그는 예루살렘 성전을 증축하고(막13:1) 경제적 번영을 누리기도 했다.

헤롯 1세가 죽자 그의 유언에 따라 그의 영토는 세 아들에게 나누어 주어졌다. 아켈라오(Archelaus)는 팔레스틴의 남쪽 부분, 빌립(Philip)은 북동쪽, 헤롯 안디바(Herod Antipas)는 갈릴리와 베뢰아 지방을 다스리게 되었다. 이 헤롯 안디바는 헤로디아 문제로 세례 요한을 처형했고(막6:17-29), 예수님을 다시 살아난 세례 요한으로 생각한 그는(마14:1-2) 예수님을 죽이려고 여러번 시도했다(눅13:31). 예수님은 그를 (여우)(눅13:32)라고 부를만큼 간교한 자였 다. A.D.39년 안디바는 헤로디아의 말을 듣고 로마에 가서 현 분봉왕의 직위에서 보다 높아지기 위하여 간청하려고 간 사이에 헤롯 아그립바 1세가 황제에게 고발하여 분봉왕직에서 추방했다. 아그립바는 야고보를 죽였고(행12:1-3), 베드로를 체포했으며 여러 초대敎會의 지도자들을 괴롭힌 자이다. 그는 A.D.44에 죽었고 그 후 17세 밖에 안된 헤롯 아그립바 2세(행25:)가 즉위하였다.

A.D.53년까지 유다는 로마의 영토나 다름없이 통치를 받다가, 그 후부터 A.D.66년까지 왕에게 통치를 받았다. A.D.66년에 반란이 일어나 로마와 전쟁을 하게 되었다. 네로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70년까지 정권을 유지하게 되었으나 70년 봄에 마침내 디도(Titus)장군에 의해서 예루살렘성은 무너지고, 지금까지 성전 중심의 유대교는 종막을 고하게 되었다.


문화적 종교적 배경

당시 문화는 크게 셋이다.첫째는 유대교(Judaism),두번째는 헬레니즘(Hellenism), 세번째는 로마의 제국주의다. 그 중에서 유대교는 기독교의 뿌리가 되었고 헬레니즘은 기독교가 성장한 지적 토양이 되었으며, 로마의 제국주의는 기독교가 성장할 수 있는 환경,즉 로마의 안정된 정치와 법률,건축술,조직력 등은 敎會 구조에 큰 도움을 주었다. 그러면서도 이 세 문화는 기독교의 가장 무서운 적이 된 것은 역설적 사실이다.

1.유대교(Judaism)

1세기의 팔레스틴 인구는 150-200만 정도였으며, 유대인이 약3/1정도(50-60만) 되었다. 그러나 요세프스(Josephus)에 의하면 유월절 때 예루살렘에 모여드는 유대인의 숫자가 무려 270만이나 되어 당시 예루살렘의 모습이 어떠함을 볼 수 있다. 요세프스에 의하면 유대교엔 크게 세 종파가 있다.

(1)바리새파(초자연주의자)

당시 바리새파의 수는 6천명이 약간 넘는 것으로 추산된다. 바리새파의 기원에 대해서 정확한 기록은 없으나 마카비 전쟁 전후 일어났던 하시디안 ,즉 경건주의자들로 보여지며 그것이 바리새란 이름으로 처음 나타난 것은 요한 힐카너스 당시(135-105 B.C.)이다. 그 뜻은 (파르쉬)(분리하다)란 뜻으로 그들의 배타적 성격을 볼 수 있다.

(2)사두개파(자연주의자)

숫자로는 바리새파보다 소수이나 주로 교육을 받은 자들이며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 높은 위치에 있는 자들이다. 그 시작은 다윗 당시의 사독(왕상1:32343845)에게서이며 A.D.70년 예루살렘이 멸망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3)에쎈파(금욕주의자)

聖經엔 이 에쎈파(the Essenes)에 대하여 놀랍게도 침묵하고 있다. 그러나 요세프스나 알렉산드리아의 필로(Philo),플리니(Pliny)등의 기록에 의하면 이들은 약 4천명 쯤 되었으며, 유대의 여러 마을에 흩어져 있었으나 중심은 사해의 서쪽 광야였다고 한다. 이 종파는 B.C.2세기부터 A.D.70년까지 계속되었다.

에쎈(Essenes)이란 원래 (호씨오스 οσιοσ 거룩)이란 말에서 왔다고 필로는 말한다. 그들은 흰 옷을 입었고 독신을 강조했다. 어떤 그룹에서는 자녀를 위해 결혼을 허락했으나 대개는 양자를 데려다가 길렀다. 생활은 손 씻는 결례,세례,기도 등 수도원적 생활을 했다. 기독교와 비슷한 점이 많아 어떤 비판적 학자들은 기독교의 고향은 베들레헴이 아니라 쿰란(Qumran)이라고까지 말하기도 한다.

