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7 장. 최후의 몇날

왕이 그의 수도에 입성하심

[헬몬]산에서 변모하신 후에 예수께서는 전파사시고 가르치시며 남쪽으로 내려가셨다. 가시는 길 주변에 있는 유대와 사마리아의 여러 동네에서 천국복음을 전파하시고 병든 자를 고쳐주셨다. 그리고 칠십인을 따로 세워 사명을 주어 보내신 것도 아마 이 기간 중이었을 것이다(눅10;1이하). 그러나 최종목적지는 예루살렘이었다. 마가복음은 갈릴리 사역 기간에서 바로 예루살렘의 마지막 일주간으로 건너 뛰어 서술하고 있다. 그러나 연대순으로 살펴볼 때 누가복음의 한 부분 전체가(19:51-18:14)이 사이에 끼어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요한복음에 의하면 갈보리에서 돌아가시기 전 예수님께서는 최소한 두번,즉 10월의 장막절(요7:210)과 12월의 수전절(요10;22)에 예루살렘에 계셨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각 지방에서 모여드는 순례자들로 예루살렘이 혼잡하게 되는 3월의 유월절 즉 유대인 최대 명절과 함께 예수께서는 그의 결정적인 시기가 다가온 것을 아셨다.

유월절 엿새 전 금요일 저녁에 그는 베다니에 도착하셨다.다음날 안식일을 조용히 쉬셨다. 그리고 그 다음날 아침 그는 예루살렘 입성을 준비하셨다. 많은 순례자의 무리가 성안으로 밀려들고 있었다. 어떤 사람들은 전국에 으명해진 갈릴리 선지자 예수가 예루살렘으로 오고 있다는 소문을 듣고 그를 보려고 길 가에 나와 서 있었다. 그동안 숨기워졌던 모든 베일이 벗겨졌다. 종려주일날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메시야로서 입성하셨다. 이것이 바로 그 떠들석한 절기에 있었던 화려한 행렬의 의미였다. 또한 예수께서는 그러한 영광을 공공연히 받아들이셨다.대중적 인기는 한번 일어났다가 사라졌으나 이제 다시 한번 짧은 순간이나마 되살아났다. 잿물로 변했던 불길이 벼란간 다시 타올랐다. 호산나라고 외치면서 예수님을 환호한 순례자들의 대부분은 말할 것도 없이 지방에서 온 사람들이었다. 즉 그 주간이 끝나기도 전에 [그를 십자가에 못 박으소서]라고 외쳤던 도시의 잡배들과는 전혀 다른 북쪽 갈릴리 예수님의 동향인들이었다. 대중의 감정이 이미 그를 거슬러 흐르기 시작한 후에도,실로 마지막 순간에 이르기까지 예수님을 그들의 친구로, 영웅으로 생각했던 수천의 사람들, 즉 그로 인해 육신의 병이 나았던 사람들, 얽혔던 가정이 원만하게 되었던 사람들,영적으로 모든 것이 새로와지게된 남녀의 무리들이 있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된다. 이러한 사람들이 그들의 감사와 찬사를 그에게 보냈던 것이다. 그를 환영하는 무리의 외침 속을 지나 왕은 그의 도성을 향해 나아가셨다.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예수께서는 자신의 신분을 선포하셨다. 더 이상 사역 초기에서처럼 군중들이 갈채를 피하시지 않으셨다. 갈릴리 사역 시기에 제자들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에게 숨기신 것과는 달리 더이상 자신의 왕적 위엄을 숨기지 않으셨다. 그의 마음속에는 어렸을 때부터 종종 깊이 생각해왔던 옛 위대한 선견자의 말씀이 맴돌고 있었다.[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도다] (슥9:9).드디어 옛 선지자의 꿈이 이루어졌다. 영원히 시온의 딸이 그 사랑하는 자,그 주를 기다려야 했던 것은 아니었다. 영원히 다윗의 왕위가 비어있어야 했던 것은 아니었다.종려 주일의 그 행로등으로 예수님께서는 말로써 하는 것보다 더 명백하게 선포하셨다[네 왕을 보라!]