에쎈파의 회원이 되려면 도합 3년간의 견습기를 거쳐야 하며 서약을 한 후 세례를 받은 후에야 된다. 그들은 율법 준행이 바리새파보다 더 엄격하고 다른 사회에서 들어온 음식은 먹지 않았다. 에쎈파는 제사장과 그들을 보좌하는 레위인, 이스라엘 자녀들과 할례를 받지 않은 문(門)의 개종자들이 있다.

(4)서기관과 랍비들

유대교인들이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 있을 때 율법에 대한 깊은 연구가 시작되었고 그 결과 새로운 계급, 즉 서기관이 생기게 되었다. 당시 유대인들은 여기 저기 흩어져 살고 있었기 때문에 각 회중들마다 자신의 사본을 갖기를 원했다. 그래서 구약,그 중에서도 율법을 베끼는 전문가들이 생겼고 그러다 보니 결과적으로 聖經학자들이 되었다. 이것이 서기관의 유래이다.

서기관의 대표적 인물은 에스라(느8:9)이다. 그런데 서기관들은 흔히 율법 교사, 또는 단순히 교사라고 불리우기도 한다. 그들은 예루살렘은 물론 유대와 갈릴리 각 지방에도 흩어져 있었다. 대부분의 서기관들은 바리새파에 속해 있어 聖經에 보면 (바리새인의 서기관)(막2:16) (바리새인 편에서 몇 서기관이 일어나)(행23:9)라고 표현하고 있다.

2.헬레니즘(Hellenism)

기독교의 지적 토양을 준 것은 두 말 할 필요도 없이 헬레니즘, 그 중에서도 헬라의 철학이다. 이것은 신 플라톤의 철학이 어거스틴(Augstine)을 통하여 신교(新敎)의 교리적 체계를 세운 것과 또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의 철학이 아퀴나스(Aquinas)를 통하여 구교(舊敎)의 교리적 체계를 세웠다는 이 단 한 가지만으로도 알 수 있다.

여기서는 헬라의 문화 일반에 관한 연구나 기독교에 큰 영향을 주었다고 흔히 주장되는 신비종교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고 다만 철학에 대해서만 생각해 보고자 한다.

(1)플라톤주의(Platonism)

플라톤주의는 주전 4세기에 살았던 플라톤(Platon)에서 연유된 사상적 체계를 말한다. 그는 쏘크라테스(Socrates)의 제자로서 이원론적 입장에서 모든 것을 보았다. 즉 세상의 물질세계는 보이지 않는 이데아(Idea)의 세계의 그림자에 불과함으로 참으로 존재하는 것은 이데아의 세계라고 하였다. 따라서 이 변하는 비실재(非實在)의 세계에서 참으로 실재(實在)하는 세계에 이르기 위하여 반성(reflection)과 명상(meditation)과 고행(asceticism)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에 의하면 지식은 구원이며 죄는 무지(無知)라고 하였다.

플라톤주의는 新約 聖經에 직접 언급되어 있지 않다. 그러나 그의 이원론(Dualism)은 1세기에 일어났던 영지주의(Gnosticism)와 3세기 플로티누스(Plotinus)에 의하여 소개된 신플라톤주의에 의해서 반영되고 있다.

(2)영지주의(靈知主義))

영지주의(Gnosticism)란 이름 그대로 헬라어의 지식(知識)을 뜻하는 그노시스(γνωσισ)란 말에서 유래한 것이다. 그들은 영지(靈知)에 의해서 구원받는다고 한다. 영지주의자들은 하나님은 너무 위대하시고 거룩하시기 때문에 천하고 타락한 이 세상을 창조할 수 없다고 한다. 다만 하나님에게서 여러 단계로 그의 신성(神性)이 발산되어 마지막으로 물질 세계가 창조되었다고 한다.

그들에 의하면 물질은 악한 것이다. 따라서 인간이 구원을 받으려면 물질 세계를 부정하고 보이지 않는 세계를 찾아야 한다고 했다. 여기서 나온 사상은 첫째로 금욕주의이고, 두번째는 영(靈)은 깨끗하고 실제하나 물질은 더럽고 실제하지 않는다는 사상이다. 이 사상에 대해 바울은 (골2:821)에서 지적하고있다. 놀라운 것은 한국 敎會에 이 영지주의 사상이 여러 형태로 흘러 들어왔다는 사실이다.

(3)신플라톤 주의(Neo-Platonism)

플라톤의 원리들은 에집트의 리코폴리스(Lycopolis)에 살았던 플로티누스(Plotinus, A.D.204-269)에 의해 소개 및 발전되었다. 또한 플로티누스는 폐르샤의 이원론(二元論) 사상에 큰 영향을 받았다. 신플라톤주의라 함은 플라톤의 이데아와 현상으로 보는 이원론과 폐르샤의 빛과 어두움 둘로 보는 이원론 사상에 기초한 종교철학(宗敎哲學)을 말한다.

따라서 신플라톤주의에서는 영(靈)은 선하고 육체는 악하다고 본다. 그들에 의하면 구원이란 감각에 의존하는 모든 육적 욕망을 제거하고 영의 생활을 하는데 있으며 그것은 죽을 때 이루어진다고 했다. 신플라톤주의가 플라톤주의와 다른 점은 영적 생활이 지적 노력에 의하여 이루어지는게 아니라 무한자(The Infinte)와의 신비적 연합에 의하여 이루어진다고 본 점이다.

그런데 영지주의와 신플라톤주의는 기독교의 성육신(成肉身:Incarnation) 교리와 조화할 수가 없다. 그것은 육체는 악한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인간의 몸을 입고 역사(歷史)속에 오셨다는 것은 생각할 수 없기 때문이다.

(4)에피큐리안주의(Epicureanism)

에피큐리안주의란 341-270 B.C.에 살았던 에피큐러스란 사람의 사상적 체계를 말한다. 에피큐러스의 가르침은 그의 제자인 루크레티우스(Lucretius)의 작품 속에 가장 잘 나타나 있다. 그에 의하면 세계는 원자(原子)가 우연히 결합되어 만들어진 것이라고 했다. 쉽게 말해 에피큐러스의 우주관은 현대의 무신론적 물질주의 진화론과 유사하다.

따라서 이 세계엔 목적(目的)도 절대선(絶對善)도 없다고 했다. 있다면 최고의 가능한 선(possible good)이 있을 뿐인데 그것은 쾌락이라고 했다. 그리고 이 쾌락이란 고통이 없는 것이라고 정의했다. 그런데 이 사상을 흔히 육체적 쾌락주의로 보는 것은 사실과는 다른다. 반대로 보다 지속적이고 완전한 만족을 주는 즐거움을 택하라고 가르침으로서 정신적 쾌락에 강조를 둔다. 이 에피큐리안주의에 대해서는 바울이 아레오바고에서 설교할 때 처음으로 언급되고 있다.

(5)스토아 철학(Stoicism)

사도행전에서 에피큐리안주의와 함께 언급되고 있는 것은 스토아 철학이다. 이 스토아 철학은 지중해 동부에 있는 키프러스의 제노(340-265 B.C)에 의해 기초가 세워졌다. 그는 인격적 신(神)을 인정치 않았으나 우주가 절대이성(Absolut Reason)에 의해 지배된다고 했다. 그는 이성에 일치된 생활이 최고의 선(善)이라고 하면서 개인적 감정은 실체가 없는 해로운 것이라고 했다. 그래서 그는 감정에 의해 지배되지 않는 완전한 자기 절제를 목적으로 내세웠다.

이 스토아 철학은 고상하기는 하지만 기독교와는 다르다. 여기엔 자유의지나 악의 존재가 인정되지 않는다. 그들에게는 모든 악은 선의 일부에 불과함으로 그들에게는 개혁이나 변화가 배재된다. 그들의 신(神)은 비인격적(非 人格的) 존재임으로 인간의 일에 인격적 관심을 갖지 않는다. 물론 그들의 윤리관이 많은 점에서 기독교의 윤리관과 유사하지만 그들의 전제와 실천은 서로 다르다.

(6)냉소주의(Cynicism)와 회의주의(Scepticism)

냉소주의(冷笑主義)는 플라톤의 철학과 같이 쏘크라테스의 가르침에서 나왔다.쏘크라테스는 단순한 욕구를 가진 사람만이 어려운 역경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고 했다. 그래서 냉소주의자들은 최고의 덕은 아무 것도 원하지 않는 것이라고 한다. 모든 욕망에서 자유롭기 위하여 욕망을 제거하려고 한다. 그들은 모든 표준과 법을 포기하고 완전히 개인주의자가 된다.

최초의 회의주의자는 엘리스의 피로(Pyrrho of Elis,365-295 B.C.)이다. 그들은 경험에 의지하기 때문에 궁극적 표준이란 있을 수 없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사람마다 경험의 내용이 다르기 때문이라고 했다.

또 모든 판단은 상대적이라고 한다. 왜냐하면 어떤 사람에게 가벼운 것이 어떤 사람에게는 무겁게 느끼기 때문이라 한다. 따라서 회의주의자들의 논리적 면은 완전한 지적 마비로 끝난다. 아무튼 냉소주의나 회의주의는 표준을 포기하는데서 시작한다. 전자는 윤리를 다루었고 후자는 지성(知性)을 다루었다. 기독교가 이들과 크게 다른 것은 하나님을 인간의 절대적 표준이라고 믿는 점이다.