예루살렘 입성은 행동화된 비유였다. 그 일이 신실한 자에게는 그들이 기다리던 표적이 되었다. 또한 이 일은 예수님의 최종적인 사명의 시작을 알리는 것이었으며 뒤 따라 올 격렬한 행동과 감정에 알맞는 전주곡이었다. 이 일은 예루살렘의 모든 관심을 예수님께 집중시켰으며 그 결과 그 주간 동안의 모든 관심을 예수님께 집중시켰으며 그 결과 그 주간 동안 어디를 가든지 무리가 그를 따랐고 그의 이름이 모든 사람의 입에 오르내리었다. 이 일이 그를 반대하는 자들에 대한 도전장이 된 사실 역시 무시할 수 없다. 이일은 그들에게 대한 도전되었다. 그들은 다른 것은 참을 수 있었으나 거리를 지나 행진하던 이 행렬만은 참을 수 없었다. 이 광신적인 찬탈자를 아주 억눌러 버려야만 했다. 예수님께서는 그 소란한 절기에 도전을 하고 계셨다. 예수님께서 그 날 받아들이셨던 왕적 영광의 표는 그 도전의 실마리를 제공했으며 군중이 외친 [호산나]가 그것을 단단히 못박았다. 예수님께서는 악한 세력으로 하여금 제멋대로 하도록 내버려 두셨다. 그는 자신의 권능을 알고 계셨다. 그는 하나님의 기름부음 받은 자였다. 그는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신 왕좌에로 나아가고 있었다. 그는 마지막 싸움에 대한 각오가 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러한 때에도 흥분으로 인하여 군중의 가슴속에 그의 마음과는 동떨어진 민족적 혹은 현세적 메시야 사상이 되살아 나지나 않을까하여 예수님께서는 그의 나라가 지상의 왕국이 아니라 천국에라는 것을 명백히 보여주는 조처를 취하셨다. 즉 그는 화려한 장식으로 꾸민 군마를 타시지 않고 나귀의 새끼를 타셨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리라 그는 겸손하여 나귀,곧 멍에메는 짐승의 새끼를 탔도다(마21:5). 더우기 그 행렬이 예루살렘을 향해 서서히 움직일 때 예수님이 제2의 [막카비]라고 상상했던 자들을 놀라게 할 만한 어떤 사건이 일어났다. 구부러진 길이 감람산의 모퉁이를 꺾어 도는 곳에서 예루살렘성이 벼란간 시야에 들어왔다. 예수님께서는 그곳에서 멈추시고9눅19:41-이하) 말없이 앉아서 생각에 잠기셨다. 그는 그 앞에 펼쳐 있는 예루살렘성을 바라보셨다. 놀랍게도 성을 바라보는 그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예수님께서 우신 것이었다! 그들은 그가 우신 이유를 알지 못했다. 그들은 그가 사랑하는 성의 완악함과 우매함으로 인해 그 마음이 얼마나 괴로우셨는가를 알지 못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불과 칼날이 예루살렘의 운명을 결정지을 임박한 날을 내다보고 계신 것으로 스스로를 내세울 것을 바랐던 그 지도자가 울고 있다는 것을 알았을 뿐이었다. 그들은 이상하게 여겼으며 마음이 동요되었다. 행렬이 다시 이루어져서 움직였을 때 아마도 그들의 호산나 소리는 전보다 덜 확신에 찬 것이었을 것이다. 결국 이 사람이 그들이 바랐던 왕이었던가? 그러나 그리스도의 생각은 그들의 새각과는 달랐다. 그날이 끝나고 그 열기가 아직 식지 않았을 때 예수님께서는 몰래 빠져 나가 무력으로 왕위에 오를 메시야를 아직도 열망하고 있던 자들의 심한 실망과 분노를 일으켰다. 그리고 그는 조용히 베다니로 돌아왔다.

2. 짙어가는 그림자

다음 이틀,월요일과 화요일에 예수님께서는 다시 예루살렘에 계셨다. 그는 대담하게, 노골적으로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던 불경건한 매매자들의 잘못된 생각을 직접 채찍을 들고 징계하셨다(마21:12-13). 예수님 영혼 속에 있던 격렬한 성품이 성전 뜰에 서서 끈으로 만든 채찍을 머리 위에 높이 쳐드시고 장정들도, 무리도 겁에 질려 말못하고 물러서게 했던 그 때만큼 눈빛이 무섭게 타올랐던 때는 없었다. 또한 그를 반대하는 자들과의 논쟁,특히 우리가 이미 살펴 본 가이사의 세금 문제에 대한 논쟁, 그리고 바리새인들의 궤변과 위선에 대한 신랄한 공격이 그들 사이를 완전히 벌어지게 하고 예수님의 운명을 결정지우게 된 사건(마23장) 역시 이때에 있었다.

유월절 이틀전[산헤드린 공회]가 예수님을 최종적으로 제거하는 방법과 수단을 논의하기 위해 급히 소집되었다. [산헤드린 공회]는 71인으로 구성된 귀족의 조직체였는데 유대민족의 총회와 최고 재판부를 겸했으며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 그리고 장로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바리새파와 지도자들이 함께 그 회원이 되었기 때문에 심의중에 종종 마찰과 쟁론이 있었다. 그러나 예수님 문제에 있어서는 어떤 협약이 이루어져 양편이 그의 체포를 요구하는 일에 합세했다. 그런데 문제는 어떻게 그를 체포했느냐였다. 정말 어려운 문제는 언제 변할지 모르는 군중심리였다. [산헤드린 공회]의 공개적인 공적 조치가 군중의 감정으로 하여금 예수님 편으로 급변하게 하지 않을런지는 아무도 확신할 수 없었다. 이것은 주의 깊은 계략을 요하는 매우 난처한 문제였다. 그런데 전혀 뜻밖의 해결책이 스스로 굴러 들어왔다. 예수의 제자중 하나가 이들을 만나 보기를 간청했다. 그는 즉시 안내되어 들어왔다. 그리고 예수를 은밀히 어둠을 이용해 체포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 자신이 예수님의 행동을 미리 알고 있었다. 예수가 잘 가시는 곳도 알고 있었다. 그가 그들을 데리고 그곳으로 가서 예수를 마음대로 체포하게 하겠다고 했다. 이렇게 하여 더러운 배신 계획에 대한 이야기가 그들 사이에 터놓고 오고갔다. 피흘린 돈이 주어짐으로 협정이 맺어졌다(마26;14이하).

다락방

이 주간의 수요일은 예수께서 [베다니]에서나 산중에서 혼자 보내신듯 하다.그러나 목요일 저녁 유월절 음식을 먹는 시간에는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예루살렘에 있는 한 친구의 객실에 앉아계셨다. 이제 불과 한두시간만 지나면 폭풍이 무섭게 휘몰아 칠 것이었으나 여기 이 조용한 다락방에는 하나님의 참 평화가 가득했다. 이 방에서 기독교의 영원한 성례가 제정되었다. 여기에서 [우리들이 거할 곳이 될 천국]에 대한 불멸의 말씀이 있었으며 보혜사 성령의 약속이 주어졌다. 또한 여기에서 예수님께서는 죽으시기 전 최후로 하나님께서 세상에서부터 그에게 주신 자들, 즉 궂은 때마 맑은 때나 수년간은 따라다니며 동행했던,그리고 오늘 밤 그를 가장 열렬히 사랑하는 소수의 충성스런 자들과 함께 만찬을 나누시면서 다시 만날 것과 하나님의 천국 잔치에 따른 잔을 그의 손에서 받게 될 것을 약속하셨다.