3.로마의 제국주의(帝國主義)

유대교와 헬레니즘과 함께 기독교에 큰 영향을 준 것은 로마의 제국주의이다. 특히 그들의 법률과 모든 제도는 초대 敎會에 큰 영향을 주었다. 당시의 건축 양식이나 음악 같은 예술은 중세기에 그 꽃을 피우기까지 계속적으로 영향을 주었다.

그뿐 아니라 로마의 세계적인 통일은 온 세계를 한 이웃으로 만들어 주었다. 즉 세계의 평화와 교통의 편리,언어의 통일은 기독교의 福音을 전하는데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다.

지금까지 우리는 기독교에 큰 영향을 준 3대 요소, 즉 유대교와 헬레니즘과 로마의 제국주의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그런데 역설적인 사실은 이 세 요소가 기독교 발생에 큰 영향을 주었으면서도 두고 두고 기독교의 원수가 되어온 사실이다. 이것은 역사의 아이러니이다. 그래서 敎會는 오랫동안 이 세 문화적 공해(公害)를 제거하기 위하여 몸부림쳐 온 것이다.

끝으로 우리는 新約성경을 기록한 언어(코이네:κοινη) 헬라어에 대하여 잠간 생각해 보고자 한다. 본래 (코이네:κοινη)란 뜻은 (일반적인:common)이란 말이다. 이 언어는 300 B.C.에서 A.D.500까지 사용된 말이다. 헬라어에는 고전 헬라어와 일반 헬라어 두 종류가 있었는데 코이네 헬라어는 알렉산더 대왕이 세계를 정복한 후 통용시킨 말이다.

본래 이 코이네 헬라어는 고전 헬라어에 비해 누구나 읽고 이해하기 쉬운 글로 알렉산더가 문화의 교류와 정신세계의 통일을 위해 보급했지만 그러나 그것이 福音을 전 세계에 보급하는데 사용될 줄은 알렉산더 자신도 몰랐을 것이다. 이렇게 볼 때 하나님의 섭리는 너무도 깊고 넓어 아무도 측량할 수 없음을 본다.


新約의 정경

1.새 계약의 기원

본래 新約이란 말은 고전 11장 25절고후3:6절의 (헤 카이네 디아데케 η καινη διαθηκη)란 말에서 유래한 것으로서 그 뜻은 두 가지이다.

첫째는 유언(Testament),두번째는 계약(Covenant)이다. 여기서 중심이 되는 것은 두번째의 계약(契約)이란 말이다. 즉 新約이란 새 계약으로 이것은 옛날 이스라엘 백성이 모세를 중재자로 하나님과 맺은 옛 계약에 대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중재자로 성립된 새 계약이란 뜻이다. 이 새 계약에 대하여는 예레미야가 이미 예언한 것이었다.

(렘 31: 32)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 언약은 내가 그들의 열조의 손을 잡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세운 것과 같지 아니할 것은 내가 그들의 남편이 되었어도 그들이 내 언약을 파하였음이니라 (렘 31: 33)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러나 그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에 세울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

이 예언은 장차 그리스도를 통해 새 계약이 이루어질 것을 말한 것이다. 마침내 이 예언은 이루어졌다. 예수님은 마지막 성만찬에서 (눅 22: 20) 저녁 먹은 후에 잔도 이와 같이 하여 가라사대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즉 예수님의 잔, 다시 말해 십자가에서 흘리신 보혈이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가로막힌 죄의 담을 무너뜨리고 이즈러진 관계를 회복시킨 새 언약의 상징이요 표가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 새 계약의 내용을 기록한 내용이 바로 新約 聖經이다. 그리고 옛 계약의 내용을 기록한 책을 구약 聖經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이 두 책은 서로 구별은 되지만 사실은 서로 뗄 수 없는 한 권의 책이다. 왜냐하면 이 둘은 서로 분리된 두 계시(啓示)가 아니라 한 계시의 연장이기 때문이다.

즉 구약 聖經은 새 계약을 예언한 책이요, 新約은 구약의 예언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어떻게 성취되었는가를 기록한 책이다. 그리고 구약과 신약의 사이엔 계시가 점진성을 가지고 나타나 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구약은 39권, 新約은 27권, 모두 합쳐 66권이다.

2.新約 聖經을 기록한 동기와 정경화의 과정

예수님 당시엔 구약 聖經 외에 다른 아무런 문서도 필요치 않았다. 예수님 자신 아무런 글도 쓰신 일이 없었다. 있었다면 간음하다가 잡힌 여인(요8:1-11) 앞에서 "몸을 굽히사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요8:6)라는 기록이 있을 뿐이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마28:18-20) 명령했으나 복음을 기록하라고 하시지는 않았다. 그래서 예수님의 제자들은 福音을 기록할 필요성을 느끼지 않았다. 福音 전파하기에 분주한 것도 그 중에 한 이유였다.