이 다락방이 기독교인들에게는 후일 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해 세워졌던 모든 그대한 교회건물들 보다 더욱 친밀하고 귀중한 곳이 되어왔다는 것은 약간 기이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다락방의 이야기는 예수님께서 식탁에서 일어나신 후 제자들을 이 정적이 덮인 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갈보리에서 돌아가신 후 지도자 없는 상심한 제자들이 폭도들로부터 숨을 곳과 피난처를 찾다가 발견한 곳이 바로 이 다락방이었기 때문이다. 이 다락방은 잃어버린 그들의 선생에 대한 제자들의 절망적인 슬픔을 목격했던 장소였다. 또한 예수님께서 빗장을 지른 잠긴 문으로 들어오셔서 그가 부활하여 사신 것을 보이셨을 때 그 슬픔이 당혹한, 믿기지 않는 기쁨으로 바뀌게 되었던 곳이기도 했다(요20:19).그리고 예수님께서 그 아버지 하나님께로 올라가신 후 아마도 이곳에서 그들은 다시 모였을 것이며 성령께서 강림하셔서 그들의 영혼을 오순절의 영광으로 넘치게 하시고 교회를 탄생하게 했을 것이다(행1:13.2:1).만일 전설이 말하는대로 이 다락방이 베드로가 감옥에서부터 피신하여 왔던 집과 같은 곳이라면(행12:12) .복음서에서 이와같이 신비스런 인물로 나타나는 [그 집 주인](막14:14)은 다른 사람이 아닌 마가복음의 저자 [요한 마가]의 어머니,즉 마리아의 남편이라고 결론지을 수 있다. 앞에서 살펴본대로 마가복음에서 예수와 함께 [겟세마네]에 있다가 예수께서 잡히시자 벗은 몸으로 도망했던 [어떤 청년]은 바로 [마가]자신이었을 것이다(막14;51).우리는 그가 그 아버지 어머니를 도와 예수님과 제자들을 위해 그 다락방을 예비하며 그날 밤 최호의 만찬이 진행되는 동안 문 밖에서 기다리다가 무슨 일이 생기나 보기 위해 감람산으로 그들을 뒤쫓아 갔다고 상상해 볼 수 있다. 어쨌든 많은 추억을 지닌 이 다락방은 복음이 전파되는 곳마다 언제나 그리스도인들의 마음을 끌고 사로잡게 될 것이다. 성찬 떡이 나누어질 때마다 성찬 포도주가 부어질 때마다 성찬 떡이 나누어질 때마다, 성찬 포도주가 부어질 때마다 우리는 그곳에서 예수님을 만나고 있다는 느낌을 갖게 될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고 말씀하셨다(눅22:19). 이것은 주님의 마지막 소원이었으며 기독교인들은 항상 이를 신성한 것으로 생각해 왔다. [주의 만찬]을 기념하는 일은 단순하나 헤아릴 수 없이 깊은 의미를 지난다. 수세기에 걸쳐 성례를 행하는 가운데 믿음이 자라왔으며, 희망이 불붙고 사랑이 유지되어 왔다. 우리의 생각을 남에게 전달하려고 할때 우리는 세가지 언어를 사용할 수 있다. 첫째로 말의 언어가 있다. 그러나 우리는 모두 이 언어가 얼마 못되어어서 무용(無用)해진다는 것은 안다.또한 가장 깊은 것들을 전달해 줄 말을 찾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안다. 말의 언어 너머에는 예술의 언어 즉,음악,회화,조각 등이 있다. 물론 종교는 이러한 것을 필요로 하나 여기에는 역시 한계가 있어 예술의 언어가 무용해져 버린다. 이 이상에는 행동의 언어가 있다. 그리고 이것만이 삶의 궁극적인 것들을 전달할 수 있다.이러한 행동의 언어로 교회는 그리스도의 명령에 따라 떡을 떼면서 눈앞에 갈보리의 수난을 그리스도의 명령에 따라 떡을 떼면서 눈앞에 갈보리의 수난을 그리며 포도주를 분배하면서 세상을 구원하는 십자가의 피를 기억하는 것이다. 예수께서 잡히시던 날 밤 다락방에서 다락방에서 제정하신 성찬의 의미에 대해 우리는 더 이상 생각할 수는 없다. 다만 교회는 [주의 만찬]시행에서 단순히 [기념]만을 찾지 아니하고 언제나 [임재]를 찾아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성찬에 있어서 우리가 하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다만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에게 오셔서 우리의 믿음에 그 자신을 실감케 하시며 정결케 하는 교제로 우리를 축복하신다.[오,내 주여, 여기에서 내가 당신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보나이다]

4. [겟세마네]

밤이 깊어진 후 예수님께서는 식탁에서 일어나사 제자들을 이끌고 [겟세마네]로 가셨다(마26:36 이하).[감람산]기슭에 자리잡고 있는 이 장소는 예수님께서 자주 가시던 곳 중 하나였다. 그들이 기도하기 위해 조용한 곳을 찾아 이곳으로 온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그러나 오늘 밤 예수님께서는 그 영혼의 짐이 그를 잘 아는 자들까지 함께 나눌 수 없을 만큼 무거웠고 또한 그의 영이 혼자서 하나님과 있기를 바랐으므로 대부분의 제자들은 숲 밖에 남겨두시고 베드로와 야고보, 요한까지도 조금 떨어진 곳에 두시고 어두운 곳으로 홀로 기도하시러 나아가셨다. 그는 무릎을 꿇고 엎드리셨다. 그리고 얼굴을 땅에대셨다.그러자 누구도 알지 못할 고통이 시작되었다. "내 아버지여, 만일 할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 고통이 계속되는 동안의 예수님 마음을 헤아려 보려고 생각해 볼 필요는 없다 .이러한 상황에서 설명을 찾는다는 것은 불경스러운 짓일 뿐이다. 그러나 한 가지 우리가 확실히 알 수 있는 것으니 예수님으로 하여금 그 일을 피하려고 하게 한 것은 죽음에 대한 공포가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많은 순교자들도 찬송하면서 굽히지 않고 그 마지막 순간을 맞았다. 하물며 그들 누구보다 더 큰 용기를 가지셨던 예수님이야.... 그로 하여금 하나님께 울부짖게 했던 것은 죽음이 아니었다. 그것은 죄였다. 그것은 온 세상의 수치와 모든 인간들의 짐이었으며, 그 무서운 시간에 이것들을 죄없는 그의 마음에 떠맡고 계셨다. 그것은 죄의 무서운 공포와 혐오,그리고 저주를 벼란간 의식하게 된 것이었다. 바울이 그 특유의 대답함으로 표현한 것처럼 그것은 "죄를 알지도 못하는 자가 우리를 위하여 죄로 삼으신 바된 것이었다.(고후5:21).이 이상 더 깊이 캐고 들어가려고 해서는 안된다.그리스도께서 그의[사랑하는 제자들]까지도 뒤에 남겨 두셨다면 우리는 이 일에 개입하려 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다만 멀리 서서 어둠 속에서 외치는 [내 아버지여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라는 외침을 들을 수 있을 뿐 이다. 그러나 계속 귀를 기울이고 있으면 또 다른 외침이 조용하고 단호한,그리고 위대한 수락의 평안으로 가득한 기도 소리가 정적을 들려온다. [내 아버지여 만일 내가 마시지 않고는 이 잔이 내게서 지나갈 수 없거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마26:42).이와같이 그의 전생애를 통해 한번도 흔들린 일은 없었던 그의 믿음은 여기에서도 승리하였다.

이때쯤 제자들은 이 며칠간의 긴장으로 심신이 지쳐서 잠이 들어 있었다.그들이 만일 깨어 경게하고 있었더라면 숲 밖에서 깜박거리는 횃불을 보았을 것이다. 그러나 아무도 깨어 지키지 않았다. 어쨌든 무력으로 저항한다는 것은 예수님의 생각에서부터 멀었다. 그래서 유다와 성전 군관들, 그리고 그 부하들이 왔을 때 그들은 예수를 체포하는데 거의 아무 어려움도 없음을 발견했다. 예수님께서는 끌려가셨다. 그리고 제자들은 완전히 기력을 잃고 "모두가 그를 버리고 도망하였다"(마26:56).