그러나 에수님이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후 그의 행적을 알고 또 그에게서 교훈을 직접 받은 제자들과 주님을 아는 사람들이 하나씩 둘씩 세상을 떠나게 되어 주님의 생생한 교훈을 남겨 놓아야 할 필요성이 생기게 되었다. 게다가 敎會 안에는 일정한 교리와 규칙이 없어서 신앙과 생활에 혼란이 생기고 여기 저기서 이단 사상이 발생하게 되었다. 바로 이 두가지 큰 이유에서 新約 聖經을 기록해야 할 필요성이 생기게 되었다.

요한은 聖經을 기록한 이유를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요 20: 31)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위에서 新約 聖經을 기록한 직접 동기를 말했거니와 요한은 여기서 근본적인 목적을 두 가지로 말한 것이다. 즉 그리스도께 대한 신앙을 갖게 하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신앙을 통하여 영생을 얻게 하기 위하여 기록했다고 했다.

그러면 어떤 과정으로 新約 聖經이 기록되었을까? 예수님이 승천하신 후 약 20년 동안은 구전시대(口傳時代)였다. 주후 50년 경에 바울은 데살로니가 敎會의 문제로 인해서 편지를 써야 할 필요가 생겼다. 그것은 바울이 데살로니가에 머물면서 전도하였다. 이 때 (주의 날 the day of the Lord)에 대하여 언급했으나 분명히 밝히지 않았기 때문에 어떤 이들은 (주님이 곧 재림하신다면 내일을 위해 저축하며 일할 필요가 없지 않는가?)하고 오해했다. 따라서 바울은 이것 을 가르쳐 줄 필요성을 느꼈다.

그래서 바울은 (때와 시기)에 대하여는 우리가 알지 못함으로깨어 근신하고 피차 권면하라고 했다. 그러면서 결론적으로 (살전 5: 21) 범사에 헤아려 좋은 것을 취하고라고 기록했다. 그러나 얼마 후 바울이 들은 데살로니가 敎會의 형편은 더욱 악화되었다. 많은 교인들이 이미 그리스도께서 임하셨다고 動心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다시 그들에게 편지를 써야 할 입장에 처했다.

그러므로 바울은(살후 2: 15) 이러므로 형제들아 굳게 서서 말로나 우리 편지로 가르침을 받은 유전을 지키라고 가르쳤다. 이렇게 바울 서신들은 당시의 敎會에 실제적 필요성 때문에 기록되 었다. 그리고 福音서들은 이보다 약 20년 늦게 마가福音부터 시작하여 기록되었는데 누가福音 서론(눅1:1-4)의 내용으로 보아 예수님의 교훈집이나 언행록(言行錄)같은 단편적 기록이 있었을 것으로 믿어진다.

그런데 많은 문서들이 기록되자 또 다른 문제가 생겨났다. 그것은 어떤 것이 참으로 하나님의 말씀인지, 어느 것이 보다 큰 권위를 가진 것인지 하는 문제였다. 그러다가 경전(Canon)이 제정되게 된 것은 140년 말씨온(Marcion)이란 이단자에 의해서 비롯되었다. 말씨온은 영지주의(靈知主義)자로서 구약의 하나님과 新約의 하나님이 다르다고 하여 구약을 부인하고 누가福音과 바울의 서신 10권만을 聖經으로 받아들였다. 마침내 이것은 敎會에 혼란을 야기시켜 144년에 敎會에서 파문을 당하게 되었고 그 결과 경전 제정의 필요성을 가중시켰다.

경전 제정의 제 2단계는 189년 이레니우스(Irenaeus)에 의해 이루어졌다. 그는 당시의 문헌들을 세 가지로 분류했다. 첫째는, 완전히 경전으로 인정하는 책으로서 4福音서와 13권의 바울서신, 그리고 요한 1서와 베드로 전서이다.

둘째는 경전으로 인정해야 할지 의심나는 책으로 예를 들면 히브리서, 야고보서,베드로 후서,요한2,3,서, 및 유다서와 계시록이다. 세번째는 , 경전으로서 전혀 인정할 수 없는 책인데 그 예로서 바나바 서신,헬마스의 목자서, 12사도의 교훈집(Didache),및 솔로몬의 지혜서 등을 들었다.

그러나 뭐니 뭐니 해도 경전 제정의 결정적 시기는 제 3단계인 367년 아다나시우스(Athanasius)에 의해 이루어졌다. 그는 부활절 기념 강연에서 新約 27권만을 경전으로서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솔로몬의 지혜서, 벤 시락, 에스더, 유디트,도비트,12사도의 교훈집과 헤마스의 목자서 등은 경전이 아니나 읽어서 도움이 되는 제 3급의 책이라고 하였다. 그러다가 397년 칼타고의 제 3차 회의 때 어거스틴이 참석한 회의에서 27권만이 정경이라고 결정됨으로서 지금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新約의 경전이 완성된 것이다. 따라서 경전 제정은 우연히 어떤 개인의 의견에 의하여 단시일에 결정된 것이 아니라 성령의 역사 속에 오랜 세월을 통하여 결정지은 것이다.