5. 유다의 수수께끼

그 반역의 밤에 있었던 사건을 다루기 전에 먼저 예수를 배신한 유다에 대해 살펴 보아야겠다. 처음부터 예수님을 따르던 무리 중에 한사람이었으며,하나님 아들의 은혜로운 임재에 감화를 받아온 유다가 이와같이 무서운 배신 행위를 저지르게 되었다는 것은 일반에게는 전혀 납득이 가지않는 일이었다. 그래서 이들은 유다는 보통 인간이 아니라 사탄의 화신이며 인간의 탈을 쓴 괴물이라고 결론을 내린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은 만족스러운 해답이 못된다. 이 주장은 또한 복음서 기자의 관점이나 심리학적 사실을 정당하게 취급하지 못하고 있다. 우리는 좀더 깊이 살려 보아야겠다.

베드로나 안드레 또는 그 나머지 제자들과 마찬가지로 유다에게도 모든 것을 버리고 그리스도를 좇았던 때가 있었다. 이것은 아주 중요한 사실이다. 그는 예수를 위해 가정과 친척을 버렸다. 물론 현세적 지상 왕국에 대한 희망이 그러한 결정에 작용한 것은 틀림없으나 이런 것 이상의 사실 즉 그가 예수님에게서 흡인력을 느꼈다는 사실이 있다. 갈릴리에서 온 젊은 선지자의 호소는 이 전 그의 전생에에 있어서 어떠한 것보다도 더욱 그를 감동하게 했다. 그래서 부름을 받았을 때 그는 기꺼운 마음으로 따를 수 있었다.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유다에 대한 예수님의 평가이다. 모든 종류의 사람들을 판별하는데 익숙한 예수님의 눈이 유다 속에서 참 사도의 자질을 찾아내었다. 여기에 천국을 위해 훌륭하게 봉사할 수 있는 자질을 가진 한 사람이 있다고 생각하셨다. 종종 예수님께서 유다를 그 곁에 있게 하신 것은 제자 가운데서 배신자가 생길 것이라는 하나님의 에정 계획에 필요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어 왔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불합리할 뿐 아니라 불신앙적이라는 것을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이것은 예정론을 운명론으로 바꾸어버리는 주장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섭리와 작정을 비난하는 주장이다. 이것은 거룩한 설화을 엄숙한 연극 연기의 수준으로 전락시키는 주장이다. 예수님께서는 다른 열한 제자를 부른것과 꼭 같은 이유로 유다를 불러 제자가 되게 하셨다. 예수님께서는 유다 속에서 무한한 가능성을 가지며 고상한 장래가 촉망되는 한 인간을 보셨다. 물론 그는 다른 것들도,즉 그 영혼의 은밀한 곳에서 혼잡을 이루고 있는 도덕적 모순들,빛과 어둠의 이상한 갈등 용기와 비겁,자기 헌신과 자기애등을 보셨다. 그러나 이것은 단순히 그가 인간적인 욕망을 가진 사람이란 것을 의미했을 뿐이며 또한 사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것에서부터 그의 성도들을 모으셨던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유다에 있어서도 이와같이 되기를 바라셨다. 예수님께서 맨 처음 제자가 되었을 때는,가능성 많은 하나님의 사람이었다.

처음부터 모든 것이 잘되어갔다. 그는 생의 위대한 모험에 나섰으며 그 자신 그것을 알고 있었다.그러나 차츰 미묘한 변화가 그에게 찾아왔다. 마치 그것은 봄이 사라져 버린 것과 같았다. 그는 예수님과 함께 있는 것이 전보다 편치 못했다. 다른 제자들은 무엇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전혀 눈치채지 못했을런지 모르나 예수님은 아셨다. 이 시기에 예수님께서 한밤중에 하신 은밀한 기도에는 유다의 이름이 괴로운 짐이 되었을 것이 틀림없다. 유다의 태도에 생긴 변화는 제자들의 현세적 물질적 만조가 된 인기의 조류를 타지 못했던 것이 직접적인 결과였던 것으로 보인다. 유다에게는 이와같이 비실세적이고 꾸물거리는 방법이 이해되지 않았고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만조가 된 인기의 졺는 그들 모두를 행운과 굉장한 성공에로 날라다 주었을 것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기회를 의도적으로 버릴 예수님때문에 그 기회가 영영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그의 마음은 쓰리고 억울했으며 비뚤어지기 시작했다.

이 사실은 그 배신 행위의 참 동기가 무엇인가를 암시해준다. 이 동기에 대해 여러가지 의견이 제시되어 왔다. 돈에 대한 사랑이 그 동기였을까? 의 본성에 탐욕의 기질이 있었다는 것은 확실한 사실이다. 또한 그는 전대의 돈을 훔치는 일에 습관이 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복음서 기자중 요한은 솔직하게 그를 가리켜 도적이라고 말하고 있다(요12:6).그러나 돈이 유다로 하여금 그의 선생을 팔게 한 주된 동기였다고 보기는 어렵다. 만일 돈이 그의 목적이었다면 매우 용이하게 제사장들과 더 나은 거래를 할 수도 있었다. 은 삼십량은 두배 또는 세배로 늘어날 수도 있었다.

시기심이 그 동기였을까? 이것 역시 일부 작용했을 것이다. 다른제자들이 전부 갈릴리 출신인 반면 그만이 열두 제자중 유일한 유다 사람이었다는 사실은 ("가롯"이란 말은 유다의 한 동네인 [가롯출신의 사람]이란 뜻이다) 그를 외롭고 소외된 자로 만들고 비판적인 사람이 되게 했을런지도 모른다. 또한 그와 같이 야심적인 성격의 사람에게는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 요한을 택하여 더욱 가까이 두신 것이(막5:379:2) 마음 쓰리게 느껴졌을 것임이 틀림없다. 그러나 그의 범죄를 시기심 만으로 표현하는 것은 어무 가볍다.

어떤 사람들은 두려움이 그 동기였다고 주장한다. 이 주장에 따르면 유다는 닥아오는 재난을 내다 보았으며, 그 재난이 닥칠 때 지도자인 예수님 뿐 아니라 그를 따르는 모든 사가도 함께 당하게 될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고 한다. 즉 예수님께서 가라앉게 될 때 다른 사람도 함께 끌려 들어가게 될 것으로 알았다. 두려워진 유다는 최악의 사태가 닥칠 때 그 자신을 구하는 유일한길은 당국이 그들의 적을 잡도록 도와준 것에 대한 보답으로 밀고자를 놓아줄 것을 바라서[공범자 밀고]의 증거를 만드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우리는 이 동기를 제외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이것이 사실의 전부는 아니다.