3.정경 결정의 원리

정경 결정의 원리가 초대 교부(敎父)들에 의해 공식적으로 논의된 적은 없으나 지금 우리들이 갖고 있는 재료에 의해 크게 세 가지였음을 발견하게 된다. 첫째는, 사도서(使徒性), 즉 新約 聖經은 사도들과 또 그들과 밀접한 관계를 가진 사람들에 의하여 기록되었다는 점이다. 물론 마가나 누가 같은 사람들은 사도는 아니었다. 그러나 마가는 베드로의 통역관으로서 베드로를 통하여 역사적 예수에 대해 정확히 알고 있었다.

누가도 바울의 의사로서 바울과 그 밖의 (눅 1: 1) 우리 중에 이루어진 사실에 대하여(눅 1: 2) 처음부터 말씀의 목격자 되고 일군된 자들의 전하여 준 그대로 내력을 저술하려고 붓을 든 사람이 많은지라 이 모든 일들을 근원부터 살핀 자료를 통해 역사적 예수와 초대 敎會의 역사에 대하여 누구보다 정확히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聖經 기록자들이 다 한 성령을 통하여 감동을 받았다는 사실이다.

초대 敎會는 이들의 교훈을 사도적 권위를 가진 것으로 인정하였으며 바로 이것 때문에 그들의 기록이 사도성을 가진 것으로 인정된 것이다.

두번째,정경(政經) 제정의 원리는 보편성(普遍性), 즉 당시 敎會에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정받았다는 점이다. 이것은 사도성 인정에 대한 당연한 추론이다.

세번째, 정경 제정의 원리는 교리의 일관성이다. 놀라운 것은 1600여년 동안 여러 가지 다른 환경에서 기록되어진 聖經이 서로 모순됨이 없이 일관성 있는 교리를 말하고 있다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그러나 개혁자들은 위에서 말한 것 외에 聖經의 내적 증거(internal testimony)에 대해서 강조한다.

칼빈은 新約 聖經 전체의 정경성을 말했다. 그는 말하기를, 聖經을 읽게 될 때 신자들의 마음을 울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확신이 新約 聖經의 정경성을 보여주는 최고의 증거라고 했다. 그리고 이 확신은 성령의 내적 증거를 통해 나타난다는 것이다.

4.新約 聖經과 그 권위

新約 聖經의 권위에 대해 생각하기 전 그 권위를 표현하는 (계시, 영감, 권위)란 말의 뜻을 잠시 살펴보자

계시(啓示)란 말은 (αποκαλυψισ)즉 (벗긴다)는 뜻이다. 나아마 사람 소발이 욥에게(욥 11: 7) 네가 하나님의 오묘를 어찌 능히 측량하며 전능자를 어찌 능히 온전히 알겠느냐고 말한대로 인간의 능력으로는 하나님을 알 수가 없다.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 자신이 가리워진 커어텐을 벗겨 주셔야 알 수 있다.

다음 영감(靈感)이란 말이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말씀하실 때 θεοπνευτοσ,즉 God breathed (하나님이 불어내셨다.)는 뜻으로 말씀하신다. 이것은 하나님이 자기를 계시하실 때 사용하시는 통신 방법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불어내실 때 기록한 사람뿐 아니라 심지어 그들이 사용한 말까지 불어 넣으셨기 때문에 축자영감(逐字靈感)이란 말을 사용한다.

마지막으로 사용하는 말은 권위(權威),즉εξουσια이다. 이 말은 聖經에 들어 있는 능력, 혹은 무게를 말한다. 그러면 왜 聖經이 무게와 능력을 가지는가? 그것은 한 마디로 말해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이제 聖經을 통하여 그 권위를 살펴보자. 마태복음21:42절에 보면 예수님은 구약을 가르켜 성경(복수로), (요10:35)에도 성경(단수로)이라고 언급했다. 原文에는 γραφη 라 고 하셨다. 그 뜻은 (기록 a writing)란 말이다. 즉 예수님은 구약의 기록을 하나님이 영감하신 권위있는 말씀으로 보신 것이다. 바울도 (거룩한 기록 딤후 3:15,롬1:2), 또는 (하나님의 말씀 롬3:2)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구약 聖經에 대한 의심은 없다. 이제 문제는 新約도 구약과 같은 권위를 가지고 있느냐 하는 점이다. 그런데 바울은 딤후3:16절에 모든 (聖經 πασα γραφη),즉 新約을 포함해서 다 하나님의 감동으로 되었다고 했다.

베드로는 바울의 서신을 곡해하지 않도록 주의를 시키면서 (벧후 3: 16) 또 그 모든 편지에도 이런 일에 관하여 말하였으되 그 중에 알기 어려운 것이 더러 있으니 무식한 자들과 굳세지 못한 자들이 다른 聖經과 같이 그것도 억지로 풀다가 스스로 멸망에 이르느니라 (벧후 3: 17)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이것을 미리 알았은 즉 무법한 자들의 미혹에 이끌려 너희 굳센 데서 떨어질까 삼가라고 했다.