[드 퀸시](De Quincey)는 유다가 배신자 노릇을 한 것은 예수님으로 하여금 어쩔 수 없이 집권자가 되게 하려는 수단이었다는 유명한 주장을 했다.그의 선생이 자신을 내세워 왕위에 오를 기회를 하나씩 놓치고 있는 곳을 지켜 보면서, 조급해진 유다는 드디어 만일 예수님께서 스스로 행동을 취하지 않으신다면 그로 하여금 행동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들어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러나 어떻게 그렇게 할 것인가? 분명히 그렇게 하는 방법은 예수님으로 하여금 위태로운 상황에 처하게 하는 것이리라. 그러면 그는 분기하여 그의 권능을 나타낼 수 밖에 없을 것이며 그러면 그의 왕국이 이루어지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것은 매우 교묘한 주장이다. 그리고 만일 이 주장이 받아들여진다면 다시 한번 역사상에 최악의 평판을 되살아나게 할 것이다. 그러나 이 주장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이 주장은 예수님을 우유부단하고 일을 미루는[햄릿]과 같은 인물로 묘사하고 있다. 배신자 유다 대신에 [생각을 잘못한 聖者]유다를 보여주고 있으며 뿌리채 악에 물든 범죄 대신 판단상의 오류를 말하고 있다. 복음서에는 이러한 주장을 뒷받침하는 증거가 단하나도 없다.이 주장은 예수님 자신이 그 제자의 행위를 정죄하신 말씀과 일치하지 않는다. 판단상의 오류나 지나치게 열렬한 제자의 경솔함이었다면 예수님께서는 확실히 용서하셨을 것이다. 그러나 유다에 대해서 예수님은 다만"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그 사람은 차라리 나지 아니하였더면 제게 좋을 뻔 하였느니라"고 말씀할 수 밖에 없었다(막14;21).그렇다면 [듸 퀸시]의 주장도 젖혀놓을 수 밖에 없다 이제 남은 것은 거의 참 동기임이 확실한 [유다의 비뚤어진 원한]이다. 그의 세속적 희망에 대한 좌절이 원한을 키웠으며 그 원한이 깊어져 증오를 변했다. 유다는 자신이 거짓된 구실에 이끌려서 기만당했으며 몇년 동안의 그의생활은 헛된 낭비였다고, 또한 예수님이 그에게 해준 것이라고는 그를 절망적인 재난에 끌어 넣은 것 뿐이라고 속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오냐 이것을 그대로 갚아 주리라! 그는 앙갚음을 결심했다. 이 외에도 그는 오래 전부터 예수님의 눈이 그를 마치 책읽듯이 꿰뚫어 그의 생각과 은밀한 성격의 불성실한 것들을 모두 알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그리고 이것이 그의 분노와 원한을 더욱 강렬하게 했다. 그는 배반할 것을 생각해 보기 시작했다. 한번 이런 생각이 그 마음을 흔들 때에 유혹자 사탄의 나머지 일은 손 쉬웠다. 그 생각은 곧 확고한 의도가 되었으며 그의 영혼은 놀라운 속도로 타락해갔다. 이제는 아무것도 그를 구원할 수 없었다. 그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그의 발을 씻기시는 예수님의 모습이나(요13:5). 만찬석상에서 있었던 예수님의 마지막 호소도(요13:26)그를 구해내지 못했다. 그때 쯤 그는 이미 되돌릴 수 없게끔 그의 영혼을 팔아버린 후였다. 이제는 다만 그것을 실행하는 행위만이 남아 있었다. 그러나 그 날밤 공범자들과 미리 짠 신호는 어떤 악한 영이 암시한 것일까? 동산에서 유다가 그 선생으리 고함소리나 때리는 것이나 찌르는 것으로가 아니라 입맞춤으로 배반했을 때 그것은 소름끼치는 무서운 범죄의 절정이었으며, 인간의 무도함이 갈 수 있는 범위를 넘어 파렴치한 극에 달한 것이었다.

매일 성경


 누가복음 19:26-14  승리의 입성
 마태복음 21:10-14  성전을 깨끗케 하심
 마태복음 23:13-39  바리새인들을 공격하심
 마태복음 26:17-30  다락방
 요한복음 13:1-17   만민의 종
 마태복음 26:36-46  겟세마네
 마태복음 26:14-16  유다의 신비
 마태복음 27:3-10   유다의 신비

 

토론을 위한 문제

1.종려주일 행진의 목적은 무엇이었는가?

2.성전을 깨끗케 하실 때 예수께서 인용하신 "내 집은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라"는 말씀은 오늘의 교회에 어떤 의미를 주는가?

3.당신은 유다가 배신하게 된 동기를 어떻게 설명하겠는가?

4.성찬이 거행된 때마다 그 속에 과거.현재,미래 전부가 포함되어 있다는 말은 어떤 의미에서 사실일 수 있는가?