여기서 중요한 말은 (다른 聖經 τασ λοιπασγραφασ)란 말이다. 이것은 분명히 구약 聖經을 말하는 것으로서 베드로는 바울의 모든 서신들을 구약과 꼭 같은 권위를 가진 말씀으로 본 것이다.

아뭏든 초대 교부 터툴리안(Tertullian,주후200년경)은 처음으로 라틴어로 신약(Novum Testamentum)이라고 하여 오늘의 新約 聖經을 표시하기 시작하였다. 이것은 또한 많은 福音주의 신학자들에 의해 강조되어 왔다.

그로마키(Gromacki)는 신구약의 관계를 다음과 같이 말했다. (新約은 구약에 포함되어 있고 구약은 新約에서 설명된다. 新約은 구약에 감추어져 있고 구약은 新約에서 계시된다.) 그러면 신구약 聖經의 주제(主題)는 무엇인가? 그것은 한 마디로 말해 그리스도이다(눅24:44). 따라서 우리는 신구약의 내용을 그로마키와 함께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구약聖經------그리스도를 위한 준비
福音서  -----그리스도의 나타나심
사도행전-----그리스도 전파
서신   ------그시스도의 설명 
계시록 ------그리스도 안에서의 완성
본문:(히8:13)새 언약이라 말씀하셨으매 첫 것은 낡아지게 하신 것이니 낡아지고 쇠하는 것은 없어져 가는 것이니라

*새 언약(καινην:카이넨) 헬라어 원문에는 새 언약이라 번역된 한글번역에 해당되는 말로서 단지 형용사 새로운이란(καινην 카이넨)만 기록되어 있다그러나 번역상 앞의 귀절들에서 새 언약이란 용어가 수차 등장되어 그 표현이 (διαθηκην καινην:디아데켄 카이넨)으로 나타나고 있는 점으로 보아 문맥상 언약이란 말(διαθηκην:디아데켄)을 생략한 듯이 보인다. 히브리서 기자는 여기서 더 나은 언약을 묘사하고 있다.

구 언약이란 모세가 시내산에서 받은 언약을 말하는데 이는 첫번째 것으로서 낡아져 없어져 가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미 선지자 예레미야가 새 언약이란 말을 사용하여 시내산 언약의 철폐 시기가 도래할 것임을 예고한 바 있다. 새 언약이란 말에서 형용사 새로운의 (καινην카이넨)은 특별한 의미에서의 새로움을 뜻한다. 그것은 알려지지 않은 낯설은 또는 주목할만한 질로서의 새로움을 의미하며 종종 聖經 속에서는 옛 것의 상반되는 개념에 쓰이고 있기도 하다. 새 언약, 그것은 그리스도의 도래로 말미암은 은혜의 계약이다.

본론:새로운 언약(New Tastment)로 일컬어지는 新約 聖經은,구약 聖經에서 하나님께서 언약하셨던 인류에 대한 구원 언약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새롭고 온전하게 확증(롬5:8)된 것을 증언한 책이다. 본문에서도 (새 언약이라 말씀하셨으매 첫 것은 낡아지게 하신 것이니)라고 함으로써 新約 聖經의 의미를 잘 설명해 주고 있다. 구약 聖經이 하나님의 구원 언약의 그림자라면 新約 성경은 그 실체라고 할 수 있다.

*함께 그 내용을 총괄적으로 살펴 보겠다.

1.福音서

구세주에 대한 기쁜 소식을 전한다는 의미로서 福音서라고 불리우는 책들을 공관福音서와 제 4福音서로 나누기도 한다. 공관福音서는 마태,마가,누가福音서를 뜻하는데 그리스도 예수를 전하되 히브리 사람들의 종교적 관심으로 공통되게 그리스도를 증거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가 공관福音서들을 보면 구약 聖經의 인용문들이 많고 세 책들이 유사한 점이 많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요한 사도가 기록한 요한福音서는 기독교가 세계로 확장해 나갈 주후 90년경에 기록된고로, 그리이스 철학 사고에 젖은 당시 세계인들에게, 쉽게 이해될 수 있도록 철학적 표현으로 그리스도를 전했다. 즉 그리스도의 福音은 유대교의 일부분이 아니라 온 세계인들을 위한 하나님의 우주적인 福音임을 알리고자 한 것이다. 이천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요 한福音이 우리들에게 쉽게 이해될 수 있는 용어로 쓰여진 것은 바로 그와 같이 전 세계인들을 위한 선교를 목적으로 했기 때문이다.

* 福音서들의 특징을 살펴보면

(1)마태福音:만인의 왕으로서의 그리스도를
(2)마가福音:쉬임없이 일하시는 구세주로서의 그리스도를
(3)누가福音:완전한 인격자로서의 그리스도를
(4)요한福音:인간으로 오신 하나님으로서의 그리스도를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그 모든 福音서의 목적은 하나님께서 에덴 동산에서 언약하셨던 구세주(창3:15)께서 이 땅에 오셔서 인류를 위한 죄 값을 대속하시고 부활,승천하셨음을 전하는데 일치하고 있다. 그리고 그를 믿어 영생을 얻을 것을 권하고 있다.(요20:31)

2.역사서

즉 사도행전을 지칭하는 말이다. 그리스도께서 누구이시며 어떻게 인류의 구원을성취하셨는지를 기록한 것이 福音서들이라면 사도행전은 그 성취된 福音이 어떻게 해서 "온 유대로부터 땅끝까지"(행1:8) 敎會를 통하여 전파되어 갔는지를 보여준다. 저자는 누가로 주후 62년경에 로마 판도에 있는 세계인들에게 기독교를 변증하기 위하여 기록했다(행1:1-3). 그러므로 사도행전은 일반 역사인 관점으로 쓰여진 것이 아니라 신앙적 관점에서 초대 敎會사를 기록한 것이다.

* 그 주요한 내용은

(1)敎會의 탄생과 그 배경
(2)敎會의 고난과 궁극적인 승리성
(3)福音은 유대 민족의 전유물이 아닌 온 세계인을 위한 것
(4)敎會와 인류의 역사는 인간들이 주인이 아니라 전지 전능하신 삼
위일체 하나님의 행동 무대임을 강조했다.
3.서신서

요한계시록을 제외한 사도행전 이후의 책들을 뜻한다.서신서들은 대개 사도들이 敎會들에게 편지 형식으로 신앙 교리, 규범, 위로와 경계를 고양시킬 목적으로 기록되었다(딤전1:3,벧후1:12-13,유다1:3). 이 서신들은 크게 교리 서신(로마서,고린도전,후서,갈라디아서), 옥중 서신(에베소,빌립보서,골로새서,빌레몬) 그리고 목회 서신(디모데전,후서,디도서), 공동 서신(히브리서,유다서,요한1,2,3서,베드로전,후서)으로 나눌 수 있다.

*그 내용의 특징은

(1)교리 서신(로마서,고린도전,후서 갈라디아서): 기독교의 최대 신학자요,개척자인 바울사도의 편지로서 기독교의 핵심 교리를 기록해 놓았다. 어떤 신학자는 (聖經 66권이 반지라면 로마서, 갈라디아서는 그 반지의 보석이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이렇듯 기독교 구원의 도리를 깨우치려면 로마서와 갈라디아서를 필히 이해해야한다.

(2)옥중 서신(에베소,빌립보,골로새,빌레몬):바울 사도가 로마 감옥에 투옥된 후에 기록한 것으로서, 기독교 福音의 충만성,통일성,보편성,우주성 등을 아름답게 증거했으며 그 福音 안에 거하는 성도들의 삶의 가치관,윤리관,목적 등을 교훈했다.

(3)재림서신(데살로니가전.후서)

(4)목회 서신(디모데전,후서,디도서):바울 사도가 후계 목회자인 디모데와 디도에게 그들의 사역을 돕기 위해 보낸 편지로서 敎會의 행정,목회자의 자세 이단 침투에 대한 경계 등을 기록해 놓았다. 특히 디모데 후서는 바울 사도가 순교하기 1-2년 전에 기록한 (유언장)과 같은 것으로 바울 사도의 신앙 고백적 내용이 듬뿍 담겨 있음을 볼 수 있을 것이다(딤후4:6-817-18,21)

(5)공동 서신(야고보서 베드로전,후서,히브리서,요한1,2,3서,유다서):각 사도들이 온 敎會에게 보낸 회람 편지 형식으로서 기독교 신앙 확립, 이단 침투에 대한 경계와 그리스도인들의 사회 윤리관,敎會 윤리관 등을 교훈한 글이다

4.예언서

요한계시록을 뜻한다. 저자는 요한 사도로서 이 땅에서 福音 때문에 고독과 고난을 당하기 마련인 그리스도인들에게 용기와 희망과 경계를 주실 목적으로 기록했다(계1:4-59). 그 내용의 특징은,이 세상은 곧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인하여 종말이 닥칠 것이며, 그 종말의 때가 시작되기 전 악이 창궐하여 그리스도인들과 敎會를 핍박할 것이나, 궁극적으로 그리스도의 권세로 이기고 또 이길 것(계5:517:14)이며,장차 영원한 천국에서 필설로 다하기 어려운 영생으로 보상받을 것이니, 신앙을 변절치 말고 하나님께 죽도록 충성(계2:10)하라는 것이다. 즉 그리스도인들과 敎會의 희망을 예언한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